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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특집/'생명의 나무'를 키우는 식물적 상상력/김요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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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요안
댓글 0건 조회 6,520회 작성일 02-06-23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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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김요안
1998년 현대시학 문학평론으로 등단. 현재 한양대, 외대 강사.

'생명의 나무'를 키우는 식물적 상상력


  인간이 앓고 있다. 자연이 앓고 있다. 그리고 문학이 앓고 있다. 자연은 저만치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인간의 시선 속에, 인간의 사유 속에 존재한다. 인간의 해석이 개입되지 않은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 無와도 같다. 그렇다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위나 지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고 그렇기에 자연은 스스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정신과 물질로 이분된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정신을 대변하고, 자연은 인간의 물적 존재 기반이 된다. 하지만 인간을 통해 나타난 자연의 정신은 극히 제한적이고 심지어 왜곡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은 인간에게 일부분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삶의 조건으로 또는 환경으로써의 자연은 인간에 의해 그 모습을 달리 나타낸다.
  현대인의 삶의 환경은 꽃피고 새가 우는 산과 들이 아니다. 음풍농월하며 낚싯대를 드리우는 강과 바다가 아니다. 순환하는 자연의 흐름 속에서 씨앗을 뿌리고 흙을 일구는 농촌이 아니다. 문명 속의 현대인은 삶의 편리를 위해 강을 막아 댐을 건설하며 다리를 놓고, 산의 나무와 흙을 파헤쳐 마천루와 같은 빌딩 숲을 세운다. 그렇게 세워진 도시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환경이다. 그럼에도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존재의 환경을 자연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극히 비현실적인 몽상이 될 것이다. 생명공동체로서 함께 얽혀지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서만 그리는 자연의 형상은, 이념으로서의 문학과 다를 바 없는 헛된 망상이나 추상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환경문학은 몽상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태어나야 한다.
  환경문학은 문명사적 가치전환으로서의 '생명주의' 문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의 품속에 뿌리 내릴 때 우리의 생명이 지속될 수 있다는 시대인식으로서의 전환기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대와 사회가 바뀜으로 새롭게 다가 선 인간의 문제나 인간을 둘러싼 환경이라는 삶의 조건에 대한 문학적 성찰이 곧 환경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인간의 역사는 자연에 대한 정복의 역사라 할 수 있을 만큼 자연에 대한 인간 우위나 인간 중심의 사고로 이어져 왔다. 그리고 갈수록 비인간화되는 삶의 모습(물질만능, 생명천시, 타자에 대한 무관심 등)은 파괴된 자연에 대한 또 다른 관심을 낳았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사랑이 진실 된 것도, 확신에 찬 것도, 완전한 것도 아니기에 이러한 관심은 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그럼에도 자연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언제나 인간에게 늘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어 준다. 자연은 모든 생명의 삶의 始原地가 되기 때문이다.  
  9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생명'의 바람은 산업화와 기계문명에 대한 거부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상생(相生)을 핵으로 한 새로운 문학적 통찰을 이끌었다. 그리하여 생태파괴와 환경오염에 대한 비판적 성찰, 생명에 대한 새로운 자각 등이 시작품의 주요한 창작 동인이 되었다. 이런 시들은 '환경시', '생태시', '생명시'등의 명칭으로 다양하게 불려지지만 그 중심에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새로운 깨우침이 담겨 있다. 자연은 이전처럼 이상적인 삶의 고향이 될 수도 없고, 개발하고 극복해야만 할 반문명적인 삶의 현실도 아닌, 우리의 삶의 토대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쓰고 있다.
  일회용 비닐우산이 되어 버린
  절망을 쓰고 있다.

