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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특집/조폭이 찾아간 곳, 그곳이 더 무섭다/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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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이 찾아간 곳, 그곳이 더 무섭다
강성률(영화평론가)
1. 욕망의 투시, 공간
주변부 삶에 나타난 공간의 불온성에 대한 청탁을 받고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수많은 특집 거리 가운데 왜 하필 공간의 '불온성'에 대한 특집을 마련했을까 하는 생각. 무슨 말인가 하니 불온성이라는 의미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 불온성이 부정적이기만 하다면, 그것을 굳이 특집으로 다룰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온성의 불온한 의미야 알고 있겠으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온당성과는 또 다른 의미의, 불온성의 긍정적인 측면을 발견하길 바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령 불온성은 삶의 주변부에 머물기에 삶의 다양성의 다른 이름이 될 수 있고, 주변부의 불온성은 또 끊임없이 중심부를 향해 '똥침'을 날리는, 그래서 중심부로 하여금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하기에 중심부의 에너지를 보충하는 대안 공간이 될 수도 있으며, 주변부의 막막한 공간에서 실망하고 절망하며 살아가는 주변부 삶은 역설적으로 중심부를 욕망하기에 욕망의 지형도로 볼 수도 있다. 불온성이 우리의 자화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을까.
그런데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영화라는 매체는 기본적으로 환상적이라는 점이다. 어두운 공간에서 스크린에 비치는 빛을 바라보며 꿈에 젖은 듯 영화를 보노라면 어느덧 관객은 자신의 입장은 잊어버린 채 영화 속 상황으로, 영화 속 인물로 빨려들어간다. 그래서 현실에서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영화를 통해 대리만족 하면서 스타가 구축한 환상을 자신도 '깊게' 체험한다. 어쩌면 영화는 진정한 백일몽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의 이러한 특성과 불온성을 결합하면 정말로 불온한 것과 만나게 된다. 현실 속에서는 자신이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을 영화라는 합법적인 공간에서는 체험할 수 있다. 그것은 상상의 나래이며 욕망의 실현이다.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현실에서는 도덕적이고 근엄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어두운, 욕망이 들먹이는 쾌락 원칙의 공간에서는 자신을 억눌렀던 법칙을 벗어나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왜곡되고 변형되었다 할지라도 이미지가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매력은 강렬하고, 그렇기에 거부하기 힘들다. 그러나 현실과 영화의 이런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그는 사회의 낙오자로 낙인 찍힌다. 퇴행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이런 경우이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관객은 자신의 욕망이 펼치는 판타지를 본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감독의 욕망이지만, 관객의 욕망이기도 하다. 같은 영화를 두고 다르게 해석하는 것도 결국 자신만의 판타지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판타지는 반드시 온당한 것일 수도 없고, 반드시 화려한 것일 수만도 없다. 불온한 것에서 자신의 쾌락 원칙을 표출할 수도 있고, 비루한 것에서 상상의 카니발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영화 속의 공간은 현실 속의 공간과 일대일 대응이 어렵다. 비록 현실 공간이더라도 그것을 카메라에 담는 순간 이미 판타지의 세계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판타지가 되어버린 공간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기에 관객들은 그 공간을 욕망하게 된다. 현실은 초라하지만, 영화 속의 공간은 묘한 아우라를 품어낸다. 그래서 다시 관객들의 욕망은 더 좋은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런 관객의 욕망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제작자들은 공간을 찾아서 순례를 시작한다. 이제 관객과 제작자가 합의한 욕망의 공간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곳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기도 하고, 시대를 반영하기도 한다. 영화 속의 불온한 공간이 카타르시스로 작용하고, 따라서 현실의 활력소가 되는 것은 그 공간이 비록 불온한 것을 담을지라도 그것 또한 인간 욕망을 표출하기 때문이며, 그런 욕망을 순간적으로라도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2. 진정 불온한 것은 무엇인가
최근 한국 영화에 대해 말이 많다. 그것은 주로 상업성에 관한 것이다. 몇 편의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했지만, 오히려 그런 흥행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일련의 조폭 코미디가 흥행함으로써 그런 영화가 조폭을 미화했다는 비판과, 조폭 영화의 흥행으로 인해 작품성 있는 다른 영화가 위축된다는 비판이 그것이다.1) 그러나 이런 비판은 사실 그리 정교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의 속성도 놓치고 있을 뿐더러 보다 중요한 문제, 즉,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유독 조폭 코미디를 본 이유에 대한 사회적 고찰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영화가 '대박'을 터뜨렸다는 것은 그 영화가 그만큼 많은 인물들의 욕망을 보여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많은 관객들이 그 영화가 그린 욕망을 보고 동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려진 욕망이 퇴행적이든 아니든 그것은 나중에 따질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작년과 올해 최고의 화제는 단연 조폭 영화이다. 2001년 한국영화 흥행 순위 10에서 조폭 영화가 무려 6편을 차지했을 정도이다.2) 도대체 왜 갑자기 조폭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왜 많은 한국 관객들은 조폭 영화를 봤을까? 참으로 흥미로운 문제이지만, 여기에서는 조폭 영화에 재현된 공간에 주목하기로 하자.
