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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특집/묵시록적 전망에 대한 ≪녹색평론≫의 혁명적 모반/고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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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고명철
댓글 0건 조회 3,276회 작성일 02-06-2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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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고명철
(문학평론가, 광운대 겸임교수)

묵시록적 전망에 대한 ≪녹색평론≫의 혁명적 모반


묵시록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메말라 시들어버린 나무에 참을성 있게 짜증내지 않으며 물을 준다는 오래된 전설, 지금까지 만든 영화 중 내게 가장 중요한 영화 속에 내가 각색하여 삽입한 이 전설이 해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이성에 반하여 수년간 산으로 물통을 날랐던 수도승은 현혹되지 않고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기적을 믿었기 때문에, 어느날 그에게 그 같은 기적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앙상하게 메말랐던 가지들이 하룻밤 사이에 푸른 잎사귀로 뒤덮여버린 것이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 중에서

1. 진보 매체의 새로운 탄생

작지만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보폭, 더디지만 결코 더디다고 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 매체가 있다. 겉 모양은 화려하지 않지만 속 알맹이가 꽉 여물어 그 과육을 이웃들에게 고루고루 나누어주는 매체가 있다. 나즈막하지만 결코 나즈막하지 않게 인류의 현위기에 대한 모르스 부호를 쉼 없이 타전하는 매체가 있다. 1991년 11월 창간한 격월간지 ≪녹색평론≫이 그것이다.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62호를 내는 동안 단 한번도 독자들과의 약속을 깨지 않고 꾸준히 ≪녹색평론≫의 신념을 구체화하는 매체 활동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생태문제와 관련된 이론적 실천과 실천적 이론을 모색하고 있는 ≪녹색평론≫을 괄호 안에 넣고서는 생태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성찰과 실천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크고 작은 진보 성향의 매체들이 타락하고 삐뚤어진 사회의 이면을 응시하며 진보라는 패러다임 아래 변혁과 개혁을 향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나, ≪녹색평론≫에서 보여주고 있는 만큼 10여년에 걸친 시간 동안 지속적이고 집중적으로 '환경'과 '생태'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매체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녹색평론≫과 관련하여 쉽게 지나쳐서 안될 것은 ≪녹색평론≫이 생태문제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러한 관심을 통해 ≪녹색평론≫이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게 무엇이며, 또 그러한 궁극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움직임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비단 이것은 지금까지 보여준 ≪녹색평론≫의 이념과 구체적 활동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 사회의 생태문제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그 전망을 모색하는 데 자족하지 않는다. 물론 무엇보다 예의 문제가 중요한 관심사라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녹색평론≫이 지금, 이곳에서 또 다른 현안으로 내게 주목되는 것은 1990년대 이후 새롭게 변모되고 있는 진보 매체의 한 좌표를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녹색평론≫의 창간 시기가 던져주는 의미는 자못 상징적이다. 1980년대를 휘감아 소용돌이치던 변혁의 거센 파고가 잦아들고, 급변한 국내 안팎의 정세 속에서 뿔뿔이 흩어진 채 악무한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악다구니 같은 경쟁적 삶을 살아가며 너나 할 것 없이 진보의 깃발을 내리는 90년대 초반, ≪녹색평론≫은 도리어 보란 듯이 80년대의 진보와 구별되는 진보의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 생태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시각을 견지하면서 일상 생활 깊숙이 그러한 시각을 현미경적 시야로 포착해냄과 동시에 전지구적·인류적인 망원경적 시야를 통해 생태문제가 우리 민족의 문제만이 아니라 전인류의 공통된 근원적 문제임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이것은 어찌보면 처음부터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환경과 생명에 대한 관심은 그 내포하는 바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외연 역시 그 경계 범주를 확연히 그을 수 없는 터라 자칫하면 추상적이고 관념적 형태의 담론만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지식사회의 구호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 '생태계를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환경을 지켜야 한다' 등의 윤리적 정언명제로 수렴될 수 있다.
하지만 ≪녹색평론≫에 대한 이러한 기우(杞憂)는 기우에 그칠 뿐이다. ≪녹색평론≫이 오늘날까지 지탱되고 있다는 게 바로 단적인 증거이겠으나, 생태문제와 관련하여 그동안 보인 ≪녹색평론≫의 담론과 그 구체적 실천은 비록 진보를 겉으로 표방하지 않되, 일상화된 진보 혹은 진보의 일상화를 묵묵히 기획·실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떠한 진보 매체보다 진보적이다. 따라서 이 글은 생태문제를 다루고 있는 ≪녹색평론≫의 성격을 검토하는 것과 아울러 ≪녹색평론≫의 그러한 노력이 90년대 이후 새롭게 모색되고 있는 진보 매체의 맥락 속에서 어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자연스레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생산력의 형이상학'을 전복하는 ≪녹색평론≫의 실천원리