  비극이 되기에는
  너무나 흔해빠진 우리 시대의 비
  대량생산의 장미를 쓰레기통에 가득 채우는
  전천후 산성비 오늘도 내린다.
                          ― 이형기, 「전천후산성비」

  '절망'이라는 우산을 쓸 수밖에 없는 삶의 현실은 생태환경의 파괴에서 비롯된다. 인간 중심의 산업화와 도시계발은 기껏 쓰레기통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장미 빛 치장에 그칠 뿐, 건강한 삶을 발아해 낼 수 있는 생명의 빛은 아니었다. 자연의 빛을 가린 채 우리 몸 속에 스며든 눈부신 문명의 빛은 생명의 꽃을 피워내지 못한다. 시인이 바라 본 현대사회는 온전한 삶의 토양이 파괴되고 생장이 멈춘 절망의 공간이다. 공장에서 기계로 대량생산되는 제품들은 의식주와 관련된 생필품뿐만이 아니라 심미적이며 정신적인 욕구까지 충족시켜줄 수 있는 무형의 가치상품까지 포함된다. '장미'라는 꽃은 바로 그러한 것으로, 내적 세계의 정신적 정원에 피어나는 상품이다.
  김춘수의 시에서처럼 (장미) '꽃'은 단순히 지각되고 소비되는 대상이기보다는 사용자인 인간주체에게 하나의 몸짓으로 다가와 존재의 의미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같은 프로그램과 생산라인에서 획일적으로 찍혀 나오는 모든 생산품들은 존재의 의미가 되어 주기보다는 그 즉시 소비되어 버려지는 즉물적이고 순간적인 소모품이 된다. 모든 상품들은 헛된 욕망으로 게걸스럽게 소비되고 나면 재생 불가능한 쓰레기가 된다. 대량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대의 산업 구조 속에 인간의 존재성마저 위협 당하고, 새롭게 형성된 삶의 환경은 더욱 무서운 결과를 계속하여 낳고 있다. 그것은 산업화에 의해 자연생태가 파괴되고 그 부작용으로 인체가 고통받는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 자체가 생명의 의미를 전해주지 못하는 획일적인 테크놀러지 속에서 황폐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과 정신은 자연을 지배하는 과학기술 앞에서 계속 사그라지고 있다. 인간은 자연과 한 몸이기에 이는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자연의 생명력을 하루빨리 회복하지 않는 이상, '대량생산의 장미를 쓰레기통에 가득 채우는 전천후 산성비'는 영원히 우리들 머리 위에 절망의 소나기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새마을 회관 앞마당에서
  자연보호를 받고 있는
  늙은 소나무
  시원한 그림자 드리우고
  바람의 몸짓 보여 주며
  백여 년을 변함없이 너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송진마저 말라버린 몸통을 보면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시멘트로 밑둥을 싸바르고
  주사까지 놓으면서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 김광규, 「늙은 소나무」

  우주가 탄생하던 무렵 지고의 신 마코나이마는 온갖 짐승들을 창조하고 아들 시구에게 그들을 다스리게 했다. 그때 지상에는 거대하고도 아주 경이로운 나무 한 그루가 솟아 있었다. 가지에는 갖은 열매들이 열리고, 줄기 둘레에는 바나나와 옥수수를 비롯한 온갖 곡식들이 자라고, 뿌리 주변에는 고구마·감자·마 등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 이를테면 그 나무는 인간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모든 먹거리를 제공해주는 은혜로운 나무였다. 천신(天神)의 아들 시구는 이 나무의 혜택을 온 세상에 퍼뜨리고 싶어했다. 이 나무가 자라는 곳에는 굶주림과 배고픔 따위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구는 나무를 베어서 그 조각과 씨를 세상 곳곳에 뿌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 기적의 나무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린 순간 시구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베어낸 나무의 그루터기 안은 동굴처럼 뻥 뚫린 채 오직 물만 가득 차 있었는데, 그 물은 땅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거대한 수원지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무는 그 물을 빨아들여 온갖 열매와 곡식을 제 몸 안에서 키워내었고, 또 그러면서도 지하의 수맥이 터져 땅 밖으로 넘쳐흐르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 사실을 재빨리 간파한 시구는 야자나무 잎으로 짠 덮개를 그루터기에 덮어 홍수를 막았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미봉책은 오래 가지 못했다. 게으르고 심술궂은 한 갈색 원숭이가 그 뚜껑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그루터기 안에서는 엄청난 양의 물이 솟아올라 땅을 뒤덮어버렸다. 시구는 짐승들을 거느리고 산으로 달아나 야자나무 위로 올라갔다. 폭풍과 함께 어둠이 밀어닥쳤다. 홍수 기간 동안 그들이 살아남는 데에는 야자 열매가 큰 도움이 되었다. 물이 빠지자 그는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그는 두 조각의 나무를 비벼 불을 지피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어나갔다.
                                 ― 남아메리카 북동 해안에 있는 가이아나의 아카와 족 설화



