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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문화산책/창백한 꿈의 끝자락에서/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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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남석
댓글 0건 조회 2,954회 작성일 02-06-2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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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김남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 [오태석 희곡의 개방성 연구] 고려대, 경기대 강사


창백한 꿈의 끝자락에서
-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론 -


0. 가짜 〈삼류 인생〉을 대신하여

최근 우리 영화는 〈깡패〉들의 독무대이다. 스크린의 곳곳에서 깡패들은 다양한 캐릭터와 신분으로 출몰한다. 조직의 사활을 걸고 운명적으로 맞서야 했던 어릴 적 두 친구, 대담무쌍한 배짱과 기예로 남자들을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여자 보스, 깡패 조직의 보스와 체육 선생님으로 뒤바뀐 친구, 조직간의 쟁투에서 패퇴하고 절로 도피한 조직폭력배들, 학교로 간 조직폭력배의 괴수 등으로 한국 영화는 만원이었다. 덩달아 관객들도 연일 만원 사례를 이루며, 한국영화는 성공을 거두는 듯 했다. 조심스럽게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거론하는 발언도 새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공은 상업적이고 외형적인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최근에 구경한 깡패들의 삶에서 〈삼류 인생〉 특유의 씁쓸한 아픔을 발견한 적이 없다. 그들만의 삶이 드러내는 거친 세목을 확인한 적도 없다. 우리는 그들의 멋진 양복과 호쾌한 무예와 죽음을 넘어서는 의리를 구경한 바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복과 무예와 의리는 〈밑바닥 인생〉에는 걸맞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 자체로 과장되어 있어 어떠한 삶의 층위에서도 진정성을 담보받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 안에는 생계에 대한 걱정도 없고, 밑바닥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절절한 이유도 없고, 이러한 인생이 가져올 수 있는 폐해도 없다. 그러니 이러한 영상적 묘사는 실제 인생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는 하나의 동경의 대상일 뿐이다. 더구나 그 동경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되었을 삶의 가치나 그 동경을 이루지 못한 좌절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진정한 삼류가 아니다.
우리는 깡패 영화 중에서도 기억할 만한 영화의 목록을 가지고 있다. 가령 『게임의 법칙』이나 『초록물고기』와 같은 영화는 밑바닥 인생의 아픔과 삶의 세밀한 결을 간직한 경우였다. 이 영화에는 현재의 깡패 세계가 보여주는 환상 대신에 구차함이 가득했고, 영화(榮華) 대신에 파멸이 존재했으며, 동경 대신에 열패자의 아픔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 비교를 한다면, 최근 우리 영화의 공백은 무척 큰 것 같다. 외형적인 화려함이 크기에 그 공백은 더욱 커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공백은 차분하지만 열정적인 한 편의 영화로 인해 어느 정도 만회되는 듯한 인상이다. 투박한 편집과 일상적인 묘사와 특별할 것 없는 스토리 라인으로, 잘못하면 현실로 착각하기에 적당한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그것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트롯트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심수봉의 음악을 사랑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영화를 낭만과 환상과 재미로만 알고 있는 이들에게 삶의 구체적 풍광을 소개하는 것이,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씁쓸함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 또한 영화일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영화였다.


1. 불편한 현실, 창백한 음악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음악에 대한 꿈을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들의 꿈은 몹시 창백하다. 이것은 그들의 음악을 억압하는 혹은, 그들의 꿈과 길항하는 현실 때문이다. 임순례는 첫 장면부터 이러한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상당히 공을 들인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숙달된 동작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네 명의 연주자가 있다. 음악이 끝자락에 도달하면, 씽어가 간결하고 나직하게 인사말을 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마지막 공연을 알리는 고별사이다. 그러나 비장한 어조나 관객들의 아쉬운 탄성 같은 응당 뒤따를 것으로 생각되는 반응은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어지는 카메라 워킹으로 해명된다.
