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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젊은시인조명 해설/이문숙의 신작시/황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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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시인조명
황현산
이문숙의 신작시
이문숙은 좋은 시인이다. 과장하지 않고도. 아주 좋은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그는 시에 깊은 관심을 지닌 사람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았을까. 필경 그 이유는 그가 지닌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자신을 널리 알리는 데에 서툴렸다거나 애써 노력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알려지지 않음은 오히려 그의 선택이다. 이문숙은 마치 세상의 다른 모든 일을 젖혀두고 시 쓰기를 선택하듯이 이 알려지지 않음을 선택했다. 고통 속에 잊혀져 있는 사람으로서의 그 조건이 없다면 아마 그의 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문숙의 이 선택은 그의 시에 관해 말을 하려는 사람의 태도까지 규정한다. 알려지지 않으려는 그의 시에는 당연히 날카로운 방법도 우쭐거리는 주제도 없다. 거기에는 늘 겉으로는 잔잔하고 속으로는 깊은 고통이 있고, 이 고통의 큰 뿌리와 작은 뿌리에 구분할 수 없이 엉켜 있는 언어가 있으며, 그래서 읽은 사람을 이상하게 매혹하는 힘이 있지만, 그에 관해 어떤 말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고통의 자리로 함께 따라내려 가거나, 고통을 그 자리에 온전하게 남겨 놓고 세상을 향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그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콩밭 속의 시계]가 이 정황을 훌륭하고 명료하게 설명해 준다. 콩밭 속에 의자가 하나 있고 그 위에 시계가 놓여 있다. 누군가 거기 버린 시계일 텐데, 아주 버리기는 아까워, 콩밭 매는 일꾼의 새참 시간이라도 알려 주고, 그러다 가져갈 사람이 있으면 딸려 가라고 거기 놓아둔 것이리라. 이 버려진 시계는 시계로서의 기능을 아직 끝내지 않아, "콩밭 속에서도 쉬지" 않는다. 세상의 여늬 시계처럼 이 시계도 문자판을 하루에 두 번 돌겠지만, 그러나 벌써 다른 시간을 가르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콩밭 고랑에서 콩보다 더 우뚝 자란 옥수수의 칼날 같은 잎이 역시 칼날 같은 시침과 쉽게 구별되지 않으며, 나비 한 마리가 마치 콩잎 위에 앉아 있듯 그 문자판에 앉아 있다. 시계에서 흘러나오는 시간이 옥수수 대궁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옥수수 잎으로 흘러나와 "콩넝쿨 붉은 밭"을 다 덮는다. 이 시간은 벌써 다른 세계의 시간이다. 그것은 미물들의 시간이며, 식물의 시간이다. 자기 마음속을 깊이 들여다 볼 줄 아는 인간이 있다면 그도 이 시간 속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 시간 속에서 꿈을 꾸는데, "진주가 열리는" 어떤 나무를 생각한다.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이 진주 키우기는 그러나 세상의 시간에서 바라보기에 얼마나 여리고 어리숙한가. 그 단단함은 그 진주를 달고 있는 나무의 실핏줄을 타고 꼭데기에서 뿌리까지 느리게 흐르는 수액의 순환으로 얻어질 뿐이다. 생명의 이 빛나는 적극성은 세상에서 벌써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으늑한 자리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시인에게 이 자리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직업인이고, 한 사람의 아내이고, 한 아이의 어머니인 그에게, 콩밭 속의 시계는 저 식물의 시간이 세상의 시간으로 환원되려는 그 갈림길을 나타낸다. 이 시간은 절로 무성한 식물들의 으늑한 자리로 그를 데려가면서 동시에 현실의 시간 속으로 그를 쫓는다. 저 세계 시간의 쉬지 않음은 이 시인에게마저 이 세상 시간의 분주함이 되려 한다. 나무가 진주를 달기 위해서는 마음 속에 그 특별한 시간을 안아들이면 그만이겠지만, 그 진주가 빛나기 위해서는 현실의 시간을 빌려야 하는 것인가. 시인은 마지막 대목에서 문장 하나를 복잡하게 쓰고 있다.
...... 옥수수잎 성큼성큼 자랄 때 나는
저 커다란 시계를 낡은 의자가 끌어안아
늙으막의 그늘 아래
느릿느릿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으면 한다
이 시구의 문장은 전체적으로 시간의 부사절과 주절이 합해진 복문인데, 주절이 다시 조건절과 주절로 이루어진 복문 하나를 안고 있는 종합문이다. 시인은 이 복잡한 문장으로 귀를 "아주 멍멍"하게 하는 "콩밭 한가운데 시간"을 연출하여, 가능한 한 현실의 시간에 저항하려 한다. 시인이 그 언어로 만드는 나무의 실핏줄이 이와 같다.
