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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젊은시인조명 해설/격정과 소멸의 풍경들/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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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성호
댓글 0건 조회 4,389회 작성일 02-11-04 11:30

본문

젊은시인조명
격정과 소멸의 풍경들
-신종호의 신작시들

유성호


  1.
  신종호 시인의 신작시 열 편에서는, 언어의 표층적 차원에서 포착 가능한 전언이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의미론적으로 명료한 언어 대신, 실재와 상상의 영역을 넘나드는 사물의 이미지들을 통해 불명료한 기억들을 간접화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시 속에 들어앉아 있는 사물들은 대부분 그 사실적 외관이 묘사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풍경 묘사의 형식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것은 그 이면에 시인의 경험이나 감각을 환기하는 비유의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다.
  따라서 그는 시를 통해 관념으로 직접 달려가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거부감을 갖고 있는 시인이다. 그만큼 그는 사물의 외적 특성(풍경)과 서정적 주체의 내적 특성(경험)을 유추적으로 결합시키고, 그 결합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주체와 사물간의 불화 내지는 균열의 형상도 포착하고 있다. 그 형상을 통해서만 신종호 시인은 발언하고 침묵하고 표상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시인이 그리는 풍경과 시인의 감각 사이에 끼인 비유의 그림자들을 통해서, 시인이 세계내적 존재로서 견지하고 있는 세계 이해 방식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그가 그리는 사물들은 매우 미세하면서도 역동적인 파동을 그리고 있어, 몇몇 우의적(寓意的) 개괄로 그 상징적 의미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리고 시인의 감각은 그 사물들이 그리는 파동들을 자신의 기억과 고스란히 겹쳐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풍경을 통해서만 자신을 발견하고 노래한다. 그런데 잘 읽어보면, 그 풍경은 생성되고 발아하는 특정한 목표를 향해 있기보다는, 한결같이 격정을 잉태하고 있으면서도 필연적으로 소멸의 전조(前兆) 앞에 놓여 있는 모습을 띠고 있다. 이것이 신종호 시의 가장 으뜸 되는 특징일 것이다.
  그의 시는 이처럼 사실적인 정보 전달에는 철저하게 인색한 채 격정과 소멸의 이미지를 풍요롭게 그리면서 스스로의 형식을 완성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시를 읽는 의미는, 시를 통해 시인의 삶의 기율이나 방향을 이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 자체가 그리는 감각적 동선(動線)을 따라 그것들이 그려내는 예사롭지 않은 격정과 소멸의 파동에 동참하는 데 있다. 그 동참 속에서 우리는 존재가 갖는 격정의 쓸쓸함과 소멸에의 기억을 거듭 확인하는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노래하는 것, 그의 시는 거기서 충실히 멈춰져 있다. 더 이상의 과장된 포즈나 가치론적 지향은 그의 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2.
  신종호 시인의 시선에 의해 포착되고 형상화되는 사물들은 그 안에 매우 역동적인 격정을 내장하고 있다. 물론 그 격정이 외계(外界)를 향한 능동적인 자기 개진의 에너지는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내적으로 소멸될 운명에 처한 사물들의 쓸쓸한 조락(凋落)의 가능성을 높이는 일종의 자기 소진의 힘으로 기능하고 있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그의 시에 담겨 있는 사물들은 소멸의 운명을 향해 예정된 수순을 밟아나가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다음 작품에서 신종호 시인은 사라져버릴 운명에 처한, 그것도 소멸 바로 직전에 놓여 있는 사물들의 형식을 분주하게 쫓는다. 이때 시인이 그려내는 '소멸'의 형식은, 사물의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극단적인 존재 전환의 방식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편재적(遍在的)으로 구성하고 있는 항구적 원리로 나타나고 있다.

  아름다운 것들이 시들어가는 세상 빈 하늘. 인사동 골목 귀퉁이에 걸터앉아 하모니카 불고 있는 파계승의 눈 속으로 지는 동전 반 닢의 노을. 살아서 미안하다고, 노인복지회관 옆 주차장 벤치에 앉아 남은 햇살 쪼이며 웅얼거리는 할머니. 길마다 저승꽃 피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길이 하나씩 죽어간다. 붉은 신호등 속에 갇힌 검은 사람처럼, 길을 잃고, 깜박이는 숨결, 모두 길 속으로 들어간다. 그 길을 따라 걷는 나의 시는 목발 짚고 일어서는 하늘이다.