조폭 영화에 재현된 공간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절([달마야 놀자]), 가족([조폭 마누라]), 학교([두사부일체], [신라의 달밤])가 주된 공간이다.3) 여기에 2002년 들어 첫 흥행하고 있는 [라이터를 켜라]까지 합쳐보자. [라이터를 켜라]는 기차를 무대로 하지만, 기차에서 벌이는 싸움은 선거 때 일해준 대가를 받으려는 조폭과 국회의원의 싸움이 주된 것이라는 점에서 정치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조폭 영화에 나타난 공간적 특징은 조폭과 결코 어울리지 않는 곳이라는 점이다. 조폭인 마누라, 조폭과 절, 조폭과 고등학교, 조폭과 정치4)가 하나의 공간에서 같이 전개된다. 조폭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런 공간의 결합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어떤 상황과 맞지 않는 인물이 그 공간에 들어가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시츄에니션 코미디의 웃음 코드이며, 이때 웃음을 유발하는 가장 큰 무기는 조폭들의 무식함이다. 무슨 상황이라도 조폭식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통해 조폭들의 단순무식함을 풍자하는 것이다. 가령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새가 뭐냐는 질문에 조폭 마누라는 "짭새"라고 말하고, "메일 하냐"는 질문에 깡패는 "매일 하지요" 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다음 카페를 두고 우리 구역이냐고 묻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언어유희적 웃음 코드는 의미 없는 말장난으로 그칠 우려가 있지만, 적절하게 구사되면 캐릭터 설정도 하면서 풍자도 하는 다이얼로그 코미디의 코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일련의 조폭 코미디가 정말 무서운 것은 조폭의 생활을 풍자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들어간 공간의 맹점까지 조롱하고 비웃는다는 데 있다.
조폭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공간에서 그들은 싸움을 벌인다. 조폭들이 주로 하는 것이 싸움이기에 그리 놀라울 것은 없지만, 그 상대가 조폭과 맞설 상대가 아니기에 문제가(또는 웃음이) 발생한다. 소심한 공무원이 어느 날 조폭 부두목 마누라와 결혼한다. 이제부터 남편과 부인의 싸움이 시작된다([조폭 마누라]). 고요한 산사를 조폭이 접수한다. 이제 수행에 방해가 되는 스님들과 조폭 간의 싸움이 시작된다([달마야 놀자]). 승진을 위해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한 부두목이 고등학교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학교의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불량배를 피하려는 조목 부두목의 눈치가 시작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학교의 강압적 지배 구조이다. 이제 그 구조와 조폭의 싸움이 벌어진다([두사부일체]). 조폭 같은 선생에게 매일 당하는 학생들이 세련된 신사 같은 조폭에게 매력을 느낀다. 그런데 선생과 조폭은 동기동창이다. 이제 둘의 싸움이 시작된다([신라의 달밤]). 일해준 대가를 받으려는 조폭과 주지 않으려는 국회의원, 자신의 300원짜리 라이터를 찾으려는 백수와 주지 않으려는 조폭의 싸움이 전개된다([라이터를 켜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장르적으로 볼 때, 조폭의 싸움이라면 마땅히 액션이나 느와르가 되어야 하는데, 코미디라고 한다. 어찌된 일인가. 그것은 조폭과 대상들이 서로의 역할을 바꾸면서 발생하는 효과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조폭 코미디의 묘미가 있다. 좀더 설명해 보면, [조폭 마누라]는 한국에서 유유히 전해온 가부장 중심의 가족제도를 뒤집는다. 순진한 공무원5)인 남편(박상면)은 조폭 마누라(신은경)와 아무 것도 모른 채 결혼한다. 신혼 첫날 밤 그는 신부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한다. 신혼 여행 후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섹스는 물론이고 모든 생활에서도 주도권은 신부가 쥐고 있다. 자신의 의도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이쯤 되면 가부장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언니의 소망에 따라 조폭 마누라가 아기를 가질 결심을 했을 때 상황은 더욱 심해진다. 결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녀는 남편과 강제로 섹스한다. 여성이 당할 때의 포즈를 남편이 그대로 취한다. 가부장적 남성 권력의 상징인 가족의 권력 관계를 밑바닥에서부터 깨뜨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상당히 진보적인 페미니즘 영화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남성을 지배하는 여성의 권력이 남성성의 상징인 육체적 힘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그 힘으로 남성과 똑같은 방식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그 한계를 드러낸다.
