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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젊은시인조명/목발 짚고 일어서는 하늘 외9편/신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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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종호
댓글 0건 조회 4,375회 작성일 02-11-0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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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젊은시인조명/목발 짚고 일어서는 하늘 외9편/신종호


목발 짚고 일어서는 하늘


아름다운 것들이 시들어 가는 세상 빈 하늘. 인사동 골목 귀퉁이에 걸터앉아 하모니카 불고 있는 파계승의 눈 속으로 지는 동전 반 닢의 노을. 살아서 미안하다고, 노인복지회관 옆 주차장 벤치에 앉아 남은 햇살 쪼이며 웅얼거리는 할머니. 길마다 저승꽃 피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길이 하나씩 죽어간다. 붉은 신호등 속에 갇힌 검은 사람처럼, 길을 잃고, 깜박이는 숨결, 모두 길 속으로 들어간다. 그 길을 따라 걷는 나의 시는 목발 짚고 일어서는 하늘이다.

녹슨 용수철처럼 발목이 아프다.






나무는 사람을 기억한다


가랑비 내리는 아침, 출근길 인도에 앉아 피멍 든 손으로 소주 마시며 나무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았다. 찢어진 옷 사이로 고목의 등걸처럼 얽은 살이 보인다. 구두도 없이 맨발로 나무둥치처럼 웅크리고 앉아, 나무라고 소리친다. 떡 진 머리카락 사이, 짓무른 이마의 상처에 누런 송진이 흐른다. 병든 나무한테 적선 한번 하시죠. 빠진 앞니가 아직도 덜 아물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입 속에서 쇄, 쇄, 쇄, 떨고있는 보도블록 위 나무 인간.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앞마당에 심었던 대추나무 한 그루, 오줌 갈겨 십 년을 키우다 고향 떠나며 마음에서 잘라버린 그 나무, 피 흘리며 내 귓속에서 다시 자란다. 허리가 잘린 나무. 쇄, 쇄, 쇄,






내 영혼의 곰보자국


우산도 없이, 비 맞으며 걷는다. 바닥에 떨어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피곤처럼 신발에 흥건하게 고이고, 빗물 커튼 사이로 세상이 숨는다. 포장마차 지붕 위로 손톱 만한 검은 물자갈들이 떨어지고, 쇠못 같은 빗줄기가 내 메마른 머리에 구멍을 숭숭 뚫는다. 부서지고 싶은 일들로 가득찬 일상의 옆구리로 물이 새고, 나도 한줄기 비가 되어 무책임하게 거리를 흐른다.

어깨에 새겨진 우두자국처럼, 쇠못 소나기가 긁어 놓은 내 영혼의 곰보자국. 점점 더 깊어 가는, 상처 없이는 걷기 힘든 거리.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은행열매, 촘촘히 비 맞고 서있다. 아, 초록의 꿈이 노랗게 마를 때까지 비우고 또 비워야 할 하늘.






달빛 연가


무슨 일을 저질러야 할 것만 같은 밤이다. 이유 없는 사랑 하나 만들어 쉬엄쉬엄 놀다 돌탑에 깔려 죽어도 좋을 罪스러운 겨울 馬耳山. 벌거벗은 보름달이 풍기는 차가운 살 냄새,  골짜기 흰 눈들이 붉게 녹고 있다. 불쑥 솟아 마주보는 두 봉우리 사이 목을 매고 부르르 떠는 저 달도 오늘만큼은 지독한 不倫이다. 山寺의 경계에 서서 하늘 바라보는 우리들 절룩거리는 사랑도 모두 不倫이다.

맷돌에 뼈라도 갈아 흰 눈처럼 날리고 싶은 이 밤, 무너지는 돌덩이리들 사이에 깔려 피 흘리는 馬耳山 보름달.






랩소디 앤 블루


겨울바다가 아주 시원하게 미쳐버렸다. 바람이 숨겨둔 시한폭탄 물결 세워 춤추게 하고, 파도는 인사불성 쉰 목소리로 달을 불러 노닐게 한다. 이내 풍경들 하염없이 몸부림치다 일어서는, 격포 채석강 바위 아래. 굵은 눈발 되어 날리는 절정의 男女들.

모두 날(生)것으로 울고있다. 꼭 한번 이렇게 미치고 싶어 마음 졸이며 찾아온 겨울 밤바다, 사랑도 없는 삭막한 세월, 용케 견뎌온 불망(不忘)의 상처를 꺼내 수장(水葬)시키며 하염없이 눈 맞는 가슴에 파도가 새겨준 불꽃무늬 문신(文身).

얇게 저며져 차곡차곡 쌓여 가는 달빛 바위. 태엽감긴 인형처럼 빙글빙글 춤을 추다 멈춘 밤바다. 아픔이여, 너를 등지고 돌아가야 할 길이 모두 무너졌다.






목련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白手의 봄. 리허설도 없이 시작하는 연극처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속살을 내미는 목련, 나는, 근지러운 피부를 북북 긁으며, 목련 속으로 들어 감. 떨어지는 꽃잎, 부서지는 나의 얼굴, 세상이 간지럽다. 떨어지는 것들, 죽음의 속도, 목을 뚝 뚝 분지르고 싶다, 불꽃으로 피어나는, 급성의 紅疫. 삶이 간지럽다, 고 소리치는, 붉은 입 속에, 끼룩대며 날아가는, 반점투성이의 살찐 비둘기.





항아리 4
                

열 길의 서러움을 땅 속에 묻고
붉게 버무려진 꿈들을
무거운 돌로 눌러 埋葬을 했다

마음의 틈새마다
콤콤하게 우러나는 군둥내

슬픔이 조금 더 자라
햇살의 상처를 쓰다듬을 때

코를 막고,
확 비워 버려야 할 겨울의 몸살
소리없이 봄이 왔다





토르소


장독대 옆 대추나무
가지 잘려
열매 맺지 못한 가을

빨래 집게가 물고 있는
푸른 하늘  

아무 것도 깨물 수 없는
나의 틀니





귤 속의 바다


귤 껍질을 벗기면 그 안쪽으로
파도의 주름살마다 바다를 임신한
알맹이들이 섬처럼 열려 있다  
하나 따서 입에 물면
질서 없이 터져 나오는 신맛에
가볍게 온몸이 달아올라
슬며시 눈감으면
황금빛 바람으로 터지는 마음의 바다





南極의 꿈 1


칠십 만 년 전의 고독
피가
하얗게 얼어 버린 세상

얼음 꼭대기
아슬한 영혼의 빙점에서  
누가 설인처럼 서있는가

혼자 죽어가야 할
지친 새벽
오로라, 찬 빛 오로라  

빙벽 한 길 무너지는 소리에
온 몸의 뼈
우두둑, 얼음처럼 부러진다


신종호
1964년 경기도 여주 출생
1997년 6월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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