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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집중조명/구용의 시 『아리랑』 분석/배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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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배인환
댓글 0건 조회 3,533회 작성일 02-11-0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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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구용 시와 삶의 흔적
구용의 시 『아리랑』 분석
-나의 발견

배인환


1.

구용의 작품들은 우리 시문학사에 금자탑으로 자리 매김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들은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역작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일반 독자들은 물론 시를 전문으로 하는 내노라하는 비평가들이나 시인들도 접근을 꺼리고 있다. 왜냐하면 널리 알다시피 그의 시는 난해한 시로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구용 시의 난해성에 대해 나는 [구용의 삶과 문학」(2002년도 ≪금산문학≫)에서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로 서술한 바 있다.
첫째, 시어의 선택에서 추상명사의 도입과 상징어 은유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함축된 한자어가 많은 점도 하나의 이유이다.
둘째, 표현 양식이 특이하다는 것이다. 구용 자신의 표현을 들어보면, "선배들의 시를 읽어보니 전통양식의 표현만 가지고는 도저히 내가 의도화 한 표현이 안 될 것 같아 내 나름대로 시적 표현에 노력해 왔습니다."
이러한 의도에서 나타난 것이 조남익의 표현을 빌린다면 '진술형식인 역설적 표현, 풍자적 진술, 모순 형용법 등이 원용되어 있다.'고 말했으며 홍신선은 '김구용의 시에는 그가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간에 선적 방법론이 두드러지다 고 말하고 있다. 시 문맥의 비 논리성이나 비약, 이질적인 극단의 이미지 연결 등에서 오는 부조화 등이 바로 선적 방법론이라는 것이다.
셋째, 시의 모더니즘 양상이 매우 복합성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시에는 초현실주의 절연기법이나 의식의 흐름, 주지주의의 몰개성의 태도 등 현대시의 온갖 요소들이 엉키어 있다.
넷째, 시작과정에서 언제나 결론부터 출발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기교는 기승전결에 길 드려진 독자들에게 당혹 감을 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다섯째, 시의 배경이 노장철학과 불교의 경전에 그 근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독자가 그의 시를 이해하려면 먼저 동양 고전과 불경에 어느 정도 예비 지식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여섯째, 많은 시가 장시라는 점이다. 소설도 장편보다는 단편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에 시를 쓰면서 장시를 들고 나왔다는 사실은 독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는 점이 명백하다.
이런 6가지 요인들이 그의 시의 특징이기 때문에 읽히지 않는 시, 어려운 난해시, 철학적인 형이상학 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냥 외면만 할 수는 없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속담을 교훈 삼아 험난한 황해에 도전해 보고자한다.
구용의 시는 3부 작 {구곡}, {송백팔}, {구거}를 30년에 걸쳐 써냄으로써 완성을 보게 된다. 그의 이전의 시집인 {시}는 이 시집을 준비한 단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시집 {시}에는 여러 가지 실험들이 들어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있다.
그의 3부작은 이름이 「아리랑」이라고 밝힌 바 있으나(≪현대문학≫1983년 2월호, 대담 p.131)실제로 전집으로 나온 것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그리고 그의 시집 {시}에 수록 된 「아리랑 ⅠⅡⅢ」을 1960년, 1960, 1961년에 각각 발표하면서 위의 장시 {구곡}, {송백팔}, {구거}를 써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위의 대담). 따라서 구용 시의 열쇠는 「아리랑 ⅠⅡⅢ」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먼저 이 작품들을 분석해 보고, 구용 시의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 한 걸음 다가가 보고자하는 데 이 글의 의도가 있다.
그러면, 구용 시의 이해를 위해 ≪현대문학≫(1983년 2월호)에서 가진 대담의 일부를 들어보자.

