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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젊은시인조명/이기성 신작시 해설/<흰 공포와 검은 절망에 가로눕기>/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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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인덕
댓글 0건 조회 4,389회 작성일 03-03-20 20:06

본문

이기성 신작시 해설
흰 공포와 검은 절망에 가로눕기
백인덕(시 인)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며 태어난 이상은 빨리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 소포클레스

1.
관습의 질긴 힘줄을 비틀어 낯익은 세계로부터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은 필경 고통스럽고도 위험천만한 도전이다. 그러나 이 고통과 위험을 담보로 시(언어)는 새로운 세계의 규모와 차원을 구조화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각 시대마다 그 요청하는 바가 다르긴 하겠지만 이 도전에는 언제나 '젊은'이란 수식어가 붙어야 했다. 이때 '젊은'이란 물리적 현실에 구속됨 없이 은폐된 세계와 투쟁할 수 있는 열정에 다름아니었다. 자신의 전 존재가 무(無)화 될지도 모르는 길에 아낌없이 자신을 던지는 행위, 반성하고 다시 가슴을 치면서도 위험 속으로 자신을 몰아가지 않으면 존재가 간지러워 견딜 수 없다는 자의식, 이것이 바로 그 열정이었다. 이 열정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키다 꺼져버리기도 했지만, 사회 문화적 변화의 물결과 맞물려 시대를 구획하는 가파른 단층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러한 단층의 면모는 가깝게 1990년대 이후 우리의 현대시에서 유파에 관계없이 강력한 추세로 등장한 서술시, 또는 서사체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술시란 묘사시와 함께 시의 두 기본유형 중 하나이다. 묘사시와 서술시는 시사(詩史)의 전개상의 필요성과 결합하여 어느 하나가 우세한 지배 원리로 등장하곤 한다. 구조주의 시학자 야콥슨에 따르자면, 시는 언어선택의 원리인 은유원리가 우세한 장르인 반면 산문은 언어배열의 원리인 환유원리가 우세한 장르이다. 이때 언어적 질서로써의 언어선택의 은유원리는 시에 있어서 압축성과 암시성을 위한 엄밀한 시어선택으로, 반면에 언어배열의 환유원리는 산문에 있어서 사건을 시간적 순서나 인과적 관계로 배열하는 구성원리로 대치된다.
서술시가 우리의 현대시에서 지배적인 유형으로 부각되었다는 것은 그 배경에 있어서 많은 변화의 요인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동화(同化)와 투사(投射)를 핵심원리로 하여 서정적 세계인식을 드러내는 좁은 의미의 서정시를 제외한다면, 현대시는 삶의 과정이나 조건을 시의 제재로 선택하는 현실 지향적 경향을 드러냈다. 특히 서술시를 지향했던 젊은 시인들에게서 보였던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경향은 '초현실적'이라는 것이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과(過)현실'에 대한 성찰적 자기 인식이었고, '환상적'이라는 것이 배제나 도피라는 부정적 의미를 완전히 소거했다는 점에서 소박한 리얼리즘 계열의 시보다 더욱 더 현실 지향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현대의 거의 모든 문화적 내용물이 서사적 구조를 갖추고 있고, 또 요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현대시에서 서사체의 득세는 당연한 시대적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서술시 지향에 일정한 우려와 경계가 가해졌던 것은 대부분의, 특히 젊은 시인들에게서 산출되는 서술시의 지나친 추상화와 내면화의 경향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경험의 파편화와 우연성이라는 새로운 서술시의 본질적 특성이 가능성만큼의 한계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지나친 일반화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번 호에 집중 조명하게 될 이기성의 작품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서술시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의 작품들은 시의 한행 한행이 의미를 가진다기보다는 여러 작은 정보들이 지속적으로 제공됨으로써 하나의 의미를 구축해내는 '축적의 원리'에 의해서 더 잘 해석된다. 그리고 이 점은 각각의 작품들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모두 10편의 작품을 (더 많은 정보가 제공된다면 그것을 다 접한 이후에나) 살폈을 때 하나의 메시지가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2.
닳아빠진 구두 밑바닥에 쩔꺽쩔꺽 들러붙는 생이 식당 앞까지 쫓아온다. 주먹만한 돌멩이를 집어던져도 킁킁대며 질기게 따라와 누런 혓바닥으로 딱딱한 발꿈치를 핥는다. 나, 누추한 신발 한 짝 잃어버린 적 없고 축축한 불륜의 문장 한 줄 엿본 적 없어도 텅 빈 구내식당 비릿한 공기 속에서 한 그릇 밥에 코를 박고 조금씩 파먹을 때 문득, 억울하다. 움푹한 그릇에 묵묵히 쌓인 어둠은 목 언저리 검은 주름으로 패이고. 유원지에 벗어둔 신발을 두 손에 쥐고 하루는 눈 퉁퉁 붓게 울고 하루는 굶어죽는 것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하는 동안, 해는 지고 생은 거듭 누추해지고 혈세(血稅)의 계절은 닥쳐온다. 끈끈한 식탁에 엎드린 등뒤에서 검푸른 제복을 입은 관리들이 컹컹 짖으며 문을 두드리고 있다.
― [열정] 전문