   자연의 품속에서 생명의 젖줄을 빨며 성장해 온 인간이 자연을 생활의 부속물정도로  취급한다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마치, 자연을 관리해야 할 대상이거나 개발해야 할 주변환경 정도로 간주한다면? 한 마디로 자연에 대한 인간 중심적 사고는 자연을 개발하기는커녕 그전까지 받던 자연의 혜택마저도 잃게 할 것이다. 위의 설화를 통해 볼 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인간에게는 재앙이 닥치게 된다. 하지만 자연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언제나 인간의 삶의 터전으로 남는다. 그러나 자연의 은혜를 망각한 인간은 현대문명 속에 자연을 박제시킨다. 기분전환을 위한 풍경으로, 보호되어야 한다는 맹목적 당위성으로 박제되는 자연은, 인간에 의해 그렇게 숨통이 막힌다. 위의 시에서 우주의 생명으로 불멸성의 상징이 되는 나무는, 인간에 의해 그 밑둥이 시멘트로 막혀진 채 죽어가고 있다. 나무의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그 아픔을 알지 못하는 새마을 회원들(개발의 역군)은 자연과 이어진 자신들의 생명의 고리가 천천히 풀려져 가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흙, 물, 바람(공기)등은 우주의 생명을 이루는 근원 질료로 자연계의 모든 생명을 양육하는 풍요로운 젖줄기가 된다. 약 70%가 물로 구성된 인간의 몸 역시 자연의 근원 질료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 생명을 이어간다. 공기(산소)와 물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 없고, 그것이 오염되었다면 인간의 몸 역시 오염되는 것이다. 자연의 기본 원소들이 유기적인 생명의 고리로 이어져 있다면 인간 역시 그 고리의 일부가 된다.
  땅(흙) 속의 거대한 수원지에 뿌리 내린 채 그 물을 빨아들이며 태양과 바람을 맞으며 온갖 열매와 곡식을 제 몸 안에서 키워내는 나무가 아프고 고달픈데도 인간은 짐작조차 못한다. 이미 인간은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만 인간중심의 시각으로 자연을 보살피고 즐기려 한다. 하지만 어찌해도 인간은 자연과 이어진 생명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기에 자연이 날로 파괴될수록 인간은 끔직한 경험을 하게되며 공포감 속에 몸을 떨 수밖에 없다. 최승호의 「공장지대」는 이를 섬뜩할 정도로 그려내고 있다.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정수리 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 최승호, 「공장지대」

  인간에게 길들여진 자연은 황폐해 질 수밖에 없으며 황폐해진 자연 속의 인간 역시 온전할 수 없다. 생태계의 먹이사슬처럼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과 물질들은 생명고리라 부를 수 있는 유기적 관계망 속에 놓여있다.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에 수많은 공장들이 들어서고, 눈부신 문명의 빛은 레이저처럼 자연의 살점들을 깍아 내고 있다. 하늘의 오존층은 점점 크게 뚫려가고, 지상의 흙과 강은 점차 썩어가고 있다. 그러나 더욱 무서운 것은 인간 정신의 황폐화이다. 외부 환경을 변화시키는 테크놀러지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새로운 지각체험을 유발하고, 인간의 인식을 대상화시킨다. 갈수록 대상화되는 인식의 체험과정은 즉물적이고 순간적인 정신적 삶의 환경을 조성한다. 자연 속에 내재된 가치와 질서가 가려지고 파괴되었을 때, 인간의 내적 세계가 온전할 수는 없다.
  거대한 소비 대중문화 속의 시인들에게 변화된 체험환경(자연을 통한 1차 체험이 아닌 영화, TV, 컴퓨터 등의 매체를 통한 체험)은 거짓된 욕망과 왜곡된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이남호의 말처럼 "자연이 상실된 빈 공간을 가득 채우는 대중문화의 악마적 매혹은 자연은 물론 삶의 정신도 망각"시켜 버리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무뇌아'는 단순히 환경오염에 의해 태어난 기형아정도가 아니다. '공장의 굴뚝'으로 비유된 현대문명과 간통한 인간이 겪는 비극적 결과다. 환경오염은 자연의 생태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세계까지 황폐화시킨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의 몸과 정신은 자연 속에서 생명을 얻어 자라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염된 자연환경은 인간의 몸과 정신을 기형적으로 만든다.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는 백지와 같은 인간의 뇌('무뇌')와 '허연 폐수'가 흘러내리는 산모의 유방, 그리고 탯줄대신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은 인간과 한 몸으로 이어져 있는 자연이 파괴되었을 때 인간에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쓰여진 환경시들에는 쉽게 돌이킬 수 없는 파괴된 삶의 환경에 대한 시인의 위기 의식이 드러난다. 앞서 살펴 본 시들에서는 파괴된 자연환경을 바라보는 시인들의 시각이 진지하게 드러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위기 의식의 발로일 뿐 자연과 함께 하는 살아있는 시적 호흡은 아니다. 자칫 이러한 시들은 환경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경고성 문구에 그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고는 환경운동단체나 매스컴의 캠페인을 통해 보다 분명히 전해지고 그에 대한 공감을 살 수 있다. 자연의 생명력이 시작품을 통해 형상화되기 위해선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로 뻗어 오르는 '영원한 생명'의 나무처럼 부드러운 식물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밖'에 있는 자연을 주시하는 예리한 시선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시인의 따뜻한 숨결이 묻어나야 한다.

