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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초점/문명의 야만, 야만의 문명-90년대 생태주의 문학의 공과/이재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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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문명의 야만, 야만의 문명
-90년대 생태주의 문학의 공과
이재복
1
90년대를 흔히 미시담론의 시대라고 한다. 이 말은 이미 90년대를 표상할 때 하나의 고정된 언술처럼 되어버린 것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쓰고 있고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이 말은 정말로 90년대를 표상하는데 적합한 말일까. 아니면 기실은 적합한 말이 아닌데 그것을 모른 채 모두가 적합한 말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이 말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 90년대를 미시담론의 시대라고 명명하는 것은 적합한 말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무의식 중에 수용하게 된 데에는 냉전과 탈냉전의 논리가 강하게 작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90년대 이전을 냉전의 시대로 그 이후를 탈냉전의 시대로 구분한 뒤, 냉전의 시대에는 거대담론이 탈냉전의 시대에는 미시담론이 지배적인 양식이라고 심각하게 고민하지도 않은 채 당연하게 믿어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이면에는 많은 사람들이 냉전의 시대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인간의 생존을 지배한 가장 큰 담론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이보다 더 큰 거대 담론은 없어 보였고, 그러한 거대 담론이 무너지고 해체되면서 그동안 억압되었던 미세한 담론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일어나게 되자 그들은 바야흐로 미시담론의 시대가 도래한 착각 속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거리를 두고 탈냉전 시대라고 하는 90년대를 보면 그 脫자의 진정한 의미가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은 되지만 그것이 거대담론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90년대를 보면 금새 이데올로기가 무너지고 해체된 자리에 강력하고 강렬한 힘으로 새롭게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는 담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담론은 결코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보다 가볍다거나 그 자장이 미미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이 담론은 이데올로기보다 더 큰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담론, 다시 말하면 생태주의 담론은 우선 그것이 인간뿐만 아니라 유기물이나 무기물 등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의 실존적인 위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생태계의 파괴는 어떤 존재자 개별의 문제가 아니라 무수한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존재자의 실존적인 위기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태주의 문제가 어느 한 개인이나 국가가 아니라 전 세계적 혹은 전 지구적인 어떤 정치적 연대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데올로기가 문제적이었던 냉전시대에 국제연합이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였다면 생태가 문제되고 있는 탈냉전시대에는 국제환경연합 혹은 국제생태연합 같은 단체가 하나의 상징적인 존재로 성립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생태주의와 관련하여 다음으로 문제적인 것은 생태의 위기가 진보와 발전의 논리를 가진 가장 이상적인 체계라고 믿었던 자본주의 문명이 야기한 그늘이라는 점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허무주의의 만연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냉전의 시대가 끝나고 탈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던 사람들에게 생태의 위기는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환멸로 바꿔놓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러한 조짐은 특히 세기말과 맞물려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묵시록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환멸은 곧 자본주의 문명의 토대 및 가치 체계에 대한 대대적인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또한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문명을 지탱해온 여러 패러다임들이 변화하지 않으면 생태의 위기에서 오는 인류의 실존 위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문명의 토대 및 가치 체계로 군림해온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과학만능주의, 서구중심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남성중심주의 등이 각각 해체되면서 그동안 억압받아온 감성, 유기·무기물, 자연, 영성, 동양, 공동체 의식, 여성 등이 새롭게 그 존재성을 회복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앞으로 도래할 문화 및 문명의 토대 및 가치 체계의 중심에 생태주의가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태주의 문화 혹은 생태주의 문명은 그것이 인류의 실존 위기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어떤 당위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당위성이 기존의 자본주의 문명(문화)의 토대 및 가치체계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억압을 의미하는 그런 식의 당위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래할 생태주의 문명(문화)은 기존의 자본주의 문명과의 철저한 단절을 통해 성립될 수 없다. 