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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신작소설/기억의 집/양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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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소설
기억의 집
양영아
고기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붉고 얇은 살덩이가 희멀건 국위에 둥실 떠 있었다는 것 밖에. 기름이 많지 않은 국물은 아무런 양념이나 건더기 없이 담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고급 음식점에서 먹는 징기스칸의 조리법 같기도 하다. 야채 따로 고기 따로 국물에서 건져 먹는 징기스칸 따위를 먹어 본 적 없는 그녀였다. 아마도 조리법을 제대로 몰랐으리라. 하긴 그 고기를 어떻게 먹어야 한다는 조리법을 알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는 석유 곤로 위 솥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덮어 쓴 채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을 잠시 멀뚱이 바라보며 서 있다.
먹어 볼래? 나지막하게 속삭이듯 묻는 그녀의 음성에 주술 걸린 것처럼 나는 부엌으로 들어가 곤로 옆에 쪼그리고 앉는다. 고기의 연한 살점을 소금에 찍어 입 안에 넣어 주는 그녀는 여느 때와 달리 웃음을 띄고 있다. 그 모습이 생소해서 맛은 느끼지도 못한 채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나는 자꾸만 눈을 깜박거린다. 긴장을 하거나 어색하면 나오는 오래된 버릇이다. 엄마는? 또다시 고기를 입에 넣어주려는 그녀에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묻는다. 그녀는 무어라 대답을 하지도 않으면서 싫다는 내 입에 고기를 밀어 넣어 준다. 입안에 노릿한 내가 침과 함께 고이는 듯해서 제대로 씹지도 않고 꿀꺽 고기를 삼키고는 일어나 부엌을 나온다.
희령일 깨워라.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그녀의 말에 뒤를 돌아다본다. 이 늦은 밤 자고 있는 언니를 깨우라니. 나에게처럼 고기를 소금에 찍어 먹게 하려는 것일까. 나는 잠시 문고리를 잡고 서 있다가 거실 한쪽 벽에 켜놓은 붉은 백열전구를 쳐다본다. 거실 바닥과 한쪽 벽면에 붉은 빛을 드리우고 있는 작은 전구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태롭고 괴기스러워 보인다. 어쩌자고 저 등을 그대로 켜놓은 것일까. 이사온 첫날 새벽 화장실에 가려다 말고 거실 한쪽 벽면을 타고 흐르는 붉은 빛에 흠칫 몸을 떨었다. 붉은 빛을 띤 무엇인가가 벽면을 타고 와 내 몸으로 기어 오를 것만 같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그 날처럼 몸을 흠칫 떨고는 언니 방문 앞으로 가 조용히 문고리를 돌린다.
희령 언니는 내게 등을 보인 채 창가 의자에 앉아 있다. 하얀 블라우스와 롱스커트를 입은 언니는 가슴에 흰헬멧을 안고 있다. 이사 하던 날 유난히 큰 창문이 있는 이 방으로 들어서서 언니는 자기 짐을 풀기 시작했다. 창 너머 야경은 불 밝힌 교회 십자가들 사이에 불빛이 점점이 박혀 고장난 크리스마스 트리 같기도 하고 불꽃놀이가 끝난 후 같기도 하다. 창으로 쏟아질 듯 들어온 달빛과 불빛으로 불 꺼진 방안은 언니의 모습을 선명히 담아내고 있다. 달빛에 드러난 언니의 실루엣이 천천히 움직이며 뒤를 돌아본다. 그 모습에 사각사각 스커트 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언니는 나를 아무말 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두 눈을 약간 찡그리고 잔주름을 모은 채 집중하듯 나를 바라볼 때의 희령 언니는 그녀를 닮았다. 그럴 때면 그녀가 언니를 낳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언젠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언니에게 뺨을 맞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까지 몰아쉬면서 언니는 내게 침을 뱉듯 말했다. 그따위 소리 한번만 더 지껄이면 죽을 줄 알아.