丘: {구곡}과{송백팔}그리고{구거}는 내겐 3부작입니다. 이것을 합치면 제목이 「아리랑」입니다. {구곡}{송백팔}{구거}는 사실 30년 계획을 잡고 십년마다 집중적으로 1부 씩 써온 것입니다. {구거}가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좀 더 시일이 걸려야겠지요 {구곡}중에서 1곡은 현대문학에 발표했는데 그때 제목이 「아리랑」입니다.
鍾: 아리랑 이라고 선생님께서 특별히 생각한 까닭은 무엇인지요?
丘: 산문시집 {시}에 보면은 「아리랑 ⅠⅡⅢ」이 있어요. 그때부터 해보고싶단 의욕이 들었지요. 아리랑이 무엇인지 사실 나는 잘 모릅니다. 왜정 때 나라 없는 설음이 분하고 원통해 이 나라 국민으로서 많은 서러움을 겪으면서 아리랑이 무엇인지 확실히는 모르지만 맘에 들었습니다.

이상의 대담에서 구용은 시적 동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동기만 말하고 있을 뿐 깊은 뜻은 말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자신은 아리랑이 무슨 뜻인가는 잘 모르지만 일제 강점기에 나라 없는 서러움에 복받쳐 아리랑이 마음에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김홍근은 {구거}의 해설인「한 문학 작품의 도는 세월이 판단해 줄 것이다」라는 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김구용의 모든 시에는 제목이 없다. 그저 시詩일뿐이다. 마치 모든 사물이 원래는 이름이 없듯이 그 시가 세상에 나왔을 때, 다른 것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마지못해 시우 천상병이 지어준 것이 '곡曲' '송頌' '거居'이고 그 3부작을 묶어 '아리랑' 이라고 불렀다. 모두 넓은 의미에서 '노래'라는 뜻이다. 이 본격적인 3부작이 나오기 이전의 시를 모은 그의 첫 시집도, 같은 맥락에서, 제목이 '시詩'였다."

김홍근은 구용의 시는 전부가 노래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구용의 시는 아리랑과 같은 노래라는 뜻이다.


2.

구용의 시중에서 「뇌염」이나 「풍미」는 이미 걸작으로 발굴되었다. 필자의 생각으론 「아리랑 ⅠⅡⅢ」역시 그의 대표작이 될 것은 의심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구용 자신이 이 시를 거론하였다는 하나의 사실만 가지고도 유추할 수가 있다. 또한 읽어보면 그 깊이와 다양성이 빼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T.S 엘리오트의 「J. 앨프리드 프루프로크의 연가」가 「황무지」나 「내 개의 4중주」의 징검 다리 역할을 하듯이, 또 R.M 릴케의 「눈먼 여인」이 「두이노의 비가」나 「오르포이스에의 소네트」로 이어주는 역할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리랑 ⅠⅡⅢ」은 {구곡}{송백팔}{구거}에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시는 「아리랑 Ⅰ」이 60행「아리랑 Ⅱ」가 41행「아리랑 Ⅲ」이 50행, 도합 151행의 장시이다. 같은 해에 쓰여진 144행의 「불협화음의 꽃Ⅰ」이 「아리랑 ⅠⅡⅢ」과 비슷한 분량이다. 그러나 산문시의 빅 쓰리인 「소인」「꿈의 이상」「불협화음의 꽃Ⅱ」나, 훗날 본격적인 장시인 {구곡}{송백팔}{구거}에 비하면 단시에 불과하다.
이 시들은 구용의 다른 시와 마찬가지로 난해시 임에 틀림없다. 한 번 읽어서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모든 감성과 지성을 다 동원해서 천천히, 차근차근, 자세히 읽어야 겨우 어렴풋이 알 정도이다. 「아리랑 ⅠⅡⅢ」을 다 분석할 수는 없다.
그렇다 김현이 「3곡」의 해설에서 '모든 현명한 시평가들이 말하고 있듯이 시를 산문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필연코 그 시에 대한 하나의 배반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논문의 끝 부분에 가서 그는 또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주저하고 당황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산문이고 「3곡」은 시이기 때문이다. 시라는 점에서 「3곡」은 우리가 영구히 들어갈 수 없는 유리 저편에 응결된 행위이다. 우리는 다만 멀리서 바라 볼 수 있을 따름이지 그것을 확인할 도리는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지적은 구용 시의 난해성에 대한 시평가의 고뇌의 일단을 피력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1. 시의 시대적 배경

