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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호/신작소설/소멸의 흔적/원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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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소설
소멸의 흔적
길은 기억을 되뇌인다. 이상물질에 반응하는 알레르기처럼, 어김없이.
여자는 통인가게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뿐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통인가게 앞을 지날 때, 여자는 또 저만치 앞서 있었다. 여자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용수염을 보았으리라. 내가 그 앞을 지날 때 한 남자가 명주실처럼 뽑아낸 하얀 엿을 손가락 길이만큼 토막낸 뒤 참깨나 땅콩으로 보이는 속을 한 숟가락씩 넣고는 분주하게 여며주고 있었다. 그때마다 명주실 같은 엿가닥이 반짝거렸고, 새하얀 슈거 파우더가 풀풀 일었다.
비를 뿌렸던 먹구름은 모두 지나간 듯했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둠침침했다. 사람들은 길에 들어서기 전에 하늘부터 쳐다보고 발을 떼어놓았다. 차가 다니지 않는 일요일의 인사동은 금세 자막 올라가는 극장 속처럼 웅성대기 시작했다. 여자는 수도약국이 있는 골목 입구의 상점 앞에 앉아 있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녀는 한참 동안 유리창 안쪽의 다기세트를 구경하다가 정작 검정색 쥘부채 하나만 살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쉽게 결정하지 않고 가슴속에 쟁여두는 성미니까. 나는 이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멈춰 서서 캐리어 멜빵 끈을 추스렀다. 아이는 내 등에 얼굴을 묻은 채 여전히 자고 있었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을 때 잠깐 깨어나 칭얼댔을 뿐, 녀석은 두 군데 서점을 순례할 때부터 줄곧 잠에 빠져 있었다.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무작정 근처 카페로 뛰어들었었다. 처음에는 입구 안쪽에 서서 비 오는 광경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마냥 기다리고 있기엔 빗줄기가 제법 거셌다. 입구를 막고 오래 서 있기도 면괴스러워 나는 헤즐럿 커피를 한 잔 시켜 놓고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우두망찰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나는 불현듯 눈앞으로 비껴가는 뭔가를 보았다. 흰 티셔츠에 색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는 아주 평범한 뒷모습.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뭔가가 내 가슴께를 쿡 아리고 지난 뒤에야 내 이성은 ‘뭐지?’ 하고 묻고 있었다. 아이를 들쳐 업고 그녀를 쫓아 나간 뒤에야 나는 비가 막 그쳤다는 것을 알았고, 그리고, 그 길이 낯설지 않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가슴께를 아리고 지나가는 낯설지 않은 기억. ‘뭐지?’ 하고 물을 수밖에는 도리가 없는.
여자는 가방에 붙은 보조 주머니에 검정색 부채를 꽂고 학고재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이어 여남은 걸음쯤 옮겼을까. 휴대폰 벨이 울렸고, 여자는 돌장승이 있는 인사동 입구에 멈춰선 채 오 분 가량 통화를 하였다. 그녀는 여전히 뒷모습을 보인 채였고, 가끔씩 새카만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뭔가를 심각하게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크라운베이커리 모퉁이에 멈춰선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좀 있으면 그녀는 부랴부랴 횡단보도를 건너간 뒤, 참여연대가 있는 건물 앞에서 빈 택시를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 터였다.
여자를 앞질러 갔어야 옳았을까. 그래서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확인하고 알은 체를 해야 했을까. 나는 캔버스가 잔뜩 쌓인 화방 모퉁이에 멈춰 선 채 때늦은 후회를 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멈춰 서서 시간을 늦춘 것인지도 몰랐다. 신호등이 막 빨간색으로 바뀔 찰나, 여자는 이미 택시에 올라타고 있었다. 가슴께로 싸한 뭔가가 훑고 지나갔다. 그 때라도 소리를 질러 택시를 붙잡아야 했을까. 나는 한국일보 방향으로 내달리는 택시의 후미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여자를 자꾸 떠올려 어쩌자는 건가.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인사동길을 걷다가 유리창 안에 진열된 다기세트를 들여다 보는 여자는 흔하디 흔한 풍경 아닌가. 이 더위에 부채를 사는 것이나, 하루에도 열댓번 이상 걸려오게 마련인 휴대폰이 하필 학고재 앞에서 울린 건 대단치도 않은 우연이었다. 하물며 급한 전화였다면, 택시를 잡기 위해 뛰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횡단보도 한가운데 엉거주춤 서서 백상미술관 옆으로 돌아든 길을 망연자실 쳐다보았다. 아이가 잠에서 깨었는지 다리를 버둥거려 가며 뒤쪽으로 벋대기 시작했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흔들며 아이의 엉덩이께를 두어 번 치켜올려 주었다. 어어어―, 연이야! 아빠 여깄지. 오오오―, 잘 잤니? 외로 틀고 돌아본 아이의 얼굴은 한창 물 오른 토마토처럼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어디든 들어가 아이를 뒤스러 주어야 했다. 집에서 나온 게 한 시였으니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기저귀도 갈아주고 우유도 먹여야 했다.
그러나 내 발은 뒤로 돌아서지 못했다. 횡단보도를 건너 풍문여고 정문 앞까지 걸었을 때는 그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독도서관 쪽으로 뻗은 아득한 길을 보자 내 발은 무작정 앞으로만 움직였다. 풍문여고를 지나자 덕성여고와 여중의 운동장 가로 늘어선 나무들이 컴컴한 그늘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돌담 아래로는 빗물에 쓸려왔을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뭉쳐 있었다. 이 년 동안이나 오르내렸던 길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혼자였고, 육교와 잇대어진 그 길에서 아내를 만났고, 결혼하기까지의 이 년 동안 학원과 연결된 그 길을 중뿔나게 걸었었다. 그렇게 열심히 걸으면 지루하기만 했던 인생에 한줄기 서광이라도 비칠 거라고 생각했었는지. 캠코더에 달린 작은 화면을 바라보며 걷는 것처럼, 내 걸음은 자꾸만 아래위로 흔들렸다.
환풍구를 통해 사람 비린내가 울컥 풍겼을 때와 빨간줄과 파란줄이 똬리를 튼 채 삐걱 삐걱 도는 소리를 듣고서야 나는 복수탕과 화개이발관을 지나쳤다고 느꼈다. 그 때까지도 내 머릿속은 제법 기억의 심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트선재센터 앞 사거리에서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내 기억의 심전도는 사이클을 멈춘 채 뚜우―하고 일직선을 그렸다.
