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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시사쟁점/정치에 대한 환멸과 정글 법칙의 승인/이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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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승희
댓글 0건 조회 3,617회 작성일 02-06-23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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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쟁점
이승희
(성균관대, 광운대, 성공회대 강사)

정치에 대한 환멸과 정글 법칙의 승인


1.
지난 100여 년 동안 역사물이 특별히 부상하던 시기는 여러 차례 있었고, 그 의미는 장르와 시대라는 두 가지 변수에 의해서 각각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현재 역사물의 선풍은 단연 TV 드라마의 몫이다. KBS는 <용의 눈물>로부터 <왕과 비> <태조 왕건> <명성황후>를 내놓았고, MBC는 '드라마 왕국'의 자존심을 회복해준 <허준>으로부터 <홍국영> <상도>를 내놓았다. 여기에 뒤늦게 합류한 SBS의 <여인천하>는 <태조 왕건>과 근소한 차이로 경합을 벌이고 있다. 사극의 인기는 시청률이라는 수치를 통해서 이미 공증되었으며, 출연자들이 극중 캐릭터로 광고 모델에 기용되고 극중 대사가 인구에 회자되는 데서 실감된다. 앞으로 이 인기가 얼마만큼 지속될지 모르지만 현재 각 방송사들은 이후 후속작으로 사극을 계속해서 기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공이 불확실한 모험에 해당하는, 바꾸어 말하면 막대한 제작비만큼 이윤을 얻을 수 있을지가 매우 불투명한 사극이 1990년대 후반 이후로 이처럼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문화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사극이 공중파를 타고 방송되는 것이 비단 어제오늘이 아니건만, 요즘의 이런 현상은 확실히 유난스러운 데가 있다.
그런 만큼 사극에 대한 세간의 비평적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져 있다. 물론 그 관심은 대체로 호의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것에 모아져 있다. 이는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첫째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용감무쌍한 왜곡'에 대한 비판이며, 방송사간의 경쟁적인 제작과 선정성이 왜곡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극의 매력 뒤에 은폐되어 있는 지극히 보수적인 지배 이데올로기 재생산에 대한 비판이다. 시청자들이 현 정치적·경제적 현실과의 유비관계를 사극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발견하며 현실의 응어리를 배설하지만, 이를 따라가는 동안 그 내러티브가 마련한 지배 이데올로기의 그물에 포박되어 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 같은 비판은 분명 그 정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푸코가 언젠가 복고주의 영화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대중의 기억을 둘러싼 싸움'이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 현대 대중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기억을 전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당한 채, 소위 '대중문학', 싸구려 책들, 교과서, TV나 영화와 같은 보다 강력한 장치들에 의해 기억이 재편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재편성된 그 '기억'이 실질적으로 사극의 시청자들에게 현실에서 어떤 효과로 드러날지는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에 침묵해도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세한 내러티브를 기억하지는 못할지라도 선택과 배제, 왜곡으로 가공된 이미지는 오랫동안 시청자들의 머리 속에 각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비판이 현실적으로 무력하다는 데 있다. TV 드라마 역사 30여 년 동안 여론의 지탄을 받았던 드라마가 어디 한두 편이었던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며 부도덕한 내러티브를 비난하는 소리는 지금까지 내내 있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량품' 드라마는 건재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변주되어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아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은 사극의 전성시대라 좋을 만큼 하나의 뚜렷한 문화적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사극의 '용감무쌍한 왜곡'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청자들은 크게 불평하지 않고 가쉽거리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것 또한 현실이다.
언젠가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신의 영화에 대한 세계인의 사랑을, '우리 안에 있는 마음은 나이를 쉽게 먹지 않는다'라는 요지로 해석하여 답변한 것을 기억한다. 이 답변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물리적인 시간의 축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우리를 간혹 '유치함'에 젖어들게 하는 낯설면서도 너무나 친숙했던 그런 류의 체험을 상기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마음의 나이는 역사화할 수 없는 현재 진행형이며, 여기에 농축되어 있는 유아적 단계의 정서와 행동방식은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활성화된다.