언니가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은 J가 죽고 나서 부터이다. 언니는 J가 죽고 난 뒤부터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원래 말이 많지 않았던 언니였지만 J의 오토바이 사고 후, 그녀와 나에게 눈을 맞추려고도 하지 않았고, 말을 건네지도 않았으며, 몇 번이고 묻는 말에야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다. J의 유품이었던 흰헬멧을 가지고 와서 언니는 한동안 가슴에 안고 지냈다. 잠 잘 때도 머리맡에 헬멧 두는 것을 잊지 않았고 가끔씩 그것에 말을 걸 듯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런 모습에 나는 몸서리를 쳤고 언니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만 갔다. 흰옷만을 고집하며 헬멧을 안고 있는 모습은 마치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듯 보였다. 어둠 속에서 창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 언니에게 나는 한숨 쉬듯 말했다. 잠깐 나오래. 언니는 내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우두커니 창 밖만 응시하고 있다. 등 돌려 방을 나오려 할 때 어디선가 갓난아기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으응애, 으으으으앵. 온 몸에 소름이 끼쳐와 나는 빠르게 문고리를 비틀고 방안을 나온다. 왔구나. 언니의 중얼거림이 문 틈에 끼여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듯해 방을 나와서도 움직일 수가 없다.
아기 울음 같은 고양이 소리는 첫 날부터 들려왔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나는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갓난아기 울음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상 앞에서 그녀는 침울하게 말했다. 밤새 고양이가 울어대는 바람에 잠을 설쳤구나. 국을 떠 입으로 가져가던 언니가 순간 멈칫했고, 나는 젓가락으로 콩자반을 집으려다 상 위에 떨어뜨렸다. 그 뒤에도 가끔 새벽이면 아기처럼 울어대는 고양이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마루 유리문의 커튼을 젖히고 현관 쪽을 바라본다. 현관문 옆으로 커다란 유리문들이 보이고 그 너머로 대문으로 이어진 계단들이 보인다. 이 집은 유난히도 계단과 유리가 많다. 전에 살던 한옥집에 비해 지대도 높은 데다 대문 밑으로 계단이 있고 삼 층인 우리집은 또다시 계단을 밟고 올라와야 했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앞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어 한낮의 햇빛을 집 전체가 반사시키고 있는 것이 보는 이들을 거부하는 듯 보였다. 거대한 식물원 같은 느낌이 들었고 온실의 쿰쿰한 썩는 냄새가 열기와 함께 대기 중으로 피어 오를 것도 같았다.
나는 이 집이 하늘 위에 떠 있는 듯 불안하고 추워 보였다. 하교길에 길목으로 들어서 이 집을 올려다 보면 투명한 유리에 어김없이 눈을 찔렸고 미로처럼 이어진 계단을 보며 한낮 초여름 날씨인데도 습관처럼 추운 듯 몸을 떨었다. 근처 집들은 이제 공사를 시작해 이 삼층을 올리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군데 군데 한옥이 많았던 곳이라 사각 뿔처럼 솟은 이 집은 주위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이사를 앞두고 어떤 집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조금 사이를 두고는 야경이 좋은 집이라고만 했었다. 하늘 위에 떠 있는 야경이 좋은 집. 돌계단을 올라 빨간 철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주인집 현관이 보였고 오른쪽 화단 위부터 삼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 계약 할 때는 파란 대문이던 것을 빨간 색으로 페인트를 했다며 이사하던 날 그녀는 드러내놓고 못마땅한 눈치를 보였다. 이삿짐 트럭에서 내려 대문을 바라보면서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그 어떤 말로도 그때의 두려운 기분을 표현할 수가 없다. 가슴 뛰는 흥분 섞인 두려움. 가방 두 개를 양 손에 들고 비질비질 땀을 흘리며 나는 멍하니 대문을 바라보고 서 있는 언니를 힐끔거렸다. 뜨거운 오후 햇살에 눈을 찔리며 언니는 오랫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저녁에는 한강을 바라보며 고기를 굽자구나. 야경이 기막힐 걸. 그녀는 언니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며 말했다.