하수관같이 움츠리고 있는 어두컴컴한 길. 밝음과 어두움은 겨우 몇 걸음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연락을 받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흰 천을 덮어쓰고 누워 있었다. 절대로 현실 같지 않은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간호사가 옆에서 계속 중얼거렸다. 피가, 너무 많이 났어요. 지혈이 안됐어요. …백혈병이 있는 걸 조금만 빨리 알았다면, …산모가 절대로 수술은 안 할 거라구 소리소리 질렀어요.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어쩌면, …그래두, 아이는 건강해요.
기억이란 말은 현재와 연결된 느낌이지만, 추억이라고 말하면 현재와는 단절된 먼 과거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지 않을까, 길마저도. 아내는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그래서 스무 살 어림까지 고아원에서 살아야 했던 과거를 몹시 원망스러워 했었다. 그 원망이 결국 아내를 죽인 건지, 아니면 아이나마 살릴 수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수관처럼 우중충한 길을 벗어나자 마자 먹구름은 현대 계동 사옥 쪽을 지나 빠른 속도로 서울 한복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금은 살고 있지 않은, 과거 어느 때 잠시 머물렀던 추억을 향해 발걸음이 움직였다. 국군서울지구병원이라 현판을 건 기무사와 예맥화랑을 지나쳤다. 항상 두어 명의 사복 경찰이 서 있곤 했던 수도상회는 아원공방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고, 학고재화랑과 금산갤러리를 지나자 국제갤러리가 나타났다. 나는 버릇처럼 지붕 위를 쳐다보았다. 꼭대기로 걸어 올라가는 모양의 여자마네킹. 조나단 브롭스키, ‘지붕 위를 걷는 여자’, 1994. 아내가 ‘서울의 미술관 순례’란 주제로 예비취재를 할 때 갤러리에 따라갔다가 주워들은 것이었다. 그때 아내는 집 앞에 있는 저 이상스레 생긴 작품도 몰랐느냐며 면박을 주었었다. 아니, 정말로 나는 갤러리 뒷골목에서 일 년 가까이 자취를 하면서 그때까지 마네킹을 한 번도 눈여겨 본 적이 없었다. 굳이 땅만 바라보고 걸었을 리도 만무한데 말이다.
한동안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고양이가 하품 같은 입모양을 하며 갸르릉 거리더니 갤러리 뒤쪽으로 사라졌다. 지붕 위를 걷는 여자의 오른쪽 다리 곁에 웅크리고 있던 검정색 도둑고양이였다. 고양이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국제갤러리 옆으로 연해 있는 골목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정작은, 내가 살았던 집을 찾아갈 용기가 필요해 시간을 벌었던 건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입구(口)자 집.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주인아주머니 방이 보이고, 대문간 왼편으로 화장실과 비좁은 세면장이 하나씩, 그리고 대문 오른쪽에 방 하나, 정사각형의 마당을 중심으로 왼편과 오른편에 방이 하나씩 달린. 눈을 감고도 걸이못 하나 떨어진 타일 하나의 위치까지 기억해낼 수 있는 집이었다.
삐이-걱 소리는 외려 나무대문을 밀쳤던 나를 긴장시켰다. 대문 한쪽은 여전히 돌쩌귀가 부러진 상태였다. 마당 가운데 있던 밤색 얼룩무늬 고양이가 목에 이어진 끈을 끌고 마루 밑으로 들어가더니 얼굴만 빼꼼 내밀었고, 주인아주머니 방문 앞 기둥에 묶인 개는 소리로만 크르릉 거리고서 이내 고양이를 따라 기어들어갔다. 연이어 개와 고양이의 비린내가 한꺼번에 콧속을 후비고 들어왔다. 이 년 동안이나 보아온 풍경이고 냄새였다. 나는 방에 들어가기 전이면 언제나 개와 고양이를 마루 밑으로 쫓은 뒤에 구두를 벗어 방문 옆에 놓인 궤짝 위에 올려놓았었다. 그렇지 않으면 구두는 뒤축을 개에게 질겅질겅 씹히거나 고양이털이 한웅큼씩 묻은 채 마루 밑에서 발견되기 십상이었다.
낯선 곳에만 들어서면 잔뜩 움츠리던 아이가 웬일인지 점잖게 업혀 있었다. 냄새에 묻혀 집은 더 적막해 보였다. 두 방은 자물쇠가 걸린 채 음산해 보였고, 나머지 두 방은 쪽마루와 궤짝 위에 신발이 얹혀져 있었다. 누가 되었든 사람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버릇처럼 나는 대문 앞 나무 의자 위에 수북하게 쌓인 우편물부터 들춰보았다. 대문 옆방에 살던 할아버지의 우편물이 유독 많이 보였다. 하지만 그 분은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러니 우편물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주인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무슨 생각으로 그걸 쌓아 놓고 있었는지. 하기는 이태 전에 이사 간 내 우편물도 두 개나 나왔다. 고등학교 동문회와 대학 동아리 후배들이 보낸 초청엽서.
두 장의 엽서를 살피고 있을 때 내가 이 년 남짓 기거했던 방문이 벌쭉 열렸다. 그리고 한 사내가 빨래 바구니와 가루세제를 들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가 대문 앞에 서 있는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는 사이, 나는 정강이께가 가려워 두 손으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고양이 알레르기 탓이었다.
*
맞물린 톱니바퀴는 언제나 반대방향으로 돈다. 만남과 헤어짐이란, 그 톱니들 사이로 비껴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 칸을 비우고 지나거나 건너뛸 수는 없을까. 운명의 톱니바퀴가, 그런 게 정말로 존재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희연이 건 전화는 11시쯤 울렸고, 나를 깨웠다. 밥 먹었어요? 나는 잠긴 목소리로, 어! 비 오네, 딴청부렸다. 나 없다구 밥 굶지 말아요. 나는 방문을 열어젖히다 말고 가슴께가 뭉클했다. 새벽에 숯가마에서 시뻘건 숯을 꺼냈어요. 얼마나 이뻤는지 알아요? 같이 봤어야 했는데. 난 무슨 금광이라도 캐는 줄 알았다니깐. …듣고 있어요? 나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그럼! 호기롭게 말했다. 세상에…, 나무가 불을 품고 웅크리고 있다가 온 몸으로 삭여내는데, …이건 말로는 설명이 안되겠다. 나는 수화기를 들고 웅크리고 있다가 물었다. 언제 올라와? …음, 오후에 출발해서, …치, 어차피 밤샘작업해야 아침에 생방 나가는 거 잘 알면서. 어, 잠깐만요…….
