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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신작시/김인자/안개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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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인자
55년 강원도 삼척 출생 89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89년 현대시학 '시를 찾아서'로 등단 시집: 겨울 판화<91년. 문학세계> 나는 열고 싶다<94년. 인화> 상.어.떼.와.놀.던.어.린.시.절<01년.여음> 시산문집: 그대, 마르지 않은 사랑<99년.우리글> 공저 다수
안개
고향으로 가는 길은 안개가 길을 막았다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든,
그러나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고향은 몸이 알아서 길을 낼 터이지
마음만 앞세운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안개 탓이리라, 가을 산들은 붉다못해 검다
한낮에도 안개의 입자들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골수에도 안개가 끼었으리라
양지바른 곳에 계시는 어머님은 이제 편안해 보였다
알고 계실까 내 흘러온 길, 앞을 분간 할 수 없는
안개들이 걸음을 막막하게 했다는 것을,
재회의 기쁨도 잠시 혼자 돌아갈
나만의 길을 어머니는 염려하고 계셨다
봄부터 우리를 위해 선산의 밤나무들을 홀로 돌보셨을 어머니
서둘러 아이들에게 줄 밤을 주워가라 하셨지만
갈 길 멀고 시간 없다는 걸 핑계 대며
빈손으로 산을 내려오는 나를 나무랄 때도 됐지만
그래도 등뒤에서 여전히 웃고만 계시는 어머니
돌아오는 길은 내내 쓰리고 허전한 안개밭이었다
마알간 해 사라지고 바람에 안개 쓸려갈 법도 한데
어둠이 길가에 서성댈 때까지 안개는 그대로다.
내 생애 안개 걷힌 날 얼마나 있었다고
오늘 하루분의 안개를 탓하랴
고향은 그리움만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때되면 지친 몸 알아서 가는 곳이니
어떤 힘으로도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제 아무리 짙은 안개가 길을 막아선다 해도
일기
글자를 익히면서부터
일기 쓰기를 강요받았으리라
그날 있었던 일을 그대로 쓰기만 하면 된다며
일기의 생명은 정직이라고 어른들이 가르쳤을 때
일기는 아무도 엿볼 수 없고 엿보아서는 안 되는
보물 가득한 개인 금고였다
오늘을 반성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그럴듯한 가르침을 누군들 의심했겠는가
어느 날 나의 금고 열쇠를
다른 사람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의 허망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철이 들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두 개의 각기 다른 금고 열쇠를 가지게 되었는데
하나는 실명이고 하나는 차명이었다
실명 금고에는 누군가 슬쩍해도 눈감아 줄 수 있는 것들을,
차명 금고에는 가공할만한 것들을 채워 나갔다
정직을 생명처럼 가르쳐 온 일기는
거짓을 가르치는 일등공신이었고
내 생은 이중국적을 가진 떠돌이 밀교자였자
결국 나는 거짓을 더 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돌아온 탕자처럼
호롱불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거짓말 한 줄에도 가슴 두근대며
몽당연필에 침을 바르던 그때처럼
정직한 일기를 쓰고 싶다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오직 하나의 일기장만을 가진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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