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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단편소설/초대받지 않은 손님/이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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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호림
댓글 0건 조회 2,934회 작성일 02-06-23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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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이호림
《작가세계》로 등단


초대받지 않은 손님 





    집에 돌아왔을 때 그가 와 있었다. 내 낡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가 온 게 놀라웁지는 않았다. 그가 오기를 바란 건 나였다. 그는 나의 바람을 따라온 것 뿐이었다.
    한가지 사소한 의문이 있긴 했다. 잠긴 문을 어떻게 따고 들어왔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의 원룸 열쇠를 준 적이 없었다. 그가 잠긴 문을 열고 들어오려면 천상 문의 걸쇠를 망가뜨리고 들어오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문은 멀쩡했다.
    그 의문을 풀자면 그를 깨워 그에게 물어보면 되었다. 나의 잠긴 원룸 문을 따고 들어오는 그만의 독특한 방법이 있었을 것이었다. 나는 침대로 가 곤히 잠든 그를 깨우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깨우지 않았다. 곤히 잠든 그의 모습을 채 일미터도 안되는 가까이서 보는 순간, 나의 사소한 의문 때문에 그의 잠을 방해한다는 게 무엇했다. 나는 나의 의문을 잠시 유보하기로 했다.
    내가 그를 깨우지 않은 것은 썩 잘한 일이었다. 그가 내가, 나를 방문해주기를 바란 그가 맞다면 굳이 그를 깨워 잠긴 나의 원룸문을 어떻게 열고 들어왔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바란 그라면 잠긴 문쯤은 얼마든지 따고 들어올 수 있었다. 그가 열쇠도 없이 나의 원룸문을 따고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내가 바라던 그이라는 그럴듯한 증거였다.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담고 스위치를 넣었다. 잠시후 나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깊이 잠든 그를 관찰했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잠들기 직전에 마시는 커피는 습관이었다. 습관적으로 마시는 커피는 공기의 느낌이나 물맛처럼 무미건조했다. 그러나 오늘밤은 그 맛이 느껴졌다. 그를 관찰할 수 있는 거리와 시간을 허용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의 등을 보고 싶었다. 그는 천정을 향한 채로 누워 있어 그의 뒤쪽을 엿볼 수가 없었다. 그가 내가 오기를 바란 그인가를 알려면 그의 앞쪽이 아니라 그의 뒤쪽이 확인될 필요가 있었다. 나는 평소보다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그의 등이 천정을 향하도록 그가 몸을 뒤척이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내가 커피를 다 마실 동안 마치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는 커피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나 그가 누워있는 나의 침대로 갔다. 오른손을 그와 침대 사이의 잇닿은 공간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와 침대가 밀착되어 있어 그 사이로 손을 집어넣는데 약간 애를 먹어야했다. 그가 잠결에서도 나의 손길을 느꼈는지 한차례 몸을 비틀었다. 그의 등짝은 밋밋했다. 나의 등짝이 밋밋한 것처럼. 내가 찾는 것이 없었다. 내가 찾는 것은, 날개였다. 하얀 눈부신 날개. 나는 실망했다. 어쩌면 그는 내가 바라는 그가 아닐지도 몰랐다.
    나는 손을 뺐다. 그리고 그를 관찰하던 소파로 다시 돌아왔다. 그에 대한 경계심이 생겼다. 그에게 날개가 있었다면 나는 나의 침대에서, 그의 곁에서 잠을 청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가 내가 오기를 바라던 그가 분명했으니까. 날개가 없는 그의 곁에서 잠이 들 수는 없었다. 지금 나의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그는 내가 바라는 그가 아닐 수도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제시될 때까지 좀더 두고보아야 했다. 나는 그로 인하여 불러일으켜진 나의 설렘과 나의 실망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다. 오늘밤은 나는 나의 침대가 아닌 소파에서 자기로 했다.
    눈부신 아침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몹시 상쾌했다. 어린시절 피로감과 외로움과 삶의 무거움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그때에 맞이하던 아침들 가운데의 한날 같았다. 문을 넘어들어온 아침햇살이 아주 맑았다. 방안 공기가 무척 깨끗하다는 증거였다. 그가 맑은 햇살을 등지고 창가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오늘 아침 이 상쾌한 기분이 그와 상관이 있다는 걸 알았다.