카메라가 줌 아웃하면 외화면(off screen)에 숨어있던 광경이 속속들이 프레임 내부로 흘러 들어온다. 당연히 앉아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던 관객들은 서서 움직이고 있다. 노출되는 영역이 넓어지면 그들이 춤을 추고 있음을 알게 된다. 불온한 표정의 남녀들이 서로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어지럽게 실내를 돌고 있다. 서로의 몸을 탐하기에 여념이 없는 이들에게 한낱 무명 밴드의 고별사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한마디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삼류 인생의 합작품이다. 임순례는 누추한 현실을 화면 내에 점차적으로 옮겨옴으로써, 그러한 현실에 짓눌려 해쓱해져 가는 음악과 〈삼류 밴드〉의 창백한 운명을 노출시킨다. 스테판 샤프는 영화구조의 미학을 분석하는 자리에서, 점진노출(slow disclosure)의 중요성을 역설한 바 있다. 점진노출은 영상적 정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영화문법이다. 카메라 워킹이나 쇼트의 확대를 통해 프레임 바깥(off screen)에 잠재되어 있던 정보를 관객에게 인지시키고, 새로운 정보를 통해 관객의 호기심과 인식상의 충격을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법이다.
임순례는 점진노출을 영화 도입부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화려한 의상과 숙달된 연주 그리고 세련된 인사말, 이 모든 것은 확대되는 프레임 안에서 초라하고 왜소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들의 외양과 음악은 현실에서 아무런 반향도 갖지 못한 것이며, 음악이 파생시킬 수 있는 열광이나 존경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비참한 삼류 밴드의 처지만이, 그들에게 허용된 전부인 셈이다. 예전에 꿈꾸었던 순수한 음악은 이제 음습한 지하 한 귀퉁이에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갈 따름이다.
서사적 정보가 계속 공급됨에 따라,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한층 분명해진다. 원래 7인조였던 그룹은 지금은 4인조로 전락해 있고, 조만간 3인조로 추락한다. 풍요로웠을 것으로 생각되던 그들의 음색은, 갈수록 큰 공백을 드러낸다. 3인조가 되면서 4인이 이루던 안정적 사각 구도마저 훼손된다. 더 불안한 것은 이러한 3인조마저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멸 과정을 지켜보고 또 다른 한편으로 앞날을 예측하는 작업은 관객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들의 꿈도 대게 이러한 수순을 밟으면서 전락했음을 씁쓸하게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그들의 꿈을 쉽게 버리지 않는다. 특히 성우는 집요하리만큼 음악에 매달린다. 그의 집념은 꿈을 잊고 현실을 질주하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조각조각 떨어진 현실의 조각 사이로, 간신히 가려온 꿈의 속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본다는 것은, 꿈이 벌거벗겨지는 자리 혹은 현실이 불편하게 드러나는 자리를 지켜보는 행위와 같다. 이 영화는 잊혀진 꿈을 불편한 음악으로 바꾸어, 편안하게 위장된 우리의 삶 속으로 밀어 넣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인물이 자조적으로 던지는 〈하고 싶은 일을 해서 너는 행복하냐〉는 대사는, 맞은편에 앉은 성우가 아니라 그 맞은편에 앉은 관객을 겨냥하게 되는 것이다.


2. 오래된, 그리고 오랜 꿈과의 조우


거듭해서 추락하던 〈와이키키 브라더스〉에게, 호텔 전속 밴드로의 취업은 비록 일시적일지언정 안정감을 선사한다. 첫 공연마저 성공리에 마친 멤버들은 각자의 일상을 제 2의 고향에 풀어놓기 시작한다. 강수는 지배인과 포커를 치고 정석은 특기인 〈여자사냥〉에 나선다. 셋이 모여 술을 마시기도 하고, 웨이터 기태와 일상의 한 부분을 공유하기도 한다.
성우는 자신의 고향을 돌아보는 것으로 여정을 푼다. 그가 풀어놓은 여정 속에는 10년 전 그와 그의 친구들과 그의 음악이 있다. 성우, 민수, 인기, 수철은 〈충고〉 동창으로, 학창 시절 〈충고 보이스〉라는 그룹사운드를 결성한 바 있었다. 민수는 키보드, 수철은 드럼, 인수는 베이스 기타를 맡았고, 성우는 그 그룹사운드의 리더 겸 씽어였다. 어딘지 현재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닮은꼴을 이루고 있는 그룹이었다.
