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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젊은시인조명/열정 외 9편/이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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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젊은시인조명/열정 외 9편/이기성
열 정 외 9편
닳아빠진 구두 밑바닥에 쩔꺽쩔꺽 들러붙는 생이 식당 앞까지 쫓아온다. 주먹만한 돌멩이를 집어던져도 킁킁대며 질기게 따라와 누런 혓바닥으로 딱딱한 발꿈치를 핥는다. 나, 누추한 신발 한 짝 잃어버린 적 없고 축축한 불륜의 문장 한 줄 엿본 적 없어도 텅 빈 구내식당 비릿한 공기 속에서 한 그릇 밥에 코를 박고 조금씩 파먹을 때 문득, 억울하다. 움푹한 그릇에 묵묵히 쌓인 어둠은 목 언저리 검은 주름으로 패이고. 유원지에 벗어둔 신발을 두 손에 쥐고 하루는 눈 퉁퉁 붓게 울고 하루는 굶어죽는 것에 대해서 열심히 생각하는 동안, 해는 지고 생은 거듭 누추해지고 혈세(血稅)의 계절은 닥쳐온다. 끈끈한 식탁에 엎드린 등뒤에서 검푸른 제복을 입은 관리들이 컹컹 짖으며 문을 두드리고 있다.
밥·2
늙은 여자가 밥상 앞에서 징징 울고 있다, 누대(累代)의 찌그러진 밥상 앞에 나를 내려놓고. 검은 무쇠솥 안에선 오래 씹어도 삼켜지지 않는 하얀 밥이 익어간다. 밥상 위에 혓바닥처럼 늘어진 노을,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던 아이들은 온몸에 검은 폭탄을 칭칭 감고 저녁의 밥상 위로 몸을 던진다. 덜 익은 별들 폭죽처럼 터져 발등으로 떨어지고 나는 살아서 오늘도 한 술의 딱딱한 밥을 씹는다. 뒤늦게 떨어진 별 빈 밥그릇에 쩔렁쩔렁 부딪칠 때 완강한 기둥만 남은 밥상은 허공으로 떠오르고 저 거대한 기둥에 나를 단단히 용접한 늙은 여자여, 오늘도 나는 불멸의 밥을 씹고 또 씹어 늙은 여자의 거대한 입 속에 넣어준다.
누에가 노래한다
그 사내는 비린 구름을 너무 오래 이고 온 것 같았다. 늘어진 발바닥 땅에 끈적끈적 들러붙는 잠에서 깨면 온몸에 수천 개 짧은 발들 솜털처럼 흔들린다. 세상을 소요하는 머리 흰 늙은이들은 혀를 차고, 너무 일찍 방생된 어린 자라들 딱딱한 얼굴을 뒤집어쓰고 진창에서 뒹굴 때, 말하자면 뜬구름 같은 걸 하나 머리에 이고서 사내가 어기적어기적 저녁노을 속으로 기어들어간 뒤 얘기는 끝났어야 했다.
그러나 흔하디흔한 얘기의 끝자락을 실처럼 입에 물고 사내는 세상의 골목을 누빈다. 진창바닥 시장을 돌며 구름의 노래방이 된다. 누가 귀를 기울일 것인가마는 시장에서 밥 빌어먹는 노인들 빈 밥그릇 위에 번지는 구름. 새하얀 머리카락 같은 비단실을 친친 감고 사내가 검은 아스팔트 위에 배를 대고 기어가는데, 그가 흘리고 간 흔적마다 수천 개의 발들이 필사적으로 구름의 노래를 운반한다. 구정물 진창에 훌러덩 뒤집혀진 자라의 눈이 벌겋게 물드는 저녁, 비린 구름 하나가 저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휴 일
얇은 공기가 한꺼풀씩 덮이며, 그의 살점을 조금씩 떼어먹고 하늘로 올라간다. 공터에서 공을 차는 사람들, 생선트럭의 비린내 확성기 웅웅거리며 비좁은 방안에 몰려와 뒤섞인다. 사내는 웅크리고 자고 있다. 눈가의 주름과 자잘한 숨구멍들 천천히 열리고 닫히며, 손가락을 빨면서 꿈을 꾸는가, 웃다가 찡그리다가 천천히 낡아가는 대지(大地)의 얼굴처럼, 니코틴에 찌든 사내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쪼그라들고 있다. 창밖에선 허공을 찌르는 한낮의 환호성, 뻥뻥 차올린 흰 공들 획획 솟구친다. 켜놓은 텔레비전에선 쩍 벌어진 뱀의 입 속으로 어린 짐승이 소리도 없이 빨려들어가고, 소용돌이가 가라앉자 강은 다시 조용해진다. 사내의 이마에 한 줄 깊은 금을 그어놓고, 공기의 입술들이 사내의 딱딱한 표정을 조금씩 베어물고 있다. 생선트럭은 구정물을 줄줄 흘리며 떠나고 그의 입 속에 갇혀있던 냄새가 조금씩 새어나간다. 사내의 방을 삼킨 흰 뱀은 허공 속으로 스르르 사라진다.
