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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특집/역사교과서 문제로 본 한일관계/지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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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과서 문제로 본 한일관계
지명관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가 일어나자 곧 생각나는 구절이 있었다. E.H.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이다.
“어떤 사회가 어떤 역사를 기록하는가, 어떤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가 하는 것 이상으로 그 사회의 성격을 의미깊게 시사하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이번에 문제가 되었던『새로운 역사교과서』라는 우익적인 역사교과서가 중학교용 교재로 일본의 문무과학성의 검인정을 통과하였다는 것이야말로 오늘의 일본 사회의 성격을 여실하게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년 신학기에 공급될 132만 107권 가운데서 불과 그 0,039퍼센트 즉 11개교에서 524권을 채택하는데 그쳤다는 사실 역시 일본사회의 오늘을 여실하게 반영한 것이라고 해야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번 일본교과서 파동이야말로 오늘의 일본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반복되는 배반
먼저 이번의 역사교과서 문제는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방일하였을 때 한일 양국 정상이 합의해서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 대한 명백한 배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었던 것이 아닌가.
“오부치 총리는 금세기의 한일 양국 관계를 돌이켜 보고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이에 대하여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
“또 양국 정상은 양국 국민, 특히 젊은 세대가 역사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하여 견해를 함께 하고 이를 위하여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에 일본 우익이 펴낸 『새로운 역사교과서』는 이것을 번복한 것임은 두말할 것 없다.
그래놓고는 한국이나 중국이 일본정부를 비판하면 검인정이란 민주주의 국가에서 하는 것이니까 사실에 잘못이 없다면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느니 그 역사교과서의 연사인식은 일본정 부의 견해와는 다르다느니 했다. 그리고 그 역사교과서의 역사관에 간여할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검인정을 통과한 그 교과서에 대하여 재수정을 지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실제에 있어서 1982년에 교과서파동이 일어났을 때는 한국이나 중국의 강경대응에 거듭 수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웃나라들에 대한 고려를 해야한다는 새로운 검정기준 조항을 삽입하기까지 했었다. 1986년에 우익 단체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가 고교용으로 『신편 일본사』를 펴냈을 때에는 일본정부는 한국과 중국의 대대적인 항의에 네차례나 수정을 명령했었다.
그렇다면 왜 이번에는 일본정부가 그처럼 완고한 자세를 취했을까. 크게는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나는 오늘의 일본이 처해 있는 정치적 정세 때문이고 또 하나는 한국이나 중국의 저항에 대한 과소평가에서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본국내의 정치적 면에서 본다면 사실은 지금의 정치세력이 우익 교과서를 떠받드는 세력에 그 어느 때보다도 동조하고 있다고 해야한다. 전쟁 전에 있어서 우익세력이 크게 대두한 경로를 되돌아본다면 우익세력과 일본의 정치세력이 어떻게 결합하는가를 알 수 있다. 일본의 권력층에는 강한 우익적인 심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세를 감안해서 자중하려는 온건파가 있었고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는 강경파가 있었다. 이런 경우에 대체로 표면에서는 우익을 거부하면서 이면에서는 우익과 결합한다는 이중성이 나타난다. 그러나 위기가 오면 온건파는 후퇴하고 강경파가 앞장을 서게된다. 이때 거의 분별 없이 초국가주의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가 자민당 단독집권이 불가능하게 되어가자 90년대에 들어와서는 심지어 사회당과도 연립정권을 만들어 자민당세력은 연명을 꾀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당만이 거의 붕괴되다시피 하고 지금은 공명당 또는 보수당이라는 정당들과 연립을 하여 자민당은 계속 장기집권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지난번 모리(森)정권에 대한 일본 국민의 지지도가 9퍼센트대로 떨어지게 되자 자민당은 대단한 연출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고이즈미 (小泉)총리를 내세워 탤런트 인기를 얻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저것 역시 거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가시지 않고 있다.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는 정치세력은 없고 필요할 경우 국민을 설득해낼 수 있는 세력은 일본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 아랜트가 「시민적 불복종」이 라는 글에서 말한 “권력의 실추” 즉 “인민이 자기들의 대표자, 권력을 부여해 준 선거로 선출된 공직자에게서 자기들의 동의를 철회했다는”상황은 일본에서도 심각하다. 