그 날 저녁 현관문을 열어 놓은 채 유리문 앞에서 돗자리와 신문지를 깔고 우리는 고기를 구웠다. 현관 문 위의 전등이 고장 났는지 켜지지 않자 그녀는 마루에서 전선을 연결해 삼십 촉짜리 백열전구를 끌어내 밖에 내걸고 석유 곤로를 내왔다. 석유 곤로의 심지를 이리저리 맞추자 검은 그을음이 우리들 머리 위로 피어 오르며 백열전구를 감싸고 돌았다. 달구어진 후라이팬에 올려진 돼지고기는 지직, 소리를 내며 익기 시작했고 그녀는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희령 언니 앞의 접시에 놓았다. 그녀가 옮겨놓은 고기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언니는 김치로만 밥을 먹고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언니 접시의 고기를 집으려던 내게 상추에 고기를 얹던 그녀가 말했다. 그냥 놔둬라. 야경을 보기 위해 현관 옆에다 돗자리를 폈던 것인데 이미 어두워진 하늘과 밖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고기만 구워 입안에 밀어 넣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녀는 이미 식어 버린 언니 몫의 고기를 비닐 봉지에 담아 버렸다. 새벽 잠자리에서 나는 기름진 고기를 먹었는데도 쉽게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이 집에서의 첫 야경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 생각의 꼬리를 물 듯 응애, 고양이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녀는 이미 안방으로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평소에도 말없이 혼자 있기를 즐기는 언니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녀도 알았으리라. 거실을 지나 안방문을 열려다 말고 돌아서 내 방 미닫이를 연다. 그녀와 언니의 방은 도어 달린 나무문이었지만 내 방문은 창호지를 바르는 미닫이이다. 손잡이 쪽 창호지가 작게 찢긴 것 빼고는 비교적 깨끗한 편이라 새로 바르지 않았는데 열고 닫을 때마다 나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불끄고 누운 한 밤 그 작은 틈 사이로 누군가 눈알을 굴리며 내 방 안을 훔쳐 볼 것만 같은 생각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숨을 죽인 채 누워 있곤 하는 것이다. 학교 복도 같은 나무바닥의 거실은 지나치게 넓었다. 직사각형의 거실에는 별다른 가구가 놓여 있지 않아 더욱 휭해 보였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손때 묻은 가구들을 그녀는 이사오면서 대부분 가지고 오지 않고 버렸다. 집이 좁아서 어쩔 수 없어, 의아하게 쳐다보는 언니와 내게 그녀는 변명하듯 말했다. 가구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좁다던 집은 전에 살던 곳보다 오히려 두 배 정도 더 컸다.
누군가 거실 바닥 밟는 소리가 들린다. 지은 지 오래된 것이 분명한 이 집은 고요가 꿈틀거리는 늦은 저녁이나 새벽녘이면 거실 나무 바닥이 삐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이 새벽, 거실을 서성거리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녀는 잠자리에 든 후에는 여간해서 잘 깨어나지 않았고 희령언니 또한 이사온 다음에는 방안에 틀어박혀 책 만 읽으며 잘 나오지 않았다. 삐꺽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듯해 이불을 손에 꼭 쥐고 머리끝까지 끌어 올려 덮어쓴다. 이사 온지 석 달이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편하게 잠을 자지 못한다. 액자까지 바꿔 달며 방 단장을 했지만 낯설기는 마찬가지이다. 삐꺽거리며 나던 발자국 소리가 방문 앞에서 뚝 멈춘다. 숨이 멈출 것 같은 공포가 머리끝을 잡아 당기는 것 같다. 누… 누구야 소리 지르려는데 톡, 스위치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고 욕실 문이 열렸다 닫힌다. 그렇다. 누군가 화장실에 간 것이다. 내 방 앞에는 바로 욕실이 있었다. 편리하다며 좋아했던 처음과 달리 나는 새벽녘 누군가 욕실에 갈 때마다 내는 삐꺽거리는 발자국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두 손 모아 가슴에 얹고 방안의 어둠을 응시한다. 언제쯤 이 어둠과 친숙하게 마주할 수 있을까. 불 꺼진 창가에 서 있기를 좋아하는 언니를 생각하다 눈을 감는다.
