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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 초점 시계간평 소멸에 관한 철학적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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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시계간평
소멸에 관한 철학적 명상
1. 죽음으로써 삶을 이야기하는 시
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존재이다. 태어남이 우연이라면 죽음은 필연이기에 인간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이 사실 앞에 막연한 공포와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죽음은 진정 마지막인가?', '죽음 다음에 또 다른 생은 없는 것인가?', '과연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만 하는가?' 라는 물음들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은 죽음의 문제야말로 인간이 해명하고자 하는 영원한 딜레마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죽음이란 '사랑', '자유', '행복'과 같은 문제만큼이나 보편적이기 때문에 수많은 문학작품을 통해 중요한 테마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운 肺血管이 찢어진 채로/아아, 너는 山ㅅ새처럼 날러갔구나!" (「琉璃窓 1」) 라는 정지용의 슬픈 고백은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존재의 상처와 고독감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고통이 어디 타자의 죽음을 통해서만 인식되는 것이겠는가? 살아가는 매 순간 순간마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죽음의 길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지금이 아닌, 다른 것으로, 거역할 수 없는 시간의 도저한 흐름으로부터 우리는 이탈하지 못한다. 그럼으로 "삶은 오늘도 죽음의 序曲을 노래하였다/이 노래가 언제나 끝나랴"(「삶과 죽음」) 라는 윤동주의 비애에 찬 목소리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죽음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슬픈 초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또한 인간은 죽음을 넘어서고자 하기에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바위」)라는 청마의 비장한 결의처럼 우리는 죽음을 초극하고자 하는 존재의 의지를 확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같이 시인들에게 있어 죽음을 인식하는 계기와 방식은 각각 다르게 드러난다. 그것은 공통적으로 시간 앞에서 유한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비극적 형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죽음의 문제가 중요시되는 이유는 그것이 언제나 삶에 대한 집요한 성찰로부터 기인한다는 점 때문이다. 즉 죽음에 대한 고뇌와 갈등은 삶의 문제를 치열하게 돌파해 가고자 하는 의식 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따라서 죽음의 문제는 삶의 문제로 귀착된다. 그렇다면 과연 죽음의 문제는 각기 어떠한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을까? 대략 일별하자면, 그것은 존재 일반이 경험하는 인간의 죽음, 실존적 개인으로 구체화된 존재론적 죽음, 사회와 역사의 문제로부터 야기된 도덕적 죽음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은 살아감의 방식과 태도가 각기 다른 것처럼 죽음에 대한 인식 또한 다양한 빛깔과 무게로 우리의 현실 속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번 계절에 발표된 시들 속에도 죽음의 문제는 예외 없이 발견된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야말로 개인과 시대의 밑면을 투명하게 비추어 줄 수 있는 시적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번 계절에 발표된 시들 중에서 특히 문인수의「성묘」(『리토피아』2002. 봄), 김재석의「仙亭」(『현대문학』2002. 2), 조영서의「포커페이스」(『세계의 문학』2002. 봄), 정은숙의「일식(日食)」(『문학사상』2002. 3), 손택수의「세일즈맨의 죽음」, 이재훈의「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현대시』2002. 2)와 같은 작품은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 놓여있는 다양한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2. 인간 일반의 사건으로서의 죽음
죽음이란 흔히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매우 빈번하게 대면 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그것은 가까운 가족과 친지의 죽음으로부터 타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건을 다소 낯설게 여기는 것은 죽음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행위 자체를 회피하거나 배제하려는 경향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죽음은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며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문인수의「성묘」는 소멸하는 것들이 지니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날카롭게 포착하고 시라 할 수 있다.
11월의 오후는 짧다.
그러나 어떤 죽음에도
제 몸의 반경을 지니는 억새의 춤,
여러 무덤 주변에 아직 환한 것처럼
또 다른 동작으로 주춤주춤 갈아입는 것처럼
사람들도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
그 다음이 금세 일몰이다.
「성묘」전문
성묘라는 낯익은 풍경을 한 폭의 그림처럼 담아내고 있는 이 시는 간결하지만 인간 존재가 거느리고 있는 죽음의 문제를 매우 집약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11월이란 계절적으로는 겨울로 향해 가는 마지막 순간이며, 오후 또한 하루의 일상이 마감되는 소멸의 시간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봄이 존재의 탄생과 시작을 의미한다면 겨울은 죽음과 소멸을 예고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처럼 기울어져 가는 계절과 박명(薄明)의 시간 속에 화자는 존재한다. 그것은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는 점에서 물리적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환기한다.