한 매체가 꾸준히 10여년 동안 지식사회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특히 90년대 이후 영상문화의 홍수에 직면하여 활자문화가 위축되는 현실에서, 그리하여 독자가 책으로부터 이반되는 현실에서 생태와 관련된 비대중적 특정한 주제를 고집스럽게 기획한 ≪녹색평론≫이 말 그대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간명하면서도 그렇지 않다. 다음에 읽어볼 ≪녹색평론≫의 창간사는 이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지금부터 이십년이나 삼십년 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범람하는 인쇄물 공해의 시대에 또 하나의 공해를 추가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를 이 조그마한 잡지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무겁다. 거의 파국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산업문명의 이 압도적인 추세속에서 우리의 보잘것없는 작업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게다가 이 작업이 불가피하게 삼림파손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실로 착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시도하려는 작업이 어떤 의미가 있든지간에 이것이 생태계의 훼손을 조금이라고 수반하는 것이라면, 이 작업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망설임 끝에 결국 이 잡지를 내기로 결정한 것은 그것이 크게 가치 있거나 많은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으리라는 자기도취적인 낙관이 있어서가 아니다. 점점 가속적으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환경문제를 보면서,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체들이 지구상에서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대단히 불투명해지는 현실에 직면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은 그렇다치고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그 아이들이 성장하여 사랑을 하고 이번에는 자기 아이들을 가질 차례가 되었을 때 그들의 심중에 망설임이 없을까―하는 좀더 절박한 심정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아마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회피하기 어려운 당면 현실일 것이다. 우리가 ≪녹색평론≫을 구상한 것은 지극히 미약한 정도로나마 우리 자신의 책임감을 표현하고, 거의 비슷한 심정을 느끼고 있는 결코 적지 않을 동시대인들과의 정신적 교류를 희망하면서, 민감한 마음을 지닌 영혼들과의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 나가기 위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녹색평론≫을 발간하는 이유가 천명되고 있는 창간사의 서두 부분이다. 현재의 삶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으며, 때문에 미래의 삶에 어떠한 희망도 내다볼 수 없는 묵시록적 현실이 펼쳐질 수 있으리라는 '절망'을 가만히 앉아서만 지켜볼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행간 곳곳에 스며있다. 여기에는 전지구적·인류적·문명사적 고민이 배음(背音)으로 깔려 있다. 단지 남들이 크게 주목하지 않은 주제를 특화시킴으로써 새롭게 세상에 내보일 매체의 이목을 끄는 데 만족하는 게 아니라,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문제에 대한 일면적 관심으로 그쳐서는 안된다는 절실한 문제의식이 삼투돼 있다.
사실 ≪녹색평론≫이 출현하기 전까지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문제와 관련하여 현실을 냉정히 직시해보자면, 환경문제는 잊혀질만 하면 으레 매체의 한 귀퉁이를 장식할 수밖에 없는 천덕꾸러기였다고 할까. 그러다보니 환경문제를 직간접으로 다루는 매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 대동소이한 편집과 기획이 꼬리를 무는 격이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필자의 경우 지나치게 전문가(환경과 생태 분야의 전공의 연구자) 중심으로 편중되는 가운데 환경문제가 우리의 일상성과 어떠한 연관을 맺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결여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환경문제가 국내의 공해나 오염에만 국한되는 가운데 전세계적 환경문제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한 논의가 개진되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 시급한 당면과제는 국제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몸부림, 즉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국가의 총력전이 요구되는 현실 속에서 뿌리뽑힌 자들의 생존권을 수호하고, 반민족적·반민주주의적 현실을 변혁하는 데 온힘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동에서 소외된 민중의 위엄과 자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은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계급모순에 대한 해결과 함께 분단체제의 온갖 분단모순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던 셈이다. 말하자면 이 땅의 모순을 안고 있는 소외된 인간의 문제 앞에서 환경문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는 어딘지 모르게 사치스런 담론으로 비쳐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녹색평론≫의 창간사에서도 읽을 수 있는 바처럼 환경문제는 사치스럽다기보다 우리시대에 가장 첨예한 아킬레스건이 되고 있다. 오히려 환경문제에 대한 지속적 관심은 지금, 이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현존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속세대의 전존재의 생존에 직결되는 중대한 현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녹색평론≫이 지향하는 매체의 거시적 방향성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녹색평론≫의 정신적 이념이자 정체성이며, 창간호부터 62호까지 그리고 이후 지속적으로 발간될 편집의 문제틀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창간호부터 ≪녹색평론≫의 편집 책임을 맡고 있는 김종철이 지난 해 창간 10주년을 맞이하며 언급한 부분은 경청할 만하다.