지금까지 파시스트적인 가속도를 내며 질주해온 이 문명을 완전하게 돌려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이상주의자의 잠꼬대에 불과한 것이다. 新生이란 언제나 단절이면서 연속인 것이다. 여기에 도래할 생태주의 문명의 괴로움, 더 나아가 이 문명이 심하게 앓아야만 하는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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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새로운 거대담론으로 부상한 생태주의가 '지금 여기'에서 가지는 딜레마를 우리 문학은 얼마나 심하게 앓아 냈는가 혹은 앓고 있는가. 이 문제는 생태주의에 대한 문학하는 사람들의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깊이나 넓이와 맞물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익히 알고 있듯이 90년대 생태주의에 대한 관심은 문학의 위기 혹은 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한 사람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새로운 제재의 고갈에서 문학의 위기가 온다고 주장했던 오르테가 이 가세트 Ortega Y. Gasset의 전망은 적어도 90년대 한국문학에서는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는 말이 되고 말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생태주의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열기가 곧바로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깊이와 넓이로 이어진다고 볼 수 없다. 더욱이 어떤 하나의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그것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 없이 단순한 욕구의 차원에서 접근해 너무나 쉽게 몸을 바꿔온 우리 문학사의 저간 사정을 고려할 때 이 깊이와 넓이의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깊이와 넓이의 부재는 곧바로 '속류' 혹은 '사이비'를 양산하게 되어 진정한 담론의 정립에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90년대 생태주의 담론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90년대에 쏟아져 나온 생태주의 문학 중에는 '속류' 혹은 '사이비'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90년대의 '속류 생태주의'는 생태 그 자체를 단순히 소재의 차원에서 접근하거나 생태계의 파괴에서 오는 불안을 인간적인 보호본능의 차원에서, 다시 말하면 소박한 휴머니즘적인 차원에서 보여주며, '지금 여기'에서의 문명에 대한 천착도 없이 성급하게 유토피아적인 전망을 내 보이는 그런 특성을 지닌 것들을 말한다. 이 사실은 진정한 생태주의란 소재의 차원을 벗어나며, 인간만이 아닌 자연 심지어는 무기물까지를 포함하는 차원에서 그 담론이 성립되고, 문명과 자연 혹은 문명과 반문명 사이의 적절한 긴장 속에서 그 존재성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90년대 거대담론으로 부상한 생태주의를 이렇게 규정하고 보면 생태라는 이름을 달고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수많은 문학 작품 중에서 상당수가 거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생태주의 문학의 한 모범으로 간주되어온 작품들이 기실은 과장되거나 왜곡된 평가의 산물에 다름아니라는 그런 사실도 포함될 것이다. 이런 과장되고 왜곡된 평가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하이다. 많은 평론가들은 유하의 '하나대' 시편을 90년대 생태주의 문학의 한 성과로 평가해 왔다. 그들은 유하가 자본주의 문명의 중심인 '압구정동'이 아닌 하나의 자연으로 존재하는 전라도 어디 쯤에 있는 '하나대'를 노래했을 때 이것을 문명에 대한 비판 혹은 그 대안으로서의 자연을 노래한 시로 규정하고 여기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던 것이다.
유하의 '하나대' 시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90년대 포스트모던 문명의 가장 전위였던 유하라는 한 시인의 몸 바꾸기에 지나친 의미부여를 한 결과이다. 많은 평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자본의 지배와 모순 구조를 가장 잘 드러내는 '압구정동'에서 그 문화(문명)의 속내를 철저하게 체험한 유하라는 시인의 몸 바꾸기를 자신들이 견지해온 문명비판과 그 대안으로서의 생태지향이라는 그런 주장을 펼치는데 일정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하나의 호제로 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 이렇게 문명의 속내를 속속들이 체험한 유하라는 시인도 그 문명을 비판하고 자연으로 몸 바꾸기를 하지 않았느냐. 그의 몸 바꾸기는 진짜 아니냐. 따라서 문명에서 자연으로 몸 바꾸기는 당위적인 것이다.'라는 그런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바로 평자들의 함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문명에서 자연으로의 몸 바꾸기의 정당성 여부에 앞서 유하라는 이름과 그 바뀐 결과에만 집착한 것이다.
그러나 유하의 문명에서 자연으로의 몸 바꾸기는 평자들의 평처럼 그렇게 긍정적인 여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압구정동'에서 '하나대'로의 이행은 문명과 자연의 긴장을 통한 공존이 아닌 일방적인 도피이다. 그는 '압구정동'으로 상징화된 쓰레기 같은 문명 세계에 살면서 그 쓰레기 같은 세계가 싫어 '하나대'라는 하나의 이상적인 자연을 만들어 그곳에서 살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몸은 '압구정동'에 마음은 '하나대'에 있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모두 다 '하나대'에 있으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기만이다. 그 자신이 쓰레기 같은 문명 세계 속에서 살면 그 쓰레기 속에서 자연을 노래해야 한다. 문명은 분명 비판의 대상이지만 그 문명에 대한 천착 없이 어떤 자연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유하는 90년대의 생태주의를 제대로 구현해낸 시인이 아니다.