「아리랑 ⅠⅡⅢ」이 쓰여진 1960년은 4.19혁명이 일어난 해이며 1961년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해이다. 이 두 혁명은 정신사적으로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기에 충분했고 시인들 역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래서 몇몇 시인들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좋은 작품들을 썼고 그것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김수영의 「풀」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같은 작품이 대표적인 케이스 일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에서는 이 양대 혁명에 대하여 직접적인 표현은 일언반구도 없다. 다만 그러한 대 사건들이 녹아들어 변형된 현실로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홍신선은 이 점에 대하여 "전쟁과 혁명 같은 외면 현실세계의 감당하기 힘든 격변을 통과하면서도 김구용은 앞에서 적은 대로 기이하게도 내면 심리 묘사에 집착하고 있다."라고 언급한다.
「아리랑 ⅠⅡⅢ」은 구용 시의 특징의 하나인 산문시를 졸업할 시기에 쓰여진 자유시라는 점이다. 실제로 산문시는 1961년에 쓴 「불협화음의 꽃Ⅱ」와 1962년에 쓴 「9월 9일」이후에는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는 시인이 등단한 이후 10년만에 쓴 작품이고 시를 쓰기 시작한 24년만에 쓴 작품이며 120여 편의 시를 쓴 후에 쓴 작품으로 시인의 기량이 어느 정도는 완숙기에 접어든 시기에 쓴 작품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2-2. 타 시인의 유명 작품과의 비교

이미 나름대로의 평가를 받고있는 동시대의 시들-김수영의 「풀」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 김광섭의「성북동 비둘기」 전봉건의 「피리」등과 「아리랑 ⅠⅡⅢ」을 비교해보면 구용 시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나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아리랑 ⅠⅡⅢ」이 수많은 연봉을 가진 금강산이라면 위의 시들은 백두산이나 한라산 같은 단일 봉의 시라고 할까 하는 점이다. 구용의 시가 좋게 말해서 깊이와 다양성을 지닌 작품이라면 역사적 평가를 받은 위의 작품들은 통일되어 있고 집중되어 있는 작품이라 시적 향기가 확 풍겨온다. 반면에 구용의 「아리랑 ⅠⅡⅢ」은 나쁘게 말하면 난삽하다. 그래서 향기가 나지 않는다. 반면에 인간의 피냄새와 퀴퀴한 땀 냄새가 날 뿐이다.
시의 난삽에 대하여 구용의 「3곡」에 대한 평에서 김현은 뽈 발레리가 프레데릭 르페브르에게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난삽성이란 세 가지 순서의 이유 때문에 생겨난다. 처음 이유는 작가에게 주어지는 주제의 어려움에서 온다. 이러한 경우에, 작가가 명확함을 기하면 기할수록 작품은 읽기에 어려워진다. 두 번째로는, 시인에게 부과되어 있는 수많은 독립적인 조건들 때문이다. 만일 시인이 조화와, 이 조화의 연장, 조형적인 효과의 단속됨, 사고 자체의 단속됨,그리고 우아함과 구문의 유연함을 만족시키려한다면, 그리고 그가 전체를 고전적인 운율의 틀 속에 끼워 넣기를 원한다면, 그의 노력의 복잡함이, 그가 충당하였던 조건들의 독립성이 그로 하여금 그의 스타일에 대해 머리 쓰게 하고 그의 작품의 마티에르를 아주 단단하게 하고, 독자의 정신을 어지럽힐 압축 혹은 생략법을 써야만 하는 경우를 만들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세 번째의 이유는 이 두 가지의 다른 요소들의 혼합에 지나지 않는다. 즉, 그 이유는 아주 오래 연장되어온 작업의 결실이 시 텍스트에 축적되어 있다는 데에 있다."
이상이 김현의 인용문이고 「3곡」이 위의 3가지 이유 때문에 난삽하다고 말하고 있다.