지난 10년 동안 ≪녹색평론≫을 통하여 우리가 일관되게 이야기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성장, 팽창을 내적인 요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산업경제, 산업문화가 물러나고, 새로운 차원의 농업중심 사회가 재건되는 것만이 생태적, 사회적 위기와 모순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건강한 길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이 근본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지고, 또 평등하게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존공영(共存共榮)이 아니라 공빈공락(共貧共樂)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차원의 농업중심 사회'의 재건과 이를 위한 '공빈공락(共貧共樂)'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녹색평론≫이 그동안 무모하리만치(?) 집요하게 기획·실천해온 정신적 이념이자 구체적 실천이다. 기존의 진보적 패러다임과는 그 인식과 실천 면에서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첨단 정보화사회로 옮아가는 엄연한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이와 같은 주장은 현실을 몰각한 퇴행적 사고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새로운 차원'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어 종래의 전통적 농업사회의 생산양식과 다르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지만 어떻든지 간에 '농업중심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생산양식의 진보라는 측면에서 얼핏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지고, 또 평등하게 가난해야 한다는", 즉 공빈공락의 삶의 자세에 이르게 되면, ≪녹색평론≫이 구체적 현실의 실재감과 유리된 어떤 막연한 이상에 사로잡히지나 않았나 하는 의구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다 함께 번영을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고 변혁시킴으로써 계급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풍요로운 인간 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이 기존의 진보 패러다임의 골격을 이루는 주요 내용에 대해 ≪녹색평론≫의 이념은 상충된다. 바로 여기서 ≪녹색평론≫만의 독특한 진보성이 발견되는 바, ≪녹색평론≫이 강하게 부정하는 것은 '생산력주의'다.

우리는 인간의 사고방식이 사회의 물적 기초의 반영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사고 자체가 사회전체의 변혁에 필요한 또다른 물적 기초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자신이 지금 인정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우리 대다수가 생산력의 형이상학에 너무나 깊이 빠져있기 때문에, 오늘의 이 어처구니없는 생명파괴의 일상화와 구조화를 뿌리로부터 극복하는 길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녹색평론≫이 부정하는 것은 바로 '생산력의 형이상학'이다. 자본주의적 삶의 근대적 파행성이야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경제물신주의의 욕망은 지구상의 모든 대상물의 본래가치를 교환가치로 환치시킴으로써 인간을 자본의 노예로 전락시키고 있음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 자본에 대한 불가사리같은 탐욕은 자본이 무한하게 생산해내는 이미지와 기호를 소비하는 데까지 이르며, 유무형의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본주의의 묵시록적 현실이 어떻게 현현될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이와 같은 자본주의적 삶을 부정하며 인간해방의 서사를 꿈꿔왔던 현실사회주의적 삶의 근대성 역시 국가독점자본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현실사회주의권 국가의 생산력 향상을 위해 자본주의 못지 않게 자연 생태계를 파괴시켜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각기 나름대로의 정체(政體)를 달리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쌍방 모두 인간다운 세상을 건설한다는 근대적 삶을 향한 기획과 그 실천에서는 과학기술을 동원해 한정된 자원을 이용하여 생산성을 증대시킴으로써 물질적 만족과 그에 따른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적 기획이 전인류의 복지는커녕 몇몇 국가의 제한된 부류의 인간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속속 목도되고 있는 현실이다. 더욱 개탄스러운 현실은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속하는 개별국가의 국가발전주의 전략에 의해 자연 환경이 복구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히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진보적 삶을 추구하였으나, 진보는 그 이름이 무색할 만큼 인간을 억압하는, 더 나아가 인간의 삶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삶마저 절멸시키는 문명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녹색평론≫이 기획·실천하고자 하는 진보는 이러한 것과 그 궤를 달리한다. ≪녹색평론≫이 추구하는 진보는 예의 문명적 위기의 근본적 원인인 '생산력주의'를 부정함으로써 대안문화를 일상의 영역에 뿌리내리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낯익은 것을 발본적으로 부정하는 인식의 대전환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급진적이며 혁명적이다. '생산력주의'를 부정하고 '생산력의 형이상학'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 관성화된 생산양식의 진보와 문명적 삶에 대한 인식을 전복적으로 사유하고 그것을 실천해야 할 과제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3. 환경문제에 삼투된 ≪녹색평론≫의 진보성

