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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문화산책/'시골 선비 조남명'이 이 시대에 주는 의미/김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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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미혜
댓글 0건 조회 3,382회 작성일 02-11-0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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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연극 에세이>
'시골 선비 조남명'이 이 시대에 주는 의미 

김미혜
                                          

   조선조 중기의 학자인 조식 선생(호는 남명)이 태어나신 것이 1501년이었으니 2001년은 그의 탄생 500주년이 되는 해였고 이윤택이 쓰고 연출한 「시골 선비 조남명」이 지난 해 처음 개최된 '서울 공연예술제'에서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평생 벼슬을 마다하고 많은 후학을 길러낸 이 대 유학자의 업적을 기리는데 크게 이바지한 셈이 되었다.
   일생을 살면서 누군가를 자신의 모범으로 삼고서 살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필자에게도 그런 인물들이 몇 있다. 역사적 인물로는 조식선생이 그 중 한 분이고 가까운 인물로는 필자의 외조부가 이에 속한다. 조식선생과 필자의 외조부는 두 분 다 창녕 조(曺)씨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필자의 외조부는 인명사전에 오를 만한 분은 아니셨지만 필자의 인생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 분은 부패로 얼룩져 결국 우리 역사에 오점을 남긴 자유당시절 공무원을 감사하는 기관의 높은 자리에 있으셨지만 정년퇴임 후 2년이 지나자 필자의 외가에는 밥을 끓일 쌀이 없었고 외삼촌들의 학비조달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필자의 외조모는 그러한 집안사정을 남편에게 불평하지 않던 전형적인 한국여인이었고 필자의 외조부는 그런 형편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용히 난(蘭)을 기르고 타계하시기 전까지 사군자를 치던 분이었다. 재직시절에도 명절날 등에 들어오는 선물을 절대 받지 않으셨고 -외조모께서 남편 몰래 받으신 일은 있었다-, 정년퇴임 후 전의 부하직원들이 잘 되어 인사차 보내오는 선물은 받으셨다. 외조부의 공적 생활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런 선물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나는 걸 보면 부하직원들도 사랑하고 배려한 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한 편의 연극에 대해 쓰는 글에서 크게 자랑할 것도 없는 필자의 집안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주변에서 고결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너무도 힘든 이때 「시골 선비 조남명」을 보며 존경하던 조식선생을 그린 연극이 새삼 고마웠고, 필자의 어린 시절 채근담을 읽어주시기도 하던 외조부가 갑자기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많은 것들을 망각하고 반성 없이 그저 바쁘게만 일상을 보낸 필자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이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한 분야들로 되어 있어 누구나 그저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 그 분야 중에서도 또 작은 분파의 끝에 매달려 그것을 하나의 세계로 알고 사는 것이 현대인들이 사는 모습이다. 필자도 연극계, 연극학계 -좀더 넓게 말하자면 대학사회- 외엔 아는 분야가 거의 없다. 필자의 지인(知人)들도 거의 모두가 이 분야에 속한 사람들이다. 손바닥 보듯 뻔한 연극계를 보면 그 좁은 판에서 자신의 이득을 위해, 또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곡예 하듯 바쁜 사람들이 많다. 서로 사랑하고 배려해도 연극계가 잘 굴러갈지 모르는 이 어려운 판국에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예들이 많다. 대학사회를 보아도 학자는 보기 드물고 지식을 파는 직업인으로서의 교수가 더 많다는 인상을 받는다. 학연과 지연에 매달려 새로운 피의 수혈을 거부하는 교수들,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리가 탐나 감투를 좋아하는 교수들, 힘없는 제자들이나 후배들에게 전횡을 부리는 교수들, 자신의 학문과 무관한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상식적인 이야기나 주어 대는 텔레패서(television+professor의 줄인 말)들...이런 모습이 우리 사회의 마지막 양심과 양식의 보루여야 하는 대학사회를 지키는 이들의 면모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한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말이 있었다. 유교망국론과 동일한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공자의 사상이 잘못 수용된 데에서 나온 말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어지러운 중국 천하가 어떻게 하면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에서 나온 그의 "인(仁)-철학"이 원초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맹점, 즉 별애(別愛)의 측면만이 부각된 것이다. 