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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초점/죽음을 넘어 살아오는 투탕카멘 미라의 눈/홍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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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홍기돈
(문학평론가, 중앙대강사)
죽음을 넘어 살아오는 투탕카멘 미라의 눈
-엄창석의 『어린 연금술사』와 『황금색 발톱』을 중심으로
1. "내 얼굴을 보는 자 정녕 죽으리라"
엄창석은, 위대한 예언자가 대개 그러하듯, 맹인의 상태에 이르러 있다. 인간에게 두 눈이란 욕망을 복제하는 기관이 아니던가. 두 눈 멀쩡히 뜬 이가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우리들의 눈이 욕망의 창(窓)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진실이란 처음부터 가려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욕망에 의해 가려진 상태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욕망의 바깥에 앞을 못 보는 위대한 예언자가 있다. 그가 보는 것은 눈 뜬 이들이 볼 수 없는 진실의 세계이며, 진실의 세계를 신탁(神託)으로 계시하면서 예언자로서의 자격을 보여주게 된다. 엄창석을 일러 '앞을 못 보는 위대한 예언자'라고 할 수 있다면, 바로 욕망이 위태롭게 발 딛고 있는 진실의 지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의 세계가 쉽게 펼쳐질 리 만무하다. 인간이란 욕망덩어리 자체이고, 인간이 축조해 놓은 이 세계는 욕망으로 촘촘하게 수놓인 장막과 같기 때문이다. 제 눈을 스스로 후벼파야 했던 신화 속 외디푸스는 그 사실을 정확하게 증명한다. 화려한 장막의 무늬 위에서 그는 만인으로부터 칭송을 받는 왕이었지만, 그것은 오직 욕망의 창 앞에 펼쳐진 장막의 세계에서만 사실일 따름이다. 그 욕망의 창 앞을 벗어나는 순간,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이자 어머니를 아내로 취한 파렴치한에 불과하다. 그러니 제 눈을 스스로 후벼파는 외디푸스의 단죄는 죄악을 복제해내었던 욕망의 창을 송두리째 부숴 버리는 행위인 셈이다. 따라서, 자신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진실을 수락하는 데 그만한 단죄가 요구되었다면, 처음부터 진실의 세계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얼마나 무거운 대가가 뒤따라야 하는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베욤 레라츠 압트파기 모츠 타무츠."(「황금색 발톱」, 65쪽). 이 히브리어를 번역하면 "내 얼굴을 보는 자는 정녕 죽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엄창석의 소설 세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진실을 직시하기 위해 엄창석이 담보로 내걸고 있는 것은 그의 목숨인 것이다. 「황금색 발톱」의 김필릉, 「육체의 기원」의 김승빈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죽음을 면한다 하더라도, 신탁을 원하는 자가 없는 세상에서의 예언자는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그의 사원 속에 유폐되게 마련이다. 「소설 기계」의 한지언이 정신병원에 유폐되듯이 말이다. 극심한 기근과 역병 창궐 따위의 극히 흉흉한 징조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한지언/엄창석은 그 유폐에서 풀려날 길이 없다. 오로지 무한하게 증식하는 화려한 욕망만이 모두의 시선을 붙들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예중앙』 2001년 가을호에 발표된 「몸의 예술가」를 보건대, 엄창석의 선택은 여전한 듯하다. 목숨을 걸고 욕망만이 부유하는 세계에 맞서는 한편, 진실의 세계에 다가가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은 이 작품에서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극한의 단식에 돌입하는 '몸의 예술가'는 타락한 시대에 맞서서 "하나의 예언"을 하기 위해 "당대의 질서가 신으로부터 허락되었다고 본다면―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봐―신을 거역하는 방식으로 가장 신적인 것, 그러니까 먹고 생명을 이어가라는 창조적 본성에 역행"(『문예중앙』 2001년 가을, 136∼137쪽)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유폐와 죽음을 향해 열려 있는, 위대한 예언자가 되기 위한 엄창석의 여정은 당분간 계속 이어지리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위대한 예언자를 향한 엄창석의 이러한 노력은 거의 생득적인 기질에서 연유한다고 파악될 정도이다. 예컨대 작가가 그리고 있는 자신의 열한 살 즈음 다음과 같은 모습은 그런 가능성을 시사한다. "나는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냄새를 맡으면서 아궁이의 땔감을 맞춘 것처럼, 하구의 풍경을 보면서 시원의 형상을 정확히 그려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연금술사』, 13쪽)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하구의 풍경'이지만,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시원의 형상'이다. 보고 있는 것과 그려내고자 하는 것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것이 바로 예언일 텐데, 작가는 예언을 '믿음'의 수준에서 끌어안고 있다. 그러고 보면 주인공이 굴뚝에 기어오르거나(『연금술사』 1장 「아름다움」) 교회 종탑에 올라가는 장면(『연금술사』 6장 「신」)은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마을 전체의 풍경을 한 눈에 들여다보면서 동시에 그 풍경 이상을 그려내기 위한 장소가 바로 굴뚝 위, 교회 종탑 꼭대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로, 위로 기어오르는 행위는 신의 얼굴(진실)을 보기 위해 다가가려는 노력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얼굴을 보는 자 정녕 죽으리라." 엄창석은 신이 내린 경고를 알고 있으면서도 어기려고 한다. 『어린 연금술사』와 『황금색 발톱』은 바로 그러한 위반의 흔적이다. 이 위반 위에서 구리나 납처럼 보잘 것 없이 나뒹구는 것들은 황금이 되어 광채를 발하기도 하고, 후기자본주의의 정점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욕망들은 그 허약한 뿌리를 내보이기도 한다. 이를 드러내어 보여주면서 작가는 위대한 예언자들의 뒤를 따라 점점 맹인의 상태로 다가가고 있다. 그러니 『어린 연금술사』와 『황금색 발톱』을 따라가는 이 글은 작가 엄창석이 들려주는 신탁의 내용을 되새기는 정도가 될 듯싶다. 조금 더 나아간다면 엄창석이 위대한 맹인 예언자로 나아가게 되는 방식 정도나 부기하게 될까.
