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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문화산책/조폭(영화)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떠나갔는가/이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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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이상용
《씨네 21》 신인평론상 수상. 현재 영화주간지 《필름 2.0》 스텝 평론가, 문화일보 칼럼 <이상용의 영화보기> 등.
조폭(영화)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떠나갔는가
한국영화 점유율 50%의 신화. 이러한 수치는 발리우드라 불리는 인도처럼 다양한 언어와 노천에서 행해지는 영화 관람 환경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가 공수 될 수 없는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세계사적으로 드문 현상이다. 그런데 신화 달성의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조폭 영화'였다.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킬러들의 수다>, <달마야 놀자> 등 조폭이 나오는 소재의 코미디 영화가 흥행작의 목록을 채우는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다. 더구나 단 한 편의 낙오작도 없는 대약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작년 조폭 코미디의 대미를 장식한 <두사부일체>의 제작사 제니스 엔터테인먼트도 마찬가지였다. 제작을 결정한 2001년 3월 무렵만 해도 '조폭'이라는 설정이 대중적인 호소력을 얻기에는 장애가 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코미디 감각이 있는 시나리오에 희망을 걸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두사부일체>가 히트작이 되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두사부일체>는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과 <화산고>가 개봉하는 12월에 한바탕 스크린 확보 전쟁을 치러야했다. 유일한 전략은 대작 영화들 사이의 틈새 시장을 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두사부일체>는 개봉하자마자 예상외로 큰 호응을 얻으며, 배급사 CJ 엔터테인먼트는 점점 스크린 수를 늘려 나갔다. 서울 35개 스크린으로 시작한 <두사부일체>는 개봉 첫 주 좌석점유율 90%에 육박하는 관객몰이를 하며 거의 두 배 가까운 스크린을 확보한 <화산고>를 제쳤다. 관객들은 새로운 블록버스터보다는 웃음과 힘이 있는 조폭 코미디의 편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제작자나 관객 그리고 비평가들에게 여러 문제 거리를 안겨 준 셈이었다.
대작이나 멜로드라마를 선호하던 과거 관객들의 수용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물론 <두사부일체>가 내용 면에서 미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립 학원 재단에 대한 비리 폭로와 같은 현실적인 언급은 <두사부일체>를 다양하게 해석하도록 길을 열어놓는다. 그러나 홍보 단계에서 이러한 내용적인 부분은 철저히 빠졌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재미있다'라는 입선전이었다. 포스터의 문구는 "너, 딱걸렸어."
'재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대중 영화라면 당연히 고려해야 할 의무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동안 한국 영화는 이 재미를 추구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오히려 이들 조폭 영화는 철저한 기획의 상품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은 같은 조폭 코미디 영화라고는 해도, 캐릭터의 유형이나 이야기의 표현 방식이 사뭇 다르다. <신라의 달밤>이 친구 사이의 우정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면, <조폭 마누라>는 가위를 든 여성이 주인공이다. <킬러들의 수다>는 킬러가 직업인 한 무리의 형제들을 등장시켰고, <달마야 놀자>는 사찰로 간 조폭들을 다루었다. <두사부일체>는 이들 형제 영화들을 피해 보무 당당하게 학교로 갔다. 비슷한 조폭 코드를 활용하지만 각각의 영화들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세밀히 기획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놀랍게도 조폭 영화는 서로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멜로드라마가 붐을 이룰 때 고만고만하다는 인상과는 사뭇 달라진 것이다.
색다른 조폭 영화 <두사부일체>
대미를 장식한 <두사부일체>를 통해 이 영화와 기존 조폭 영화의 차이와 관계를 생각해보자. 고학력 시대를 맞이하여 유능한 조폭이 되기 위해서 계두식은 학교에 간다. 그런데 충성심 넘치는 중간보스 계두식은 스승의 권리가 떨어진 현실을 목도하게 된다. 평소 두목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생각하는(두사부일체!) 두식에게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식의 진심은 교권이 무너진 학원을 조폭의 정신으로 재무장할 수 있다는 무대포 정신에서 나온 발상이다.