[달마야 놀자]는 한국에서 가장 문제 많은 집단 가운데 하나인 종교를 건드린다. 부두목의 배신 때문에 쫓기던 재규(박신양) 일당은 심산유곡의 절6)로 잠입한다. 그곳을 접수한 그들은 노스님에게 허락을 받고(실은 협박해서) 그곳에 머문다. 그러나 절은 스님들의 도량이다.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 이제 쫓으려는 스님들과 남으려는 깡패들의 싸움이 진행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청명(정진영) 스님은 재규보다 무술이 더 뛰어나며, 대봉(이문식) 스님은 불곰의 해병대 선배라는 점이다. 그들은 오히려 깡패보다 더 깡패 같다. 그래서 스님들은 힘으로 조폭을 눌러 조폭들도 스님 같은 규칙적인 생활을 하도록 한다. 스님들의 싸움 솜씨는 마지막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계의 폭력사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도량인 절과 폭력은 분명 별개의 문제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TV 뉴스에도 등장할 만큼, 조폭까지 동원한 종파의 주도권 싸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조폭들과의 싸움을 통해 영화 속에 재현했다고 할 수 있지만, 노스님의 입적, 재규의 깨달음(?), 그리고 장르의 규칙에 따라 처리함으로써 그런 문제제기는 묻혀졌다. 상대적으로 다른 조폭 영화의 대상에 비해 [달마야 놀자]에 그려진 불교의 모습은 그리 부정적이지도 않고 직접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닫혀진 종교계의 문제와 부딪쳤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두사부일체]의 배경은 학교7)이다. 승진을 위해 고등학교에 다시 들어간 두식(정진호)은 학교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조폭 부두목이 학교 짱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학교 폭력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두식이 들어간 학교가 실은 학원 비리의 '결정판'이라는 점이다. 교장은 선생을 성추행하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선생은 과감히 해직시킨다. 그뿐인가. 학생들에게는 수시로 돈을 걷고, 부자 딸의 성적을 조작까지 하며, 심지어 여학생을 때려 입원시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무마하기 위해 정치인에게 줄을 댄다. [신라의 달밤]은 또 어떤가. 선생이 최기동(차승원)은 말이 선생이지 실상은 깡패이고, 이에 반해 경주로 사업 확장차(?) 내려온 박영준(이성재)은 깔끔한 선생 같은 깡패이다. 학생들은 깡패 같은 선생보다 선생 같은 깡패를 더 따르며, 심지어 자신들을 받아 달라고까지 한다. 선생들의 폭력은 [친구]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학생을 때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군대의 그것이다. 하긴 군복 같은 교복을 입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각 영화의 학교는 사회의 그 어떤 분야보다 폭력이 횡행하는 곳이며, 그런 폭력은 뿌리 깊이 내려있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도 폭력이 있고, 선생과 학생 사이에서도 있고, 선생들 사이에서도 있다.