≪녹색평론≫의 이러한 이념과 실천적 방향성은 다각도로 모색되고 있는 환경문제에 대한 담론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하나는 지금, 이곳에서 직면하고 있는 환경문제의 실태에 대한 인문학적 시각이 국내외의 필진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예의 인문학적 시각이 이론 차원에서만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 당면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치열하게 모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을 ≪녹색평론≫이 동시에 병행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흔히들 90년대 이후 80년대의 성격을 담지한 진보 매체의 급격한 쇠락과 함께 ≪녹색평론≫처럼 이론적 실천과 실천적 이론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진보 매체를 만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녹색평론≫이 내게 보여주는 우직한 진보의 행보는 80년대와 성격이 다른 진보의 미더움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 그렇다면 ≪녹색평론≫은 자신의 이념을 현실의 장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을까?

3-1. 환경문제의 구체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
≪녹색평론≫의 진보 매체로서의 정체성은 환경문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일관성 있게 시도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일일이 그 개별적 사례를 들어 소개할 수는 없지만, 수돗물불소화 반대와 환경교육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이른바 수돗물불소화 논쟁을 통해 보건복지부의 무책임한 관료행정과 이러한 행정을 부추긴 일부 치과계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비판적 진보 매체로서의 역할을 ≪녹색평론≫이 웅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수돗물에 불소를 투입하여 충치를 예방하자는 보건복지부의 의료행정이 개발독재시대 병폐 중 하나인, 밀어붙이기식 관주도의 일방통행식 관료주의 행정과 다를 바 없으며, 이러한 문제점을 방관하지 않고 바로잡고자 한 시민의지의 적극적 발현이라는 점에서 ≪녹색평론≫의 비판적 성찰은 소중하다. 물론 ≪녹색평론≫의 수돗물불소화 반대의 입장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돗물불소화를 찬성하는 입장보다 더욱 객관성 있는 과학적 근거와 책임있는 윤리적 근거를 통해 수돗물불소화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비판은 전국의 환경운동 시민단체와 환경운동가, 그리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일반 시민들과 함께 개최한 '수돗물불소화 반대 2001 전국대회'를 통해 수돗물불소화가 초래할 생태계 파괴와 국민 건강 위협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림으로써 국민의 건강을 담보로 한 무책임한 관료행정의 맹점을 적시해내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녹색평론≫이 줄기차게 제기한 수돗물불소화 반대의 입장이 이처럼 전국적 지지와 시민의 힘을 결집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환경문제에 대한 접근이 우리의 일상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환경문제의 대부분이 산업화시대가 야기한 문제점(공해, 오염)에 국한되거나, 동식물의 생태계 파괴와 관련된 생물학적 부분에 치우친 감이 있다면, ≪녹색평론≫이 그 가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수돗물불소화 반대의 입장은 바로 우리의 일상성과 밀착돼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환경문제의 접근과 관점을 달리한다. 그렇다고 기존의 환경문제 접근이 중요성을 상실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환경문제는 어느 특별한 사안이 중요성을 더 하느냐는 우선순위의 문제가 아니듯이 생태계의 삶을 총체적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는 경중을 달리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강조하는 바는 이제 환경문제는 원론적이거나 환원론적 접근이 아니라 우리들의 실제 생활과 가장 밀접한 부분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수돗물불소화 반대에 시민들의 역량이 응집되어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고, 다른 문제로까지 자연스레 확장될 수 있는 계기를 가질 수 있는 사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수돗물불소화 반대의 입장을 천명한 ≪녹색평론≫이 그동안 축적시킨 구체적 실천의 과정은 환경문제 해결에서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모범적 사례라 할 만하다.
이처럼 수돗물불소화 반대처럼 환경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 외에도 ≪녹색평론≫이 보여준 비판적 성찰 중 대표적인 것은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녹색평론≫이 환경에 대한 인문학적 깊이를 추구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녹색평론≫이 추구하는 이념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생산력주의'로 치닫고 있는 우리의 교육적 현실을 근원적으로 비판해야 될 과제가 제기된다. 아무리 환경과 생명에 대한 중요성을 부르짖고 환경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계몽'하더라도 정작 중요한 환경문제를 개인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레 내면화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시적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세계는 뿌리깊은 '생산력의 형이상학' 속에서 파국으로 치닫는 무한질주를 하고 있는 터에 어느 특정한 순간, 어느 특정한 세대에만 국한된 환경문제에 대한 '계몽의지'는 다음 세대로 문제의식이 이월되지 않은 채 간곳 없이 증발돼 버릴 운명에 직면한다. 따라서 이러한 비극적 운명이 도래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바로 교육문제의 해결에 달려 있다는 게 ≪녹색평론≫의 문제의식이다. 그리하여 ≪녹색평론≫은 틈날 때마다 우리 교육의 현실에 대해 뼈아픈 지적을 하곤 했다. 그 비판의 핵심에는 "교육을 노동력 양성과 공급기구로 좁혀 보아 수단화하는 편협하고 뒤집힌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비판적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국가발전주의 전략의 일환으로 노동의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시장에 공급되는 노동력을 양성시켜야 하는데, 그러한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교육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근대화의 일꾼 혹은 산업화의 일꾼에서 신지식인이라는 그럴듯한 위장술로 급변하는 노동시장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노동력을 탈없이 제공하는 교육적 패러다임과 근본적으로 문제의식을 달리하는 교육적 풍토의 모색을 ≪녹색평론≫은 주장한다.
그런데 이 교육 문제에 대한 ≪녹색평론≫의 비판을 접할 때 내가 주목하는 글은 박강리의 [교과서를 통해 본 환경교육](≪녹색평론≫1997. 7·8. 35호)이다. 내가 이 글에 각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청소년들의 중등교육 과정의 교과서에서 환경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으며, 교육되고 있는가에 대해 예리한 비판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강리의 주장은 어떤 문제에 대한 근원적 비판과 근원적 해결을 추구하는 ≪녹색평론≫의 입장에서 볼 때 다소 개량주의적 시각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비판이 갖는 설득력은 충분히 귀기울일 만하다. 그의 비판적 성찰의 대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열대림의 파괴, 사막화 등 제3세계 환경자원의 파괴와 피해문제를 단순히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이기심으로 축소함으로써 제3세계의 그러한 문제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국제간의 역학관계가 은폐되어 있다.