한편「성묘」가 지니고 있는 시적 묘미는 죽음이 임박해 오는 시간을 화자가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사라져 가는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온건히 지키고 있는 자연의 강한 생명력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것은 "그 어떤 죽음에도 / 제 몸의 반경을 지니는 억새의 춤"이라는 구절처럼 죽음 앞에서 결코 초라하거나 왜소해지지 않는 자연의 강인한 속성을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억새'란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강한 생명력을 상징하는데, 이 시에 나타난 억새의 생명력은 죽음을 상징하는 '무덤'으로 인해 더욱 부각된다. 즉 완전한 죽음의 상징물인 '무덤' 앞에서 화자는 오히려 생의 의지를 불사르는 생명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다. 죽음의 현장에서 생명의 고결함을 경험하는 순간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존재의 의지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밝음으로 인해 어둠이 가능한 것처럼, 태어남으로 인해 죽음으로 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인 것이다. 즉 모든 존재는 탄생과 더불어 사멸의 길을 걸어야하는 숙명의 시간을 감당해야만 한다. "또 다른 동작으로 주춤주춤 갈아입는 것처럼 / 사람들도 하산을 서두르고 있다 / 그 다음이 금세 일몰이다"라는 표현처럼 존재는 거부할 수 없는 일몰의 시간을 향해 가야만 한다. 하지만 시인은 죽음을 대결과 집착으로서가 아니라 포용과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시는 삶과 죽음이 길항하는 시간과 공간을 동시에 포착하면서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존재의 미학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문인수의 여타 시가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자연이란 은유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문인수가「성묘」를 통해 소멸하는 자연과 인간의 풍경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면, 김재석의「仙亭」은 죽음이 남겨놓은 고통과 상처를 궁극적으로 치유하는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고 있다.
대낮,
望山의 가슴 아래께가
움찔하더니
김氏네
訃音
망연자실한
낮달
임종을 못해
울먹이는
바다
모든 길들이
문상 온
喪家
일찍 달아오른
윷판
기웃거리는
햇살
「仙亭」전문
죽음이란 사건은 누구에게나 충격과 슬픔을 안겨다 준다. 그것은 인간에게 엄청난 파토스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이성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김재석은 죽음이란 사건 앞에서 매우 절제된 감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그것은 마치 박용래의「下官」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이 몇 컷의 이미지 속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시키고 있다. 하지만 박용래가 가능한 모든 주관적 감정을 배제시킨 채 객관적 풍경을 묘사함으로써 슬픔의 미학을 완성했다면 김재석의 경우는 자연에 대한 객관적 묘사보다는 보다 주관화되고 내면화된 감정을 시 속에 용해시키고 있는 편이다.
「仙亭」은 매우 정갈하면서도 일체의 군더더기가 없는 형식미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절제된 시어와 선명한 이미지를 구사하고 있는 이 시는 죽음이란 사건에 대해 슬픔의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은 채 여과된 감정만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극도로 절약된 언어의 행간 속에는 죽음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운 심정이 더 짙게 드리워져 있기에 시적 울림은 훨씬 크다.
이 시에서 죽음을 목도하는 시간은 '대낮'이다. 대낮은 만물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생명의 시간이며 또한 모든 존재가 낱낱이 드러나는 빛의 공간이다. 이처럼 생명이 만개하는 대낮에 갑작스럽게 직면한 죽음이란 더 없는 충격을 안겨주는 것이다. 화자는 이러한 당혹감을 "망연자실한 / 낮달 // 울먹이는 바다 // 기웃거리는 / 햇살"이라는 자연에 비유함으로써 슬픔의 감정을 감각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전달한다. 이는 자연을 인간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친근한 정서를 유발한다. 즉 '움찔하다', '망연자실하다', '울먹이다', '달아오르다', '기웃거리다'와 같은 동사가 인간의 내적 심리를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仙亭」이라는 제목을 통해 드러난다. 언뜻 보면 이 시의 제목과 내용은 서로 상이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목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를 유추해 보면 시인은 죽음을 통해 보다 영원한 세계로 진입하기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즉 1연에 제시된 '望山'은 다음에 제시되고 있는 모든 시적 정황들을 떠받치고 있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달', '바다', '길', '해'와 같은 자연적 사물들은 모두 '망산'을 향해 집중됨으로써 결국 인간의 죽음이란 이승을 떠나 저승의 세계로, 차안을 넘어 피안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임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仙亭'이란 '신선이 머무는 곳'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 영원한 선(善)의 세계에 귀의하고자 하는 동양적 사유를 함축하고 있다. 특히「仙亭」은 시인이 추구하고자하는 동양적 내세관과 그것을 형상화한 시의 형식이 적절하게 부합된다는 점에서 시적 완결성을 드러내 주고 있다. 즉 담박하고 절제된 언어, 여백의 미를 강조한 시의 형식은 시의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주는 것이다.
