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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특집/한국 환경 운동의 자취와 흐름/백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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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명수
댓글 0건 조회 4,300회 작성일 02-06-2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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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백명수
환경운동연합 부설 (사)시민환경연구소 연구원

한국 환경 운동의 자취와 흐름


들어가며
동족 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겪고 난 우리사회는 전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때문에 그 이후의 반세기는 국가재건이 지상최대의 목표인 개발 이데올로기와 반공 이데올로기의 시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개발에 대한 반대는 정권에 대한 저항과 도전으로 간주되었고, 때문에 한국사회의 환경운동은 근본적으로 대중실천적 운동양식을 지니게 된다.  
1960년대부터 진행된 경제개발우선정책과 독재정권 하에서 고도의 압축성장을 하며 많은 환경문제를 잉태하게 된다. 중화학공업 중심의 생산체제, 화학비료와 농약에 의존한 농업생산체제, 도시화와 산업화로 인한 서식지 파괴 및 생물다양성 감소, 핵 발전에 기초한 전력체제와 핵폐기물문제, 각종 난개발로 인한 국토의 파괴, 두산 페놀사건으로 대표되는 화학물질의 생태계 위협 등 수많은 문제가 나타났다. 이러한 환경 이슈들은 그 문제의 본질과 대응 수준의 발전에 따라 일정한 단계를 이루고 있으며, 87년 6월을 경과하면서 환경문제가 급속도로 시민사회의 주요 이슈로 떠오르게 된다. 더불어 90년대에 이르러서는 지구온난화와 유전자조작 등과 같은 지구환경문제가 대두되고 더 이상 환경문제가 한정된 지역 또는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공통의 과제라는 인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개발의 상징 '검은 연기'에 대한 저항의 시작
1960년대 경제개발이 국가의 최우선과제로 설정된 이래로 공단이 형성되고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는 잘사는 국가로 가는 차표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공단지역을 중심으로 주민들은 공장의 검은 연기, 하수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물이 더 이상 부의 상징이 아니라 지역의 농작물을 말라죽게 하고, 바닷가 인근에 양식하던 물고기를 떼죽음하게 하였으며, 더 나아가 주민에게 피부병과 같은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등 건강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공해나 환경오염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주민들은 공장의 매연·폐수 등으로 인해 점차 삶의 터전이 망가지자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일어서야 했다. 이러한 초기의 주민운동은 단순한 피해보상운동으로 그치고 있으나, 주민들의 생존권투쟁운동이 사실상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태동이었다. 1965년 5월 부산 감천화력발전소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 25만 명은 검찰에 매연분출 가처분명령을 신청하였으며, 1969년 공단이 집약적으로 들어선 울산지역 삼산평야 주민들은 한국알루미늄공장이 들어선 후 말라죽기 시작한 벼들에 대한 피해보상을 요구하였다. 같은 해부터 여천·광양지역에서도 어장피해가 속출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 후반에는 낙포리 마을에서 주민들에게 눈병과 피부병 환자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주민들은 정부에 농작물 보상과 이주대책을 위해 진정서를 제출하였으며, 이후 공해대책주민위원회까지 결성하여 보다 조직적으로 공장의 매연, 폐수 등 공해피해에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공단지역주민을 중심으로 한 피해보상운동은 당시의 군사독재정권과 경제개발 우선의 국가시책으로 인해 국가보안에 대한 저항으로 인식되어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공해문제의 사회적 부각