희연의 전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그리고 나는 한 시간 가까이 비 오는 걸 내다보았다. 지난밤엔 열대야 때문에 새벽볔에야 잠들었으니, 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속까지 시원했다. 그 사이 옆방 ―내 방을 기준으로 9시 방향이다― 할아버지는 아홉 살 짜리 아들과 함께 노란 우산을 쓰고 외출했다. 누가 보더라도 조손지간으로 보일 만했지만, 주인아주머니는 영락없는 아들이라고 혀를 찼다. 저 우산 쓰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라고, 걸음걸이에 손 흔드는 모양새까지, 두 대를 거쳤다면 저렇게까지 똑같을 수는 없다며 한참동안 골목길을 내다보며 소리 죽여 큭큭거렸다. 그리고 이내 대문을 닫으며, 불쌍한 냥반! 했다. 몹쓸 년, 새끼를 버리구선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아주머니는 대문간에 붙어 있는 공동화장실로 들어갔다. 반투명의 유리문 안쪽으로 그녀의 보라색 상의가 흐릿하게 주저앉았다.
옆방 할아버지는 조강지처와 장성한 세 아들이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젊은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렸다고 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는 새로 얻은 젊은 여자와 네살박이 꼬마가 함께 살았지만, 젊은 여자가 이 년 전에 통장을 들고 도망치는 바람에 두 부자만 남았다는 것이었다. 전엔 한약방을 해서 꽤 살었던 모양인데, 아무튼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언젠가 아주머니가 하회탈 같은 얼굴을 하고 마당에 널린 개똥을 치우며 얘기한 적이 있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기도 창피해 칠순 나이에 시난고난 살고 있다고. 하긴 앞방 ―내 방을 기준으로 12시 방향이다― 여자의 말에 의하면 주인 아주머니 역시 간단한 생은 아니었다. 첫딸 낳고 일 년만에 남편이 죽는 바람에 환갑 가까운 지금까지 청상으로 살고 있다는 거였다. 그나마 딸이 결혼을 한 뒤로는 방 세 개에서 나오는 사글세만 믿고 근근히 사는 모양이었다. 공평빌딩 뒷골목에서 한다는 난전은 그야말로 소일거리인 셈이었다.
보라색 상의가 벌떡 일어나더니 반투명 유리를 밀치고 나왔다. 그리고 이내 야트막한 봉당 위로 뛰어올라 종이박스부터 걷어찼다. 쥐 잡으라고 데려다 놨더니, 뭐하는 겨? 쥐약을 새로 놓던지 해야지 원, 나오던 거 도루 들어갔잖어, 인마. 내가 웃으며 내다보고 있는 동안 아주머니는 노끈에 묶인 고양이를 몇 번이나 번쩍 치켜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 때마다 노끈에 바싹 묶여서 곪았던 상처가 벌겋게 드러났고, 고양이는 앞발을 버둥거리며 발악을 했다. 언젠가 희연도 화장실에서 쥐를 본 적이 있다고 했었다. 첨엔 무슨 먼지덩어리가 수챗구멍에서 쏙 올라오나 했어요. 근데, 그 잿빛 덩어리가 내 얼굴을 한 삼 초쯤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예요. 꼭 팥알 같은 눈이 박혀 있었는데, 내가 꺅― 소리를 지르니깐 다시 그 구멍으로 쏙 들어가데요.
그러나 주인아주머니가 고양이를 방문 앞에 묶어 놓는 진짜 이유가 다른 데 있다는 걸 이 집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내가 이사 오기 전, 내 방에 공사판에서 날품을 팔던 오십줄의 노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아주머니한테 연정을 품었다는 거였다.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면 아주머니 방문 앞을 기웃거리며 구걸하듯 구애를 했고, 그 때문에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고 했다. 나는 한번도 제대로 본 일이 없지만, 12시 여자는 아무래도 좀 모자라는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고양이만 있으면 무서워서 접근을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고양이는 아주머니한테 더할 나위 없는 문지기인 셈이었다. 어쨌든 묶여 있는 고양이가 쥐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비가 그치자 마자 아주머니는 핸들카에 박스를 하나 얹고 장사를 나갔다. 네모난 보도블록 위를 구르며 나는 바퀴 소리가 타각타각 국제갤러리 쪽으로 멀어졌다. 나는 베개 하나를 안고 방바닥에 엎드려 마당을 바라보았다. 개와 고양이도 종이박스에 배를 깔고 엎드려 나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머리를 앞발 사이에 묻었다. 아주머니에게 반했다는 사내는 왜 고양이를 무서워하게 되었을까. 언젠가 나도 잠결에 마당에서 나는 낯선 사내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가보진 않았지만 간절하다고 느꼈던 목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어렸을 때 동네 개한테 내가 된통 물렸던 것처럼, 그 사내도 고양이한테 얼굴이라도 할퀴었던 걸까. 아니면 나처럼 고양이 옆에만 가면 온몸이 가려워지기라도 하는 걸까.
입구자 집 네모난 마당으로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햇볕은 마당에 평형사변형을 그려 놓았다.
비 온 김에 하루 쉴랬더니, 그예 그치고 말았네요. …일요일이라 대목이긴 하지만.
12시 여자가 대나무발을 말아 올려 못에 걸쳐놓고 쪽마루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남성용 트렁크 팬티가 아닐까 싶을 숏팬츠 차림에 손에는 손톱깎이를 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당을 넘어 방까지 들어오는 햇볕을 쪼이며 공상에 잠겨 있던 나는 불쑥 튀어나온 허연 허벅지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비루먹은 개와 고양이 냄새 때문에 한여름에도 맘대로 문을 열어 놓을 수 없는 나에게 소나기 내린 직후만큼 청명한 때도 없었다. 그 청명한 오후 시간을 뺏길 수는 없었다. 나는 베개를 괴고 엎드렸던 자세 그대로 태연스레 마당 건너 여자를 바라보았다.
연이 언닌 취재 갔나봐요? 주말인데, 어째 안 보이네요. 이번엔 어디로 갔어요?
여자는 손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손톱을 깎아 마당 쪽으로 튕겨냈다. 강원도 횡성, 숯막에. 나는 간략하게 대답하고 여자의 손톱이 튄 마당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손톱 쪽으로 다가가던 강아지가 내 눈길을 눈치챘는지 잔뜩 움츠린 채 종이박스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나른한 표정으로 박스 안에 잠들어 있던 고양이가 강아지의 서슬에 깨어났다가 이내 눈꺼풀을 닫았다. 녀석들은 흔히 알기로도 상극인데 지난 겨울부터 무척 친해졌다. 그 추운 겨울밤, 종이박스와 헌옷가지 몇 장 속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버텨낸 것이었다.