성우와 친구들은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다가 자연스럽게 과거의 한 시절로 넘어 들어간다. 그 시절 그들은 같은 이름으로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남과 여로 갈라 앉은 고등학생 청중이 보이고, 그 앞에서 어설프고 경직된 포즈로 음악을 연주하는 〈충고 보이스〉가 보인다.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만 빼고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무대였다. 회상을 좀더 따라가면, 이들이 열망했던 음악과 음악으로 인해 받은 상처들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성우는 음악과 첫사랑에 대한 열병을 동시에 앓게 된다. 첫사랑의 대상은 같은 리싸이틀 장에서 만난 이웃 여고 그룹사운드의 씽어인 인희였다. 인희는 거친 무대 매너와 도도한 눈빛과 강렬한 음악적 카리스마로 청중뿐만 아니라, 성우마저 사로잡는다. 인희 곁으로 다가가려는 성우의 노력이 번번이 좌절되면서, 첫사랑의 아픔은 그의 음악 속에 배어들게 된다. 성우의 좌절을 더욱 부추긴 요인은 인희가 마음에 둔 대상이다. 자기 또래를 훌쩍 넘어 연상의 음악선생님과 가깝게 지내는 인희의 모습은 성우에게는 거의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인식되었다. 마치 그가 꿈꾸었던 음악처럼, 첫사랑은 요원했다. 이처럼 회상 속에는, 음악은 첫사랑처럼 매혹적이고 그 첫사랑의 우월한 애인처럼 동시에 절망적인 것이라는 서글픈 기의가 숨어있었던 셈이다.
여름 해변에서 만난 삼류밴드와의 대결도 음악적 기의를 숨기고 있다. 〈충고 보이스〉에서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재빠르게 변신한 성우 일행은, 또래의 여학생들과 사귈 기회를 잡는다. 그들의 만남이 무르익을 무렵, 해변 일대에서 명성을 날리던 선배밴드들이 끼어 든다. 선배들은 음악적 유명세를 이용해서, 어린 여학생들을 독점해 버린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가 무산되자,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심정적으로 반발하고 주먹세례마저 감수하며 패싸움을 불사한다.
주목되는 장면은 그 다음날이다. 선배들에게 실컷 얻어맞고 해변에서의 연고지마저 잃은 성우일행은, 모래사장으로 밀려 나와 있다. 비록 허허롭지만 여유롭지만은 않은 처지이다. 그런데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자 그들은 지난밤의 울분을 말끔히 잊은 듯, 다시 장난에 열중하기 시작한다. 음악으로 유명해지거나 여자들의 관심을 장악하지는 못할지언정, 한산한 오후의 해변은 오롯이 그들 차지였다. 선배들에게 의탁했다가 버림받은 좌절이나 첫사랑의 실패 정도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그들은 기운차게 해변을 질주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서로가 있었고, 음악이 있었고, 서로와 음악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그들에게 음악은 도달할 수 없는 무지개처럼 요원한 것이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과 그 열정을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현실이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그들이 품었던 음악에 대한 꿈을 상징하듯 그들이 가진 알몸은 연약하고 볼품없었지만, 그 시절 그들은 알몸을 거침없이 드러낸 채 해변을 질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잠시지만 그들만의 와이키키 해변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뜨겁고 농염한 햇빛이 꿈처럼 일렁거린다. 그 꿈이, 언젠가는 그 벌거벗은 몸으로 안착할 와이키키 해변으로 인도할 것이고, 그 곳으로 가는 길에 희망에 찬 음악이 있다고 믿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한 때 이들에게 음악은 서로에 대한 우정이었고 현실을 버티는 희망이었고 와이키키 해변으로 가는 꿈이었던 것이다. 하여, 불편한 현실을 지탱하고 견디게 하는 가능성과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3. 폐허가 된 꿈으로 Ⅰ : 과거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와이키키 해변을 향한 어린 날의 질주는, 회상 다음에 이웃한 현실 풍경 속에서 정지된다. 임순례는 과거의 아름다운 꿈 곁에, 누추한 현재의 모습을 이어 붙인다. 이 삽화 속에는 친구들끼리의 알력과 배신, 현실에 대한 좌절과 서글픔이 가득하다. 첫 쇼트에서 연주자 앞에 천박한 춤 커플이 나열된 것과 대동소이한 관점이다.
성우가 몸 담았던 그리고 몸 담고 있는 두 개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약속이나 한 듯이 허물어져간다. 먼저 어릴 적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현재 모습을 보자. 민수는 약사가 되어 있고, 수철은 시청 공무원이 되어 있고, 인기는 환경운동가가 되어 있다. 수철과 인기는 온천 개발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다. 수철은 온천 개발을 장려하는 시 정책을 따라야 하는 입장이고, 인기는 시 정책의 불합리와 횡포를 고발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들은 곧 있을 온천 반대 집회에 대한 이견으로 충돌한다. 수철은 친구사이를 내세워 온천 반대 집회의 원만한 진행을 인기에게 청탁하지만, 인기는 꼿꼿한 신념을 앞세워 수철의 청을 거부한다. 이들의 우정에 심상치 않은 균열이 가 있음을 암시하는 삽화이다.