그런 때에는 “권력의 어떠한 형태의 감퇴도 폭력의 유혹을 받기 쉽다”는 상황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지금 폭력적 반이성적 선동적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합리적인 대화를 찾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지 않는가 염려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은 오늘날 그들의 사회에 이어지고 있는 우익적 경향에 언론은 물론 정치세력도 연합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부총리까지 지낸 일본집권세력의 요인의 한 사람인 고토다 마사하루 (後藤田正晴)씨 같은 원로도 자기도 협박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지금 세상은 1930년대 전반 즉 전쟁 전에 우익이 크게 대두하던 시기와 비슷해지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발언했던 것이다. (2001년 5월 3일『 아사히신문』) 이러한 경향은 이번 뉴욕과 워싱턴의 테러사건과 이에 대한 미국의 전투적인 대응에 따라 더욱 심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기서도 아렌트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제도가 잘 돼가지 않으면 정치사회는 인간에 의존하는데 인간은 약한 갈대여서 惡行을---범하지는 않는다고 해도---묵인하기 쉽다”
어쨌든 일본의 자민당은 고이즈미 씨를 내세워서 지난 7월말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이나 중국과의 사이에 어려움이 생긴다고 해도 정치적 연명을 위해서 우익세력으로 국내결속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실제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 특히 한국과 중국이 대대적인 반일운동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은 더욱이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를 앞두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제자체에 다소 차질이 있다고 해도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익 역사교과서를 은근히 지원한 것이었다.
사실 2000년도 대일 무역관계를 보면 비록 우리의 적자폭이 105억 6800만 달러이상이라고 해도 우리의 대일 수출은 99년도 비해 28억불이나 증가한 186억 6881만 달러에 달했었다. 거기다가 2000년도에 일본인으로서 우리나라에 입국한 숫자는 99년도에 비해서 13퍼센트 약 30만이 증가한 247만 2054명이었다. 이처럼 경제적, 인적인 교류가 는다면 국가 간에 비록 충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흡수할 수 있게 되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한국의 반발이 다소 있다고 해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리하여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말끝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말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그 말을 완전히 배반하고 착착 한국 신민지화의 길을 걸어왔던 그 길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무사사회의 논리라고 할까, 모든 말은 상대를 다루기 위한 전략·전술용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협정도 공동성명도 저버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라는 대가를 일본은 치러야만 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아렌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약속은 미래를 질서지우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방법이고 인간이 가능한 범위에서 미래를 예언할 수 있는 것,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98년의 한일 공동선언에서 새로운 한일관계를 기대하면서 박수를 보낸 한국 국민에게는 역시 일본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신뢰할 수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일본의 나카소네(中曾根)수상 같은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우익적이면서도 아시아를 중시한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82년의 교과서 문제와 차관문제로 시끄러웠을 때 83년 1월에 총리로서는 한국을 처음 공식방문하고 40억 달러 차관문제도 대번에 해결하고 말았다. 고이즈미 수상에게서는 그러한 두 가지 얼굴이 불가능할 정도로 일본의 자민당은 위기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거품인기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하는 것이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할 때 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방일한 후 약 2년 반동안 계속된 한일관계 흔히 『뉴욕타임즈』같은 데서 한일 밀월시대라고 했던 시기는 어이없게 끝나버린 셈이다. 한일관계가 얼마나 취약한 것이며 일본과의 관계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또다시 보여준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관계가 앞으로 어떤 타결 점을 발견한다고 해도 적어도 한일 정부간 즉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진정한 화해와 이해가 없는 일종의 “차가운 평화”(cold peace)와 같은 것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나라 또는 중국은 반일을 국내정치에서 정치적 효용성이 있다고 해서 이용하는 시대는 졸업했는데 거꾸로 일본은 嫌韓·反中을 국내정치에 이용한다는 역사의 역전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일본이 자기들의 내정을 위해 대외관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1923년 관동대진 때 조선인 학살에 광분하는 일본인들을 바라보면서 일본의 개화나 그 문명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느꼈던 함석헌 선생을 생각하게 된다.