아마도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를 상업적인 유용성으로 잘 포장해낸 것이 바로 대중예술일 것이다. 그것은 심각하고 진지하며 인간 역사의 비전에 대한 질문들 속에서 걸러진 찌꺼기를 모아 놓은 저장고이며, 인간들은 잠시 눈을 감고 일상적인 욕망 혹은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을 배설하기 위해 그 저장고를 방문한다. 자본주의 사회가 빚어내는 분비물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이 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할 것이기 때문에,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대중예술 혹은 대중문화라 불리는 그런 것들은 사실상 자본주의라는 인간역사의 한 단계가 필연적으로 만들어낸 별로 산뜻하지 못한 정화조(淨化槽)인 셈이다. 그 정화조에는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이 분해된 채 뒤엉켜 있으며, 이를 정화하기 위한 장치도 또한 존재한다.
TV 드라마 역시 이에 속한다. 특히 공중파를 통해서 안방으로 전달되는 TV 드라마는 저렴한 가격으로 누구나 소비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공공성이 유난히 강조된다. 일상성의 지속 그리고 사회의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대체로 이것은 지배적인 세간의 통념을 이용하여 '정화' 기능을 수행하며, 이를 공공의 윤리로 확정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여기에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소재의 드라마라면 금상첨화다. 아이에서부터 노인이 함께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아무래도 세계에 대한 단순하기 그지없는 명쾌한 인식일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어렸을 적부터 듣고 보고 읽고는 했던 동화 세계의 윤리, 즉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이다. 진부하며 유치하다고 받아들이는 류의 드라마에, 곧잘 무장해제를 하는 것도 그로부터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TV 드라마는 특정 매니아층을 형성시킬 수는 있어도 시청률을 결코 높일 수는 없다. 따라서 TV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으며 사극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현재 방송되고 있는 사극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식의 비판은 그 대상이 자본주의 사회의 이율배반적인 구조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는 데 도움이 될 뿐, 그 이상을 넘지 못하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의 무력감을 비판의 수용자가 지닌 무책임성 혹은 도덕적 자질의 결여로 환원시킨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오히려, 그런 당위적인 요구로는 TV 드라마의 '도덕성'을 결코 획득할 수 없으리라는 현실논리를 상기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공허한 계몽조의 도덕성은 그것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의 복잡한 중심을 결코 관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자본주의 사회에서 TV라는 매체적 속성의 필연적 귀결로, 불가항력적인 대세로 승인해버릴 수도 없는 일이다. 가령 <태조 왕건>을 영웅호걸 드라마의 재판으로'만', <여인천하>를 여전히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멜로드라마의 반복으로'만' 결론 내린다면, 그것은 그 대상들이 품고 있는 한줌의 진실과 대화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대체로 현 한국사회의 정체성을 역사와 전망의 계기를 변증법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고착된 것으로 파악하는 인식, 그리고 이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드는 것은 제반 물적 조건에 비해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담론이 거대하게 부풀려진, 사회의 전반적인 폭식증과 관련되어 있다. 그렇기에 비판은 가능하되, 그 비판은 전혀 생산적이지 못하다.
확실히 이 시대는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테리 이글턴이 말하듯이, 이 시대는 '공허한 보편주의'와 '근시안적 특수주의' 사이에 갇혀 있다. 근대적인 도덕주의와 후기근대적인 탈중심화의 급진적인 시각이 적어도 우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꿈꾸는가를 일깨워 줄 수는 있지만, 그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 실현을 지연시킬 수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다시 시청률을 다시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시청률은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사회의 가치 동요 및 변화와 민첩하게 협상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사극의 상업적 유행은, 높은 시청률로 막대한 제작비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광고가 쇄도해오길 바라는 방송국과 이를 개인적으로 소비하는 시청자간의 '공모'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공적인 공모의 결과, 즉 '대박'이 터지는 경우는 사실상 그리 쉽지 않다. 그것도 이번의 사극처럼 하나의 군(群)이 동시에 혹은 연타를 치는 경우는 더더욱 쉽거나 흔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 문제적이다. 그리고 이 현상의 중요성은 일차적으로―그람시의 표현을 빌자면―'시대의 철학' 즉 '침묵하는' 다수 사이에서 어떠한 정서와 세계관이 우세한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는 점에 있다.