    오래 날 지켜보고 있었나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내 침대에서 자는 바람에 나는 소파에서 자야 했어요. 그 바람에 사십분이나 늦게 일어났네요. 잘하면 오늘은 회사에 늦을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은 내가 회사에 늦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지요.
    그는 역시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용서하겠어요. 오늘 아침은 특별히 기분이 상쾌하니까요.
    나는 그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나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지 않은 지 상당히 오래되었으므로 순전히 그를 위한 아침식사였다. 당근 두개를 녹즙기에 갈아 당근쥬스를 만들고, 샌드위치를 만들고, 달걀 후라이를 했다. 그는 샌드위치를 먹고 당근쥬스를 마시고 달걀 후라이를 먹었다. 나는 그가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그의 곁에 앉아 그에게 물었다.
    근데 왜 당신한테는 날개가 없지요. 그 하얀 눈부신 날개 말예요.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한참이 지나도록 대답이 없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기에 지친 나는 다시 물었다.
    당신은 내가 기다리는 그가 아닌 모양이군요. 그치요?
    역시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에게서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안 나는 약간 화가 나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욕실에서 출근준비를 끝내고 나왔을 때 그는 아침식사를 끝내고 씽크대 앞에 서서 먹은 식기를 씻고 있었다. 나는 설겆이를 하고 있는 그에게로 가서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만일 당신이 내가 기다리는 그가 아니라면 당신은 이 집에서 당장 나가야 해요. 나는 당신을 초대한 적이 없으니까요. 알겠지요.
    나의 단호한 태도에 그가 당황한 듯 했다. 그제서야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나는 그의 고개 끄덕거림에 만족할 수 없었다.
    고개만 끄덕거리지 말고 말을 해보란 말예요.
    그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그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거렸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가에 핀 엷은 미소가 나의 답답함에 제동을 걸었다. 나는 더이상 다그칠 수 없었다. 그의 미소 속에서 그가 벙어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이천억이지 이조요? 이건 엄청난 실수잖소."
    부장의 지적을 듣고서야 나는 나의 실수를 보았다. 이천억과 이조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장부상에서는 단지 영 하나의 차이에 불과했지만.
    "무슨 일 있소? 요즘 계속 실순데."
    "……"
    "인경씨, 시집이나 가요. 내가 여자라면 벌써 시집가서 이 지긋지긋한 일을 때려쳤겠소."
    부장을 만나고 나온 나는 불쾌했다. 어쩐지 모자란 사람 취급을 당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만 따지면 부장의 말이 틀리다거나 지나친 것은 아니었다. 벌써 시집을 가서 이 지긋지긋한 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것은 바로 나의 심정이었다.
    부장이나 다른 남자직원들로부터 그런 말을 듣게 되면 내 마음속을 들킨 것만 같아 몹시 불쾌했다. 부당하다는 느낌에 반발심이 일기도 했다. 나는 부장과 입사동기였다. 남자는 승진을 하고 여자는 마냥 제자리를 고수시키는 회사의 이상한 방침 때문에 입사동료였던 부장은 부장이 되고 나는 아직도 말단으로 있었다. 내가 지긋지긋해진 것은 제 나이에 시집을 못간 탓도 있겠지만 회사의 어이없는 방침 탓일 수도 있었다. 나와 입사동기였던 여사원들은 모두 시집을 가서 이 지긋지긋한 일로부터 벗어났다. 나만이 남아 있었다. 젊은직원들은,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나를 늙은 여우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쩌다 나만이 이 지경까지 남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요즘들어 실수가 잦아졌다는 부장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어제도 그제도 그그제도……나는 결재서류의 하자에 대하여 지적을 받고 있었다. 하찮은 실수들이 아니었다. 이천억원을 이조원으로 쓰는 것처럼 장부상으로는 공 하나 차이에 불과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엄청난 파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식이었다. 나도 요즘의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었다. 젊은 직원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늙은 여우에 대한 소문이 나의 일을 방해하고 있었다. 늙은 여우는 살 만큼 살았으므로 조만간에 죽임을 당하게 될 거라는 소문이었다.
