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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집중조명/시와 <석가>라는 아이와 어머니와/이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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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조명-구용 시와 삶의 흔적
시와 <석가>라는 아이와 어머니와......
이진명
원고청탁을 받았을 때 산문쓰기도 싫고 집안일로도 바빠 망설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쓰겠다고 답한 이유가 하나 있다. 구용선생의 말 한마디 때문이다. <석가>라는 아이를 아시오! 그 한마디 때문에. 세상의 누가, 또 어느 책에, 또또 어느 시에 이런 一喝이 있었던 적이 있던가. 구용선생의 그 한마디 뒤에 이어지는 다른 말들도 마찬가지. 나는 그 말을 갖고 시를 써 발표하기도 했으니, 오늘의 이 글을 써야만 한다는 생각이 거절을 못하게 했다. 개안. 누가 내 눈을 띄어 주었는가. 개안. 꼭 그것만 같았다. 이렇게 칠십 老詩人이 2천5백년을 박살내는 것을 들으니, 시쓰는(문학하는) 사람의 힘이, 비루했던 문학(시)의 힘이 새삼 위대하게 생각되는 거였다. 돌풍처럼 속을 휘돌며 나간 그 말은 단순히 말이 아닌, 무슨 始原의 압축덩어리인 것만 같았다. 그 말은 2천5백년이라는 시간만을 박살내는 것이 아닌, 우주 평생의 시간을 박살내는 것만 같았다. 가슴속에 확철한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이런 박살을 이루어내는 것은 아닐까. 구용선생의 시와 불교와 어머니와......
원고청탁의 제목은 <김구용 선생님에 대한 시인의 단상>이고, 주제 및 집필 방향은 <구용 선생의 시와 삶에 대한 산문적 접근>이다. 나는 구용 선생의 시에 대해 특별한 애착으로 무슨 공부를 한 것도 없고, 더욱이 그 삶에 대해 접근이라는 용어를 쓸 정도로 아는 바도 없다. 문학청년 시절, 시문예지 등에서 누군가의 짧은 글로 만났거나 귀동냥으로 들었거나 하는 걸로, 내 맘에 맞는 몇 가지의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20세 중반 무렵에 딱 한번 뵈었고, 내가 등단하던 무렵(30세 중반) 다니고 있던 출판사 민음사에서 구용선생 번역의 [열국지] 출간 때문에 몇 차례 뵙게 된 일이 있고, 결혼하고 출판사 그만두고도 몇 차례인가 찾아뵙긴 했었다. 그럴지라도 솔한 만남이다. 그런 솔한 만남 속에서 내 맘에 비쳐들고 들려오던 모습과 소리가 있었는데, 그걸 여기서 써본다면 하는 마음으로 써보고 싶다. 구용선생에게야 내 일이 기억에 남고 어쩌고 할 것이 없는 것이고, 나 혼자 구용선생을 두고 이렇게 저렇게 무언가를 여럿 훔쳐 꿍쳐놓고 있는 것만 같아 송구스럽다.