  녹슨 용수철처럼 발목이 아프다.
- [목발 짚고 일어서는 하늘] 전문

  시인의 말에 의하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시들어간다. 시간의 풍화를 결국 견디지 못하고 시간의 운명 안에 갇히는 걸 두고 '시듦'이라고 표현한다고 할 때, 모든 사물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만 실재하고 현실 속에서는 시들어간다. 그런데 시인의 눈에 비친 그 시들어가는 것들이란, 실상 배타적인 목록을 구성하는 어떤 특정 사물들이 아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시인의 눈에 포착되는 모든 사물들이고, 그것들은 모두 '길'이라는 상징으로 수렴, 소멸되고 만다.
  시를 따라가 보자. 시인의 눈에 비친 풍경은, "시들어가는/빈/지는/남은/죽어간다/갇힌/잃고/깜박이는" 등으로 몸을 분주히 바꾸면서 연속되는 소멸 지향의 용언들에 의해 포착된다. 그 용언들은 "파계승/할머니"처럼 삶의 시간과 기율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나 "노을/저승꽃"처럼 소멸 직전에 자신의 존재를 선연하게 각인하는 시각의 대상들이 거느리는 술어들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이러한 소멸의 아우라를 안고 시 곳곳에 산포되어 있는데, 여기서 산포(散布)라 함은, 그것들이 의미의 집중성을 띠면서 하나의 전언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방사적(放射的)인 외연의 확산을 겨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모든 것들이 '길'과 여러 가지 상관성을 형성한다. 시인에 의하면, '길'에는 저승꽃이 피었고, '길'은 하나씩 죽어가고, 사람들은 '길'을 잃고, '길' 속으로 들어가고, 시인은 '길'을 따라 걷고 있다. 따라서 '길'은 행위의 주체이자 대상이자 배경이다. 그 길 위에 서 있는 주체는 불구의 몸이다. "아픔이여, 너를 등지고 돌아가야 하는 길이 모두 무너졌다"([랩소디 인 블루])라고 노래하듯이 말이다. "목발"을 짚은 "발목"이 아픈 존재, 곧 걷기에는 힘에 버겁지만 어떻게든 걸을 수는 있는 중간적이고 잠재적이고 불완전하며 녹슬어버린 존재, 그것이 바로 시인이 이 작품에서 노래하는 시인 스스로의 초상이다.
  그 초상에 이르기 위해 시인은 '빈 하늘'과 '지는 노을', '남은 햇살'과 '죽어가는 길'을 각각 전경화(前景化)하였다. 거기에 까메오처럼 나타나는 파계승과 할머니는 시의 인물들이라기보다는, 그저 풍경으로 화해버린 어떤 소멸의 이미지를 담고 있을 뿐이다. 그 이미지의 연쇄를 온몸으로 감당하면서 "녹슨 용수철"처럼 탄력을 잃은 채 삐걱거리며 걷는 시인의 발목은 매우 아프다. 또 그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목발 짚고 일어서는 하늘"로 그려지는 "나의 시"는, 사물들이 그려 보이는 파동의 동선 속에서 발견되는 새삼스러운 통증에 의해 발원되고 완성되는 삶의 그 무엇이다. 그뿐이다. 여기서 '목발/발목' 사이의 언어유희(pun)적 상상력이 개입하는 것도 놓치기 아까운 것이지만, 그보다는 이 작품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관념과 사물의 인접성을 통해 "시적 언어는 대용어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돌이킬 수 없게 말해진 어떤 것이다."(O. 파스)라는 잠언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점만 확인하기로 하자.

