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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기획/시민사회운동의 새로운 도약(跳躍)을 위한 한마당/안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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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운동의 새로운 도약(跳躍)을 위한 한마당
안남일
《리토피아》에서 《시민과 세계》라는 매체에 대한 견해를 써달라는 의뢰를 받고 서점에서 책을 구입했을 때의 그 난감함이란! 다름 아닌 《시민과 세계》라는 매체가 바로 2002년도 상반기호로 도서출판 당대에서 처음 간행되었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막 시작인 매체를 가지고 이 매체가 가지고 있는 성향이며 지향점에 대한 견해와 전망을 논의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하나의 매체의 탄생은 해당 매체의 '창간사'를 통해서 그 목적과 의도 그리고 방향성을 살펴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해당 매체가 가지고 있는 독자성과 타 매체와의 변별성 그리고 지향점에 대한 자세를 피력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해당 매체의 견해라는 것은 겉으로 들어난 것을 확인하는 선에 그칠 수밖에 없으며, 이후 해당 매체가 보여주는 내용들이 체계적으로 쌓여 나갈 때 비로소 전망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창간호만으로 《시민과 세계》가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게 무엇이며, 또 그러한 궁극적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움직임이 어떤 것인가를 파악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창간호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민과 세계》의 이념과 구체적 활동을 위한 이론적 성찰을 통해서 단편적이나마 현재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그 전망을 모색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시민과 세계》의 성격에 대한 검토를 통해 우리의 시민사회의 제 양상을 살펴보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시민사회(Civil Society)라고 하는 것은 사농공상(士農工商)과 같은 신분적 구분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사람이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이다. 그는 시민사회를 모든 사회의 기초로 보면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사회계약에 의해 구성하는 사회라고 정의한다. 또한 생명.자유.재산이라는 개인의 권리를 기초로 하며, 이를 수호하기 위한 시민적 결합으로 시민사회를 보고 있다. 그러므로 시민사회는 근대적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기초로 하면서, 그것이 개인을 중심으로 한다는 뜻에서 개인주의이며 따라서 자유주의인데, 국가주의에 반대하여 세계주의(Cosmopolitanism)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존 로크, 강정인 외譯, 역{통치론}, 까치글방120, 까치, 1996. 참조)
한국사회의 사회운동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괄목할만한 변화를 보이면서 그 핵심주체로 시민운동이 급부상했다. 맑스주의가 1980년대까지 진보운동의 중요한 토대가 되어 사회구성체 논쟁을 촉발시켜서 이론적.실천적 운동 즉, 노동자 계급투쟁과 사회구성체 논쟁이 진보진영의 주류를 이루었다고 본다면 1990년대에는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서의 시민운동이 활성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한국의 시민운동 역사를 이야기할 때 시민운동의 본격적인 시발점을 흔히 1989년 경실련, 즉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經濟正義實踐市民聯合)의 창립으로 잡기도 하는데, 이처럼 한국의 시민운동이 1990년대에 그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먼저 세계사적인 측면에서 냉전체제의 해체로 인한 이분법적 대결구도가 사라지고 환경, 인종, 종교 등과 같은 세계사적인 문제가 대두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한국사회의 상황 변화와 사회운동세력의 시민운동으로의 전환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우리 사회에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 곧 환경, 교통, 소비자문제 등의 새로운 사회문제들에 대한 제반 사항들을 정치권에서보다 시민운동세력들이 더욱 활발하게 개진해 나갔다는 점이며, 후자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며 형성된 사회운동세력들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시민운동세력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의 시민운동은 서구의 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의미로 전달된다. 서구의 민주화 과정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과 함께 진행되면서 시민사회의 형성과 발전은 정치적 민주화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식민지 상황과 해방, 그리고 분단상황 속에서 외부로부터 이식된 형태로 국가주도 아래 이루어졌다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다가 변화의 속도마저도 엄청났기 때문에 정치적 변화의 속도와 보조를 맞추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양상을 드러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서구에서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이 우리에게도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와 함께 사회적 갈등양상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형태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시민사회가 존재할 때 민주주의의 역량이 발휘될 것이고 시민사회는 강도 높은 사회운동이 있을 때 존재한다.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자기성찰적이고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개인들 사이의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보장한다"(케니스 H. 터커, 김용규 외, {앤서니 기든스와 현대사회이론}, 일신사, 1999. 참조)고 하였다. 이는 시민운동이라는 것은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가치의 선포이면서 동시에 문화적 지향성에 기반한 창조적 요구 행위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더불어 국가권력에 의한 시민사회의 식민화는 이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정당화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의 시민운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하승창([시민운동 10년이 낳은 문제, 시민없는 시민운동의 극복을 위한 작은 생각], 제1차 동서정책포럼 "시민운동, 이대로 좋은가?" 발표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시민운동이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운동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운동이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행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회적 비판에 답해야 하는 시민운동으로서는 이같은 사회적 변화는 중대한 것이다.
