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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집중조명/전후 인간의 파괴적 자화상 :김구용의 『詩』/조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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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구용 시와 삶의 흔적
전후 인간의 파괴적 자화상 :김구용의 『詩』
조해옥
1. 전쟁 체험과 『詩』
6.25 전쟁은 시인의 체험 영역을 확대시켰다. 전쟁 체험은 외부에 대해 눈을 뜨게 만들었다. 고향 상실과 강압적인 이별과 굶주림의 체험은 비극적이지만, 인식의 확대와 현실 비판적 시각을 가능케 한 토대가 되었다. 전쟁 체험을 반영하는 작품들은 50년대 현실의 문학적 수용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또한 전쟁 체험은 인간 내면에 대한 탐색을 가능케 하였다. 김구용의 50년대 시는 비극적인 외부 현실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가 결합되어 있다. 그의 산문시는 관념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고, 환상적 구조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전후 현실과 괴리되어 있지 않다.
50년대 문학은 전쟁 문학적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공통된 양상을 보인다. 모더니스트 시운동이 피난지 부산에서 '後半紀'동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고 순수서정시의 경향과 50년 후반의 '실험적 기교주의'의 시인들이 시단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1950년대 시문학의 밑바탕에는 전쟁 체험이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쟁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 역사적 사건의 영향력과 체험의 정도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50년대의 문학은 첫째로 절박한 현상의 문학, 내지 절실한 보고문학적 성격을 띠게 된다."고 한 평가는 이 시기의 문학 작품들에서 노출되는 문학적 형상화의 결여를 지적한 것이다. 이 같은 전쟁문학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전쟁체험을 초현실적 기법으로 수용하고 있는 김구용의 시작품들은 50년대 시문학사에 상당한 의의를 가져다 준다.
김구용은 1949년 《신천지》에 시 <山中夜>와 <白塔頌>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1976년에 간행된 시집 『詩』에는 전후(戰後) 현실이 긴장감 있게 반영되어 있다. 『詩』는 기존 가치에 대한 저항 정신을 함축적으로 형상화시켰다는 점에서 김구용의 시력(詩歷)에서 상징적인 시집이다. 『詩』에서 전쟁 체험의 비극성은 시적 자아의 파괴되고 분열된 심리 상태를 통해서 드러난다. 전쟁의 흔적은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로써 전후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
2. 허상과 광기의 뇌염균
김구용은 인간의 지식과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긴다. 전쟁은 지식과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허상에 의지해 죽음을 합리화시키는 극단적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김구용은 인간의 지식이 만들어낸 전쟁의 허상을 '광기의 뇌염균'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에 뇌염 환자는 운명하는 것이다. 곁에는 처자도 없이 송장이 송장 위에 누적될 따름이다. 인류의 智腦는 균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균들은 그들의 主調를 보이지 않는 舞踊과 소리 없는 歡笑로 교차하며 精을 이루었다. 균들의 신, 균들이 발생한 사람 몸은 가속도로 백골이 되다. (중략) 언제인가 사람은 頭骨을 집어들고 아내에게 말하겠지. 보라, 이것은 우리가 古文書에서 흔히 읽을 수 있는 그러한 뇌염으로 사망한 자는 아니다. 구멍이 여기에 증거로 있다. 이것은 彈穴이다. 사람이 사람의 智腦에 의하여 사람을 서로 죽인 생명의 투쟁이었다. 炎菌은 그 腐腦에서 퍼졌을 것이라고.
-<腦炎> 부분, 1952
뇌염균이 인간에게 생물학적인 죽음을 피할 수 없게 하듯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그것을 합리화시키는 인간의 지뇌(智腦)는 "피할 수 없는 毒菌"에 감염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毒菌"이란 추상에 지나지 않는 관념이 발생시킨 전쟁의 광기이다. 절박한 죽음 앞에서 자신의 절규도, 자신을 구원해줄 사람도 없이 죽어 가는 뇌염 환자처럼,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전쟁터에서 무고한 사람들은 총탄에 쓰러져 홀로 죽어간다. 화자는 죽은 자의 탈육된 두개골에서 지식의 허상이 만든 뇌염균의 흔적을 찾아낸다. 그 흔적이 총탄에 의해 뚫린 구멍이다. 김구용은 한낱 헛된 관념 덩어리에 불과한 이데올로기와 그것이 자행한 전쟁의 폭력성을 독균에 감염된 지뇌로 표현한다. 지뇌에 의해 사람들이 서로의 생명을 빼앗도록 만들고, 그러한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이 바로 전쟁인 것이다.