그녀는 오늘도 고기를 먹을 모양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주방에서 풍겨 나오는 무 넣은 고깃국 냄새가 진동을 한다. 뿌연 수증기를 피워 올리며 용암의 소용돌이처럼 끓어오르는 기름지고 뜨거운 국을 그녀는 좋아했다. 입안 가득 씹히는 육질의 풍만하고 깊은 맛을 넌 모를 거야, 상 위에 놓인 고기 반찬에 손을 잘 대지 않는 내게 무슨 비밀을 말하듯 소곤거리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수저질만 반복하곤 한다. 그녀는 이틀에 한번씩은 고기 반찬을 밥상에 올렸다. 어제 시장을 봐온 그녀의 양손에는 검정비닐봉지가 잔뜩 들려 있었다. 그녀는 고기가 남아 있는데도 또다시 장을 봐오곤 했다.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불안한 듯 냉동고를 꽉꽉 채워놓았다. 부엌에 있던 그녀가 돌아다보며 말한다. 밥 먹어라. 희령인 속이 안좋다고 하는 구나. 나는 손을 씻고 와 밥상 앞에 앉아 그녀를 건너다본다. 예전의 보기 좋던 그녀의 몸은 형체를 잃고 어느새 무른 살집이 불어나 둔해지고 잔병치레가 잦았다. 어쩌자고 그녀는 저 기름진 것들을 전쟁터 전사처럼 꾸역꾸역 먹어대는 걸까.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땐 보름에 한번 상에 오를까 말까한 것들이다.
아버지가 죽고 난 뒤부터 그녀의 식성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통깨를 솔솔 뿌린 고춧잎 무침, 무채, 미나리 무침 등 나물을 즐겨하던 그녀는 아버지가 없고 부터는 악착같이 기름진 것을 탐했다. 밥을 먹다 말고 나는 걸신들린 듯 고기를 손에 들고 뜯어먹는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의 입가에 흐르는 기름기에 속이 넘어올 것만 같다.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닭이다. 그녀는 백숙의 푹 고아진 닭살을 연신 입으로 가져갔다. 먹을 것을 행여 빼앗기지 않으려는 아이처럼 서두르며 부드러운 육질을 소금에 푹푹 찍어 급하게 먹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나는 숟가락을 상 위에 내려놓는다. 왜 입맛이 없니? 그녀는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히 한번 묻고는 식사를 계속한다. 생전에 아버지는 닭을 좋아했다. 특히 통째로 푹 고아 삶은 닭을 즐겼다. 아니 즐겼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아버지는 닭을 좋아했지만 밥상에 고기 반찬이 오르는 것은 한 달에 한번 정도였다. 나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내 방으로 들어가 문고리를 걸어 잠근다.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처진 눈매의 아버지를 보며 참 낙타 같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등어리에 지방을 저장해두는 큰 혹이 있어 며칠을 굶어도 견딜 수 있는 사막의 낙타. 유난히 긴 속눈썹 또한 그러했다. 모래 바람에 씀벅씀벅 큰 눈을 껌벅이며 묵묵히 태양에 데워진 자갈과 모래를 밟을 것만 같았다.
그 날 비가 왔었다. 토요일 오후,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시험 공부를 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그녀와 언니는 집에 없었다. 이상하게도 시험기간에 비가 자주 내렸다. 나는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다 창문을 깨뜨릴 듯한 요란한 천둥소리에 움찔, 경기를 일으키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온 비바람이 노란 커튼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어느새 내린 비구름으로 주위가 어두웠고 책상 위에 켜둔 스탠드 불빛만이 둥그렇게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며 켜져 있었다. 빗물로 축축하게 젖은 창틀을 휴지로 닦으며 자명종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세시 오십 분. 네 시가 안된 시간이었는데도 창 밖은 동굴 속처럼 어둠을 깊게 내리고 검은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하늘이 번쩍 갈라지며 무너지듯 굉음을 쏟아내고는 이내 고요해졌다. 세우비를 흩뿌리고 있는 번개 지나간 하늘을 쳐다보았다. 가는 빗줄기가 방향을 잃은 듯 창안으로 들어와 얼굴을 적셨다. 눈 감고 빗물에 얼굴을 맡긴 채 잠시 서 있었다. 빗줄기가 온몸을 적실 듯 거세지기 시작해 창문을 닫고 거실로 나갔다. 아버지는 작업복 위에 우비까지 챙겨 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퇴근해서 돌아 온지 몇 시간 되지 않은 아버지가 작업복을 다시 입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어디 가세요? 의아하게 묻는 내게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아버지 얼굴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우산을 펴든 아버지가 철 대문 바깥으로 사라진 뒤로 쿠릉, 소리와 함께 하늘이 갈라져 내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 돌려 거실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째각째각 소리를 내며 바삐 움직여야할 시계추가 멈추어 있었고 시계 바늘은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혀 두 팔로 가슴을 감싸안고 한참을 붙박인 채 서 있었다. 그 날 뺑소니 사고가 있었고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공사현장을 가려 길을 건너다 차에 치인 것이다. 그 날부터 희령 언니, 나 그녀만이 남게 되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온 것은 그 뒤 삼 년이 지나고 였다.