이를 전하는 민수 역시 변해버렸기는 마찬가지이다. 민수는 성우에게 수철과 인기의 사이를 알려주면서도 시종일관 냉소적이다. 그는 두 사람의 급박한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대립만을 문제삼는다. 있어야 할 걱정은 없고 불만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첫 인상부터 거드름과 속물 근성을 드러내던 민수였기에, 이러한 냉소는 잠재되어 있는 친구들 사이의 불신을 예고하는 또 하나의 삽화이다.
이러한 균열과 불신이 터져 나오는 것은, 수철의 장례식장에서이다. 인기가 선동하는 시위 대열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던 수철은, 해직과 죽음을 연이어 맞이하게 된다. 기다렸다는 듯이 민수는 수철의 죽음을 인기의 탓으로 돌린다. 울먹이던 인기 역시 자신의 무죄를 변론하며 수철을 돕지 않은 민수를 도리어 욕한다. 인수가 잘못과 비리를 폭로하자, 민수 또한 이성을 잃고 싸움마저 불사한다.
친구들은 수철의 삶을 걱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중시했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음악이 자애로운 품성 그리고 열정적인 믿음으로 서로를 묶어주고 현실을 버티게 해주던 시절은 사라졌다. 음악과 친구는, 각박한 세태와 생존 경쟁 앞에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과거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꿈은 사라진 것이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성우는, 이러한 변질에 격하게 반응한다. 상가집에서 상을 엎으면서, 친구들에게 처음으로 분노를 섞어 소리친다. 〈그만들 하라고〉. 무엇을 그만 하라는 것일까. 아마 음악을 배신하는 행위를 그만 하라는 뜻이 아닐까. 음악에 들였던 투명한 열정을 훼손시키는 짓을 그만 하라는 뜻일 게다. 〈행복하니,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사람은 너밖에 없지 않느냐〉는 수철의 유언(遺言)같은 질문에, 이제 너희들도 차례로 대답해야 한다는 조그마한 종용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성우는 이렇게 폐허가 된 현실에서 허물어진 꿈의 잔해를 반추한다.


4. 폐허가 된 꿈으로 Ⅱ : 현재의 〈와이키키 브라더스〉


현재의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전속밴드로 생활의 안정감과 여유를 되찾은 이들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둥지를 계획한다. 강수는 가장 눈에 띤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아, 연애를 할 결심을 한다. 그러나 원체 쑥맥인데다 정석의 방해마저 겹쳐 뜻한 바를 쉽게 이루지 못한다. 정석에게 상대를 뺏긴 강수는 실의에 빠지고, 마약을 가까이 함으로써 밴드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책임을 지고 강수가 떠나자, 세 명으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표면 장력같은 균형감이 무너진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연주는 음악적으로 허름한 공백을 드러내었고, 현실에서도 볼쌍사나운 대오를 드러내었다. 성우가 어릴 적 자신의 음악학원 원장을 초빙해서 일시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하지만, 오히려 불균형과 소란만 심화시킨다. 그나마 간신히 지탱하던 밴드는 음악학원 원장의 실수로 인해 다시 위기에 처한다. 이제는 성우마저 그만두어야 할 신세가 된다. 정석은 과거의 정부(情婦)를 끌어들여 살아남지만, 그의 재빠른 배신 역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이것으로 사실상 와해된다. 성우는 음악학원 원장과 함께 하루치 일거리를 좇아 다니다가 결국에는 혼자 남게 된다. 음습한 캬바레, 초라한 행사장, 좁은 룸싸롱을 전전하며 온갖 수모를 당한다. 곳곳에서 음악은 대량생산된 싸구려 물품처럼 팔리고 있었다. 나훈아를 닮은 너훈아에 이어, 너훈아를 빙자한 무엇이라고 불러야 될지 모르는 수많은 가짜들이 판을 치고 있다. 대중음악은 쓰고 버리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취급되지 진위와 가치를 논해야 하는 예술품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음악에 대한 외경심이나 사랑은 찾을 길이 없어진다. 그저 삶의 추악한 언저리나 천박한 음지에서 수음처럼 허무하게 스러질 뿐이다.