고양이는 태어나서 7주 안에 알게 된 동물하곤 그게 생쥐라도 친구가 될 수 있대요. 하긴, 저 개도 아주 어릴 때 고양이를 만났지만. …참, 아저씨 이사 온 담에 생겼지, 쟤네들은.
발톱을 깎으며 여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손발톱을 깎으면서도 내 눈빛을 읽어낸 거였다. 인사동에서 액세서리 난전을 하면서 익힌 눈치일 터. 그 눈치를 뻔히 알면서도 나는 숏팬츠 속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하얀색 팬티를 힐끗거렸다.
저 고양이, 되게 불쌍해요. 발정기가 한참 지났는데 아직도 수컷을 못 만난 거 같아요. 밤마다 그렇게 울어대는데도…. 고양이는 임신이 될 때까지 계속 발정을 하거든요. …하긴 저 몰골에다가 옆에는 개까지 한 마리 버티고 있으니, 내가 수코양이래두 거들떠 볼 거 같진 않지만. ……참, 아저씨는 피부가 엄청 예민하신가봐요? 연이 언니가 그러는데, 고양이 냄새 오래 맡으면 살갗에 알레르기 생긴다면서요?
나는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내가 처음 이사 올 때 이 집에는 제법 큼직한 암캐 한 마리만 있었다. 다른 곳보다 방값도 훨씬 싸고 학원과도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내심 이곳으로 이사를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주인아주머니에게 개를 치워달라는 조건을 달았었다. 아주머니도 마침 그럴려구 했다며 흔쾌히 응했기에 나는 다른 요구조건 없이 이사를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암캐는 이 집을 떠났지만 그 개가 낳은 강아지중 한 마리가 남았고, 쥐가 많아졌다는 뻔히 들여다보이는 속내로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나중에 추가되었다. 그 놈들이 제법 자라서 지금 내 부아를 돋우고 있는 것이었다.
저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쪽마루 위에 흩어졌던 손발톱을 주워 모아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여자는 허연 허벅다리를 그러모아 앉고 내게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여자가 이렇게 여러 마디로 질문공세를 펴기는 처음이었다. 희연과는 더러 부침개나 찌개를 나눠먹곤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베개를 밀쳐 놓고 문지방 앞으로 다가앉았다. 그리고 뭐든 물어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녀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어른인 것이다.
저, …연이 언니랑, 결혼 안해요?
여자는 묻고 나서 큭큭 거리며 웃었다. 그 표정에는 나른한 고양이 얼굴에서 풍기는 장난기가 잔뜩 묻어 있었다.
글쎄…, 때가 되면 하겠죠, 뭐.
흣, 빨리 하시라구요. …밤에, 아저씨 애원하는 목소리, 너무 불쌍했어요. 히힛.
여자의 말장난에 넘어가고 말았다는 낭패감이 치밀었다. 그러면서도 내 방에서 나누는 속삭임에 가까운 대화가 어떻게 저 방까지 전해졌는지 의심스러웠다. 게다가 나는 고양이 알레르기 때문에 항상 방문을 닫고 있었는데 말이다.
설마, 제가 엿들었다고 의심하는 건 아니겠죠? 그냥, …요새 장마철이라, 발만 치고 있을 때 많았잖아요. …저두 밤에 비 오는 소리 듣는 거 무척 좋아하거든요.
…….
연이 언니한테 잘해 주세요. 요즘 같은 세상에, 그것두 사랑하는 남자랑 밤새 한 방에 있으면서 그걸 지키는 여자가 어딨겠어요?
이럴 땐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게 좋을지 몰라서 나는 쭈뼛거리기만 했다. 외국어학원 초급회화반 강사 일 년 경력이면 웬만한 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은 생길만도 한데 말이다. 학원에서는 날씨가 어떤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필요한 건 뭔지, 또는 박물관을 어떻게 찾아가는지 따위를 묻고 대답하면 그만이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얌전했고, 초급반인 만큼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고 언제나 의기소침한 표정이었다. 지금껏 12시 여자 같은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이제 겨우 스물셋이었고, 내가 아는한 두 달에 한 번 꼴로 섹스 파트너를 갈아치우는 여자였다.
여자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애써 숨기고 나서 쪽마루 끝에다 솔향을 피워 놓았다. 고양이와 개 냄새가 조금이라도 덜 나도록 하려는 나름의 배려였다. 희연의 말에 의하면 12시 여자는 대학 1학년 때 가출을 했다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그래도 구속받는 걸 워낙 싫어하는 성격일 뿐 탈선을 한 경우로 보기에는 상식이 꽤 있어 보인다고 했다. 희연은 여자를 만날 때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힘인지 모른다고, 빨리 가족들한테로 돌아가라고 설득하곤 했었다. 쑥색 향의 끄트머리, 좁쌀 만한 불빛 너머에 매달렸던 잿빛 토막이 봉당으로 툭 떨어졌다.
어떤 동물학자 말이 암컷이나 수컷이 종족번식을 할 때는 누구나 두 가지 전략중에 하나를 이용하게 된대요. 암컷은 수줍음을 타거나 방종한 전략을 쓰구요, 수컷도 성실한 전략이나 바람기 있는 전략을 쓴다는 거예요. 그러니깐 누구나 네 가지 경우의 수중 하나에 속하게 되죠. 연이 언니나 아저씬 수줍음과 성실함으로 뭉쳤으니까 많진 않겠지만 똑부러지게 낳아서 기를테구요, 나 같은 애들은 기회가 많기는 하겠지만, 뭐……, 흣 …그렇다는 거죠, 뭐.
배시시 웃고나서 여자는 쪽마루 위에 뉘어 놨던 전지 크기만한 검정색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언젠가 인사동에서 만났을 때 보니, 가방 안에는 인위적으로 산화시켜 골동품을 가장한 반지, 목걸이, 팔찌, 열쇠고리 같은 걸로 가득차 있었다. 페루나 태국, 또는 인도의 수입품을 가장한, 메이드 인 차이나가 분명한 것들. 저것들을 팔아서 여자는 언제쯤 꿈에도 그리는 세계일주 배낭여행을 떠나게 될까.
