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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신작소설/죽음을 만나는 법/김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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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양호
댓글 0건 조회 2,898회 작성일 02-11-04 11:42

본문

신작소설
죽음을 만나는 법

김양호

  
1.
“뭐가 잡혀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생각에 빠져 있던 사내는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바로 옆자리에 까만 비옷을 입은 여자애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언제 왔을까? 뿌연 해무가 깔려있는 바다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모양이었다.
“뭐가 잡히냐구요?.”
다시 여자애가 턱밑에 손을 괸 자세로 물어왔다. 사내는 짧게 대답했다.
“황어.”
모자가 달린 까만 비옷을 입은 여자애는 병아리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여자애는 힐끔 사내 모습을 살폈다. 검푸른 작업복을 입고 챙이 있는 감청색 모자를 쓴 사내 모습은 할 일없는 실직자 같았다. 옆얼굴에 붙은 여자애의 시선을 느끼며 사내는 손을 들어올려 세우에 묻어 귀밑으로 달라붙은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미끼는 뭐예요?”
여자애가 다시 물어왔다. 스무 살 이쪽저쪽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에 코가 오똑하고 쌍꺼풀진 눈동자가 새까만 단발머리 여자애였다.
사내는 대꾸 없이 백사장에 세워둔 낚싯대를 올려다보았다. 파도가 발치께까지 밀려오는 모래톱 앞에 칠팔십도 쯤 되어 보이게 꽂아둔 낚싯대였다. 꼭대기에 매달린 가이드와 낚싯대 초리끝이 스쳐가는 바람에 건들거리고 있었다.
“미끼는 뭐냐니깐요?”
여자애가 다시 물어왔다. 어딘지 심드렁하고, 한곳이 깡충 튀어 오르는 목소리였다. 사내는 작업복을 뒤적여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포라이터를 켜자 휘발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담배를 피워 물고 한 번 양 볼이 오목하게 빨아들이고 난 다음 연기와 함께 대답을 내뱉었다.
“오징어 내장.”
“오징어 내장요?”
여자애가 웃었다. 입술이 벌어지면서 왼쪽 윗입술 쪽에 덧니가 드러났다. 비옷 앞섶이 열리자 노란 반소매 니트가 가슴을 내밀고 봉긋 솟아올랐고 그 아래로 무릎께를 덮는 검정 치마가 펄럭였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여자애는 작은 돌멩이를 주워 몸을 엇비슷하게 기울인 다음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던졌다. 물수제비가 떠지기도 전에 돌멩이는 파도 속으로 휩쓸려 버렸다. 날개 끝이 까만 갈매기 두어 마리가 끼룩대며 그들이 앉아있는 등명해수욕장을 스쳐지나 정동진 쪽으로 날아갔다.
  “바닷물이 왜 짠 줄 아세요?”
갈매기를 바라보던 여자애가 불쑥 그렇게 물어온 건 둥실 떠오른 갈매기 한 마리가 둥근 반원을 그으며 파도위로 날아내린 다음이었다.
사내는 피우던 담배를 모래 위에 비벼껐다. 싱글거리는, 약간 짓궂은 미소가 여자애의 둥그런 눈가에 떠올라 있었다.
“모르죠? 아저씨 얼굴에 그렇게 쓰여져 있네요. 난 몰라.”
잠깐 키득거리고 난 여자애는 가슴을 내밀며 뒷말을 이었다.
“오줌을 쌌기 때문이래요. 물고기들이요.”
우습죠?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여자애의 모자챙을 따라 맺힌 빗방울이 한 방울 아래로 뚝 떨어졌다. 손등으로 차양 끝을 훔치고 난 여자애가 비옷 앞섶을 여몄다. 보지 마세요. 노란 가슴이 얼굴을 가리고 까만 비옷 속으로 사라졌다.
기적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오후 세 시, 강릉으로 가는 하행선 열차가 정동진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기적소리가 들리는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산자락을 끼고 내려앉은 정동진 역이 아슴푸레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해안선을 따라 휘어진 철로 끝자리에 서있던 시그널이 목을 꺾고 있는 모습과 역 플랫폼에 모여 있는 관광객들의 모습이 아련히 눈에 잡혔다. 그 너머로 보이는 산능선에는 함선 모양으로 지은 두 척의 카페가 하늘을 향해 코를 우뚝 세우고 있었다.
“아가씬 학생인가?”
그편을 보고 난 사내가 시선을 돌리며 뚜벅 물었다.
“휴학생도 학생이라면요.”
날름 말을 받고 난 여자애가 냉큼 뒷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정동진 쪽에 가서 놀지 않고 여깃냐 그걸 묻고 싶은 거죠? 아저씬.”
사내는 대답 없이 바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앞에 꽂아둔 낚싯대에 맺혔던 빗방울이 하나 또르르 굴러내렸다.
“저긴 재미없어요. 정동진도 몇 년 전 정동진이지 지금은 엉터리예요.”
여자애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정동진은요, 촌색시 덕지덕지 분칠한 모습이에요. 전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소박하고 정겨운 바닷가 마을이었는데. 저는 정동진을 참 좋아했거든요. 드라마가 방영되기도 전부터 정동진을 찾곤 했어요. 거기서 그림을 그리곤 했거든요.”