2-3. 「아리랑 ⅠⅡⅢ」과 장시 {구곡}, {송백팔}, {구거}와의 연관 관계

{구곡}, {송백팔}, {구거}는 시집 {시}에 있는 많은 시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시인이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시간에 따라 어쩔 수 없는 내면의 성숙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막연한 관계이고 「아리랑 ⅠⅡⅢ」이 {구곡}, {송백팔}, {구거}와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이고,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밝히기는 너무나 벅찬 작업이다. 그것은 위의 시들을 독파하고 분석하고 비교 검증해야하기 때문에 한 몇년은 걸려야 할 작업의 분량이다. 앞으로는 그런 연구를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본 고에서는 주제 면에서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 하는 정도만 말하고자 한다.
「아리랑 ⅠⅡⅢ」의 주제는 '나의 발견'인 것이다.
「아리랑 Ⅰ」에서 '나를 발견한다.'는 구절이 두 번 나온다. 그것도 시의 마지막에서 결론처럼 나온다.
「아리랑 Ⅱ」에서도 '나'에 대한 이야기가 집요하게 나온다.
「아리랑 Ⅲ」에서는 '나'라는 단어는 집적 말하지는 않지만 '무수히 부정한 길을 얼마나 부정하면/ 이르를 수 있는 곳인가.'하고 묻고 있다. 이것 역시 나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절규이다. 그러므로 「아리랑 ⅠⅡⅢ」의 주제는 '나의 발견'인 것이다. 물론 달리 볼 수도 있다. 특히 「아리랑 Ⅲ」에서는 어떤 경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구곡}{송백팔}{구거}의 주제는 무엇인가? 역시 이 장시들의 주제 역시 '나의 발견' 이다.
다행히도 구곡에 대한 비평문은 몇 편이 된다. 그 중에서 김진수는 구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려 300여 쪽에 이르는 김구용 시인의 장시 {구곡}을 이끄는 핵심적인 모티브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여 '나'를 찾아가는 험난한 정신적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시간의 풍화를 겪으며 천변만화하는 무상한 자아를 벗어나 '참된 나'를 발견하기 위한 정신적 구도의 도정을 노래한 시이다."

{송백팔}에 대해서는 구용 자신이 ≪조선일보≫('송백팔'에 대한 이상현기자와의 대담. 1980.7.23) 에서 의도를 밝힌 바 있다.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 세상 살다가는 인생길에서 뭔가 자신의 밑천을 추려내 볼까싶어 써온 것들입니다. 막연한 동기에서 쓰기 시작했지만, 우리의 삶을 비판적이나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다는 찬양, 찬송하는 입장을 시도해본 것이지요.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곧 자신을 위한 노래입니다. 예전에 미처 가져보지 못했던 것을 찾고자하는 자기발견이지요.

이렇듯이 {구거}에 대한 좋은 평론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나, 이들 논의의 핵심을 추출해보면, {구거}에서도 주제는 '나의 발견'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1거의 2에서 구용은 다음과 같이 나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그 동안 소식이 궁금하던 날
    어린이 놀이터에서
    잠시 나를 잊었더니
    시가市街는 점점 새로웠다.

    오해를 받았을 때는
    오해한 이가 생각나서
    기대했을 때는
    기대한 이가 생각나서

    그러다가 언제부터인지
    수시로 나마저 잃어서
    음악 풍경에
    내가 있었다.

    몰랐던 일을 상상도 못했던 작용으로
    알았다고 하자
    그러나 그러기 이전에도
    내가 있었음을 안다.

    그런 뒤로 심심하면
    간혹 나는 없어져,
    미싯가루를 물 타는
    그녀 곁에서 내가 쉬고 있었다.

    이러히 연습 삼아
    시간의 안팎으로 드나들다가
    산책하기에 이르렀으니
    거듭 부정한 긍정이라구나 할까.

    비가 오네요.
    귀기울여 들어보세요.
    모양과 색깔은 각각이지만
    하나 하나가 빛나네요.

「아리랑 Ⅲ」의 '무수히 부정한 길을 얼마나 부정하면/ 이르를 수 있는 곳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는데, 이 1거의 2에서 '거듭 부정한 긍정이라구나 할까' 라고 응답하는 것이다. 30년 전에 나에 대한 부정이 30년이 지난 오늘에야 긍정으로 응답을 하고 있다. 이 얼마나 긴 자기탐구의 여정이냐!
{구거}에서는 시인의 평생의 화두인 '나의 발견'에 대한 탐구와 동시에 결론에 도달한 경지를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2-4. 구용 시의 시적 인물