② 환경문제에 대한 위기 진단과 그 해결책을 위한 대안제시가 너무나 원론적이고 상투적이다.

③ 생명의 진실을 가르치는 과학교육은 생명에 대한 기술주의적 접근으로 치중한 가운데 생명에 대한 철학에 토대를 둔 생명교육이 등한시 되고 있다.

④ 여러 교과목 사이에 환경문제에 대한 통합적 시각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①∼④는 비단 교과서에 드러난 환경교육의 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위 네 가지 사항은 지금, 이곳에서 환경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립하는 데 쉽사리 지나쳐서 안될 중요한 비판적 지점이기도 하다. 널리 알려졌듯이 알튀세르의 말을 빌리자면, 교육제도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인 바, 한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는 교육적 수단을 통해 국민을 자연스레 지배질서로 편입시킨다. 그때 중요한 매개물이 바로 교과서라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이것은 환경문제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 폐허화된 절대빈곤의 나락에서 1960년대부터 국가발전주의 전략에 의해 추구된 근대화에 따라 형성된 지배이데올로기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성장신화를 전국민에게 내면화시켰던 것이다. 그 내면화는 말할 필요 없이 국가의 발전을 위한 개발의 불가피성에 대한 불감증의 심리 기제와 맞물리면서 환경과 생명에 대한 인식은 도구적 이성의 개발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때문에 ①과 같은 문제점은 제3세계의 현실 만이 아니라 곧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되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될 뼈아픈 지적이다. 우리 역시 지난 날 중동지역의 개발에 이어 작금 동남아와 중국을 비롯한 제3세계에 진출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고자 해당 지역을 개발하는 데 동참하고 있는데, 이는 그 지역의 생태환경을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 근대전환기 무렵 서구열강의 이권 쟁탈의 희생양으로서 국토가 유린당하고 생태환경이 크게 훼손된 것을 경험한 과거를 돌이켜볼 때 제3세계의 환경문제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냉철한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이 요구된다. 그런가 하면 그나마 진단되고 있는 환경문제와 그 해결 대안이라는 것이 서구의 자연정복적 세계관의 폐단과 그에 상충하는 동양의 자연친화적 세계관만을 원론적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는 바, 이것 역시 작금의 환경문제에 대한 진단과 대안을 모색하는 면에서는 진부하기 짝이 없다. 서구/동양의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이 얼마나 현실성을 지니고 있는지 그 근본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요구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의해 굴절된 환경문제의 인식을 극복해야 될 것이다(②). 그러자면 생명체의 신비를 생물학적 시각으로 탐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적 시각을 고루 겸비한, 즉 '생물교육'에서 '생명교육'으로의 인식 전환이 요구된다(③). 물론 이것은 세부적으로 외양을 달리하고 있는 여러 교과서 사이에 학제적(學際的) 접근을 통해 환경문제에 대한 통합적 접근이 가능해야 되는 것이기도 하다(④).
이처럼 현재의 교과서를 통해 본 환경교육의 실태는 막연히 생각하는 것 이상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터져 그 균이 살갗 깊숙이 침투해들어감으로써 어느덧 우리의 온몸 구석구석으로 병균을 전이시키고 있다. 민족의 미래가 내걸린 우리의 교육 현실이 환경에 대한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직시해야 된다. ≪녹색평론≫만의 몫으로 이것을 진단하고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제는 정말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해결 대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될 것이다. 비판을 하되, 비판이 비판으로 머무는 게 아니라 비판을 넘어서 어떤 현실적 대안을 구체적으로 강구하지 않는다면, 교육은 물론 환경문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현실과 유리된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만 남을 것이다.

3-2.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대안문화운동