경남 울주군 온산면, 이 지역은 1974년 건설부가 산업기지 개발지역으로 고시하면서, 비철금속·석유화학공업 중심의 공업단지가 형성되었고, 1979년 온산동제련에 이어 1980년에 럭키화학, 쌍용정유 등이 잇달아 입주하였다. 초기의 온산주민들은 이미 60년대부터 인근 울산공단 주민들의 고충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강압적인 군사독재정권과 개발 우선 정책으로 인해 공단건설에 대한 어떠한 반대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1978년 동해펄프의 흙탕물피해, 쌍용정유의 송유관시설분쟁 및 준설작업으로 인한 피해, 그리고 1979년 고려아연의 공장폐수 피해, 특히 온산동제련에서 시험가동일주일 만에 시운전자의 실수로 기준치의 1000배에 해당하는 동이 배출되는 등의 크고 작은 피해들이 잇달아 발생하였다. 이에 대해 자연스레 주민들은 청원 및 항의시위를 곳곳에서 벌이게 되고, 마을간의 공동활동도 확대되기 시작한다. 점차 공장이 많이 늘어나면서 초기 소수의 공장피해가 다수의 공장피해로 확대되고, 이에 따라 주민들의 피해보상요구도 공장전체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피해 또한 어장피해에서 점차 대기오염으로 인한 농작물 피해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런 와중에 1982년 서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환경단체인 공해문제연구소가 생겼으며, 이 시기 즉 1982년경부터 온산지역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 괴질(환경단체에서는 '온산병'이라 부른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전신 신경통증세, 심한 경우에는 수족마비, 전신마비, 반점 등이 생기는 이 괴질은 중금속 폐수가 흘러나오는 대정천을 중심으로 매년 발생하는 환자수가 증가하였으며, 1985년에는 이 괴질로 인하여 12세의 어린 소년이 사망하기까지 하였다. 그 동안 벌여왔던 주민들의 수많은 피해보상요구는 일정 지역에만 한정되었다. 하지만 이 사안은 1984년 공해문제연구소의 문제제기로 1985년 1월 한국일보 보도를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경제개발이 국가의 최우선시책이었고, 공단주변지역 외의 사람들은 환경오염피해에 대한 실질적인 인식이 거의 전무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일보의 보도는 일본의 대표적인 공해병으로 인식된 '이따이이따이병' 증세가 우리나라에도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사회적으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집단 괴질 발생과 확산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진찰 환자 수를 30명으로 한정짓거나 증세와 상관없이 모두 같은 처방을 내리는 등 너무 무성의했으며 이에 대한 언론 보도도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다. 자연히 국민들의 관심도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이후 공해에 대한 인식은 주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통해 지역적인 문제에서 전국적인 문제로 점차 확대되기 시작하였고, 환경단체와 지역주민간의 연대활동 또한 계속 이어졌다.

환경운동 확산의 계기
80년대 중반까지의 공해지역 주민들의 생존권 투쟁과 공해를 야기하는 기업 및 독점재벌에 대항하기 위한 환경단체의 공해추방운동은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이후 정치적 기회구조의 확대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된다. 상봉동 연탄공장 주변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진폐증에 걸린 '검은 민들레' 박길래씨 사건은 오염된 환경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자신도 모르게 죽음의 병에 걸린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연탄공장을 상대로 한 법정소송에서 개인의 환경권보호가 인정되어 승소하기는 했지만 이미 재판과정에서 악화된 건강과 약값으로 팔아버린 집을 되찾기에는 어림도 없는 1000만원을 보상받았다. 1999년 어렵게 버텨가던 '검은 민들레'는 결국 그 꽃을 떨구고 말았다. 다른 한편에서는 열악한 작업환경에 견디다 못한 어린 노동자 문송면 군이 사망하였고, 원진레이온공장에서는 전선도 녹여버릴 만큼 유독한 이산화황탄소가 뿜어져 나오는 작업환경에서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원진레이온은 대표적인 공해기업으로 일본에서 20년 동안 가동해 이미 감가상각이 지난 중고기계를 이산화황탄소 중독증이 알려지기 전에 고가로 매입해 공장을 세우고, 작업교대의 원칙이나 노동자보호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노동자들의 환경권을 유린하였다. 결국 노동자들에 대한 직업병이 인정되면서 원진레이온은 문을 닫게되었지만 공장의 기계는 중국으로 이전하여 일본과 마찬가지로 '원진병'을 수출한 셈이 되었다.