이렇게 생태주의와 관련하여 과장되고 왜곡된 평가를 받은 경우가 어디 유하 뿐이겠는가. 진정한 생태주의 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흔히 정신주의 시를 쓰는 시인으로 분류되는 조정권, 황동규, 이성선, 황지우, 이기철, 최동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조정권의 시가 문제적이다. 90년대 정신주의의 한 경지를 보이고 있다는 평가를 받은 그의 『산정묘지』(1994) 같은 시도 그가 추구하는 그 정신의 순일함이 문명화된 세계의 일상이라든가 속세와의 단절 속에서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山頂을 향하는 순일함은 천상의 것이지 지상의 것은 아니다. 천상의 수정 같은 원리란 지상의 어두운 구석,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 문명이 야기한 그늘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고의적으로 은폐하려는 그런 무서운 음모 이론과도 협잡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오히려 문명의 부정적인 그늘을 들추어내고 그것을 고발하는 그런 문명비판 문학 작품(송희복은 이런 류의 문학을 '생태학적인 문명비판 문학〉 (「생명문학과 존재의 심연」, 『좋은날』 1998)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자연과 문명을 분리가 아니라 통합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태주의에 대한 바람직한 시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생태학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이미 문명비판이라는 말속에 생태학적인 상상과 사유가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필자는 생태학적이라는 수식어를 생략한 것이다)이 '지금 여기'에서 좀더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문명 비판적인 문학은 간혹 엄살에 가까운 비명과 부정으로만 일관하는 대안 없는 절망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인식 주체의 몸과 마음을 속이는 기만적인 행위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 문명 비판 문학은 쓰레기 같은 문명 세계를 직시하며, 그것을 과도하리만큼 거세게 혐오하고 또 파괴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쓰레기 같은 문명 세계의 주범인 인간을 고발하고, 문명의 미래에 대한 어떤 묵시록적인 불안을 환기하기도 한다. 문명에 대한 이와 같은 강도 높은 비판과 어두운 미래를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가들로는 이형기와 백민석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밖에도 이하석, 고형렬, 이승하, 이남희, 김수용, 박혜강 등의 작업들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형기와 백민석이 90년대 문명 비판의 전위로 명명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먼저 이 두 사람은 세대가 다르다. 이형기는 1933년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서 해방과 유신을 거쳐 지금 여기에 이른 이순을 넘긴 그야말로 구세대이며, 백민석은 1971년 산업화 시대에 태어나 민주화 시대를 거쳐 1995년에 등단한 이십대 후반의 신세대이다. 거의 40여 년에 달하는 이 차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차이의 진정한 의미는 이형기가 '문명'보다는 '자연'을 모태로 하여 성장하고 또 그것을 텍스트로 하여 자신의 문학 세계를 펼쳐 온 것에 비해 백민석은 '자연'보다는 '문명'을 모태로 하여 성장하고 또 그것을 텍스트로 하여 자신의 문학 세계를 개진해 왔다는 사실에 있다. 한마디로 이형기는 자연의 감성에 토대를 둔 서정 시인이고, 이에 비해 백민석은 문명의 한 상징인 매체에 길들여지고 그것을 즐기는 텔레비젼 키드(신수정은 그를 '텔레비젼 키드 세대'로 그의 문학 세계를 '텔레비전 키드의 유희'라는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다. 『문학과 사회』 1997년 가을호)이다.
이렇게 문학적인 토대가 다른 두 사람이 90년대에 들어 동시에 문명 비판이라는 한 목소리를 낸 것은 흥미 차원을 넘어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어떤 보편성을 끌어낼 정도로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형기가 『죽지 않는 도시』(1994)에서 보여주고 있는 현대문명이 야기한 불화와 갈등, 여기에서 기인하는 미래에 대한 절망과 비관, 더 나아가 섬뜩한 파멸 의식 같은 것이 신세대 작가인 백민석의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1997)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비록 장르는 다르지만 이 두 작가의 작품에 공통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격렬한 문명 비판은 그동안 파시스트적인 가속도를 내며 질주해온 자본주의 문명 전체에 대한 강렬한 경고의 메시지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형기와 백민석이 문명 비판이라는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방식이라든가 그 뉘앙스의 정도는 다르다. 이형기가 문명을 비판하는 방식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책임 의식에 입각한 일종의 우려의 시각에서이다. 그의 문명 비판은 격렬하고 증오에 찬 것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는 이 문명에 대한 혹은 그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애정이 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백민석의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에는 그런 시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문명 비판의 방식은 도덕과 윤리를 동반하지 않는 무정부주의적인 것이다. 이러한 무정부주의적인 시각은 다음과 같은 대목에 잘 드러나 있다.
"산택하라, 비트냐 퍼크냐? 이게 뭐야?" 내가 물었다.
"선택하라, 비트냐 펑크냐, 예요." 사내애가 한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선택하라는 거죠. 비트냐 펑크냐."
"비트나 펑크나 다…… "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 그게
그거 아냐?"
"그게 그거죠?"
사내애가 울적한 얼굴로 시인했다. 그러곤 내 손에서 쪽지를
뺏어들었다. "이건 김지하, 라는 어떤 옛날 사람이 쓴 「諷刺냐 自
殺이냐」란 글에서 베낀 거거든요. 그 글 끝에 선택하라, 풍자냐
자살이냐, 고 씌어져 있었지요. 괜찮죠?"
"「諷刺냐 自殺이냐」를 끝까지 다 읽었어?" 놀란 내가 추궁했다.
"아뇽." 사내애는 부정했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나요?"
"아무튼 그 아저씬 좀 불쌍한 노친네더군요. 서울대학교까지
나와서, 전과자에다, 직장도 없교, 정신병원이나 들락날락하고,
'죽음의 굿판'이니 뭐니 해서 깨지고, 지 이름 때문에 인생이 좆
됐으니 이름을 바꾼다고 신문사에다 편지질이나 해대고. 일간지
들에 쫙 났어요. 마누라한테 이혼은 안 당했는지 몰라."
