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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초점/세계의 겨울, 시의 표정/김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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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김창수
(문학평론가. 고려대 강사)
세계의 겨울, 시의 표정
언어와 세계
시인은 언어와 존재와 사이에 위치한다. 감각과 의식의 결정물인 언어는 근본적으로는 의식의 범주에 속하고, 시적 언어는 표상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니는 관념이기에 여타의 언어와는 구별된다. 시인은 세계에 대한 자신의 감각과 인식을 언어를 통해 시적 이미지 속에 물질처럼 응축시켜야 하기 때문에 언어는 시적 장르의 본질을 이룬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언술은 시에서 더욱 유효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언어가 없으면 존재도 없다는 언어주의로 이해한다면 결국 언어도 죽음을 맞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실제로 언어는 존재의 아늑한 거처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핍박하고 제한하는 감옥이 되는 사례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와 존재 사이에서 작업하는 시인의 고투는 흡사 날카로운 작두 날 위에서 춤추는 만신의 모습과 혹사하다. 이때 무당은 자신의 몸/언어/주체도 작두/존재/객체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만신의 의식은 접신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육체의 무게는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만신은 작두 날도 자신의 몸도 다치지 않고 춤출 수 있으며 마침내 해원의 목적을 달성한다.
지금 시인들이 딛고 서야할 작두 날은 한층 날카롭다. 2002년이 열리는 겨울, 그 야단스럽던 밀레니엄의 수사들은 어느 겨를에 사라지고 세계의 구석구석을 신자유주의의 세찬 광풍이 훑어지나가고 있다. 대결과 경쟁 그리고 전쟁은 차츰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삶의 영토를 거칠게 짓밟고 의식의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9.11 사건으로 촉발된 세계전쟁은 이제 한반도로 방향을 틀고 있다. 이로 인해 6.15 남북 정상회담과 각종 남북 교류 사업으로 열리는 듯 하던 남북화해시대는 급격히 냉각되고 새로운 긴장이 조성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불모지대와 헐벗은 민중들에게 퍼부어 지던 폭격이 멎자 그것이 한반도에서 재현되지 않기를 바라며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정세는 참으로 비시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인류가 이룩했다고 자부해온 근대 문명의 정체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묵시록과 변증법- 김승종과 최정례
2001년이야말로 세계의 겨울이 본격화하는 해임을 제보하는 한편의 우울한 참요(讖謠)가 있다. 김승종의 시 [태극]({리토피아}2001 겨울호)이 거기에 해당한다. 미디어 속에서 펼쳐지는 워게임(war game)의 이미지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최근의 사태를 음양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검고 광대한 우주 틈으로
명멸하는 푸르고 붉은 빛//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여윈 새 날아 들고//
아프가니스탄 흙벽돌집 마을에
오색 풍선 내려 앉는다//
명멸하는 푸르고 붉은 빛 사이로
검고 광대한 우주//
안도 밖도 없는
무극의 폭발 -김승종, [太極]
여기에서 '우주'를 무한히 확장시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우주는 지구까지가 고작이니까. 물론 우주는 단수일 수가 없다. 우주는 다른 우주와 공존하거나 더 큰 우주에 의해 감싸여 있다. 지구 안에 존재하는 세계들, 그리고 그런 것들을 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이다. '푸르고 붉은 빛'은 '검고 광대한' 현존의 세계를 파열시키며 묵시록적 비젼을 제시한다. 광대한 세계의 기호는 제국주의의 심장인 세계무역센터이고, 또 다른 세계는 '여윈 새'로 표상된 이슬람이다. 반대로 여윈 새의 둥지인 흙벽돌집에 무겁게 '내려앉는 오색풍선'은 희망이나 꿈과는 무관한 죽음의 풍선이다. 잔인한 보복의 폭탄세례를 오색풍선이라고 한 것은 초강대국 미국이 세계 최빈국 아프가니스탄을 상대로 벌이는 전쟁을 스스로 '무한정의'(infinite justice)라고 명명한 것만큼이나 아이러니이다. 그런데 '여윈 새'는 어디로부터 날아 온 것인가. 그것은 공포의 백색가루가 미국내에서 제조된 것과 마찬가지로 미국발 미국행 비행기가 아니었던가? 테러범들이 모두 이슬람근본주의 단체인 알카에다 조직원이라고 해도, 오사마 빈 라덴의 전사라고 해도 사태는 달라지지 않는다. 현재의 이슬람은 미국중심의 서방세계가 만들어낸 적(혹은 타자)이며, 빈 라덴역시 냉전시대 미국 외교정책과 CIA가 수행한 공작이 낳은 인물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마치 언어의 바깥에서 현실의 내부로 날아든 것처럼 충격적인 9.11 사건은 내부로부터의 침공이 분명하다. 자기 동일성을 위해 추방한 또 다른 자아의 모습인 동시에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들씌워진 악령이기도 하다. 미국의 비극은 파괴된 세계무역센터와 펜타곤도, 수천의 희생자가 아니라, '내부'를 외면하고 한사코 '사악한 이슬람인'의 이미지를 만들어 모든 원인을 외부로 돌리며 난폭한 국가주의로 재무장하고 있다는 점일 게다. 이 시에서 '안도 밖도 없는 무극의 폭발'이라는 표현은 그런 점에서 거듭 음미할만한 표현이다.