1978년 고리 핵발전소를 시작으로 월성, 울진, 영광 등에 핵발전소가 들어섰고 이후 발전소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러던 중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이전보다 훨씬 빈번한 핵발전소 피해가 발생하였지만 정부의 핵 발전정책은 더욱 공고해 졌다. 1988년에 고리핵발전소에서 10년 간 근무했던 박신우씨가 임파선암으로 사망하고, 같은 발전소 노동자 방윤동씨가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이어 영광핵발전소에서는 일용노동자 김익성 씨가 무뇌아를 사산하였고, 김동필 씨가 기형아를 출산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리핵발전소 인근 효암리에서 1년 간 사망한 주민 8명의 사인이 모두 암으로 밝혀지는 등 핵발전소로 인한 피해가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핵발전소 11, 12호기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핵발전소 인근 주민들의 분노와 함께 최초로 반핵운동단체('전국핵발전소추방운동본부')가 결성되어 핵발전소 피해보상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반핵운동은 핵발전소 건설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뿐만 아니라 핵발전소 가동으로 인해 생기는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반대로도 이어졌다. 1990년 안면도에서는 정부가 서해안 안면도 일대에 핵폐기물을 영구보존하기 위한 시설을 건설한다는 보도를 접하고 주민과 환경단체 등은 바로 '안면도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는 안면도 주민 모두의 반대투쟁이 결국 핵폐기장 건설 계획을 백지화시킨 것으로 이 사건을 통해 전국적으로 핵의 위험을 알렸으며, 지역주민이 반대하면 정부의 정책도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대구페놀사건과 리우회의
1990년대 초 수돗물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극도로 심해지고, 먹는 샘물 시판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일어나던 가운데 1991년 3월, 대구 시내 수돗물에서 심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발표는 두산전자가 페놀원액 30톤을 그대로 흘려보냈고, 흘러나간 페놀원액은 정수장의 염소와 결합하여 클로로페놀이라는 발암물질로 변해 수돗물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다는 것이었다. 두산전자가 이미 90년 11월부터 325톤의 페놀을 몰래 방류해왔다는 사실 또한 밝혀지면서 국민들은 환경오염문제가 더 이상 남의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자신의 문제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환경단체뿐만 아니라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연합회, YMCA 등의 단체가 결합하여 두산제품, OB맥주 불매운동 등을 전개하였으며 이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두산그룹과 정부는 이 사태를 서둘러 진화하기 위해 두산그룹회장이 200억 기부의사를 발표하였으며, 정부는 두산그룹의 행위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러한 발표 이후 4월, 2차 페놀유출사고가 또 다시 발생하였는데, 두산전자의 조업개시 10여일 만에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환경처 장관과 차관이 경질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의 최대의 피해자는 바로 지역 임산부들이었다. 발암물질을 먹은 임산부들이 유산, 기형아 출산 등에 대한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고, 두산그룹과 대구시를 상대로 법정 싸움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환경단체 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들도 환경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우리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서 환경운동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더구나 1992년 브라질에서 개최된 리우회의를 계기로 국내 환경단체 및 시민단체들은 국내 환경문제 뿐만 아니라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등의 지구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의 여론 또한 리우회의를 계기로 지구환경문제로 국민적 여론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국내로는 페놀사건으로 인해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외로는 리우회의개최를 통해 지구환경문제로의 인식을 확대하여 우리나라의 환경운동은 1993년을 전후해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다.

산업화와 도시화의 미명아래 '난개발'로 무너지는 생태계
우리나라는 인구에 비하여 국토가 매우 협소하고 산지가 3분의 2를 넘는 등 실제 사용 가능한 국토 면적이 26%에 불과하기 때문에 산림을 훼손하거나 해면매립을 통한 국토의 확장은 어쩔 수 없는 일로 간주되고 있었다. 도시 간접자본시설의 확충에 의한 고속도로 및 도로개발이 전국 각처의 산지를 허물고, 골프장, 스키장 등을 포함한 각종 리조트시설개발까지 가세하여 생태계파괴를 초래하였다. 대표적으로 지리산양수발전소 건설, 무주리조트개발, 가야산 골프장개발, 인제 군 종합훈련장 건설사업 등을 들 수 있다. 국립공원 지리산의 소중한 생태계를 허물고, 여기에 핵발전소의 사생아라고 일컬어지는 양수발전소를 건설하려는 사업은 개발을 위해 환경영향평가서조차 부실하게 작성한 대표적 사례이다. 이에 맞선 진주환경운동연합을 위시한 지역환경단체와 중앙의 환경단체는 환경영향평가를 진행한 담당교수와 환경부장관을 고소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으나, 결국 현재에도 지리산 한 자락에서 공사는 진행 중에 있다.