보름 전 옷가지에 둘둘 말아 아래층 화단에 묻어버린 새끼고양이가 떠오른다. 학교에서 돌아와 방에 있는 내 귀에 야옹,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뒷문 쪽일까. 옥상으로 통하는 뒷문을 열자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새끼고양이가 배고픈 듯 야옹, 울며 내 팔에 매달렸다. 어미를 잃어버렸을까. 원래 고양이를 싫어했지만 하얗고 작은 새끼고양이는 애처롭고 가여워 보였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작은 접시에 따라주자 고양이는 쩝쩝 소리를 내며 혓바닥으로 핥아 먹었다. 언니가 알면 고양이를 기르자고 할 것만 같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우선은 새끼고양이가 쉴 공간을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때 저쪽에 걸려 있는 빈 새장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새장을 들고 와 작은 옷가지를 밑에 깔고는 고양이를 들어서 집어 넣었다. 야옹, 앙탈부리듯 작게 울어대는 새끼고양이를 들고 언니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겼다. 내일까지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우유를 접시에 더 따라준 후 방으로 들어왔다. 그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우유를 들고 새장 가까이 걸어가다 우유를 바닥에 놓쳐 버렸다. 한쪽 구석에 잘 놓아 두었던 새장은 옆으로 튀어 나와 있었고 안에서 심한 몸부림을 쳤는지 새끼고양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죽어 있었다. 밖에서 새장 고리를 무심코 잠궈 버려 고양이가 죽은 것이다. 잠시 갇혀 있는 것을 새끼고양이는 그리도 참지 못했을까. 차마 오래 쳐다볼 수도 없었지만 고양이를 묻어야만 했다. 나는 옷가지를 손으로 끌어당겨 고양이를 둘둘 말고는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대문 밖 화단에 묻어버렸다.
창문 열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유리문 밖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토막 난 듯 보인다. 회색 기운을 잔뜩 입에 문 것이 금방이라도 빗물을 토해낼 것만 같다. 피를 수혈 받듯 급하게 숨을 들이쉰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내 속으로 들어와 모래처럼 서걱거리며 한쪽 가슴을 따끔거리게 하고는 흔적 없이 빠져나간다. 얼굴을 바람에 맡기듯 눈을 감는데 뒷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희령 언니다. 속이 안좋다며 식사도 하지 않은 언니는 흰헬멧을 들고 옥상으로 오르고 있다. 언니는 저 멀리 강변이 내다보이는 자신의 방 창문과 기다란 나무 작대기를 받치고 있는 주황색 빨래줄이 이어져 있는 옥상을 좋아했다. 요즘 들어 언니는 내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말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그녀가 오기 전까지 생모 얼굴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내게 언니는 엄마 대신이었다. 그녀가 아버지와 혼인신고를 하고 우리집에 왔을 때 어렸던 나는 엄마가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를 잘 따랐지만 언니는 달랐다. 아버지가 사고로 죽고 나서는 이제 그녀가 이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언니의 말을 들으며 나도 언젠가 그녀가 떠날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처럼 특별히 친절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편했고 마치 이모나 고모처럼 느껴지게 했다. 이 집으로 이사할 때 언니는 순순히 따랐다. 언니는 지쳐 있었고 무엇보다도 J가 죽은지 반 년 밖에 되지 않았다.
J가 죽은 지 반 년.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어느새 반 년이나 흐른 것이다.