정동진 역이 알려진 건 모래시계란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형사에게 붙잡혀가는 장면을 촬영한 장소라는 게 알려진 다음이라고 했다. 그런 여주인공이 재벌 후계자와 결혼한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그곳은 삽시간에 동해안의 관광명소로 부상했다. 주로 여학생을 위주로 관광객이 줄을 잇자 정동진행 특별열차가 편성되었고, 역사주변은 삽시간에 민박집과 모텔이 들어섰다. 젊은 연인들은 그곳을 다녀오지 않으면 대화 축에도 못 끼는 판이었다. 여자애의 얘기는 그런 거였다. 이곳 등명에는 친척이 살고 있어서 자주 들린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애들 보면 머리가 텅 빈 바보 같애요. 저길 보세요.”
여자애가 해송이 솟아있는 뒤편을 가리켰다. 굴곡 많은 해안도로 쪽 모래사장에는 동해의 맞바람을 완강하게 맞으면서도 곧게 솟아있는 소나무가 붉은 혓바닥을 내보이며 서 있었다. 숲 너머로 보이는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등명 락가사(洛伽寺)의 대웅전 지붕이 비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기와장이 검푸른 이무기의 등껍질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저 절 멋지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전부 정동진으로만 가거든요. 아니 저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몰라요. 난 여기에 앉아 정동진으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경멸하곤 해요.”
사내는 다시 낚싯대 끝을 올려다보았다. 어신이라곤 없고 여전히 초리끝만 불어오는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바다 위로 드리워진 반월 모양의 낚싯줄이 밀려오는 파도에 실려 조용히 흔들렸다.
“저 절에 가보셨어요?”
여자애가 다시 물어왔다. 사내는 고개만 저었다.
“락가사에는 말예요. 신기한 게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사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대웅전 바깥벽에 탱화가 있는데. 글쎄 그게….”
“……?”
“알몸이 다 비치는 망사를 두른 여자들인데요. 그 여자들 치모까지 그려져 있지 뭐예요. 그림 솜씨가 약간 조잡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 절에 그런 그림이 그려진 곳은 저기밖에 없을 거예요. 수도하고 있는 부처님을 유혹하는 여자그림. 웃기죠? 그런데 아저씨.”
“…….”
“지금 내가 뭘 했는지 아세요?”
쪼그리고 앉아 묻는 여자애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사내는 까만 비옷으로 앞섶을 가린 여자애를 힐긋 바라보았다. 치마를 깔고 쪼그려 앉은 모습이 어딘지 엉거주춤해 보였다.
“바다를 더 짜게 만들었어요. 오줌쌌거든요.”
물 말아서 밥 먹었어요, 그런 표정으로 말하는 여자애의 덧니가 개구쟁이처럼 드러났다.
종알거리는 여자애 얼굴을 바라보던 사내가 뭐라고 대꾸하려는 순간 정동진 쪽에서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열차가 출발하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세워둔 낚싯대를 뽑아들고 릴을 감기 시작했다. 물기 머금은 스피닝 릴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줄을 다감고난 사내는 대충 낚싯대를 접었다. 여자애가 다시 말을 건네온 건 낚싯대를 들고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아저씨 정체를 맞춰볼까요?”
밀려오는 파도 위에 앉아 있던 갈매기가 날아올랐다.
“아저씬 나랑 같은 과예요. 아웃사이더. 사흘째 낚시를 던져도 고기 한 마리 못 잡는 실직자. 재수 없이 정리해고 된 사람이거나 죽을병을 앓고 있는 사람. 아니 죽으러 온 사람. 맞죠?”
종알대는 여자애의 음성이 부슬비처럼 등뒤를 적셔왔다. 사내는 돌아서서 묵고 있던 민박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칠 벗겨진 간판에 쓰여진 솔밭민박이라는 글귀가 내리는 세우에 구정물 묻은 얼굴을 씻고 있었다.


2.
더 싸주세요. 많이, 많이 깊숙이 끝에다가요. 당신은 사정할 때 신음소리를 내요. 어떤 소리냐구요. 개같이 헥헥거려요. 아니요 빼지 마세요. 그대로 놔두세요. 난 그게 좋아요. 축축이 흐르는 느낌이 좋아요. 이대로 죽어버리듯 잠들었으면 좋겠어요.
잠에서 깨어난 사내는 지독한 꿈을 꾸었다는 걸 알았다. 꿈을 꾸면서도 사내는 그게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꿈이란 걸 알고 꾸던 꿈에서 깨어난 느낌은 비참했다. 마치 침대에서 자다가 혼자 방바닥에 굴러 떨어진 느낌이었다. 화풀이할 사람도 없었다.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밤이 되자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파도소리는 더 가깝게 들렸다. 들려오는 파도소리는 입술을 깨물고 거품을 토해내는 바다의 목구멍 깊숙이에서 으르렁대며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방안에서는 습기 먹은 바람냄새가 났다. 닫힌 밀창에 부딪혀 푸드덕거리는 나방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다.
누렇게 색이 변하고 파리똥이 묻은 형광등은 약간 떨고 있었다. 사내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베개를 가슴에 깔고 엎드렸다. 머리맡에 놓인 담배를 집어 물었다. 지포 라이터를 켰다. 뚜껑을 닫자 휘발유 냄새가 풍겼다. 라이터를 손에 쥐고 내려다보면서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리고 장방형의 연꽃 무늬가 사방으로 번져나간 벽지를 바라보았다. 방바닥과 맞닿은 모서리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약간 들려 있었다. 오줌쌌거든요. 치마 밑에서 오줌을 쌌다고 말하던 여자애의 음성이 들렸다. 아저씨와 난 같은 과예요.