"신전이 불탔다고 신이 죽은 것은 아니다."(「육체의 기원」, 115쪽). 그리고 모든 일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벌어지고 있다. '사막의 폭풍'이 사납게 몰아치고 있으며, 천사 이스라필은 종말이 임했음을 알리기 위해 '모래의 나팔'을 불어대고 있다. 그 너머에 신탁이 보여주는 진실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니 깨어있는 자는 신탁을 얻기 위해 거센 모래 바람에 맞서며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어린 연금술사』가 어떻게 위대한 예언자로 성장하게 되는가 그 과정을 추적해 볼 필요가 있겠다.
2. 시원(始原)으로서의 아름다움, 그 가슴 시린 풍경
『어린 연금술사』의 세계는 신비한 마법으로 가득 차 있다. 화자의 나이 열한 살은 바로 '사물에 영혼을 부여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신비를 품고 있으며, 그 신비가 발하는 빛을 작가는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그 신비한 세계에서는 필통 속 색연필들 사이에서 꽃뱀이 혀를 날름거리기도 하고, 장대비 내리는 날 비를 타고 하늘로 오른 미꾸라지가 마당에 떨어지기도 한다. 비슷한 외양을 가진 것들은 스스로 관계를 맺는데, 잠자리가 거대한 모습으로 커져 헬리콥터가 되었다는 상상이라든가, 이름에서 풍기는 어감의 유사성과 자지와의 비슷한 모양으로 생긴 병도의 별명 '병뚜껑'은 그런 경우이다. 호기심은 종종 적극적으로 유사성을 만드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한다. 병도가 양손으로 배꼽을 가운데 두고 뱃살을 주름지게 모으면서 "할머니 보지는 이렇게 생겼어."라고 말을 하거나 "처녀들 것은 겨드랑이를 조금 벌리고 팔꿈치에서 겨드랑이로 거울을 보면 꼭 같은 모양이 보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내밀한 감정이 증폭되는 경우도 다를 바 없다. 미향이를 그리며 서성거렸던 길은 어두운 밤 신비하게 하나의 선처럼 반짝거리며, 똑같은 피리임에도 불구하고 미향이의 숨결이 닿은 피리는 다른 소리를 낸다. "미향이의 피리를 불면 피리 끝에서 미향이의 가는 음색이 묻어 있지만 내가 산 피리는 여느 나무가 꺾인 자리에서 굴절되어 나는 퉁명스런 소리"(『연금술사』 203쪽)를 만들어낼 뿐이다. 사랑만이 아니라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나'는 공장장과 재빈이 엄마의 불륜을 엿보게 되는데, 조용히 도망가다가 마주친 창문에 걸려있던 공장장의 옷은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 온 세상은 공장장의 옷자락이 된 듯, "캄캄한 사위는 온통 공장장의 눈으로 뻑뻑히 들어차 있어 숨조차 쉴 수 없었다."(『연금술사』, 176쪽)라고까지 진술하게 만든다.