최정례의 [폭탄에 숨다]({창비}2001.겨울호)에서 자살 공격의 의미를 동심원적으로 확장하거나 심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붕괴된 건물이 아니라 건물로 표상된 문명과 그문명의 기반인 것이다. 이번 사태는 어쩌면 서구가 주도해온 근대 드라이브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이와 관련하여 존 업다이크(J. Updike)처럼 이를 '우울한 21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
네가 나를 버렸듯이
나도 너를 버릴거야
폭탄을 안고 숨어들어
솟구치며 날아 갈 거야
나의 뼈 너의 피를 안고
네 마천루를 관통할 거야
저것봐
바다는 끓어 증발하고 벽들은 녹아 내리지
지구가 태양에서 놓여난 듯 내동댕이쳐지고
불길은 하늘의 반을 가리지
이 작품에서 자살공격의 경고는 삶의 내면을 향해 울려 퍼지고 있다. 작품내의 '너와 나'는 동양과 서양, 자연과 인간간의 대결을 포함한 일체의 타자화된 존재와 동일시된 자아간의 대결처럼 읽힌다. 특히 수직으로 솟아 있는 마천루를 수평비행으로 관통하는 이미지는 남근주의에 대한 공격을 암시이고, '네가 날 버렸듯이'라는 시구는 버림받은 타자의 보복으로 이해해도 될 것이다. 이제 생각이 다른 존재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세계는 붕괴의 아수라(阿修羅)가 될지 모른다. 근대 문명의 가장 커다란 죄악은 너무 많은 타자(혹은 적)을 생산하였다는 것이다. 교실에서, 가족 내부에서 혹은 국가 내부나 생태학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사태들은 붕괴나 해체라는 현상적 특징뿐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생성시키는 요소들간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이번 사건이 거의 동일한 동역학을 보이고 있다. 작품 속의 화자(타자의 대변인) '나'는 '바다가 증발하고 벽이 녹아 내리는' 가공할 풍경을 상기시키며 주체인 '너'의 결단을 강요하고 있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음산한 목소리로 선악을 갈라내거나 '너'와 '나' 사이에 심연을 파는 행위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오히려 '너와 나' 사이의 무수한 장애를 걷어 내고 건너지르는 지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연못 떨어진 배롱꽃, 길 위의 눈송이- 김해자와 박영근
김해자는 꽃 속에서 뿌리와 가지와 잎을 보고 새삼스럽게 생명과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명옥헌에서 김주리를 보다]({황해문화}2001.겨울호)라는 작품은 노동 현장에서 죽어간 옛 동료의 넋을 회상한다. [명옥헌..}은 그런 의미에서 월명사의 [찬기파랑가]에 닿아 있다. 천년의 시공을 넘어서도 아름다운 이의 넋을 회상하는 정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만큼 망자에 대한 그리움은 보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동양의 찬(讚), 서양의 찬시(讚詩 hymn) 송시(訟詩 ode)와 같은 갈래는 대부분 망자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하고 있다. 대상이 되는 사람은 물론 기릴만한 넋을 가져야 한다. 생전에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은 육신의 죽음으로 훼손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후에 더욱 휘황한 빛을 발하게 된다. 기파랑(耆婆郞)이 눈서리에 시들지 않는 푸른 잣나무의 기상을 가진 화랑이라면, 김주리는 '떨어져 더 붉은' 노동자의 넋이다.