(「음악인 협동조합 2」『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pp.211-212)
인용문에서 무정부주의적인 시각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이 바로 '비트냐 펑크냐'이다. 이 '비트냐 펑크냐'는 김지하의 '풍자냐 자살이냐'를 페러디한 것이다. 지하의 이 말은 세계에 대한 실존 방식을 드러내는 말이다.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세계에 대해 풍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드러낼 것이냐 아니면 차라리 상징적인 자살을 할 것이냐, 70년대 지하가 실존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이렇게 그 위기에 대항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실존적인 치열함은 「음악인 협동조합 2」에 와서는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되어 무화되기에 이른다. 풍자냐 자살이냐 고통스럽게 세계에 대응할 필요 없이 비트든 펑크든 아무 것이나 좋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세계 인식이다. 이것은 진실성과 진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믿거나말거나식' 세계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인식하에서는 문명에 의해 성립된 미와 추,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 참과 거짓 등과 같은 가치 평가적인 구분이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 현실과 비현실,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또한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문명이 야기할 수 있는 무정부주의적인 광란과 부조화, 무질서는 '믿거나말거나박물지 음악인 협동조합'이 주체하는 공연장에서 인간과 돼지가 獸姦하는 대목에서 극에 달한다. 90년대 문학을 통틀어 문명의 가장 어두운 부분 중의 하나로 표상될 수 있는 이 수간의 대목은 그것이 문명의 종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믿거나말거나박물지 음악인 협동조합'의 공연장에서 수간을 통해 태어날 아이(상징적인 존재로서의 아이)가 마르케스의 『백년간의 고독』에서 한 가문의 종말을 맞게 한 그 돼지 꼬리가 달린 아이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음협의 인간과 돼지의 수간을 통해 우리가 전망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생명의 씨앗을 갖지 못하는 '희망 없는 전망'일 뿐이다.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는 이처럼 '지금 여기'에서의 문명이 표상할 수 있는 부정 의식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부정 의식으로 인해 그는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아 왔다. 시각에 따라 다르게 평가할 수 있지만 그의 부정 의식은 비난보다는 찬사를 받을 여지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표상하는 부정 의식이 다소 위악적인 몸짓을 과장되게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 소설에 드러난 그의 문명에 대한 부정 의식은 부정을 위한 부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문명에 대한 부정 의식은 긍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지금 여기'에서의 문명이 가지는 모순과 부조리, 부정성을 그 밑바닥까지 들여다 봄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긍정으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부정의 실체를 알고서야 긍정의 토대를 세울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점에서 백민석과 이형기의 문명 비판은 진정한 생태주의 정립에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견지하는 문명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그 드러남이 온전한 생태주의 문학의 모습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들이 보여준 것은 생태주의 문학의 一面일 뿐이다. 온전한 생태주의 문학은 일면이 아닌 문명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고려하고, 이를 토대로 문명과 자연 사이의 적절한 긴장과 균형 감각을 고려할 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3
90년대 새로운 거대 담론으로 부상한 생태주의 문학의 가능성을 열어보인 작가로는 김지하, 정현종, 최승호, 이문재, 박완서, 최성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속류'와 '사이비적'인 생태주의를 넘어 일정한 정도의 인식론적 존재론적인 깊이와 넓이를 겸비한 진정한 의미로서의 생태주의 문학을 구현하고 있다. 이 작가들의 공통점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몸을 바꿔 생태주의 문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적어도 이들은 어떤 하나의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그것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 없이 단순한 욕구의 차원에서 접근해 너무나 쉽게 몸을 바꿔온 사람들과는 다르다. 이 점은 그들이 구현하고 있는 생태주의 문학에 대한 신뢰성과 함께 가능성을 더해준다고 할 수 있다.
먼저 김지하의 경우를 보자. 생태주의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미 70년대부터 시작된다. 그의 첫 시집인 『황토』(1970)를 보면 그 안에서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은 단순히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다'라는 명제이다. 그는 70년대의 그 억압적인 상황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라는 사실을 육체와 감각적인 언어를 통해 노래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번의 감옥 체험은 그가 표상해 온 이 '살아 있다'를 위기로 몰아넣기에 이른다. 이 실존적인 위기 상황에서 그는 '살아 있다'라는 명제를 육체와 감각이 아닌 영성과 감성의 언어를 통해 다시 살려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살아 있다'라는 명제가 눈에 보이는 차원(육체와 감각)에서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영성과 감성)에서도 구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살아 있다'라는 명제의 범주가 더 심화되고 확장된 것이다. 지하는 이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살아 있음을 통합하여 80년대 중반 그것을 '생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이 '생명'의 견고한 토대를 세우고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의 질서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우주 삼라 만상의 진화 원리의 바탕으로 삼는 동양의 氣 사상, 동학의 侍天主, 不然其然의 논리, 주역의 陰陽五行, 불교의 空, 無, 도가의 虛 등 동양의 사유체계들을 수용한다.