언뜻 보기에 한껏 이완된 어린아이의 신비한 세계를 병렬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어린 연금술사』는, 그러나, 나름의 질서를 통해 확장되고 있다. 그 질서란 주술의 기초가 되는 두 가지 원리에 맞닿아 있는데, '유사법칙(Law of Similarity)'과 '접촉법칙(Law of Contact, 혹은 감염법칙Law of Contagion)'이 바로 그것이다. 유사법칙이란 "'유사는 유사를 낳는다' 혹은 '결과는 그것의 원인을 닮는다'이며", 접촉법칙이란 "'한 번 서로 접촉한 것은 실제로 그 접촉이 떨어진 후에도 계속 서로 작용한다'이다."(프레이저, 장병길역, 『황금가지Ⅰ』, 삼성출판사, 1992, 45쪽). 그러니 『어린 연금술사』의 신비한 분위기는, 근대과학의 입장에서 파악하기에, 두 가지 오류를 적극적으로 확대하면서 직조된다고 볼 수 있다. "동종주술은 유사에, 감염주술은 연속에 의한 관념 연합에 근거하고 있다. 동종주술은 서로가 닮은 사물이 동일하다고 가정하는 오류를, 그리고 감염주술은 한때 서로 접촉했던 사물이 언제나 접촉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오류를 저질렀다."(『황금가지Ⅰ』, 46쪽)
"연필심이 변해서 꽃뱀이 되는가, 아님 꽃뱀이 변해서 연필심이 되는가, 하는 착각"(『연금술사』, 140쪽)은 모양의 유사성 때문에 빚어졌다. 미꾸라지가 빗줄기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것은 내리는 빗줄기처럼 기다랗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상력의 축이 유사법칙에 기댄 것이라면, 미향이의 피리가 특별한 까닭이라든가 공장장의 옷이 공장장의 시선을 대체할 수 있는 이유, 자신이 서성거렸던 길이 어둠 속에서 하나의 선처럼 반짝거리는 원인은 접촉주술과 관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사법칙과 접촉법칙이 종으로 횡으로 교직하면서 『어린 연금술사』의 세계는 신비하게 떠오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 세계의 마법사 혹은 연금술사인 셈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할 사실이 있다. 열한 살 소년을 다룬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어린 연금술사』는 화자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불로의 약을 먹은 것처럼, '나'는 어른의 세계를 엿볼 뿐 신비로운 세계를 버리고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프롤로그-열한 살의 신비한 참여」에 드러나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일 터이다. "그들은 오늘날 한 인간에게도 사물에 영혼을 부여하는 시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사물에 영혼을 부여하는 그 시기에 우리의 내면은 온갖 상징적, 은유적 형상물들로 넘쳐났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우리의 머리가 이성으로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에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장치를 몸 안에 아로새겨 왔는지! 마치 옛사람들이 동굴 벽에 그린 섬세한 그림이나 신전 기둥에 새긴 조각처럼."(『연금술사』, 8쪽)
'그들'이 모르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를 대표하는 화자 '나'는 성장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건너기 힘든 '그들'과 '우리' 사이의 경계선을 보여주는 것이 작가의 숨겨진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어린 연금술사』가 '미향 이모'의 등장에서 시작하여 그녀의 죽음을 즈음하여 끝난다는 사실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경계선 이쪽 편에 무게중심으로 존재하는 이가 바로 미향 이모이기 때문이다. 미향 이모는 이 소설에서 미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면, 오십천 하구의 풍경을 보면서 그 시원(始原)의 형상을 상상하는 '나'로 하여금 마주치자마자 눈앞에 시원을 떠오르게 할 정도이다. 그러니까 '시원=미향 이모의 아름다움'인 셈이다. 또한, 미의 여신을 그린 '비너스의 탄생'이란 그림에 실망하게 할 정도이다. 즉, 미의 여신으로까지 능히 올라갈 수 있는 것이 미향 이모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미향 이모를 대하는 어른들은 반응은 걱정에 가깝다. 그들은 모두 한숨을 동반하며 자신의 생각들을 펴 나간다. "사람은 그저 보리 알갱이처럼 수수하게 생겨야지. 너무 잘 생기면 팔자가 사납지. 쯧쯧", "사내들끼리 죽자 사자 칼부림까지 벌이는 판이라는데", "하기야 아가씨 눈을 보니 남자들 한 트럭쯤 빠지겠대요", "어휴우. 인물이 너무 잘생긴 것도 곳간을 가득 채워 놓은 것처럼 우환을 쌓아놓는 것이네"(『연금술사』, 18∼20쪽) 어른들의 이런 반응을 '나'는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둘러싸고 '그들'과 '우리'를 나누는 경계선이 뚜렷이 드러나는 셈이다.