「아리랑 ⅠⅡⅢ」에는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들이 시의 키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잘 살펴보면, 「아리랑 Ⅰ」에는 O양이 있고 그가 있다. 그리고 소년이 있다. 또 노인이 있다. 「아리랑 Ⅱ」는 문씨가 있고 내가 있고 매춘부가 있고 소년이 있다. 「아리랑 Ⅲ」에는 이양과 아내가 있고 역시 소년이 있다. 「아리랑 ⅠⅡ」에는 새가 나오는데 새들은 한 쌍이다. 「아리랑 Ⅲ」에는 한 쌍의 남녀가 나온다. 이렇게 많은 인물들이 소설이 아닌 시에 등장한다.
이 시들의 배경은 전후의 각박한 현실이며, 매춘부가 등장하는 질서가 파괴된 암울한 세태와 살인을 저지르는 무시무시한 대도시의 뒷골목, 미군에게 유린당하는 순정과 자존심 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다. 세 편 다 소년과 이양이 살해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는 개인이 아니라 메카니즘화 된 사회라는 암시를 한다.

「아리랑 Ⅰ」은 세 편중에서 길이가 가장 긴데 첫 연에서 '괴로움'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보기 드물게 비유를 써 가면서 설명하고 있어 이해하기에 쉽다. 구용의 시에서 비유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의 시에는 항상 은유나 환유등 이해하기 어려운 고차원적인 수사법이 동원된다. 다만 인간의 '괴로움'을 매우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하긴 인생에서 고뇌가 없다면 정신적인 산물인 문화가 창조될 수 있을까? 고뇌 없이는 시 한 줄도 쓸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삶은 그냥 동물적인 생존에 그칠 것이다.
이 연에도 '철로 가의 무수한 논밭'이라는 매우 기발한 표현을 하고 있다. 평화의 상징인 논밭에 기계문명의 이기라고는 하지만 침략자의 개입은 많은 애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 2연에서 본격적인 구용 시의 스타일이 나온다. 탐과 종에서 나오는 외침은 곧 아리랑이 아닐까. 무어라고 새길까 묻는다. 그는 '곡'과 '송'과 '거'로 새겼다. 이 구절에서 금강산 1만 2000봉의 아름다움으로 '곡'과 '송'과 '거'를 쓰겠다는 시인의 도저한 야망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이때 그의 필생의 3부 작의 태동을 보는 것이다.
이 3부 작을 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고 제정, 즉 시간과 노력이 문제일 뿐 손톱을 깎는 일처럼 일상이다. 하늘의 비밀과 종교까지도 파 해쳐 보겠다는 의욕이 엿보인다.
이제 시에서 현실이 나타난다. 구용 시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는 성적 타락의 문제가 여기서도 나온다. O는 가나다 뭇 남성이 좋아하는 창녀인 모양이다. '칼들이 난자하여도'에서 칼은 무엇의 상징인가. 남자의 그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절망에서도 날개를 보고 있다. 이어서 나오는 남녀의 대화는 더욱더 재미있다. 다음 연에서의 노인은 누구인가. O의 아버지가 아닌지. 그의 시선은 딸의 어린 시절을 절망의 현실(겨울나무)에서 꿈속처럼 보고 있다. 우리의 딸은 양갈보로, 우리의 소년은 도둑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전후의 참담한 현실, 그리고 그 소년은 살해되고 마는 분단의 현실. 이것이 내국의 현실이고 외국은 어떤가. 지금 미쏘는 핵폭탄 놀이를 하고 있다. 그것도 강변에서, 강은 역사로 상징되는 시어임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어떻게 핵 폭탄을 가지고 놀이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무모한 짖을 인류가 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불안과 고독과 일촉즉발의 위기를 의식하면서 살아야하는 현대인들의 비극이 있다.
그는 이런 가지가지 사물과 현상에서 나를 발견한다.