그러나 성우는 현실을 엎지 못한다. 수철의 상가에서처럼 단호하게 현실의 상을 엎지 못한다. 묵묵하게 감내할 뿐이다. 그러니 현실에서는 음악을 하는 이유나 음악에 대한 열정 그리고 음악으로 행복해질 미래의 세상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러한 음악은 현실의 배설물과 다르지 않다.
광란의 룸싸롱 씬(scene)은 이 영화의 절정이자 압권이다. 사장들과 호스테스들이 벌이는 질펀한 육체의 난장판. 음악은 그 안에서도 시녀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수청을 강요당하는 궁녀처럼 성우는 사장들에게 옷을 벗기운다. 추잡한 삶의 한 가운데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갈 힘을 성우는, 아니 음악은, 음악에 대한 꿈을 상실했고 그래서 더할 수 없이 창백해졌다. 미약한 동작으로 거부를 표시하지만, 이미 질주하기 시작한 광폭한 현실을 거스를 수는 없다. 유일한 저항은 이러한 현실에서 눈을 떼는 것이다.
성우의 눈길이 도피한 곳은 노래방 기기 속에 펼쳐진 바다였다. 그러나 그 바다는 언젠가 천진하게 달려본 적이 있는 그 바다는 아니었다. 화면 속의 바다에도 나체의 미녀가 달리고 있고 그 뒤를 여러 남자가 뒤따르지만, 춥고 황량하게만 느껴진다.
어릴 적 친구들의 바다가 디졸브되면, 우리는 생각한다. 어린 날의 벌거벗은 바다가 얼마나 따뜻했던가를.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춥고 가혹한 곳인지를. 잃어버린 꿈을 확인하는 일이 얼마나 불편하고 참담한 것인지를 되집어 보게 된다. 이러한 대비는 성우가 처한 고단한 현실을 잔인하게 보여준다. 전자기타로 가리기에는 우리의 몸은 너무 비대했고, 현실은 너무 냉혹했다. 이것이 임순례가 포착한, 현실의 완강함과 생존의 비참함이며, 이러한 것들이 겁박하여 한껏 창백해진 우리의 꿈이다. 순수한 꿈의 가라앉음이고, 훼손된 잔해이고, 그 위에 누추하게 자리잡은 현실이다.


5. 삶의 온기와 화색


임순례의 영화가 여기까지였다 해도, 그 작가적 진정성과 영상 미학은 상당했을 것이다. 한껏 창백해진 꿈의 끝자락으로 맺어졌을 영화적 종결은 나름대로 유효했을 것이다. 그러나 임순례는 영화적 욕심을 부린다. 창백해진 꿈을 그냥 놔두지 않은 것이다. 한 줄기 온기를 수혈해서, 차가운 현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일구어낸다.
수혈의 내용은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는 기태의 등장이다. 노란색으로 물들인 머리를 연신 흔드는 이 발랄한 웨이터는, 꺼져가는 음악의 열정을 지피는 촉매 구실을 한다. 그는 강수에게, 음악학원 원장에게, 성우에게 음악을 가르쳐달라고 끊임없이 졸라댄다. 음악은 이제 비전이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사람도 떠나는 마당이다, 다른 일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고 아무리 일러주어도 듣지 않는다. 기태는 자신에게 음악은 적성에 맞는 것이라고 우기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음악에 대한 흥미가 있었고 열정이 있었던 성우와 〈와이키키 브라더스〉 멤버들의 초창기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꿈을 기태가 이어받고 있는 셈이다. 이 꿈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기에, 강수도 정석도 음악학원 원장도 성우도 떠나야 했던 와이키키호텔의 전속 밴드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흥겹게 자신의 음악을 연주한다. 실제 연주가 아니라 신디사이저의 가짜 연주이지만, 그는 만족한다. 관객이 보아줄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자신이 택한 직업에 만족한다. 이러한 만족이 창백해진 꿈의 마지막 불씨를 이어가는 것이다.