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앞두고 진행된 덕유산국립공원 개발은 마찬가지로 보존해야할 생태계를 무참히 파괴한 사례였다. 지역주민마저 개발을 원하는 분위기에서 환경단체만이 반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국제대회를 핑계로 생태계파괴를 일삼는 행위는 침묵 속에서 진행되었다. 1993년 국군은 강원도 인제군 가마봉 일대에 최대 군사훈련장을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가마봉 일대는 원시적인 신갈나무림이 서식하는 등 생태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지역이다. 이 사업은 진행 중에 인제 군민에게 알려지면서 주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중앙 환경단체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환경운동연합을 중심으로 군종합훈련장 건설을 저지하기 위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땅 사기 운동이 전개되었다.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인해 사업은 초기 계획에 비해 축소되어 건설되었다. 하지만 훈련장 건설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은 국방문제 앞에서 환경문제를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전 국민이 단결하여 지켜낸 곳이 있다. 팔만대장경이라는 문화유산을 품고 있는 가야산국립공원이 바로 그것이다. 가야산국립공원에 18홀 짜리 골프장을 건설하려는 사업자와 이에 맞서 가야산을 지켜내기 위한 환경단체, 주민의 싸움은 많은 관심을 이끌어 냈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해인골프장 건설 반대에 대한 백만인 서명이라는 유래 없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사업자와 환경단체 등의 치열하고 지난한 법정공방은 2000년 대법원의 최종판결로 끝이 나고 결국 가야산국립공원은 골프장건설이라는 난개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공업용지에 대한 수요 증가는 간척지 개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시화호의 간척사업은 1960년대부터 그 가능성이 검토되었고, 한국수자원공사에 의해 1987년 6월부터 사업이 진행되어 1994년 1월 물막이 공사가 완료되었다.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로 맑은 물을 공급할 것이라는 시화호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생활폐수와 공장의 오염물질이 대량 유입되고 게다가 설계 및 시공상의 문제점까지 겹쳐서 썩은 물이 가득 고여있는 죽은 호수로 변하고 말았다. 국민들의 간척·매립에 대한 막연한 생각은 TV방송을 통해 펼쳐진 썩은 물을 접했을 때 모두 사라져버렸고, 크게 분노하였다. 5천억 원의 공사비를 투입하여 만든 것이 썩은 호수였으며, 당국의 종합대책발표와 지속적인 수질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질은 더욱 나빠지고 말았다. 이는 간척·매립으로 인한 생명의 보고인 갯벌파괴에 이은 재앙이었다. 결국 시화호는 담수호로서의 기능을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에 대해 책임지는 이는 누구도 없고, 피해자만 남았다.

핵은 안 된다
1990년 안면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가 1993년까지 이어지면서 정부의 핵폐기장 건설계획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수세에 몰려있던 정부는 핵폐기장 건설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웠고, 이와 함께 조만간 핵폐기장 후보지가 결정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던 중 1994년 12월 서해 앞 바다 작은 섬 굴업도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지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정부는 연말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후보지를 확정하려고 한 것이었다.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는 인근의 섬 덕적도에서 시작되었다. 후보지 발표에 따른 환경단체의 발빠른 대응 및 덕적도 주민들의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상경투쟁은 시위에 참가하던 할머니의 죽음, 폭력진압으로 인한 시위주민의 부상사태, 환경운동가의 구속 속에서 어렵게 진행되었다. 1995년 지자체 선거에 덕적면 반대투쟁위원회 사무국장은 군의원 후보로 출마해 핵페기장 건설 반대를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전개하기도 한다. 특히 환경단체는 굴업도가 이미 1991년 정부의 지질조사후 부적격지로 건설검토가 전면 백지화된 점을 들어 문제제기를 하였고, 이에 따라 정부가 굴업도에 대해 다시 지질조사를 하던 중에 활성단층이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계획은 10여 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안면도 투쟁과 함께 성공한 대표적 반핵운동 사례로 기록된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은 지역주민들의 적극적 반대와 환경단체의 조직적 지원이 이루어낸 성과이다. 특히 덕적도 지역주민의 치열한 반핵의지에 인천지역 학생운동 진영뿐만 아니라 인천연합 등 지역사회운동조직들이 가세함으로써 1980년대 후반부터 이어져온 반핵운동의 흐름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반핵운동에 있어서 이러한 성공적 흐름은 계속 이어져 1997년 대만핵폐기물 북한이송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대만당국의 핵폐기물을 북한으로 이송하려는 계획에 항의하기 위하여 국내 환경활동가들이 직접 대만에 입국하였고, 국내적으로 전 국민이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여 결국에는 그 계획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위험한 미래 - 환경호르몬, GMO 그리고 생명특허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 생활에서 가정용품, 의약품, 자동차용품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수많은 화학물질은 편리성과 유용성으로 그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이와 같은 화학물질이 생산, 유통, 사용 및 폐기 등 전 생애에 걸쳐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인체와 환경에 노출되고 있다는 국민적 인식을 하게 된 예가 바로 환경호르몬이다. 