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5호/행사수첩/월탄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강연회 소묘/장이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장이지
댓글 0건 조회 3,375회 작성일 02-06-23 15:01

본문

행사수첩 월탄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강연회 소묘

장이지




지난 해 12월 13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월탄 박종화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강연회가 있었다. 갑자기 몰아닥친 한파에도 아랑곳없이 월탄 선생을 잊지 못하는 제자 및 후배 문인들이 속속 세종홀로 모여들었다. 월탄 선생 곁에서 그분의 육성을 들으며 문학의 길로 들어선 제자들은 어느덧 백발의 노인이 되어 강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생전의 월탄 선생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잔잔한 감회에 젖어 있었다. 문학의 위기가 운위되는 와중에 월탄 선생의 장강(長江)과도 같은 문학 세계에 매료된 젊은이들의 참여도 놀라웠다. '스타 크래프트'와 '넷 서핑'에 중독된 세대, 소위 '시큰둥 세대'로 불리는 저들이 월탄 선생의 어떤 점에 끌린 것일까 잠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이 문학이 아니고는 우리의 얼을 지킬 수 없었던 어두운 시대를 살다 가신 월탄 선생의 뜻을 모두 헤아리리라곤 기대할 수 없지만, 저들은 또한 저들 나름대로 월탄 문학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는 문학의 본령을 깨우쳐가고 있으리라 짐작하니 마음이 절로 훈훈해졌다.
강연회는 황금찬 시인의 개식사 및 추모사로 막을 올렸다.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월탄 선생의 삶과 문학을 지켜보았던 문학평론가 윤병로 선생이 첫 번째 연사로 강단에 올랐다. 윤병로 선생은 월탄 선생이 낭만주의 문학의 온상이었던 『백조』의 주역이었던 점, 최초의 역사소설가인 동시에 전형적인 정사적 역사소설가라는 점, 시종일관 민족문학의 주체성을 고수한 작가정신의 소유자라는 점 등을 역설했다. 불현듯 내겐 월탄 선생의 '역(力)의 예술론'이 떠올랐다. "만사람의 뜨거운 심장 속에서는 어떠한 욕구의 피가 끓으며, 만사람의 얽혀진 뇌 속에는 어떠한 착란의 고뇌가 헐떡거리느냐, 이 불안이 고뇌를 건져주고 이 광란의 핏물을 녹여줄 영천(靈泉)의 파지자는 그 누구도 '역(力)의 예술'을 가진 자이며 '역(力)의 시'를 읊는 자이다." 마치 월탄 선생의 고혼이 돌아와 오늘날 우리 문학하는 후배들에게 다시 '역(力)의 예술'을 강조하며 노호하고 계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한동안 정신이 아뜩해졌다. 윤병로 선생의 열강 속에서 월탄 선생의 유지가 고스란히 되살아나 좌중을 압도했다. 이런 것이 사제동행(師弟同行)의 향기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문학이 천대받는 시대, 책이 작품이 되지 못하고 상품으로 그치는 시대, 책이 불살라지는 시대의 책임이 어찌 우리 문학하는 사람에게도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왠지 두렵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윤병로 선생은 월탄 선생의 역사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셨다. 『금삼의 피』만 해도 어떠한가? 월탄 선생은 역사가 보지 못한 것, 역사적 이면에 비친 인간적인 측면을 탐구하는 데서 역사소설의 의의를 찾으셨다. 『대춘부』와 『다정불심』은 또 어떠한가? 거기에는 일본제국주의 치하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민족정신을 앙양하려는 숱한 기도들이 신화처럼 숨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윤병로 선생은 월탄 선생을 일컬어 "마치 대하처럼 가없는 민족사의 물줄기 속에 수많은 격랑의 인간사를 바다로 끌어안은 민족작가"라고 평하고 연단을 내려왔다. 과연 월탄 만큼 선이 굵은 소설가가 우리 시대에 몇이나 되었나 헤아리다가 스스로 겸연쩍어짐은 어쩔 수 없었다.
소설가 최근덕 선생이 뒤이어 단상에 올랐다. 이번에는 월탄 선생의 인간적 풍모를 회상하는 강연이었다. 강연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문학의 스승이 곧 인생의 스승이기도 했던 시대를 회고주의자가 되어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미메시스의 거울이 깨져 문학이 인생의 총체적 비전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이즈음 가끔 하는 생각이었다. 세종홀의 하얀 탁자 앞에 앉아 탁자보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약간 초조했다. 나의 이런 회고주의적 감회가 단순히 현실도피 심리에 그치지 않기를 수없이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어느덧 평론가 김양수 선생의 강연이 시작되고 있었다. 김양수 선생은 월탄의 역사소설이 일제치하의 질곡을 외면한 채 회고 취향에 흐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오늘의 시각으로 견주어 역사적인 옛 행적을 오늘에 되살림으로써 국난 극복의 한 방편이 되었다는 취지의 논지를 폈다. 과거에서 미래를 발견해 내지 못하는 민족에게 과연 미래는 있겠는가 하고 자문케 하는 시간이었다. 강연회는 김후란 시인의 「청자부」(월탄 作) 낭송으로 끝났다. 미적 절대를 감싸고 도는 절체절명의 망국한(亡國恨)이 김후란 시인의 청자색 음색을 타고 세종홀을 가득 메웠다.

"선은/가냘핀 푸른 선은/아리따웁게 구을러/보살같이 아담하고/날씬한 어깨에/사월훈풍에 제비 한 마리/방금 물을 박차 바람을 끊는다.//그러나 이것은/천 년의 꿈 고려청자기!"

이날 오후에 있었던 제36회 월탄문학상 시상식에서는 김구용 선생이 수상의 기쁨을 안았다. 그동안 구용 문학은 그 난해하고 오묘한 미학, 장대한 스케일 때문에 많은 이해와 조명을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번 수상을 계기로 구용 문학에 대한 합당한 조명이 이어지리라 기대해 본다. 2001년 12월 28일 김구용 선생은 수상의 기쁨을 뒤로 한 채 숙환으로 돌아가셨다. 발인날 눈이 내렸는데 구용 선생은 그 눈을 보셨는지 모르겠다. 이 세상에선 더 이상 쓸 게 없으셨던 분이셨다. 참으로 다양한 시를 쓰셨다. 그 시들이 모두 우리 문학사에서 새로움으로 빛났고 또한 새로움의 씨앗으로 어둠 속에 뿌려졌다.

"나뭇가지의 그림자는/흐름을 안는다./기다리다가 지쳐서/여자가 과일을 저무는 길로/동댕이쳤을 때/나는 아팠다.//개미들은 달이 뜨는 숲으로/나를 운반해간다./고마운 일이다./시간과 시간이 서로 만나/씨앗은 초라한/시고(詩稿) 속에 묻혔다."(김구용, 「사랑을 위하여 나는 잊는다」 중)

고마운 일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추천3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