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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문화산책/도리없는 현실의 정수박이에 동화적 희망을 들이붓다/김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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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김유미
1996년 《객석》 예음 평론상으로 등단. 고려대강사
도리없는 현실의 정수박이에 동화적 희망을 들이붓다.
1. 원형성과 동심
<지네와 지렁이>는 오태석의 최근작이다. 제목부터 동심에 빠져들게 하는 면이 있는데 이 작품은 사실 그런 측면이 강하다. 이 작품에 대해 '만화적'이라는 표현을 그들 스스로가 사용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심과 오태석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신화적 인물들은 결국 동심과 통한다.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의 심청이 <여우와 사랑을>에서의 여우 등이 이러한 성격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작품 <지네와 지렁이>는 그러한 원형적 성격이 작품에 미치는 영향이 커 보인다.
지네와 지렁이는 이 작품에 틀거리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안내자 역할을 넘어서 사건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품안으로 한겹 더 들어가면 사진사 정씨(정진각, 김병옥), 북한군 통신병(이도현), 채무자들(강현식, 장영남 등)이 주요 인물이 되지만 그들은 결국 지네와 지렁이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지네와 지렁이는 미물이라서 실제 우리의 옛날 이야기에 등장했던 호랑이나 여우같은 폼나는 인물들과는 구별되는 측면이 있지만 정감있게 느껴진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지금은 잘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호랑이나 여우 못지 않은 특별함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미물을 주요한 인물로 삼은 이유는 이 작품의 본론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환경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사진작가 정씨가 발견한 희귀한 야생화인 노루귀꽃(조영진), 금낭화(박현비), 꿩의 바람꽃(권수빈)이 하나의 인물들로서 등장하여 말을 하게 만드는 것도 이러한 관점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작품을 더욱 동화적으로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지네와 지렁이도 옛날 이야기에 등장하는 구미호처럼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야 하는데 그 어려운 난관이란 보통 남의 생명을 해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여러번 꼬아서 결국 남의 생명을 구해주는 일이 보람되다는 주제를 설파한다. 이러한 주제의식도 역시 동화적인 낙관성과 연관된다. 더구나 지네와 지렁이는 서로 인간이 되기 위한 경쟁관계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관계도 살벌한 것이 결코 아니라서 이들이 경쟁관계에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모순적인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지렁이와 지네는 경쟁관계이기 전에 친구이고 어떻게 보면 지씨네 집안(?)으로 혈연관계인지도 모른다는 얼토당토 않은 상상까지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이 작품의 미덕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그들의 원형적 힘은 작품속의 사진사 정씨와 통신병에게 큰 힘을 미친다. 사진사 정씨와 북한 통신병은 비무장지대 어디쯤에선가 황당한 만남을 갖는데 민간인과 북한 통신병은 지네와 지렁이의 관계처럼 해석될 여지를 준다. 남과 북으로 갈려 경쟁 혹은 대립관계에 있다는 점,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친구가 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혈연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점이 그렇다. 그들의 할아버지로 분한 지렁이의 대사에서 그들은 동기간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 이러한 혈연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이들이 결코 서로를 해치면 안되는 관계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다. 지네와 지렁이가 발휘하는 원형적 힘은 바로 이러한 정씨와 북한 통신병을 그들과 병렬관계에 놓음으로써 그들의 만남을 개연성있게 만들어 주고 그들에게 비빌 언덕이 되어 준다.
지네와 지렁이가 일을 벌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상상력도 관객을 행복하게 하면서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가장 결정적인 상상력은 마지막에 독가스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오리로 만드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독가스에는 방독면이 제격이다. 그렇지만 방독면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구해내야 하는 지네와 지렁이 입장에서는 변신술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 독가스에도 끄떡없는 것을 오리로 설정한 점, 오리로 만들어서라도 그들을 살려야 한다는 점 자체가 동심을 나타내 주지만 연극적 오브제인 방독면을 오리탈이 대체한다는 점 또한 동화적 상상력의 재미를 더해 주는 부분이 된다. 게다가 오리탈이 모자라서 서로 나누어 쓰는 장면은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하여 긴박감과 함께 집중도를 부각시킨다. 이 장면은 감동을 준다. 착한 심성의 원형성을 믿음직스럽게 느끼게 해준 지네와 지렁이에 대한 감탄도 감탄이지만 정씨와 통신병이 이들을 따라 사랑의 마음을 나눔으로써 인간과 미물의 구분은 물론, 남과 북의 갈등을 비롯해 역사적 갈등까지도 무화시키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순간만은 그 가능성에 행복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행위들이 그렇게 전염성이 강한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불행히도 우리의 현실은 이와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은 물론 제살마저 깍아 먹어야 할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장면이 비현실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을 단지 유아적인 상상력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거기에는 원형적인 힘이 버텨주고 있기 때문이다.