전쟁의 상처는 죽음의 만연을 체험하는 데서 발생한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죽음의 만연화와 대도시의 비정함이 1950년대 김구용의 시에서 시적 자아의 황폐한 내면으로 표출된다. 전쟁은 가려져 있던 인간의 어두운 충동을 노출시킨다. <탈출>은 전쟁과 피난을 직접 묘사하여 인간의 살고자 하는 본능을 드러낸다. "발가벗은 본능은 生·死의 양극에서 思考와 역사성이 없었다. 祖上이 미지 앞에 꿇어 엎드렸던 바로 그 자세였다./그러나 지식과 과학이 인간을 부정함에 만질 수 없는 용모와 보이지 않는 救護를 힘없는 입술로 불렀다."(<탈출>, 1951) 지식과 과학과 이데올로기와 무기는 인간 존재를 부정하였다. "저주할 자기 肉塊와 양심을 割切하는 천재가 되어 餓死를 면하"(<탈출>)하기 위해 항도(港都)로 탈출한 화자의 체험을 담은 <탈출>과 더불어 <피난지>(1951)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막다른 지점까지 쫓겨온 시적 자아의 절박한 심정을 보여준다. 이 시의 화자는 바다를 앞에 두고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지점에 서서 "나는 없었다" 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전쟁은 김구용의 시에서 시적 자아들이 생의 '막다른 지점'에 서 있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확인하게 만든다.
<療飢圖>(1953)에서 화자는 요기를 하기 위해서 지하식당을 찾는다. 그곳에서 화자가 요기하는 과정은 먹는 자와 요리된 음식과의 투쟁처럼 묘사된다. 굶주린 화자의 눈에 요리사의 "뺨과 이마와 또 모발의 언덕은 불로 변하며 연신 살점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요리사의 육체에서 살점을 보는 화자의 극도의 기아 상태는 전후의 궁핍함을 잘 보여준다. 또한 굶주린 자가 음식을 급하게 먹는 과정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식당 안의 사람들의 시선은 잔인하다. 김구용은 화자가 음식을 먹는 것을 식당의 다른 사람들이 임상대(臨床臺)에 누은 화자를 요기하는 것, 즉 세계가 요기하는 것과 대응시키고 있다. 화자가 음식을 먹는 과정은 스스로를 심각한 자괴감에 빠뜨린다. "가엾이도 나는 臨床臺에 누워 그들과 요리인을 성당의 천정으로까지 우러러보았다. 내 시궁창 같은 내장의 시험관에 음식이 질걱질걱 고이면서 세계는 요기하였다. 요리인이 어깨를 뒤로 젖히고 승리자로서 나를 비웃었을 때 그 얼굴에 퍼지는 광명을 감탄하였다." 굶주린 화자가 자괴감에 빠져 음식을 먹는 행위는, 그를 굶주리게 만든 현실에 의해서 그의 육체가 관찰되고 요기되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된다. <療飢圖>에서도 시는 먹는 자와 먹히는 자의 적대적 구도를 갖는다. 전후의 현실은 강한 자와 약한 자의 적대적인 대립과 투쟁이 있을 뿐이고, 여기에는 오로지 승리와 굴복의 원칙만이 지배한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시적 자아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짐승과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자의식에 함몰된다. "오늘도 나는 사람 탈을 쓴 굶주린 짐승"(<半獸身>, 1952)으로, "산 속 물에 제 모습을 비쳐 보며, 간혹 피묻은 입술을 축"이는 半獸身(<半獸身의 독백>, 1953)으로 자신의 모습을 고백하는 자야말로 전후 인간의 자학적인 초상인 것이다.
3. 밤의 관음(觀音)과 백의(白衣) 관음
김구용의 시에서 관세음보살은 1950년대를 살아가는 민중의 고통을 여러 모습-과부, 매춘부, 고아 등-으로 현현하면서 전후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로 나타난다. 매춘부는 김구용의 시에서 전후 현실의 어두운 측면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체로 작용한다.