둘째, 우리 사회의 민주화과정의 확대와 지방조직의 성장, 정보화 등 여러 요인에 기초하겠지만 과거와 같은 중앙집중형 조직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조건이 되어 가고 있는 점이다.
셋째, 시민단체의 자기규제의 위기이다. 시민운동이란 결국 '공익'이라고 판단되는 문제들에 대해 자임하고 하는 것인 만큼 위임받은 사람들과 달리 책임질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만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스스로를 규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민단체의 주장이 사회적 공감대를 얻을 수 있다.
넷째, 시민운동의 정치적 진출에 관한 문제이다. 총선연대 활동은 시민운동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켰다. 그만큼 정치적 편향에 관한 시비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시민단체가 정치적으로 지지와 반대의 대상이 되거나 기존 정당을 통해 개인의 입신양명을 구하는 정치적 야심의 발판으로 이해되는 현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 시민단체 전체를 하나로 묶는 획일적인 연대기구에 대한 내외의 우려이다. 시민운동이 획일적으로 하나의 목소리만 내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시민운동이 기본적으로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자임하여 사회문제에 도전하는 것인 만큼 다양성, 다원화라는 그 기본정신을 훼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앞으로도 사회적으로 커다란 현안이라 하여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하나여야 한다는 듯한 풍토가 조성되는 것은 시민운동이 갖는 기본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므로 반드시 경계되어야 한다.
여섯째, 정보시대는 다른 조직구조를 원한다. 과거의 운동조직에서 중요한 것은 '집단'이었지만, 정보시대 조직에서의 중요한 요소는 개인과 개별단위이다. 시민운동에게 필요한 조직체계도 이제 네트웍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이제 시민단체에서도 운동가 개인에 대한 '교육'은 필수사항이 된다.
물론 우리 사회의 상황을 역사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서구에서 겪은 자본주의화의 경로를 거치지 않아 계급적 의식이 내적으로 충분히 성장될 수 있는 조건이 조성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시민적 담론이 부상하고 있는 것은 이제까지의 사회주의 운동이 상황을 현실적이고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대중들의 동의를 창출해 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민운동이 유효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논쟁보다는 현실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시민운동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한계들을 지적해내고 그것이 적극적 운동의 형태로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계급운동과의 유기적인 연대성을 찾아내어 재구성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계급운동의 규범들이 새로운 시민운동들의 동의를 얻는 과정, 그리고 이러한 동의를 기반으로 한 연대의 모색으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해내고자 하는 적극적인 운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측면에서《시민과 세계》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시민과 세계》와 같은 매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시민과 세계》를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것인 만큼 다른 매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시민과 세계》와 유사한 기존 매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시민운동에 대한 이론의 탐구와 정책의 제시와 같은 것이 해당 전문가 중심의 일방향적으로 편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 시기 시민운동의 급성장과 사회적 영향력의 증대가 시민들의 폭넓은 조직적 참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전문가나 시민운동활동가들에 의한 정책대안의 제시와 언론매체를 통한 홍보 등에 의지해 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시민운동이 우리의 일상적 삶과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또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행동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상호 개진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해당 매체가 가지고 있는 경직된 방향성에서 기인함과 동시에 거시적 안목의 토론의 창구역할이 미흡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시민과 세계》가 지향하고 있는 '논쟁(論爭)의 마당'으로서의 역할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아래의 글은《시민과 세계》를 발간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창간사의 일부분이다.
(중략) 시민운동은 국가와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행위자가 되었다. 제도정치에 환멸을 느낀 많은 국민들이 시민운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작년 이후 시민운동 역시 큰 시련에 직면해 있다. 비록 4.13총선 당시 900개가 넘는 시민단체들이 모여서 추진한 낙천낙선운동이 정치개혁의 가능성을 열었으나, 그 이후 나타난 정치권의 구태의연한 모습은 시민운동 내부에서도 자신의 한계를 절감케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더욱이 '홍위병론', '2중대론'등 시민운동에 대한 지속적인 공세는 시민운동의 입지를 크게 위협하였으며 나름대로의 의미 있고 중요한 성과들도 모두 묻어버리고 시민들을 정치적 허무주의로 몰아가는 데 일조하였다.