불은사라진걸까나무에스며든걸까서울가는길에연이가사랑해요. 교보문고를 둘러본 뒤 영풍문고로 향하는 길에 희연이 보낸 문자메시지가 휴대폰에 찍혔다. 띄어쓰지 않고 모두 붙여 쓴 글이었다. 두 번에 나뉘지 않고 한 번에 보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나마 글귀를 생각하느라 희연은 삼십분도 넘게 머릿속으로 정리했을 게 뻔했다. 나는 휴대폰에 붙은 말줄임(…)버튼을 여덟 번 눌러가며 두 번 정독하고 나서야 의미를 파악했다. 그녀의 문자메시지는 언제나 선문답 같았다. 나는 영풍문고 매장을 두 바퀴 돌고 난 뒤에야 엄지손가락으로 한 문장을 꾹꾹 눌렀다. 불은 처음부터 나무 속에 있었는지도 몰라.
희연을 처음 만난 건 대학 삼 학년 때였다. 아니, 그건 만난 게 아니라 그저 같은 공간에 있기만 했던 건지도 모른다. 졸업하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붙여 본 적이 없으니까. 삼 년 후배인 희연은 제대 뒤 복학했을 때 같은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학교 방송국 아나운서였던 그녀는 자주 수업에 빠졌다. 나는 그녀가 진행하는 뉴스와 음악방송을 듣기 위해 스피커가 달려 있는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곤 했다. 그녀가 방송을 진행하는 시간대에 낀 과목들은 늘 성적이 좋지 않았다. 이 년 동안, 나는 그저 그녀의 음성을 듣기만 했다. 따뜻한 물에 퍼지고 있는 은은한 작설차 내음 같은 목소리. 졸업앨범용 단체사진을 찍을 때 슬금슬금 다가가 그녀 옆자리에 섰던 걸 빼면 한 번도 마음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아주 헤어졌는가 싶다가 다시 만난 건 작년 여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인사동에서였다. 막 소나기가 그친 거리를 지나가는 희연을 보고 쫓아가서 큰소리로 부른 거였다.
영국에서의 이 년은 뚜껑 열린 맥주병처럼 밍밍했다. 학비를 벌어가며 학위과정을 끝내겠다는 포부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대학원생, 접시닦이, 세차원이던 일과는 끝내 접시닦이, 세탁부, 세차원으로 바뀌고 말았다. 누군가의 흔적을 말끔하게 없애주는 따위로 이십대를 마무리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불연듯 들었다. 아무튼 나는 대학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종로 뒷골목의 허름한 외국어학원 강사가 되어 있었고, 그 사이 희연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조그만 프로덕션에서 작가와 내레이터를 겸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내가 희연을 불렀을 때 그녀가 속한 프로덕션 사장은 아이엠에프에 된통 발목을 잡혀 있었다. 그녀는 초조한 눈빛으로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명함을 내밀며, 친구하고 둘이서 삼청동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 내가 전화했을 때는 방송국에 구성작가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이제 목소리를 들려줄 수가 없게 되었다고 무척 아쉬워했다. 막 유행이던 인터넷 동창 찾아주기 사이트에서 그녀의 이메일 주소를 클릭했다가 이내 취소하곤 했었는데, 그녀는 내 자취방에서 불과 삼백 미터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운명이란. 컴컴한 밤길에 채이는 돌부리처럼 느닷없고, 어이없는 것 아니냐.
기이한인연이네제몸을태울걸알면서도불을품고있다니지금톨게이트. 풍문여고 앞을 지날 때 희연의 답글을 받았다. 나는 일요일이면 종종 20년을 가로지르는 시간여행을 하곤 했다. 80년대쯤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삼청동 부근과 인사동,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2000년의 종로 거리. 바둑알만큼 촘촘한 타일이 박혀 있는 복수탕에는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놈을 끼고 중년의 아줌마가 때를 밀고, 화개이발관에서는 널빤지를 깔고 앉은 유치원생이 젖빨고 있는 돼지새끼 그림을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주인 아주머니는 이빨 나간 우동사발에 꽁치를 잘라 넣고 나서, 번개 맞은 쥐가 그려진 봉지를 툴툴 털어가며 파란색 가루약을 뿌리고 있었다. 뺑뺑 돌려가매 사복경찰 깔아 놓으면 뭐한대. 새앙쥐 같은 놈덜도 못 잡으면서. 안 그래? 총각. 아주머니는 청와대 쪽을 바라보며 큰소리를 쳤다. 이 동네 사람들은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지에 상관 없이 대부분 정부에 불만이 많은 편이었다. 청와대 근처라는, 그리고 한옥보존지구라는 이유 때문에 건물을 높게 지을 수도 없고, 신개축의 허가 조건도 무척 까다롭다는 거였다.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을 거였다. 어쩌면 조선시대, 그 이전부터. 밤이면 잇대어진 야트막한 기와지붕 위로 도둑고양이들이 뛰어다니고, 천장 위에는 엄지손가락만한 바퀴벌레가 들끓고, 하수구로는 생쥐가 들락거리곤 했다. 서울 도심의, 그것도 청와대와 국무총리공관과 경복궁이 지척에 있는 곳에서 말이다. 옆방 할아버지의 아홉 살 난 아들이 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녀석의 눈에는 족보 따위는 꿈에도 못 꿀 잡종개나 고양이가 그래도 귀여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옆구리께를 긁적거리며 되도록 소리가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
12시 여자가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섬주섬 긁어모아 들고 나간 뒤에 나는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새벽녘에 벌어진 느닷없는 사건들이 꽤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잠이 멀찌감치 달아난 데다, 어차피 한 시간쯤 지나면 자명종이 나를 깨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월요일 아침 일곱시면 희연이 제작한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에 나오니까. 나는 개켜진 이불에 비스듬히 누운 채 방구석에 누워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다섯시 오십분. 아직은 자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조그마한 집구석에 모인 사람들이 사는 방식도 참 가지각색이라고 생각하며 실쭉거렸다.
자정에 가까웠을 무렵 화장실에 가려고 방문을 열었다가 나는 그림자를 보았다. 12시 여자의 방문에 비친 검은 실루엣이 아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방 안쪽에 촛불이라도 켜둔 모양, 유리창문에 걸쳐진 하얀색 커튼으로 그림자 연극을 하는 것처럼 방 안의 풍경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었다. 머리 두 개는 포개어진 듯했고, 허리 쪽으로 감겨 올라간 다리와 뒤쪽으로 내뻗은 두 다리, 그리고 고물거리며 움직이는 잇대어진 두 사람의 허리. 간혹 새어나오는 숨소리까지, 두 사람의 움직임은 마치 희연의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허물 벗는 매미 같은 형상이었다. 9시 방향의 벌쭉 열린 방문 틈새로 담뱃불을 보지 못했다면 나는 그 자리에 더 오랫동안 서 있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희연이 내 방에 놀러 오는 날이면 12시와 9시 방향의 시선이 6시 방향으로 고정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12시 여자의 이번 파트너는 한시가 가까웠을 무렵, 조용히 돌아갔다. 소곤거리는 소리에 이어 대문 여는 소리가 삐,이,이,거,어,어,억 여러 차례 분절되어 들렸다.