J가 우리 집에 처음 오던 날을 기억한다. 오월,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스치며 바람을 타고 날아들었고 붉게 번진 노을이 하늘을 물들이는 저녁, 땀에 절은 군청색 작업복 차림으로 J가 왔다. 아침부터 집안 곳곳을 쓸고 닦으며 갖은 음식을 장만했던 그녀는 대문을 들어서는 J의 옷차림에 실망하는 눈치였다. 언니는 활짝 웃으며 J의 한쪽 팔을 잡고 있었는데 나는 마루 한켠에 우두커니 서서 귀에 선명히 꽂히는 유쾌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노을을 등지고 서서 하얗게 미소짓는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옅은 기름냄새와 땀냄새가 났지만 오히려 그것이 상쾌하게 느껴져 코를 큼큼 거리며 냄새의 여운을 찾기도 했다. J는 생동감 있어 보였고 살아 있는 한 그루 나무 같았다. 회사에서의 복장 그대로 달려 왔다며 수줍은 소년처럼 미소지었는데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에 그녀도 마음을 놓는 듯 했다. 그녀가 장만한 음식을 사양하지 않고 열심히 먹는 모습을 힐끔거리며 나는 자꾸만 마음이 간지러웠다. 어느 곳이라고 딱히 말할 수 없지만 그냥 가슴 속이 간지럽다는 느낌. 나는 밥을 먹으면서 자꾸만 눈을 깜박거렸다. J는 가라앉아 있던 집안 분위기를 따뜻하고 풍요롭게 바꿔놓았다. 처음으로 그녀와 언니가 모녀처럼 다정해 보였고 아버지의 빈자리가 잠시나마 채워지는 듯 했다. 행복했다. 반듯한 이마에 내려온 머리카락을 언니가 자연스럽게 손으로 쓸어 올려 줄 때는 가슴 한쪽이 콕, 바늘에 찔린 듯 아프기까지 했다. 저는 엔지니어라 기계가 좋습니다. J의 말에 나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엔지니어… 엔지니어, 나도… 나도 그래요. 그 날 저녁 언니의 홍조 띤 얼굴에서는 미소가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J가 아끼고 좋아했던 오토바이 헬멧. 흰색의 그것을 J는 유독 아끼고 좋아했다. 가끔 오토바이를 타고 집에 올 때도 헬멧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J가 죽던 그 해 시월, 언니는 J의 신부가 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례식 날 소리 죽여 우는 언니 옆에서 얼굴로 번지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나는 막연한 슬픔에 가슴이 미어왔다. 그 따뜻하고 평화로운 저녁을 이제는 맞을 수 없다는 사실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흰헬멧을 안고 사는 언니는 아직도 그를 가슴에 묻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철계단을 밟고 옥상으로 오른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천상에서 지상으로, 이 집에서는 모든 게 계단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계단이 없으면 지상으로 내려 갈 수도 없고 하늘 가까이 오를 수도 없다. 나는 이 집에 지하실이 없다는 사실에 괜시리 안도하며 희령언니, 소리내 부른다. 난간이 없는 옥상은 위험해 보였다. 빨래를 널거나 걷어올 때 멈춰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현기증에 뒷걸음질 쳐야했다. 요즘 들어 언니는 부쩍 옥상에 자주 올라갔고 바람을 쐰다며 한동안 서 있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두 팔 벌리고 하늘을 향한 채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언니 모습을 볼 때면 나는 가슴이 쿵, 내려 앉아 급하게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곤 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옆에 서는 내게 언니는 돌아보며 쉿, 하듯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무슨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듯 귀를 기울이고 서 있는 언니 곁에 나도 그렇게 서 있다 옥상을 내려오곤 했다.
하늘에서 빗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얼른 줄에 널린 빨래를 걷어 왼쪽 팔에 걸며 눈으로 언니를 찾는다. 언니는 보이지 않는다. 부슬부슬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한 하늘은 어둠을 재촉하고 있다. 어디로 간 거지. 빨래를 놔두고 다시 올라올 생각으로 계단을 내려 가려다 나는 옥상 한쪽 구석의 창고를 돌아다 본다. 옥상 한 쪽에 만들어진 창고 안에는 지난번 살던 사람들 것인지, 주인집 것인지 모를 버려진 가구와 못쓰게 된 가전제품 등이 있었다. 이사하던 날, 주인집 여자는 인심 쓰듯 마음대로 창고를 사용해도 좋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볍게 아, 네 했을 뿐이다. 옥상에 오를 때마다 나는 확 트인 시야를 방해하는 흉물스러운 폐가처럼 한쪽에 만들어진 창고를 짧게 일별하곤 했다. 이 집에는 우리에게 소용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가족 수에 비해 지나치게 큰 거실과 방, 깨져 버릴 듯 불안한 유리들, 미로처럼 이어진 계단들. 게다가 옥상 위의 먼지 쌓인 창고까지. 빗물로 얼룩진 어둠 깔린 바닥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창고로 발걸음을 옮긴다. 빗소리 때문인지 약간 열려 있는 문 틈 사이로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가건물 같이 허술하게 만들어진 창고 문을 손으로 밀어 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발짝 창고 안으로 들어가 언니를 부른다. 어둠에 섞인 먼지 냄새가 훅, 코 끝에 밀려온다. 어디선가 꼼지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언니가 작은 손전등을 내 쪽으로 비추자 야옹야옹,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린다. 너무 놀라 붙박힌 채 그 자리에 서 있는 내 쪽으로 언니가 다가서며 말한다.