이렇게 영성과 감성을 강조하는 동양의 사유체계들이 수용되면서 그의 생명 사상은 인간 중심이 해체되고 인간만이 아닌 모든 생명체와 무기물, 최초의 초기적 물질까지도 동등하다는 논리를 갖게 된다. 그의 생명 사상에서는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만물들이 그 안에 神靈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모두 공경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사물과 우주 생명 전체는 따로 따로 떨어져 (틈, 여백, 거리, 자유) 각립할 개연성이 있으되 결코 떨어져 불리할 수 없는 전체적이고 유기적이며 끊임없는 차원 변화와 더불어 변화, 생성, 진화하는 전체적 유출활동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기존의 인간 중심의 협소한 생명 개념을 넘어 우주적인 생명 개념으로의 확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생명사상은 한마디로 '우주는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살아 있는 생명 그 자체'라는 명제로 요약된다.
그가 내세우는 이러한 생명 사상은 우주와 인간의 마음 사이의 벽을 만들어 그 감응 자체가 불가능한 서구의 것과는 달리 인간과 우주의 무궁한 감응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인간과 우주에 대한 새로운 사유 체계임과 동시에 기존의 반생명적인 문명이나 문화에 일정한 반성과 비판, 그리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체계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생명 개념의 확장은 그것이 너무 크고 넓기 때문에 자칫하면 실감의 차원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다. 실질적으로 그의 생명사상을 비판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시와 사상의 견고한 상보적인 관계 속에서 오랫동안 인간과 우주 전체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이 문명을 돌려세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온 그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여기에 대한 천착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의 생명 사상은 생명 운동이 되어야만 한다. 그의 생명 사상은 사상의 차원에서가 아닌 보다 구체적인 일상(현실)의 운동 차원에서 구현되어야만 한다. 실천적인 운동성 없이 사상으로만 남아 있는 사상은 공허한 것이다.
김지하의 생명 사상이 우주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광대무변한 것이라면 정현종의 그것은 아주 작은 것에 대한 발견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생명이 무슨 추상이나 이념이나 거창한 철학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작은 것들 속에 들어 있"(『문학과 사회』 1992년 가을호)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말하는 작은 것들이란 익히 여러 평자들(정과리, 송희복 등)에 의해 언급되었듯이 숨결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에게서 숨결은 김지하의 그것과는 다르다. 지하의 경우에 그 숨결은 인간과 우주의 同氣感應을 통해 형성되는 무궁무궁한 살아 있는 기운으로 표상되겠지만 정현종의 경우에 그것은 단지 인간의 코나 입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긴장과 이완으로서의 들숨과 날숨의 의미 밖에는 없다.
그의 생명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산문집 『생명의 황홀』(1989)과 시집 『한 꽃송이』(1992) 『세상의 나무들』(1995)에 집약적으로 드러나 있다. 특히 다음의 시는 그의 이 작은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생명관을 잘 반영하고 있는 절창이다.
환합니다
감나무들에 감이,
바알간 불꽃이,
수도없이 불을 켜
천지가 환합니다
이 햇빛 저 햇빛
다 합해도
저렇게 환하겠습니까
- 「환합니다」
가을 햇볕에 공기에
익은 벼에
눈부신 것 천지인데,
그런데,
아, 들판이 적막하다 -
메뚜기가 없다!
오 이 불길한 고요 -
생명의 황금고리가 끊어졌느니
- 「들판이 적막하다」
시인의 눈길이 닿고 있는 것은 저 먼 우주의 어느 "별"(김지하)이 아니라 감나무의 "감"과 들판의 "메뚜기"이다. 시인은 "감"과 "메뚜기"라는 이 작은 존재들로부터 생명의 한 원리를 발견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 발견은 결코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아울러 그 발견에서 오는 미적 체험의 폭 역시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지하의 우주로 향한 그 광대무변한 상상력을 형상화한 「줄탁」에서 받은 강렬한 미적 체험이 이 두 편의 시에서도 그대로 감지되고 있다.
정현종이 보여주는 생명관은 시인이나 시인 주변의 일상과 현실의 차원에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실감의 정도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생명관이 어떤 보편적인 만족의 대상으로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그의 생명관 혹은 그것을 형상화 하고 있는 시의 경우 유의해야 할 것은 그것이 지나치게 유미주의적인 측면으로 경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은 생명에 대한 소중함과 그 발견을 아름답게 노래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시인 개인의 미에 대한 탐닉에 머문다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방향은 그의 미적 체험이 특수성과 함께 보편성을 담보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하의 큰 생명관과 길항을 통해 좀더 새로운 변화와 생성의 과정을 밟아가는 것이다.
최승호의 생태주의의 편력은 독특하다. 그는 지금까지 『대설주의보』(1983)를 시작으로 『여백』(1998)에 이르기까지 모두 8권의 시집을 상재하고 있다. 이 시집들에 드러난 시인의 생태주의에 대한 편력은 한마디로 '어둠'에서 '밝음'으로의 이행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회색'에서 '검은색' 그리고 '흰색'으로의 이행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색조의 변화는 곧 시인의 문명에 대한 인식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색조가 회색을 띠고 있는 『대설주의보』와 『고슴도치의 마을』(1985)에서는 주로 문명이 행사하는 폭력성과 광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폭력과 광기의 주체는 인간이며 그 희생양은 동물과 생물 같은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시인은 이 희생의 살풍경을 때로는 냉혹하게 또 때로는 그로테스크한 시각으로 포착하여 인간이 야기한 폭력과 광기의 참혹성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문명의 야만성에 대한 고발인 동시에 시인의 불안 의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이 불안 의식이 '대설주의보'로 상징화된 것이다. 이때의 '대설'은 순수한 흰 눈이 아니라 문명의 불순물들이 섞여 있는 회색 산성눈인 것이다.