그리고 언뜻 잠들었던 나는 새벽녘에 방으로 튀어들어온 여자 때문에 소스라쳐 일어났다. 눈을 뜨고 몸을 벌떡 일으킨 건 순간이었지만, 그가 12시 여자라는 것과 뛰어들면서 했던 첫마디가 ‘살려주세요’였던 건 한 템포 느리게 인식되었다. 여자는 방문을 화급히 닫아걸고 나서 방바닥에 동그랗게 웅크린 자세로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문에 귀를 대고 바깥 동정을 살펴보았지만, 밝은 곳에서 캄캄한 곳의 사정을 눈치채기란 쉽지 않았다. 언뜻 다투는 소리를 들었던 나는 주인아주머니를 흠모했다던 사내가 또 찾아온 모양이라고 잠결에 짐작했었다. 밖은 한없이 적막하기만 했다. 칼을 막 휘둘렀어요, 찌를 것처럼. 여자는 웅크린 자세 그대로 오들오들 떨었다. 나는 젖버듬히 물러선 자세로 눈동자만 굴려댔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큼직한 부엌칼을 들고 설쳐대는 그림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여자는 머리채를 휘둘리기라도 했던지 손가락으로 연신 뽑힌 머리카락을 훑어내렸다. 미안해요. 불 켜진 데가 여기밖에 없었어요. …쟤는, 완전히 끝났다고, 벌써 세 달 전에 말해줬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죽어버리겠대요. 그러면서 왜, 칼은 나한테 휘두르나 몰라. …걱정할 건 없어요. 죽을 용기는 없는 놈이니까.
지붕 위로 도둑고양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리고, 연이어 마당의 암코양이도 아기 울음소리나 토악질 소리 비슷한 괴성을 질러댔다. 어디선가 기와 달그락거리는 소리,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소리, 세숫대야나 양은냄비 부딪치는 소리, 고양이들끼리 크악―캬악 싸우는 소리. 12시 여자가 한참만에 고개를 들고는 모호한 웃음을 흘렸다. 그제서야 칼을 들었다는 사내가 확실히 돌아갔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양이들이 밖에서 저렇게 소란을 피울 수는 없을 테니까. 12시 여자는 내가 마당에 내려가 사방을 둘러보며 안심하라고 세 번이나 말한 뒤에야 조심스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광고화면 오른쪽 위에 씌어진 프로그램명이 지워지기 무섭게 나는 리모콘의 녹화버튼을 눌렀다. 희연이 속한 팀이 촬영해왔을 내용은 15분에서 20분 안팎이겠지만 몇 번째로 편성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숯막 얘기는 두 번째로 나왔다. 리포터는 오래 전에 활동했던 개그우먼이었다. 나는, 저 여자 누구더라? 머리를 굴려보다가 자막을 보고서야, 아! 맞다, 무릎을 때렸다.
남자엠시가 리포터에게 숯가마에서 찜질을 하고 와서 그런가 피부가 좋아졌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리포터는 볼을 만져가며 과장스레 맞장구를 치고 나서, 숯막에서 가져온 손목 굵기의 참숯을 들어 보였다. 이게 보기엔 작아 보여도, 처음 가마에 쟁여넣을 때는 세 배나 굵은 참나무였다고 합니다. 숯가마 속은요, 1,400에서 (잠깐 더듬다가 원고를 보고 말을 잇는다) 1,800℃에 이르는 고온이라고 하는데요, 거기서 오 일동안(손바닥을 쫙 펴 보인다) 완전히 불사르고 나면, 참나무가 이렇게 단단하고 날씬한 숯검댕이로 변한다는군요(살짝 웃는다). 이어 컴컴한 산길을 세 명의 숯장이와 리포터가 걸어올라가는 장면이 나왔다. 산중턱에 있는 숯막은 연기로 자욱하고, 숯가마 앞에 놓여진 대형 선풍기와 그 속으로 열기를 내뿜고 있는 잉걸불이 보였다. 리포터는 가마를 옮겨가며 숯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인터뷰했다. 숯을 꺼내는 가마 앞에서 리포터는 목소리를 높여가며 호들갑을 떨었다. 와! 무슨 금광을 캐는 것 같아요. …와우! 와하! 저 빛깔 좀 보세요. 불꽃놀이를 하는 것두 같구요……. 가마 앞으로 다가갔다 물러섰다를 반복하던 리포터는, 이어 숯가루가 섞인 거무튀튀한 모래가 끼얹어진 숯무더기 쪽으로 다가갔다. 그 뜨겁던 불꽃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이제야 숯 모양이 갖춰지는 것 같은데요? 50년 동안 숯장이만 했다는 노인은, 글쎄요? 숯이 먹어버맀나, 껄껄 웃었다. 이어 노인은 숯이 수분조절을 해주고, 악취도 없애주고, 전자파도 빨아들인다고, 박사님들이 그러더라고 약장수처럼 늘어놓았다. 리포터나 숯장이 노인은 희연이 적어준 대본대로 읊조리고 있을 거였다. 적어도 내겐 모든 소리가 희연의 목소리로 들렸다. 카메라가 리포터를 따라 찜질방으로 운영되는 숯가마로 들어갈 때, 나는 칫솔과 수건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더 지체하면 학원에 늦을 것 같았다. 어차피 테이프가 끝까지 돌아가면 비디오데크는 자동으로 멈출 테니까.
밤 사이 마당은 어수선해져 있었다. 개가 싸논 똥덩어리와 오줌줄기, 뒤집어진 채 수돗가에 널브러진 고무통. 12시 여자의 방문 유리창에 길게 금이 가 있고, 그 앞 쪽마루 위에 엎드려 있던 고양이 두 마리가 냉큼 일어나 쏜살같이 담벼락을 타고 뛰어올랐다. 또다른 한 마리는 윤기가 흐르는 검정색이었다. 꿍얼거리며 엎드려 있는 개 옆으로 질겅질겅 씹힌 듯 끊어진 노끈이 보였다. 세수를 하고 돌아왔을 때 텔레비전은 뉴질랜드에 있다는 번지점프대를 보여주고 있었다. 리포터인 미스코리아는 점프대 난간에 다가섰다 물러섰다를 반복하며 계속 울먹거리기만 했다. 나는 바지를 꿰어 입고 서둘러 학원으로 향했다. 희연이 삼박 사일간의 취재일정을 마치고 이제 막 돌아올 시간, 월요일은 여덟시 수업을 시작으로 열세 시간이나 지루하게 이어진다.