이 작품의 제목은 왜 하필이면 <열정>인가?  인용된 시의 구석구석을 뒤져보아도 무엇에 대한, 어떤 '열정'인가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흥분이나 도취처럼 명확한 대상과 방향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회적 감정으로서 '열정'을 정의한다면 보다 무난한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기성의 작품들은 작품 전체를 다 읽어야 비로소 주제가 드러나는 '축적의 원리'에 의해 의미가 형성된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작품 전체를 다 읽었어도 주제는 오히려 불투명한 베일 뒤로 은폐되기도 한다. 이때 작품의 해석을 위해 제목은 하나의 강력한 상징으로 등장하게 된다. 다시 말해 거의 무관한 듯이 보이는 제목과 내용과의 거리, 혹은 긴장과 충돌이 오히려 이기성의 시 세계를 불명확한 전언 속에서 내비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인용시의 표면을 따라가 보면, 시적 자아인 '나'는 꽤나 험난한 여정을 '닳아빠진 구두'와 '딱딱한 발꿈치'로 열심히 걸어왔다. 그러나 화자의 소회는 '문득 억울하다'는 것뿐이다. 무엇이 억울한가, '거듭 누추해지'면서도 '쩔꺽쩔꺽 들러붙는 생'이 그렇다. 비록 어둡고 부정적인 수식어로 치장했지만, 그 '생'은 '누추한 신발 한 짝 잃어버린 적 없고 축축한 불륜의 문장 한 줄 엿본 적 없'는 나름대로 부끄럽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문득 억울하다'고 화자는 직정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이 억울함은 "텅 빈 구내식당 비릿한 공기 속에서 한 그릇 밥에 코를 박고 조금씩 파먹"어야 하는 생의 신산함과 "끈끈한 식탁에 엎드린 등뒤에서 검푸른 제복을 입은 관리들이 컹컹 짖으며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압박감 때문에 더욱 가중되고 있다. 그러나 좀처럼 이 '억울함'의 원인, 또는 근거는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목인 <열망>의 실체도 모호하게 남는다. 이처럼 '문득 억울하다'는 짧은 한 구절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이 구절이 이기성의 작품들을 해명할 수 있는 하나의 키워드로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뒤에서 확인되겠지만 그의 작품들에서 화자가 화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른 작품들은 3인칭과 적절한 거리두기에 의해서 의미가 산출되고 있다. 결국 이기성의 작품은 '열정'과 '문득 억울하다'는 감정적 토로가 어떻게 얽히는 가를 확인함으로써 하나의 의미로 수렴, 정위(定位)될 수 있을 것이다.