1997년 환경호르몬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고, 젖병, 컵라면 용기 및 각종 플라스틱 제품에서 환경호르몬, 즉 내분비교란물질이 녹아 나오며 이 물질은 생식기능의 저하, 성염색체의 이상 및 암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에 대한 국민적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후 정부는 환경호르몬 물질을 별도로 규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국내에서 사회적으로 GMO에 관한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7년부터였으며,  1998년 5월 생명공학의 올바른 발전을 위한 시민·사회단체 실무자 모임이 결성되었고 이어서 8월에는 유전자 조작 콩이 우리나라에도 수입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탑골공원 앞에서 집회를 갖고 정부에 대해 유전자 조작 농산물의 유통실태를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어서 시민단체들의 생명공학 관련 반대운동 네트워크인 연대모임이 결성되었고, GMO와 관련해서는 안전성 검증이 되지 않은 유전자 조작 식품의 수입, 유통, 판매를 반대하며 정부에 대해 GMO의 환경방출 방지를 위한 규제제도 마련을 요구하였다. 98년 11월 정기국회를 통해 수입콩의 30%가 유전자 조작된 것임이 알려지면서 GMO문제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1999년 4월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유전자재조합식품·식품첨가물 안전성 평가자료 심사 지침안'을 마련하여 제정·고시하였고, 이어 농림부는 '농수산물품질관리법'에 유전자변형농산물표시제 조항을 삽입하여 공식적으로 GMO에 대한 표시제 근거를 마련하였다. 1999년 5월 GMO반대운동에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가 동참함으로써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GMO와는 가장 대척적인 입장에 놓여 있는 환경농업단체들과 생활협동조합들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GMO문제는 크게 생명공학이라는 과학기술에 대한 문제이므로 생명윤리, 생명특허, 생명과 환경정의 문제와 연결된다. 생명공학에 사용되는 원재료는 제3세계 종의 90%, 종다양도의 2/3가 집중되어 있으며 특히 아시아와 남미에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제3세계의 유전자원을 이용하여 개발한 생명공학 제품에 대한 특허의 인정은 지금까지 농민이 자유롭게 이용한 유전자원에 대하여 기업에게 배타적 소유권을 주는 것이다. 생명공학의 특허는 바로 수 천년 동안의 제3세계 농민의 집단적 지식과 노력을 사유화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나라 환경단체들의 국제연대활동은 아직 초창기라서 매우 미약하며, 생명공학 반대운동 또한 아직 초기 단계에 있다.

동강은 흘러야 한다
1997년 강원도 영월의 동강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강에 불과했다. 정부는 이 동강에 대규모 다목적 댐 건설계획을 고시하였고 이로 대해 지역주민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환경운동연합을 필두로 많은 환경·사회단체들이 댐 건설 반대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영월 동강의 아름다움과 천연기념물, 석회암동굴 등이 방송과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지역주민과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반대운동은 전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이에 환경단체는 동강 현지에서 직접 시민들과 함께 하는 행사 등을 통해 동강의 아름다움과 생태계의 소중함을 알리려고 노력하였다. 동강댐 백지화 운동은 점차 학계, 종교계, 문화계, 예술계 등으로 확산되었다. 동강을 지키기 위한 온갖 바램이 노란 손수건의 물결, 각계 각층 2,000여 명이 참여한 33일간의 밤샘농성, 그리고 5,000여 만원의 국민성금 등으로 이어졌다. 결국 2000년 6월 5일 환경의 날에 "멸종위기 동·식물을 보전하기 위해 동강 댐 건설을 백지화하겠다"는 대통령의 발표로 10여 년 간의 논란이 종결되었다. 경부고속철도, 영종도신공항 등 주요한 국책사업에 대해 그 동안 환경단체들은 끊임없는 반대운동을 벌여왔지만 단 한번도 사업을 중단시킨 예가 없던 상황에서 동강댐 백지화운동은 1990년대 대표적 시민운동으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국민이 환경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며, 시민사회가 자신의 삶의 기반인 자연과 생태를 스스로 보호해 갈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는 점을 방증해 줌으로써 21세기 환경운동의 낙관적 미래를 예고하였다. 그렇지만 2000년 동강댐 백지화발표 이후 동강은 표류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 간 진행되어왔던 동강댐 백지화 운동과정에서 지역공동체가 동강나 버렸고, 그리고 각종 난개발로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가 되어 버린, 더 이상 비오리, 어름치와 같은 천연기념물이 살수 없는 곳이 되었다.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은 너무 안일하고 늦다. 동강 댐 건설반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강원도 지방자치단체는 동강의 난개발을 묵인하고 있다. 환경단체는 지역주민과 정부사이에서 자리잡고 있지 못하다. 흘러야만 했던 동강은 어디로 흘러야 할지 몰라 지금 표류하고 있다.