2.
모든 역사물이 마찬가지겠지만 사극은 기본적으로 모순의 형식을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장르이다. 사극이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그리고 역사적 사실과 미적 자율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만 하는 긴장과 갈등의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적 재료와 환경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원천이기는 하지만 현재의 요청으로 불려나와 가공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사극의 운명이다. 실제 인물 혹은 사건은 사실상 현 시청자들의 갈증을 풀어주는 원자재로서의 의미가 크고, 그 정도가 클수록 '원자재'와 '상품'의 간격은 더욱 벌어지기 마련이다. 사극의 이러한 시대착오적인 면모가 과거 역사를 '제대로' 복원시키지 못한다는 비난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사실상 그런 점이 시청자들을 TV 앞에 묶어두는 요인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극은 역사에 대한 재해석은 물론, 뚫려 있는 빈틈을 현대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게 과감히 재구성할 수 있는 권리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 과정에서 사극은 드라마를 성공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포석을 깔아두고 시청자들이 흥미요인들을 찾을 수 있도록 드라마 전략을 세운다. 몇 년 전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허준>의 경우, 한편으로는 사극으로서는 파격적인 뉴에이지 풍의 음악과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 한방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는 자상한 정보의 제공, 결코 위험수위를 넘지 않는 삼각관계, 조연들의 눈부신 활약 등이 한몫을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허준이 온갖 어려움과 장애 속에서 뛰어난 의술과 고결한 정신으로 자신을 헌신하는 신화로부터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지금 방송되고 있는 사극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상도>의 경우 주인공이 한의에서 상인으로 바뀌었을 뿐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기본 전략은 <허준>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여인천하>는 현대감각을 살린 사극이라는 포맷에 매력적인 요녀의 흡인력, 야사의 재미와 정통사극의 스케일과 가치의 조화, 낭만적인 사랑 그리고 정치 드라마라는 다초점을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요인들의 배치 전략이 사극의 선풍적인 유행의 핵심 요인 자체는 될 수 없다. 드라마 전략상 배치되어 있는 제반 요소들이 어느 정도 진화한 측면이 있다 할지라도, 이런 점들은 사극이 지닌 이점을 십분 활용한 TV 드라마의 내재적 속성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극의 상업적 유행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사극이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문화상품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공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에서 시사받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극은 일일연속극이나 트랜디 드라마와 같은 현대물이 별로 다룰 수 없는 공적인 영역의 주제를 다루는 것이 보통이었다. 현대물이 공적인 주제를 다루기 어렵거니와 가까운 과거를 다루는 경우조차 '검열'이나 유관 집단의 시비로 중도하자 하기 십상인 반면, 사극은 '과거'라는 안전장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용이한 편이다. 