그러나 김구용이 현실 속에서 그것을 포용하는 관음의 모성적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은 현실에 대한 그의 직시(直視)가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정신인 것이다. 그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전후 사회의 단면을 매춘부를 통해 제시하는데, 매춘부는 민중의 고통으로 나타나는 관세음보살, 즉 "밤의 관음"(<관음찬 Ⅱ>)이다. 그는 밤의 관음인 매춘부를 통하여 허무감과 파괴충동에 사로잡힌 전후 인간의 초상을 구현시키고 있다. 매춘부를 통하여 혼란에 빠져 있고, 가치판단이 정지된 공간인 전후의 혼란상을 함축시켜 보여준다. 동시에 매춘부는 매춘부와 성행위를 하는 시적 자아의 현실 속의 모습을 발견하게 하는 매개이다. 시적 자아가 매춘부와 성행위를 하는 형상은 자멸하듯 서로를 파괴시키는 양두사(<벗은 奴隸>)로 표현된다. 하나의 동체를 가지고 있으나 머리는 둘이라서 서로를 물어뜯고 파괴시키는 양두사는 전후 공간과 그곳에서 생존하는 인간에 대한 김구용의 자학적인 직시(直視)이다.
<無想의 母胎>는 성 마리아의 무염시태(無染始胎)를 패러디한 작품이다. 매춘부인 소녀의 아비를 모르는 임신은 성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가진 마리아의 무염시태와 대응한다. 성 마리아와 성스러운 가정을 이루는 요셉은 매춘부 소녀의 몸을 욕망하는 '그'와 비교되며, "세상의 아버지" 예수는 매춘녀의 사생아라는 운명을 지니고 세파를 헤쳐가야 하는 아기와 조응한다. 인간적인 욕망을 초월하여 숭고한 신앙에 의한 마리아의 수태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성가정은 아비를 모르는 아이를 밴 매춘부와 세상의 혼란을 잊기 위해 매춘부의 육체를 욕구하는 '그'의 동서생활과 극적으로 대조되어 나타난다. 성가정과 이들의 동서생활의 유일한 공통점은 매춘부의 "성스러운 모성애"이다. 그러나 매춘부가 성 마리아처럼 아기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은 매춘부인 그녀의 현실 속에서는 아이러니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녀는 틈만 나면 붉고 푸르게 팽키칠한 음식점에서 또는 창 없는 판자집에서 남자들과 交接하면서도 그에게만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未久에 그들은 汚辱을 주며 받았다. 머리맡의 의복과 물 그릇은 희미하니 빛났다. 그는 그제야 처녀가 누구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음을 알았다. 분노나 실망이나 질투는 마음의 광장 어디에도 그늘지지 않았다. 厭症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써, 살아 있는 인형과의 접촉은 계속하였다. 무작정한 행동은 도시의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가가 되었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누구에게도 죄는 없고 어디에도 평화는 없었다.
<無想의 母胎> 부분, 1956
'그'는 길에서 잡화를 파는 소녀의 몸을 정복하고자 한다. 그 정복욕은 그가 산에 오르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그와 매춘부의 사랑은 오욕(汚辱)을 주고 받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는 매춘부가 누군가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가 "염증이 나지 않"는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또 도시의 혼란을 잊기 위해서 매춘부, 즉 "살아 있는 인형"과 접촉을 계속한다. 반면에 화자의 살아 있는 인형은 "그의 애무에 대해서 수지(收支)를 맞춰야 한다"고 여기는 매춘부인 것이다. 화폐와 육체에 대한 욕망만이 관계를 지속시켜 주는 도시의 뒷골목은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파괴되고, 가치판단이 정지된 공간이다. 그곳에 사는 이들에게 죄의식은 부재한다. 그와 매춘부의 관계와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의 의미는 1950년대 도시의 무질서와 가치관의 혼란상으로 확대된다.