김구용이라는 시인의 이름 석자는 중고등학교 문학소녀시절에 시전문지 [현대시학]을 통해 그 제호를 쓴 어른으로, 또 그 지면에 시발표를 하시는 어른으로 처음 알게 됐다. 그 당시에는 난해시라는 용어가 시비평이나 시인들의 산문에서 아주 빈번하게 사용되었는데, 선생의 시도 난해시로 말해지곤 했던 것 같다. 뭣도 모른 채 열심히 시의 글자들을 읽고 시 외적인 잡문들을 빼놓지 않고 읽던 시절이었다. 선생의 <九曲> 연작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연작발표는 연작발표대로 읽으면서 나중에 <구곡> <백팔송>의 시집을 사서 또 보곤 했다. 농경적 전통 서정시와는 다른 난해함, 모던함 같은 것을 맛보았을까. 시비평가들이 그렇게 안내하니 그렇게 안내받으며 김구용 외 여러 시인들의 이름을 익히며 오랜 문학소녀시절을 보내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는 특별활동반 외에 종교반의 활동이 활발했었다. 기독교반, 카톨릭반, 불교반, MRA반(도덕재무장운동)이 있었다. 나는 특별활동반으로는 문예반을 했고, 종교반으로는 불교반에 들었다. 특히 불교반은 중3 때부터 고등학교만 올라가면 바로 들어야지 하며 벼르고 있었던 거였다. 나는 그때 마지막 중학교 입시 세대였으므로 본교 고등학교로 바로 진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게시판에는 매주 토요일이면 불교반 회보가 붙었는데, 같은 교문을 사용하던 등하교길 그 게시판 앞에 꼼짝없이 붙들리곤 했다. 매주 붙여지는 회보 안내 제목 때문이었다. 오늘의 연제 : 나(我)란 무엇인가, 오늘의 연제 : 자아(自我)란 무엇인가, 참나(眞我)란 무엇인가...... 또 회보 하단에 매주 등장하는, 연사 : 무진장(無盡藏) 스님. 無盡藏? 어라, 이건, 바다 밑 무슨 보물섬에 보물이 무진장 있다는 그런 표시인가. 참으로 이상한, 이상한 나라의 암호들, 알 수 없는 기호며 부호만 같은 안내문이었다. 괄호 앞의 한글
<나> <자아>마저도 이상한 상형문자였다. 그렇지만 호기심을 넘은 강한 끌림에 고등학교만 올라가면 제일 먼저 저 불교반에 신청서를 내어 알아보리라 했다. 이렇게 해서 불교는 초등학교 때부터 즐겨하던 시와 내 삶의 두 줄기로 지금껏 이어져 오고 있다 하겠다.
김구용 선생을 시인으로만 또 글씨가 소문난 분으로만 또 인품의 염결성이 각별한 분으로만 알고 말았다면 나는 여기에 쓸 것이 없고 쓰려는 염도 못 냈을 것이다. 구용선생의 불교공부와 한문학이 승려들이 공부하는 강원의 外典강사를 하셨을 만큼 깊으시고, 절에도 적을 두신 적이 있다 하니 그런 점에 내가 더 끌렸던 건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의 어떤 염결성 때문에 반은 은둔하다시피 사시는 것과 시 따위는 일찍 그쳐 문밖을 나서지 않는 그 생활모습에 더 강하게 끌렸던 것이 분명하다. 불교에 깊으시고 스님들을 사랑하시고 자신의 시는 일찍 그쳐 끊으시었으나 한시를 읊어주기도 하시었고, 보내오는 최근 문예지나 젊은 사람들의 시집을 골방 속에서 여전히 안경 너머로 보시고 계셨으니.
구용선생과의 첫만남은 25세 무렵이었던 듯하다. 나는 그때 직장생활중이었고 쉬는 날만 되면 교외 인근 알지 못하는 동네 산자락들을 해지도록 돌고 돌아다녔다. 절을 찾아다녔다고 해도 되겠다. 산자락에는 언제고 절이 붙어 있었고 절이름표 보고 찾아들어가 보면 산자락 밑이었다. 사는 곳이 성북구여서 가까운 절로는 화계사와 도선사가 있었다. 그들이 앉은 삼각산, 도봉산은 또 그 경색이 명색 아니던가. 자주 갔었다. 그러다보니 아는 이들이 생겼고, 다시 아는 이들을 찾아 일부러 가기도 했다. 화계사에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다니는 승려학생들을 위한 <학림>이라는 기숙사가 있었다. 거기에 승려시인들이 간혹 모이곤 했다. 나는 그들을 좋아했다. 장소와 시인들을 다함께 좋아했다. 내 삶에 지핀 두 줄기, 문학과 불교. 시인과 승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별나게 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가만히 왔다 가만히 가곤 하는 한 여성동무였을까. 어느 쉬는 날도 화계사에 갔는데, 승려시인이 셋 모였고, 그들의 말이 곧 김구용 선생이 오신다는 거였다. 이따금 올라오셔서 산속에 들어 막걸리를 한되씩 하며 淸談을 나누곤 했다는 것이다(청담이라는 이 표현은 이십수년이 지난 지금 그때를 기억해보며 아련해져서 만들어본 표현이다). 우리는 기숙사 뒷길, 종신수녀원이라는 깔멜수녀원의 높은 담장이 이웃하고 있는 삼각산의 신령스런(?) 숲속길을 살랑살랑 걸어올라갔다. 당시 활발히 작품발표를 하시던 박희진 시인의 <神韻이 감도는 숲......>이라는 시구절이 절로 맴도는 숲속길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금지구역이었던, 몇몇의 스님이 자신들만의 산책길로 발자국을 놓은 정도의 조요로운 풀속 길. 장끼가 수차례씩 울음을 내지르며 날아올랐다.