학원에서 돌아오니, 희연은 불도 켜지 않은 방에 태아처럼 잠들어 있었다. 저렇게 둥글게 몸을 말고도 잠이 들 수 있구나 생각하며 나는 희연의 등 뒤에 바투 다가가 그러안았다. 월요일에는 수업이 다른 날보다 두 배는 많았다. 방문이 제대로, 꼭 닫힌 걸 확인하자 마자, 나는 바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지만, 희연과 나는 잠이 깨어 있었다. 이번엔 내가 잔뜩 오그리고 있고, 희연이 나를 뒤에서 안고 있는 자세였다. 우린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고 누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희연이 후―, 숨을 길게 내쉬었고, 그 숨결이 내 귓불과 목 언저리를 간지르고 지나갔다.
꿈을 꿨어요. 막 시디를 걸어놓고, 창가로 다가섰는데, …저 아래쪽 벤치에 선배가 앉아 있었어요. 음―, 아주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던 거 같아요. 아! 내 목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구나. 꿈속에서도 얼마나 행복했는지. …난, 아나운서가 돼야겠다고 다짐을 했어요. 여기저기 시험을 무진장 많이 쳤는데, 매번 면접에서 떨어졌어요. 그런데, 그 때까지도 선배는 여전히 그 벤치에 앉아 있었고, 내가 걸어놓은 음악도 그때까지 들리고. …이상하지? 꿈속에서도 몇 년은 지난 거 같았는데.
그런 것두 기시감이라고 하나?
기시감? 글쎄, …방금 내가 꾼 꿈이, 과거 어느 때 있었던 일이라면. …그렇지만, 그건 언제 일어난 일인지 잘 기억나지 않을 때 쓰는 말이잖아요? 난 다 기억 나는 걸. 학교방송국 아래 있었던 벤치.
혼자서만 시간을 훌쩍 넘겼다니까 말이지. ……그런데, …다, 보고 있었구나? 내가 거기 늘 앉아 있었던 거.
내 입술이 희연의 입술을 찾아 흐읍, 빨아들였다. 그녀는 프흐, 웃음을 짓다가 이내 혀를 내밀어 주었다. 혀 끝에서 작설차 내음이 났다. 나는 손을 움직여 희연의 가슴께로 가져갔고, 곧바로 단추 두 개를 끌렀다. 장작개비처럼 굳어 있던 희연이 내 손을 살짝 거머쥔 뒤 옆구리 쪽으로 밀쳐 놓았다. 그리고 머리맡에 놓였던 대바구니를 끌어와 눈앞에 들이밀었다. 방 안은 아직 어두웠지만, 나는 그것이 숯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강원도 숯막에서 사온. 연필 길이 만큼씩 잘라진 팔목 굵기의 숯들이 대바구니 가득 담겨져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리고 울퉁불퉁 결이 간 숯은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맞부딪칠 때마다 텅텅텅 울렸다.
숯가마 속을 들여다보면서 언뜻 내가 생겨나던 순간을 기억한 거 같아요. 불꽃이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붙는 것처럼. 참, 모질구나, 생명이란. 그게 어디든, 불붙을 나무만 있으면 ‘훅’하고 옮겨 붙는구나. 망설임도 없이. 그리고, 그 나무가 다 탈 때까지, 정말 열심히 뜨겁구나. 다 타고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안 믿기지요? 내가 생기던 순간을 기억한다는 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듯.
……그런데, 내 몸뚱어리에 불을 옮겨준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정말 뜨겁게 사랑을 하긴 했을까요? 선배 말처럼 나무는 이미 불을 간직하고 있었는지, 그런지도 모르죠. 차라리 그랬다면 원망이 생기진 않을 텐데. …꿈속에서, 면접에 붙은 애들이 잘 나가는 부모가 있다고 얼마나 자랑들을 하던지. 후―.
나는 희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땀이 밴 손이 참 따뜻했다. 그 속에 불이라도 간직한 듯.
이거 방문 앞에 놔둬요. 숯은 악취를 빨아들인다니까, 그래도 덜 가려울 거예요.
그러나 희연이 내 방에 숯을 가져다 놓고 며칠이 지난 다음부터 내 몸은 조금씩 더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전처럼 가렵기만 하고, 그래서 긁으면 그저 벌겋게 변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살갗은 마치 풀쐐기에 쏘인 것처럼 두툼하게 부어올랐다. 500원짜리 동전 만하던 부기는 날이 더할수록 조금씩 커져서 아주머니에게 월세를 주기 위해 10분 가량 마당에 서 있었던 날은 등허리로 손바닥만하게 번지기까지 했다. 긁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가려웠고, 긁적일 때마다 부기는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희연은 새로 생긴 건 숯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숯 때문에 알레르기가 심해질 리는 없지 않냐며 괜히 미안해했다. 밖으로 나가면 언제 그랬냐 싶게 가려움증이 없어졌고, 집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긁적긁적 퍼져나갔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보내다가 한밤중에야 돌아와 약사가 지어준 약을 먹고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열흘을 겨우겨우 참다가 복덕방에 방을 내놓았지만 예상대로 별 소용이 없었다. 두 명이 찾아오긴 했는데, 방문은 열어보기도 전에 마당에 서서 인상만 찌푸리고 돌아갔던 것이다.
삼 주를 그렇게 보냈다. 칼부림을 했다던 사내가 두 번 더 찾아와 소동을 부렸고, 용케 그 사이사이로 그림자연극의 남자 주인공이 다녀갔다. 칼부림 사내는 예상 외로 고등학생 같은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림자 사내는 여전히 그림자로만 모습을 드러냈다. 검정색 수코양이를 따라갔던 암코양이는 사흘만에 돌아와 밥그릇에 코를 박고 있다가 주인아주머니에게 포획되어 얌전하게 묶였다. 나는 저 녀석이 어딜 가서 더 지독한 페로몬을 묻혀 온 게 분명하다며 아주머니가 없는 틈을 타 기습적으로 물을 뿌려댔다. 그때마다 고양이는 기겁을 하며 마루 밑으로 도망쳤고, 개는 소리로만 크르릉 거릴 뿐 이내 고양이를 따라 들어가 앞발 사이에 머리를 묻고 낑낑거렸다.