아니야.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사내가 이곳에 온 것은 실직해서가 아니었다. 죽으러 온 것도 아니었다. 굳이 생각해 보자면 살아남기 위해 사내는 이곳을 찾아온 거였다. 아니 한 여인을 잊기 위해 찾아온 거였다.
장비아(妃峨). 독거미 같은 여인. 독침을 감추고 숨넘어가는 신음소리를 내는 여자. 섹스로 시작해서 섹스로 끝난 만남만을 가졌던 여인. 한 달 전, 그녀와 이곳에서 헤어질 때까지 일년간 계속되었던 그녀와의 만남의 전부는 섹스였다.
이곳은 한 달전 그녀와 마지막으로 살을 섞었던 해변이었다. 민박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아랫도리만 벗은 채 뱀처럼 엉켰던 기억이 사내의 뇌리 속에 떠올랐다. 바지 한 자락 다른 다리에 걸치고. 움직이지 마요. 싸주세요. 사랑 속에 맹독이 숨겨져 있다는 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인가. 치료약은 독초가 있는 부근에 있을 터였다. 사내가 초가을의 등명해수욕장을 다시 찾은 이유였다.
그렇다고 떠난 여자를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떠난 여자를 미워한다는 것은 치사한 일이라는 것쯤은 알 정도의 자존심은 가진 사내였다. 비록 한 번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전국대회에서 한 번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는 사내였다.
독거미 같은 여인.
그녀는 자신이 지닌 독을 화려하고 선명한 오색 줄무늬로 드러낸 독거미였다. 비단실을 쳐놓고 먹이가 걸릴 때까지 집요하고 끈질기게 기다리다가  먹이가 걸리면 달려들어 온몸을 비단실로 칭칭 묶고 진액 한 방울 남김없이 깡그리 빨아먹는 거미였다. 당구선수만을 골라가며 만나고, 만나는 기간이 반년을 넘지 않는다는, 별명이 흑거미라는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당구장에서였다.
전국규모로 조직되어 있는 당구협회에서 개최한 쓰리쿠션 시합이 열리고 있을 때였다.
준결승전에서 사내와 만난 상대는 부산의 주먹코였다. 짧게 깎은 상고머리에 사각진 얼굴을 한 주먹코는 전국규모의 대회에서 두 번이나 우승한 노련한 선수였다. 준결승이지만 실은 결승전이나 다름없는 경기였다.
쓰리쿠션 열 다섯 점을 먼저 치는 편이 이기는 이 게임은 삼판 양승이었다. 상대편의 제너럴 애버리지는 일곱 큐였다. 말하자면 열다섯 개의 쓰리쿠션을 평균 일곱 큐에 끝내는 구력이었다. 그 정도 되는 상대를 이기려면 다섯 큐를 넘지 않아야 했다.  
초구를 잡은 사내는 한 구 한 구 신중하게 공을 겨냥해나갔다. 첫판에서 키스가 난 건 기본구를 시작으로 세 점을 치고 난 다음이었다. 상대편은 단숨에 여섯 점을 쳤다. 브릿지를 만들어 큐를 겨냥하는 손이 떨렸다. 두 번째 큐는 다섯 점을 쳤지만 주먹코는 연이어 일곱 점을 치고 나서 한가롭게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았다.
사내는 당구대 위에 모아진 공을 훑어보았다. 포인트를 먼저 맞춰야 하는 빈쿠션이었다. 별 어려울 게 없는 기본공이었다. 포인트를 잡고 공을 밀어붙였다. 공은 천천히 굴러가 쿠션에 부딪힌 다음 두 개의 공을 차례로 맞추고 멈춰섰다. 초크를 묻히고 나서 다시 연이어 다섯 점을 쳤다. 마지막 공이라는 심판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 공은 바깥돌리기였다. 브릿지를 세우고 연습볼을 치듯 공을 밀어쳤다. 키스를 피한 공이 부드럽게 목표구에 맞았다. 관람석에서 박수소리가 들렸다. 첫째 판을 이긴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판은 주먹코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초구를 잡은 주먹코는 단숨에 열 다섯 번의 스트록을 했다. 손댈 틈도 없는 게임이었다.
마지막 판이 되자 사내는 손바닥에 나있는 땀을 닦았다. 한 점 한 점 이미져리 포인트를 신중히 겨냥했다. 아홉 점을 치고 큐를 내렸다. 주먹코가 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먹이를 덮치는 수리의 눈빛으로 초록색 당구대 위를 노려보다가 자세를 잡았다.
문득 관람석으로 걸어오는 여자가 사내의 시선에 잡힌 건 그때였다. 까만 민소매 원피스에 어깨를 덮을 정도의 머리를 뒤로 모아 묶은 여자였다. 흰 얼굴에 먹구슬처럼 까만 눈을 지닌 여인은 버선코처럼 끝이 약간 치켜 올라가 콧구멍이 들여다보였다.  도발적으로 고개를 세운 젖꼭지가 도드라져 보이는 앞가슴을 내밀고 시합대 쪽으로 걸어오는 여자를 본 순간 마음이 울컹 흔들렸다.
흑거미다.
주변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급체한 느낌이었다. 발목 끈이 없는 까만 샌들을 신은 여자는 건너편 당구대 쪽 앞자리에 앉았다.
