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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젊은시인조명/콩밭 속의 시계 외 9편/이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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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문숙
댓글 0건 조회 4,566회 작성일 02-06-23 14:58

본문

젊은시인조명
이문숙
1958년 경기도 금촌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콩밭 속의 시계 외 9편


콩밭 한가운데
버려진 의자에 시계가 앉아 있다
중앙현관에서 만나는 근엄한 둥근 시계가
옥수수 잎으로 던지는
시침의 흘러내리는 칼날
갈팡질팡 날다
나비, 시계의 11과 12 사이에 앉아 있고
저 흘러가는 시간들 살뜰히 다 받아
옥수수 잎 줄줄이 흘러내리고 콩넝쿨 붉은 밭을
다 덮는다
그만 저 시계 의자 위에서 쉬었으면 하는 나는 오늘도
진주나무에 진주가 열리는 꿈을 꾼다
한낱 배설물이, 어떤 사나운 것으로 내리쳐도
내리친 그것이 동강나버리는 진주를
실핏줄의 가지를 가진 나무, 수액이 천천히 꼭대기에서
뿌리로 순환하는 나무
나는 콩밭에서도 쉬지 않는 저 시계가
두려운 모양이다 옥수수잎 성큼성큼 자랄 때 나는
저 커다란 시계를 낡은 의자가 끌어안아
늙으막의 그늘 아래
느릿느릿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콩밭 한가운데 시간은 한 순간도 버릴 데가 없어
그 한치 틈도 없는 콩밭을 지날 때
내 귀는 아주 멍멍하다  
버려진 시계가 철컥철컥
노다지 흘러가기만 하는  





출근길


빙빙 돌아서
구불구불한 너머길, 찌그러진 가드레일 쫓아
붉은 화살표를 따라 버스가
덜덜거리며 가시골에 닿는다
가시에 발바닥이 찔려 원숭이들 울고
우는 원숭이들 가득 태운
버스가 덜덜거리며 한창인 파꽃으로 가고
쌩 오토바이가 들추고 간 뽀얀 길 파꽃 위에 얹혀진다
파꽃으로 열반하는 구부러진 길, 사고다발표지판을 지나
덜덜거리며 응달 마을에 닿는다
언덕패기 북향 집에서
얼어붙은 붓으로
그린 몽유도원도 복사꽃덩어리 찬란하고
가시에 찔린 발을 끌고
죄송합니다 상수도관 교체공사, 파헤쳐진 흙 위로
덜덜거리다 가다 보면
칠보석재 깨진 돌비들에
새겨진 해석할 수 없는 문자들
복개된 냇가에 당도하자
햇물에 구정지 옷을 빨던 옛여인 진흙을 털며 일어서고
길들이 벌떡 일어서고
저 씻은 듯한 벼랑에 맨봉우리에
너럭바위에 가지 못하고
구름에게 가지 못하고  
구불구불 가지 못하고
직진으로 내빼는 길에서 가시에 발이 찔려
울고 있는  
이 원숭이들 덜덜거리며 가고





보드블럭의 비 한 점


고기 한 점이 먹고 싶다는데
비 한 점이 내린다
뜨거운 노루피가 마시고 싶다는데
탄현홀트 앞에선 텃밭을 두른 삭정이 가지
기어오르던 나팔꽃 앞에선 말갛던 하늘이
중산에 오니까 설익은 고기
한 점을 툭 떨어트린다
아하고 받아 먹으려는데 먼저
메마른 사시나무가 가져간다
설컹하게 빗방울이 썩은 어금니에 씹힌다
고기 한 점 먹고 싶다는데
보드블럭에도 피 한 방울 구른다
마른 바닥이 붉은 혀를 꺼내 핥는다
삭정이 가지 나팔꽃
오므린
터지기 직전






환각의 1분1초


신호대기 중에 보니
저 멀리 사거리에 청색 신호가 떨어진다

아까부터 저쪽 정류장에 서 있던 중늙은이
엉거주춤 손을 들다 어 하는 순간
버스는 휙 지나치고
오랜만에 햇빛에 나왔는지
이상하게 흰 얼굴에 홍조가 인다
그 얼굴을 허공에 던져놓고

혹여 누가 아는가
그가 더없이 좋은 죽음을 맞으러 가는 길이었는지
잘 갖춰 입은 양복이 지상에서 입을
그의 마지막 옷이였는지
지나치는 이 버스가 그를 데려다 줄
눈부신 말이었는지

종마소의 말들도
여물통에 주둥이를 박는 걸 잊어버리는
벚꽃 그늘 아래
아직도 그가 내젓던 손
허공에 떠 있고
그 순간이 死後처럼 켜져
어 하는 한 순간을 환하게 밝히고