저쪽으로 보이는 등산로, 그 길가 천막가게에서 막걸리와 도토리묵을 어느 스님인가가 가서 받아왔다. 구용선생이 스님들한테 술을 따라주시었고 아마도 나도 그결에 따라주셨을 것이다. 그렇게 연초록 잎이 뻗고 잔꽃들이 흔들리는 햇살 번진 풀밭에서 고담준론(?)이, 한시가 읊어져나오며 나비들이 날았던가. 그때 구용선생의 말 한마디가 귓속으로 벌이 들 듯 들어왔다. 마르고 가늘은 한 손가락엔 타들어가는 담배를 끼고 다른 한손으론 옆의 스님 손을 꼭 잡으며, '내가 이 스님들을 참 사랑해요' '내가 이 스님들을 참 사랑해요' 라고 하시던 말이('꼭' 이니 '참'이니 하는 부사는 내가 이 글을 쓰자고 해서 먼 기억의 아득함에 기대 집어넣는 것이 아닐지 혹 모르겠다). 그때의 구용선생 모습은 지금 헤아려보니 육십이 갓 넘으셨을 연세고 10여 년 후 출판사 일로 다시 뵙게 된 칠십을 갓 넘기신 모습과 똑같이 키는 크시고 살점이라곤 없이 깡깡 마르신 모습이었다. 선생은 술을 좋아하시는 것 같았고 담배도 아주 즐기시는 것 같았다. 제법 긴 시간을 보내고 어둑할 때 일어섰는데 술이 꽤 되셨기에 스님 한 분이 동소문동 댁까지 바래다 드리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나도 방향이 같았으므로 같이 타야 했다. 집에 가 한잔 더하자 하셨는지 어쨌는지 우리는 선생에 끌려 조그만 한옥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의 방 풍경은 기억나지 않는다. 선생께선 한지를 펴더니 같이 간 스님과 나에게 각각 무슨 글인가를 한문으로 써주셨는데 분명 멋진 글귀였을 그 글이 기억나지 않는다. 오랫동안 봉투 속에 잘 보관만 해두다가 잦은 이사통에 어떻게 됐는지 잃어버렸다. 아쉽다. 선생의 유명한 글씨를 잃었대서가 아니다. 그걸 지금 다시 펴볼 수 있다면, 내 붉고 하염없이 제 무게에 갈앉아내리던 길다란 커텐 같았던 청춘을 연민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그러나 지나간 것은 다 지나가게 하라.
(...중략...)
석가라는 아이를 아시오
석가라는 아이가 왜 거지가 됐는지 아시오
어머니를 일찍 잃었기 때문이오
어머니 찾아가려고 거지가 되어 헤매다닌 거요
팔십이 되어 겨우 사라나무 아래 잠들었소
어머니를 만난 거요
팔십객이 되어 어머니 만나 따라간 거요
좋아서 미소를 지면서
(...중략...)
난 가고 싶어요 난 이젠 곧 가요 어머니가 강 건너 수양나무 아래서 기다려요 난 곧 어머니 만나요 행복해요 어머니가 6.25때 날 살렸어요 난 어머니 때문에 살았어요 어머니 사랑해요 난 이젠 해방이에요 곧 어머니 만나요 난 돌아가요
(...중략...)