    오늘 실수에 대해서 만큼은 이유가 분명했다. 나는 서류를 작성하면서 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집이었다. 집에 두고온 그였다.
    나는 그가 내가 방문해주기를 바랐던 바로 그인지에 대하여 곰곰 따져보고 있었다. 나는 그가 바로 그인지 아닌지 단정을 못내리고 있었다. 열쇠없이 나의 원룸 안으로 들어온 것과 오늘 아침 눈떴을 때의 상쾌함을 상기하면 그가 바로 그인 것 같았고 눈부신 날개가 없다는 것과 벙어리라는 사실을 들추어보면 아닌 것도 같았다. 그가 만일 내가 바라는 그가 아니라면 당장 집에서 쫓아내야 할 거였다. 그가 바로 그가 아니라면 나와 다름없는 제약에 빠진 존재라는 의미였고, 나와 다름없는 존재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들어와 있다는 것은 불순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남의 집에 무단침입한 도둑이거나 강도일 수도 있었다.
    나는 퇴근을 서둘렀다. 집에 있는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마트를 들러 찬거리를 샀다. 오랜만에 보는 장이었다. 그동안 나는 집에서 홀로 밥먹는 게 싫어 밖에서 대어놓고 저녁을 먹고 있었다.
    집에 당도했을 때 그는 텔레비젼의 만화영화를 보고 있었다. 만화영화가 재미 있는지 마치 어린애처럼 웃어대고 있었다. 내가 집에 들어오는 줄도 몰랐다. 나는 그를 내버려두었다. 마치 어린애처럼 웃어대는 그가 행복해 보여서였다. 나는 씽크대 앞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저녁식사를 마주하고서 나는 그에게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내가 기다리는 그가 아니라면 무상으로 잠자리를 제공하고 식사를 대접하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침에도 물었지만 이 점은 분명히 해두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묻는 거예요. 당신은 내가 기다리는 그인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의 물음을 못듣는지 혹은 무시하는지 식사에만 여념이 없었다.
    그럼 이렇게 묻겠어요. 당신은 내가 원하는 걸 해 줄 수 있나요.
    이번에는 그에게서 반응이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느릿느릿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원하는 걸 들어줄 수 없다는 건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이었다. 결국 그는 내가 기다리는 그가 아니었다. 하얀 눈부신 날개도 없고 말도 할 줄 모르는 그가 내가 기다리는 그일 리가 없었다.
    밥맛이 없었다. 모처럼 내가 차린 저녁식사였지만, 그가 내가 기다리는 그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식욕이 없어졌다. 그의 식욕은 왕성했다. 벌써 밥 한공기를 비우고 있었다.
    당신은 내 집에서 나가야 돼요. 난 당신을 초대한 적이 없고 당신은 무단으로 나의 집에 침입한 거니까요. 오늘밤 당신을 쫓아내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내일 내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집에서 나가야만 해요.
    그가 조금전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쳐들고, 가로저었다.
    나가지 않겠다는 건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럼 경찰을 부를 수 밖에는 없어요. 경찰을 부르는 건 아주 귀찮은 일이고 또 당신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지만 하는 수 없어요.
    그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슬픔이 가득했다. 그의 슬픈 표정을 보는 나도 슬퍼졌다. 그는 말은 하지 않지만 얼굴 표정으로 충분히 그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듯 했다. 나는 더이상 그에게, 그가 나의 집을 나가야한다는 사실을 강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밥그릇에 다시 한가득 밥을 채워주었다. 그의 슬픈 표정이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의 슬픈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슬픔 때문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설겆이를 마치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그는 이미 나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 잠들어 있었다. 나는 조금 화가 났다. 청하지도 않은 불청객이 주인의 침대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부당한 일이었다. 나는 그를 깨워 나의 침대에서 내쫓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그를 나의 침대에서 내쫓지 못했다. 잠들어 있는 그의 한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잠든 그의 평온함을 방해하는 것은 몹시 나쁜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었다. 비록 이 침대가 나의 침대라 하더라도 그가 잠들어 있는 이 순간 만큼은 그의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나를 엄습하는 것이었다.