문명이 야기한 회색빛의 음울한 색조는 『진흙소를 타고』(1987), 『세속도시의 즐거움』 (1990), 『회저의 밤』(1993)에 오면 검은색으로 바뀐다. 이 시집들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어두운 밤이다. 여기에 오면 문명의 야만성은 극에 달한다. 이 문명의 야만 혹은 야만의 문명으로 인해 결국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無化되고 만다. 무화 중에서도 철저한 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시가 「회저」(『회저의 밤』)이다. '회저'란 살이 썩어 들어가는 병으로 이것은 곧 문명의 썩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야만의 문명에 대한 시인의 소멸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완전한 소멸(무화)을 통해 거듭 나려는 생성의식으로도 볼 수 있다. 시인은 「회저」에서 "온몸의 살이 썩고/온몸의 뼈가 허물어져서/재 밑의 재로 나는 돌아가리라"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야만의 문명에 대한 철저한 무화를 통해 새롭게 거듭나려는 시인의 의지 아닌가. 문명이 썩고 또 썩고, 어둠이 점점 더 깊어질수록 밝음은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문명이 가지는 어둠을 어둠으로 직시하고 그로부터 밝음을 찾으려는 시인의 의지는 『반딧불 보호구역』(1995), 『눈사람』(1996), 『여백』에서 구체화된다. 어둠의 끝에서 찾은 밝음이기 때문에 이 시에 드러나는 밝음은 순정함을 넘어 경건하기까지 하다. 인간의 폭력과 광기에 의해 무참하게 희생당했던 존재로 그려진 동물과 생물들이 여기에 오면 그 안에 모두 신성을 모시고 있는 경건한 존재로 그려진다. 가령 "코끼리 코! 무소의 코뿔보다 놀림이 자유자재인 부드러운 코끼리 코"(「알을 닮은 눈사람」)라든가 "자욱한 물안개 속으로 연어들이 돌아오는 소리 듣는다. 어린 날의/강에서 죽으려고 먼 바다에서 늙어 돌아오는 연어들의 노래를"(「물안개」), 또는 "수평선에서 넘어온 고기잡이 배 한척, 그 뒤를 갈매기들이 너울너울 따라옵니다"(「바다」) 등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가진 존재자들의 자유와 평화의 풍경이다. 시인은 문명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지향점을 바로 이 모든 존재자들의 공존과 화합 속에서 찾은 것이다.
이처럼 최승호의 생태학적인 편력은 문명에 대한 철저한 체험을 통해 성립된다. 어느 한 시집만 놓고 보면 그의 생태주의는 문명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과 선적이고 명상적인 체험의 전경화로 읽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그의 생태주의는 문명과 자연 혹은 문명과 인간 사이의 적절한 긴장과 이완을 통한 넘나듦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생태학적인 상상력이 최근 선적이고 명상적인 길로 들어선 것은 사실이지만 이 길이 세속 도시와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문명(속)과 자연(선) 사이의 긴장과 이완은 계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명과 자연의 넘나듦의 문제는 이문재의 경우에도 중요한 화두이다. 90년대에 상재한 『산책시편』(1993)과 『마음의 오지』(1999)에서 그는 문명과 자연의 넘나듦을 속도에 대한 인식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그는 현대 문명 사회는 '빠름'을 선택하고 '느림'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빠름'보다는 오히려 이 '느림'에 절대 가치를 부여한다. 그는 "게을러야 한다 게으르고 게으르고 또 게을러서 마침내 게을러터져야 한다//게으름의 익은 알겡이들을 폭발/시켜야 한다 천지사방으로 번식시켜야 한다"(「석류는 폭발한다」『마음의 오지』)는 느림에 대한 강렬한 자의식이 투영된 발설을 하고 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빠름의 속성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무서운 가속도(파시스트적인 가속도)를 내며 질주하는 문명을 돌려 세우는 방법으로 그가 속도를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인 방식으로 그는 '산책'을 들고 나온다.
