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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젊은시인조명/시인의 산문/이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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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성
댓글 0건 조회 3,818회 작성일 03-03-2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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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

이기성


구내 식당은 병원 옆에 있었다. 오래 묵은 반찬 냄새와 눅눅하고 미끌미끌한 공기 속에 줄을 서서 기다린다. 때늦은 식사를 기다리는 줄은 길고 지루하다. 겨우 빈 자리를 찾아 식판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 순간, 나는 당황한다. 바로 앞자리에 한 노인이 앉아 있다. 낯선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면서 밥을 씹고 삼켜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 그렇다고 이미 탁자에 놓인 식판을 들고 다른 자리로 옮겨가기도 늦었다. 자리에 앉아 가능한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허공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 뜨거운 육개장의 벌건 국물이 금세 셔츠 위에 번진다. 나는 숟가락질이 서투르다. 슬금슬금 노파를 훔쳐본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도둑고양이처럼 태연하고 긴장된 시선으로 노파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 주름진 얼굴, 가느다란 목을 본다. 검은 빛깔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은 백발, 피로와 핏기가 함께 빠져나간 듯 투명하고 누른빛이 도는 얼굴, 그리고 앙상한 목 언저리의 푸릇한 핏줄. 연노랑의 원피스의 소매 아래로 보이는 팔목, 그리고 손가락. 그녀는 달걀의 껍질을 까고 있다. 그녀의 마른 손가락은 연약한 껍질을 벗기고 또 벗긴다. 마침내 허연 속살이 드러나고, 별안간 그걸 내게 내민다! 음험한 마음을 들켜버린 것처럼 나는 잠깐 서늘해진다. 어떤 친절은 잘못 뱉어진 농담처럼 고통스럽다. 서늘함과 고통 사이에서 불행히도 나는 웃어야 하는 순간을 놓쳤다. 민망한 표정으로 껍질이 벗겨진 계란을 받는다. 다시 노파는 끈기 있게 삶은 달걀을 벗겨 조금씩 먹고 있다. 늦은 오후 구내 식당은 식기들이 쟁그랑거리며 부딪치는 소리, 물큰한 김, 그리고 음식 냄새로 한없이 깊고 어둡게 가라앉는다. 나는 벌겋게 번진 셔츠의 흔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밖으로 걸어나간다. 식당의 입구는 병원과 이어져 있다. 그리고 나는 한참 동안 식판에 놓인 껍질이 벗겨진 달걀을 본다. 미지근하고 눅눅한 시(詩)처럼 그것은 내 앞에 놓여있다. 맥박은 천천히 뛰고 나는 그걸 영원히 삼킬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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