희주야, 이리 가까이 와봐. 언니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약간 떨리기까지 한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빨래를 가슴에 끌어 안으며 언니 곁에 다가가 주저 앉는다. 내가 곁에 앉자 언니는 손전등을 구석으로 비춘다. 불빛에 야옹, 소리가 살아나듯 더욱 크게 들려온다. 그리고 뒤이어 야광처럼 번득이는 고양이 눈들. 나는 너무 놀라 뒤로 엉덩방아를 찧는다. 세상에 어디서 이렇게 많은 고양이들을 모아 놓은 걸까. 열 마리 쯤 될까. 한쪽 구석에 몸을 누인 채 자고 있는 고양이가 언뜻 보기에도 가장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흰고양이, 검은 고양이 등 모두 제각기 빛깔이 달랐다. 이것 좀 봐. 언니가 비춘 곳에는 낳은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새끼고양이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대여섯 마리 될까. 그 옆에 버티고 앉아 경계의 눈빛을 우리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 어미 고양이인 듯 하다. 어둠 속에서 나는 고양이들의 수많은 눈빛에 둘러 싸여 꼼짝할 수가 없다. 길을 잘못 들어선 사람처럼 황급히 언니의 손을 잡아 끈다. 내가 이끄는 대로 창고를 나선 언니의 손에는 헬멧 말고도 책 하나가 들려 있다.
고양이들이 이렇게 많이 살고 있었다니. 옥상을 내려와서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책은 또 무어란 말인가. 언니 방 책상 위에 있던 빨간색 양장본의 책들. 요즘 언니가 열심히 읽고 있던 그 책들은 창고에서 가져온 것이란 말인가. 책장 속에도 책은 얼마든지 있었다. 언니는 손에 들고 온 책의 먼지를 털고 쥐오줌이 묻어 있는 부분을 휴지로 꼼꼼하게 닦는다. 방까지 뒤쫓아 들어간 나는 언니에게 묻는다. 언제부터야? 고양이들 말야. 그리고 또 그 책은 뭐야?
큰 속임수를 당한 사람처럼 나는 왠지 억울하고 무섭다.
페르시안 고양이들은 개처럼 순하고 사람을 잘 따른데. 언니는 내 질문에는 답하지 않은 채 양장본을 들고 창가로 가 선다. 왜 사람들이 꾸준히 고전을 읽는 줄 알아? 답을 기대하지도 않은 듯 말을 잇는다. 제목들이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쓰여졌기 때문이야. 죄와 벌, 여자의 일생, 부활, 분노의 포도…… 그렇지? 나는 오래되고 낡은 게 좋아. 그리고… 그것들은 아주 오래… 오래 살잖아… 아주 오래 말야.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그저 침대 위에 놓인 흰헬멧을 한번 쳐다보고는 언니 방을 나온다.