“〈야, 이게 일본이냐? 이렇게 옅고 좁은 사람이냐?〉 그때 젊은 마음에도 미워한다기 보다도 업신여기고 싶어습니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오늘 우리는 전후 민주주의의 길을 걸으면서 선진국가로서 번영을 누려온 일본이 바로 요 정도밖에 되지 못하느냐고 생각하게 된다. 일본은 아시아인들에게 이러한 환멸을 안겨주려는 것일까.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껴안으면서도 왜 일본은 저런 우익의 길을 가려고 하는가. 정말 일본은 오늘도 일본인에 대한 아시아인의 회의와 불안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도 그 길을 가고 있다고 하겠다.
일본의 우익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익이라고 하면 나치나 파시즘을 생각하고 일본의 군국주의 또는 초국가주의를 생각하게된다. 이런 사회가 대두한 데 대해서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이 많은 것을 제시해 준다. 그는 “모브”(mob)에 대해서 몇 번이나 본격적으로 논했다. 그는 “민중과 모브”는 다르다고 하면서 민중은 혁명적이며 이념에 대해서 헌신하는 데 비해서 모브는 모든 계급의 탈락자들의 집단이라고 했다. “민중은 모든 혁명에 있어서 대표성을 위해서 싸우는 데 비해서 모브는 언제나 ‘강한 인간’‘위대한 지도자’를 지지한다”모브는 이들에게 갈채를 보내고 그들에게 향하여 비판이라도 하면 투석으로 대한다고 했다.
일본의 야당인 민주당 당수 하도야마(鳩山)씨는 자기는 민방에서 주목을 못 받는 데 비해서 고이즈미씨는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그가 인기가 있으니까 하는 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정말 고이즈미씨는 자주 민방에 출연해서 기인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을 비난이라도 하면 전화로 걸려오는 청취자들의 항의에 시달려야만했다. 외상 다나카여사는 그가 실언하면 할수록 인기가 올라간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 대해서 하도야마씨는 체념 어린 구조로 나도 권력을 쥐면 그렇게 되겠지라고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브가 無賴漢에 바치는 영웅숭배를 아렌트와 함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대한 배경으로서는 과잉자본과 과잉노동력의 결합이라는 사태가 있다고 아렌트는 보았다. 원한, 절망 위에 선 계급 탈락자들의 동맹이 생겨나 아우성을 친다. 물론 오늘의 경우에는 더욱이 양식 있는 일본인들이라면 여기에 대해서 퍽 회의적이고 그것을 거품이라고 바라보는 것이지만 이러한 양식과 모브의 영웅숭배라는 대립이 지금 일본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이런 모브가 사회의 상류를 차지한다면 나치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그 사회란 범죄인사회라고 해야한다고 아렌트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우파들이란 목청만 높이면 대중이란 그들의 말을 들어주기 마련이라고 생각한다. 우익이란 이처럼 자신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지배인종과 노예인종을 가르고 유색민족과 백색민족을 가르면서 계급을 넘어 국민을 통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민중과 모브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베르토르트 부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에 나타나는 자들은 모브이만 가령 우리나라의 품파에 나타나는 것은 역시 민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품파공연에서는 “산다는 것”이 무웟인지 아느냐고 묻고는 그것은 “베푼다는 것”이라는 대답을 이끌어내는데 이것이야말로 민중이 모브와는 달리 삶을 위한 이념을 제시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나치가 보여준 반 이념, 반 휴머니즘, 반 문화 그리고 냉소주의와 니힐리즘, 이것은 모브에 깃들어 있는 심성이다. 그러니까 아렌트는 나치당원이 한 “문화라는 말만 들어도 나는 총을 겨눈다”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아렌트는 여기에 기꺼이 발을 맞추려는 지식인들이 특히 문학인들 사이에 많다고 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대표로서 일본에서는 이시하라 도쿄도 지사를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에 있어서 이번의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든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참가했거나 그 역사교과서를 직접 집필한 사람들도 대부분 계급이나 집단이나 연구자 서클에서 탈락한 사람들이라고 하겠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대개가 자기 분야에서 정상적인 업적을 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잔인성을 고발하기보다는 그것을 시인 또는 찬양하려고까지 한다. 그래서 예를 든다면 1904년에서 5년에 걸친 노일전쟁에 대해서 이 역사교과서는 이렇게 기록했던 것이다.