나는 이때만큼 어른들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르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홀연히 옹달샘을 떠올리게 했던 그 여자가 저렇듯 우환덩어리라니.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어떤 깊은 연유가 있다 한들 어른들의 생각에는 결코 동조할 수 없는 외진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어른과 나 사이의 공간. 그 번잡하고도 쓸쓸한 공간에 내 유년의 대장간이 자리잡고 있었으리라. 거기서 지워지지 않을 뜨거운 영혼을 새겨넣느라 밤새 꿈 속을 토닥거리고 이른 아침부터 굴뚝을 오르도록 내 유년을 내몰곤 하였으리라. -『연금술사』 20쪽
'어른과 나 사이의 공간', 이 공간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성장소설이라면 '내'가 어른의 세계를 향해 그 공간을 가로질러 나아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겠지만, 작가는 『어린 연금술사』를 그렇게 구축하지 않았다. 유사법칙과 접촉법칙으로 빚어지는 신비감을 팽창시키면서 그 공간을 자연스럽게 은폐해 나간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의 전면을 차지하는 신비한 분위기는 미향 이모의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하여 햇살처럼 퍼져 나간다고 말할 수 있다. 당연히 그럴 것이 그 아름다움은 신비한 모든 것들을 낳는 시원이 아니던가. 물론 그렇다고 어른의 세계가 허물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른과 나 사이의 공간'은, 단지 은폐되었을 뿐, 여전히 견고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의 세계가 견고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미향 이모의 죽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미향 이모는 집안의 반대로 인해 실연을 겪게 되고,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채 방황하다가 의문의 죽음에 이르게 된다. 소설 처음 부분에서 어른들이 쏟아놓던 한숨이 현실화된 것이다.
따라서 한껏 평온한 어린 시절을 담담하게 그려낸 듯 보이는 『어린 연금술사』의 바탕에는 '어른과 나 사이의 공간'이 긴장감으로 채워져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팽팽한 긴장의 끝에서 엄창석은 미향 이모의 죽음을 통해 미의 패배를 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내'가 그 패배를 수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 더욱 아름다움의 세계에 집착하게 되지 않았을까. 사실, 작가/'나'는 처음부터 그러한 패배를 예감하고 있었다.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풍경 속에 섬뜩한 공포가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부분에서부터 벌써 보고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깨달음을 따라 미향 이모의 죽음이 예정된 수순처럼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봄볕이 강하다곤 하나 아직 차가운 물이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나는 갈매기의 매끈한 복부에서 빠져 나온 앙증스런 두 다리에 매료되어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갈매기들은 반짝이는 수면 위로 가는 다리를 늘어뜨리고 내가 있는 데까지 날아왔다. 나도 모르게 무릎을 굽혀 코 아래까지 물 속에 잠기게 하였다. 눈만 내민 하마처럼 수면 밖으로 두 눈을 내었다. 눈앞에서 갈매기떼가 은어를 집어채는 광경은 숨을 멎게 할 지경이었다. 수천 개의 담홍빛 앙증스런 발들이 수면을 스치고 회색빛 부리에 머리가 물린 고기는 꼬리를 버둥거리며 새의 비상을 따라 공중으로 치솟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내가 있는 위치가 갈매기떼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날갯짓에서 흩뿌려진 물방울이 가랑비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갈매기의 물갈퀴가 내 머리를 스치며 날아올랐다. 내 몸이 물고기처럼 갈매기의 부리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 오싹 들었다. 그 전율 속에서도 잠시 머리를 물 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수면 위로 눈을 내놓고 갈매기들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아니 섬뜩한 공포가 나를 죄고 있었다. 나는 이 광경을 아름다움으로 보아야 할지 공포로 느껴야 할지 분간할 수 없었다. 멀리 다리 위에서 지켜볼 때 함빡 눈이 내린 듯이 아름답기만 했던 갈매기떼의 모습 속에 이 같은 공격성이 숨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가슴이 시릴 만큼의 아름다움에는 어떤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는 아름다움 속에 공포가 도사리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는 이미 공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갈매기떼의 광경은 그 뒤 오래도록 내 마음에 자리잡게 되었다. -『연금술사』 49∼50쪽
어른이 되어 '그들' 가운데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를 보면서 한숨을 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에둘러 갈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길을 택하지 않는다. 그러한 길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고 결심한 적이 있듯이, "미의 난폭성을 받아들이겠다"는 쪽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그가 이 순간 선택한 길, 그 길의 저 멀리에 위대한 예언자의 삶이 놓여있고, 절대적 미의 가치에 눈 멀어버린 예술가의 고단한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나는 그때 아름다움의 어떤 실체를 보았다고 여긴 듯했다. 그리하여 내 유년의 영혼에 '아름다움'이 새겨지게 되었고, 성년의 어느 때 부닥치게 될 미의 난폭성을 받아들이겠다는 먼 징조가 싹이 튼 건지도 모른다. 성년이 되어서 거기에 이름을 붙여보았다. 그 아름다움은 가학자(加虐子)였다."(『연금술사』 51쪽)
3. 아테나의 피리를 얻은 마르시아스
정녕, 아름다움은 마치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로움을 내장하고 있는 것 아닐까. 내 밖에서 빛을 발하는 아름다움은 분명히 매혹의 대상이다. 하지만, 매혹의 대상(아름다움)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거리는 아무리 부지런히 다가가더라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아름다운 대상과 내가 일치하는 순간, 바로 그러한 순간은 결코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욕심을 부려 일상의 질서 속으로 그러한 순간을 끌어들이고자 노력을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무거운 일상 속에서 그 아름다움은 이미 신비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에 빛을 잃어버린다. 그로 인해 매혹의 감정은 평상의 무미건조한 감정 속으로 녹아버리게 되고, 심리적 거리는 매혹의 상태 이전보다 더 멀어지게 된다. 그러니 아름다움은 나에게 날카로운 생채기를 낼 수 있을 때에만 매혹의 대상으로 자리할 수 있는 법이다. 그 생채기의 아픔을 곱씹으면서 무지개처럼 헛되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쫓는 존재를 일러 우리는 '예술가'라고 부른다.