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내 형제간에 우애하면, 즉 모두들 그렇게 실천하고 사는 삶이 모인다면 중국 천하가 화평해지리라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공자의 별애는 자연스레 겸애(兼愛)를 낳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선 겸애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별애가 판을 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내 집 울타리 밖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내 집만 무사하고 깨끗하면 되고, 내 부모만, 내 남편과 아내만, 내 자식만 편안하고 잘 살면 된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큰 병폐인 도덕 불감증의 출발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도덕과 윤리란 작은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나도 있지만 또 다른 나인 남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복잡한 사회에서 남의 덕이 있으므로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어찌 나만이 중요하고 나와 혈연관계가 있거나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만이 중요하겠는가. 선진의 서양인들은 효도나 가족애를 요란스레 내세우며 떠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나보다 못한 사람들, 예를 들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 나이가 들거나 신체의 장애로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기독교 정신이 피부에 밴 그들이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생각은 하면서도 눈물겹도록 인간적이고, 인간의 인간됨을 느끼게 하는, 그러나 우리에게선 쉽게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잘못 수용된 유교 철학에다 한 몫을 더 보태준 건 해방 후 들어온 미국의 천민문화이다. 사실 미국의 중산층은 매우 보수적이고 건전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들어온 건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의 정책에 의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쨋든 우리에게 들어온 그들의 천민문화는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를 물질만능의 사회로 만들어 놓았다. 매일 텔레비전의 뉴스시간을 메우는 부정과 비리, 이것도 결국은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저질러지는 야만적 행위이다. 정치에 투신하는 이들 중 과연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런 결심을 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많은 이들이 결국은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기꺼이 정치꾼이 된다. 그들이 감히 나라와 민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가증스럽다. 문제는 그런 이들이 소위 식자층이라는 점이다. 평범한 직업을 갖고 작은 일에서 최선을 다하며 사는 선량한 시민들의 분노는 그래서 더 크다. 부정과 비리가 운위될 때 거론되는 돈의 액수 또한 가히 천문학적이어서 그저 입이 떡떡 벌어질 뿐이다. 필자는 유학시절 그 나라의 총리가 별장을 지을 때 직책을 이용해 자재를 싸게 구입하고 약간의 탈세를 한 것 때문에 총리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보았다. 거론되던 액수가 정확히 얼마였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나라보다 국민소득이 훨씬 낮은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비리라고도 보지 않을 정도의 액수였던 것은 분명하다. 부정은 했지만 그 액수가 적으면 처벌받지 않는 우리나라와는 크게 대조되는 대목이다. 그 액수가 많건 적건 부정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처벌을 받아야 하는 나라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흔히 조선시대 선비들이 당쟁을 일삼았던 사실을 비난한다. 물론 그 선조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당쟁은 인의(仁義)의 유교이념을 신봉하며 사회 도덕규범의 실천자여야 했던 선비들이 세속의 지위를 얻고 권력의 주체가 되자 자신들의 권력강화와 연장을 위해 사회의 규범체계를 악용했고 내 편은 군자이고, 나와 다른 편은 소인이라는 별애의 편가르기를 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 별애의 편가르기는 불행하게도 여전히 우리의 피 속을 흐르고 있다. 슬프고 두려운 일이다.  
   우리는 요즈음 선비정신을 그리워한다. 한국 세계 대 백과사전에는 "선비는...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지도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며 의리의 신념을 사회 속에 제시하고 실천해야 함과 동시에 유교적 도덕규범을 실천하는 사회적 모범을 보여서 대중들을 교화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다. 따라서 선비는...항상 그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고 제시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임무를 실천해야 하는 지도자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위에 언급했듯 옛 선비에 해당하는 오늘날 식자들의 행태가 아수라장 속이라 선비다운 식자가 그립고 선비정신이 그리운 것이다.  