  山에는 꽃피네/ 꽃이피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피네
  山에/ 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

  山에서 우는 적은새요/ 꽃이좋아/ 山에서/ 사노라네
  山에는 꽃지네/ 꽃이지네/ 갈 봄 여름없이/ 꽃이지네
                                       ― 김소월, 「山有花」

  소월의 시에는 자연 속의 삶의 시간과 공간이 함께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공 속에는 생명을 지닌 각 개체들이 相生하고 있다. 저만치 피어 있는 꽃도 단절된 삶의 공간 속에 홀로 놓여진 것이 아니라, 새가 존재할 수 있는 의미가 되어 새로운 삶의 공간을 함께 열어 가는 것이다. '저만치 혼자 피어 있는 꽃'과 '새가 함께 사는' 공간은 영원히 피고 지는 생명의 흐름이 순환되는 자연공간이다. 즉 자연은 개체가 존재하는 외부 환경이 아니라, 개체들과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그 의미를 드러내는 유기적 공간이 된다. 즉 산과 꽃과 새는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짐으로써 生命의 磁場을 확산해 가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을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의 질서로 살다가 병들고 죽는 유기적 존재이다. 사람과 자연은 하나의 유기체이며 인류가 생활하는 자연환경은 인류의 생존과 발전, 번영을 위한 존재기반이 된다. 「山有花」에는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화자의 시각처럼 이미 인간은 산과 새와 꽃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고리에 함께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에서 화자(인간)는 대상(산과 새와 꽃)을 굽어보는 우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대상과 함께 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적 존재로 볼 수 있다. 이럴 때 한 편의 시작품은 독자들에게 생생한 자연의 삶을 전할 수 있는 것이며, 자연 속에 내재된 생명의 의미까지 확인해 볼 수 있게 한다. 물론 그 의미는 타자(모든 생명체와 사물 그리고 자연현상까지)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가 아닌 생명공동체로 향하여 열려진 시각은 자연 속에 녹아든 시인의 식물적 상상력을 통하여 마련된다.

  삼월
  온몸에 새순 돋고

  꽃샘바람 부는
  긴 우주에 앉아
  진종일 편안하다.