[라이터를 켜라]의 주무대는 기차이다. 백수 허봉구(김승우)는 화장실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라이터를 가지고 있는 건달 양철곤(차승원)을 따라간다. 그런데 양철곤은 선거 때 도와준 대가를 받기 위해 국회의원(박영규)이 탄 기차에 탄다. 이제 기차 안에서는 허봉구와 양철곤, 양철곤과 국회의원 간의 자기 것을 찾으려는 싸움이 시작된다. 허봉구는 양철곤에게서 라이터를 찾으려 하고, 양철곤은 국회의원에게서 일한 대가를 받으려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탐탁치 않다. 조폭 두목이 일개 백수에게 라이터를 줄 리 만무하고, 국회의원이 조폭 두목에게 쉽게 돈을 줄 리 없다. 결국 가장 손쉬운 방법인 폭력이 동원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국회의원의 모습이다. 그는 선거 때 조폭의 전적인 지원을 받았으면서도 당선되고 나서는 모른 척한다. 대가를 요구하며 기차에서 부딪힌 조폭에게 절대 줄 수 없다고 하다가 기차 안의 승객과 더불어 모두 죽을 처지에 처한다. 유권자를 위해 일하겠다는 입에 발린 소리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공약(空約)인지 영화 곳곳에서 드러난다. 혹독한 고문, 민주화 운동 운운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작금의 정치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문제 하나와 직면하게 된다. 조폭 코미디의 공간은 왜 하필 가족, 학교, 사찰, 정치일까? 다시 말하자면, 왜 조폭들은 다른 많은 공간을 두고 왜 하필 가족, 학교, 사찰, 정치의 공간에 들어가 그들의 폭력과 맞서 싸우는가?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곳은 한국 사회의 모순이 결집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며, 그곳은 눈에 보이는 육체적 폭력이 아니라 뿌리 깊은 구조적 폭력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모순이 있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가 이미 거론한 적이 있다. 그때의 생각보다 별로 새로운 것이 없기에, 좀 길더라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독자들은 우리 사회가 무엇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두말할 것 없이 나는 계급과 힘의 논리에 의해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혹시 아니라고 하고 싶은가. 나도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바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계급과 힘의 논리의 정점에는 가부장적 질서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군대, 회사, 학계, 정치계, 종교계 어느 한 곳 이런 방식에서 벗어나는 곳이 없다. 정점에 있는 한 사람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사회, 그의 말을 거절할 수 없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 만약 보스(그가 총사령관이든, 재벌 회장이든, 지도 교수든, 총재든, 교주이든) 눈에 벗어나면 사회적 매장을 각오해야 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사회이다. 이런 가부장적 수직 통합의 질서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곳이 어디일까. 조직폭력배 아닌가. 단지 차이가 있다면, 사회는 폭력이 구조화되어서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 조폭은 폭력을 전면에 부각시킨다는 것 정도이다.
만약 이 말을 받아들인다면 조폭 영화는 한국의 전반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영화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왜 조폭 영화만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도 조폭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일 뿐인데. 혹시 보여주기 싫은 자신의 모습을 타자를 통해 확인했을 때의 난처함 때문은 아닐까. 개봉 예정인 [두사부일체]를 보자. 학생 위에 선생, 선생 위에 이사장, 이사장 위에 정치가가 먹이사슬처럼 얽혀있다. 그나마 조폭은 형님을 배반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는 쉽게 배반할 수도 없는 탄탄한 구조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8)
그런데 이런 사실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조폭영화에 재현된 공간이 루이 알튀세르가 그토록 강조했던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 이하 ISA)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국가 기구에는 경찰이나 군대처럼 실질적인 억압을 행하는 억압적 국가 기구(Repressive State Apparatus)와, 사적 공간인 것처럼 가장하지만 사회 재생산에 교묘하게 기여하는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가 있다. 특히 알튀세르가 중시한 것은 ISA인데, 이것은 공공연하게, 그렇지만 공식적으로 지배 이데올로기를 교육시키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이런 ISA로는 "종교 ISA(여러 가지 교회 체계), 교육 ISA(여러 가지 공사립 학교체계), 가족 ISA, 법 ISA, 정치 ISA(여러 가지 정당을 포함한 정치체계), 노동조합 ISA, 커뮤니케이션 ISA(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 문화 ISA(문학, 예술, 스포츠 등)"9) 등이 있다.10)
이렇게 조폭 영화에 재현된 ISA는 조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조폭을 능가하는 폭력을 구조적으로 저지르는 공간이다. 물론 이런 논의를 두고 조폭 영화를 만든 제작자나 감독이 단순히 웃기기 위해 만들었을 뿐,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그래서 지나친 과민반응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것이 더 무섭다. 의식하지 않았어도 드러나는 것, 그것은 뿌리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증거에 다름아니다. 조폭 코미디 속의 공간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생활과 너무나 가까워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던 일상적 공간이 실은 우리 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안고 있던 공간이었다.