3. 실존과 대면하는 존재의 죽음
인간의 실존이란 그것이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인식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야스퍼스의 말처럼 "내가 그것에 바탕을 두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근원적" 방식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인간의 일반적 본질보다도 개개인의 실존을 문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실존이란 개별적 인간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려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존재론적 탐구를 드러내고 있는 시는 언제나 자각하는 인간의 의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조영서의「포커페이스」는 '나의 죽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되묻는 실존적 응시이다.
태양은 빛을 숨기고
바람은 눈살을 찌푸리고
오늘도 하늘은 낯짝이 없다
큰 눈이라도 펑펑 쏟아질 것 같은
저녁 나절,
시간은 이빨 없는 이를 간다
뽀드득뽀드득, 보이지 않는 소리에
눈은 또 한번 금이 간다
어디선가
또
바람이 일어선다
나는 바람을 다시 세우고 죽음을 산다
(죽음은 본살이다)
왜 죽음은 죽음을 보지 못하나,
눈을 빤히 뜨고도
(죽음은 완성이다)
사람은 죽어서 비로소 사람이 된다, 고 한
어느 시인의 익명이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죽음은 유전자다)
끝내는 눈보라가 하늘을 흩날리고
꽃잎, 꽃잎 같은 눈송이를 휘젓는
하이얀 손길이 쓸쓸하게 따스하다
하늘은 왜 눈이 부시게 부시게 떠나,
「포커페이스」전문
조영서의 시는 언제나 손에 잡히는 구체적 사물을 형상화하기보다는, 실체 없는 무형의 것에 대한 탐색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 특이성이 돋보이는 시인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늘', '바람', '빛' 과 같은 대상물이라 할 수 있는데, 이처럼 그가 무형의 것들을 집요하게 성찰하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우주적이며 본원적 세계를 가장 집약적으로 상징할 수 있는 사유적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말한 발레리의 시처럼 자연의 본질적 속성과 접촉함으로써 인간은 가장 실존적이 되는 것이다.
이 시의 서두에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우울한 음영이 드리워져 있다. "태양은 빛을 숨기고 / 바람은 눈살을 찌푸리고 / 오늘도 하늘은 낯짝이 없다"와 같은 구절은 마치 우주가 열리기 이전의 혼돈된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인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뽀드득뽀드득" 이빨 없는 이를 갈고 있는 소리가 있을 뿐이다. '소리'란 '빛'과 '색' 이전의 것이기에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근원적 세계를 드러내 주는 상관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으로 소리란 시원의 세계이며 미지의 세계를 드러내 주는 것이다.
이 시는 형태와 내용에 있어 크게 두 가지 축으로 나뉘어져 있다. 그 하나는 자연의 생성과 소멸을 드러내주는 외부적 현상이며, 다른 하나는 괄호 속에 묶여 있는 죽음에 대한 내면적 독백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밖과 안은 서로 조응하면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데, 이는 마치 대우주와 소우주가 서로 마주치고 결합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자연의 움직임은 응축에서 확산으로 어둠에서 밝음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역동성 속에서 화자는 죽음이라는 가장 어렵고 무거운 문제를 매우 활기 있는 것으로 변모시킨다. 즉 "나는 바람을 다시 세우고 죽음을 산다"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화자는 스스로 죽음의 문제를 주체적이며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때 괄호 속에 묶여있는 시적 진술들은 시인의 내면 의식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집약해 보면, 죽음이란 인간의 가장 본질적 문제(본살)이며 또한 인간을 완성하는 것인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숙명(유전)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삶을 인식하는 자만이 깨어있는 자이듯이, 죽음을 사유하는 자만이 진정 죽음의 문제 앞에 실존하는 개인이 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럼으로 조영서의「포커페이스」는 감추어져 있고 실체를 알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보다 명확히 함으로써 자각하는 존재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시라 할 수 있다. 한편 정은숙의「일식(日蝕)」은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 물음 앞에서 궁극적으로 그것은 무(無)로 환원되는 존재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느 날 내앞에서 보이는 모든 사물들은
풍경속으로 길을 떠난다
사라지고 있고, 사라지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종국에는 모두 없어져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도 저와 같이 사라져
아무도 떠올리지 않고 다시는 복제되지 않고
시간은 허물어지고, 또 그위를 다른 풍경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풍경은 새로 태어나고 없어지고
사람들은 누구도 그를 추억하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당신도 바란다.
