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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초점/낯선 모임 속으로/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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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낯선 모임 속으로
- 비밀지하조직의 모습으로 살펴 본 90년대 소설에 대한 회고와, 2000년대 소설에 대한 비판적 전망
김남석
Ⅰ. 소설적 공간과 모듬살이의 방식
귀향자의 대명사는 오디세이이다. 나는 오디세이보다 집으로 가는 길을 어렵게 찾은 예를 알지 못한다. 난관도 문제지만 유혹도 문제이다. 칼립소 같은 여신이 아내 페넬로페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숱한 어려움과 유혹에도 오디세이가 집으로 가려고 했을까.
일단 오디세이가 가진 물적·정신적 재산이 이타카에 있다는 가정을 세울 수 있다. 조그마한 지역이지만 오디세이는 한 나라의 왕이었고, 그를 추앙하는 백성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토 안에는 집과 노비와 양이 있었다. 또 그가 사람들 사이에서 받고 있는 신망, 그러니까 오디세이의 입장에서 보면 명예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여기서 칼립소의 예로 돌아가 보자. 칼립소는 여신이므로 그 정도의 부귀영화 정도는 충분히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 왕으로서의 명예와 여신의 남편으로서의 명예는 어느 쪽이 일방적으로 처진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페넬로페와 비교해보자. 칼립소의 미모가 페넬로페를 능가했다고 공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명함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 칼립소는 페넬로페에게 뒤진다. 그것은 남편에 대한 신뢰이다. 페넬로페는 이 신뢰를 지니고 있었다. 칼립소가 신뢰를 가졌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오디세이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애타게 찾은 것도, 페넬로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페넬로페는 아내이자 집이었지만, 칼립소는 정부(情婦)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오디세이에게 페넬로페가 신뢰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고대 사회에서 가족의 위상에 대해 알려준다. 과거의 가족은 그 자체로 사회집단이었고, 그 집단은 어떠한 외부적 압력에도 불변하는 굳은 믿음을 내부적으로 공유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전에는 자신의 이름이 가문을 대표했으며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거론하며 성립되었다. 어떤 가문의 누구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개체의 정체성이기도 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 이러한 상황은 돌변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족은 사라지고, 단지 몇몇이 유지하는 작은 소집단만 남는다. 이른바 핵가족이다. 대가족이나 방계가족의 개념은 점차 가족개념에서 멀어져간다. 90년대 한국의 가족 패턴은 핵가족을 넘어선다. 남편/아내/자식의 단순한 구도마저 붕괴되고, 자식을 포함시키지 않는 가족이 양산된다. 심지어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무시되고, 생활 반경만 공유하는 동거가 표면화된다. 그러다가 그 상대마저 용인하지 않고 섹스파트너를 이용하는 독신 생활로 나아간다.
가족 스타일의 변화는 소설의 중심 구조를 뒤흔든다. 90년대 소설에서 전통적 의미의 가족을 보여주는 소설은 흔하지 않다. 특히 90년대 출신 작가에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사실 이러한 지적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지적에서 간과된 것이 있다. 가족의 개념이 뒤흔들린다고, 모듬살이에 대한 욕망마저 철저하게 포기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90년대 소설은 특히 공간에 대한 천착이 강했다고 판단된다. 소설 안에 창조된 공간은 다종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담는 용기로 기능 한다. 그래서 소설의 공간은, 작가가 주목하는 모듬살이의 형태와 관련성이 높다. 자아와 세계의 대결에서 소설이 탄생한다고 할 때, 세계의 규모는 모듬살이의 형태로부터 중요한 윤곽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모듬살이는 작품 내의 타인들의 얽힘과 관계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 얽힘과 관계를 읽고 받아들이는 타자(독자)의 삶을 포괄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용기를 따로 떼어내어 요모조모 뜯어보고자 이 글을 구상했다. 90년대라는 문학의 시기를 지나면서 변모해 가는 용기를 잘 살펴보는 일은, 그 안에 무엇을 담을까를 고민했던 작가들의 생각을 엿보는 중요한 단초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릇이 네모였다면, 우리는 당시의 견해나 작가의 생각이 네모에 가까웠다고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
Ⅱ. 무거운 동지들과 가벼운 이방인
그렇지만 나는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공연히 속이 꽉 막혀왔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여행을 할 때 당신은 불빛이 있는 쪽을 걷지 않나요. 내가 그 불빛을 당신의 인쇄소로 정했다 해서 내 여행이 죄스러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가끔 당신에게는 하찮은 것이 위로가 될 때는 없습니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의 목소리나 어떤 분위기 같은 것 말입니다.