다음 연은, 내부의 세계로 들어간다. 물이 흐르는 것은 시간의 개념이다. 이때까지는 공간에서 보았다면 이제는 시간에서 보겠다는 의도이다. '가죽 구두가 변하듯'은 무슨 말인가. 발로 뛰는 것이 아닌가? 하도 많은 길을 걸어서 가죽 구두가 변형되어있다. 얼마나 재미있는 표현인가. '살구꽃이 새들의 노래를 모으듯'은 여러 가지 함축된 표현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적인 나의 진면목을 찾는 것이 이 시의 주제인 것이다.
「아리랑 Ⅱ」에서는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시에서는 문씨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씨는 구용 시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일연의 비슷한 인물일 것 같다. 자의식 과잉의 룸펜 같은 지식인일 것이다. 왜 하필 문文씨일까? 문학가를 표현하고싶었던 것은 아닐까. 씨 자가 붙은 것을 보니 보통사람이고 바로 시인이다. '문씨는 두 눈을 가진 유리 컵'에서 그 비밀을 알 수가 있다. '두 눈을 가진 유리 컵'은 무엇일까? 이 것은 현미경이다. 시인은 견자이기 때문이다. '컵'이라는 표현은 왜 했을까? 그것은 현대는 음료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두 눈을 가진 유리컵'을 현미경으로 봐야 다음의 번갯불로 연결이 된다. 현미경을 보기 위해서는 밝은 빛이 필요하다. '나무 가지를 뻗는'에서 나무가지는 무수히 많고 그곳에는 잎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시인의 영역은 확대되는 것이다. 첫 연의 '세균의 번식처럼/저마다 개성하는데'는 무슨 말일까? 이 말은 이 사회가 위에서 말한 지식인들의 잉여생산을 비꼬는 것이 아닐까. 넷째 연의 '자병의 사슴' 역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시인이기 쉽다. 그렇게 봐야만 '포도빛 새벽을 마신다'와 연결이 가능하다. 왜'자병'의 사슴일까. 문화재지만 살아있지는 않다는 뜻도 되고 이미 지난 세월이라는 뜻도 되겠다. '마신다'는 중첩된 표현이다.
그 다음 연의 '언어 이전의 말씀,/그 모습', 이 구절은 시인이 시로 표현하고자하는 목표가 된다. 시인은 이 어둠 속에 있는 말과 모습을 찾기위해서 평생을 거는 것이다.
다음 연부터 미군에게 음모를 깎기는 조롱당하는 우리의 딸이 나오고 철조망에서 총살당하는 헐벗은 동포, 빈 깡통을 줍던 소년의 이유 없는 살해 등 비참한 현실이 나온다. 이런 현실을 유리창을 통해서 보는데 그 창(의식)에 고이는 눈물은 우리의 침묵을 깨고 부르는 노래를 듣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서인 아리랑이라는 것이다.
다음 연에서는 '외국산 새 한 쌍'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해독하기가 어렵다. 필자의 생각으론 외국 가수나 시인의 상징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외국의 문학이론, 더 비약한다면 성모 마리아와 예수 등이 아닐까. 외국에서 현대 시를 배운 시인이 한국적인 것에 접목한다는 표현이다. 왜 라디오냐 하면, 그 당시 최고의 홍보 매체가 라디오이기 때문. 나머지 시구는 어렵지 않다.
다음 연에서부터는 구용의 영원의 주제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시인이다. 시인이란 남들이 다 자는 밤에 등불을 밝히고 그것도 '지저분한 셋방'에서 고난의 길을 걷는 나이다. 그래서 '군중 속의 나를 헛되이 바라본다' 산 속의 수도승이 아닌 군중 속의, 군중과 아픔을 같이 하는 시인인 나를 헛되이 바라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소득이 없는 나이기 때문이다. 나에 대한 탐구에도 부정이 거듭되면서 진전이 없다.
다음 연의 문씨는 사실 구용의 분신이다. 그는 시를 쓰며 밤에 몰래 눈물 짖는다. 어떻게 시인의 가슴을 가진 사람이 울지 않을 수가 있을까. 국경이 없는 진짜 시를 쓰고싶은 것이 희망이기도 하다. 그 때야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모든 책에 있는 말은 내가 일상 사용하는 낱말'에서 시의 완성을 예견하는 구절인 것 같다. 3부 작에 대한 강한 의욕이라고 할까.