  白手의 봄. 리허설도 없이 시작하는 연극처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속살을 내미는 목련, 나는, 근지러운 피부를 북북 긁으며, 목련 속으로 들어감. 떨어지는 꽃잎, 부서지는 나의 얼굴, 세상이 간지럽다. 떨어지는 것들, 죽음의 속도, 목을 뚝 뚝 분지르고 싶다, 불꽃으로 피어나는, 급성의 紅疫. 삶이 간지럽다, 고 소리치는, 붉은 입 속에, 끼룩대며 날아가는, 반점투성이의 살찐 비둘기.
- [목련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전문

  이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목련'과 '비둘기'라는 대상 역시 사실적 외관을 띠지는 않는다. '목련'은 마치 연습조차 없이 관객 앞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처럼 난데없이 불쑥 당돌하게도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내밀고 있는데, 그 풍경 역시 단순한 배경(背景)이 아니라 시인이 그 안으로 들어가 한몸으로 어우러지는 일종의 관념적 전경(前景)이다. 그 안에서 꽃잎이 지고 나의 얼굴은 부서진다. 그 조락과 와해("떨어지는 것들")는 '죽음/속도/파괴/불꽃/급성/홍역' 등의 빠르고 불가항력적이고 병리적인 소멸의 이미지들로 이어진다. 또한 "나는, 근지러운" "세상이 간지럽다" "삶이 간지럽다"의 점층적 연쇄 역시 주체와 대상을 동시적으로 연결하는 시인의 우의적 상상력이 빚고 있는 결과이다. 마지막 부분에 날아가는 "살찐 비둘기"는 이러한 세상의 불구성에도 아랑곳없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또 하나의 불구의 영혼을 우화하고 있다.
  이러한 일관된 소멸 지향성은 이 시인의 시에서 "벌거벗은 보름달이 풍기는 차가운 살 냄새"라든가, "山寺의 경계에 서서 하늘 바라보는 우리들 절룩거리는 사랑도 모두 不倫이다.//맷돌에 뼈라도 갈아 흰 눈처럼 날리고 싶은 이 밤, 무너지는 돌덩어리들 사이에 깔려 피 흘리는 馬耳山 보름달."([달빛 연가])에 대한 묘사 등으로 이어진다. 이는 "아슬한 영혼의 빙점"([南極의 꿈 1])에 서 있는 쓸쓸하고 눈 밝은 영혼의 자기 확인이자, 세계 참여의 한 방식으로 '소멸'이 기능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신종호의 시는 '나'라는 주체에 의해, 더 정확히는 주체의 시선에 의해 포착되는 풍경들을 직조해낸 다음, 거기에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저며 넣는 방식으로 씌어지고 있다. 사물을 사물 자체의 생리와 특성으로 묘사하고, 나아가 사물 스스로 주체가 되게 하는 어법과 그의 시는 근원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앞으로 그의 시가 펼쳐지면서, '나'의 경험과 기억 혹은 무의식을 사물과의 우의적 유추 관계 속에서 써가는 방법이 아니라, 사물 스스로 풍경이 되어 어법의 주체가 되는 작법을 한번 고려해 볼 만하다. 왜냐하면 풍경을 전경화한 후, 거기에 자신의 감각과 정서를 유추적으로 병치시키는 작법은, 다양한 풍경의 감각적 재현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자아 중심적인 자기 표현의 시로 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이 시인에게 사물 스스로 말하는 방법을 주문하는 까닭은, 삶의 쓸쓸한 소멸과 조락이 "나의 시"([목발 짚고 일어서는 하늘])나 "부서지는 나의 얼굴"([목련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처럼 '나'의 자의식을 매개시키지 않고 나타날 때 신선한 지각의 갱신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3.
  이처럼 신종호 시인의 시적 작업은 철저하게 1인칭의 기억 속에서 시작되고 완성되고 있다. '나'로 지칭되는 서정적 주체의 경험과 기억과 가치 판단 속으로 모든 사물과 풍경과 삶의 편린들은 수렴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물들은 자신들만의 목소리나 존재 형식으로서보다는 주체의 경험을 환기하는 비유적 매재로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사물들은 시인의 감각과 기억의 문맥 속에서만 재구(再構)되고 현상된다.
  다음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두 작품은 모두 빗속의 풍경을 다루고 있는 시편들이다. 그러나 비 내리는 거리의 외양은 철저한 세부 묘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치 잘라진 단면처럼, 시인의 관념을 통해 재구된 풍경으로서만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산도 없이, 비 맞으며 걷는다. 바닥에 떨어졌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피곤처럼 신발에 흥건하게 고이고, 빗물 커튼 사이로 세상이 숨는다. 포장마차 지붕 위로 손톱 만한 검은 물자갈들이 떨어지고, 쇠못 같은 빗줄기가 내 메마른 머리에 구멍을 숭숭 뚫는다. 부서지고 싶은 일들로 가득찬 일상의 옆구리로 물이 새고, 나도 한줄기 비가 되어 무책임하게 거리를 흐른다.