그녀는 뜨개질을 하고 있다. 거실 구석에 빨래가 가지런히 개여 있고 작은 대바구니에 담긴 털실 뭉치를 끌어 당기며 대바늘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요망스럽다며 그녀는 고양이를 싫어했다. 무서운 비밀을 알게 된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거실을 서성이며 그녀를 바라본다. 며칠 전 그녀는 아버지가 즐겨 입던 털스웨터를 꺼내 실을 풀어 감았다. 그리고는 한여름 더운 날씨 속에서 선풍기도 틀지 않은 채 뜨개질을 했다. 그녀는 정성껏 뜨개질한 스웨터를 장롱 깊이 넣고 겨울을 보낸 후 여름이 되면 그 옷을 다시 풀어 새로운 옷을 디자인할 것이다. 지난 여름보다 그녀는 더욱 살이 쩌 보인다. 입지도 못할 아버지 스웨터를 열심히 뜨개질 하는 그녀를 말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건 말린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누구나 그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자신을 설득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은 아버지 스웨터를 뜨개질하는 그녀나 흰헬멧을 안고 사는 언니 모두 지금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이미 떠나버린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떼를 쓰는 것. 그녀는 어쩌자고 이 집으로 이사를 해서 떠나버린 것들의 존재를 더욱 키워버린 걸까. 그냥 살던 곳에 있었으면 자연스레 치유될 상처들이 이 집으로 온 후에는 더욱 커져 곪아 터져 버릴 것만 같다.
아까 나를 노려보던 고양이가 얼마 전 죽은 새끼의 어미일까. 그 생각을 하자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쳐온다. 그녀에게 말해야 한다. 고양이가 더 이상 이 집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된다. 거실에서 뜨개질을 하던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안방과 부엌, 욕실의 문을 열고 그녀를 부른다. 부엌 석유 곤로에 올려놓은 커다란 솥에서는 뜨거운 물이 끓고 있다. 이 늦은 밤에 또 고기를 삶을 모양이다. 뒷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슬리퍼를 꿰어 신고 옥상으로 오른다. 계단을 다 오를 때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비야, 이리와 봐. 맛있는 고기를 줄게. 어서 와봐. 평소 고양이를 질색하던 그녀가 작은 자루를 들고 고양이를 유인하고 있다. 나비야… 이리와 봐. 나비야. 나는 차마 그녀를 부르지 못하고 내려오고 만다.
부엌에서 도마질 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 파를 다듬어 썰고 소금을 넣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녀의 손놀림이 눈에 그려진다. 책상 앞에 앉아 나는 그녀의 손놀림을 상상하며 건성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얼마나 잔 걸까.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던 나는 화장실에 가려 일어나 문을 열고 나온다. 아직까지 부엌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다.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선다. 곤로 위의 솥에서는 뚜껑을 약간 열어 놓은 틈 사이로 뿌연 수증기가 피어 오르고 있다. 그리고 언제 나왔는지 희령언니가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작은 쟁반을 사이에 놓은 채 바닥에 앉아 있다. 작은 쟁반 위의 얇게 썬 고기를 언니 쪽으로 옮겨 놓는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고 손으로 그것을 집어먹는 언니 모습이 들떠 보인다. 잔치가 끝난 후의 부엌 같은 느낌에 나는 손으로 눈을 몇 번 문지른다.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입가, 흔들리면서도 묘한 광채가 나는 눈동자, 언니의 모습은 잊었던 옛날이야기처럼 낯설고 슬프다.
먹어 볼래? 속삭이듯 묻는 그녀의 말에 나는 주술 걸린 것처럼 부엌으로 들어가 쪼그려 앉는다. 그녀의 흰 손이 고기를 집어 입 속에 넣어준다. 나는 질겅질겅 고기를 씹어 먹는다. 그러나 고기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 희령 언니와 나는 그 집에서 일 년을 살았다.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유리와 계단이 많던, 고양이 소리가 끊이지 않던 하늘 위에 떠 있는 듯한 그 집이 떠오르곤 한다. 이제 그녀는 걸신 들린 듯 고기를 뜯어 먹지도 않으며 언니는 흰헬멧을 안고 살지도 않는다. 영원히 지상에 발 딛지 못할 것 같던, 지상에 존재 하지 않을 것 같은 집. 우리는 그 집을 기억의 집이라 부른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는 기억의 집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억의 집에는 늘 불안한 바람이 삐걱이고/ 기억의 집에는 늘 불요불급한/ 슬픔의 세간살이들이 넘치고/ 자세히 보면 고요히 흔들리는 벽/ 더 자세히 보면 고요히 갈라지는 벽/ 그 속에서 소리 없이 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 혹은 긴 한숨 소리.
- 최승자의 시,「기억의 집」中에서 (끝)
양영아
1971년 서울 출생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중
2000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소설「소설 속의 여름」당선
「존재의 몇가지 거짓말」,「창백한 기타」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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