늙은 여자가 밥상 앞에서 징징 울고 있다, 누대(累代)의 찌그러진 밥상 앞에 나를 내려놓고. 검은 무쇠솥 안에선 오래 씹어도 삼켜지지 않는 하얀 밥이 익어간다. 밥상 위에 혓바닥처럼 늘어진 노을,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던 아이들은 온몸에 검은 폭탄을 칭칭 감고 저녁의 밥상 위로 몸을 던진다. 덜 익은 별들 폭죽처럼 터져 발등으로 떨어지고 나는 살아서 오늘도 한 술의 딱딱한 밥을 씹는다. 뒤늦게 떨어진 별 빈 밥그릇에 쩔렁쩔렁 부딪칠 때 완강한 기둥만 남은 밥상은 허공으로 떠오르고 저 거대한 기둥에 나를 단단히 용접한 늙은 여자여, 오늘도 나는 불멸의 밥을 씹고 또 씹어 늙은 여자의 거대한 입 속에 넣어준다.
― [밥·2] 전문

이기성의 작품들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밥' 또는 '밥'의 이미저리 문제에 집착한다. 위의 인용시는 제목도 그렇지만 '밥' 자체가 시를 끌어가는 중심 모티브가 되고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밥'이란 것은 모든 노동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보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때로는 그 결과가 목표로 전도되는 비참한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먹고살기가 현재보다 훨씬 지난한 과업이었을 1920년대에도 김소월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밥'은 기껏해야 정신의 고양과 행동의 자유를 구속하는 어쩔 수 없는 '생활'의 이미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견고하게 구조화된 지금 '밥'의 문제는 훨씬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기성의 '밥'은 어떤 이미지들을 거느리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 개의 이미지 군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시적 자아인 '나'와 관련되는 것들로 "비릿한 공기 속에서 한 그릇 밥에 코를 박고 조금씩 파먹을 때"([열정])와 "나는 살아서 오늘도 한 술의 딱딱한 밥을 씹는다"([밥·2]) 등에서 드러난다. 다른 하나는 "늙은 여자가 밥상 앞에서 징징 울고 있다"([밥·2]), "시장에서 밥 빌어먹는 노인들 빈 밥그릇"([누에가 노래한다]), "저편 움푹한 둥치에서 늙은 여자들/둘러앉아 찬밥을 먹고 있다"([소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개의 이미지 군은 작품 안에서 전후의 맥락을 고려할 때, 스산하면서도 소외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서 같은 범주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분리한 이유는 "오늘도 나는 불멸의 밥을 씹고 또 씹어 늙은 여자의 거대한 입 속에 넣어준다"([밥·2])는 구절이 암시하듯이 '밥'과 관련된 행위의 자발성에서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열정]과 [밥·2]에서 드러나듯이 화자가 '밥'을 먹게 되는 것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관습적인 부분이 강하고, 또한 그마저도 무엇에겐가 압박당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반면에 '늙은'이라는 수식어로 무장한 '그/그녀'의 '밥'을 먹는 행위는 당위적이거나 "웅얼웅얼 밥그릇에 얼굴을 박고/늙은 석불의 코를 조금씩 뜯어먹는"([소풍]) 것처럼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된다. 그 행위란 다름아닌 득남을 위해 '석불의 코를 조금씩 뜯어먹는' 것이다. 그 보상이 겨우 '찬밥'이라는 데서 시인의 '늙은' 세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드러난다. 이 부정적 인식은 "말하자면 뜬구름 같은 걸 하나 머리에 이고서 사내가 어기적어기적 저녁노을 속으로 기어 들어간 뒤 얘기는 끝났어야 했다."([누에가 노래한다])는 데 이르러 전면화된다.
'늙은 여자/그 사내'라 지칭되는 구세대에 대한 시인의 부정적 인식은 비록 거리두기라는 시의 전략으로 인해 그 표현의 정도가 완화되고는 있지만, 철저하고도 전면적인 면모를 완전히 감추지는 못한다. 늙은 여자는 '밥상'('허공으로 떠오른 거대한 기둥')에 '나'를 단단히 용접하고, 부질없는 노동('불멸의 밥을 씹고 또 씹어')을 강요하며, 자신들은 그저 세대를 이어갈 욕망에 사로잡힌 존재들이다. 또한 '그 사내'는 이미 끝났어야 할 '흔하디흔한 얘기의 끝자락을 실처럼 입에 물고' 세상의 골목을 누비고([누에는 노래한다]), '비좁은 방안'에 '웅크리고 자고 있'지만, 그의 방에선 '쩍 벌어진 뱀의 입 속으로 어린 짐승이 소리도 없이 빨려들어가고'([휴일]) 있다. 또 그 사내는 [제야]에서는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은회색 물고기들을 트럭에 던져 올'리는 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사내는 '웅덩이처럼 패인 가슴의 구멍 흰수건을 틀어막고 서류가방을 주워들고는 천천히 골목을 벗어난다.'([복수]) 그리고 그 최후는 '아직도 사내의 두 발은 피뢰침에 매달려 있'([마을])을 만큼 비참할 뿐이다.
이기성의 작품에서 '밥', '밥상', 또는 밥을 먹는 행위 등은 모두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구세대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그가 '생'이 누추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유원지에 벗어둔 신발을 두 손에 쥐고 하루는 눈 퉁퉁 붓게 울고 하루는 굶어죽는 것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하는 동안'이다. 구세대를 좇아 열심히 '밥'을 추구해도 종국에는 '뜬구름', '손가락을 빨면서 꾸는 꿈', '닳아빠진 금이빨' 같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자는 차라리 '굶어죽는 것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하는 동안', 생이 거듭 누추해진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누추한 '생'은 화자에게 있어 숙명적이라기보다는 지난날의 어떤 선택의 결과로 보인다. 어쩌면 '열정'에 사로잡혔던 과오로 인해 당하게 되는 '복수'일지도 모른다.