―최윤의 「회색눈사람」
인용된 목소리의 주인은 「회색눈사람」을 이끄는 화자이다. 독백 속의 〈인쇄소〉는 주인인 〈안〉과 그의 동지들인 〈정〉과 〈김〉이 운영하는 비밀 아지트이다. 이들은 반정부 지하조직인 〈문화혁명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인쇄소는 그들이 제작하는 비밀문건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이들의 활동을 주목하는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좌파 성향을 지닌 지하 운동의 보고기 정도로 취급해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좌파 청년들의 세계관을 설파하는 것에도, 현대사의 어느 지점쯤에서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초상을 모사하는 것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다. 지하 운동의 목적이 공개되지도 않고, 시대적 배경도 알려지지 않는다. 단지 이 작품이 1992년에 발표되었고 화자가 20여 년 전의 사건을 회고한다는 언술을 단서로 삼는다면, 1970년대 초반에 확산일로에 있었던 유신 반대 운동을 가장 유력한 모델로 삼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은 장담할 수 없는 추측이다. 더 중요한 것은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작품의 궁극적인 의도는 거기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집단은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문맥 속의 집단으로 주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집단을 주목하는 목적은 따로 있다.
그 목적은 위에서 인용된 화자의 독백 속에 있다. 지하조직은 쓸모와 가치를 높게 평가해서 강하원을 받아들이는 반면, 강하원은 의탁할 누군가가 있다는 이유로 인쇄소를 선택한다. 이 작품에서 강하원은 외로운 인물이다. 쉴 곳을 부여받지 못한 자이며, 찾아올 친인 하나 갖지 못한 자이다. 이런 이에게 동지와 소속이 생긴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적어도 화자에게 이 지하조직은 개인적으로 꿈꾸는 친인들의 집단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집단은 강하원을 집단의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최윤의 「회색눈사람」은 90년대가 내놓을 수 있는 수작이다. 이 작품은 깔끔한 문체와 정련된 구성 방식으로 읽는 재미를 쏠쏠히 돋우고 있다. 또한 균형 잡힌 작가의식으로 인해 지나도 낡지 않는 느낌을 선사하고 있다. 특히 90년대의 정서를 먼저 예견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소설은 80년대까지의 집단적 관심 내에, 90년대적 삶의 방식을 따르는 개인을 이양한 작품이다. 이 싹은 자라서 90년대 소설의 토양을 일구는 하나의 모델이 된다. 대사회적인 목표와 거대한 이념을 겨냥하는 지하조직의 외형은, 90년대 이전 문학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80년대라고 해서 저항과 이념만을 신봉하는 인물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이전 문학은 이러한 저항과 이념 신봉을 위한 인물에 편향한다. 최윤은 이러한 관례를 벗어나는 지점에 위치한다. 그녀는 90년대 이전 모임과 90년대적 인물을 결합하여, 새로운 기풍을 선보인다. 무거운 이념을 따른 자들과 이들을 무작정 따르는 가벼운 이방인의 구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어떤 의미에서 진짜 비밀조직은, 이러한 가려진 구도 속에 있는 가벼운 이방인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방인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비밀조직이 급속도로 확산되기 때문이다.
Ⅲ. 상처 입은 자들의 향연
강하원은 상처 입은 자이다. 90년대 문학이 본격화되면서, 이러한 상처 입은 자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앞에서 90년대 이전의 문학에 정치적 투사나 이념적 레지스탕스만 살지 않았던 것처럼, 90년대 문학에도 상처 입은 자들만 살지는 않는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90년대 문학에서 상처 입은 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그들의 윤곽이 뚜렷해진다는 점이다. 윤대녕은 이러한 자들의 움직임을 예리하고 빠르게 반영한 작가이다.