배롱꽃 배시시 웃다가/ 목을 간지르는 비에 젖어 떨어졌네
젖어 더 붉은 꽃 잎 못물에 투신했네
겨울이 가기 무섭게/ 성마른 봄꽃 뻗쳐 오를 때/ 암수술 꽉채워 파랗게 굴리며 소리도 없더니/ 꽃이란 꽃 한꺼번에 타올라 우두둑 지고 없는 한여름/ 톡, 톡 꽃잎 터뜨리더니
먼저 떨어져 갔네 구호 한마디 없이/ 저마다 한 잎 뿐인 생의 주사위/ 연못에 던져졌네/
떨어져 더 붉었네
왜 배롱꽃인가? 우선 여름꽃이라는 것이다. 성마른 봄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오를 때, 배롱꽃은 묵묵히 지내다가 모든 꽃이 다 져버린 여름날 피어난다. 그것은 세한 연후에 더욱 푸르른 송백(松柏)의 지조와 같다. 배롱꽃에 얽힌 비극적 전설도 변함 없는 사랑이다. 수줍음과 순수한 꽃이되 뜨거운 사랑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꽃은 망자의 넋이자 노동자의 표상이며 어쩌면 화자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박영근은 최근 그의 시에서 길 어귀에서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눈송이들을 자주 떠올리고 있다. 눈송이는 겨울의 꽃이다. 꽝꽝 얼어붙는 날 밤이어야 눈송이는 눈부시게 '살아' 있을 수 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나는 별과 마찬가지이다. 골목 어귀에서 서성거리고 박영근의 눈송이들은 IMF이후 길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의 신산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삶글} (2001 겨울호)에 실린 그의 시 [봄]은 그의 마음이 온통 겨울에, 그리고 골목길 위에 있음을 알려준다. 길 위에 선 사람은 결코 자유롭지 않다. 끊임없이 출구를 모색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마치 광야가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아무데도 갈 수 없는 닫힌 공간이기도 하듯이.
하나, 둘 흩날리는 눈송이였다
뒷골목에 몰려 쌓여가는 눈더미였다
흙먼지와 그을음 쓰레기를 쓰고
한밤중 온통 얼어가는 얼음덩어리였다
어떤 뜨거운 말들이 치웠는지 나는 모른다
맨땅에 선연한 침묵의 빛을 본다 -[봄]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이미지들 역시 강화된다. 흩날리는 눈송이는 눈더미로, 마침내 흙먼지와 그을음을 쓴 얼음덩어리로 응고된다. 흩날리는 눈은 단독자에서 집단으로 조직되고 단단하게 결집한다. 그러나 이러한 눈의 운동은 '-였다'라는 종결어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과거의 일일 뿐 지금은 중단되어 있다. 눈송이가 굴러다니던 곳이 이제 '맨땅'이며 거기에는 오직 침묵만 흐르고 있다. 그의 눈송이에 생명과 운동성을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는 눈송이들이 '온통 얼어가는 얼음 덩어리'로 화할 수 있는 계절을 오히려 그리워하는 것일까? 이쯤이면 왜 그가 일상적인 촉각을 뒤집어 표현하고 있는지 알 게 된다. 봄은 소생의 계절이 아니라 오히려 견고한 생명체들을 일순간에 녹여내는 파괴자일 뿐이다.
하강하는 산줄기과 폭포의 의미- 이성부와 김진경
이성부는 제4시집 {야간산행}이래 산이나 바위, 계곡과 능선을 몸으로 껴안고 있다. 산을 세계와 삶의 축도로 보기 때문이며, 산으로부터 세상살이의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것이리라. {시와 시학} (2001,겨울호)에 실린 [저를 낮추며 가는 산]은 겸허한 인간의 모습을 산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산줄기가 저 건너 북쪽 산줄기보다
나지막하게 내려간다
허리 굽히고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봉오리 하나를 일군 다음
자꾸 저를 낮추며 간다.