3.
이기성이 부정적으로 인식한 구세대적 '생'의 대척점에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다'가 '온몸에 검은 폭탄을 칭칭 감고 저녁의 밥상 위로 몸을 던져' 마침내 '별'이 되는 존재들이며, 또한 '사내'가 비좁은 방안에서 웅크려 자고 있는 동안에도, 한낮의 환호성을 지르며 흰 공을 뻥 뻥 차올리는 생동력으로 충만한 존재이다. 그렇게 아이들이야말로 순수한 의미에서 '놀이하는 인간'이다. 그들의 '밥'은 '유희'이며, '폭죽처럼 터져' 순간적으로 '별'이 될 수 있는 '열정'이다.
그러나 시적 자아인 '나'가 그 아이들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자명하다. '오늘도 나는 불멸의 밥을 씹고 또 씹어 늙은 여자의 거대한 입 속에 넣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밥'을 매개로 구세대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원인 중에 하나는 '유원지에 벗어둔 신발'이라는 구절을 통해 드러난다. 시적 자아가 인식하는 아이들의 세계는 그마저도 '유원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유원지는 노동의 법칙보다는 놀이의 법칙이 우선하는 공간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유원지에서의 놀이란 제한된 공간 안에 '쾌락'이란 당의를 입혀 제공되는 노동의 위장된 이름일 뿐이다. 여전히 '생'을 지배하는 것은 '노동'이지 '놀이'가 아닌 것이다. 결국 화자는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의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시적 자아의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누대(累代)의 찌그러진 밥상 앞으로 내몰리지 않는, 생명력으로 충만한 아이들의 모습은 금세 자취를 감춘다.