    그날밤도 나는 나의 침대는 그에게 빼앗긴 채, 소파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다음날 아침도 상큼했다. 집안 공기가 아주 맑게 느껴졌다. 실제로 집안 공기가 아주 맑아진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는 나는 해맑은 시골집에 와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아침밥을 차려주고 그에게 꼭 집을 비우라는 당부를 하고, 유쾌한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집안에 가득한 맑은 아침 공기가 나의 기분을 유쾌하게 했다. 집 밖으로 나서면 바깥공기는 언제나처럼 불순하고 탁했다.
    출근한 나는 일 속에 파묻혔다. 언제부터인가 들기 시작한 지긋지긋하다는 느낌이, 그날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부장으로부터 지적을 당하지도 않았다. 늙은 여우라는 젊은 직원들의 쑥덕공론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루해가 정말이지 눈부시게 흘러갔다.
    퇴근무렵에야 나는 비로소 집에 있는 그를 떠올렸다. 그가 나의 지시대로 나의 집을 떠났을까 싶었다. 나는 집에다 전화를 했다. 내가 집에다 전화를 걸은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는 전화를 받을 리 없었고 또 전화를 받는다 하더라도 벙어리인 그가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나는 그가 나의 지시를 따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내가 기다리는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므로 계속해서 나의 집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집을 나가지 않았을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나가라고 했을 때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나가지 않겠다고 했었다. 그럼 경찰을 부르겠다고 하니까 몹시 슬픈 표정을 지었었다. 그의 슬픈 표정은 정말 슬퍼서 그의 표정을 쳐다보는 나도 슬펐었다. 그는 여전히 나의 집에 있을지도 몰랐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여전히 나의 집을 지키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그래야 했다. 나는 전화수화기를 다시 들었다. 그러나 나는 전화를 걸지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수화기를 드는 순간 그의 슬픈 표정이 떠올라오고 도저히 경찰서에 신고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같이 저녁이나 먹자는 동료의 권유를 약속이 있다는 핑계로 물리치고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기 전에 나는 잠깐 마트를 들러 저녁 찬거리를 샀다. 저녁 찬거리를 사면서 나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게 여겨졌다. 나를 위해서라면 굳이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 마트에 들릴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도 이해가 안가는 나의 행동 때문에 피식 실없는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내가 집에 들어갔을 때 그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젼의 만화영화를 보면서 어린애처럼 웃고 있었다. 그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만화영화를 보며 어린애처럼 웃고 있는 그를 내버려두었다. 씽크대 앞으로 와 저녁 찬거리를 내려놓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의 행동을 놓고 볼 때, 나는 그를 나의 집에서 다시 보게 된 것에 대해 별로 불만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나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그에게 따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식사시간에 나는 그 문제를 걸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집의 주인이었고 그는 불청객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이 집을 나가달라는 나의 부탁을 듣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이 나의 정중한 부탁을 들어주기를 바랐어요. 정말이지 나로서는 정중한 부탁이었으니까요.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식사에 여념이 없었다.
    이제 경찰을 부를 수 밖에는 없어요. 당신에게는 나의 정중함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의 왕성한 식욕은 벌써 밥 한공기를 거의 다 비우고 있었다. 그가 나의 얘기를 듣는지 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나의 밥을 퍼서 그의 빈 밥공기에 옮겨주었다.
    당신이 나의 집 물건을 훔치지도 망가뜨리지도 건드리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오늘까지는 참겠어요. 하지만 내일은 분명히 이 집에서 나가야 해요. 아니, 그럴 필요가 없겠네요. 당신 마음대로 해요. 내가 경찰서에 신고를 할 테니까.