그는 매춘부 소녀가 아기를 가졌다고 고백하자, "'내부를 가린 의상이 훌륭하게 임무를 다하였다'며 칭찬하였다. 그는 그녀에게 '범죄자는 누군지 알 수 없으나 축복받아야 한다'고 대답"한다. 여기에서 "내부를 가린 의상"이란 내장을 가린 육체를 의미한다. 여자가 임신한 것을 여자의 육체가 임무를 완수한 것으로 여기는 그의 의식에는 아비를 모르는 아기를 가진 여자에 대한 질투 같은 '감정'은 개입하지 않는다. 그는 "살아 있는 인형"에 대해 냉정한 관찰자의 거리를 유지한다. 그는 매춘부의 태아에 대해서도 "사람으로 형상되는 한 마리 어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아무도 결과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 번 배〔腹〕속에 떠오른 달은 黃金面에 계속 상처의 금을 그으며, 숲을 뚫으며, 달아나는 그들의 차를 건전히 따라왔던 것이다. 폭격에 부서진 空地에서나 공장 굴뚝 너머로 관청과 또는 언덕 위 병원이며 성당이며 시체실을 통과하여, 고궁의 기와등으로 충돌도 정지도 없이 어떠한 장벽도 권력도 방어도 물리치고, 학교 옆구리에서 달은 다시 튕겨져 나왔다.
,<無想의 母胎> 부분, 1956
김구용은 소녀의 태아가 점점 자라나는 것을 그와 매춘부의 뒤를 집요하게 좇아오는 하늘의 달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뱃속의 태아가 자라는 것은 어떠한 것으로도 막거나 피할 수 없는, 그들과 태어날 아기의 운명적인 현실을 상징한다. 그는 아기의 탄생을 보면서 아비를 모르는 한 인간의 고단한 운명을 예감한다. 그는 매춘부에게 아기의 아버지 노릇을 하겠다는 거짓말을 하고 매춘부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그는 산모를 혼란의 沼에 핀 연꽃으로서 바라보았다. 처녀인 동시에 매음부며 아기 어머니인 동시 소녀인 一人四役의 여자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무엇에도 물들지 않는 明鏡이 될 수 있을까. 그는 불가능한 기대 외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無想의 母胎> 부분, 1956
그가 매춘부에게서 더러운 연못에서 피어나는 연꽃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無想의 母胎>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가 걸어가는 도시 거리는 여전히 성당의 시계는 죽어 있고, 매음부 같은 여자들이 거리에 넘치고, "전사자들이 길거리 곳곳에 쓰러졌었던 지난 날"이 지배하는, 기대가 불가능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꿈의 이상>은 시적 자아가 밤의 관음으로 파악하는 전후 현실을 포용하면서 백의 관음으로 상징되는 이상적 세계와 일치되어 가는 깨달음의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꿈의 이상>는 화자인 '그'가 실직자였을 때, 굶주려 있던 자신에게 오렌지를 주었던 '흰 옷의 여자'를 그리워하며 찾아헤매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는 지난날에 실직자로서 쓰레기 안에 전락한 일이 있었다. 어디를 가나 그는 飢餓와 외면하지 못하고 기름때 묻은 거리를 헤매었다." 그가 육신에서 벗어날 길 없는 굶주림 때문에 과일가게에서 수모를 당하고 쫓겨난다. 그때 청년과 같이 온 흰 옷의 여자가 오렌지를 사준다. 그는 오렌지를 준 흰 옷의 여자를 그가 꿈꾸는 이상으로서 가슴에 새긴다. 흰 옷의 여자는 그의 현실과 꿈 속을 오가면서 환상으로서 나타난다.
대학 시간 강사인 그는 잡지사의 대담 자리에서 여의사와 여교사와 여대생 세 명의 여자와 만나게 된다. 세 명의 여자들은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상류계층 사람들이다. 그에게 흰옷의 여자가 가지는 고결한 이미지는 확고해 지는 반면에 세 명의 여자들은 그에게 염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처녀 의사는 덤불을 그 창 안에서 헤치며, 한 겹 깊은 胎兒를 긁어내는 중이나 아닐까. 그는 그렇게 짐작하였다. 蛇穴을 採掘하면 그녀의 수입은 느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여의사는 흰까운을 입었을 것이다. 지난날 그에게 오렌지를 주었던 그 여자의 흰 옷차림이 떠올랐다. 그는 酸化하는 이중의 영상에서 막연한 염증을 느꼈다."(<꿈의 이상>) 흰 가운을 입은 여의사에게서 흰옷의 여자를 연상하는 것에서조차 염증을 느낄 만큼, 그는 흰 옷의 여자를 성스럽고 고결한 존재로 꿈꾸었다. 그러나 흰 옷의 여자는 "막연한 理想"이며, "현실에 나타난 정신의 영역", "가능의 배반당한 모습"이다. 그녀는 비현실적인 이상 속의 여자인 것이다.