  어깨에 새겨진 우두자국처럼, 쇠못 소나기가 긁어 놓은 내 영혼의 곰보자국. 점점 더 깊어 가는, 상처 없이는 걷기 힘든 거리.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은행열매, 촘촘히 비 맞고 서있다. 아, 초록의 꿈이 노랗게 마를 때까지 비우고 또 비워야 할 하늘.
- [내 영혼의 곰보자국] 전문

  비 내리는 거리, 그곳을 걸으며 시인은 거리의 풍경을 주워 담는다. 길바닥, 빗줄기, 포장마차, 은행나무, 그 열매, 하늘, 이러한 풍경들이 시인의 시선에 포착된 사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색조와 외관을 버리고 오로지 시인이 갖고 있는 현재적 감각과 과거의 기억으로 치환되어 나타난다.
  우선 시인이 지고 가는 피로처럼 무료하게 튕겨오르는 빗방울들, 마치 "커튼"처럼 사물을 은폐하고 드러내는 빗줄기들, "물자갈들"이나 "쇠못"으로 몸을 바꾼 빗줄기들, 이들은 모두 일상의 "피곤/메마름/부서짐/무책임"들을 줄줄이 환기하는 작용을 한다. 그 비가 흥건히 적시고 있는 포장마차나 은행열매 역시 시인의 영혼의 상황을 말하려는 전경일 뿐이다.
  이때 시인은 자신의 영혼에 새겨진 "곰보자국"을 떠올린다. 왜 그 흔하디 흔한 '눈물자국'이 아닌 "곰보자국"이었을까. 이는 물론 눈물의 감상성을 넘어 상처이자 시간이기도 한 곰보자국을 남기고 가는 "쇠못 소나기"로 하여금, 더욱 생의 비극적 비의를 환기시키려는 시인의 의지가 개입된 경우일 것이다. 그러한 깊이 모를 시인의 상처를 끝없이 각인하면서, 그리고 은행열매를 한없이 적시면서 비는 줄기차게 내린다. 시인의 초록 꿈도 그 은행들처럼 노랗게 말라간다. 이러한 소멸로의 귀결이 바로 시인이 바라보는 "곰보자국"의 궁극적 존재 의미이다. 그러니 시인은 "내 영혼의 곰보자국"을 다해 하늘을 비우고 또 비워야 한다. "우두자국" 같은 천형처럼.

  가랑비 내리는 아침, 출근길 인도에 앉아 피멍 든 손으로 소주 마시며 나무라고 소리치는 사람을 보았다. 찢어진 옷 사이로 고목의 등걸처럼 얽은 살이 보인다. 구두도 없이 맨발로 나무둥치처럼 웅크리고 앉아, 나무라고 소리친다. 떡 진 머리카락 사이, 짓무른 이마의 상처에 누런 송진이 흐른다. 병든 나무한테 적선 한번 하시죠. 빠진 앞니가 아직도 덜 아물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입 속에서 쇄, 쇄, 쇄, 떨고있는 보도블록 위 나무 인간.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앞마당에 심었던 대추나무 한 그루, 오줌 갈겨 십 년을 키우다 고향 떠나며 마음에서 잘라버린 그 나무, 피 흘리며 내 귓속에서 다시 자란다. 허리가 잘린 나무. 쇄, 쇄, 쇄,
- [나무는 사람을 기억한다] 전문