『어린 연금술사』에서 그러한 예술가의 운명을 보여주는 이는 바로 미향 이모의 애인이다. 미의 고향[美鄕]을 연상시키는 어감에서 알 수 있듯이, 시원의 이미지와 그대로 포개지는 미향 이모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아름다움을 쫓는 이는 번번이 커다란 생채기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그 상처로 인하여 미향 이모로부터 결코 멀어질 수 없다.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인해 미향 이모가 거처를 옮기게 되면 그는 얼굴 한번 보기 위해 남모르게 찾아온다. 만남이 발각되어 미향 이모의 오빠에게 심하게 두들겨 맞고 쫓겨나도 마냥 행복하다. 미향 이모의 얼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 마지막엔 한쪽 다리를 잃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처절하게 미향 이모를 향해 나아가는 자의 직업은, 어린 미향이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극장 간판쟁이가 아니라 진짜 화가"(『연금술사』 196쪽)이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것은 무지개처럼 헛되게 빛나는 아름다움이기에 미향 집안의 어른들로부터 반대에 부딪힐 따름이다. 직업과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미향 이모의 애인인 화가가 걸었던 길은 미향을 사랑하는 '내'가 앞으로 걷게 될 길이기도 하다. 소설의 처음 부분에서 묘사되듯이, 미향은 이모의 축소판 혹은 분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아름다움에 대한 어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라거나 "미의 난폭성을 받아들이겠다"라고 하는 결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미향과 '나'의 관계는 미향 이모와 화가의 관계와 의식적·구조적인 상동(相同)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눈길을 끄는 사실은 '화가'라는 직업에 대응하는 듯 보이는 '피리'를 둘러싼 '나'의 행위이다. 『어린 연금술사』는, 미향 이모와 화가가 헤어졌듯이, '나'와 미향이 헤어질 때를 즈음하여 결말을 맺는다. 소설의 끝 부분에서 '나'는 일부러 미향의 피리와 똑같은 것을 사서 바꿔치기를 한다.
미향의 피리를 불면 피리 끝에서 미향이의 가는 음색이 묻어 있었지만 내가 산 피리는 여느 나무가 꺾인 자리에서 굴절되어 나는 퉁명스런 소리에 불과했다. 피리 속에 입김을 계속 불어넣으니 피리에 혼이 들어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중략)…나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가 차츰 마음이 씻겨지는 것을 느꼈다. 교회 종탑에서 내려다보면 내가 피리를 훔친 것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피리를 간직하고 싶은 내 마음까지 보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종탑의 눈은 내가 피리를 훔쳤다고 여기질 않고 그 아이의 입김을 훔쳤다고 여길지 몰랐다. 입김을 훔친 것은 악(惡)일까.
-『연금술사』 203∼204쪽
입김을 훔친 것은 악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마르시아스를 살펴보는 일이 필요할 듯하다. 마르시아스는 여신 아테나의 피리를 주운 인간이다. 신의 입김이 서려있는 피리이기에 평범한 여느 피리 이상의 소리가 흘러나올 것은 당연하다. 사람의 마음을 빼앗는 소리를 연주하게 되어 우쭐해진 마르시아스는 아폴론과 음악 경쟁을 벌이기에 이른다. 신과의 대결에서 인간이 이길 리는 만무한 노릇. 결국 마르시아스는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마르시아스는 과연 어디에서부터 악을 범하기 시작했던 것일까.