허리를 숙인 주먹코가 두 점을 치고 큐를 세웠다. 사내는 다음 공을 겨냥했다. 안쪽으로 짧게 끌어치면 되는 공이었다. 오른쪽 손목을 부드럽게 사용해서 빨리, 짧게 끊어서 치면 다음 공의 위치도 치기 좋은 위치에 자리잡을 거였다. 공은 빨려 들어가듯 적구에 부딪혔다.
다음 공은 더블 쿠션이었다. 공은 매끈하게 밀려가 초구를 맞힌 다음 양쪽 쿠션을 번갈아 부딪치고 나서 적구에 맞았다. 다음 공은 두 번 돌리기였다. 사내는 다음 공을 치기 위해 당구대 건너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여자가 앉아 있는 바로 앞이었다.
초크를 바르던 사내의 눈이 힐긋 여자의 앞가슴을 보았다. 탄력있게 턱을 내민 앞가슴에는 뾰족한 젖꼭지가 목을 빼들고 박혀 있었다. 노브라였다. 사내의 표정을 본  여자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만만한 미소였다.
여자의 발이 시야에 들어왔다. 맨발에 샌들을 신은 차림새였다. 가느다랗고 까만 부채살 모양의 끈이 발등을 덮고 있는 발은 작고 앙증맞았다. 희고 매끈한 발가락이 가지런히 드러나 있었고 양쪽 엄지에는 까만 페티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매끈한 한 쪽 발목에 걸려 있는 얇은 금줄을 본 순간 사내는 맹렬한 성욕과 함께 그 발을 입 속에 넣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엉뚱하고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국선수권대회에서, 그것도 결승전이나 다름없는 경기의 마지막 판에서 그런 생각에 빠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저 발가락을 입에 넣을 수만 있다면 시합이야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스스로 절망했다. 세 번째 판은 엉망이었다. 채 다섯 점도 치지 못하고 큐를 세워야 했다.
주먹코에게 결승전을 내준 사내는 터덜거리며 시합장을 빠져나와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밖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말라붙은 거목 같은 도시의 건물주변으로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있었다. 세워둔 지프로 걸어가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관악산 위로 불 밝힌 비행기가 소리 없이 날아가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살충제 맞은 왕파리 같죠?”
그런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사내는 시선을 돌렸다. 가로등 불빛 아래 까만 원피스를 입은 흑거미가 등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밤하늘에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면 파리약 흠뻑 맞고 비실대며 기어가는 왕파리 같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지금, 날 놀리는 겁니까?”
“아니에요.”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쌍꺼풀없는 여자의 먹구슬 같은 눈이 사내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눈꼬리에 그어진 잔주름이 몇 개 눈에 띄었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도발적인 눈길을 피해 사내는 가지런한 여자의 발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저 때문에 게임 망쳤죠? 사과하는 뜻으로 저녁을 사고 싶어요.”
“좋습니다.”
차문을 열자 여자는 냉큼 옆자리에 올라탔다. 사내는 시동키를 꽂았다.
시동을 걸려는 사내의 손을 여자 손이 다가와 잡았다. 키를 꽂은 채 사내는 여자얼굴을 보았다. 검은 눈에 촉촉한 물기가 배어 있었다. 시선을 사내에게 고정시킨 여자는 말없이 사내의 손을 끌어내렸다. 여자의 손가락이 사내의 손바닥을 두어 번 긁었다.
손바닥을 긁고 내려온 여자의 손이 사내의 바지 앞섶을 덮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사타구니를 덮은 여자의 손가락이 거미처럼 움직였다. 바지 앞섶이 뭉클 부풀어올랐다. 긴 손가락이 사내 바지의 앞 지퍼를 열었다. 귀면상이 침을 흘리며 튀어나왔다. 채워진 사이드를 풀고 난 여자가 사내의 무릎 위에 엎드렸다. 여자의 입술이 따뜻하고 촉촉하고 매끈거리는 빨판처럼 귀면상 뿌리를 핥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타구니에서 고개를 든 여자가 귀밑머리를 쓸어 넘기며 사내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여자가 앉아있는 자리로 옮기자 프론트 글라스에 등을 기댄 여자가 민소매 원피스를 허벅지 위로 한 뼘쯤 끌어올리며 사내의 아랫배 위에 걸터앉았다. 순간 검은 숲이 힐긋 시선에 잡혔다가 엉덩이를 내려놓자 사라졌다. 귀면상도 숲 속으로 사라졌다.
저녁대신 땀이 흠뻑 젖은 섹스를 마치자마자 여자는 지프 앞좌석에 붙은 후면경을 보며 화장을 고쳤다. 눈 가장자리에 생겨난 주름이 약간 아래로 쳐져 보였다. 여자는 양쪽 검지를 뻗어 쳐진 주름을 위로 두어 번 밀어 올렸다. 그리곤 핸드백을 들고 차에서 내려 사라졌다.


3.
 바깥은 해풍에 젖은 끈끈한 어둠이 둘러싸고 있었다. 저녁 무렵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사내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수평선 어림인 먼바다에서 불을 밝히고 있는 오징어잡이 배들의 집어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겨울날 아침 창에 얼어붙은 성에꽃처럼 번져나가는 불빛이었다. 언제부턴지 내리던 비는 그쳤고 바람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점퍼를 걸치고 민박집 바깥으로 나선 사내는 백사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백사장까지의 사이에는 짙푸른 해송숲이 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숲을 지나 백사장으로 나서려던 순간이었다.