이제 시민운동은 문제를 제기하기만 해도 관심을 끌고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었던 초창기의 이득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고, 전문성의 확보와 구체적 대안의 제시, 도덕성과 일관성의 유지라는 과중한 짐을 지고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중에서도 당면의 실용적인 문제 해결에 치중해 온 시민운동도 앞으로는 이론과 정책으로 무장해야 된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중략)
이런 어려운 세상 한가운데서 또 한 권의 읽을 거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분명히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희망이 없다면 누군가가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개인으로 쪼개지고 있는 세상에서 모여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희망이 된다는 신념으로 이러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어려운 시대의 하나의 논쟁의 마당, 희망찾기의 마당이 되기를 자처한다. 계속 노력하다 보면 희망을 찾는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목소리에도 더욱 힘이 실릴 것으로 기대한다.([창간사 ; 시민사회의 정신적 도약을 위하여],《시민과 세계》창간호, 2002. 2∼4쪽)
[시민사회의 정신적 도약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우리는 《시민과 세계》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곧 현재 한국적 상황에서의 시민운동이 당면한 사안들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시민운동으로서의 도약을 이루고자 하는 문제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민과 세계》가 가지고 있는 매체의 방향성이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시민운동과 관련하여 그에 따른 전문성의 확보와 구체적인 대안의 제시 그리고 도덕성과 일관성의 유지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의 시민운동과는 달리 시민사회 내에서 형성되고 있는 진보적 담론의 소통과 시민운동의 이론과 정책을 논의하는 논쟁의 마당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은 시민운동에 대한 '실천적 이론'과 '이론적 실천'을 함께 드러내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어떻게 개진되고 있는 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권두언'에는 "우리 사회 시민공론광장의 새로운 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풀뿌리 참여민주주의에 기반을 둔 새 시민공동체를 지향하며, 이를 중심으로 우리 시대 개혁과 진보 담론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산실 역할을 수행한다"(5쪽)는 편집인들의 발간취지를 담고 있다. 더불어 《시민과 세계》창간의 기본 정신을 "열린 연대를 지향하고, 열린 연대는 더불어 사는 공동의 세계를 지향하고, 《시민과 세계》가 추구하는 시민/공동체는 단지 국가 시민/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세계 시민/공동체"(7∼8쪽)로 명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보다 넓은 시민공론의 광장으로 기능하면서 실종된 개혁담론 재생을 위한 시민사회운동의 열린 연대와 성숙에 기여하고자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제기획'에는 "시민사회에 대한 일반론을 넘어 과연 '시민'이란 누구이며, 어디에서 그 시민을 찾을 수 있는가"(9쪽)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권력과 상호관련성을 통해 민주주의를 완성해 가는 시민의 존재를 탐색하고 있다.
'창간기념 좌담'에는 2001년에 발생한 9.11테러 이후의 세계질서의 변화의 방향과 현단계 한국사회에서 민주화의 답보와 신보수화 경향에 대한 주제를 통해서 "세기초 새로운 전환시대의 상황을 진단해 보고 어떻게 한국사회 개혁의 새로운 활로 또는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112쪽)를 모색해 보고 있다.
'세계의 창'에는 "테러사태와 보복공격 이면에 있는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 이로 인한 계급.계층.국가 간 대립과 갈등, 국제적 긴장의 고조와 국제적 분쟁의 빈발에 대비한 군사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군산복합체, 그리고 미국 주도의 군사화와 군산복합체와 세계의 테러집단 간의 기생적 상보관계"(183쪽)를 요한 갈퉁(Johan Galtung), 사카모토 요시카스(坂本義和) 등의 동.서양 필진들의 담론으로 풀어내고 있다.
'동시대 논점'에는 "한국 시민사회의 발전을 위한 현단계의 과제를 찾아내어 현상을 분석하고 대안을 찾아낸다는 문제의식"(241쪽)을 가지고 당대 우리 사회에서 조속히 해결해야 할 문제점을 제시하고 그 대안적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
'참여사회 구상'에는 참여연대의 '시민참여―시민연대―시민감시―시민대안'이라는 활동방향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장으로, 시민적 삶을 위한 바람직한 제도 또는 정책의 대안 마련을 모색하고 있다.