    그러나 나는 다음날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강제로 끌어내지 않는 한 그가 나의 집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가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와의 동거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그에게 아침밥과 저녁밥을 제공해주었고 나의 침대를 그가 쓰도록 해주었다. 나는 그와 동거하는 내내 거실 소파에서 잤다. 그는 벙어리였지만 의사소통에 불편은 없었다. 그의 표정은 연극배우처럼 풍부해서 나는 그의 표정을 통해서 그가 하고자 하는 의사표시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나의 말과 같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전달력이 있었다. 그가 슬픈 표정을 지으면 내가 울고 싶을 정도로 슬퍼졌고 그가 기쁜 표정을 지으면 나도 기뻤다. 그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실제로 내 몸에 심한 통증이 왔다. 내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을 때에도 그랬다. 그의 표정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별한 힘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가 오고부터 나는 나를 방문해주기를 바랐던 그를 더는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릴 틈이 없었다. 나는 그의 식사를 챙기고 그의 빨래를 하고 그의 뒤를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가 나에게 도움을 준 일은 없었다. 그는 내 대신 나의 침대를 썼고 저녁에는 늘 텔레비젼 만화영화를 보았고 저녁식사를 끝내고 해가 지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가 오고부터 나의 아침이 상큼하고 밝아졌다는 것 뿐이었다. 그는 움직임이 별로 없고 게을렀지만 아침 잠에서 깨어나는 시각 만큼은 나보다 빨랐다. 그는 늘 나보다 먼저 깨어 햇빛이 비치는 창가에 서서 내가 일어나기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나의 또 하나의 골칫거리였다. 나의 골칫거리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고, 나는 그 위에 또 한가지 골칫거리를 덧안은 셈이었다. 내가 그를 기다렸던 것은 그 골칫거리를 해결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나는 골칫거리를 떨쳐버리지도 못한 채 나를 찾아주기를 바랐던 그를 잊어가고 있었다. 산다는 게 그런 것 같았다. 벽돌을 쌓아올리듯 골칫거리는 쌓여갈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와 동거를 시작한 지 한달쯤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회식이 있어 회사에서 좀 늦게 돌아왔는데 그가 집안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고 있었다. 소파가 넘어져 있고 옷장속의 옷들이 파헤쳐져 있고 찬장 속의 그릇들, 경대 위의 화장품들 어느 것 하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없었다. 마치 도둑이 들어 온통 집안을 들쑤셔 놓은 것만 같았다. 사실 그 광경과 마주치는 순간에는 도둑이 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도둑이 아니라 그가 한 짓이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는 얌전하고 조용해서 집안의 물건 어느 것 하나 함부로 만지거나 옮겨놓은 적이 없었다. 내가 그에게 호감을 가진 이유였다. 만일 그가 다른 남자들처럼 자기 주장이 강하고 강압적이었다면 나는 결코 그를 나의 집에 들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가 나의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가 누워있는 침대 주위도 상황은 매일반이었다. 그가 누워 자고 있는 침대 주위의 어지러움을 보고서야 나는 이 난장판의 주인이 그라는 걸 감지했고, 그에게 화가 나고 말았다. 편지였다. 오래전 내가 어떤 남자를 사랑했을 때 그 남자와 주고받았던 편지들이었다. 그가 그 편지들을 꺼내어 읽고 있었던 것이다. 한통 한통, 겉봉에서 꺼내어져 알맹이가 펼쳐져 있는 걸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나의 은밀한 편지들을 보았다는 사실은 용납할 수 없었다. 옷장을 엉망을 만들어 놓았다거나 그릇들을 깨먹었다거나 소파들을 넘어뜨리거나 한 것은 넘어갈 수 있어도 내 편지를 훔쳐본 것 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냥 넘어가지지가 않았다. 나는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폭탄의 뇌관에 막 불이 붙은 듯한 상태였다. 그 편지들이 꺼내어 펼쳐져있는 걸 보는 순간 그랬다. 뇌관에 불이 붙은 폭탄은 급기야 요란한 굉음을 내며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를 깨웠다. 그의 자는 모습은 늘 그렇듯이 아주 평온해 깨우고 싶지 않지만 그 거리낌을 무릅쓰고 깨웠다. 그만큼 그에 대한 나의 분노가 컸다. 그가 느릿느릿 눈을 떴고 의아하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침대에서 끌어내고, 그리고 소리쳤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
    그의 표정으로 슬픈 빛이 번져갔다. 그의 표정을 바라보는 나도 슬퍼졌다. 그러나 나는 나를 감싸오르는 슬픔을 무시했고, 그를 외면했다.