보충해서 말하죠. 우리들 최초의 모임은 이 년 전 봄에 시작됐죠. 당시 무명 배우였던 그녀와 동갑내기 친구인 잡지사 기자, 대학강사, 화가 이렇게 몇몇 사람들이 신촌의 한 카페에서 모임을 갖게 된 게 동기가 됐죠. 저마다 이유야 다르겠지만 아까도 말했듯 그들은 모두가 삶으로부터 거부된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자주 만나 공통의 것을 찾으며 좀더 은밀한 방식으로 모임을 키워나갔죠. 그 후 건축가, 수련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가수, 시인들이 더 들어왔고 집단의 동일성을 확보하자는 뜻에서 육십사년 칠월 생들만으로 모임을 제한했어요. 물론 그들은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사람들처럼 살아요. 하지만 역시 삶에 제대로 뿌리박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아무튼 우리는 한두 달에 한 번쯤 은밀히 모였다가 헤어지곤 해요. 어떻게 보면 두 겹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죠. 현실적인 삶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는 살아지지 않으니까, 말하자면 지하에다 다른 삶의 부락을 하나 더 세운 거예요. 우리가 은어를 문장으로 한 것도 다른 뜻이 아녜요. 말하자면 거듭나기 연습을 해요. 어떻게든 우리 방식으로 버티고 사는 법을 배운단 말이죠.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
〈은어클럽〉의 한 멤버는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한다. 강하원이 우물쭈물하며 속마음을 끝내 열어 보이지 못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제 상처 입은 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치유하기 위해서 조금 더 분명하고 당당하게 나서야 한다고. 그 만큼 이들에게 상처의 치유는 절실한 문제이다.
위의 멤버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강하원과는 사뭇 다르다. 강하원은 등록금을 걱정하고 하루 끼니를 걱정하고 자살의 유혹에 시달릴 정도로 물질적으로 빈곤한 세대였다. 그런데 〈은어클럽〉의 멤버들은 이러한 빈곤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적어도 먹고사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도 없는 인물들이다. 거기다 삶의 여가와 정신적 탄력마저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삶은 훼손되었다고, 이중의 삶을 도모해야 할 정도로 절박하다고, 이들은 말한다.
이들의 구조신호는, 때로는 엄살로 들릴 정도로 그 정도가 지나치기도 하다. 특히 90년대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에게, 이들의 말은 배부른 자의 어리광이나 세상물정 모르는 책상물림의 잠꼬대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일리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투정 속에 90년대의 한 단면이 예고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작품이 93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명시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93년은 한국정치사의 한 구획선이다. 문민정부에 대한 엄정한 평가는 추후 역사의 몫이겠지만, 가시적 정권 교체는 당시 사람들에게 정치적 관심을 후퇴시킨 결정적인 이유로 작용한다. 정치적 참여를 소리높혀 주장하던 이들에게서, 절반쯤의 이유를 몰수해간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념을 떠나 구체적 삶의 자리로 복귀해야 하는 부담에 시달린다. 당연히 문학도 달라진다. 개성적 삶의 스타일을 좀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동시에, 이념의 탈색으로 인해 흔들리는 중심을 잡아야 하는 부담이 또한 얹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문단의 새로운 신예들은, 90년대 이전의 무거운 이념으로부터 자신의 삶과 문학을 적극적으로 분리시킨다. 이른 바 90년대 신세대 문학이 생장하는 것이다.
「은어낚시통신」에 주목하는 64년 7월생은 80년대 학번이고, 93년에 서른 살이 된다. 이들은 신세대 작가들이 선택한 90년대의 핵심 인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념이 떠난 자리에서, 삶의 가혹한 보복을 받고 있다. 이 보복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상처를 남기는 듯하다. 이러한 상처 입은 자들의 목소리을 채집하기 위해 윤대녕은 안간힘을 쓴다. 이러한 안간힘은 윤대녕의 이후 작품에도, 그리고 이후의 작가들에서도, 공통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된다.
그러나 윤대녕의 시선은 차츰 그 설득력을 잃어간다. 이후 윤대녕은 이 멤버들을 하나씩 추적해서 그 삶의 치유양상을 들여다보는 소설을 쓰려고 한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항상 똑같은 증상만 보여주고 그 외상만 대충 치료하다가 그만두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해답을 이 작품 안에서 찾아보자. 한두 달에 한 번씩 모여 이중생활을 하는 것이 과연 치유를 향한 몸부림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이들의 만남은 자신들의 상처를 특권화하고 미화하려는 혐의가 짙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수음적 욕구 충족이나 음지에서의 가식적 탄식이 아니라, 세상으로의 진군이 아니었을까. 이 소설에서 김청미는 제의를 집전하는 여사제처럼, 화자에게 더 거슬러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차라리 거슬러 오름을 포기하고 자신이 세상으로 나와야 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무식한 질문과 간단한 대답으로는, 윤대녕이 말하는 비의를 온전히 해독하고 올바로 비판할 수 없을 지는 모른다. 그러나 은어클럽의 멤버들이 현실인의 자화상이라면, 그들은 비밀조직에 웅크릴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왔어야 한다. 그랬다면 유폐된 영혼이나 신비한 집단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이들에게 비밀조직은 세상으로 나가는 수단이어야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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