여신/미향의 입김을 훔친 것은 악행이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로부터 조금 더 나아갔을 때 악행에 이르는 사건과 맞닥뜨리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과연 인간의 영역은 어느 정도까지이기에 더 나아가면 안 되는가가 분명치 않다는 사실. 그 영역을 넘어서 버린다면 신에 대한 도전이 되어 버린다. 이것은 공장장과 재빈 엄마의 불륜을 혼자 엿보게 된 '나'의 두려움과 일치한다. 보지 말았어야 할 광경을 엿보게 되자 캄캄한 사위는, 마치 신의 시선처럼, 온통 나를 주시하지 않았던가. 그 광경은 처음부터 신만이 보고 알았어야 할 내용이었다. 마찬가지로 여신/미향의 입김을 훔친 순간부터 두려움은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신은 일찍이 "내 얼굴을 보는 자 정녕 죽으리라"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엄창석은 이미 여신/미향의 입김을 훔친 자이다. 그러기에 그는 미향 이모를 사랑함으로써 화가가 보여줬던 예술가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흡사 '미'라는 찬란한 불꽃에 한순간 눈이 멀어버린 양상이다. 이제 그에게는, 신의 얼굴을 보면 죽으리라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이미 주어진 길을 기꺼이 수락하여 따라갈 도리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눈앞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부침하는 욕망이란 엄창석에게 미가 놓인 시원을 가리는 장막처럼 다가설 뿐이다. 『황금색 발톱』에 실린 「색칠하는 여자」의 다음 발언은 그러한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실존에 닿아있는 욕망이라면 유행을 좇아다니겠어요? 유행은 현대 권력의 가장 근원적인 생산기지가 아니겠어요?"(「색칠하는 여자」, 30쪽)
『황금빛 발톱』은 위대한 예언자로 자라난 어린 연금술사가 들려주는 신탁이다. 지금은 유행을 쫓는 욕망이 부글부글 들끓는 시기이며, 그러한 욕망에 이끌려야만 만인의 왕이 될 수 있고 칭송을 받을 수 있는 때이다. 마치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외디푸스가 만인의 왕이 되어 칭송을 받았던 시기의 테베와 상황이 유사하다. 테베에 왜 극심한 기근이 몇 년 동안 밀어닥쳤던가. 말도 못할 역병은 또한 어찌하여 그리 퍼져나가게 되었던가. 눈밝은 이는 옛이야기에서 교훈을 찾아내는 법. 그러니 깨어있고자 하는 자는 와서 들을 지어다. 우리의 맹인 예언가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과장된 평화 속에서 창백하게 흔들리는 자는 와서 볼 지어다. 우리의 맹인 예언자가 내리고 있는 신탁을.
4. 성난 오랑우탄을 닮은,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짐승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짐승이로다. 늙은 코끼리의 복부이듯 주름진 가죽 위로 짧은 털이 송송 돋아 있고 구름처럼 느릿느릿 움직였으되 실상은 엄청난 빠르기였다. 내가 기거하는 동굴 앞에서 그 짐승을 본 것은 알라께 찬미할 때였으니……. 오, 무서워라 육지 위로 올라선 바다의 모습이라. 이랑이 이랑을 삼키고 포세이돈의 성남에 거칠 것이 없도다……
…(중략)…
얼굴은 성난 오랑우탄을 닮은 듯하다. 눈은 매사촌의 알처럼 푸른 빛이 흘렀고 무엇을 향할 때면 희랍인의 오목거울처럼 불타듯이 빛났다. 마치 거대한 구름덩어리처럼 혹은 산맥처럼 크기를 가늠할 수 없다. 사막의 한 자락을 입에 물고 눈 아래로 붙은 코로는 사막의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그것에게서 정신을 혼미케 하는 냄새가 났다. 피의 냄새였다……
…(중략)…
오, 다시 보면 거대한 짐승이고 다시 보면 엄청난 군대의 진군이다. 그 진군의 형태가 전날의 짐승과 어찌 저리 닮았던고. 짐승이 군단이고 군단이 짐승이로다.
오, 짐승이 스쳐가는 곳마다 홍대(洪大)한 화염의 빗자루가 지나가는 것 같구나. 마을과 마을이 불탄다. 돌 위에 돌이 쌓인 곳이 없고, 몸 위에 목을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없구나. 날개 달린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유프라테스의 하수는 피를 토한다. -「황금색 발톱」 51∼56쪽
엄창석이 들려주는 신탁은 종말론적 입장에 닿아있다. 종말론은, 극단적인 신비주의에 빠진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의 힘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파생한다. 어떤 절대적인 힘이 인간의 모든 의지를 압도하여 파국으로 이끌어버리는 것이 바로 종말 아닌가. 그렇다면, 저 암울한 종말을 알리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성난 오랑우탄을 닮은 짐승은 대체 무엇인가. 『황금색 발톱』의 제1부가 '후기자본주의 서설'이라는 제목으로 묶이고 있는 것을 보건대, 그 짐승은 후기자본주의의 상징화에 틀림없다. 그러니까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질서, 더 나아가 전지구적인 질서로부터 종말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두 가지를 생각하게끔 한다. 첫째, 우리는 바로 짐승의 육체에 깃들여 살고 있다. 종말을 불러오는 저 짐승은 다른 어떤 곳에서 이 곳으로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을 운용하는 질서이기에 우리 역시 짐승의 일부인 것이다. 그러니 엄창석이 "오, 다시 보면 거대한 짐승이고 다시 보면 엄청난 군대의 진군이다.…짐승이 군단이고 군단이 짐승이로다."라고 했을 때, 우리는 그 군단을 이루는 전사들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피신할 장소가 남아있지 않다.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해 응전해야만 하는 상황, 이 상황이 엄창석으로 하여금 종말론의 입장으로 나아가게 만든 바탕이다.