너무 일찍 방생된 어린 자라들 딱딱한 얼굴을 뒤집어쓰고 진창에서 뒹굴 때
― [누에가 노래한다] 중에서

어린 군인들은 묵묵히 지나갔고
농부들이 찌그러진 달을 굴리며 지나갔다.
아이들은 밀보다 빨리 자랄 것이다.
이발소에서는 머리카락 뭉치들이 누런 부대에 넣어 팔려간다.
― [마을] 중에서

애들이 목 매달아 놓은 고양이 검게 흔들거리고
― [복수] 중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된 '늙은 여자/그 사내'의 '생(세계)'의 대척점에 '아이'들의 덜 익은 '생'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를 명명(命名)하고, 세계를 바꾸어 나가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일 뿐이다. 위에 인용된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아이들은 '너무 일찍 방생'되었고, '밀보다 빨리 자'라 잘려나간 머리카락처럼 팔려갈 것이며, 재빨리 구세대의 방식을 익혀 고양이를 '목 매달아' 놓을 것이다. 이쯤에 이르면 아이들은 구세대의 대척점에서 슬그머니 내려와서 어떤 공모(共謀)의 관계를 형성한다. 조금 산만하기는 하지만 작품 전반에서 드러나는 '흰/검은'의 대비적 구조가 '흐린, 탁한'으로 섞이듯이 말이다. 그러면 이 공모를 거부했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기성은 그 세계를 [장미원]에서 엽기적으로(신선하다는 느낌이 없으므로 말 그대로 괴기적이라는 의미에서) 형상화해 보여준다.

아주 오래 전 이곳은 장미의 정원이 있었던 곳. 진홍빛 꽃잎 한 장 들추고 그리로 들어간 여자애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등(燈)을 켜자 하루살이떼가 새까맣게 눈으로 몰려들고 삽자루를 쥔 사내들은 코를 막고 달아났다. 퍼런 입술 검은 흙을 털어내고 치마자락을 들추자 너무도 오래 전의 냄새가 천천히 흘러나온다. 까맣게 탄 혓바닥을 한 장 뜯어내고 여자애는 허공의 그네 위에서 발을 구른다. 굳어버린 눈꺼풀 속에 숨었던 별들이 흰나비떼처럼 쏟아지고 아득아득 씹히는 새파란 별들, 여자애는 자꾸 발을 구른다. 낡은 주름 스커트가 활짝 펼쳐지며 펄럭이고 베어문 이빨 자국 아직 남아도 있는 별들 휙휙 바람소리를 내며 찢어진 꽃잎 속으로 들어간다. 오래 전 이곳은 장미의 정원, 꽃잎의 그늘 겹겹마다 사라진 아이들이 숨어 있는 곳.
― [장미원] 전문