“일로 전쟁은 일본이 생존을 건 장대한 국민전쟁이었다. 일본은 이에 승리해서 자국의 안전보장을 확립했다. 근대국가로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은 유색인종의 나라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균대국이었던 백인제국 러시아에 이긴 것은 세계의 억압받는 민족에게 독립에 대한 한없는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또한편 황색인종이 장래 백색인종에게 위협을 준다는 것을 경계하는 황화론(黃禍論)이 구미에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노일전쟁에 앞섰던 청일전쟁에 대해서도 이렇게 기술했다.
“일청전쟁은 구미식 근대입헌국가로 출발한 일본과 중화제국과의 피할 수 없는 대결이었다...... 만약 일본이 졌다면 아마도 중국과 같은 운명의 길을 걸었을는지 모른다”
이런 생각에서 사실 검인정에서 삭제를 명령받은 대목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 기술한 이런 구절도 들어가 있었다.
“전쟁은 비극이다. 그러나 전쟁은 선악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어느 쪽이 정의고 어느 쪽이 부정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라와 나라가 국익의 충돌 끝에 정치로써는 결말이 나지 않아 최후수단으로서 행하는 것이 전쟁이다. 미군과 싸우지 않고 패배하는 것을 당시의 일본은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일본의 침략과 전쟁은 미화되는 것이다. 전쟁자체에 대한 찬가를 부르는 셈이다 .그런 전쟁에 대한 반성이나 비판을 한다면 그것은 자학사관(自虐史觀)이라고 하고 아무리 터무니없다고 해도 자기들의 생각을 소리높이 외치고 폭력적으로 강요하면 일본국민이 받아드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에서는 이념을 찾아가려는 자세란 볼 수가 없다.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해서는 경멸하는 자세이고 허무주의와 냉소주의가 넘쳐 있다. 일본의 이익만 강조하는데 그 이익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데 대한 검토나 반성은 없다. 평화라는 단어나 그러한 사상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에도 하나 아렌트가 그의 초기작품『라헬 파룬하겐』이라는 유대인 여성에 대한 책에서 한 말을 생각하게 된다. “사실에 동의하는 것을 거부하고 사실과의 관련을 부정한다면 곧 사실은 의견의 하나로 해소된다” 사실이나 진실은 “그것을 믿고 증명하는 사람들에게의존한다.” 그러니까 사실과 진실은 많은 의견과 반사실 그리고 부정 속에 불안한 모습으로 움츠리고 있는 셈이다. 이번 일본의 우익 교과서에서는 사실이란 무력하기 짝이 없고 그것을 부정하는 고함 소리만이 판을 치고 있다고 해야한다.