「아리랑 Ⅲ」에서는 불교적인 냄새가 짙게 난다. 음악과 시도 깃들여져 있다. 또 특이하게 남녀의 사랑 이야기도 나온다. 이 시에서도 나를 찾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첫 연의 아프리카는 춤과 노래의 메카, 음악이 있는 곳에 천사들은 있다. 또 연인들도 있고, 사랑의 절정은 둥근 거울(완성된 의식)안 시선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에서는 실연(거울의 난파선)은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나 절정에 다다른 사랑은 하강 곡선을 그리면서 파멸은 왔고 그것은 집산 생멸의 이치이며 사랑의 생멸은 의상으로 춤춘다는 것이다. 의상으로 춤춘다는 표현이 참 미묘하다. '육수점'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사랑의 성에서 물러가는 길거리(도시의 길, 인생의 길)의 타임을 안다. 이때 이와 비슷한 비련의 여인 '춘희'가 라디오의 전파를 탄다. 실연한 이양은 비오는 날 떠났고 갈 길 없어 유곽으로 들어갔는데 '하얀 봉함 편지(자살 혹은 사망 통지)'가 되어 날라 왔다.
다음 연은 빈한한 시인의 가정이 나타난다. 마치 두보의 만년처럼. 모든 천재 시인들의 비참한 현실의 삶처럼. '무념의 눈'/과 '천연한 청각'을 갖고 있는 사람은 바로 견자이다. 남편인 시인은 병들고 굴 껍질을 까는 아내, 메밀 묵이나 약밥을 파는 아들, 셋집인지 무어인지 모르지만 집은 형무소 담벽에 가까이 있다. 감옥에 앉아있는 죄수들은 "메밀 묵이나 약밥 사요"에 어떤 심정일까? 이 연에서는 또한 감옥에 가친 사람이 죄수인지 감옥밖에 있는 사람이 죄수인가를 묻고 있다. 달리 보면 구용은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죄수인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는 듯 하다.
다음 연에서 '너의 손은 걸레' 라는 시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너는 나의 분신이며 바로 시인의 손이다. 시인은 더러운 곳을 닦는 걸레가 될 수밖에 없다.
네온의 불빛이 망령처럼 비치는 도시에는 사람다운 사람이 살지 않고 달에 심겨진 계수나무는 4대 문안에서 시들어 달의 신비는 그 잘난 인간의 지능 때문에 파괴된다. 분단된 대지는 전쟁에 휩싸이고 피눈물이 강산을 덥고 전쟁의 승리는 형제의 시체들을 넘어오건만 이런 사항도 모르고 소녀는 월간 잡지를 보고 천진하게 웃는다. 전쟁 중에도 사랑을 하듯이.
아리랑의 종장은 새김이 바뀔 때마다 지배자의 담은 높아가고 그럴수록 웃음을 자아내려고 복선을 깔아 놓는다. 소설 같은 사건이 끝났지만 소설보다 더한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무념을 살려내니까, 순수의 시간이 비로소 오고 일단 시간을 인간은 숙명적으로 받아드릴 수밖에 없다. 무념 무상은 인간사를 떠나 세상은 불변의 부처의 세상이 된다. 그러나 아직도 나를 발견하는 길은 험난하다. 부정은 대 긍정을 위한 도정이다. 민요의 후렴이 3번 뒤따른다.

                                       3.

이상 필자의 나름대로 「아리랑 ⅠⅡⅢ」을 분석해 보았다. 몇 군데는 독파하지 못했고 많은 오독이 있었을 것이다. 오독도 때로는 창조적 오독이 될 수 있다는 일설에 위안을 느낀다. 문학 작품은 어디까지나 읽고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리고 깊이 못 읽었을 지라도 안 읽는 것보다는 낫다고 자위해 본다. 그러면서도 구용의 시는 끝없는 '자기 발견'이 구용 시의 근저에 흐르고 있는 주제이었음을 알아본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아무튼 이 시들을 읽으면서 구용의 시에서 엉뚱하게 쓴 것 같이 보이는 낱말 하나도 헛되이 쓴 것이 하나도 없으며 많은 시구들이 단순한 의미로 쓴 것이 아니고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는 것,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구용의 시도 시간을 넉넉히 가지고 읽고 또 읽으면 어느 정도는 의미를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한 위대한 시인의 작품의 일면이라도 읽어보니 충만한 기쁨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행복은 아닐 것이다.
앞으로 구용 시를 위한 좋은 비평문이 계속 많이 나올 것을 믿으며 아울러 그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날로 증가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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