숯막에 다녀온 이후로 희연은 두 주동안의 촬영을 서울에서 했다. 1․2부로 나누어 서울에 있는 미술관을 돌아보았는데, 인사동과 경복궁 주변의 미술관을 예비취재할 때는 나와 동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주엔 꿀 따는 날에 맞추느라 일찌감치 강릉 근처의 한봉단지에 다녀왔기 때문에 주말을 함께 보낼 수도 있었다. 희연은 방문을 꼭꼭 닫고 자야하는 불편을 감수하고 일주일에 하룻밤 정도는 내 방에 함께 있어 주었다. 물론, 예의 수줍음과 성실함의 전략을 지키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긋지긋하던 알레르기의 정체가 결국 밝혀지고 말았다. 일요일 아침이었다. 12시 여자가 전에 없이 일찍 일어나서는 내 방문을 똑똑똑 두드렸다. 아홉 시를 조금 넘긴 시간. 희연은 부리나케 일어나 웃옷을 걸치고서 새침한 표정으로 물러나 선풍기부터 틀었다. 나도 ‘잠깐만요’를 외치며 속옷 위에 티셔츠와 반바지를 꿰어 입었다. 밤사이의 찜통더위는 살인적이란 말에 부족함이 없었다. 문을 열자 12시 여자는 불안한 눈빛에 시치름한 표정을 덧씌우고 손가락으로 마당부터 가리켰다.
징그러워 죽겠어요. 저게 대체 뭐죠? 아까는, 내 방까지 두 마리가…….
마당은 구더기로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세 가닥으로 이어진 행렬은 12시 방향과 화장실 방향, 그리고 개와 고양이가 엎드려 있는 종이박스 쪽으로 고물고물 이어져 있었다. 세 가닥의 시작은 여자의 방과 화장실 사이의 어깨 넓이쯤 되는 틈바구니인 듯 싶었다. 오래된 아코디언과 트랜지스터 라디오, 그리고 장판 쪼가리 같은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는, 평소엔 눈길조차 주지 않던 곳. 그 곳에서 구더기의 행렬이 고물거리며 기어나오고 있었다.
따라나오는 희연을 방에 있으라고 밀어넣은 뒤에, 나는 수도꼭지를 틀고 호스 끝을 오므려가며 마당 구석구석으로 물을 뿜어댔다. 잡동사니가 쌓여 있는 곳에는 더 오랫동안 물을 뿌려 주었다. 십분 이상 물을 뿌리고서야 노르스름한 그 놈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놈들은 다시 고물거리며 기어나왔다. 언제까지고 끊어질 것 같지 않게. 12시 여자는 핫팬츠 차림으로 옆에 서 있다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뭐가 죽어 있는 거 같죠? 그렇죠? 그런 게 아니길 바랬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국 잡동사니를 하나씩 들춰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마당에 한참을 서 있는데도 가려움증이 생기지는 않았다. 아코디언과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빼내고 장판 쪼가리들을 들추며, 나는 주인아주머니가 쥐약 놓았던 걸 기억해냈다. 둘둘 말린 장판지 밑엔 분명 큼직한 쥐가 죽어 있으리라. 아주머니 방문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커다란 자물통만 덜렁 걸려 있었다. 장판 쪼가리에 구더기 세 마리가 붙어 올라왔다. 그리고 그 아래, 흠칫, 시커먼 동물의 사체가 말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생선뼈가 흩어져 있는 바닥, 쥐라고 하기엔 너무 커다란, 그건 분명 검정색 고양이였다. 윤기 없는 털, 푹 꺼진 눈자위, 갈비뼈를 고스란히 드러낸 비쩍 마른 등거죽. 언젠가 이 집 고양이를 홀려서 함께 달아났던 놈과 비슷한 크기였다. 언제 나와 있었는지, 희연이 내 등을 꼭 안아 주었다.
비닐봉지에 거죽을 쓸어 담는 동안 고양이털이 풀풀 날렸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다 말고, 어쩌면 이것도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이렇게라도 자신의 존재를, 거기 한 죽음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으리라. 존재를 알리는 일. 누구라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불꽃이, 아직 타지 않은 나무로 옮겨붙는 것처럼,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제 살을 끊임없이 나눠주고 파먹고 하는 게, 그런 게 생명 아닌가 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 났을 때, 기어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벌써 어제 저녁부터 후덥지근했던 것이, 어쩌면 이미 예상되었던 소나기였다. 나와 희연은 오랜만에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마당을 내다보았다. 어쩌면 입구자 집에서는 바람도 입구자로 부는 모양이었다. 비가 들이치는 부분이 평형사변형의 모양으로 젖어들었다. 예각의 구석마다 쓸리거나 밀려왔던 자잘한 쓰레기들조차 마당 한가운데 배꼽처럼 붙은 하수구로 쏟아져 들어갔다. 지상의 끝이고 지하의 시작인 구멍. 나는 어쩌면 지하철 역사에서 크르렁거리며 도는 바람도 저런 조그만 구멍에서 비롯되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제 비가 내렸나 싶게 소나기가 뚝 멎었다. 비를 담은 구름들이 일제히 서울 한복판을 지나 한강 너머 쪽으로 건너갔다. 하늘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정강이께가 가려워지기 시작했다고 느꼈다. 빌어먹을 알레르기, 괜찮아진 줄 알았더니만. 나는 문을 닫고 나서 옆에 놓였던 숯바구니를 장난스레 끌어안았다. 옆에서 희연이 까르르 웃어댔다. 이 집에선 숯이 완벽한 탈취제네요? 후후―. 그러지 말고 옷부터 벗어놔요. 여기도 냄새가 많이 배었을 거야. 나는 희연을 돌려 앉혀 놓고 속옷까지 훌훌 벗고, 새 걸로 갈아입었다. 그러면서 이제 희연과 나는 한 방에서 속옷을 갈아입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고 흡족해 했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희연은 돌아앉은 채 벽을 바라보면서 연신 큭큭 거렸다.
빨래 바구니와 가루세제를 들고 마당으로 나섰다. 대문간에 한 사내가 두 장의 엽서를 들여다보고 서 있다가 나를 의식했는지 이쪽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등에는 아이를 업고 있었는데, 갑자기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정강이를 긁어대는 모양새가 누군가를 많이 닮아 있었다. 우리는 홀린 듯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냥 담가놔요. 내가 있다가 빨아줄게요. 희연이 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말했다. □ (200×112)
원시림
1972년 충북 제천 출생, 1999년 '진주신문' 가을문예 및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발표작으로 「기둥」, 「용꿈」, 「믹스언매치」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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