문제는 신기할 만큼 조폭들의 정신세계가 학원의 풍토와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립학교의 교장과 이사들이 조폭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폭로에 이르면 '학생이 되려는 조폭'과 '조폭이 되어버린 학교' 사이의 상식을 무력화시킨다. 아마 조폭과 교육자 중 둘 중 누가 더 도덕적인가를 묻는 것처럼 황당한 시험지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시험지의 답안은 단순한 웃음의 유도를 넘어서 교육제도가 얼마나 비극적인가라는 현실 인식에 도달한다. <여고괴담>과는 다른 방향에서 <두사부일체>는 학원 영화의 관습들을 나름대로 소화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하반기 조폭 영화들의 대다수가 바로 이러한 한국 사회의 모순에서 출발했다. 그들은 술집과 뒷골목을 벗어나 가정을, 사찰을, 학교를 접수하기에 이른다. 가정, 종교, 학교의 일상적인 평화로움은 조폭들의 침투로 인해 새로운 영역으로 탈바꿈되며, 그 과정에서 웃음과 폭력이 유도된다.
과거에도 '팔도 사나이' 시리즈를 비롯하여 조폭 영화의 스타일이 크게 유행한 적은 있었다. 일명 '다찌마와리' 영화로 불리는 이들 작품은 정의, 영웅, 계몽을 앞세워 조폭들의 주먹 앞에 대중적인 지지를 보내주었다. 최근 조폭 영화들에게도 이러한 분위기는 감지된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사회의 반동으로 조폭 영화들은 일상에 내재한 폭력의 허위를 끄집어내고 스스로 조롱하는 하나의 유행이 된 것이다. 대다수의 조폭 영화들이 '배신'이라는 테마를 핵심으로 지닌 것도 그 때문이다. <친구>,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달마야 놀자>에서 배신은 드라마의 허리를 지탱하는 주요한 사건이다. 의리로 뭉쳐진 집단 내부의 배신은 이중적으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다.
그 첫 번째 얼굴은 타인을 믿을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이며, 두 번째 얼굴은 배신을 확인하는 순간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신뢰하게 되는 기묘한 쾌감이다. <친구>에서 유오성이 보여준 양면성은 바로 이러한 이중성에 기반한 것인데, 올해 조폭 영화를 마감하는 <두사부일체>는 여기에서 살짝 벗어난다. <두사부일체>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듯이 영화는 두목을 향해 충성을 다하는 중간 보스 계두식의 충성심이 핵심을 이룬다. 여타의 조폭 영화들과는 달리 조폭의 실상보다 학교의 현실에 밀착할 수 있는 것은 이 '충성심' 덕분이다. 돈으로 편입한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쳐야 졸업장을 따고 새로운 영토를 접수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지만, 참교육을 실천하려는 교사의 뒤를 따르며 두식은 부하들에게 학교를 접수하자고 성토한다. 그것은 주먹 다툼이 아니라 도덕의 게임이다.
덕분에 <두사부일체>는 과거의 조폭 영화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 반성과 검열을 보여준다. 칼을 휘두르는 장면도 없고 싸움의 과정에서 피를 흘릴망정 죽는 사람도 없다. 강력한 무기라면 목검과 야구방망이 정도이다. 여러 조폭 영화들과 비슷한 시기에 기획된 <두사부일체>는 먼저 공개되어 승승장구하는 동료들의 쾌거를 거울 삼아 조금은 성숙해진 장르 영화로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장르의 완성이라기보다는 시장의 냉정함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기존의 비판들을 수용하면서 시장의 흐름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한 끝에 또 하나의 변칙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변칙성은 조폭 영화의 생명력이기도 하다. 성장영화와 깡패 영화의 장르 관습을 섞었던 <친구>가 갱영화의 핵심 모티브인 배신을 주제적 차원으로 끌어올리지 않으면서 끝까지 멋있게 묘사하려 애썼던 남성적 힘의 품위가 조폭 코미디 영화에선 곧잘 무너진다. <두사부일체>의 주인공 계두식은 잘못을 저지른 부하에게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벌을 주지만 학교에서 거꾸로 비슷한 방법으로 온갖 모욕을 받는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낮에는 학교에서 학생과 선생에게 얻어터지고 밤에는 룸살롱에서 부하들을 두들겨 패는 이중적 폭력의 순환구조 안에 있는 그 주인공을 보며 관객들은 낄낄거린다. <조폭 마누라>에서 신은경이 연기하는 여자 조폭 두목이 순진한 남편을 거의 강간하듯이 범할 때도 피식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가했던 무수한 폭력의 형태가 정확하게 거꾸로 뒤집힌 상황으로 연출되는 것이다.
조폭 영화를 둘러싼 논쟁들
그러나 조폭 영화가 흥행의 무드를 타기까지는 여러 논쟁과 난관이 있었다. 특히 관객 점유율 50%를 향해 돌진하면서 <친구>, <신라의 달밤>의 바통을 이어받은 <조폭 마누라>의 흥행은 질적인 측면에서 한국 영화가 점점 하락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주었고, <친구>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조폭'이라는 소재로 인한 폭력성 논쟁을 야기하였다.
