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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신작시/백엽상이 있는 시간 외 1편/이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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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엽상이 있는 시간 외 1편
이순현
시설은 철책으로 거대하게 잠겨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백엽상, 창밖에 있다. 희고 딱딱한 목질의 살과 뼈로 한 지평을 오래오래 가고 있는 백엽상, 무화과처럼 이목구비까지 모두 안으로 감추고 있어, 흰빛조차 단추처럼 딱딱하다. 갈비뼈 사이로 코끼리의 코처럼 긴 호스를 사방으로 내밀고 어둠과 빛을 빨아들인다. 빛과 어둠이 쓰는 문장을 풀어내며 이곳의 일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한다. 그림자가 흔들리지 않으므로, 생물도감 어디에도 등재되지 못한 채 시간을 밟고 가는 길, 옆에 서 있는 무화과의 깊은 그늘을 통과해야 한다. 무화과 열매는 중심의 텅 빔을 향해 털이 섬세하게 돋아있다. 백엽상의 그것이 그 안에 다 돋아난 듯, 분홍 빛깔이 농익을수록 백엽상 흰 빛의 순도가 높아진다.
백엽상이 잘 보이는, 남쪽에 앉아 점심을 먹는 그는 시설에 종사할수록 바깥에 점점 더 깊이 중독되어 간다. 무화과처럼 말의 샘을 분홍으로 감추고 딱딱한 등을 내보인다. 무엇이든 처음은 점액질이다. 입안에 침이 많이 고인다는 건 말의 샘, 수맥이 풍부함을 반증한다. 점액질로 바뀌어갈 해파리냉채, 비름나물, 장조림, 차수수밥, 북어국, 식판에 각각 담겨 있다. 식판이 비어가고, 그의 등으로 자막이 지나간다. 전광 다이오드들의 on, off의 행렬이 사막을 가로지르는 코끼리처럼 그를 통과해 나간다. 말들이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환풍기는 쉬지 않고 공기를 퍼낸다. 소용돌이치는 흰 빛 파장들 사이로, 그의 말, 꿈, 기억들이 분홍빛으로 들킨다.
어두운 벤치에 앉아서 밝은 쪽으로 본 풍경
……너 녀 노 뇨 누 ……
다 댜 더 뎌 도 ……
연극동아리 연습실 밖으로 나와
목청이 터져라 또박또박 단음으로 울부짖는다
유난히 잔혹극을 좋아하는 그는
대학 캠퍼스의 잔디밭에 엉거주춤 서서
땅 저 아래 깊은 소리를 뽑아 올려
몸 가장 열린 데로 뿜어낸다
……셔 소 쇼 수 슈 스 시
……여 오 요 우……
가로등은 나무 몇 그루와 벤치를 길어 올리고
나무는 바람과 안개를 길어 올리고
날벌레들은 허공에서 요요함을 걸러내고
밤 열시를 넘긴
향기와 소리와 빛은 축축하게 젖어들고
…………처 쳐 초 쵸…………
이동해 가는 모음과 모음의 틈으로
달 그림자는 소리 없이
시속 수천 킬로로 질주하고
한번도 태양을 본 적이 없는 밤 열시 이십삼분
일초 이초 삼초……가
긴 옷자락으로 발걸음의 흔적을 지우며
나무 속으로,
안개 속으로,
요요함 속으로,
……스며들고
……효 후 휴 흐 히
가 갸 거 겨 고……
단음들이 공룡처럼 몸을 길게 늘이고
어둠의 목덜미를 물어뜯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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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현
·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내 몸이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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