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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신작시/천벌의 옷 외 1편/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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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벌의 옷 외 1편
유홍준
저 유리창 너머, 풀린 동공
귓구멍이 꽉 막힌 여자가 멍하니 서 있다
유리창 밖 멀고 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유리 속의 여자를 부르기 위해
누구는 구부린 손마디로 유리벽을 두드리고
누구는 유리벽을 향해 수화를 해야 한다지만,
저 유리 속의 여자
평생 한 곳만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있다
저 유리 밖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만
저 여자 유리 밖 세상 알지 못하고
유리 속 여자 들여다보며 살지만 우리
저 유리 속 여자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유리 속의 여자에게
천 벌의 옷을 입혔다 벗겼다 또 입히는 것
유리 속의 여자가 입었던 천 벌의 옷을 사서 입는 것
천 벌의 옷이 천벌의 옷이란 걸
깨닫는 자만이 유리 속의 여자를 불러낼 수 있을까
저 유리 속의 여자를 아내로 맞은 사내가
오래, 오래오래, 할로겐 불빛 켜지는 유리벽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
유리관 속의 시간
황금당에 가서
차가운 시간의 이마 반짝이는
시계의 진열을 들여다본다
물과 햇빛이 없는
유리관 속에서도 시간은
저렇게 죽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
생고무보다 질기고
말고기보다 더 질긴 것이 저 진열장 속의 시간이다
보라, 모이를 쪼는 닭의 부리처럼
유리관 속의 시간을 쪼며 돌아가는
초침(秒針)들
저 황금당 곱사등이 주인은
죽지 않는 시간을 팔아
제 불구가 낳은 가족을 거뜬히 먹여 살린다
유홍준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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