조폭 영화에 드러난 공간은 가부장적 수직 구조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일인 위주의 수직적 구조가 폭력을 행하는 공간이며, 그런 폭력이 구조화된 공간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가 대부분이 이런 구조 속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조폭 영화에 재현된 ISA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으로서 상징이었는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ISA에서 교육을 받고 휴식을 취하고 위안을 받는 사람들은 무엇을 배울 것이며, 무슨 위안을 받을 것인가. 더 큰 문제는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이들은 사회가 계급과 폭력의 구조에 의해서 지탱된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실망할까, 또는 그런 구조에 재빨리 익숙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자위하면서 자신도 구조화된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참으로 끔찍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가부장적 수직 구조를 재상산하는 ISA는 얼마나 불온한가. 그런데 [라이터를 켜라]를 보면서 필자는 그런 불온성의 구조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조폭의 폭력에 대응하려는 국회의원이 억압적 국가 기구인 경찰력을 마음대로 동원하며, 이걸 취재하는 기자는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취재한다. 정치 ISA와 커뮤니케이션 ISA, 그리고 억압적 국가 기구의 결합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결합은 계속될 것이다, 쭉 ―.
이렇게 써놓고 보니 필자가 조폭 영화에 드러난 폭력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은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는 것 같다. 사실 필자는 작년과 올해 조폭 영화에 나타난 폭력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위험한 수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방 범죄의 문제도 영화마다 등급이 매겨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극장주를 비롯한 유통의 문제라고 본다. 필자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은 조폭을 우리가 너무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환경에 관한 문제이다. 분명하게도 조폭은 사회의 악이다. 필요악도 아니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없어져야 한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사고를 '폭력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사고가 그렇기에 행동을 폭력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폭 코미디를 옹호라는 것은 조폭의 문제보다 조폭이 들어가서 부딪치는 ISA의 문제가 더욱 심각하기 때문이다. 조폭은 순간적 폭력만 휘두르지만, ISA는 구조적 폭력을 휘두른다. 그것도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렇게 한다. 특히 가부장적 근대화를 이룩한 우리에게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3. 건강한 불온성을 꿈꾸며
영화에 나타난 주변부 공간의 불온성은 한마디로 단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주변부라는 정의와 불온성이라는 정의가 생각보다 쉽게 단정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먼저 주변부라는 용어를 보면 이는 대단히 상대적인 개념이다. 중심부가 전제가 되어야 주변부가 성립할 수 있지만, 보는 이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불온성이라는 개념도 온당성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 역시 보는 이에 따라서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중심부와 주변부가 동시에 존재하고, 온당성과 불온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이라고 필자가 생각한 조폭 영화의 공간들을 살펴보았다. 그곳은 가정, 종교, 사찰, 학교라는 공간으로, 알튀세르의 ISA의 공간이기도 했다.
한국영화의 주변부 공간으로는 술집이나 여관이 자주 등장한다. 이곳은 한국영화의 역사와 함께할 정도로 그 역사도 오래되었지만, 그러나 그곳은 그만큼 식상한 공간이다.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공간에서 등장하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곳에서 하는 행위들, 즉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하는 행동이 불온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너무나 식상한 것이다. 공간의 불온성은 공간의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문제이다. 어떤 공간을 다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관과 술집은 내용이 없다.
불온성은 중심과 주변을 끊임없이 넘나든다. 주변부에 있지만 중심을 욕망하기 때문이며, 중심이 있는 것은 더욱 중심을 향하기 때문이다. 이 모순이 불온성의 존재조건이다. 주류의 불온성이 주변부를 향하면서 그들을 통제하려고 할 때 그것은 무엇보다 무섭다. 그야말로 불온한 불온성이다. 불온성이 단순한 불온성이 아니라 주류의 독단적이고 경직된 도덕성에 일침을 가하고 그것을 보완해줄 때 건강한 불온성이 된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건강한 불온성을 기대한다. 너무 불온한 생각인가.
<주>
1) 조폭 영화의 폭력(미화) 문제, 모방범죄 문제, 한국영화와의 관련성 등에 대한 비판에 대해 필자는 비판한 바 있다. 졸고, [조폭 영화는 위험하다굽쇼?], {민족예술} 78호.