따라서 사극이 상업적 유행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오락으로 소비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곧 공적인 주제를 다루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의 정치적인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사극이 TV 드라마인 만큼 그리고 과거시대를 다루고 있는 만큼 현재의 쟁점들은 그리 예각화되지 못하며, 문제의 수준은 결코 통념적인 수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리하여 사극에는 현 사회에 만연해 있는 공적인 문제들에 대한 공감대가 극히 일반적인 이야기 포맷으로 반영되며, 그 잠복되어 있던 문제가 '우연적으로' 순간 적극 활성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가령 <허준>이 방송될 당시 때마침 사회는 의약분업 분쟁으로 술렁거리고 있었고, 이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시청자들에게 고결하고 의로운 인물을 흠모하도록 만든 이 드라마의 휴머니즘이 적중했던 것이다. 이때 <허준>과 의약분업 분쟁의 교차는 전적으로 우연적이었다. 이는 <태조 왕건>이나 <여인천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태조 왕건>이 현 정권의 대북한 '햇볕정책'을 모르진 않았겠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정상회담과 같은 일대 사건과 마주치리라는 것은 예감하지 못했을 것이며, <여인천하>의 치부책 에피소드 역시 연이어 터진 '××× 게이트'들과는 무관하게 사전에 기획 집필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시청률 1, 2위를 다투고 있는 <태조 왕건>과 <여인천하>에 나타난 시청자들의 공적인 관심사는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 것일까. 우선, <태조 왕건>은 사극의 단골시대를 벗어나 후삼국과 고려라는 보다 낯선 시공간으로 수직 이동함으로써, 그리고 <여인천하>는 정치 1번지의 주체를 남성에서 여성으로 수평 이동함으로써, 각각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면서도 권력획득과 정치라는 그리 낯설지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태조 왕건>이 작중 시대 배경을 후삼국과 고려를 택한 데에는 <용의 눈물> <왕과 비>와의 차별성을 염두에 둔 KBS의 고심이기도 했겠지만, 그 효과는 보다 정치적이고 고차원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었음에 틀림없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바와 같이 그것은 바로 통일을 실현한 탁월한 정치적 능력과 인간의 품격을 지닌 왕건의 드라마가 현실 한국정치에서 '통일'이라는 화두를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의 말세적 징후는 영웅 호걸들을 호출하였고, 마침내 왕건이라는 영웅에 의해 통일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현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환멸을 상쇄해줄 만한 '위대한 개인'의 출현을 기대하는 동시에, 마침 현 정권의 활성화된 통일정책의 상승 무드에 대한 낭만적 기대를 걸고 있었던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 제목이 암시하듯이 통일을 실현한 승자 왕건에게 손을 들어주기로 작정한 것이었던 데다가, 이를 위한 내러티브 전략은 왕건이라는 인물 그리고 그의 통일업적을 부각시키기 위해 가동되었기 때문이다. 첫 주 방송분부터 이 드라마는 그 점을 명확히 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통일신라의 고승 도선대사의 예언 덕분인데, 대단한 법력을 지닌 그가 아직 소년에 지나지 않는 왕건이 앞으로 난세를 평정하고 통일을 이룩하는 '신의 아들'임을 예언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다분히 설화적인 방식의 예언은 소년기의 아역배우와 청년기의 최수종이 분한 왕건이 카리스마가 강한 김영철 분의 궁예에 상대적으로 밀리는 이후 과정에서도 그 힘을 보존한다. 그러면서 점차로 왕건과 궁예의 역학관계는 전도되는데, 이는 도선대사의 예언이 그들의 정치적 능력과 도덕적 자질의 문제로 구체화되면서부터이다. 왕건은 난세를 평정하고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뛰어난 지도자로서의 품성을 지닌 인물로 그려지는 반면, 궁예는 점점 광기에 사로잡혀 지도자로서의 도덕성을 상실한 인물로 그려지고, 궁예가 죽고 난 이후에는 이제, '가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 자멸해가는 견훤과 대조를 이루면서 왕건의 지도자로서의 품격은 계속해서 유지 강화된다. 나중에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 왕건의 통일전선에 합류하여 그 전위에 서서 자신의 장자 신검과 맞서는 것은 왕건의 통일정책에 그 정당성을 드높이는 드라마적 전략인 것이다.