- 졸시 <낮술>에서
내가 두 번째 시집에 넣은 <낮술>이라는 시에는 칠십노인이니 노대가니 노시인이니 하는 말이 나온다. 이는 김구용 선생을 시속에서 일컫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이 시는 바로 <석가>라는 아이를 아시오! 그 한마디를 듣던 날의 사실적 정황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주로서 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날것으로 구용선생의 말을 집어넣었는데 주를 붙여야 하는 게 바른 것이지 않을까 하며 숙고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주를 붙이지 않았다. 구용선생의 날것의 말을 내것으로 모른 체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하찮은 신인의 졸시편에 그의 이름을 올려 언짢은 누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있었던 얘기를 기록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고 시인인 내가 시적 정황으로 제작하고자 한 것이라고, 내 자신이 시 속에 들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 속의 화자인 노시인이, 노대가가, 칠십노인이 말하는 것으로 했으니까 된 거 아니냐 하며. 나한테는 의미로운 사건이었지만 구용선생한테나 그 외 독자들에게는 대단치 않은 일화일 것이니 지저분하게 이런저런 말 넣지 말고 지나가자 했던 것이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그래도 잘못된 일이라 고언을 주면 그 책임을 달게 받겠다. 이런 속사정을 여기에 쓰는 걸 보면 내가 구용선생의 날것의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 지금껏 마음에 걸려 있었던가 보다. 나는 죽었다 깨나도 <석가>라는 아이를 아시오! 그런 말 못한다. 그리고 또 하나. 어머니에 대한 것. 어머니를 일찍 잃어 어머니 대역이 되어야 했던 내 지난 삶속의 모든 황폐와 그늘과 悲. 죽음 전과 죽음 후 죽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들. 6.25 때 자신을 살리고 어머니가 죽었다는 구용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생각. 나의 시와 불교(불교라는 큰 이름보다는 나의 경우 절과 승려)와 어머니와...... 구용선생의 시와 불교와 어머니와...... 그 셋이 찰나 하나로 합쳐지며 강렬한 회오리가 들이쳤던 것이다. 그 일을 기억해두기 위해 <낮술>을 써 시집에 넣었던 것.
출판사에서 김구용 번역의 열국지 10권의 편집교정이 진행중이었다. 나는 그때 성북동에 살고 있었으므로 선생댁인 동소문동이 이웃이었다. 편집일로 상의드리러 방문했고, 교정건으로 방문했고, 편집주간과 함께도 갔고 혼자도 갔다. 그 작디작고 낮고 낮은 한옥으로, 그속의 속 다시 작디작은 누에의 방 같은 선생의 방으로. 열국지 출간 이후론 인지를 가지러 가기도 하고 인지를 찍어드리러 가기도 했다. 일단 권수가 많으므로 책 주문이 몰리던 무렵에는 미처 그 댁에서 인지를 제 시간에 못 대줬기 때문이다. 선생께서 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인께서 해주셨는데 시간이 촉박할 때면 출근 전에 들러 받아 가기도 했고 퇴근 후에 들러 찍어드리기도 했다. 퇴근 후에 들렀을 때는 부인께서 저녁상도 차려주셔서 자취생활자인 내 신세로서는 감개무량이었다. 몇 차례 그런 내왕 속에 선생이 지금의 부인과 결혼하시게 된 얘기 등속을 듣게도 되었다. 결혼식은 부인이 성당을 다니셔서 성당에서 했는데 성경과 불경책을 함께 놓고 그 둘 위에 손을 올리셨다나. 연애, 그거, 당최 귀찮아서 두 번은 못할 짓이시라나. 일과가 어떠시냐고 물었을 때는, 혼자 동동주집에 가 막걸리를 잘 마신다며, 그러다 취하면 집으로 돌아온다고. 또 이리저리 골목을 걸어 성신여대쪽 언덕빼기(고대 뒤쪽하고도 붙은)에 올라 동네집들을 내려다보다 오신다고. 비가 오면 비닐우산을 쓰고 쭈그리고 앉아 그렇게 하다 돌아오신다고. 나도 그 시절 쉬는 날이면 동네 이 골목 저 골목을 걸으며 하릴없는 남의 집 대문들을 익혔다. 그런 발걸음의 마지막엔 언제나 언덕빼기 있는 곳으로 올라 동네집들을 내려다보다 돌아오곤 했었다. 가는비가 오는 때면 지우산을 쓰고 언덕빼기에 쭈그려앉아 또 그렇게 동네집들을 내려다보다 돌아오곤 했었다. 구용선생이 오르던 선생댁 동네 언덕길로 내가 오르고, 구용선생이 지우산을 쓰고 쭈그려앉아 내려다본 동네집들을 내가 그렇게 하다 돌아오곤 하는 그림을 여러 날에 걸쳐 그려보기도 했다. 그런 겹침은 그 시절 내 고적한 존재의 다른 짝을 본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을까.