2) 6편의 조폭 영화를 제외한 다른 영화에서도 폭력은 수시로 사용되었다. 통계를 보면, 폭력이 없는 순수한 멜로드라마는 [번지점프를 하다] 단 한 편뿐이다. 2002년 상반기 한국영화 흥행작 역시 [집으로…]를 제외하면 대부분 폭력이 들어간 영화들이다([공공의 적], [나쁜 남자], [2009 로스트 메로리즈] 등). 폭력과 한국영화와의 관계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3) 주된 공간은 아니지만, 주인공들의 학창 시절을 보여주는 배경으로 학교가 등장하는 영화로는 [친구], [네 발가락] 등이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학교는, 조폭들의 생활을 그린 영화라서 그런지, 거의 조폭과 다를 바 없다. 학생과 학생은 관계는 뺏고 뺏기는 또는 때리고 맞는 관계가 자주 등장한다.
4) 조폭과 정치는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둘은 서로 어울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뿌리 깊은 깡패 동원 정치의 맥락에서 보면 이런 결합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할리우드의 마피아 영화를 보더라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정치와 깡패는 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 같다.
5) [조폭 마누라]에서 남편의 직업이 공무원이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한국에서 공무원은 자발적으로 일하는 집단이라기보다는 위에서 시키는 것을 하는 집단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성격은 가부장제의 성격과 매우 밀접하며, 또 가부장적 근대화를 추진했던 한국과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두 집단의 유착이 항상 뉴스거리가 되는 현실 아닌가. 이런 공무원이 조폭 마누라에게 꼼짝 못하니 상징적일 수밖에.
6) 그런데 교회가 아니고 왜 하필 절일까? 한적한 곳에 모여 숙식을 같이 하면서 수행한다는 장소의 이점 때문일 것이다. 그래야 장소를 벗어나지 않고 대결할 수 있을 테니까. 재미있는 것은 알튀세르가 말했듯이 과거 막강함 힘을 발휘했던 서구의 교회가 오늘날 그 힘을 잃었듯이, 서구의 교회와 비슷한 역사를 지니는 게 한국의 절이라는 사실이다.
7) 최근 한국영화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공간 가운데 하나는 학교이다. 학교가 이렇게 등장하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런 이유의 대부분은 누구나 의무적으로 다녀야 하는 공간이라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 의무적으로 다녀야 했기에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이탈을 꿈꿀 수밖에 없고(실은 그렇게 행동하고), 적응하는 인물들도 너무나 타이트한 생활 때문에 그 공간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러기에 괴로운 추억의 공간으로 남기 십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무적으로 다녀야 했기에 그 공간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래서 훗날 회상해 보면 아련한 추억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학교는 분명 주변부가 아닌 중심부이지만, 영화에서는 대개 주변부로 그려진다.
최근 영화에 나타난 학교를 대략적으로 분류하자면, 첫째,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폭력의 현장이나 교권의 투쟁장소로서 그려지고 있는데, 이런 영화로는 [화산고], [두사부일체], [신라의 달밤] 등이 있다. 둘째로는 조폭들의 성장 과정에서 잠시 등장하는 공간인데, 이 공간은 사실 첫째 공간처럼 폭력이 횡행하는 곳이다. [친구], [네 발가락]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아련한 추억의 장소로 회상하는 공간인데,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들 수 있다. 넷째, 정상적인 학교 생활과는 아예 거리를 둔 '무늬만 학생'이 등장하는 영화인데, [해적, 디스코왕 되다], [일단 뛰어]를 들 수 있다. 다섯째, 학교에서 희망을 버리고 학원을 전전하거나 아예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인데, [버스, 정류장], [눈물] 등을 들 수 있다.
8) 졸고, [조폭 영화는 위험하다굽쇼?], {민족예술 78호}, pp.16-17.
9) 루이 알튀세르, 이진수 역, {레닌과 철학}(백의, 1991), p.140.
10) 조폭 영화에 드러난 공간이 알튀세르의 ISA와 같다는 점은 김경욱이 지적한 바 있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ISA의 문제점을 별로 길지 않게 논한 다음 논의의 많은 부분을 이런 영화들이 조폭을 미화했다는 문제에 할애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날카로운 지적이 왜 엉뚱한 곳으로 빠져버리는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김경욱, {블록버스터의 환상, 한국 영화의 나르시시즘}(책세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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