이처럼 드라마는 왕건 역에 카리스마가 강한 배우를 기용하는 대신, 왕건에 의한 후삼국 통일과 고려 건국이라는 역사적 결과를 하늘에 의해 이미 운명지어졌다는 건국신화로 둔갑시켜 그 발판을 마련한 다음, 왕건 경쟁자들의 도덕성을 절하하면서 왕건을 평범하지만 위대한 존재로서의 품격으로 미화하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죽어야만 했던 존재들은 나라를 지키고 통일을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역사의 필연적인 비극성으로 이해되며, 이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자못 비장감까지 느낄 법하다. 이 드라마에서 통일은 훼손될 수 없는 절대적인 대의명분인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2001년을 지나오면서 확실히 <태조 왕건>의 기세는 한풀 꺾였다. 방송 시간대에 이와 경쟁할 만한 드라마가 없거니와 그 동안 이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의 관성적인 충성심이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장안의 화제는 지난 해 봄부터 시작한 <여인천하>에게로 넘어갔다. 여기에는 현 정권의 통일정책이 난항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달아 터지는 ××× 게이트 사건들이 이 드라마를 추동하던 현실감을 약화하는 데 일조하였다.
정난정 역에 강수연이 캐스팅되었다는 것이 관심을 모으기는 했으나, 방송 초기에 이 드라마에 대한 반응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여인천하'라는 드라마 제목은 상반된 선입견과 기대를 갖게 했는데, 궁중 여인네들의 암투를 그린 지극히 통속적인 드라마일 것이라 생각되면서도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사극에의 기대를 품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과 기대는 사실상 <여인천하>에 대한 반신반의를 드러내는 같은 뿌리로부터 나온 것이다. 방송 처음 몇 주 동안 <여인천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시청자들에게 즉각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잦은 클로즈업 신이 낯설고 부담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출연진들의 중량은 <태조 왕건>과 현격하게 비교되었다. 더욱이 남성 캐릭터들의 경박스러움은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러나 정난정 성인 역에 강수연이 투입되고 전인화가 중전으로 간택되어 궁중에 들어가면서부터 드라마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경빈 박씨와 능금이를 비롯하여 엄상궁과 금이에 이르기까지 '여인들'의 개성적인 캐릭터가 구축되면서 그야말로 <여인천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그런데 이런 인기와는 상관없이 <여인천하>의 가장 논쟁적인 지점은 아마도 성 역할의 전도와 인물들에 대한 기존 통념의 전도에 있을 것이다. 봉건사회의 신분제와 가부장제가 견고한 조선시대에서 여성들을 정치 현장 한복판으로 불러내어 남성을 능가하는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게 하고, 복장도착을 한 여성들을 시정의 상업계를 주름잡는 상인으로 설정하는 등, 무모하다 싶을 만큼의 과감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유명한 '악녀'로 소문난 정난정과 문정왕후에게 호의적인 매력과 카리스마를 부여하였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두 가지를 전도시킴으로써 기존 사극과의 변별성을 극대화하고, 이 때문에 주목을 끄는 동시에 비판도 함께 받았다. 비판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이런 전도의 궁극적인 효과는 전혀 무용하며 여성이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을 주입시킬 따름이다. 그러나 이는 가치와 효용성의 문제를 '과정'을 생략한 결과의 문제로만 파악하는 것이며, 암암리에 시청자들을 <여인천하>가 제공한 환상에 고착되어버린 바보로 간주함으로써 이 드라마의 사회적 의미의 다른 가능성을 봉쇄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인천하>를 가동하는 전도의 근거는 당연히 가부장제와 계급억압을 바라보는 현재적 관점에 있다. 첫 회 방송된 프롤로그에서 정난정의 낮지만 격렬한 분노와 절규는 <태조 왕건>이 그랬던 것처럼 이 드라마의 향방을 가늠케 하는 하나의 가정법을 제시한다. 만일 정난정이라는 천출 소생의 여성이 봉건사회의 신분제와 가부장제를 당연한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더욱이 그녀가 뛰어난 미모와 영민한 머리를 지녔다면, 조선시대의 견고한 제도 내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라는 가정법. 사극이 작중 시공간의 모랄과 현재의 모랄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을 내포하기 마련이지만, <여인천하>는 이러한 가정법으로 그것을 더욱 극한으로 밀어붙인다. TV 드라마로부터 골치 아픈 질문을 기대하지 않지만 이런 게임을 지켜볼 용의는 가지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이 드라마는 전도와 가정법으로 곧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게임을 제공한다. 이 게임은 장애물을 무사히 통과하는 반복된 플롯으로 진행되면서 사건에 대한 흥미를 촉발시킨다.