그러다가 또 못봉을 일으켜 세우더니
무엇에 취한 듯 드러눕는 듯
금세 몸을 낮추어 부드럽게 이어간다
머지많아 이 산줄기 크높은 산을 만들어
더 나를 담흘리게 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아 이런 산줄기가 크게 될 사람의 젊은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하나 배운다
저를 낮추며 가는 길이 길면 길수록
솟구치는 힘 많이 쌓여진다는 것을
먼발치로 보며
새삼 나도 고개 끄덕이며 간다
-[저를 낮추며 가는 산]
어느 산이건 비슷하겠지만 특히 지괴가 큰 산의 꼭대기에 올라보면 산줄기의 반복되는 오르내림 혹은 꿈틀거림이 눈에 잡힌다. 까마득히 치솟아 오른 줄기는 반드시 천길 낭떠러지를 끼고 있거나 긴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오르막은 실상 내리막이며 내리막이 곧 오르막임을 깨닫게 된다. 내리막이라 하여 또 오르막이라 하여 안도하거나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작품에 나타나 있듯이 '저를 낮추며' 가는 산줄기는 '머지 않아 크높은 산을 만들'게 된다. 저를 낮추며 가는 길이 길면 길수록 솟구치는 힘은 더 많이 쌓인다는 오래된 교훈에 도달한다. 물론 이러한 상상력은 이성부의 시에서는 늘 반복되는 원형질과 같은 것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 [벼]에 나타난 민중형상 속에도 자신을 낮추며 산의 오르내림과 벼의 순응에는 미묘한 차이가 발견된다. 벼는 살아나기 위해 고개 숙이며 쓰러지며 비장하게 죽어가지만 산은 끝없이 반복되는 오르내림에 대한 달관이다. 이성부의 산시는 무궁하게 변주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한편 그의 시가 담백해지고 있는데 이는 주제에 있어 소박한 교훈으로 수렴될 위험도 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상상력의 운동 방향이 자연의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삶으로 향하고 있는데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진경의 [폭포]({실천문학} 2001. 겨울호) 는 죽음으로 내모는 힘에 몸을 내던짐으로써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역설의 시이다. 따라서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비장하다.
내 살 속 수억분의 일 세포 하나까지
땅이 잡아당기고 있는 힘에
묶여 있다는게 못견디겠다.
수억분의 일의
또 그 수억분의 일의 간격으로
촘촘히 얽어매고 있는 그물이 보인다
그물의 저 깊이
줄을 당기고 있는 다족류의 발이 보인다.
저 줄에 끌려
흙더미처럼 뭉그러지는 게 싫다.
차라리 맹렬하게
쏟아져 내리고 싶다.
맹렬하게 쏟아져 내려
일어서고 싶다.
몸을 벗어던진 길들이
절벽을 거슬러 오르고
이윽과 절정에서 웅웅거리며
둘레도 깊이도 없는 허공을
하얗게 솟아 오른다.
지구 위의 모든 존재는 중력이라고 하는 숙명적 힘에서 놓여날 길이 없다. 인류의 역사를 중력과의 싸움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인간의 꿈은 대부분 중력에서 해방되는 것은 관련된다. 구름과 새, 무지개 따위는 중력을 견디는 이미지들이다. 더 높이 뛰는 것과 멀리 던지는 것, 빨리 달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스포츠 또한 중력과의 싸움이다. 폭포는 낙하의 법칙에다 가장 철저하게 몸을 내맡기고 지속적으로 파괴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표상이다. 이것은 순응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저항이기도 하다. 이는 이육사가 [교목]에서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라고 노래한 심성도 이와 같다. 굉음을 내며 장엄하게 추락하는 물줄기를 보면서 되 튀어 오르는 물방울과, 계곡에 걸린 무지개를 쳐다보며 호수바닥에서 절벽위로 허공으로 이어지는 수직선을 타고 비상(飛上)하는 반란을 꿈꾼다. 커다란 폭포 아래에는 반드시 용이나 이무기가 숨어 있다는 옛 사람들의 믿음도 이와 같은 심리일 것이다.
그런데 세포 하나하나를 수 억분의 일의 촘촘한 간격으로 끌어당겨 화자를 절망시키고 있는 힘의 정체란 무엇인가? 삶의 모든 부문을 자신의 영토로 만들어 나가는 자본의 운동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큰 범주의 문명의 억압일 수도 있겠다. 화자는 그런 힘과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고 보고 육신의 통렬한 죽음을 통해 정신의 승리를 떠올려 보는 것이다. '둘레도 깊이도 없는 허공을 하얗게 솟아 오르는' 것은 오로지 정신만 가능한 것이니까.
가벼움의 힘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는 현실은 마치 자신을 바라보는 자는 모조리 돌로 만들어 버리는 저 희랍 신화에 나오는 괴물 메두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현실과 과제는 회피할 수 없는 우리 삶의 지반이며 우리가 해결하려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모순과 갈등이 없는 땅으로 도주할 수도 없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폭력의 광풍 속에서 시인은 시를 써야 한다. 자칫하면 가열한 상황에 압도되어 언어를 잃어버릴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신화속의 영웅 페르세우스는 돌로 변하지 않기 위해 메두사를 직접 보지 않고 청동방패를 거울로 삼아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비행(飛行) 신발을 타고 날면서 메두사의 목을 자른 다음 그것을 오히려 자신의 비밀병기로 만들어 마침내 무적의 영웅이 되었다. 페르세우스의 성공은 '가벼움'혹은 경쾌함으로써 '무거움'(石化)에 맞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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