  세월아 멈추지 마라
  지금 여기 내 마음에
  사과나무 심으리라.
                 ― 김지하, 「새봄·2」부분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희망의 미래를 가꾸고자 하는 생의 의지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삶의 현실은 산업화에 따른 지구 생태계의 파괴로, 지구 종말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다. 하지만 자연의 품속에서 모든 생명체와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생의 의지가 있다면, 생명의 단절이나 지구의 종말은 있을 수 없다. '세월아 멈추지 마라/ 지금 여기 내 마음에/ 사과나무 심으리라'라는 시구는 파괴되어 단절된 문명의 시간에 자연의 생명력을 다시 잇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 된다. 자연의 생명력이 시인의 몸과 마음속에 뿌리 내릴 때, 오염된 환경 속에 떨구어진 생명의 씨앗은 다시금 푸르게 싹터 날 것이다.  
   어느 순간에도 단절되지 않고 푸른 생명의 고리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인간과 대지, 자연은 하나가 된다. 땅에 뿌리내리고 하늘로 자라 오르는 나무는, 천지간의 모든 생명공동체에 열려져 있다. 이처럼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나무가 시인의 마음속에 심어져 있기에 시인의 '온몸'은 대지가 되고, 초록빛 생명의 새순이 돋아날 수 있는 것이다. 봄의 대지 위(시인의 몸)에 푸릇푸릇 돋아나는 새순의 초록빛은 영원한 우주의 생명력을 전해줌으로써, 광막한 우주의 한 자락에 앉아 있는 시인은 평온한 시간을 누릴 수 있다. 이미 시인은 서로 얽혀진 유기체적 우주자연의 일부이다. 그렇기에 「새봄·2」에서 '내 마음'에 심으려는 사과나무는 '생명의 나무'가 된다.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시인의 상상력은 생명의 소중함을 잉태하고 사랑을 낳는다.
  본원적인 생명의 뿌리에 닿아있는 시인의 식물적 상상력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삶의 시간 속에 온전한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만든다. 그것은 자연의 원리를 벗어난 인간 중심의 논리가 아닌, 생명공동체로서의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amor)을 통해서만 가능할 수 있다. 사랑을 의미하는 amor의 어원이 a(anti, 항거, 반대)+mor(죽음)이라 할 때, 자연에 대한 사랑은 곧 살고자 하는 생의 의지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에 시인이 마음속에 심고자 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는 우리 모두가 끌어안아야 할 생명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환경시' 혹은 '생태시'는 '생명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연 생명에 대한 피상적인 인식이나 어설픈 관심이 아니라 한 그루의 나무를 자랄 수 있게 할 땀방울이다. 거친 흙을 갈고 물을 대며 온갖 잡초를 뽑아 곡식을 수확하는 농부가 흘리는 땀방울, 그것은 자연에 대한 경외이며 생명에 대한 커다란 사랑일 것이다.
  자연 속에서 함께 호흡하며 생명을 가꾸는 농부와 같은 노력이 없을 때, 자연과 환경을 노래하는 시들은 죽음을 담은 관 위에 새겨지는 비문(悲文)에 그칠 수밖에 없다. 최근에 발표된 김종해의 시는 이런 우려를 씻어준다.

  내가 뿌린 씨앗들이 한여름 텃밭에서 자란다
  새로 입적한 나의 가족들이다
  상추 고추 가지 호박 딸기 토마토 옥수수 등의
  이름 앞에 김씨 성을 달아준다
  감상추·김고추·김가지·김호박·김딸기……
  호미를 쥔 가장의 마음은 뿌듯하다
       (……)
  흙의 뜻을 하늘에 감아올리는 가장은 바쁘다
  오늘은 아버지께 한나절 햇빛을 더 달라고 한다
  목마른 내 가족들에게 한 소나기 퍼부어 달라고 부탁을 한다
  아아, 살아 있는 날의 기도여!
                        ― 김종해, 「텃밭」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가장의 마음으로 텃밭을 가꾸는 시인의 모습은 정겹고 진실되다. 자연은 단지 인간 주변에 놓여진 환경이 아니라, 우리가 그 곳에서 함께 호흡하며 생명의 교감을 나누게 하는 존재의 텃밭이 된다. 시인의 家系에 새로 입적하는 식물들은 시인과 한 핏줄로 이어지는 자연의 생명이다. 흙(자연)의 뜻을 소중하게 감아올리는 시인은 자신이 뿌린 씨앗들에게 생명을 부여한 아버지가 되는 동시에 하늘의 아버지(자연의 주관자)의 피조물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지상의 시인은 노동의 땀방울을 대지에 흘리며 경건한 기도를 하늘로 올린다.
  「텃밭」에 드러난 시인의 삶의 모습은 파괴된 환경 속에서 앓고 있는 인간과 자연과 문학을 치유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날의 기도'가 될 수 있다. 생명의 뿌리를 보듬어 내는 식물적 상상력으로서의 글쓰기와 삶의 실천은 자연의 텃밭을 가꿀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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