   연산군대부터 중종, 명종을 거쳐 선조 대까지 그야말로 피 냄새가 끊이지 않던 시기를 살았던 조식 선생은 그런 속세에 휘말리지 않은 진정한 선비, 즉 독서인이자 학자였다. 선생에게 있어 학문도야의 목적은 속세의 부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도리와 우주의 이치를 깨닫고 그를 실천하는 인격의 성취에 있었다. 선생은 중종, 명종, 선조 대에 여러 차례 벼슬을 받았으나 끝내 속세에 나오지 않고 산중 독서인으로 남아 그저 강학(講學)에 힘쓰고 후학을 기르는 일에만 전념했다.
   이런 조식선생의 일생을 볼 때 드라마틱한 구석이란 없다. 속세의 풍파에 휘말린 적이 없었기에 그 생에 굴곡이 있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후문(後聞)에 따르면 선생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여 이윤택은 '남명학회'의 부탁을 받고 「시골 선비 조남명」을 썼다고 한다. 집필 당시 이윤택의 가장 큰 고민은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선생의 일생 중에 있었던 소박하고 작은 에피소드 몇 가지를 가지고 한 편의 드라마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고난 연극쟁이 이윤택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역사극「시골 선비 조남명」을 써냈고 가르침을 직접 전언하지 않고 한국적 연극언어 속에서 묻어나게끔 무대 위에 올렸다. 이 점이 「시골 선비 조남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시골 선비 조남명」은 총 3막 10장에 에필로그로 되어있다. 1막 '산중 독서인'에서는 조식선생의 면모를 그리고있다. 하사된 벼슬을 마다하는 에피소드가 들어있고, 학문도야가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인격도야를 위한 것이라는 선생의 주장이 나와있다. 2막 '세상과 만나다'에서 선생은 유생들을 모아 후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유생들에게 선생은 마음에 실득(實得)이 없이 "산사의 도사나 중처럼 성리(性理)의 깊은 뜻"만을 탐구해온 자신의 언행 불일치를 깨달았음을, 자신이 "말만 있고 몸이 없는 선비"였음을 실토한다. 또한 외관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당시의 천박한 풍조를 만난 선생은 그 시대정신을 따르다가 토정 이지함에게서 "똥 묻은" 덕담을 듣게 된다. 이 똥 묻은 덕담은 김지하의 대설 <똥바다>의 한 대목을 조금 바꿔놓은 것이다. 특히 이지함과 그의 종자인 서기가 함께 "어디로 사라져버렸나 이 세상의 배운자들아 / 어디로 사라져버렸나"하며 노래로 외치는 대목은 이 작품의 핵심적 메시지를 전한다.  '사화(士禍)'라는 제목이 붙은 3막은 당시의 정치풍토로 인해 일어난 을사사화를 그림으로써 꼭 한번 세상에 대해 상소문을 쓰겠다는 의지를 갖고있던 조식 선생이 을묘사직소를 쓰게 된 경위를 설득력 있게 한다. 또한 이 마지막 막에 등장하는 인물들인 윤원형, 도승지들, 그리고 조식 선생과 함께 벼슬을 하사 받는 산림처사들의 야만성과 끝까지 지조를 지키지 못하는 비굴함이 선생의 고결함과 매우 잘 대조되어 그려져 있다.  
   한 인물을 그리는 연극작품이 범하기 쉬운 우(愚)는 그 인물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그리면서 성인열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지루함과 불쾌감을 느끼기 십상이다. 그러나 「시골 선비 조남명」의 사건들은 에피소드의 나열이긴 해도 연대기적이 아니고 조식선생의 됨됨이를 가시화하기 위해 인과적으로 엮여있다. 또한 죽음을 각오하고  을묘사직소를 쓰기 전 아내에게 "내 나이 오십에 이르도록 / 일정한 생업도 봉록도 없는 무위도식의 독서인이었소 / 못 먹어서 얻은 어머님의 병환을 보면서도 약 몇첩 지어 드리지 못하고, 끝내 저 세상 원통하게 가시게 했소 / 아홉 살 먹은 내 아들 차산이가 학질에 걸려 밤새 앓을 때도 나는 책을 읽었소 / 아이를 어떻게든 업고 나가 약지을 돈을 구해야 했는데 나는 책을 읽었소 / 아이가 죽어서 어린 시체를 지게에 얹어 산에 묻으러 갈 때까지 책만 읽었소 / 책 읽는 일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어 있었겠소 / 오십에 이르기까지 책을 읽으며 언젠가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리라 생각했었소"라고 하는 비장한 말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던 한 산중 독서인 조식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냄으로써 우리의 공감을 끌어낸다.