“아저씨.”
숲 속에서 사내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흰색 니트를 걸친 여자애가 팔랑거리며 뛰어나왔다.
“만날 줄 알았어요.”
손에 들고 있는 비닐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는 여자애의 입에서 단냄새가 풍겼다.
여자애가 잡아끄는 대로 모래사장이 보이는 해송 아래 자리를 잡자 여자애가 수선스럽게 비닐봉지를 풀었다. 소주 세 병과 과자 부스러기가 쏟아져 나왔다.
“난 이래봬도 예지능력이 있거든요. 아저씰 다시 만날 줄 알았어요. 봐요.”
내미는 일회용 소주 컵은 두 개였다. 컵을 받아들자 여자애는 병마개를 돌렸다. 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병뚜껑이 옆으로 돌았다.
쌀쌀한 밤 기운에 마시는 소주에서는 석유냄새가 풍겼다. 사내가 술잔을 비우기 바쁘게 다시 술잔을 채워준 여자애는 자기 잔에도 술을 따라 마시더니 크, 진저리를 쳤다.
“역시 소준 이 맛이야. 빈속에 원샷.”
설익은 술꾼처럼 과장된 감탄사를 내뱉는 여자애에게서는 어딘가 허전한 분위기가 풍겼다. 사내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자애가 손을 내밀었다. 담배를 건네주자 여자애는 익숙하게 담뱃불을 붙였다.
포켓볼 한 대를 포함해 고작 당구대 여섯 개가 있는 당구장을 운영하던 사내가 흑거미를 만난 기간은 딱 일 년 간이었다.
검은 민소매를 즐겨 입는 그녀는 섹스를 하기 위해서만 사내를 찾아오는 것 같았다. 항상 아랫도리가 젖어있었다. 버선코처럼 콧구멍이 치솟은 여자가 전화를 걸어오고, 만나서 발가락을 입에 넣고 땀흘리는 섹스를 하고, 그리고 섹스가 끝나면 여자는 눈가의 주름을 밀어 올리고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사내는 이젠 그런 만남을 그만 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금년에 초등학교를 들어가는 외동딸이 있는 유부남이란 사실을 의식해서만은 아니었다. 왜 그녀가 자신을 선택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 또한 왜 그녀를 만났고 섹스를 하게 되었는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시합을 망친 대가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외모에 넋이 나간 사내에게 베풀어주는 호의라고 보기에도 어설픈 구석이 있었다. 세 달쯤 만나고 나서 사내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아무 이유 없이 섹스 그 자체만을 즐기는 거미도 있다.
흑거미는 달콤한 꿀을 발라놓은 끈끈이주걱 같았다.
사내는 흑거미와 섹스를 할 때면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이건 끈끈이 주걱이다.  이처럼 달콤한 꿀을 빨아 먹다보면 언젠가 자신도 모르게 그 구멍 속으로 빠져 들어가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결국 교미를 끝낸 수컷이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것처럼 독액에 몸이 녹은 자신도 흐물흐물 통째로 빨려 먹혀 버릴지도 모른다.
사내는 호박처럼 큰 복숭아를 먹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복숭아는 달콤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달콤하지만 지나치게 달콤하지 않고 부드럽지만 지나치게 부드럽지도 않은 그 맛은 불길한 예감으로 더욱더 달콤했다. 그만 먹어야지, 하는 것은 생각뿐 먹던 입이 멈추지 않았다. 한 입만, 한 입만, 이제 정말 마지막 한 입만. 마지막으로 한 입 깨물었을 때 무언가 딱딱하고 매끄러운 감촉이 혀끝에 닿았다. 사내는 즙액으로 범벅이 된 손가락 사이로 먹고 있는 복숭아를 들여다보았다. 반쯤 잘린 투구벌레가 그곳에 있었다. 번들거리는 등껍질 사이로 잘려진 날개가 보였다. 토막이 나서 꿈틀거리며 바둥대는 다리에는 가시 같은 털이 돋아 있었다. 징그러워. 토하면서 사내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나서 헛구역질을 하듯 사내는 두어 번 딸꾹질을 했다.
“아저씬 저 바다에 띄워보고 싶은 거 없어요?”
서너 잔 소주잔을 비운 여자애가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사내에게 물어왔다. 독거미. 사내는 대꾸 없이 소주잔을 비웠다.
“난 소를 띄워보고 싶어요”
“소?”
사내가 고개를 쳐들었다.
“눈감아 보세요.”
여자애가 오징어배가 떠있는 어두운 수평선으로 시선을 던지며 목덜미에 닿은 단발머리를 쓸어 올렸다. 사내는 눈을 감았다. 여자애의 음성이 들려왔다. 바닥에 착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여기 아저씨 앞에 진흙이 놓여 있어요. 그걸 가지고 소를 만드는 거예요. 암소든 수소든 상관없구요. 크던 작던 그것도 상관없어요.”
다 만들었어요? 아직 눈뜨면 안돼요. 여자애의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소가 다 만들어졌으면 이제 건너편 섬까지 뛰어가게 만들어 보세요.”
눈은 뜨지 말구요. 하는 음성이 후렴처럼 들려왔다. 사내는 자신이 만든 소가 물위로 뛰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제 눈을 뜨세요. 어때요, 아저씨? 소가 건너편 섬까지 뛰어갔어요?”