낭떠러지의 시간            


신혼의 옛집을 지나간다
방범창에는 여전히 방충망 대신
푸른 모기장이 쳐져 있다

창에는 한밤의 강간을 피해
차라리 돌로 누워버린 처녀가 산의 능선이 되어 새겨진다
아찔한 낭떠러지를 꼭 붙들고 물들이 흘러내린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돌 위에 솟은 소나무 뿌리들

푸른 모기장에 미세한 먼지들이 매달린다
갑자기 금이 가는 유리창으로
처녀의 산이 붉게 물든다

녹슨 철문을 열고 아버지와 손을 잡고 계집아이가 나온다
푸실거리며 떨어지는 저녁의 다된 빛을 들추며
속이 뵈지 않은 캄캄함 밖으로
그 안에는 오래된 가재도구들이 삐꺽거리거나
먼지를 딛고 서 있을 것이다

바랜 모기장 속에서 얼굴이 지워진 여자가 손을 흔들어 배웅한다

들고서려는 푸른 모기장을 꾹 눌러주며
못대가리들이 구부러진 몸으로
박혀 있을 것이다

옆집 벽을 되울리던 한밤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모기장에는 달려 있다
낭떠러지의 시간을 딛고
돌산의 능선이 헛된 봉우리를 깎고
세우는 동안

모기장에는 날벌레들의 몸
푸석거리며 삭아가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사이
내 안을 빠져 나온 아이의 울음소리가
오랜만에 그 앞을 지나가는 나를 따라온다






천상의 지도


그으름 올라가는 천장에
그려진 나비가 배시시 웃는다
나비에게도 눈이 있던가
암술처럼
한껏 벌어진 목구멍들

한바탕 다투고 난 뒤
들른

그 식당 카운터에 꽂힌 천상열차도
대열 밖으로
미끄러진 그 꽝하는
충돌을
말하자면 나는 오늘
경험한 건데
그집 늙수그레한 주인이 거슬러 준 건
바로 조각이 난 별 부스러기다
별들도 때론 순행하지 않는다

나는 천상의 지도를 구겨쥐고 나선다
밤의 천장에 전갈좌, 그 으르렁거리는
이빨 사이에 나비 날개가
껴 있다
내가 벌린 목구멍을
닫는 사이
또 한바탕의 까마득한 전쟁이 그 속에서
벌어진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와
죽기를 고집한 자  






거미를 바라보게


불현듯 숫개구리 울음소리 당겨 갈참나무 밝은 햇빛 속 거미줄 주렁거리고 거기 매달린 말없는 거미를 바라보면

서까래에서 흙이 흘러내리고 벽에 수수깡 드러나고 판자가 주질러앉은 마루, 비닐하우스를 져야겠다, 마루 한가득 비닐을 인두로 붙이는 매캐한 냄새, 서까래에서 흘러내린 흙이 발등을 덮고 아버지, 집이 무너지려는데  

꽁무니가 뱉는 줄을 끌고 다니면서
부지런히 허공을 긁어 짜는 시간의 집
가득한 매캐한 냄새

언 땅에 철근을 구부려 박고 비닐을 씌우고 흙으로 덮고 비닐하우스엔 파종되지 않는 식구들  

저 허수룩한 줄 안에 검은 등딱지
아버지 거기서 뭘하고 계세요
비바람에 비닐들 찢겨 흩날리는데
그 집 부둥켜안고
여직까지

펄럭거리며 흔들리는 집 속에 누워
바깥 출입도 없이
  

  
  


무심결


내 몸을 딛고 선 열매 없는 만첩홍도
人面을 한 새들이 낳은 푸근한 알,
보지도 못했던 가래나무 아래 맑은 물이 흘러간다

갑자기 이런 생각에 눈을 뜨면 내가
어느덧 그곳을 지나치고 있다      
인적도 없는 그 앞에 神具를 나르는
파란 색 개별용달 거기 서 있다

운전교습용 차들이 그 앞으로 유턴을 해서
서쪽 노을을 등지고 세상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뵈지 않다가 동공을 대면
조금씩 이동하는 매지구름인듯

사면이 꽉 막혔다
유일한 출구인 샷시문
지나치면서 한번도 열린 걸 본 적 없다
차 소리에 쇳가락 장단 묻히고
이따금 신의 추앙을 받고
소시락거리며 들어가는 바람에게나
바지랑대에 걸린 神占 깃발을 흔들어대곤 한다