죽음을 곧 영원한 평화와 안식의 세계를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낭만주의적 죽음 이해의 전형적인 경우다. 게다가 어려서 죽는다는 것은 현세의 지상에서의 고통과 괴로움을 그만큼 덜 겪게 되는 것이므로 오히려 더 순수한 것으로 칭송되기도 한다. 인용시에 등장하는 '여자애'는 어려서 죽은 아이다. '진홍빛 꽃잎'을 들추고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를 다시 세상에 꺼낸 것은 바로 '사내'들이다. '등(燈)'을 켠다는 것은 여자애가 속해 있던 어둠의 세계로부터 다시 세상의 전면으로 끌어낸다는 것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사내들은 도망치고, 남겨진 '여자애'의 시공간은 환상적인 곳으로 바뀐다. 그 순간은 '눈꺼풀 속에 숨었던 별들이 흰나비떼처럼 쏟아지고 아득아득 씹히는 새파란 별들'이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이때 '여자애'가 하는 행위는 '그네'를 타는 것, 다시 말해 위태로운 놀이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표면에 드러나는 크로테스크함과 환상적인 성격 때문에 앞서 언급한 낭만적 죽음 이해와 전연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죽음을 통해서만 '아이'가 자신만의 고유한 행위와 의미가 가능한 순간을 맞게 된다는 점에서 낭만적 죽음관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지나치게 도식화하는 감이 없진 않지만, 결국 '아이'들에게는 구세대와 공모하거나, 일찍 죽어서 환상적으로나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던가 양자택일만이 남는다.
'늙은 여자/그 사내'로 지칭되는 구세대는 끈질기게 관습적이라는 데서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반면에 '아이들'로 지칭되는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운명이 곧 구세대와 동화되거나 배제되어버릴 것이라는 점에서 희망적이지 못하다. 결국 이기성의 세계 인식은 매우 비극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4.
비극적 세계인식, 너무도 멋지게 조합된 이 말은 그러나 한 시인의 시 세계를 해명하는 데는 기대만큼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발생된 것은 반드시 소멸해야 한다는 우주의 이법 앞에 서면 희극적인 것은 잠깐이고 비극적인 것만이 무한히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이 글의 모두에서 던졌던 질문으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이기성에게 있어서 <열정>은 무엇이고, 왜 '문득, 억울하다'는 감정에 복받쳤을까?
문자세대, 엄밀하게 말하자면 문자의 마지막 세대이며 영상 세대의 직전 세대, 노동하는 인간의 마지막 세대이며 놀이하는 인간의 직전 세대. 따라서 매체의 변화가 정체성의 혼란을 가장 극심하게 만들었던 유일한 세대라는, 조금 과장된 듯이 느껴지는 세대 규정을 필자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 그러므로 이기성의 시에서 드러났던 <열정>을 문자를 통해 세계를 변혁하려던 마지막 시도라 이해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억울하다'는 심회는 공감하지만 동의할 수 없다.

당신은 열쇠를 깎는 사람이다. 뭉툭하게 잘린 세 개의 손가락이 협곡처럼 어두운 세계의 귀퉁이를 단호하게 벼려낼 때, 이를테면 세계는 열린 문과 열리지 않는 문, 어떤 섬광과 마찰의 틈새로 발목을 슬그머니 끌어당기는 구멍투성이 문장이다. 그래 검은 대리석 사원처럼 견고한 기둥들 이마를 맞대고 선 길고 긴 골목에서 당신도 한번쯤은 정오의 길 잃은 아이처럼 두리번거리기도 했을 것이니. 눈앞에서 쾅 닫히는 문 쨍쨍한 햇빛은 쏟아 붓고 당신은 무엇을 들었나. 영원히 들어맞지 않는 틀니처럼 무수히 덜그덕거리는 마찰음 혹은 닳아빠진 하악골을 새어나오는 킥킥대거나 컥컥대는 검은 음절들, 때로 깊숙한 목구멍으로 훌러덩 빨려들어가던 물렁한 혀, 낄낄대는 혓바닥이 감춘 딱딱한 열쇠 혹은 세 개의 손가락. 검은 구멍 속으로 프레스처럼 날선 언어를 끼워 넣을 때 당신은 어떤 무덤을 열고 있었던 것인지. 수천 톤의 힘으로 미친 듯 당신을 끌어당기는 바람, 그것만이 유일한 증언이다. 대낮의 비좁고 어두운 통로를 달려나오는 아이의 그림자처럼 질긴 탄식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는 당신은,
― [열쇠] 전문

시란, 시쓰기란 결국 무엇인가? 어차피 오류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위의 인용시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면, '검은 구멍 속으로 프레스처럼 날선 언어를 끼워 넣'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다. 그것이 결국은 '어떤 무덤'을 여는 확실하게 도로(徒勞)에 그칠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지우기 위해서, 쓴 것을 다시 지우기 위해서 쓰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대낮의 비좁고 어두운 통로를 달려나오는 아이의 그림자처럼 질긴 탄식을 꼭꼭 걸어 잠그'는 것은 끝없이 유보되어야 하지 않을까? 서툰 데다가 조급한 마음만 앞서가니 이쯤에서 글을 맺어야 하겠다.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끝을 찾아서} {밤의 못질}
·현재 한양대, 한양여대 강사

추천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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