진보 매체로서의 ≪녹색평론≫이 이렇듯이 환경문제를 중심으로 한 비판적 성찰의 명민함을 보여주고 있다면, ≪녹색평론≫을 지탱시키고 있는 또다른 한 축은 비판을 넘어서는 현실적 대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은 으레 선언적 명제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기에 대안다운 대안이 제출되지 않았을 경우 도리어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대안을 내세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대안을 내세우자면 그 대안이 담지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근원적 사유뿐만 아니라 그것에 기반한 미래의 이러저러한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선지자적 통찰력마저 소유하고 있어야 된다. 물론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데 중요한 동력을 제공할 주체의 의지와 윤리적 책임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이처럼 대안과 관련된 문제가 그리 녹록치 않기에 ≪녹색평론≫이 보여준 환경문제의 해결 대안을 찾으려는 모색은 아름답다. 그 중에서 ≪녹색평론≫이 가장 염두에 두는 바는 '새로운 차원의 농업중심의 사회'를 구축하는 데 있다. "협동적인 공동체를 만들고, 상부상조의 사회관계를 회복하고, 하늘과 땅의 이치에 따르는 농업중심의 경제생활을 창조적으로 복구하는" 것이 ≪녹색평론≫이 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대안문화이며, 대안적 삶이다. 그 대안의 일환으로 ≪녹색평론≫은 공동체학교의 건립을 위한 구체적 실천 방향을 수립하고 있다. 조금 앞서 이미 생태환경의 근원적 문제점 중 하나인 학교 교육의 현실을 음울하게 진단한 바 있듯이 당면한 반환경적 교육을 친환경적 교육으로 그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서는 가히 '혁명적'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게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이상으로 치부될 수 없다. 윤구병의 공동체학교 건설을 위한 열정적 노력은 ≪녹색평론≫이 실현하고자 하는 대안 학교가 단지 관념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윤구병의 [공동체학교를 위한 제언](≪녹색평론≫ 1999. 3·4, 45호)에서는 현행 학교 교육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킴으로써 친환경적 교육을 실천할 수 있는 현실 가능한 세부적 항목들이 꼼꼼히 기술돼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친환경적 교육에 대한 여러 대안도 대안이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대안 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생산력주의'로 인해 이미 임계점에 도달한 현재의 생활문화를 대신할 수 있는 대안문화를 창출하고, 그 대안문화가 착근할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윤구병의 표현을 빌리자면, '산살림, 들살림, 갯살림'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기초살림'에 기반한 '기초 생산공동체'의 복원이 그것이다. 그는 이러한 '기초 생산공동체'의 복원이 중장기 계획을 통해 차근차근 실천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녹색평론≫이 윤구병의 대안 학교와 대안문화 및 새로운 공동체 구축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에는 "기초 생산공동체를 되살리는 대안교육에 성공하면 이 성과는 국내외로 널리 확산되어 인류에게 지속가능한 미래를 열어주는 한 중요한 사례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 때문이다. 반드시 윤구병의 대안 학교가 대안문화를 창출해내는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모색하여 실천하고 있는 대안 학교는 중장기적으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보증할 수 있는, 그리하여 쉽게 포기해서 안될 대안문화를 육성시킬 수 있는 중요한 매개수단이라는 사실을 ≪녹색평론≫은 주목하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10여년 동안 환경문제라는 단일한 주제를 뚝심있게 고집하고 있는 ≪녹색평론≫에 애정을 쏟는 것은 바로 이처럼 암담하게 목도되고 있는 비관적 현실을 넘어서는 ≪녹색평론≫의 유토피아적 열망 때문이다. 대안문화를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구체적 현실에 기반한 가운데 실현 가능한 대안문화를 찾아내려는 노력이야말로 ≪녹색평론≫만이 지닌 진보성이다. 이것은 ≪녹색평론≫이 지금, 이곳에서 실천할 수 있는 대안문화'운동'이나 다름이 없다고 할까. 이 점은 진보 매체의 성격을 살펴보는 데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80년대의 여러 진보 매체가 비록 80년대 후반 경직된 정치경제학적 이념에 의해 일상의 구체성에 밀착하지 못한 이론적 도그마화의 폐단을 낳기도 하였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간과해서 안될 것은 파행적 근대성을 낳은 자본주의적 삶을 부정한 대안적 삶을 향한 운동을 치열하게 모색하였다는 사실이다.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의 역량을 응집시키기 위해 집단적 조직을 결성하고 조직의 극대화된 역량을 통해 변혁운동을 가열차게 전개한 것은 80년대의 진보 매체가 얻은 큰 수확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운동이 갈수록 이념 정향에 치우쳐 다층적 현실을 섬세히 고려하지 못한 한계점을 낳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나는 ≪녹색평론≫이 80년대의 진보 매체들과 그 성격이 여러모로 분명히 다르지만, 자신들 매체의 이념을 현실의 삶 속에서 연동하는 가운데 '운동'을 통해 실천하고자 하는 면에서는 공통점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90년대 이후 진보란 이름에 값할 매체를 딱히 무엇이라 지칭할 수 없는 현실에서 ≪녹색평론≫이 보여주는 대안문화'운동'은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안문화'운동'과 종래의 시민운동은 무엇이 다른가?