다음은 인희이다. 그녀는 과거의 꿈을 노래방에서 달래곤 했다. 고달픈 채소장수의 삶을 잠깐이나마 잊기 위해 과거의 영화로웠던 한 때를 회상하곤 했다. 그런데 그 음악이 그녀에게 돌아온다. 예전과 같은 카리스마로 청소년들을 사로잡는 음악은 아닐지라도, 부드럽고 편안한 포즈로 현실의 아픔을 잊게 하는 음악으로 돌아온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가사처럼, 〈지나간 세월 모두 잊어버리고〉. 그녀가 다시 부르기 시작한 노래는 여윈 꿈을 살지게 한다. 고단했던 그녀의 삶에도 화색이 돈다.
마지막은 성우이다. 성우는 조용히 참으면서 음악을 지켜온 인물이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마지막 동료인 정석이 떠날 때도, 그는 어릴 적 스승 곁에 남는다. 아마 스승 곁에 남듯 음악 곁에 남고 싶었던 듯하다. 그래서 수철로부터의 난감한 질문을 받아내야 했다. 다시 되뇌어 보자. 〈행복하니...? 우리 중에 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놈 너밖에 없잖아. 그렇게 하고 싶어하던 음악하고 사니까 행복하냐구... 진짜루 궁금해서 그래...〉
수철의 죽음 후에, 이 물음은 너(성우)는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행복하지 않겠느냐는 단순한 질문에서 반드시 행복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추궁으로 그 의미가 변모된다. 성우는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고 침묵한다. 그가 항상 입는 그레이 톤의 옷처럼 신중해진다. 그의 신중함이 영화 전편에 대답을 유보시키고 이 유보로 인해 긴장된 우울함이 감돌게 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홀로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희와 함께 선 무대에서는 그 양상이 조금 달라진다. 항상 신중하고 외롭게 노래를 부르던 성우는 사라지고, 편안해진 인상의 성우가 나타난다. 노래를 부르면서 만면에 화색을 띄우는 인희가 있고, 그 인희의 시선이 뒤로 향하면 성우가 있다. 살짝 웃는다. 회색빛 침울함이 물러나고 삶에 대한 소박한 희열이 떠도는 순간이다. 한 쪽 팔이 불편한 정석도 인희의 시선을 받는다. 그도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변한다. 그들의 웃음은 그들을 그룹으로 묶어주는 힘이다. 음악에 대한 신뢰가 되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된다. 비록 세 명이지만 그들의 음은 서로를 지탱해주며 상호 삼투된다. 커다란 음악적 공백이 메워지기 시작하고 교묘하게 어울리기 시작한다.
그 증거는 카메라의 워킹에서 나타난다. 첫 장면처럼 마지막 장면도 카메라가 줌 아웃을 한다. 뒤로 당겨지는 카메라 렌즈 너머로 역시 춤추는 남녀들이 보이고 이제 익숙해진 나이트 클럽 내부가 공개된다. 첫 장면으로 인해 점진노출의 긴장감은 감소했다. 더 이상 전달되거나 추가될 정보도 없는 것 같다.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외화면의 영역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무언가 조금 달라졌다.
그것은 아마도 불편했던 현실이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일 게다. 추잡한 남녀의 포옹이나 불온한 조명이나 지저분한 바닥이 드러나도 현실은 예전처럼 불편하지 않다. 그 안에서 계속 삼류밴드로 남아있어야 하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운명도 그다지 걱정스럽지 않다. 무너진 꿈의 창백한 표정 사이로 떠돌고 있는 미열의 기운을 느끼기 때문이다.
김현은 〈불가능한 꿈이 아름다울수록, 삶은 비천하고 추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꿈을 잔뜩 골라내어 현실이 무너진 폐허와 같고 그 폐허의 잔해가 대부분 일그러진 꿈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지난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방만한 일일 수 있으며, 더 확대하면 무책임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불가능한 꿈을 아름답게 기워서, 불편하고 누추한 삶을 견디는 힘으로 재조명한다. 기태가 그러했고 정석이 그러했고 성우나 인희가 그러했던 것처럼, 음악은 관객들에게 가난하고 암담한 현실을 버티는 희망으로 다시 격상된다. 이것이 이 영화를 한층 가치있게 만드는 요소이다. 그리고 임순례는 이러한 방만한 작업과 무책임한 태도에서 스스로를 구제한다. 창백한 꿈의 끝자락에도 생의 희망은 있다고, 창백한 꿈의 끝자락에도 온화한 삶의 열기는 있다고, 마음속으로 되새기게 만들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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