문명 혹은 문명의 속도와 관련하여 그가 들고 나온 이 산책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산책(산책자)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제기된 문명의 문제를 다시 산책으로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30년대 김기림, 이상, 박태원 등으로 대표되는 우리 문학은 산책자의 고유한 내면적 시선으로 백화점, 쇼 윈도, 다방, 모던 걸, 카페 여급과 같은 근대 문명을 포착해 그것을 의미화 한 것이 사실이다. 30년대 산책자의 시선에 의해 의미화 된 문명은 그 안에 긍정과 부정, 행복과 재앙,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지닌 이중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90년대 이문재의 시에 와서는 부정, 재앙, 절망의 전경화로 드러나면서 산책과 문명의 의미도 변화하게 되었다. 특히 30년대에 비해 90년대는 문명 이후, 근대 문명이 아니라 근대 문명 이후 혹은 후기근대 문명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이문재의 산책은 문명에 대한 대항 내지 대안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산책을 통해 문명의 속도를 줄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문명과 자연이 相生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중요한 물음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욕망하는 산책이 문명화 된 도시를 떠나 옛날의 隱者들이 하는 그런 은일이나 은둔의 산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산책은 문명화 된 도시에 존재하면서 그 도시를 떠나는 역설적인 의미를 가진 산책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산책은 과연 가능할까. 시인의 논리에 의하면 그 산책은 가능하다. 그것은 산책을 하는 주체의 몸이 唯心論的인 몸으로 상정될 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즉 몸 속에 마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또한 몸이 있다고 상정될 때 그것은 가능한 것이다. 몸과 마음은 不一而不二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몸을 빠져나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고, 몸 또한 마음 바깥으로 나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각각 자유로운 존재성을 가진다고 그것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면 안 된다.
이처럼 몸과 마음을 不一而不二의 차원에서 보면 문명화 된 도시에서 산책을 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마음 속의 몸은 언제든지 도시에 존재하면서 또한 도시 밖, 자연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산책은 "산책로 밖에 있으며"(「산책로 밖의 산책」『산책시편』), "오히려 길 밖이 넓고, 길 아닌 것이 오히려 더 넓고 넓다"(「길 밖에서」『산책시편』)고 할 수 있다. 마음 속의 몸이 파시스트적인 속도가 지배하는 문명화 된 도시 속에서도 그 속도를 줄이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그 근본에서부터 어긋나 있는 자연과 문명이 불완전하지만 相生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보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 비해 소설에서의 생태주의 담론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생태주의와 관련된 소설로 90년대에 출간된 것이래야 문예환경 소설집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도요새에 관한 명상』(문예산책, 1995)과 많은 평자들이 언급한 것처럼 우리 문학의 생태주의 혹은 생명주의 토대이자 그 완성으로 볼 수 있는 박경리의 『토지』(1995)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나 『도요새에 관한 명상』에 실린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90년대 이전에 쓰여진 것들이고, 『토지』 역시 완성은 90년대에 되었지만 시작은 60년대(1969) 였고, 그 중심 서사는 이미 70, 80년대에 완성되었던 것이다.
90년대 소설에서의 생태주의의 빈곤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생태주의 담론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한다면 큰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사의 약화, 매체 환경의 득세, 에코페미니즘에 대한 실천적인 인식 부족, 리얼리즘의 퇴조 등 그 원인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우선 생태주의 담론이 소설가의 잠재 의식 속에 상업성을 담보할 수 없는 재미 없고 무거운 소설로 분류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의 출판이든 잡지든 소설과 관련된 모든 메카니즘은 재미 없고 무거운 소설을 철저히 배제해온 것이 사실이다. 생태주의를 가지고 재미 있고 가볍게 쓴다는 것은 소설가의 의식 속에 이미 불가능으로 각인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생태주의와 관련된 소설이 절대적으로 빈곤한 것이 사실이며, 또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는 소설도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면 박완서와 최성각의 소설 정도이다.
먼저 박완서의 경우를 보자. 그녀의 생태에 대한 관심은 그녀가 그것을 의식하고 썼는지 아니면 못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미 「나목」이나 「어떤 나들이」등 초기 소설부터 드러난다. 이 사실을 간파하고 이선영은 그의 소설 세계를 '세파 속의 생명주의'(『현대문학』1985년 5월)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의 지적처럼 그녀의 소설은 살아 있음의 현장에서 떠난 적이 없다. 그녀를 남성 여성의 구분을 떠나 탁월한 리얼리스트라고 부르는 것도 그녀의 이러한 살아 있음을 표현하는 현장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녀가 그려내는 이 살아 있음의 현장은 문명화된 도시와 자연으로서의 생명이 살아 숨쉬는 그녀의 고향으로 대별된다. 이 대비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5)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자연의 감성이 살아 있는 "개성(박적골)"과 문명화된 도시인 "서울(현저동)"은 "낙원/비낙원, 실개천/시궁창, 싱아/아카시아, 신맛/비린맛으로 꼬리를 물고 환유적인 대립구조"(신수정, 「증언과 기록에의 소명」, 『소설과 사상』, 1997년 봄호)를 보인다. 이러한 대립 구도를 통해 작가가 의도한 것은 문명화 되면서 상실된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다. 근대 문명은 작가가 유년기 때 고향 마을인 "박적골"에서 체험한 안정과 풍요로움, 사랑과 질서, 공동체 의식 등을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작가는 이것의 소중함을 문명화된 "서울"에서의 체험을 통해 절감하게 된 것이다.