기존의 체제 내에서 정부의 환경정책을 비판하는 환경운동이 여성의 정치참여를 주장하는 여성운동은 대안문화운동이라기보다는 시민운동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경제성장 제일주의를 거부하고 생태 공동체 마을 만들기 운동을 벌이거나 도농직거래운동, 지역화폐운동 등을 통해 비시장적 대안경제를 만들려는 노력은 대안문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운동이 가부장제를 거부하며 보살핌과 나눔의 문화를 모든 사회적 약자와 함께 나누며 파괴된 자연을 살리려는 운동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대안문화운동이 될 것이다. 또 교육운동도 입시제도 개선을 위한 운동이 시민운동이라면 학교를 거부하는 탈학교운동, 대안학교운동, 가정학교운동 등은 대안문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동성애자들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어떠한 차별대우도 받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면 시민운동이지만 그것이 부모와 자식으로 이루어지는 기존의 가족제도를 거부하고 다양한 가족제도의 공존을 주장한다면 대안문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운동/대안문화운동의 구별은 명확하다. 시민운동이 기존의 생산양식 테두리 안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해결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 반면 대안문화운동은 기존의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를 부정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전복적이며 발본적이며 혁명적이다. 기존의 낯익은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기에 그렇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바깥으로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 누구도 근대적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바깥을 넘어보지 않았기에 그 월경(越境) 행위는 무모한 모험일 수밖에 없다. 마치 수평선 너머 알 수 없는 신대륙을 찾아가는 모험처럼 그 모험은 온갖 위험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모험이 수반되지 않는, 위험과 시련을 견뎌내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녹색평론≫이야말로 대안문화운동을 통해 우리에게 낯익은 이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대안문화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이 땅의 환경운동가의 선구자인 서한태의 전언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서.