이 과정에서 정난정이 보여주는 다면성이나 문정왕후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과 비정한 술수는, 이중적으로 억압된 지위를 부정하고 살아남기 위해 그녀 스스로가 내린 '운명적'인 처방이다. 문정왕후 역시 중종반정으로 세워진 정권의 허약성을 공략하고 세도를 잡은 후궁들 틈새에서, 자신의 생존과 권력 획득을 위해 우아한 자태로 노심초사한다. 경빈 박씨는 한미한 집안의 출신으로 태어나 반정 공신의 양녀로서 후궁의 지위에 오르고 자신의 아들을 보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동원한다. 그녀들에게 중요한 것은 서바이벌게임에서 살아남는 것이지,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는 '아들' 생산이다. 이 드라마의 여인들은 아들 생산을 간절하게 바란다. 그것이 그녀들을 지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가정법에 의해 호출되었으나 그녀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덜미이다. 단, 조건은 있다. 신분이 양반이어야 한다는 사실! 정난정은 자신의 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잉태한 태아를 지우려 했고, 장대인과 능금이는 복장도착을 선택했던 것이다. 결국 이 드라마는 현금에도 존속하고 있는 성적 억압과 계급 억압이라는 두 가지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정치권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적극 참여라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투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았을 때 두 드라마는 그 접근방식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일지라도 근본적으로는 정치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태조 왕건>이 현실 정치와 관계하면서 역사적 상상력으로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한다면, <여인천하>는 현재 여성들의 조건과 정서와 관계하면서 전도된 방식으로 공적 영역 중심부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관심의 향방이 과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점이다. 그것은 두 드라마가 묘사하고 있는 세계가 공통적으로 정글의 법칙이 준수되는 세계라는 점에 있다. 표면상 그 대의명분은 주어지지만, 정글의 법칙은 <태조 왕건>에서는 좀더 은폐적으로, <여인천하>에서는 좀더 노골적으로 다루어진다는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는 동일하게 드러난다. 모든 허울을 벗어내고 무엇을 위한 권력획득이며 정치인가라고 물었을 때 사실상 그 대답은 이익집단의 생존이라는 한 가지뿐이다. 현실 정치에 대한 환멸과 냉담 속에서 이 사극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일종의 은유인 셈이다. 이것이 곧 세상의 질서요, 가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작중 인물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상징적인 처벌을 통해서 서사를 종결할지라도, 이 사극들에 내재되어 있는 세계관 혹은 가치관은 정글의 질서를 승인하는 테두리 내에 있다.

3.