'시민운동/시민문화'에는 시민운동과 시민문화에 대한 비판적 조망을 통해 풍요로운 시민문화창출을 위한 제요소들을 검토.분석하고 있다.
'특별기고'에는 현 시기 시민사회의 역할과 발전방향과 관련해서 제기한 사안들 전체는 "시민.사회 단체들의 존립과 생존, 발전과 활력을 위하여 보편적으로 관련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속적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부분적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결합하여 반드시 성사시켜야 하는 과제"(390쪽)라는 사실을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참여연대 상임집행위원장으로서의 경험을 통해 고민과 대안책을 제시하고 있다.
'논단'에는 시민, 시민사회, 참여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이고 학술적인 담론들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북리뷰'에는 시민사회, 민주주의, 시민운동뿐만 아니라 정치.사회.경제 등 시민담론을 다룬 저작(著作)들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시민과 세계》창간호에 수록된 내용들을 통해서 이 매체가 가지고 있는 목표와 의도 그리고 방향성을 살펴보았다. 시민사회의 강화는 민주주의의 내실화 과정이며 시민운동은 민주화의 내실화를 가져올 수 있는 핵심적 운동이면서 동시에 민주화를 제도화시켜나가는 중심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민과 세계》가 가지고 있는 방향성은 현 시기 한국사회에 대한 객관적 시선확보와 문제점에 대한 대안적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시민운동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의 지평을 확대하고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정부와 시민이 공감하는 제도적, 문화적 근간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는 또한 개개의 주체적 이해와 관점을 넘어 전 사회적 역사적 관점 속에서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시민과 세계》는 앞으로 시민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사회적 정론을 추구하며, 시민운동의 다양성을 인정하고자 함을 역설하면서 이 길이야말로 NGO(Non-Goverment Organization)의 시대에 당연히 우리사회가 갈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시민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바람직한 시민운동의 방향이 설정될 수 있는 기초를 《시민과 세계》가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민과 세계》의 이러한 노력에서 상기해야 될 점이 있다. 그것은 《시민과 세계》의 방향성이 타당하고 그 구체적 실천들을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그것이 시민과의 연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처럼 일부 특정 시민이나 단체와의 연대만으로는 독자층을 확보하면서 《시민과 세계》의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따라서 《시민과 세계》가 추구하는 시민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방향성을 어떻게 유지해 나가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결국 시민운동의 성공 여부는 시민운동이 추구하는 목표, 해결을 해나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얼마만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러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하는 《시민과 세계》의 '열린' 방향성에 대한 믿음이 퇴색되지 않고 보다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시민운동의 주체가 시민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해당 전문가의 논지도 필요하겠지만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시민들의 생생하고 다양한 모습도 지면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리고 독자들의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마련되어 이들과 상호소통할 수 있는 방안도 필요하리라 본다. 이것이 곧 진정한 '연대'가 될 것이며, 시민 스스로 권리와 정의를 찾아 나서는 '참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맺으면서, 프랑스의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Fransois Auguste Rene Rodin)의 '칼레의 시민(The Burghers of Calais)'을 생각한다. 14세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 때 프랑스의 칼레시(市)를 구한 영웅적 시민들의 기념상인 '칼레의 시민'. 이 작품은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서로 다른 여러 표정과 복장을 한 여섯 명의 시민들이 사지(死地)로 걸어가는 모습을 건강하고 늠름한 모습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비장한 모습과 고뇌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들 여섯 명의 시민의 모습은 전체적인 통일성을 보여주면서도 정(靜)과 동(動)이 절묘하게 어울려 각 시민들의 평등한 모양새를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칼레 시민들의 태도나 표정은 그들이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그들의 확신을 잘 나타내었는데, 이는 시민들의 모습을 너무 용감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죽음을 앞둔 여섯 명의 인간적이고 진실한 심정을 표현하려는 로댕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칼레의 시민처럼 우리의 시민운동도 시민 모두가 스스로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 나서고 모든 지혜와 전문적인 역량을 모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때 보다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질 수 있는 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 시민운동의 선봉에서《시민과 세계》가 더욱더 굳건한 토대가 되어주기를, 그리고 정진해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고려대, 안양대 강사 / 《작가연구》편집위원(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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