이러한 맥락은 흥미롭다. 한국 사회의 특수성과 한국 영화의 호황 속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는 것은 작가 영화도 아니고 장인의 영화도 아닌 상투적인 오락 영화다. 그것은 <조폭 마누라>를 단순한 대중 영화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 시대의 어떤 부분을 대변하는가를 돌아보게 한다. 우선 하나의 비교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두 영화간의 내용을 비교하는 것이지만 상호 비교를 통해 비평의 편협함과 무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롭게 비교될 수 있는 작품이 조폭이 등장하지 않는 <역기적인 그녀>이다. 구조나 영화가 다루는 이데올로기로 보았을 때 <조폭 마누라>와 <엽기적인 그녀>는 매우 유사한 영화다. 어떻게 가위를 휘두르는 조폭 마누라가 깜찍한 그녀와 같을 수 있냐고? 두 영화를 잘 보시기 바란다.
<조폭 마누라>에서 신은경이 결혼을 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오랫동안 헤어져있던 언니 때문이었다. 언니는 이 영화의 신파적인 부분에 해당하는데, 신은경이 심정적으로는 착한 인물이라는 설정을 가능케 한다. <엽기적인 그녀>에서 전지현이 밤마다 술을 먹고 괴로워하는 것은 사별한 옛 애인을 잊지 못해서이다. 그녀는 과격한 행동으로 견우를 놀라게 하지만 알고 보면 순정파인 착한 여자라는 설정이다.
여성을 강하게(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성을 약하게 그리는 것 또한 두 영화의 공통된 장치이다. 바뀌어진 성 역할은 영화를 이끌어 가는 도구인 동시에 곳곳에서 웃음을 유발한다. 두 영화는 혼합 장르라는 공통점도 지녔다. 영화 평론가 김영진은 <조폭 마누라>를 이것저것 뒤섞은 "누더기 영화"라고 평가했는데, <엽기적인 그녀> 역시 멜로, 액션, 판타지 등이 뒤섞인 퓨전 영화이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 걸맞는 잡탕 장르의 운용과 시대의 외피를 가볍게 두르고 빠른 속전속결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공통된 게임의 법칙이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맨 주먹 보다 양손에 가위를 든 신은경의 모습이 더 과장되었고, 더 장르 파괴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폭 마누라>는 좀 더 거친 '엽기적인 그녀'이다. 그런데 개봉 당시 언론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관객들에게는 두 영화의 유사점이 동일한 흥행 요소나 감수성으로 작용했지만 비판과 소개의 눈들은 두 작품을 철저히 다른 것으로 인식했다. <엽기적인 그녀>에게 보내진 찬사는 새로운 청춘 영화의 복권과 감각적인 대중 영화의 등장이라는 즐거움의 기호였지만, 첫 시사 이후부터 <조폭 마누라>에게는 쓴 소리만이 돌아왔다. 어째서 구조적으로는 코드가 유사한 두 영화를 이토록 상이하게 평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혹시 '엽기' 대신 '조폭'이라는 말을 수용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엄격한 분위기를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농담은 이럴 때 사용하고 싶은데 만약 '엽기적인 마누라'라고 제목을 달았다면 비판의 눈초리에서 좀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아니라면, '마누라'라는 단어가 걸렸던 것일까.
우리 시대의 비평적 아비투스
비평과 대중의 선택 과정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널리 알린 '아비투스'(취향, 습속)라는 개념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작품의 지각과 평가의 범주는 보는 이들의 사회계급적 위치나 자본의 소유에 따라 사회적 공간과 연관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서로 상이한 아비투스(취향)를 갖는 사람이 하나의 작품을 똑같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문화가 보편적이거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 교육이나 세대 간의 학습에 의해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사례를 보자. 1980년대 민중문학이 등장했을 때 민족 문화 평론가들은 전반적으로 민중 문학을 문학적인 품위를 갖추지 못한 거친 문학으로 평가하고 더 가다듬어야 할 대상으로 평가했다. 박노해의 민중시가 "단편적으로 끊어서 축조하는 시적 전개"를 갖고 있으며, "슬로건 이상의 시적 결말에 이르지 못하고", "농촌 공동체의 정서가 희박"하다는 식으로 평가했다. 반면에 민중 문학 평론가들은 박노해의 시가 "문학적 상상력, 문학적 감수성의 한 절정을 이루면서", "구조적 전체성과 역사적 진보성을 포괄"한다고 평가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일반적인 평가, 즉 비평적 아비투스는 민중 문학 평론가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80년대의 유력한 비평 진용은 이러한 평가를 거부했다. <조폭 마누라>의 비판을 둘러싼 비교 사례로 80년대 문학 논쟁이 완벽한 실례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한국 문학 비평의 짧은 역사 속에서 비평적 아비투스라는 것이 상당히 유동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갈등을 다시 한번 제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시대의 영화 평론이 지니고 있는 비평적 아비투스는 싸구려 취향이나 B급 취향의 관객 선호를 무조건적으로 배격하고 여전히 작가 영화의 선호라는 오래된 습관과 해묵은 기준에 맞추어 미리 재단하는 것은 아닐까. 특히 한 편의 영화에 대한 갈등의 장이 비평적 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하게 상정된 비평집단과 관객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정말 돌아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시대상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인데,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에 문학평론가 고 김현이 문학비평에 던졌던 "나는 이제야말로 문학비평가가 정말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생각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비평의 방법>)라는 유명한 문장은 영화 산업의 중흥에 걸맞게 이제 영화 평론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돌려져야 할 냉정한 물음이 아닐까 싶다.