소 풍
어두운 숲속 암벽에 새겨진 희미한 석불(石佛)
앞에 놓인 스텐레스 주발에선 희푸른 향이 피어오르고
시커먼 두꺼비 한 마리 석불 밑 축축한 바위 틈 웅크리고 있다.
저편 움푹한 둥치에서 늙은 여자들
둘러앉아 찬밥을 먹고 있다
꼬불거리는 짧은 파마머리
젓갈 냄새 진득하게 밴 겨드랑이
웅얼웅얼 밥그릇에 얼굴을 박고
늙은 석불의 코를 조금씩 뜯어먹는 여자들
시커먼 두꺼비 멍하게 흰밥을 쳐다본다
마 을
나의 마을 둥그런 지평선엔 누런 해가 매달려 있고,
집들과 밀밭 사이의 좁고 휘어진 길 검은 개는 노인을 끌고 사라졌다.
노인은 닳아빠진 금이빨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사소한 교전은 정오에 있었다.
누군가 소각장의 첨탑에 올라갔다.
수백만 볼트의 전기가 그의 발바닥을 통과할 때
TV 앞에 몰려있던 사람들의 머리통도 고독한 공처럼 함께 튀어올랐지만,
이빨 사이에 박혀있던 까만 수박씨 탄피처럼 튀어나오고는
모든 게 다시 제자리에 얹혀졌지만,
화면은 지지직지지직 교전 중이었다.
초록의 풀밭에는 열두 개의 다리가 거적을 뒤집어쓰고 나란히 누워있었다.
어린 군인들은 묵묵히 지나갔고
농부들이 찌그러진 달을 굴리며 지나갔다.
아이들은 밀보다 빨리 자랄 것이다.
이발소에서는 머리카락 뭉치들이 누런 부대에 넣어 팔려간다.
아직도 사내의 두 발은 피뢰침에 매달려 있다.
가끔씩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가 바람에 펄럭거렸으나
슬픔은 아직 널어 말릴 만하고
마을 사람들은 오렌지색 가등을 켜놓은 채
잠이 든다. 누군가 바닥에 떨어진 리모컨을 슬그머니 누른다.
발 밑에 뻥 뚫리는 구멍 불빛들 순식간에 휘돌아 빠져나가고
지금, 마을은 검은 어항처럼 고요하다.