    당장 나가란 말이야.
    그가 더욱 슬퍼진 표정으로 나가려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양팔로 그를 밀쳐내기 시작했다. 그를 쫓아내려는 나의 강렬한 분노를 그제사 알아차리는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뒤돌아섰고 문을 향해 걸아나갔다. 나는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그 대신 문을 열고 그를 집안에서 내쫓고 그리고 문을 걸어잠갔다. 그에게 잠겨진 이 문은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그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그를 내쫓고 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나의 가슴이, 허전했다.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침대 위에 쓰레기처럼 어지럽게 널려있는 편지부터 치웠다. 오래된 나무상자 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워 침대 메트 밑에 감추어놓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어떻게 이걸 찾아낼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 호흡이 거칠어졌다. 하긴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았으니 아무리 내밀한 곳에 숨겼다 하더라도 그의 눈에 안 띈다는 게 오히려 어려운 일일 수도 있었다. 편지를 치우면서 나는 울었다. 편지의 내용을 다시 읽지는 않았다. 읽을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편지의 토씨 하나하나까지 내 뇌리 속에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 사람과 함께 했던 날들이 생각나서였다. 그리고 그 소중한 추억을 그에게 들켜버렸다는 데에서 오는 분노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화가였다. 그 앞에 가난하다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화가였다. 나는 그를 좋아했고, 그와 결혼하기로 서약했다. 집안에서는 그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들은 그 사람을 가난한 백수로 밖에는 보려들지 않았다. 그 사람의 그림에 대한 열정 순수한 영혼 사물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 등등에 대해서는 거들떠도 보지않았다. 그들은 그런 건 사는 데 아무런 보탬이 안되는,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인 거라고 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사는 데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라고 여겼던 그 사람의 그 성향들을 나는 좋아하고 있었다. 사는 데 별 도움이 안되는 그 성향들이 나는 한 사람의 영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자질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사람에게는 내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없으면 그 사람은 살아갈 수 없었다. 그가 그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고, 나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세상의 어떤남자도 그 사람처럼 나를 필요로 하는 남자는 없었다. 다른 남자들은 나 없이도 잘 살지만 그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그 사람의 여자였다.
    그 사람은 편지쓰기를 좋아했다. 전화보다도 편지쓰기를 더 편해했다. 나는 전화를 걸면 그 사람은 내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보낸 것보다 서너배는 더 많은 편지를 그에게서 받았다. 이게 그 사람이 내게 써보낸 편지들이었다. 내가 밤마다 그에게 건 전화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가 밤마다 내게 써보낸 편지는 아직도 이렇게 남아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그와 결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안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내게 금족령이 내려졌고 음료수라도 사기 위해 구멍가게를 가려 해도 감시자가 따라붙었다. 전화도 마음대로 걸 수 없었고, 내게 오는 전화는 일일이 검열되어 받아도 되는 것과 받아선 안되는 것으로 분류되었다. 그 사람에게서 오는 편지가 한통 내게 전해지지 않았다. 나를 못만나는 게 나만큼이나 안타까운 그가 많은 편지를 내게 써보내었을 텐데도. 5월 10일. 그 사람과 나와의 결혼식 날이었다. 그날 나는 옷이 찢기는 수모를 당하면서 창문을 통해 담을 넘어 집을 빠져나왔다. 우리들의 결혼식을 위해 신부를 기다리고 있을 그 사람에게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지 못했다. 채 집앞 골목조차 빠져나가지를 못했다. 내가 없어졌다는 걸 알고 쫓아나온 아빠와 오빠에게 덜미가 잡혔던 것이었다.