새만금에서 꺾여진 생명가치
새만금간척사업은 전북 군산에서 비응도, 야미도, 신시도, 가력도, 부안을 잇는 33km의 방조제를 건설하여 농지를 확보하겠다는 계획으로 1991년 착공되었다. 2000년 12월 현재 총 1조 1,385억 원을 투입하여 방조제 총 33km중 58%인 19km 정도가 진행되었으나 시화호의 사례를 뼈저리게 경험한 환경단체들은 새만금간척사업의 전면 중단을 요구하였다. 간척·매립으로 인해 생명의 보고인 갯벌이 파괴되고 지역공동체가 파괴되며, 매립에 필요한 토석을 얻기 위해 주변 지역의 산이 사라지는 등의 사업진행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업종료 후에도 제2의 시화호가 될 것이라는 지역주민과 환경단체의 주장으로 인해 1999년 5월 '새만금 민·관 공동조사단'이 구성되었다. 공동조사단이 현지조사 및 보고서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지역주민과 환경단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새만금간척사업 반대운동이 종교계, 학계 등의 참여로 생명평화운동으로 확대되었고, 새만금 갯벌의 소중함을 체험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생태기행, 전국회원대회 등을 진행하였다. 결국 2001년 정부는 대통령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와 공동으로 '새만금평가회의'를 구성하고 그 논의결과를 따르기로 약속하였다. 결국 평가회의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결단할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정부는 평가회의가 대통령이 아닌 정부차원에서 결정하도록 건의했다고 평가회의 결론문서를 조작하여 물 관리정책 민간위원회의 새만금반대결정을 무시하고 물 관리정책 조정위원회에서 2001년 5월 강행결정을 하였다. 새만금간척사업 강행결정은 국민의 반대여론이 80%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한 '국민 없는 국민의 정부'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었다.

나오면서
초창기 공해피해에 대한 주민들의 생존권 투쟁에서 시작하여 1987년 6월 항쟁과 1992년 리우회의를 통해 질적·양적 성장을 한 80∼90년대의 환경운동은 시민운동으로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과 영월 동강댐 백지화 운동의 성공사례를 통해서 환경운동은 사회적·대중적 지지를 받았으며, 생명가치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전 국민에게 알려 나갔다. 하지만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동강댐 백지화 이후 정부와 국민의 무관심 속에 영월 동강지역은 난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수많은 국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새만금 갯벌이 파괴되고, 간척사업은 일부 정치인, 공기업의 정치적 논리에 의해 강행되고 있다. 지방자치실시 이후 재원확보를 목표로 지방자치단체마다 무자비한 개발경쟁이 한창이고, 아직도 개인의 재산권 행사와 경기활성화라는 미명아래 환경파괴를 일삼는 선심행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환경문제는 바로 우리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세대를 위한 가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환경운동은 국민의 당위적 지지를 받기도 하지만 당장 현실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외면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시민사회 의식의 미성숙이나 무관심에 대한 문제로 돌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환경운동은 주체적으로 이제까지의 고발과 저항위주의 운동에서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좌표와 방향을 올바른 소비의식을 기초로 한 경제구조와 생명가치를 중심으로 한 삶의 양식을 제시하고 대중적인 실천을 조직해야 한다. 풀뿌리에서부터 환경문제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바탕으로 주민참여와 민주적·자치적 역량을 개발하고, 이에 기반한 시민사회의 힘으로 생명가치를 사회적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환경운동의 과제라 할 수 있겠다.  

참고문헌
한경구 외 3인. 시화호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1998년. 솔출판사. 255p.
이병천·이광일 편. 20세기한국의 야만. 2001. 도서출판일빛. 455p.
한국공해문제연구소. 한국의 공해지도. 1986. 일월서각. 276p.
전재진. 핵그리고 안면도항쟁. 1993. 충남저널사. 230p.
권영근 편. 위험한미래. 2000. 당대. 378p.
환경운동연합. 90년대 환경운동의 평가와 전망. 환경운동연합 창립5주년 기념 토론회 자료집. 65p.
이헌석. 대학생신문 2000년도 연재 한국환경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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