<조폭 마누라>를 둘러싼 논쟁은 수용과 비평 사이의 갈등 사이에서 그치지 않는다. 보다 본질적이면서 보다 해묵은 기획은 영화의 폭력성 논쟁이다. 영화와 폭력에 관한 시비는 해결된 논쟁은 아니지만 결코 해결될 수 있는 논쟁도 아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사안이 하나 있다. 폭력이나 표현에 관한 시비는 얼마 전만 해도 주로 대중음악이나 만화에서 주로 당겨졌다. 서태지나 DJ. DOC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만화의 경우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시비를 들 수 있다. 성표현에 관한 거라면 마광수나 장정일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 사회의 표현 문제의 핵심은 영화로 집중된다. 이러한 현상은 본격적인 영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해줌과 동시에 영화가 카인의 표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분명 영화의 영향력이 어느 때보다 커졌으므로 창작의 주체들이 좀더 신중해야 한다는 말에는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선택의 주체가 누구였는가를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영화의 폭력성을 제기하는 논객들의 주된 입장은 '소박한 반영론'이다. 그들은 영향과 반영이라는 단어를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질문할 수 있다. 왜 다수의 대중들은 <친구>나 <조폭 마누라>를 보고 살인하지 않는가. 이러한 질문에 '영화 폭력론'을 주장하는 논객들이 꺼내드는 카드는 청소년 보호법이다. 최근 문화검열에서 국가 보안법 다음으로 강한 위세를 떨치는 청소년 보호법은 이들이 주장하는 도덕성의 보루이다. 이들 영화가 끼치는 나쁜 영향의 대부분은 청소년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또 한번 묻고 싶다. 그들은 지하철에서 구토를 하는 공공 위생법을 위반하는 '엽기적인 그녀'를 제소할 마음은 없는가. 엽기적인 그녀 역시 아주 불량한 대목이 많고, 전지현이라는 캐릭터는 신은경보다 청소년들에게 끼칠 영향력이 더욱 지대하다.
문제는 이들의 논지가 청소년들에게 국한되면 좋으련만 본심은 다른 데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청소년 보호법을 전국민들에게 확대 적용해 모든 국민들이 보호받을 대상이라는 식의 글쓰기를 펼친다. 고로 청소년 보호법은 전국민 보호법으로 확대 실시된다. 그러므로 영화를 수용하는 입장은 언제나 배제되고 도덕의 대중 문화를 재는 척도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역시 오래된 사례를 통해 역사와 아비투스의 문제임을 말해 두고 싶다. 과거 사드는 출판 금지를 당한 저질 작가로 평가받았지만 오늘날 사드의 작품은 당당히 역사의 반열에 올라 있다. <조폭 마누라>를 수용하는 대중들의 선택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임의적 기준에 의해 제단하는 형태는 폭력 논쟁을 즐겨 제소하는 논객들 사이에서 극에 달한다.
좋은 영화를 부탁해
물론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양이를 부탁해>,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같은 영화가 비평적 주목과는 달리 시장의 싸움에서 금새 물러난 것은 개인적으로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전에 이 땅에서 벌어지는 대중문화의 수용과 이상한 비판 문화의 선민의식을 구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폭력, 조폭, 깡패라는 단어만 나오면 그 표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백안시하는 풍조 말이다.