    오지않는 신부를 기다리던 그 사람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온 그의 실망한 친구들과 함께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많은 술을 마셨던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술에 취했고, 술에 취하지않고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거였다. 새벽에 친구들과 헤어진 그 사람은 한 친구가 잡아준 노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충분한 잠을 못자고 나온 택시운전수가 그 새벽에 인사불성이 되다시피한 그 사람을 태운 채 잠깐 졸았던 모양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택시운전수가 핸들을 놓쳤고, 택시는 그 틈에 차선을 벗어나 길가로 올라 가로수를 스치고 지하철 오르는 계단을 들이받았다. 그 사고로 택시운전수는 말짱했던 반면 그 사람은 생명을 잃었다. 그 사람은 죽었는데 택시를 몬 운전수는 다친 구석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건 참 어처구니 없었다. 삶과 죽음의 엇갈림은 예측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내가 그때 결혼식장에 나갔다면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거였다. 그랬다면 그 사람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고, 나와 함께 신혼여행을 떠났을 거였다. 그 사람의 죽음에는 나의 책임이 있었다. 가장 큰 책임은 나의 집안 식구들이었다. 그 사람의 죽음을 기뻐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그런 집안식구들과 더는 함께 살 수가 없었다. 택시운전수에게는 별 책임이 없었다. 그는 직업상 우연히 그 사람의 죽음의 길에 동반자가 되었달 뿐이었다.
    나는 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었다. 가서 그 사람과 결혼식을 올리고 그 사람의 아내가 되어 그 사람의 죽음을 막고 싶었다. 내가 방문해주기를 바랐던 그는 나를 그때, 그 사람과 나와의 결혼식이 있던 날로 되돌아가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였다. 나는 13년동안이나 그런 능력을 지닌 그를 기다려왔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들은 나를 비웃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든 없든 그것은 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13년 전의 그 사람과 결혼하기로 한 그 날로 내가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남은 나의 인생도 불가능했고, 무의미했다. 나는 그를 기다릴 수 밖에는 없었다……
    집안을 정리하면서 마음도 가라앉았다. 그가 어질러놓은 집안 정리를 마쳤을 때 나는 화를 내며 그를 내쫓은 일에 대해 후회가 일었다. 적어도 그에게 그렇게까지 화를 낸 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그 편지들을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그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편지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가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데에 대해서는 충분히 용납했을 것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 혹시나 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멀리 가지 않았다면 그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오고 싶었다.
    그는 나의 집 원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이마를 파묻고 잠들어 있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가 멀리 가버렸다면 슬퍼하게 되었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를 깨웠다. 고개를 드는 그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에게 말했다. 다시는 내 편지를 훔쳐보지 말라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침대에서 자도록 했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소파를 가리켜보였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오늘은 그가 소파에서 자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누워보는 침대에서는 향긋한 내음이 났다. 아침마다 맡아져오는 그 맑은 집안공기와 같은 느낌의 내음이었다. 나는 기분이 밝아졌다. 나는 남자가 누워있던 자리라 침대에 앉기 전에 이불과 시트를 거두어 베란다에 나가 몇번 털기라도 하려고 했었다. 빠는 건 내일로 미룬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곧 알았다. 내가 우려하는 냄새같은 건 침대에 베어있지 않았다. 내 코를 상큼하게 하는 은은한, 향긋한 내음이 베어 있었을 뿐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간밤 술을 먹고 잠이 든 것처럼 머리가 띵하니 쑤셔왔다. 속도 좋지를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냉장고로 가 안의 오렌지쥬스를 꺼내어 한컵 따라 마셨지만 가라앉지 않았다. 이상하단 느낌이었다. 오늘 아침은 여느날과 좀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아니, 여느날과 똑같아졌다는 느낌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스가 찬 것처럼 속이 더부룩하고 머리가 띵하고 울적한 것, 내게 익숙한 아침이었다. 나는 원룸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보다 늘 먼저 일어나 햇빛 드는 창가에 서있던 그가, 보이지를 않았다. 나는 화장실로 가 화장실에 그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복도와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의 모습은 없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갔다. 언덕진 골목이 멀리 대로로 이어지고 있었다. 드문드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만 그는 없었다.