아니.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진흙으로 빚은 소는 건너편 섬까지 뛰어가지 못했다.
“빠져버리는군.”
“그 소를 섬까지 뛰어가게 하는 사람은요.”
여자애는 거기서 말을 끊더니 밤 공기를 한 입 물고 뒷말을 이었다.
“소원 한 가지가 이루어진대요. 내 친구가 그러더군요. 그 소가 뛰어 건너편 섬에 도착할 수 있으면, 꿈이 이루어진대요.”
사내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여자애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 친구는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자긴 죽을 거라고 말하곤 했거든요. 대단한 엄살꾸러기죠. 하지만 죽기 전에 꼭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어요.”
“그곳이 어딘데?”
“인도.”
“인도?”
“그곳에 가서 꼭 눈덮힌 히말라야를 보고 싶다고 말했어요. 만년 동안 변함 없이 녹지 않고 있는 그 거대한 산봉우리를 생각해보래요. 굉장하지 않느냐고. 그 밑에 서면 인간세상 아등바등 살아가는 거 부질없단 생각이 들 거라고 말하곤 했죠. 자기는 세상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눈대요. 히말라야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
종알거리는 여자애를 보며 담배를 피우는 사내의 입술언저리가 발갛게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해송 언저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담배연기를 휘말아 바다 쪽으로 도망쳤다. 저만큼 포말이 부서지는 모래톱 언저리를 누군가 걸어가고 있었다. 사내는 눈을 비볐다. 흑거미의 탄력 있는 몸이 눈앞에서 출렁였다. 순간적으로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그 충동에게 사내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저으면서도 또다시 질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환멸감을 느꼈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야. 끝을 내야돼. 언제나처럼 그런 생각은 생각뿐이었다. 전화가 걸려오고, 촉촉한 여인의 음성이 들리면 벌써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사내였다. 발목에 걸린 가느다란 금줄과 가늘고 긴 발가락, 그리고 발톱에 발라진 까만 색 페티큐어를 보면서 사내는 독거미라는 그녀의 별명이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독거미. 그럴 때마다 사내는 항상 거부할 수 없는 충동에 휩싸여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녀가 쳐놓은 투명한 거미줄 한가운데로, 그리하여 거미줄이 사내의 살갗을 휘감고, 출렁 몸이 움직이고, 등뒤로 다가온 거미가 촉촉한 독액 묻은 이빨을 내밀어 사내의 목덜미에 독침을 찔러 넣을 때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목이 물리고 독액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 자신의 심장에 이르는 순간을 어쩌면 기다리는 지도 몰랐다. 낙지의 흡반에 휘감겨 피를 빨리는 기분이 이럴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흡혈귀에게 피를 빨리고 싶은 공포 속에는 숨겨진 성적욕망도 한몫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피가 빨리면서 느끼는 오르가즘.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은 느낌과 희열, 그러다 서서히 사그라지는 욕망의 찌꺼기들 속에서 나른한 죽음 속으로 잠겨갈 그것.
“우울한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사내가 다시 담뱃불을 깊숙이 빨아들였다. 사내의 콧날 언저리가 벌겋게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우울한데다 재미도 없는 얘긴데요.”
눈을 깜박이며 여자애가 말을 쏟아냈다.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요. 일남 이녀 중에서 막내였대요. 오빠, 언니, 그리고 그 여자애는 모두 세 살 터울이었대요. 아버지는 근엄한 분이었고, 어머니는 자상한 분이었대요. 그런데 오빠가 고등학교 이 학년이 되자 자살을 해버렸나봐요. 집안이 난장판이 되고 부모님은 반 실성을 하고. 그때 초등학교 오 학년이던 여자애는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았죠.”
눈이 큰 여자애는 마치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났어요. 큰딸이 고등학교 이 학년에 올라갔는데요. 그 애가 또 자살을 해버렸대요. 그 이유는 나도 몰라요. 두 번씩이나 그런 일을 당하는 집도 있을까요? 믿어져요, 아저씨?”
사내는 빤히 여자애의 종알대는 입술 언저리를 바라보았다. 여자애는 사내가 피우던 담배를 빼앗아 몇 모금 빨아들이더니 모래 속에 비벼껐다.
“이제 여자애는 혼자 남게 되었어요. 그 애의 모든 행동은 끊임없이 어머니의 감시를 받았어요. 새벽부터 밤까지 어머니는 하나 남은 딸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지켜보았죠. 그 딸이 드디어 고등학교 이 학년이 되었어요. 그런데 그 애가 또 자살시도를 한 거예요. 웃기죠? 그런데 이번에는 항상 하나 남은 딸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어머니가 그걸 발견한 거예요. 그래서 간신히 살려냈죠. 기가 막힌 어머니가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봤대요. 그런데 점쟁이가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아버지가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서 그 빚쟁이들이 자식으로 태어나 빚만큼만 살다가 죽는 거래요. 그러면서 아직도 그 빚이 남아있다는 거예요.”
“부모 먼저 죽는 자식은 자식이 아니라 원수라고 한다는 거로군. 그래서?”
“그런데 그만 그걸 아버지가 알게 된 모양이에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약을 먹고 자살해 버렸대요.”
“그 딸은 어떻게 됐는데?”
“열심히 살고 있어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도 들어갔대요. 웃기죠? 믿거나 말거나 같지만. 이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아까 말한 친구 얘기예요. 자신이 바로 혼자서 살아남은 장본인이래요. 믿어져요, 아저씨?”