[환각의 1분1초]에서 시인이 차를 타고 가다 얼핏 본 "중늙은이"도 두 개의 시간이 갈리는 지점에 서 있다. 양복을 잘 갖춰 입은 이 노신사는 버스를 향해 손을 쳐들었는데, 버스는 그를 태우지 않고 지나쳐 버렸다. 화창한 봄날의 허공에 그가 내젓는 손이 잠시 "死後처럼" 빛을 뿜어 "어 하는 한 순간을 환하게" 밝힌다. 그가 손을 내젓는 순간이 빛의 시간인 것은 그 손이 잡으려던 것을 놓쳐버린 손이기 때문이다. 그가 때맞춰 버스를 탓더라면 버스는 그를 현실의 어느 장소로 데려 갔겠지만, 놓친 버스이기에 그의 현실 밖으로 멀어졌다. 버스는 다른 시간의 세계, 그의 현실이 아닌 세계, 이를테면 그가 이 일상의 모든 짐을 벗고 만나게 될 사후 세계의 버스가 되었다. 그가 허공에 들어올린 손은 일상의 현실을 놓아보내면서 사후의 빛나는 세계를 잠시 영접했다 배웅하는 손이다. 이 손의 순간이 뿜는 빛의 힘으로 이 화창한 봄날은 그 벚꽃 그날 아래 저 세계의 특별한 시간을 잠시 누린다. 놓쳐버린 것의 힘으로.
그러나 으늑하고 고독한 자리를 지키며, 자신의 모든 바람을 놓쳐버린 것에 걸고 있는 이 시인에게 세상에 대한 원망과 회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고독과 희망없는 것에의 희망은 그의 최초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그가 마지막까지 내몰린 궁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꿈이 바닥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낭떨어지의 시간"을 살아왔다. 바로 이 말로 제목을 달고 있는 시는 결혼과 함께 불행 속에 떨어졌던 한 여자의 신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여자의 "신혼의 옛집"에는 "푸른 모기장이 쳐져 있다". 그 창은 불행한 세월의 기억을 붙잡아 놓은 그물과 같다. "한 밤의 강간을 피해 / 차라리 돌로 누워버린 처녀"는 제 몸으로 "아찔한 낭떨어지를" 만들고, "푸른 모기장에 미세한 먼지들이 메달"리듯 거기 한사코 매달린다. 낭떨어지도 그 자신이며, 매달리는 것도 그 자신이다. 그 자신이 모기장이며, 그 자신이 거기 말라붙은 모기들이다. "한밤의 서러운 울음소리"도 "낭떨어지의 시간을 딛고" 거기 매달린다. 여자가 그 창문 앞을 지날 때, 그를 따라오는 것은 그의 "안을 빠져 나온 아이의 울음소리"이다. 이 울음소리는 그가 안에서 뿜어내는 비명인 동시에 그의 운명을 얽어매는 질긴 밧줄이다. 이 낭떨어지가 그의 재능을 키워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낭떨이지의 시간에 필사적으로 매달리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푸석거리며 삭아"지기도 했던 것이다.
이 삭아짐을 시인은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이라고도 운명이라고도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삶은 그의 [천상의 지도]에 없던 것이며, 그를 태어나게 해준 "별"의 지시도 아니다. "한바탕 다투고 난 뒤" 어느 식당을 찾아가 저녁을 먹은 이 시의 화자는 늙수구레한 식당 주인이 거슬러 준 "조각이 난 별 부스러기" - 이는 필경 그가 자신의 운명의 조각내어 푼돈으로 얻은 화폐일 것이다 -를 구겨 쥐고, "별들도 때로는 순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가 타고 났을 재능이 그렇게 마모되고 있다는 뜻이다. 시는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와 / 죽기를 고집한 자"라는 모호한 말로 끝난다.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은 자는 그 운명의 끝을 보기로 작정한 자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세상에서 잊혀져 삭아지는 자의 적극적인 선택이 있으며, 시의 선택이 있다. 시는 이 어긋난 운명을 거부하기 위한 무기이지만, 그 운명과의 깊은 공모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무기이다.