이런 양상은 1980년대 후반 무렵부터 진행되어온 한국사회의 흐름과 관련지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억압적이었던 정치권력이 1987년을 기점으로 하여 하나의 매듭을 짓고 한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듯했지만, 정권 교체 실패에 이은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세계의 자본주의 전일화 양상은 1990년대 한국사회를 돌연 세계화 신드롬에 발맞추어 선진 자본주의 '따라잡기'라는 푯대를 향해 돌진하도록 만들었다. 이 역사적 과정은 식민지를 경험한 제3세계 국가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한데, 그네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한 근대성의 후발성이 때이른 후기근대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억압의 정도에 비례한 반사작용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이 경험이 전연 무용한 것은 아니었다.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과정상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과거를 반성할 수 있는 소중한 역사적 계기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과거에 대한 반성이 부질없는 회의로 떨어지고, 때이른 후기근대성에 무장해제 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외관상 1990년대 이전까지는 경험해보지 못한 신천지의 눈부심과 모든 가능성의 잠재력이 제공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한국사회가 청산하고 해결해야 하는 과제들은 누적되어만 갔다. 그리고 정권교체를 이룬 현 정권에 대한 일말의 기대조차 IMF와 '옷 로비 의혹 사건'으로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로 완전히 꺾이었으며, 그러한 불신감은 급기야 '그놈이 그놈이다'라는 지극히 회의적인 정치의식을 재확인케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극의 상업적 유행은 서로 뒤엉켜 있는 두 가지를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시청자들의 현실 정치에 대한 차가운 비판이며, 다른 하나는 그 비판이 정글의 법칙을 승인하는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두 편의 사극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정글의 법칙이란, 근대이래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역사적 체험의 날인인 셈이자,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위협적인 흐름에 대한 굴복으로 비추어지는 바 있다.
이는 연극계나 영화계에서도 감지되는 바다. 연극계는 마당극, 민족극 운동의 쇠진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문화 상호주의라는 '수상쩍은' 연극에 매료되어 가고 있는 중이며, 영화계는 자국영화 객석 점유율 50% 육박이라는 신화적인 수치 아래 '조폭 영화'에 몰두하고 있다. 문화적 변동을 지시하는 정도를 감안할 때, 영화계의 이런 현상은 주목을 끄는 바 있다.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었던 과거의 '조폭'은, 힘으로 판가름 나는 주먹세계에 '조직'과 '의리'라는 집단적 무목적성을 미화하는 낭만적 페이소스를 부여하거나 이를 코믹버전으로 바꿈으로써 화려한 변신을 하였다. 이 변신의 의미는 한국영화의 다양성, 오락성의 개화시대를 알리는 지표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이는 정글의 법칙을 '실감'하는 관객들이 스크린 상에서나마 그 긴장을 이완시키길 원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의리라는 '덕목'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웃음'으로.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정글의 법칙이라는 '실감'은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절대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진리는 정글의 법칙이 강요되는 야만적인 사회의 물적 토대를 바꾸어 가기 위한 변증법적인 역사의식과 실천 속에서만 얻어질 수 있다. 물론 정글의 법칙을 혐오하는 심정도 그 만큼 비례한다는 것을 사극 자신이 보여주기도 한다. <허준>이 그랬고 <상도> 역시 그러하다. 이 사극들은 진흙탕과 같은 세상 논리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연꽃처럼 우리가 소망하는 '인간의 도(道)'를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상도>가 현재 <여인천하>와 같은 방송시간대에 편성되어 있어 <허준>이 누린 영화를 재현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장사는 돈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는 '상도'를 일생의 철학으로 삼은 임상옥이라는 인물은 분명 감동적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정글의 법칙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불행하게도 그렇게 대답할 자신이 없다. <허준>과 <상도>는 마치 정글의 법칙에서 느낀 열패감을 달래주는 향수와도 같다. '위대한 개인'은 아름답지만 그것으로 세상은 바뀌어지지 않는다. 마치 <여인천하>의 파릉군을 향한 정난정의 경고와 마찬가지로!
사극의 열풍을 탐색해본 이 글 역시 딜레마에 빠져 있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이 글은 TV 드라마 혹은 사극에 대한 '바람직한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도를 애당초 품지는 않았다. 다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본인 스스로도 흥미롭게 지켜본 사극에서 한 발을 내어놓고 이를 지켜보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현 한국사회의 시청자들 다수가 사랑하는 사극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 결과 이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정글의 법칙을 승인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한줌의 진실, 즉 정글의 법칙을 체감할 수밖에 없는 사회의 보수적이고 견고한 힘을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 동요하고 있는 가치와 물적 토대의 변동을 역사의 추동력으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일 것이다. 정글의 법칙을 사유의 원칙으로 삼는 한, 우리에게 내일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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