둘째, 이러한 상황을 이끄는 후기자본주의는 거대한 힘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다. 너무 작아서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존재하듯이, 너무 커다랗기 때문에 미처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있게 마련인데, 후기자본주의의 작동은 너무 커다랗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바라볼 수 없는 경우에 속한다. 거대함으로 인해 그 불길한 대상은, 「요한계시록」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짐승'으로 불리는 것 아닌가. 우리의 시각으로 제대로 포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짐승과의 대면이기에 상황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후기자본주의 서설'로 묶인 소설들이 하나같이 암울하게 채색된 이유는 이 두 가지 사실에서 기인한다.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서 인간은 단지 공포에 벌벌 떨기만 하는 무력한 존재일 따름이다. 다른 선택이 있다면 두 눈 질끈 감고 그 힘을 무시하면서 소돔의 백성들처럼 그저 욕망이나 채우는 정도가 아닐까. 『황금색 발톱』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한낱 쾌락을 즐기는 원숭이(「남쪽 원숭이」)에 불과하거나,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저능아(「합창」), 정신병원 갇힌 환자(「소설기계」), 전쟁에 패해 노예로 전락한 자유시민(「육체의 기원」)에 머무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한 상황으로부터의 출구를 모색하더라도 겨우 누드 모델을 통한 복수(「색칠하는 여자」) 수준에 머무른다.
"넌 왜 누드 모델이 되려고 하니?"
"전 그때 성기 안에 엄청난 권력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았어요"
"……"
나는 뜻밖의 대답에 아연한 기색을 감추며 들고 있는 맥주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일어나 작업대에 쌓여 있는 ㄱ성당의 사진들을 건성으로 살폈다. 초창기 성당 건립을 하고 있는 흑백 사진. 상투를 튼 남자, 기운 옷을 입은 아이, 한복 입은 부녀자들이 줄을 지어 벽돌을 나르고 있었다. 수 백 명의 인파들이 손을 흔들고 한복판에 완성된 성당 첨탑이 우람하게 솟아 있다. 그 첨탑을 등지고 신부 복장을 한 서양 사람 하나가 연설을 하고 있다.
"내 누드는 사내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릴 거예요. 정말 그들은 몸 검사 당하는 노예들처럼 심각한 얼굴로 내 누드 앞에서 옷을 벗을 테고, 빼앗긴 애인의 연상을 내 얼굴에 붙여놓은 뒤 수음을 하고……실물 크기로 확대된 유방과 배꼽 아래를 애무할 테죠. 그리고 혼을 바치듯이 정액을 바치겠죠. 1만 부를 찍을 경우 적어도 1퍼센트는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낼 거예요. 상상만 해도 유쾌해요."
-「색칠하는 여자」 21쪽(고딕 강조-필자)
성당 첨탑을 배경으로 연설하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서양 신부인가 아니면 누드 모델이 되고자 하는 홍양인가. 아니다, 이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서양 신부는 누드 모델이 되고자 하는 홍양이며,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신부 복장을 한 서양 사람'이 어떤 연설을 하더라도 '상투를 튼 남자, 기운 옷을 입은 아이, 한복을 입은 부녀자들'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한복판에 완성된 성당 첨탑'은 다만 서양 신부가 대중을 현혹하는 데 배경으로 이용될 뿐이다. 『ㄱ성당 70사』가 증명하는 사실은 70년이란 그 시간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요원하다는 것 아닌가.
홍양이 주장하는 '성기 안에 엄청난 권력이 숨어 있다'는 사실은 우람하게 솟아있는 성당 첨탑처럼 존재한다. 홍양은 중학교 3학년 때 도덕 선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바 있다. 성폭행을 당했으니 홍양은 명백한 피해자이다. 하지만, 성폭행을 계기로 권력 관계는 역전되었다. 도덕 선생은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워서 그녀에게 용돈을 바치는가 하면 시험문제를 가르쳐주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홍양의 주장처럼 성기를 통해 권력과 맞설 수 있을까. 작가는 정이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드러내는 성과 억누르려는 권력은 항상 대치 상태에 있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대치 상태에 있다고 믿게 하는 게 검열(권력)의 이데올로기적인 조작이지요. 때에 따라 둘은 상호 의존적이라고구요. 야누스처럼 외면한 두 얼굴이 한몸에 붙어 있어요.…(중략)…그 일탈이라는 것도 저들이 근래 새로 포장해 놓은 샛길일 따름이라구요. 아주 상투적이고 아득한 길이죠. 길의 속성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은 그 눈에 번뇌가 없기 때문이에요."(「색칠하는 여자」, 29∼30쪽).