시인은 [난설헌 생가]에서 바로 그 말을 한다. "배가 다리가 되어 줄 물이 / 이곳까지 들어차야 떠난다"는 말은 가슴 아프다. 운명은 점지되었는데, 그 운명이 실현될 길은 마련되지 않아, "배는 어김없이 돛폭이 찢겨 거기 서 있다". 복되게 누려야 할 모든 운명들, 빛 속에 발휘되어야 할 모든 재능들은 눈발 들이치는 "텅빈 안뜰 놋요강"처럼, 그 놋요강 속의 "살얼음 언 누런 오줌"처럼, 일상 속에 허물어지고 있다. 난설헌은 없다. 시인은 난설헌이 될 수 없다. 시인은 잠시 "배롱나무 뿌리를" 따라가는데, 거기서 보게 되는 것은 마지막 남은 해에 "얼어붙은 날개죽지를 대고" 날아가는 새들이다. 시인이 따라 갔던 것은 사실 배롱나무 뿌리가 아니라 앙상하게 남은 그 가지였던 것이다. 나무는 가장 불행한 시절에 그 운명의 뿌리를 하늘로 쳐들어 올리고 있다. 시인은, 불행한 겨울 바람을 땅으로 삼아 마지막 남은 햇빛을 모두 모아들이고 있는 이 "배롱나무 벗은 살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첫 운명'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엇나간 운명을 유일한 운명으로 삼고, "물 없음"을 물빛으로 삼아, "처음으로 탯줄 걸린 저 수평선"을 다시 회복하려는 것이다. 이 기대와 결단 속에서 불행은 그의 운명을 엇나가게 했던 재난이 아니라 오히려 그 운명을 실현시키는 재능이 된다. 난선헐이 그렇게 태어난다. 난설헌을 파괴하는 불행한 일상들이 바로 "난설헌 생가"가 된다. 운명의 아이러니이며 재능의 아이러니이다.
엇나간 운명에 대한 역설적 인식에 시인의 재능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이 아이러니의 시간은 얼마나 막막한가. 일상은 늘 그 자리를 맴돌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하나같이 낡은 모습을 둘러쓴다. [幻生]에서는 3월의 거리에 지지부진하게 봄눈이 내리고 있다. 네거리에 헌수막이 붙어 있다 : "목격하신 분 연락 주십시오." 이 헌수막을 내건 사람은 날마다 애타게 가슴을 조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내리는 봄의 "자주색 코트와 갈색 가방"처럼 그 초조한 마음까지 낡은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낡음 뒤에서, 멎어버린 시간 뒤에서, 경박한 애들의 "좋아라 끼득거리는" 웃음 소리 뒤에서, "오다말다" 하는 봄눈 속에서, 물오르는 "수양버들을" 훌륭하게 "목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봄은 이렇게 "허수룩"하다. 삶을 구성하는 시간들은 늘 그렇게 어둡고 침울한데, 그 속에서 기적처럼 거슬러 일어서는 역설의 시간은 어쩌다 목격되는 점의 순간이 뿐이다. 그것은 단연코 기적인데, 그 기적마저 "허수룩"하다. 질척거리거나 먼지를 둘러 쓴 자리에서 희망이랄 것도 없을 가장 허수룩한 희망에 거의 모든 것을 걸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이, 말하자면 시인의 재능인데, 이 재능은 흔한 것도 쉬운 것도 아니다. 멸망의 위험에 처한 도시에서 초라한 나그네를 천사로 알아보는 눈은 오직 한 사람만 지니고 있지 않던가. 그것이 이문숙의 재능이다.
세상에는 들어갔던 모든 것이 다시 돌아나오는 자리가 있다. 이문숙이 [무심결]에 꿈꾸는 곳은 바로 그 자리 앞에서이다. 아주 한적한 곳만을 찾는 "운전교습용 차들"도 그 앞에서는 유턴을 해서 "서쪽 노을을 등지고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 막힌 자리의 끝에 신과 내통하는 사람이 사는 곳, 곧 점쟁이 집이 있다. 사방이 막힌 그곳의 유일한 출구는 "샷시문"인데, "지나치면서 한 번도 열린 걸 본 적이 없다".
소시락거리며 들어가는 바람에게나
바지랑대에 걸린 神占 깃발을 흔들곤 한다
중요한 것은 거기 "神占 깃발"이 서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막힌 자리에만 시인의 유일한 출구가 있다는 것이다. 출구는 닫혀 있지만 그 앞을 꿈꾸며 지나가는 시인을 바라보는 눈이 없지 않을 것이다. 출구를 알아보는 눈과 출구에서 바라보는 눈은 같은 눈이기 때문이다. 출구를 바라보며, 출구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인은 유턴하지 않을 것이며, 서쪽 노을을 "등지고"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서쪽 하늘을 안고 그 출구를 가로질러 세상으로 나올 것이다. 이문숙은 갈 수 있는 곳까지 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닫힌 샷시문을 넘어섰다. 쫓기고 몰려 갔던 자리, 그러나 마지막으로 쫓기고 몰리기 전에 선택한 으늑한 자리를 창조의 출구로 만들기까지 이문숙이 지불한 것은 매우 많다. 이제 잃었던 것을 다섯 갑절 여섯 갑절로 회복할 차례인데, 다만 이 보상은 안타깝게도 시인이 상상했던 형식으로가 아닐 것이다.
(원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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