이 세상에 막 나온 아이처럼 바란다.
이 낯선 유적지에서.
「일식(日蝕)」전문
시인은 '일식'을 인간 존재의 죽음으로 비유하고 있다. "사라지고 있고, 사라지는 모든 것은 / 언젠가는 종국에는 모두 없어져"와 같은 구절처럼 시인은 존재의 완전한 소멸을 통해 죽음이란 '없음' 그 자체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내세관도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 시는 존재의 죽음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첫째는 '사물의 소멸'이고 둘째는 '기억의 소멸'이고 마지막으로는 '인간의 소멸'이다. 이처럼 완전한 소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시인에게 있어 인생이란 무의미하며 무가치한 것이라는 부정적 세계관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없어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연민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은 허물어지고, 또 그위를 다른 풍경이 올 때까지 / 끊임없이 풍경은 새로 태어나고 없어지고"라고 말하고 있듯이 '있음' 은 '없음'으로 '헌 것'은 '새것'으로 대체되어 가는 것이 우주적 질서라는 것이다. 이처럼 낡은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교차되어 가는 것이 삼라만상의 원리이며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다. 즉 시인은 이처럼 덧없는 생에 대해 '낯선 유적지'에서 잠시 머물다 지나는 순간일 뿐이라고 궁극적인 삶의 허무성을 지적한다. 그럼으로 시인은 "다시는 복제되지 않고 / 추억하지 않기를"이란 부정어법을 통해 삶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4. 사회의 그물망 속에 포획된 죽음
오늘날 현대인의 의식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은 인간의 삶이 이미 단단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 한치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것은 마치 꼼꼼한 그물망처럼 우리의 삶은 철저히 감싸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그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법칙과 질서에 구속되어 있는 수동적 인간으로 변모되고 말았다. 특히 자본주의적 삶의 구조는 인간을 생산과 소비라는 이중 구조 속에 편입시켜 놓음으로써 경제적 문제로부터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비극적 인간형을 만들어 놓았다. 손택수의「샐러리맨의 죽음」, 이재훈의「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는 이러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극단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는 목을 매고 죽었다.
라면 국물 자국이 묻어 있는
넥타이로 질끈 목을 매고 죽었다.
무슨 예행연습처럼 허구헌 날
버스 손잡이에 목을 매고 다니던 그
숨이 턱턱 턱끝까지 차오르도록
교수형을 당하듯, 버스 손잡이에 손
목을 매고 다니던 그
사내의 앞가슴까지 후즐근하게 늘어진 혀가
보풀보풀 이끼가 돋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가를 조롱하듯이 낼름대고 있었다.
「세일즈맨의 죽음」부분
손택수의「세일즈맨의 죽음」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드러내 주고 있는 것처럼 현실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최후를 매우 의미심장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시이다. 세일즈맨이라는 직업이야말로 자본주의가 양산해낸 가장 상징적인 인간형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삶의 틀 속에서 끊임없이 종속적 삶을 연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의미한다. 손택수는 이러한 공포스러운 현실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한 인간의 형상을 그로테스크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목을 매고 자살을 한 사람의 모습은 "라면 국물 자국이 묻어 있는 / 앞가슴까지 후즐근하게 늘어진 혀"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비극적인 느낌과 더불어 쓴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이처럼 죽음을 맞이한 인간의 모습을 다소 우수꽝스럽게까지 그리고 있는 것은 그로테스크라는 기법 자체가 이미 신랄한 조롱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비극적 상황을 희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부조리한 사회가 간직하고 있는 사회의 모순을 보다 분명히 노출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이는 한 세일즈맨의 죽음이 특정한 개인의 특별한 사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 모두에게 닥칠 수 있는 존재 일반의 사건으로 확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 시에 드러나 있는 '넥타이'와 '버스 손잡이'는 현대인의 운명을 암시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둘 다 인간의 삶을 옭아매고 있는 도구라는 점에서 삶을 저당 잡히게 하는 죽음의 표상들인 것이다. 결국 손택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인의 삶이란 것은 애초에 죽음을 향한 "예행연습처럼 / 교수형을 당하듯"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 근원적 폭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적 굴레로 인해 빚어진 굴욕적이며 치욕적인 삶이란 이미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역설화법인 것이다.