2. 변신에 대하여
이 작품에는 굿이 등장하지 않지만 굿이 보여주는 경계넘기의 효과 이상을 지네와 지렁이가 보여준다. 그들은 재주를 넘는 여우는 아니지만 자유자재의 변신으로 작품에 활력을 더해 준다. 그런데 그 변신이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 기술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무당도 아니고 여우도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지렁이와 지네는 사람이 되고 싶은 미물이다. 많은 무서운 옛날 이야기가 그렇듯이 그들이 사람이 되기 위해선 인명을 해쳐야 하고 정씨가 그 대상이 되는 것처럼 나온다. 그러나 이 작품에선 그런 관행을 뒤집는다. 물론 그들은 사람이 되길 원하고 그것을 위해서는 인명이라도 해칠 것 같은 포우즈를 취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제스츄어일 뿐으로 드러난다. 실제로는 그 반대의 행동이 그들을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되어 관객들의 기대를 배반하게 만드는데 관객들은 이를 혼란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지네는 오히려 정씨가 지네를 칼로 찔러야 자신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정씨는 죽어도 자기는 그럴 수 없다고 답한다. 그래서 옥신각신하다 지네가 거의 정씨 손에 칼을 쥐어 주고 자기가 몸을 들이 밀어 칼에 찔리는 형국을 연출한다. 이에 지렁이는 무효라고 주장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이렇게 뒤바뀐 행동은 정씨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미 시나리오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해쳐야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부터 해침을 받아야 사람이 되는 것으로. 그러므로 정씨도 강력히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나와야 아귀가 맞게 되는 것이다. 정씨가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해칠 수 없다고 강하게 버티는 행동은 설득력이 없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야 이 각본은 말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 작품의 변신에 관한 독특한 철학이 담겨있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잡아 먹는 호랑이나 여우도 아니고 사람이 발에 한번 힘만 주면 죽어 버리는 지네나 지렁이가 죽여달라고 애걸을 해도 생명의 존엄성 때문에 죽이지 않는다는 설정은 거의 바보같은 희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은 공산주의나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나쁘지 않은 상식적인 삶의 가치인데 이 작품은 이러한 상식을 위배하면서까지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보다는 생명이 더 소중하다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비교법을 보통은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독특한 것이 사실이고 이것이 작품을 더욱 역설적이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지네와 지렁이는 인간이 될 수 있는 시험에 완벽하게 통과한 것인지의 여부는 불분명한 채로 비무장지대의 상황 악화로 인해(국군의 등장으로 북한 통신병이 희생될 수 있는 위기가 닥쳐왔기 때문)인간의 모습이 된다. 그런데 그들이 인간이 되었다는게 중요하다기 보다는 여전히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게 남는다. 그들은 변신을 주도할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지네와 지렁이는 작품의 안과 밖을 자유로 넘나들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관객이 작품의 여러 겹들을 들춰보는 것을 보다 수월하게 도와준다. 도대체 왜 저런 모습으로 변한걸까라는 의문을 그들이 직접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역할을 이해하면 그 변화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위기의 순간에 강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리로의 변신이 그 절정에 해당한다. <백마강 달밤에>에서 보여주었던 경계넘기에 대한 굿의 무한한 가능성 못지 않게 이 작품에서 지네와 지렁이는 변신술로 그 가능성을 대신해 준다.
3.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
지네와 지렁이가 사람이 되어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등장하는데 그곳의 모습은 매우 낯설다. 그렇지만 그 곳은 바로 우리가 사는 곳에 다름 아니다. 2010년이면 그리 먼 미래도 아니기 때문이다. 장소는 지하 수백미터, 사람들은 모두 몸에 이상한 기계장치를 달고 있다. 작가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빗대어 설명하기 위해 설정한 가상의 공간이다. 사람들은 장기를 팔아 빚을 갚는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채무자들이다. 지네와 지렁이도 이러한 채무자중의 한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난다. 히라따상(정진각, 김병옥)이라는 인물이 이들의 주인인 채권자이다. 사진사 정씨가 이렇게 변한 것이다. 북한군 통신병은 채권자의 지시아래 채무자들의 시중을 드는 종업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본래 모습을 알지 못한다.