저(서한태―인용자)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운동이 있는 곳에 반드시 대책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끈질긴 운동을 펼칠 때, 모든 이가 쾌적한 환경속에서 건강하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4.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녹색평론≫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녹색평론≫의 10여년 동안 펼친 생태환경에 대한 전방위적 활동을 꼼꼼히 살펴보지 못한 점이 이 글의 결정적 한계다. 글을 마무리 지을 시점에 이르러 나는 불현 듯 나의 일상 속에서도 대안문화―'수중분만'이라는 방식을 통한 출산문화―를 체험했던 사실을 고백해야겠다. 물론 이 고백은 처음은 아니다. 이미 나와 함께 대안문화를 체험한 아내는 월간 ≪말≫(2000. 4)에 [가장 훌륭한 산파는 자연]이란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때 아내는 한 여성으로서, 그리고 한 생명을 탄생시킨 어머니로서 자신이 경험한 출산에 기반하여 기존의 관성화된 출산문화에 대한 성찰을 보인 바 있다.

그러나 출산이 무엇을 위해서인지 그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고 화려한 겉모습에만 도취되어 따르고자 한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수중분만은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출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나 역시 수중분만의 장점을 강조하고는 있지만 수중분만이 새로운 출산문화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역설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기존 출산방식의 문제가 무엇인지 따지고 폭력없는 아름다운 탄생을 일상화시키려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우선 남편이나 가족을 산모와 격리시키는 시스템 자체를 고쳐야 한다. 함께 힘을 다해 생명을 기다리는 그 소중한 순간을 놓쳐선 안된다.

아내와 함께 체험한 수중분만이라는 새로운 출산문화가 계기가 되어 다양한 형태의 출산문화에 대한 정보를 접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지금까지 우리에게 낯익은 기존의 출산문화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대안문화였다. 기실 이러한 나의 출산문화에 대한 체험은 임영신의 [평화로운 출산, 탄생의 축제](≪녹색평론≫ 2000. 5·6, 52호)라는 글 속에서도 접할 수 있었다. 이제 대안문화의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모색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점을 중시 여겨야 할 것이다. 바로 그 한복판에 ≪녹색평론≫이 놓여 있다.
그런데 ≪녹색평론≫의 이러한 노력에서 상기해야될 점은 아무리 ≪녹색평론≫의 이념이 타당하고 그 구체적 실천들이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녹색평론≫을 믿고 지지하는 독자들의 사랑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녹색평론≫을 사랑하는 마니아들의 전폭적 지지가 있기에 ≪녹색평론≫은 척박한 잡지 시장에서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무의 생명을 앗아가는 펄프사용을 거부하며 누렇고 거친 재생지를 고집하는 ≪녹색평론≫이 추구하는 생태환경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대안문화운동을 향한 그들의 '믿음'이 있기에 ≪녹색평론≫은 더디지만 결코 더디지 않은 우직한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녹색평론≫과 이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모두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노력을 보이고 있다.
다만 ≪녹색평론≫에 대해 아쉬운 점은 환경문제에 대한 근원적 사유를 통해 대안문화를 세우자는 기본 전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이러한 ≪녹색평론≫의 기획과 실천이 우리의 분단체제에 따른 민족모순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민족모순을 비껴나고서는 ≪녹색평론≫이 추구하고 있는 여러 현실적 대안들이 공염불로 전락되기 십상이다. 요즘 연일 미국의 부시행정부는 우리 민족의 현실에 대해 강대국의 패권주의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바, 결국 저간의 문제를 가로지르고 있는 것은 바로 분단체제의 민족모순에 있다. 물론 모든 사회적 현안을 분단체제의 문제로 귀결짓는 것은 현명한 사태 판단이 아니다. 하지만 이 땅의 각종 모순의 근인(根因)이 분단체제에 있는 만큼 ≪녹색평론≫의 환경문제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창간호부터 62호를 내는 동안 나의 과문일지 모르겠으나, 분단체제와 관계를 맺은 ≪녹색평론≫ 특유의 비판적 성찰과 대안문화의 모색을 만나볼 수 없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에 대량으로 쏟아부은 미사일이 아프가니스탄 민족 구성원의 생존과 아프가니스탄의 생태환경을 파괴시킨 현실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한반도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는 분단체제의 현실의 맥락 속에서 그동안 축적시킨 ≪녹색평론≫의 발본적 사유와 현실적 대안의 강구를 기대한다. 왜냐하면 ≪녹색평론≫의 노력이 분단체제의 극복과 결코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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