   「시골 선비 조남명」은 이미 언급되었지만 한 역사적 인물을 통해 오늘날의 지식인들에게 거울을 들이대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역사극'이란 부제가 붙어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선 역사극이 아니다. 지식인은 참으로 어떠해야 하는지 묻고 있는 매우 동시대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 물론 답은 들어있지 않다. 답을 얻는 건 관객 각자의 몫이다. 오늘의 시대는 조식 선생의 시대가 아니다. 창학동에 가 살지 않는 한 우리에겐 돌아가 머물 산중도 없다. 지식은 어떻게든 세상에서 유용하게 쓰여야 한다. 그렇다면 「시골 선비 조남명」에서 이윤택은 지식인의 기본적 자세를 말하고자 했다고 보아야 한다. 지식을 쌓아 진정으로 우주의 이치를 알고 인간의 도리를 아는 지식인이라면 비록 세속에 묻혀 살 수 밖에 없더라도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필자로 하여금 5세기 전 인물이었던 조식선생을 다시 생각하게 하고, 평생 인격자로 사셨던 외조부를 새삼 그리워하게 한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과연 필자가 한 지식인으로서 인격을 팔지 않고 참되게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 것이다.        
   「시골 선비 조남명」은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다. 그러나 연극적(theatrical)이다. 무대 전환이 다음 장면에 나올 인물들의 춤과 노래로 이루어지고 시조창과 택견, 망나니 춤 등 우리 전통의 볼거리, 들을 거리들이 적재적소에서 생경하지 않게 작품 속에 녹아있어 연극적이다. 또한 조남명으로 분한 조영진이 연기자 상을 수상하긴 했으나 무대를 메우는 배우들의 뛰어난 앙상블은 공동체 생활을 하는 연희단 거리패 만이 보여줄 수 있는 분위기이다. 함께 하는 배우들이 정말 행복하게 호흡을 맞추며 연기하는 모습은 관객에게도 행복감을 전해 준다. 무릇 예술작품은 즐거움과 가르침을 주어야 한다고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를 비롯한 많은 미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이 두 가지에서 그 어느 쪽도 「시골 선비 조남명」은 놓치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은 초연 이후 문예회관의 기획공연으로 재 공연되었고 지방 순회공연도 하고있다. 모쪼록 좋은 공연, 우리에게 재미와 가르침을 주는 이 작품을 많은 관객이 보고 자신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위에 언급했듯 이 작품은 필자에게 각별한 의미를 주어 필자가 독일어로 번역했다. 우리의 선비정신을, 아니 선비의 고뇌와 갈등을 외국인들에게 전할 기회가 있었으면 해서였다. 마침 이윤택이 내년 5월 베를린 연극제에 배우들을 지도하는 연기강사로 초청 받았다고 한다. 이 작품이 연극제에 모인 세계인들에게 소개될 수 있도록 추진 중이다. 지식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내용은 보편적이고, 극적 형상화의 기법은 한국적이니 '수출품'으로는 아주 적합한 것 같아 모든 일이 잘 추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김미혜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오스트리아 비인대학교 연극학과 졸업(Ph.D.)
      국제 극예술협회(ITI) 사무국장 역임
      한국 문화예술진흥원 전문위원 역임
  
     현재: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
           한국 연극평론가협회 이사
           한국 연극학회 부회장
           한국 연극교육학회 이사
           월간 <한국연극>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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