난 아무리 생각해봐도 믿을 수 없어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난 여자애는 소주 한 잔을 따르더니 목구멍 깊숙이 털어 넣었다.
“그럼 그 친구 어머닌 어떻게 되셨나?”
“돌아가신 아버지를 화장하고 돌아와선 며칠 뒤에 돌아가셨대요. 피를 한 그릇이나 토하구요.”
종알대던 여자애가 갑자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그 친구가 항상 들고 다니던 건데요. 무슨 뜻인지 맞춰보세요.”
사내는 여자애가 건넨 종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로등 아래를 지나면서 사내는 여자애가 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 종이 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다.

신께서 이르신다.
누구든 내 문을 두드리는 자 나를 볼 수 있을 것이요.
나를 본 자는 나를 알게 될 것이며
나를 알게 된 자 나를 사랑할 것이며
나를 사랑한 자 내가 사랑할 것이며
내가 사랑하는 자, 마침내 내가 죽이리라.

4.
오후의 마지막 햇살이 부드럽게 모래사장을 데우고 있었다. 이제 곧 황혼이 질 시간이었다. 낚싯대를 펴서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던지고 난 사내는 모래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독거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치켜 올라가 콧구멍이 들여다보이는 얼굴과 도드라져 솟은 유두를 발목에 걸린 금줄이 꽁꽁 얽어매고 있는 그림이었다.
흑거미의 과거를 들은 건 만난 지 반년이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녀는 여고시절 불량배들에게 끌려가 당구대 위에서 윤간을 당했다고 했다. 그 뒤부터 검은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그녀는 당구계의 고수들을 만나는 것으로 상처를 치유하려는 여자인지도 몰랐다. 이젠 내가 윤간해주리라. 그런 심정이 검은 옷 속에 숨겨진 유두 근방에 끔찍한 상처로 문신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말을 듣고 난 다음 질펀한 섹스를 마치고 뒤돌아 걸어가는 여자의 볼륨 있는 엉덩이를 볼 때면, 사내는 자신이 그녀를 겁탈했던 불량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것이었다. 한 달 전 자신과 헤어진 독거미가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는 다음 상대가 누구란 걸 사내는 알고 있었다. 부산의 주먹코였다. 덜렁 코만 컸던 주먹코는 이제 독거미에게 즙액을 다 빨아 먹히고 박제된 곤충처럼 만지기만 해도 바스러져 버릴 것이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 그리고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바다로 떠나온 거였다. 그러나 행동이란 항상 생각보다 늦었다.
사내가 앉아있는 모래사장 왼편 끝 부분은 검은 암초 무더기가 자리잡고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가 그곳에 부딪혀 포말이 튕겨났다. 사내는 튕겨난 물보라가 다시 떨어지는 암초 언저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암초 끝에서 여자애 머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흰 면바지에 베이지색 쟈켓을 입은 여자애는 암초를 이리저리 건너뛰더니 모래사장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신발을 벗어 양손가락에 하나씩 걸쳐들고 사내 편을 향해 깡총거리며 뛰어왔다. 뛰어온 여자애는 사내 곁에 풀썩 주저앉더니 대뜸 물어왔다.
“아저씨. 인도에 가본 적 없다고 했죠?”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난 가봤어요.”
신발을 벗은 채 여자애는 고개를 빼들고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친구에게 엄청 인도얘길 들어서 세뇌가 됐나봐요. 하여튼 한 번은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녀왔죠. 육 개월 간 아르바이트해가지구.”
동그랗게 쌍꺼풀진 여자애의 눈이 끄먹대는 소 눈을 닮았다는 생각이 사내의 머릿속을 스쳤다.
“만년설을 봤나?”
“아뇨.”
여자애가 고개를 저었다.
“그 대신 소를 봤어요.”
“소?”
소를 입에 달고 사는 여자애를 사내는 다시 쳐다보았다. 인중어림에 잔 솜털이 나 있었다.
“그래요. 소.”
“바다 위를 뛰어가는 소?”
사내가 말하자 여자애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동그란 눈이 깜박이며 덧니가 드러났다. 해가 넘어가고 잠깐 남은 잔광이 가물거리는 바다쪽을 보고 난 여자애는 시선을 사내 쪽으로 돌렸다.
“타지마할이 있는 아그라에 도착했을 때였어요. 결혼식 구경갔다가 되돌아오면서 길을 잃었지요. 세 사람 정도가 어깨를 나란히 걸어갈 만한 골목길이었어요. 어둡고, 인적 없는. 한쪽엔 회색 이삼 층짜리 벽돌집들이 문을 꼭 닫은 채 있고 다른 쪽엔 길옆으로 폭이 두어 뼘 정도 되는 시궁창이 흐르는 곳이었죠. 걷다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어요. 두꺼운 마로 된 휘장이 쳐진 가게였죠. 거길 지나치는데 비린내가 풍겼어요. 안에서 불빛이 보이고 두런거리는 목소리도 들렸어요. 사람들 그림자가 어른거리고요. 나는 나도 모르게 끝 부분 휘장을 살짝 들추고 안을 들여다보았죠. 그런데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아세요?”
“......?”