아무런 탈출구도 없이 그저 닫힌 미로 속을 헤매는 우리는, 그러므로, 성당 첨탑을 배경으로 연설하고 있는 서양 목사이면서 누드 모델을 꿈꾸는 홍양이다. 사람들은 거울처럼 서로의 욕망을 반사하며 원본의 실체를 지우며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까지도 기꺼이 지우면서 살아간다(「남쪽 원숭이」). 보이지 않는 권력은 그러한 유희를 적극적으로 조종한다. "총칼을 들지 않는 손이 더 섬뜩해……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이 따위 간접 폭력에 길들여져야 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길들이는 방법이나 연구하는 패들이 있어……"(「합창」 146쪽)라는 뺑칠이의 형이 들려주는 '철학적인 말'은 그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간접 폭력에 길들여져야 하는 쪽'은 민태와 같은 저능아의 상태로 점점 수렴해가고, "아주 흉측한 괴물 같은 모습"(「합창」 153쪽) 위에 '길들이는 방법이나 연구하는 패들'의 영상이 겹쳐지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든 정보와 사실을 안전한 이미지로 조작하여 유통시키는 「소설기계」 역시 권력의 은밀한 작동을 돕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예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 속에서 깨어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유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정도가 아닐까. 용기가 있다면 귓속말로나마 은밀히 그 기억을 전수할 수 있을까. "노예 시장에서 온 자들은 발을 뻗고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잤는데 일군의 전쟁 포로들인 옛 자유 시민들은 귀퉁이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을 잤다고 기술하고 있었다. 그들은 종종 밤 이슥토록 귓속말로 고향과 신들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고 함께 있는 자식들에게 선조와 영웅들에 관한 전설을 잊지 않도록 가르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적어놓았다."(「육체의 기원」 111쪽)
『황금색 발톱』은 귓속말로 전해주는 고향과 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전은 이미 불타 버렸고 이 세계는 출구 없는 미로처럼 뒤엉켜 버렸지만, 작가는 그 이야기를 잊으면 안 된다고 당부한다. 미로 속에서 스스로 미로가 되어 쾌락을 즐기는 원숭이, 저능아, 노예로 전락해 가는 이들에게 깨어있으리라고 경고한다. 저 암울한 종말을 알리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성난 오랑우탄을 닮은 짐승이 느껴지지 않는가.
5. 눈을 떠라, 투탕카멘 미라여!
"깊은 물웅덩이를 솥처럼 끓게 하고/ 바닷물을 기름가마처럼 부글거리게 하는구나./ 지상의 그 누가 레비아단과 겨루랴."(「욥기」 41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싸움에 도전하는, 도전해야만 하는 이가 있다. 이 타락한 세상을 예정해 놓은 신의 뜻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러한 세계를 예정한 신의 뜻과 맞서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예언자가 있다. 설사 허물어질 운명을 미리 알면서도 바벨탑을 쌓듯이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가는 비극적인 예언자가 있다. 무엇이 한 인간을 위대한 예언자로 이끄는 것일까. 아마도 왜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밝히는 박용하의 글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는 '욕망', 어떻게든 그 세계를 기우뚱거려, 그래서, 그 부패한 중심을 뒤흔들어 변환시키려는, 전환시키려는 '욕망', 그 '욕망'이 나를 시인으로 이끌었으리라.
내가 변하면 세계가 변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변해도 이 세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데 딜레마가 있다.
그러나 나는 '불가능'을 사랑한다.
-『나무들은 폭포처럼 타오른다』 서문 중에서, 세계사
'시인'이란 단어를 '예언자'로, 다시 '소설가'로 바꾸면 엄창석에게 꼭 들어맞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세계' 속에서 그는, 우리는 자유를 잃은 노예일 따름이다. 그러나, 그러한 세계의 바깥을 향해 나아간다면 "내 얼굴을 보는 자 정녕 죽으리라"라는 경고에 직면하게 된다. '불가능'은 바로 그러한 사이에서부터 발생한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미 그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버린 것을. 그래서 엄창석은 환상을 보고 신탁을 들려주게 된다. "내가 변해도 이 세계는 꿈쩍도 하지 않지만", 누군가는 깨어있는 눈으로 "그 부패한 중심"을 직시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패한 중심으로부터 기근의 조짐은 다가오고, 역병이 돌기 시작한다. 욕망의 창에 지나지 않는 '메마르고 까칠까칠한 죽은 사람의 눈'으로는 결코 그런 전조를 알아챌 수 없다. 아마도 몇 년에 걸친 기근에 시달리고 무시무시한 역병이 대대적으로 창궐해야만 예언자의 신탁에 대중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그 때가 되어야만 비로소 지금 불어대고 있는 모래 바람이 종말의 전조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의 순간에도 구원이 깃들 수 있을까. 엄창석은 다만 그 가능성을 위해 '메마르고 까칠까칠한 죽은 사람의 눈' 위에 '투탕카멘 미라의 눈'을 묵묵히 오려붙이고 있다. 19세에 죽은 젊은 왕의 눈이 떠지리라는 염원을 불어넣었던 고대 이집트의 주술사처럼(「색칠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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