동소문동의 어느 안 골목, 유명인 아무개의 누이가 한다는 해장국집에도 데려가 근사한 해장국맛도 보여주셨고, 동동주집 청노루에도 가 술을 나눴다. 사실 나는 술을 좋아할 줄 몰라 잘 마시지도 못하지만 선생의 한시 읊는 것이나 불교 얘기가 듣고 싶어 그런 자리가 싫지 않았다. 싫다니, 오히려 기다리는 마음도 있었다. 심상하게 말하시는 중에도 보석 같은 얘기를 툭, 내 앞자락으로 던지는 것만 같아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앞섶을 벌리는 마음도 되곤 했으니. 듣고 싶은 것을 들었을 때처럼, 알고 싶은 것을 알았을 때처럼, 그래, 이런 얘기는 또 어떤가. '우리집 오가며 봤을지 모르지만, 우리집 앞에 구멍가게 하나가 있소. 그 구멍가게 주인이 불란서에 가 공부하고 온 박사요. 그 옛날에 불란서 유학을 한 사람이오. 돌아와선 구멍가게 하오. 구멍가게. 내 그집에 이따금 가요.' 선생께서 굳이 동무가 필요하셨겠는가마는 나 또한 다른 동무도 없는 처지고 하여 정말 대여섯 시간을 마주앉아 있었다. 그렇게 오래는 한번뿐이긴 했지만.
선생께서는 보청기를 끼고 계셨으므로 많은 대화는 쉽지 않았다. 전화통화는 더더욱 어려워 부인께로 돌리셨다. 그러던 즈음 나는 첫시집을 내게 되었는데 일 보러 선생댁에 갈 때 드린 적이 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일 때문에 다시 들렀을 때 내 시집을 읽었노라 하시며 이렇게 말하시는 거였다. '그런데 無憂樹를 말하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 아니오? 무우수를 아시오?' 내가 그때 서른여덟이었으니, 젊은 것인가, 젊다면 젊고 아니라면 아니고 그런 것이지 뭐, 하는 심정으로 듣고 있던 중 아니, 그런데, 그 여러 시 중에 <無憂樹 그늘 아래>라는 시를 말하고 계시는구나 싶어 조금 놀랐다. 그거는 내 시인 것이다. 내 시? 아니 그럼, 자기 시집에 자기 시 아닌 시도 있나. 그럴지라도 자기 시 중의 자기 시, 어쩌구 하며 그 시를 쓰던 서른 무렵의 나를 잡아당겨보고 있는데 이번엔 이러시는 거였다. '그런데 말이오. 그 뒤에 평 쓴 이, 평 쓴 이, 그이 글 잘 썼대. 잘 썼어. 좋은 글이요.' 내 시가 아니라, 시집 뒤에 붙인 평론가의 시집해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다. 어쨌거나 그러시다 그날 한지를 꺼내 <無憂樹 그늘 아래>라는 내 시 제목을 그대로 한폭 글씨로 써주시는 게 아닌가. 손도 필도 떨리는 걸 지켜봤다. 연세가 있으시고 노쇄하신 거였다. 나는 그 글씨가 나쁘지 않았다. 괜찮았다. 좋았다. 고맙게 받아와 누런봉투 속에 잘 넣어두었다. 예전에도 이 방에 들어 당신의 글씨 하나를 받은 적 있었노라는 얘기는 안 했다. 구용선생께 시좀 보게 해 달라고 발표좀 하시라고 조르듯 몇 말씀 드렸더니, 발표는 잘 쓰는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못박듯이 말하셨다. <세계의 문학>에 싣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정식 청탁을 드렸으나 시발표는 젊은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그런 소중한 지면은 내가 할 게 못 된다고, 요새 시 잘 쓰는 이들 많은데 젊은 사람들 것 하라고 고수하시어 결국 선생의 시고를 받지 못했다.