손택수가「세일즈맨의 죽음」을 통해 현대인의 죽음을 매우 사실적이고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면 이재훈은「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를 통해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성을 환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관을 열었다. 몸뚱이 없이 얼굴만 덩그마니 있었다. 눈을 감았다. 무서워서 누군가를 불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떴다. 네 얼굴, 선혈 뚝뚝 흐르는 네 얼굴이 있다. 나는 그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관을 닫았다. 음악이 흘렀다. 관 속의 얼굴이 노래를 불렀다. 나는 몸 없는 그 얼굴을 사랑한다. 그리고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 네 몸을, 경멸한다.
「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부분
우리는 일반적으로 삶이란 항상 현재 속에 있고 죽음은 먼 시간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죽음이란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공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주체의 자각이나 깨어있음을 전제하지 못할 때 그러한 사회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란 어쩌면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재훈의 시는 이처럼 '일상'에 매몰되어 살 수밖에 없는 세계의 허구성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훈이 그리고 있는 죽음은 주로 죽은 자의 얼굴에 대한 묘사에 집중된다. 특히 그가 그리고 있는 얼굴의 모습은 몸과 분리된 얼굴이라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이때 그가 그리고 있는 죽음의 형상은 온전한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변형되고 왜곡된 죽음임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준다. "선혈이 뚝뚝 흐르는 네 얼굴 / 관 속의 얼굴이 노래를 불렀다"와 같은 구절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살아있는 존재인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즉 관 속에 누워있는 죽은 이의 모습은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자연인으로서가 아니라, 죽어서까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무서운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죽음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인간의 신체를 집요하게 대상화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비극적 현대인의 모습을 가장 상징적으로 대변해 주는 것이 인간의 신체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오늘의 인간이 더 이상 숭고한 대상이거나 정신적 영역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즉 "일상이라는 지능적인 시나리오에 빼앗긴 몸"이야말로 온전하고 자족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손택수와 이재훈의 시에 나타난 죽음은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내 몰린 자가 극단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통해 우리의 일상을 짓누르는 폭력적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5. 삶을 위한 명상으로서의 죽음
이번 계절에 발표된 여러 시편을 보면서 죽음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바로 오늘의 시인들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수용하고 성찰하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이 시대의 삶의 지표가 무엇인지 다시금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문인수의「성묘」와 김재석의「仙亭」은 인간 일반이 거느리고 있는 죽음을 통해 자연의 질서 속에서 순응하는 아름다운 죽음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조영서의「포커페이스」와 정은숙의「일식(日食)」은 존재와 대면하는 실존적 죽음에 대해 성찰함으로써 인간의 죽음을 물리적 차원을 넘어 철학적 사유로 이끌어 낸 경우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손택수의「세일즈맨의 죽음」, 이재훈의「아마도 일상적으로 돌아갈 한 얼굴의 죽음에 관하여」는 억압된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죽음을 강요당하는 현대인의 삶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인간을 가장 진지하고 겸허하게 되돌려 놓는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남은 삶을 어떻게 이끌고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가능하게 만든다. 인간은 죽음을 물음으로써 삶을 대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죽음을 문제시하고 있는 모든 문학작품 속에는 언제나 삶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감추어져 있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아무도 죽음을 부축할 수는 없"(오규원,「기댈 곳이 없어 죽음은」)다는 점에서 고독하고 외로운 행위이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죽음 앞에 단독자로 설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인간을 가장 인간적이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점 때문에 수많은 시인들은 죽음에 대해 탐색하고 고뇌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죽음에 대한 명상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본질과 목적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시켜 준다는 점에서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할 자세이다.
필자명: 강경희(姜敬姬)
약력: 숭실대 석사 및 동대학원 박사 수료
현재 숭실대, 호서대 강사
2001년 문화일보 신춘 문예 평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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