  또 비가 내린다. 비 내리는 아침, 시인은 출근길의 거리에서 수많은 풍경들을 만난다. 그 가운데 특징적인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보도블록 위에서 남루한 외양을 한 채 떨고 있는 그 사람은 "병든 나무"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그 병든 모습은 "쇄, 쇄, 쇄"라는 의성어와 함께 이 시의 소멸 지향적 성격을 부추긴다. 그 풍경은 시간의 통로를 따라 시인으로 하여금 기억 속의 한 풍경을 유추시킨다. 사람과 나무의 상상적 연결은 이 같은 기억의 힘에서 가능하다. 그래서 1연과 2연은 사람과 나무가 나란히 병치되면서 상호 유추를 가능케 하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기억 속의 나무 역시 통증과 불구의 형상을 띠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시에서 자연 세목으로 나타나는 온갖 생명체들은 하나같이 병들고 부서지고 상처받고 피 흘리는 불구의 형상을 갖고 있다. 거리에서 만난 그 병든 나무는 자신의 기억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또 하나의 나무를 떠오르게 한다. 나무가 사람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또 하나의 나무를 기억하고 있는 셈이다. 그 나무는 "피 흘리며 내 귓속에서 다시 자란다". 그러니 불구의("허리가 잘린") 나무는 늘 "쇄, 쇄, 쇄" 하는 의성어로 귓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종호 시인은 많은 사물의 존재 형식을 불완전하고 상처받고 불구적인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것은 곧 "장독대 옆 대추나무/가지 잘려/열매 맺지 못한 가을"이나 "아무 것도 깨물 수 없는/나의 틀니"([토르소])이기도 하고, 팔다리가 없는 토르소 자체이기도 하다. '토르소'야말로 외관으로 보면 철저하게 불구적이지만 그 자체로 이미 엄연한 물리적, 감각적 실재가 아닌가.

  4.
  고백컨대 나는 신종호 시인을 전혀 알지 못한다. 문단을 오가면서도 아마 우리는 스쳐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만 넘겨받은 그의 신작시 원고 말미에 첨부되어 있는 약력만이 그에 관해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정보이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는 간단치 않은 시공간의 공유를 경험한다. 말하자면, 그와 나는 나이와 고향이 같다. "십 년을 키우다 고향 떠나며 마음에서 잘라버린 그 나무"([나무는 사람을 기억한다])로 보아, 그도 나처럼 유년 시절만 고향에 있었나 보다. 세대와 지역이 같다는 건 언어와 감각이 겹칠 가능성을 높인다. 그런데 그는 그 가능성을 산문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한 편 한 편 읽어간 그의 시편 어느 한 구석에도 그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구체적 흔적들 혹은 자신의 생을 다해 지향해야 할 가치나 이념 같은 것을 내비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시는 그러한 것을 노출하거나 자잘한 삶의 세목들을 나열하는 언어적 형식이 아니라, 이미지의 불투명한 연쇄 속으로 시인이 들어가 쓸쓸하고 비극적인 존재 형식을 노래하고 표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에게 시는, 감각의 구체성을 통해 한 올 한 올 뭉쳐져 있는 기억 속의 풍경들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격정과 소멸의 양가성으로 견뎌내는 데 존재 의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신종호 시인의 텍스트들이 내지르는 전언은 소멸해가는 사물들의 이미지 뒤편에 꼭꼭 숨어 있고, 그의 언어가 드러내고 있는 외연은 시인의 의도를 어슴푸레하게 그려 보이고 있을 뿐이다. 불우한 생애를 지탱하고 견디는 주체와, 그 주체의 경험과 기억 속에 긴장과 균형으로 존재하는 소멸해가는 사물들, 그것들이 갈등하고 화창하는 풍경이 말하자면 그의 시이다. 그 안에 시인의 격정은 소멸의 에너지에 의해 소진되고, 남는 건 비극적인 자기 확인의 풍경들일 뿐이다.
  우리의 생에 편재해 있는 불행의 표정들을, 실재와 상상을 가로지르는 일종의 '착란'의 상상력을 통해, 시인은 소멸의 풍경 속에서 그려 보인다. "이내 풍경들 하염없이 몸부림치다 일어서는, 격포 채석강 바위 아래. 굵은 눈발 되어 날리는 절정의 男女들"([랩소디 앤 블루])처럼 말이다.
  이제 그의 시는 "목발 짚고 일어서는 하늘"이다. 거기서 시인은 "녹슨 용수철처럼 발목이 아프다." 그 아픈 시를 읽는 우리들의 마음 또한 아프다. 아니 아픈 듯하다. 격정의 힘들이 소멸해가는 필연적인 움직임을 쓸쓸히 바라보는 신종호 시인이 보여주는 이 '통증의 시학'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어둑한 비의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형상의 단단함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다음은 그 단단함과 일관성에 균열을 낼 차례이다.


유성호
1964년 경기 여주 출생.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대한매일}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저서로 {한국 현대시의 형상과 논리}, {상징의 숲을 가로질러}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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