선생의 부음을 지난 12월말경 신문지상에서 보았다. 하 추운 12월에 이사했는데 한창 이삿짐 정리중일 때였다. 상계동 구석에서 미아리로 나와 선생댁과 거리가 가까워졌으므로 새해에는 인사를 가봐야겠다는 생각도 하던 차였다. 많이 연로해지셨을 거라며 환경이 바뀐 새로움의 기분 때문인지 오랜만에 그런 생각이 다 드는 거였다. 부음을 듣기 얼마전엔 뜻밖에도 선생께서 월탄문학상을 받으신다는 단신도 보았다. 예전엔 모든 문학상도 거절하시었다던데 어쩐 일이실까 만년에, 하는 의아함이 잠깐 스치기도 했다. 나는 얼굴을 한번 뵙고도 싶어 시상식장에 가볼까 생각도 했지만 언제나의 내 일처리 방식처럼 안에서만 부풀다 귀찮고 피로해져 주저앉고 말았다. 핑계가 없을 때도 그런데 지금은 이삿짐 정리해야 된다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핑계까지 있었으니. 그러다 12월 28일인가 바로 부음을 듣게 된 거였다. 그렇다면 혹 가시기 얼마 전이니 시상식장엔 못 나오셨을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어 어쩌면 그 문학상의 수상허락을 스스로 하시긴 하셨을까, 뜻있는 어른들이 그분을 위해 올리고 가족들이 그뜻을 대신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해보게 되었으니. 사실 이 일에 末席의 내가 이런저런 생각 자체를 보태보는 것이 얼마나 주제넘은 짓이냐. 하지만 가시는 추운 겨울날에 훈훈한 옷을 두르신 것은 분명한 것 같으시니 고마운 일이다.
결국 가시기 전에 뵙지 못하고 말았다. 며칠이면 새해가 오는데 세배인사도 소용없게 됐다. 아아, 뭐든지 원하는 마음(열정)이 우러났을 때는 즉각즉각 행동에 옮겨야 한다. 그럴 적의 행동은 의무인 것이다. 나의 경우는 이런 따위의 마음을 안에서만 증폭시키다가 그 열정의 의무를 거의 저버리곤 하는 잘못된 습관에 길들어 있다. 이런 어리석은 습관으로 시작도 해보지 못한 구용선생에 대한 나 혼자의 아름다운 그림이 있으니.