열 쇠
당신은 열쇠를 깎는 사람이다. 뭉툭하게 잘린 세 개의 손가락이 협곡처럼 어두운 세계의 귀퉁이를 단호하게 벼려낼 때, 이를테면 세계는 열린 문과 열리지 않는 문, 어떤 섬광과 마찰의 틈새로 발목을 슬그머니 끌어당기는 구멍투성이 문장이다. 그래 검은 대리석 사원처럼 견고한 기둥들 이마를 맞대고 선 길고 긴 골목에서 당신도 한번쯤은 정오의 길 잃은 아이처럼 두리번거리기도 했을 것이니. 눈앞에서 쾅 닫히는 문 쨍쨍한 햇빛은 쏟아붓고 당신은 무엇을 들었나. 영원히 들어맞지 않는 틀니처럼 무수히 덜그덕거리는 마찰음 혹은 닳아빠진 하악골을 새어나오는 킥킥대거나 컥컥대는 검은 음절들, 때로 깊숙한 목구멍으로 훌러덩 빨려들어가던 물렁한 혀, 낄낄대는 혓바닥이 감춘 딱딱한 열쇠 혹은 세 개의 손가락. 검은 구멍 속으로 프레스처럼 날선 언어를 끼워넣을 때 당신은 어떤 무덤을 열고 있었던 것인지. 수천 톤의 힘으로 미친 듯 당신을 끌어당기는 바람, 그것만이 유일한 증언이다. 대낮의 비좁고 어두운 통로를 달려나오는 아이의 그림자처럼 질긴 탄식을 꼭꼭 걸어 잠그고 있는 당신은,
복 수
소매 사이로 무언가 늘어져 있다, 무엇을 끌어당기고 싶은 듯. 끈끈하게 흘러내리는 안개 속에서 지상의 붉은 주점들은 흐린 등을 내걸었다. 골목을 가득 채운 뿌연 누린내. 헛기침을 하며 모퉁이를 돌 때 어둠 속에서 그를 획, 끌어당긴다. 서늘하고 날카롭고 재빠른 그것. 순식간에 무릎을 꺾는 사내, 허옇게 굳은 손이 흐릿한 허공을 잠깐 움켜쥐었던 것도 같다. 애들이 목매달아놓은 고양이 검게 흔들거리고 주점에서 흘러나온 탁한 노래는 길바닥에 흥건하다. 먼 길을 흘러온 피 냄새 목덜미를 적시며 흰 셔츠에 툭툭 떨어진다. 사내는 웅덩이처럼 패인 가슴의 구멍 흰 수건을 틀어막고 서류 가방을 주워들고는 천천히 골목을 벗어난다. 먼 곳에서 막 돌아온 듯 벌써 넥타이를 고쳐 매고 있다. 날카롭게 도려진 심장이 나무상자 속에서 뻣뻣하게 굳어갈 때, 앙상한 소매 사이로 서늘한 무언가 삐죽, 튀어나와 있다.
제 야
누가 피리를 불며 이 고요한 밤을 지키고 있나, 붉고 푸른 전구꽃 점점등(燈) 달고선 나무들 사이 은회색 물고기들 쓰러져 있네. 트럭이 줄지어 도시를 빠져나가고 빌딩 불꺼진 창문에서 미끈거리는 검은 물이 흘러내린다. 나무들 젖어 떠있는 진창에 허연 배를 대고 누운 물고기들. 덮어쓴 신문지 아래 허옇게 굳은 발가락이 삐죽 드러나고 둥그렇게 떠진 눈, 겨드랑이에서 물컹물컹 쏟아지는 땀과 오줌의 냄새. 얼어붙은 목구멍 타고 흘러나온 입김 다 녹아버리고 굴욕의 비늘은 흩어지네. 검은 장화를 신은 사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은회색 물고기들을 트럭에 던져 올린다. 지퍼가 채워지기 전 깊은 목구멍이 마지막으로 뱉어내는 피리 소리, 붉고 푸른 전구꽃 흐린 허공에 번질 때 검은 휘장을 친 트럭은 질척이는 도시를 조용히 빠져나가고, 누가 피리를 불며 이렇게 미끄러운 밤을 지키고 있나.
장미원
아주 오래 전 이곳은 장미의 정원이 있었던 곳. 진홍빛 꽃잎 한 장 들추고 그리로 들어간 여자애는 아직 돌아오지 않는다. 등(燈)을 켜자 하루살이떼가 새까맣게 눈으로 몰려들고 삽자루를 쥔 사내들은 코를 막고 달아났다. 퍼런 입술 검은 흙을 털어내고 치맛자락을 들추자 너무도 오래 전의 냄새가 천천히 흘러나온다. 까맣게 탄 혓바닥을 한 장 뜯어내고 여자애는 허공의 그네 위에서 발을 구른다. 굳어버린 눈꺼풀 속에 숨었던 별들이 흰나비떼처럼 쏟아지고 아득아득 씹히는 새파란 별들, 여자애는 자꾸 발을 구른다. 낡은 주름 스커트가 활짝 펼쳐지며 펄럭이고 베어문 이빨 자국 아직 남아 있는 별들 휙휙 바람소리를 내며 찢어진 꽃잎 속으로 들어간다. 오래 전 이곳은 장미의 정원, 꽃잎의 그늘 겹겹마다 사라진 아이들이 숨어있는 곳.
이기성
1966 서울 출생
1998 ≪문학과 사회≫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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