물론 <조폭 마누라>가 좋은 영화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비교에서 보았듯이 <조폭 마누라>가 <엽기적인 그녀>보다 여러 면에서 못하다고 평가할 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이 괴리 현상이 대중들에게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화비평 문화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스운 것은 <조폭 마누라>의 흥행이 한국 영화의 발전을 저해할 거라는 극단적인 평가를 내리거나 한국 영화는 폭력과 조폭이 아니면 통용되지 않는다는 신화를 창조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진단이다. 여기에서 항상 대립 구도로 영화판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허위가 드러나는데 과거 <조폭 마누라>의 위치를 대변하는 것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였다. 시시한 블록버스터가 시장을 점령하고 좋은 한국 영화가 사장되는 것은 불과 몇 년 안된 극장가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구도는 한국 영화간의 훨씬 진전된 긴장 구도가 아닌가. 이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의 다양성은 이럴 때 외치고 싶은데, 김혜준 영화진흥위원회 정책연구실장의 말대로 여전히 한국형 블록버스터부터 다양한 기획 영화가 만들어져야 할 필요성이 아직 충분히 있는 것이다.
조폭 영화가 일시적인 유행이건 새로운 변종 장르의 출현이건 간에 과거 한국 멜로드라마의 다양성을 단숨에 점령할만한 기세로 다양한 기획과 에피소드를 엮어내며 빠른 속도로 주류 영화의 대열에 편입한 것은 주목할만한 현상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성공을 장담할 수는 없다. 각각의 영화마다 편차는 있지만 에피소드의 나열에 치중한 탓에 장르의 세련됨이나 이야기의 원숙미를 보여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상업 영화의 흥미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한 코미디의 재담은 이야기의 부담을 더는데 사용되었지 사건을 심화시키거나 장르를 숙성시키는데 활용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조폭 영화의 태생적 한계로 이어진다. 남성적 힘에 대한 선망을 바탕에 깔고 곧잘 그것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 영화들이 귀착하는 것은 다시 그 남성적 힘에 대한 선망임을 알아채는 것은 쉬운 일이다. 희화화된 남성성은 사실은 부메랑처럼 돌아와 강한 남성적 힘의 권위를 강화시키는 효력을 감추고 있다. <조폭 마누라>에서처럼 남성과 여성의 뒤바뀐 폭력 행사나 <달마야 놀자>나 <두사부일체>에서 어울리지 않는 합법적 공간에 들어간 조직폭력배들이 확인하는 것은 어떻게든 폭력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싶은 믿음이다. 그건 허다한 자리바꿈을 통해서도 정당한 명분이나 윤리의 나침반이 없이 도덕적 커뮤니티를 세우는 데 실패한 한국 사회 시스템을 빙둘러 가리킨다. <두사부일체>의 주인공 계두식은 공부하러 들어간 학교에서 깡패 조직 못지 않게 폭력적이며 부패한 사학 재단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다. "이곳은 우리가 접수한다"고 영화 속의 계두식은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선언한다. 그때까지 그토록 희화화된 대상이었던 그의 폭력성이 이번에는 거꾸로 세상의 정의를 실현하는 영웅적 표식이 되는 것이다. <조폭 마누라>에서 조롱의 대상이었던 조폭 마누라의 남편도 아내 못지 않게 씩씩한 조폭의 면모를 갖춤으로써 영화의 결말에서 안전하게 구원받는다.
조폭 영화가 관객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함이 있지만 은근히 폭력의 신화를 옹호하는근본적인 이야기 구조로 인해 자기 모순에 빠지기 쉬운 형태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장르를 뒤집거나 패러디하는데 재미를 붙였던 일련의 조폭 영화들은 스스로 일시적인 유행만을 부추기는 결과를 양산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한 장르 영화라면 피해갈 수 없는 비판의 눈초리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들 영화가 만드는 웃음의 그림자이다.
웃음은 우리 삶에서 남긴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를 배출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건강한 행위다. 그러나 조폭 영화를 보며 터뜨렸던 웃음은 망가진 사회의 메커니즘에 침을 뱉은 게 아니라 은밀히 공모한 것 같은 찜찜함이 남는다. 조폭 코미디가 웃음의 전제 조건으로 깔아놓았던 자리 바꾸기의 전략은 조폭이든 교육자이든 어떤자가 헤게모니를 쥐든지 사회는 그다지 발전하지 않고 있다는 집단적 무력감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가 되든 사회는 바뀌지 않고 폭력은 되풀이되며 잠깐동안의 심리적 해소감만 남는다. 그런데 이 모든 웃음의 끝에는 '나는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비겁한 퇴행심리가 깔려 있는 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조폭 영화를 본 후 우리가 감당해야 할 최후의 도덕율인지도 모른다. 피곤하게도, 한국 사회는 웃음에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폭 영화가 지닌 의의이자 한계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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