결혼하고 너무나도 낯선 평촌이라는 신도시에 살게 되었다. 아파트 생활도 처음이고 더군다나 땅도 밟지 못하고 공중에 붕 뜬 10층의 공중생활이 벙벙한 게 안정되지가 않았다. 태어나서 40년간을 서울 성북구에서만 살아서 내가 살았던 동네의 모든 길목들이 알알이 그리웠다. 특히 맘에 맞는 공간에 잘 감응하는 나의 정서는 7년간을 혼자 살았던 성북동 동네를 그리워했고, 그쪽으로 이사갈 수 있었으면 했다. 처음으로 직장도 놓았더니 신기하게 낮시간이라는 게 생긴 것이 그 발단인 듯싶기도 했다. 성북동쯤에 다시 살며 오전 늦은 시간 아니면 오후 이른 시간에 요러코롬한 모임을 만들어 몇몇과 나눈다면 그 아니 괜찮을까 싶은 일이 그림으로 자꾸 떠오르는 거였다. 한문학에 일가 있으신 구용선생을 모시고 시쓰는 가까운 친구 셋쯤이 모여 한시 공부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 다시 이사온 성북동 내 집에 모이게 하여 댁으로 선생을 모시러 가고 시공부가 끝나면 다시 모셔다 드린다든지, 홀로 가시겠다면 택시를 태워드리곤 하면서. 가까운 거리이니 선생께서도 오시기 힘드실 것 없고, 젊은 후배시인들과 즐거운 한때가 되실 것도 같고. 우리는 한문 공부, 시 공부, 이따금 불경 공부도 하며, 구용선생의 삶도 듣고. 선생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 혼자만 가진 채 계시지 말고 어여쁜 인연이라 생각하시어 우리에게 물려주면 그 아니 좋으실까. 공부 끝나면 공부상 치우고 그 위에 좋아하시는 막걸리 받아 서로 돌리며 청담도 나누다가 그러다가. 스스로 암만 생각해도 근사하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임이 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차에 C시인을 만나게 됐는데 급기야 발설하고 말았다. 우리 요러요러한 모임 한번 해볼까. 선생께는 내가 말할 테니까 한번 시작해볼까 그러고 말았다. 상상만으로도 달떠 말하면서 함박함박 웃곤 하던 내 얼굴이 지금도 생생히 비친다. C시인 왈. '진명씨다워. 진명씨도 참 특이하다.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냐. 그래, 하자.' C시인한테 요런 칭찬의 말 비슷한 말도 들었건만......
하지만 이사오지도 못하고, 선생께 그런 말 꺼내본 적도 없고, 그런 말 두 번 다시 누구에게 발설한 적도 없이 십년 세월이 그만 흘렀다. 허망하구나. 마음의 열정이 그리는 모든 몸없는 생각들, 꿈들. 그렇지만 그 일의 생각과 꿈을 아주 잊어버린 것은 아니어서 좋아하는 햇빛이 좍 들이치는 어느 시간마다에 그 그림을 펼치면 내 집 거실에 차린 공부상에 구용선생과 시친구 몇이 둘러앉아 한시를 외는 거였다.
아, 모든 아름다운 마음의 일을 완성하려면 행동해야 한다. 입은 열어 말하라고 있는 것이고, 두 다리는 제깍제깍 놀려 다리를 놓으라고 있는 것이고, 몸뚱이는 차려 사람들 눈앞에 세우라고 있는 것이다. 손은 서로 걸고 풀지 말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구용선생과 함께 그리고 싶은 찬연한 그림이 있었으나 이제는 그리려 해도 어쩔 도리가 없는 진짜 그림이 되고 말았다.
구용선생은 어머니에게로 가셨다. 강 건너 수양나무 아래서 기다리는 어머니에게로 가셨다.
塵世에서 해방되어 어머니 만나러 가셨다. 행복 찾아 가셨다.
구용선생님- 내내 행복하세요-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인사 가지 못한 나는 그 면목없음에 크게 소리라도 쳐 저 허공에 닿도록 명복을 빌어드린다.
-이 원고 마감 기간 동안에 10여년을 누런봉투 속에 보관만 하고 있던 선생이 써주신 글씨<無憂樹 그늘 아래>를 찾아내어 액자를 맞춰 내 방에 걸어놨다. 가시기 얼마 전 출간된 [구용전집]은 사야지, 사야지 하면서 아직 못 사고 말았다. [구용전집]을 진작에 사놓아 봐두었더라면 이 긴 글을 쓰는 데 얼마나 든든한 참고와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인가. 선생의 전집을 곧 사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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