“소를 죽여 가죽을 벗기고 있었어요. 거짓말이라구요? 정말이에요. 나도 처음엔 내 눈을 의심했다니까요. 그곳이 소를 신성시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눈을 비비고 그 안을 들여다봤어요. 다섯 평 정도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시멘트벽이 보였어요. 그리고 껍질 벗겨진 소가 두 마리 갈고리에 꿰어져 천장 아래를 가로질러 벽에 박힌 쇠막대기에 걸려 있었고, 바닥엔 세 명의 남자가 가죽을 벗기고 있었어요. 반쯤 벗겼는지 흰 기름덩어리가 군데군데 밴 살코기가 마치 꿈틀거리는 것처럼 피를 머금고 있더라니까요. 핏자국과 물기에 젖어서 번들거리고 있는 시멘트 바닥 위에 잡은 고기를 놓고 수염 덥수룩한 사내가 날이 초승달처럼 휘어진 짧은 칼을 잡고 있고 다른 사내들은 발라내기 좋게 옆에서 거들고 있더군요. 정말 소냐구요? 그럼요. 나도 혹시나 싶어 벗겨놓은 가죽과 잘라놓은 대가리에 달린 뿔까지 몇 번이나 확인했거든요. 내가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했구요. 뺨을 꼬집어볼 생각까지 했죠. 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어요. 피비린내, 생고기 냄새가 비릿한 땅콩냄새처럼 풍겼어요. 나는 구역질을 참으며 휘장을 내리고 돌아섰어요. 그때였어요.”
등 뒤쪽 산 너머로 해가 가라앉자 금방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사내는 말을 끊고 침을 꿀꺽 삼키는 여자애의 커다란 눈이 반짝 빛나는 걸 보았다.
“등줄기로 소름이 돋더군요. 아니 머리칼이 곤두섰어요. 바로 내 눈앞, 내 몸에서 일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흰 소가 떠억 버티고 서 있는 거예요. 바이킹처럼 휘어진 뿔을 가진 소였어요. 앞다리를 몸통보다 더 바깥쪽으로 벌리고 고개를 쳐든 소가 내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있는 거예요. 흰 소라고 하지만 완전히 흰 소는 아니고 약간 누런 털이 섞인 소였어요. 목 가까운 등에 혹이 나 있었구요. 난 오줌을 쌌어요.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것을 안 것도 나중이구요. 난 소의 눈을 보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어요.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버티고 선 소가 그대로 달려들어 날카롭고 강인한 뿔로 내 배를 받아 배가 찢겨 내장이 터져 나오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니까요. 내가 도살장 안에 가죽 벗겨진 소처럼 찢겨질 것 같았다니까요. 내가 죽은 소가 되고 마치 도살장을 노려보는 흰 소가 내가 된 것같다는 착각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고요. 어떻게 물러섰는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선 게 한 십여 미터 됐나봐요. 그제야 나는 다시 소를 바라보았죠. 그런데 버티고 선 소는 나를 바라보던 게 아니었어요. 소는 휘장이 드리워진 도살장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더군요. 동족이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말예요. 그런데 그 모습이 묘하게 느껴졌어요.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원통한 것도 아니고, 원한을 품은 것도 아니고, 뭐랄까. 그저 그렇게 응시하고 있는 모습, 달관한 것도 아니고 멍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렇게 버티고 서 있는 거예요.”
여자애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때 난 내가 죽음을 마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 전에 보았던 것은 다만 죽음의 껍질이었을 뿐이라는 것도 깨달았구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 날 분명 죽음은 나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었어요. 아주 친숙한 모습을요.”
말하던 여자애는 갑자기 시선을 돌려 사내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입에 올리는 그 말투와는 달리 여자애의 얼굴은 철부지 동자승의 표정이었다.
“이제는요, 아저씨. 이제는 사는 것도 무섭지 않을 것 같아요.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저씨도 죽으려고만 하지말고 죽음을 한 번 만나보세요”
그렇게 말하고 난 여자애는 양손에 신발 한 짝씩 나누어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민박집 쪽으로 몇걸음 뚜벅뚜벅 걸음을 떼어 놓았다. 사내는 그 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몇걸음 걷던 여자애가 갑자기 돌아섰다.
“아저씬 말예요”
그런 목소리가 날아왔다.
“무척 닮았어요. 돌아가신 아빠랑요. 어쩜 그렇게 닮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아저씨에겐 말이 술술 새나갔나봐요.”
흰바지에 베이지색 자켓을 입은 여자애는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해송숲을 향해 걸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민박집 쪽으로 총총 걸어가는 뒷모습이 차츰 해송 숲에 가려져 보일락 말락 하며 사라졌다.
이미 사라져버린 여자애의 뒷모습을 좇던 사내가 문득 눈을 비볐다.
사내의 눈앞으로 뚜벅뚜벅 흰 소가 걸어오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던 사내는 휘청 그 자리에 쓰러졌다. 두 손을 짚고 일어서려던 사내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른 풀줄기가 몇 오리 붙어 있었다.
흰 소는 간 곳 없고 부처를 유혹하는 여인들이 그려진 락가사의 탱화가 눈앞을 가득 메웠다. 부처를 둘러싼 여인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까맣게 변했다. 아랫도리를 벗은 흑거미들이 사내의 아랫도리에 치모를 비벼대고 있었다.
잠깐 기다려.
두 손을 털어 감겨드는 흑거미들을 털어내는 사내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끝)


김양호(金良浩)
7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당선
85년 문화방송 625문학상 장편소설부문 수상
문학박사, 현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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