아렌트는 「정치에 있어서의 거짓---펜타곤 비밀보고서에 대한 반성」이라는 글에서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을 분명히 알고서 말하고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일본의 우익 교과서를 쓰는 사람들은 1937년의 일본군에 의한 무서운 난징학살(南京虐殺)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일정한 이론 또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고 그것에 맞지 않는 것은 증거가 없다고 하면서 지워버리고 마는 것이다. 증인을 없애버리기만 하면 사실이란 정말 우연적인 것이므로 말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이나 중국이 증거를 제시하기 때문에 일본국민을 쉽게 기만할 수 없는 것에 투정을 한다. 하나 아렌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에게는 ‘이론’이 있고 그 이론에 맞지 않는 데이터는 모두 부정되거나 무시됐던 것이다”“자기 미래를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까지 행동하는 인간은 과거도 지배하고 싶다는 유혹에 언제나 빠지게 된다.”말하자면 오늘의 ‘정치 노선’에 의해서 과거도 고치고 ‘역사의 재기술’“자기 이데올로기에 맞지 않는 데이터의 말살”을 서슴지 않는다.(「정치에 있어서의 거짓----」)
그렇다면 이런 반이성적 반윤리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흔히 열광적으로 받아드리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일본『요미우리신문』은‘종군위안부는 없었다’라는 사설을 두 번이나 (2001년 3월 2일, 5월 9일) 계재했다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은 이번 우익 교과서에 대해서 왜 한국과 중국이 자기네 나라 내정에 간섭하는가, 그것을 받아드리면 굴욕적이다라고 했다.
그런 것을 열광적으로 받아드리는 경향이 있는 것은 그들이 사실은 대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마치 진실성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며 사실보다도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도 하겠다. 그들은 대중이 받아드릴 것을 용의주도하게 준비한다. 이리하여 현실 속에서 남들은 예기하지 못한 것을 제시하면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기도 한다. 이렇게 아렌트는 전체주의자들의 프로퍼갠더에 대해 해석했던 것이다.
일본의 우익적 경향에 대해서는 일본문화의 측면에서도 여러 가지로 검토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 측면만 들어보기로 하겠다.
하나는 일본에서는 가치 있는 것은 일본 내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국의 경우와는 달리 퍽 강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주의나 국수주의가 대두하는 기반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학사관이라는 말이 나타나는 것도 일본 밖에 가치를 두고 일본을 비판하는 것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우익 교과서에서도 ‘일본 미의 형태’라는 사진판 그림을 열다섯 쪽이나 책 첫머리에 계재하고는 일본의 문명을‘삼림과 암청수(岩淸水)의 문명’이라고 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의 4대문명과 나란히 놓으려고 했다. 이런 경향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 국민 그리고 일본의 거의 모든 지식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말을 빌린다면 일본인에게 깃들어 있는 ‘역사의식의 〈고층〉(古層)’이라고 해야할는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도 특히 노경에 이르러 이런 고층으로 회귀하는 경향이 흔히 나타나며 위기에 이르면 이러한 고층에 있어서 국민을 통일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고 하겠다. 그런 때면 ‘민족국가에서의 역사적 기억과 민족적 동질성’을 한층더 강조하는 것이다. 지금 일본은 민족의 균질 화를 꾀하며 일종의 신고립주의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런 점에서 재일 한국인들도 상당한 우려와 불안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두 번째로 들고 싶은 것은 전통적인 무사사회로서 지녀온 힘의 우위라는 의식이다. 물리적 힘에 대한 용인 내지는 찬양으로 그 힘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볼 때 모브의 대두는 있었어도 혁명은 없었다고 보여진다. 일본사 연구에 독특한 업적을 남긴 노어만(E·H·Norman)이 ‘대중적 히스테리의 폭발’이라고 한 것은 이런 것을 말한 것이라고 하겠다. 역사에 있어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민중의 힘이나 반체제적인 정치세력에서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언제나 집권세력 내에서 말하자면 인기 있는 자, 아렌트가 말한 ‘강한 인간’‘위대한 지도자’에게서 찾고 그것에 의존하려고 한다. 제도가 잘 운영되지 않을 때 개인에게 의존하고 비록 그가 “악행을---범하지 않는다고 해도---묵인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험한 정치게임이라고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말 일본의 우익은 ‘역사적 기억과 민족적 동질성’을 고취하는 언어와 함께 바른 말과 행동을 억압하는 물리적 힘도 겸해서 사용해 왔다.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집단의식이 매우 강하다. 어떤 의식조사에 의하면 오늘에 있어서도 “옳고 그름은 다수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좋다”라는 문항에 한국인은 30,98퍼센트, 미국인은 7,95퍼센트가 찬성인 데 비해 일본인은 62,27퍼센트가 찬성했다는 것이 아닌가.(2001년 6월 21일 『동아일보』참조)
우리의 대응은?