    잠시 후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와 계단을 올라 원룸으로 돌아왔다. 문을 닫으면서 나는 그가 가버렸다는 사실을 문득 깨우쳤다. 올 때 아무런 기약없이 온 것처럼 떠날 때도 아무런 기약없이 그는 떠나버렸던 것이다.
    회사에서 나는 내내 그를 생각했다. 그가 집에 돌아와있기를 바랐다. 내가 올린 기안 때문에 부장에게서 퉁박을 받았다. 부장의 입에서 또 시집 얘기가 나왔다. 인사과의 화인이라는 어린 여직원이 그녀의 동료에게 늙은 여우라고 내 욕을 하는 소리를 커피를 빼러 휴게실에 들렀다 들었다. 못들은 척 했다. 나는 하루종일 그만을 생각했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가면 그가 집에 들어와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마트를 들러 저녁 찬거리를 사왔다. 나를 위해서는 저녁 찬거리를 준비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필경 그를 위한 준비였다. 문의 자물쇠를 따면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그가 집안에 있을까, 만화영화를 보고 있는 그의 어린애같은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조금 설레었다.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침울한 집안공기가 나를 맞았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다.
    나는 아직 그를 잊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의 원룸은 벌써 그를 잊은 듯 했다. 그의 흔적이 없었다. 그가 나의 집에 왔다갔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늘 혼자 살아왔고 지난 한달동안도 혼자였다는 느낌 뿐이었다. 아침마다 느껴지던 상큼한 기분도 향긋한 내음도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것으로 보이는 머리카락 한올 털조각 한올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원룸은 내게 그가 이 곳에 왔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왔다갔다는 사실이 차츰차츰 의심스러워지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겨울이 성큼 다가들고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하여는 잊어가고 있었다. 그가 나의 집을 방문했었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게 되어가고 있었다.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는 내가 방문해주기를 바랐던 그가 아니었으므로 그가 나를 방문했었든 아니었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왔다. 동그란 원통형의 소포여서 나는 달력인 줄 알았다. 벌써 내년 달력이 나왔나 하면서 나는 그 소포를 뜯었었다. 달력이 아니었다. 동그랗게 말려진 그것은 한장의 유화였다. 진홍빛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있는 내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누가 나의 초상화를 그려 내게 보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편지가 동봉되어 있었다. 나는 편지를 뜯어보았다. 편지의 필체가 낯익었다.
    
    한달전에 프랑스에서 돌아왔어. 좀더 일찍 너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네 연락처를 찾을 수가 없었어. 며칠전에야 안 거야. 보고 싶다. 널 잊은 적이 없었어. 프랑스에서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네 그림을 그렸어. 이건 그 중의 하나야. 네 보기엔 어떤지 모르겠어. 나는 너를 모델로 그린 그림 중에 가장 잘 된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조만간에 널 찾아갈 거야. 이젠 너희 부모님도 나와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겠지. 이젠 나도 가난한 화가가 아니거든. 이 때를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몰라. 너도 기쁘지? 눈이 빠지게 기다렸겠지. 이 소포가 너한테 도착할 때쯤이면 바쁜 일들은 얼추 끝나가게 될 거야. 그럼 널 만나러 갈 수 있겠지. 정말이지 너와의 만남이 기대돼. 현우가.
    
    나는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편지의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현우는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 사람은 13년전 5월 10일 그와 나와의 결혼식날 교통사고로 죽었었다. 그런 그가 이런 편지를 보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처음 편지를 읽었을 때 나는 누군가 내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두번째로 편지를 읽었을 때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진짜 그 사람의 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편지의 필체가 그 사람의 필체였다. 나는 그 사람의 필체를 잘 알고 있었다. 누구도 그 사람의 필체와 이렇게 똑같이 흉내내기란 불가능한 일일 거였다. 나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세번째로 편지를 읽었을 때 나는 이건 틀림없는 그 사람의 편지라는 걸 확신했다. 죽은 사람이 이런 편지를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나는 확신했다. 네번째 편지를 읽었을 때 나는 이미 내 정신이 아니었다. 다섯번째 그 편지를 읽었을 때 나는 조만간에 그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는 사실을 조금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현우씨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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