여자는 연꽃과 용이 비친 거을을 들여다보며 온화한 미소를 품었다. 그녀의 얼굴은 거울 속에서 점점 觀音으로 변하였다. 그는 그녀의 등뒤에 서서 정면 거울에 나타난 聖 白衣觀世音菩薩을 보았다. …거울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지난날의 연회빛 양복 청년이 서 있었다. 관세음보살은 없었다. 연회빛 양복 청년을 반가이 영접한 흰 옷차림의 여자는 손을 서로 맞잡고 실내를 나가려 돌아섰다. 그녀는 백의 관음이 아니었다.
-<꿈의 이상> 부분, 1957
그의 환상 속에서 흰 옷의 여자는 백의관음으로 나타난다. 백의관음은 "나는 원래부터 이유가 없어요"라는 말을 반복한다. 김구용은 이상이 구현된 존재로서 백의관음을 설정하고 있는데, 백의관음의 이 같은 말은 전쟁과 전후 현실에 대한 거부의 정신을 함축한 진술인 것이다. 김구용은 '지뇌(智腦)'가 원인과 결과를 연구하는 과학적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이성중심주의의 극단적인 표출의 예를 전쟁에서 발견한다. 이 같은 그의 생각은 <腦炎>과 <消印>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원인을 탐구하는 근대과학에 대한 저항정신이 백의관음의 "나는 원래부터 이유가 없어요" 라는 말에 함축적으로 나타난다.
"나는 원래부터 이유가 없어요"는 그에게 강박증으로 나타나는 과거의 악몽-동족 간의 전쟁-을 수용하는 관용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데, 악몽 같은 환상은 현실과 혼재하면서 전개된다. 그의 환상과 강박증은 전쟁의 상처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환상 속에서 전쟁터의 악몽은 기계적으로 반복된다.
오렌지는 까맣게 첨탑을 덮어 누르면서 푸른빛으로 끓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이 다시 하나의 기계로 변하는 과정을 느꼈다. (중략) 의병들이 倭軍을 만났을 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총구멍에 견주어진 그는 祖先들보다도 원통하였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사람은 동포였다. 그는 높은 창에 있는 잡색 유리의 예수 상으로 변신할 수 없는 자신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십자가가 굽어보는 밑에서 북에서 온 동포는 그에게 다발총을 들이대고 가까이 왔다. 잡히거나 달아나는 우연은 어디에 있는가. 결정적인 순간이 앞으로 다가왔다. 죽음을 의식한 때까지가 지옥이었다. 시체가 되면 무서움은 해소될 것이다.
-<꿈의 이상> 부분
동포가 총구를 겨누었다는 사실은 죽음 앞에서 가지는 극도의 불안감과 함께 그에게 가치관의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이다. 차라리 죽은 자가 구원받은 것이라고 여길 만큼 그는 절박한 위기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던 동포는 그의 친구에 의해 사살되고, 그의 목숨을 구한 친구는 폭격 당한 성당과 함께 희생되고 만다.
그러나 그가 고통스러운 과거의 악몽과 현재를 수용하게 되자, 비로소 흰 옷의 여자에 대한 그의 집착은 소멸하게 된다. "앞날은 미지였다. 그러나 분명한 무엇이 그에게 암시하고 있었다. 흰 옷차림의 여자는 그의 기억에서 퇴색하기 시작하였다. 괴로운 덩어리는 늙을수록 인자한 주름살의 광명을 폈다. 생은 벽의 눈을 떴다. 연꽃이 눈물에서 피었다."