문명에서 비롯되는 이러한 상실감은 90년대 생태주의 문학의 한 성과로 꼽히는 「환각의 나비」(1995)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이 소설의 주요 공간인 "원주민 마을"과 "아파트 단지"는 곧 고향 "박적골"과 서울 "현저동"의 반복된 구조인 것이다. 작가는 이 공간 중에서 심적으로 "원주민 마을"에 기울어 있다. 그러나 작가는 "원주민 마을"도 "아파트 단지"도 아닌 제 3의 공간인 "천개사 포교원"을 택한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제 3의 공간을 택한 것은 작가가 문명과 자연, 근대와 반근대의 가치를 동시에 인정하려는 균형감각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제 3의 공간인 완충지대에서 근대 문명과 자연에 대한 반성적인 거리와 새로운 제 3의 대안을 찾고 있는 것이다.
최성각의 생태에 대한 관심은 「약사여래는 오지 않는다」(1995)에서 출발한다. 이 소설은 물이 오염되었을 때 그것이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하고 또 미래에 어떤 재앙을 가져오게 되는지 등을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다소 작위적이고 도식적인 감이 없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생태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없이 단순히 소재적인 인식 차원에서 쓰여진 소설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 발표한 「동강은 황새 여울을 안고 흐른다」(1999)는 이러한 인식 차원을 벗어나고 있다.
이 소설은 역사 혹은 시간에 대한 작가의 리얼리즘적인 세계 인식을 바탕으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동강 문제에 천착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 드러나는 역사 혹은 시간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에 그 존재론적 토대를 두고 있다. 그것은 동강과 그것을 끼고 사는 혹은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시각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동강의 흐름에 주목한다. 작가는 "동강은 정말 소리없이, 잠자듯 흐르고 있었다, 동강이 다만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을 그때처럼 강렬하게 느꼈던 적은 없었다"에서 드러나듯이 동강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파악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인간과 강(자연)을 연속성의 측면에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흐르는 강은 그것이 인간과 호흡을 같이 하면서 흘러왔고 또 흐르고 있으며 앞으로 흘러가리라는 점에서 보면 동강은 곧 인간의 역사이며 시간이다. 동강의 흐름 속에는 이처럼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는, 다시 말하면 인간과 역사를 연속성의 차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이 흐름을 가로막는 행위에 대해 작가는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가의 의지는 "황새여울이 아무리 많아도 동강은 흘러왔잖아, 동강은 흐를 거야"라는 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에 강하게 드러나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과 역사에 대한 작가의 해석 아닌가. 작가는 인간의 내부의 탐욕과 부폐와 무관심에 의해 '지금 여기'의 생태적인 현실이 도전받고 있지만 역사의 도저한 흐름은 막을 수 없다는 미래에 대한 확실성의 원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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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생태주의 담론은 담론의 특성에 걸맞게 활발하게 전개된 것이 사실이다. '문학 생태학'(김성곤), '녹색 문학'(이남호), '녹색 사상'(정호웅), '생명 사상'(김지하) 등 생태주의와 관련된 다양한 담론의 성립과 김지하, 정현종, 최승호, 이문재, 박완서, 최성각 등에 의한 창작 행위가 병행되면서 생태주의는 바야흐로 90년대 문단의 한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특히 평론과 시의 경우 생태주의와 관련해서 이룩한 성과는 그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깊이와 넓이의 면에서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인식론과 존재론의 토대를 마련하는 철학에서조차 생태주의와 관련하여 아직 변변한 체계를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학에서의 이러한 열기와 성과는 다시 한번 문학이 감당해온 시대 정신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생태주의는 '지금 여기'에서만이 유효한 담론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미래에 더 중심음을 낼 미래의 담론이다. '지금 여기'에서 자행되는 생태 파괴의 결과는 다가오는 미래에 우리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90년대 우리 문학에 일기 시작한 생태주의 담론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은 녹색이다"라고 한 이남호의 선언은 그 선언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선언의 의미밖에는 없을 수도 있다. 이 선언이 무게를 가지기 위해서는 생태주의에 내재해 있는 거품을 제거해야 한다. '속류'와 '사이비류'의 생태주의로는 인간, 문명, 문화, 자연이라는 이 거대한 패러다임과 맞물려 있는 생태주의 문제를 감당해 낼 수 없다.
아울러 문학이 진정으로 '녹색'이 되기 위해서는 녹색에 대한 천착과 함께 문학에 대한 진지한 천착도 있어야 한다. 녹색을 전경화하다 보면 문학은 녹색의 도구나 이데올로기 차원으로 떨어지게 된다. "문학은 녹색이다"라는 말은 문학을 통한 녹색을 의미하는 것이지 문학 자체가 녹색이라는 것은 아니다. "문학은 녹색이다"라는 말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것이 "녹색도 문학이다"라는 의미를 가질 때이다. 이처럼 생태주의 문학은 그 열기와 관심 못지 않게 냉정하게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이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즐거움보다는 괴로움이 더 큰 법이다.
이재복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1996년 『소설과 사상』 겨울호에 「동양적 존재의 숲 - 윤대녕론」으로 등단
·주요 평론 「감각과 생리 육체적 존재로서의 글쓰기」「전위적 존재 미학으로서의 몸」 「육체와 혼의 양식」「몸과 욕망의 언어」등
·편저 『몸 속에 별이 뜬다』
·현재 한양대 국문과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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