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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신작시/박쥐란 외 1편/유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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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란 외 1편
유종인
콘크리트 바오밥나무 같은 아파트에서 나는 옛집을 떠올렸다 하얀 고드름이 허공의 무처럼 자라나던 날림 집, 겨울은 심장병에 걸린 시궁쥐들과 속이 빈 무를 나눠 먹으며 살았다 뜨거운 냄비에 봉황의 무늬가 오그라든 플라스틱 밥상에선 겨울 햇살도 한 장의 파래김처럼 눈길로 집어 먹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나무 창틀로는 먹좀벌들이 여인숙처럼 드나들었다 나는 그늘로만 옮겨다니는 내 영혼의 무늬에 돋을새김의 날들을 기다렸으나 먼지만이 눈치껏 내 그림자를 피해 쌓여갔다 자꾸 오그라드는 내 마음인데 그림자는 몸보다 긴 혀로 나를 끌고 다녔다 희망이 있다면 그건 끝없이 날 오해하여 갈 날들이었다
여자도 없이 수많은 아이들이 내 마음의 이파리 뒷면에 열매처럼 매달렸다 소리없이 시들어갔다 여름날 어두워지는 무덤가에서 나는 커다란 왕사마귀 한 마리와 활극(活劇)을 벌이다 지쳐 돌아왔다 누구의 무덤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동네 개들은 낯선 눈빛으로 내 안에 든 어둠을 짖었다 내 뿌리는 곧 날개와 같아 습한 허공에도 묻어두었다 꺼내어 펄럭였다 간과 쓸개가 아닌 간음(姦淫)과 정조(貞操) 사이에도 꽃은 피리라 끝없이 뻗는 벼랑 같은 나무 위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날아오르는 중에도 젖 먹던 힘이 뿌리를 허공에 서려두었다
귀
아이가 머리를 꾸벅거린다
자전거를 세우고
대로변 작은 공원 벤치에 눕힌다
낮잠이 찾아온 거다
순간 쓰르라미 소리가 쏟아진다
4차선 아스팔트엔
쌩쌩 내달리는 레미콘 트럭들
더운 공기의 뺨을 후려치며 달아난다
잠든 아이의 두 귀가
쓰르라미 소리와 덤프트럭 스치는 소리를
나눠 갖는다 아니
나눠 먹다가 귀가 막힌다
어느 것이 이명(異鳴)인지
어느 것이 자연(自然)인지
아이가 돌아눕는 쪽, 느티나무 그늘이 더 짙다
똥 싼 기저귀를 가는 동안
참 먼 길을 달려온 곡식들의
소리를 누런 똥냄새로 맡아본다
처음, 소리의 푸른 잎사귀가 서걱대던 곳에
귀를 맡겨두었다고, 비듬이나 매달고 사는
머리카락 잎사귀를 뒤로 넘긴다
유종인
·1968년 인천 출생
·1996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아껴 먹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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