형광등 불의 그늘진 곳에 앉은 그는 고급 과자로 만든 화단을 바라보며, 여의사와 함께 卵形의 케이크를 들었다. 거지 아이가 여의사의 어깨 너머로 서양 글씨의 橫書한 유리벽 밖에 힘없이 돌아서 있었다. "난 본래부터 이유가 없어요." 문득 흰 옷차림의 여자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는 그 위치에 서 있는 거지 아이에 대하여 애정을 느꼈다. 불쌍한 아이들은 열을 짓고 유린당한 꽃밭 구릉을 넘어가고 있었다.…그는 거지 아이에게 돈을 주었다. 그는 소년에게서 忍從과 慈情과 고생으로 끝난 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꿈의 이상> 부분
그가 부단히 찾아 헤매던 대상인 백의관음이 이상 속에 있지 않고, 궁핍한 전후의 현실 속에 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예전에 그가 굶주렸을 때, 오렌지를 나눠주었던 흰 옷의 여자가 관음이었고, 빵 가게를 들여다보는 거지아이였고, 어머니였다. 그가 예전의 백의 여자가 자신에게 적선을 하였던 것처럼, 거지아이에게 돈을 준다. 그는 거지아이에게서 백의관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적선행위는 관념과 이상에 사로잡혀 있던 그가 비로소 비참한 전후 현실을 사랑하는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이 같은 깨달음은 <관음찬 Ⅱ>(1957)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관세음보살, 이제 당신은 蓮座에 없다./나는 배고픔에 외치는 音光에서 당신을 본다." "때묻은 유방의 열매와 가난한 家具와 괴로운 밤의 관음,/모두 다 모습은 다르나 어디고 있다." 나는 매춘부이고 매춘부는 고아이고, 고아는 관세음보살이다. 전후의 공간에서 소외된 모든 자들에게 관음은 현현한다.
<꿈의 이상>에서 그가 만났던 세 여자와 매춘부와 흰 옷의 여자와 거지아이는 백의관음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회전하며 변모한 것이다. 세 여자가 보여주는 다양한 세속의 모습들, 하숙집 과부의 욕망, 생활고로 매춘하는 여자, 굶주려서 양식을 들여다보는 화자와 거지아이 등의 모습이야말로 전후의 인간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화자는 변하지 않는 실체-백의관음-만을 갈망하였기 때문에 혼란 속에서 헤매었던 것이다.
4. 글을 맺으며
『詩』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은 산문시 형식으로 50년대 전후 현실을 드러낸다. 김구용은 산문 형태를 빌어 시를 쓴 것은 기존의 시형식에 대한 파괴일뿐 아니라, 50년대 현실의 절박함을 담는 데 적절한 형식이었음이 드러난다. 김구용은 전후 인간의 황폐해진 내면과 그 원인에 대해 정밀하게 포착하여 보여준다. 그는 <腦炎>에서 헛된 관념 덩어리에 불과한 이데올로기와 그것이 자행한 전쟁의 폭력성을 독균에 감염된 지뇌(智腦)로 표현한다.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전쟁의 허상이 '광기의 뇌염균'인 것이다. 전쟁은 과학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간이 부정된 극단의 예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가려져 있던 인간의 어두운 충동을 노출시킨다. <탈출>과 <피난지>는 살기 위해 생의 '막다른 지점'에 서 있는 자의 비참한 모습에 대한 확인이다. 또한 <版畵>, <마지막 곡예>, <療飢圖> 등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극한의 현실을 지배하는 생존법칙은 시적 자아로 하여금 자신을 자학적인 반수신(半獸身)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김구용은 <疲困>과 <인간 기계>을 통하여 도시문명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김구용은 어둡고 고통스러운 전후 사회의 단면을 매춘부를 통해 제시한다. 그의 전후 의식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매춘부는 무감각과 파괴충동에 사로잡힌 전후 인간의 초상이다. <벗은 奴隸>는 경제적인 빈곤 때문에 육체를 파는 매춘부의 '벗은 노예'의 의미는 50년대의 사회적 의미로 확대된다. <無想의 母胎>도 역시 매춘부를 통하여 파괴된 인간관계를 드러낸 작품이다. <꿈의 이상>은 '밤의 관음'으로 상징되는 고통스러운 전후 현실 속에서 이상적인 꿈으로서의 백의관음을 발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실을 수용하지 못하고 이상만을 좇던 시적 자아가 밤의 관음과 백의 관음이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과정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김구용의 시에서 고통스러운 현실은 시적 자아의 환상과 교차하면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김구용의 시가 보여주는 초현실주의 기법은 50년대의 현실을 기반으로 전개된다. 김구용의 시가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외국문화의 수용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김구용 시에 나타나는 초현실주의적 기법은 50년대 현실을 배경으로 형성된다. 현실의 비극을 생동감 있게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그가 시에 산문 형식을 도입하였던 것처럼 의식의 자유로운 확대가 수용된 것이다.
조해옥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저서로 <이상 시의 근대성 연구>가 있음.
한남대, 고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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