우선 자신의 장기를 팔아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자본주의 사회가 지닌 단면을 보여준다. 그들은 보통 몇번의 수술을 거친 상태라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모습이 결코 사실적이진 않아서 '저게 실제 우리 모습은 아니잖아'라는 위안을 하려고 하다가도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미국 유학간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서라는 설명을 듣고는 '어 우리 이야기잖아'하는 생각이 다시 들게 된다. 인공장기를 끼고 있는 채무자들은 그로테스크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이 곳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그다지 어둡거나 절망적이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다. 그저 일상적이다. 그래서 처음엔 낯설고 기괴스러운 공간에서의 사람들의 행동들이 점점 이해 가능한 삶으로 다가온다. 비사실적인 무대표현이 사실적인 정서효과와 행복하게 만난 경우로 해석된다. 그 결과 난해함이 줄어들면서 일반 관객들이 우리의 삶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확보하게 한다.
물론 이 공간은 그리 바람직한 공간은 아니다. 작가는 이 공간을 통해 우리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한다. 우선 장기가 겉으로 드러난 채무자들의 모습에서 인간성을 왜곡시키는 자본주의의 기형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우리의 자본주의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로 요약되는데 그것은 일제 식민지 치하를 연상시킨다. 채권자인 히라따가 일본인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잘 보여야 장기를 또 팔 수가 있고 그래야 빚을 갚게 되기 때문에 채권-채무자와의 관계는 지배-종속의 관계가 된다.
일제치하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설정은 자연스럽게 통일문제로 옮아간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히라따가 우리의 통일에 대해 명분만 있고 준비가 없다고 비판하면서 이를 위한 준비운동을 벌인다는 것은 무척 아이러니하다. 오태석은 경계 넘기의 명수이기도 하지만 에피소우드들을 묶어 내는 솜씨도 남다르다. 별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 두 에피소우드를 무리없이 연결해 낸다. 여기서도 히라따를 재일교포로 다시 설정함으로써 그가 독립운동을 못한 대신 준비운동을 하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 준비운동이라는 것의 실체는 불명확하다. 히라따는 채권자들이 빚을 갚을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이 나라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종업원으로 일하는 북한 통신병에게 구국청년단원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에서도 드러나는 바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발상으로 독립운동에 값하는 준비운동을 벌이는 것이라면 그것이 오래가지 못하고 곧 자폭할 만한 성질의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러나 참 우습게도 네 번째 수술을 해서라도 빚을 갚아야 하는 여자 채무자의 경우에 히라따가 은혜를 베풀어 빚이 탕감되고 더 이상의 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을 때 관객입장에서 히라따가 그렇게 나쁜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헛된 망상을 품게 된다. '저것이 바로 히라따가 주장하는 상생의 원리로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관객의 가치관이 한순간이나마 그에게 굴복당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없이 우리는 항상 그런 식으로 속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 작가는 그 점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 멜로적인 적당한 과장과 멋부림은 없고 냉정하지만 상식적인 현실만이 자리하고 있어 관객에게 정직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만든다. 관객들은 선악 개념이 더 확실해서 골치아프지 않고도 속시원히 우리편을 들 수 있는 연극을 원했을 지도 모른다. 사회 비판적인 작품의 경우에, 특히 일제시대가 나오면 항상 습관적으로 잡히는 국민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습관적인 감정을 재생산하도록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척 반갑다. 그렇다고 애매모호해서 그 진의를 알기 어려운 수준도 아니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작품과 비교할 때 동화적인 상상력이 가져다주는 단순, 명쾌함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많이 해결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객의 판단은 이성적인 분위기에서 토론의 결과물처럼 관객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의 놀음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얻어지기 때문에 부담스럽게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작품에서 또 문제삼는 것은 교육현실과 환경문제이다. 이 지하의 소외된 공간 맨위에는 그날의 이민자수가 큼직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이민수치는 날로 경신되고 있는데 그만큼 대한민국이란 곳이 살기 힘들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 작품에서 교육현실을 구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환경문제와 동일한 선상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으로 나온다. 우리의 어린 새싹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 교육환경이나 생태계가 파괴되어 생물이 자랄 수 없는 환경문제는 같이 취급될 수 있는 문제이다. 마실 물이 없이 떠나든지, 아이들을 교육시킬 수 없어 떠나든지는 모두 생존의 문제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모두 얽혀있다. 자본의 문제가 교육의 문제와 얽혀있고 환경문제, 통일문제와도 얽혀있다. 관객들이 여러 각도에서 이러한 문제점들을 바라 보고 공감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또한 이 작품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작품과 구별되는 매력은 이 작품에서 말하는 기형화된 현실의 모습이 그 실체를 명확히 드러내어 사실성을 더해주면서도 신화적인 원형성과 동화적인 낙관성으로 기대감을 잃지 않게 함으로써 작품의 결을 곱게 만들어 준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형편없는 현실, 폭파해버리고 다시 새싹을 피워내야만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은 현실, 그 외에는 별다는 방법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거친 숨을 가라앉히고 원래 우리민족이 가졌던 고운 심성을 회복해 내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애쓴 흔적이 어여뻐 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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