난설헌 생가


배도 다리가 되어 줄 물이
이곳까지 들어차야 떠난다
겨우내 방안에서 뒹굴다
때전 동정깃을 세우며
저 깨끗한 물빛 받으러 이곳에 서면
배는 어김없이 돛폭이 찢겨 거기 서 있다
살 벗은 배롱나무
빨갛게 벗은 뒤축으로 서서
그가 언제 들어설까
텅빈 안뜰 놋요강 속으로 뛰어드는 눈발
살얼음 언 누런 오줌
설핏 배롱나무 뿌리를 따라가면
지는 해 둥근 복판으로
얼어붙은 날개죽지를 대고 가는 새들
바람 사나워도 지는 햇볕 다 차지하고 있는
배롱나무 벗은 살 속으로 들어가면
배 한척 저어
처음으로 탯줄 걸린 저 수평선
너머 가볼 수도
있겠구나







불 똥
  

여기가 어디냐
흐실한 햇살을 받아 수크렁 반짝이는 갈기들
널브러져 있는 녹슨 절삭공구들
그 제재소 앞,

쓸모없는 공구들도
기계음을 받고
회전판에 올려지면
끄덕없던 수십년 미송도 간단없이
그 추한 나이테를 그리며 넘어지던

지나는 바람이 수크렁 가는 허리를 꺾는다
수크렁 흔들릴 때마다 보이지 않는
흐물흐물한 이빨들
  
두루미 곧게 뻗은 시간들이
푸드득 날아올랐다
빽빽했던 육체를 간단없이 파쇄했다

언제 벌떡 일어서 불똥을 터뜨릴지 알 수 없는

그만그만한
미적지근한 시간들이
차곡차곡 잘려져 쌓여 있는
그 앞이 수렁이다
수크렁이다

잘 삭은 절삭공구 부르르
불똥을 터는 불새의 깃털 하나를 주워간다

     *수크렁: 억새의 한 종류






여름밤  


한낮이 뜨거웠던 저녁이다
공터 벤치에서 한 식구가 나와  
도시락을 먹는다
아이 둘, 여자 하나
평상시의 조촐한 상차림이다
김치와 노각 무침
징징거리며 달라붙는 아이에게
어서 먹어 다그치는
열기가 가시지 않은
등나무 아래의 식사,
공터를 돌며 그들을 곁눈질하다
달을 보니
거기서도 달그럭거리는 수저 소리가 들린다
매일 식탁에서의 둥근 원이
저 달에서도 깨져 있다
한쪽이 허물어진 달처럼
家長이 빠져 있는 식사, 저 찬으로 놓인
노각은 저 달 속에서도 아삭거리며
썩은 치아에 씹히고
구름의 그늘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나온다
공터를 돌 때마다
달은 벌겋게 비벼진 밥알을 한 입 가득
물고 있다 뱉어낸다  
등나무 옆에 세워놓은 자전거
도시락 덜그럭거리며 여자는 두 아이와
뜨거운 달의 저편으로
페달을 밟아간다






幻 生        


봄눈이 오는데
아직도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자주색 코트와
갈색 가방이 펄럭인다
<목격하신 분 연락주십시오>,
만남의 광장에 모여
끼득거리는 학교가지 않는 애들
웃음소리에 치여서
봄눈은 오다말다 하는데
멎어버린 12월 29일 4시 50분경
그 현수막의 시간 속으로
봄눈이 온다
갈색 가방을 끌어안고
자주색 코트를 입은 아주머니가
봄눈을 맞으며 걸어온다
멀치감치에서나 나는
푸른 물이 패는
수양버들을 목격하는 건데
<후사하겠습니다>
그 말 뒤로 오는지 알 수조차 없는
허수룩한 봄의 시간들이
마구 패이는 건데
좋아라 끼득거리는 애들 틈을 비집고
봄눈이 온다
자주색 코트와 갈색 가방을 적시며
오자마자 자취도 없이 스러지는
봄눈이
삼월이라는데
삼월의 끝이라는데






利 己


마흔이 넘도록 혼자인 친구 있다 어느날 내 근무지로 전화 왔다 나 오늘 세 시에 결혼하니까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고 너만 살짝 와 나는 모든 일 팽개치고 집으로 왔다 고개를 넘어오는데 칠보석재 석영 속으로 햇빛이 들락날락했다 뒤란의 흑염소 매애 울었다 무슨 옷을 입고 갈까 옷장 속에 꽃나무 그득했다 목련꽃도 입어보고 벚꽃잎도 입어보았다 목련꽃은 상복같아 벗어뒀다 벚꽃치마는 신부보다 화사할까 두려워 걸어 두었다 그러다 지쳐 잠들었다 깨어나니 神占집 목련이 석양 속에 떠 있었다 몇 시나 됐을까 축의금 봉투 속으로 해가 꺼졌다 그날 내가 잠드는 바람에 그 친구는 아직도 혼자다 같이 늙어갈 줄 알았던 나는 배반하듯 솔박새와 결혼해 버렸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나 친구를 찾는다 올해도 뭉툭해진 손등에 봉투같은 흰 꽃 맺었다 나의 利己가 그속에 꾸깃꾸깃 접혀져 빛나는 화창한 봄이다

추천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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