이웃을 선택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미국의 은둔의 사상가 소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좋은 장소든 나쁜 장소든 거기에 살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북아시아에서 이런 일이 과도기적인 현상이라고 보아야할 것인가. 유럽 통합을 바라보면서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21세기도 오랜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립과 적의와 경쟁의 역사를 되풀이한다고 보아야할 것인가. 일본 우익의 움직임은 성공할 것인가. 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본것처럼 실패할 것인가. 지난번 참의원 선거에서는 압승했다고 하지만 정치적 실적이 나타나지 않으면 고이즈미 정권은 역시 단명할 것이 아닌가. 세계의 압력, 아시아의 힘이 일본의 장래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더욱이 이번 뉴욕의 참사후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 국내에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한 전쟁전과 같이 우익이 번성할 수는 없을 것이 아닌가. 이미 우익 교과서는 패배한 것이 아닌가. 일본의 언론이란 원래 처음에는 정면대결을 피하다가 점차로 비판과 공격을 에스커레이트시켜 가는 것이니까 두고 볼 일이 아닌가.
이런 모든 예상이나 가상을 그리면서 우리는 한일관계를 어떻게 구상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입체적 중층적으로 전 국민적으로 다양한 관계를 구축해 가면서 모두가 전략적인 제휴를 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국가적 사업이어야 한다. 중국이 대두하여 일본과 겨루게 되고 이 두 나라가 모두 동아시아의 평화보다는 일종의 1국 평화주의로 흘러갈 때 우리는 역시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도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구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특히 근대 이후 우리는 한·중·일이 정립(鼎立)하는 동양평화론을 주장해 왔다. 그것은 세 나라가 몰려오는 서구 세력을 공동으로 막아보자는 안보개념이 우위를 차지했던 고전적인 동양평화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정학적인 운명에서 볼 때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양육강식의 시대에는 실현될 수 없는 이념이었다. 오늘은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넘어선 지방간, 국민간 교류 또는 문화교류를 활성화하면서 그야말로 시민연대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동양평화론을 주장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21세기에는 시민사회가 크게 성장하면서 이것이 세계사의 앞날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지난날 민주화운동에 있어서 일본의 양식 있는 시민의 격려를 받았고 이번 교과서 문제에 있어서도 시민의 승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 국경을 넘어 시민연대의 상호격려란 매우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에 있어서 시민연대의 힘이 우경화를 이겨내서 주어진 민주주의에서 쟁취하는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일본에 있어서의 거대한 정치적 실험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미 지식인들 사이에서 “지적 실험으로서의 아시아”“탈 근대 복합국가”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아시아적인 비전을 가져야 하며 그러한 지도력을 키워가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일본학의 대가 매리우스 B. 잰슨(Jansen)이 『일본과 동아시아의 이웃---과거에서 미래로』라는 지난 세기말에 나온 책에서 다음과 같이 한 말은 퍽 의미 깊은 것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방위를 넘어서 민주주의로, 경쟁을 넘어서 협력으로, 의심을 극복하고 상호이해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삼국(한·미·일) 사이의 연결을 중국적시의 인상을 중국에 주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굳혀가기 위해서는 높은 차원의 정치지도력이 필요하고 그것은 다음 세기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북한을 적대시하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배려해야 한다고 강조해야 하는 것이아닐까. 이러한 방향으로 한국의 민주정치가 성숙해 갈 것인가. 그리고 각 영역 각 차원에서 그러한 지도력이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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