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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기획/일본문학의 현 상황/서정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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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본문학의 현 상황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과 현대일본인의 자아
서정완
Ⅰ 문학과 사회의 동기성(synchronicity)...'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의 배경
일본문학의 현 상황에 대해서 논할 때 거기엔 다양한 시각과 접근방법이 존재한다. 일본의 현대문학사를 통시적으로 논하면서 그 조류와 특징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고, 특정 장르나 사건을 중심으로 현대문학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 특징을 분석할 수도 있을 것이고, 특정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또는 작품론과 작가론을 연계해서 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특정 주제를 정해놓고 그 주제에 따라서 논의를 전개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가령 현대문학사를 통시적으로 논하기로 한 경우일지라도 문단을 중심으로 논할 수도 있을 것이며, 독자나 작가의 시점에서 논할 수도 있다. 이토록 다양한 가지 수가 존재하는 것은 첫째로 '현 상황'이라는 것 자체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현 상황'이라는 말이 뜻하는 범위와 개념이 너무 광범위해서 글쓴이가 의도하는 방향이나 관심사에 따라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의 글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얼굴과 방향을 가지는 '일본문학의 현 상황'을 본고에서는 문학의 배경으로서의 문화, 그리고 이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문학이라는 등식을 존중하여, 이에 입각해서 문학과 문화의 관계를 하나의 축으로 삼으려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문화란 그 사회나 집단의 역사, 사상 등을 포함하는 다면적이고 총체적인 정신활동 및 그 결과물을 뜻한다. 바꾸어 말하면 일본문학의 현 상황을 보기 위해서는 일본문학에 그 영양분을 꾸준히 공급하고 있는 일본인, 일본사회의 정체와 특성을 이해해야 하며, 또한 일본사회, 일본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그들의 내적 세계가 전개되는 문학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에 선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의 문학이라는 것이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달에 긍정적 의미든 부정적 의미든 영향을 주고 또 받고 있으며, 문학의 형태 또한 그런 시대적 추이를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시점으로 글을 전개하려는 본고는 자연스럽게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와 그의 작품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 까닭은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하는 작가와 그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이 불러일으킨 사회현상이 바로 오늘날의 일본문학의 현주소를 인식하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초판만 400만부 이상 팔리는 초대형 밀리언셀러가 되어, 쇼와시대(昭和時代) 문학의 마지막 장을 화려하게 장식한 1987년 9월에 발간된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노르웨이의 숲}에 주목하는 이유로서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점은 소위 말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에 대한 접근이자 이해이다. {노르웨이의 숲}의 폭발적인 성공은 일본에서 특히 10대와 20대의 젊은층을 중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이라고 불리는 사회현상까지 일으켰는데 필자는 '작품이 밀리언셀러가 되었기 때문에 부수적으로 발생한 일시적인 현상', '문학 자체의 완성도나 그 작품이 품고 있는 주장과는 직접 관계없는 소비자, 독자 혹은 특정 세대의 상업적인 유행에 대한 반응'이라든지 혹은 '평론가나 출판사가 만들어낸 과장된 표현' 등으로는 결코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견해는 문학과 그 사회적 배경의 유기적인 긴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간한다. 작품 자체, 문학 자체만을 너무 중심에 놓고 본 결과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의 실체를 제대로 분석하려는 시도도 없이 그저 성공한 작품에 수반되는 일시적 현상으로밖에 감지하지 못한 결과인 것이다.
필자는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과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작품에서 그려지는 세계를 문학과 그 배경이 된 사회와 그 사회에 속하는 오늘날의 일본인의 자아라는 축을 중심으로 생각해봄으로써 일본문학과 일본사회 그리고 일본인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 일본문학의 현 상황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이유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일련의 장편소설 중에서 {노르웨이의 숲}과 {태엽감는 새} 두 작품이 차지하는 특별한 위상에 관한 이해이다. 이 두 작품은 '우물'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며, 두 작품에서의 '우물'이라는 공간이 갖는 의미와 기능에 대한 해석은 바로 두 작품 각각에 대한 이해를 위한 것임과 동시에 두 작품을 발전하는 연작으로 연결짓는 개념어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과 {태엽감는 새} 두 작품을 통해서 실제 공간이자 상징적 존재이자 과거회상과 현재를 잇는 통로이자 3차원 세계와 현실세계의 출입구이자 현실에서 받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초능력을 얻는 공간인 '우물'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주인공의 '자아확인' 과정을 그리려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확인'이 바로 오늘날의 젊은이들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호응과 공감의 '실체'였으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스스로가 말하는 동시대에 대한 '커밋먼트(comittment)'였던 것이다. 이러한 장치와 시도가 있었기에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이 일어날 수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현대 일본인의 자아에 대한 이해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길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바로 이 '자아확인'의 과정이 무라카미 하루키 스스로가 밝힌 리얼리즘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울러 무라카미 하루키와 그의 작품은 국내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현재도 대표적인 외국인 작가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구체적인 숫자를 나열하면 문학사상사의 {상실의 시대}의 경우 2001년 2월 10일 현재 초판 24쇄, 2판 85쇄, 3판 8쇄라는 기록을 갱신 중에 있다. 국내에서도 '하루키 신드롬'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었는데 이 말이 오로지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을 번역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의 사회현상에 준하는 신드롬이 국내에서도 실재한다 또는 실재했다고 봐야 하는지는 검토의 필요가 있겠지만 적어도 {상실의 시대}가 베스트셀러임과 스테디셀러임에는 틀림이 없고 일본의 젊은층 독자와 거의 같은 감성으로 한국의 젊은 독자들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바꾸어 말하면 젊은 일본인의 자아와 동일한 세대의 한국인의 자아에서 어떤 공통된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이 사회나 언어를 초월한 '현대인'이라는 커다란 인류집단이 갖는 보편적인 특성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와 일본이 정서적으로 가깝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후인지는 아직은 속단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참고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우물'에 관해서는 필자가 논문지도한 석사학위 논문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에 있어서의 '우물'의 의미와 그 해석}(심재현, 한림대학교 국제학대학원 2000. 8)에 흥미로운 지적이 많으며, 필자 또한 지도과정을 통해서 많은 공부가 되었음을 밝혀둔다.
Ⅱ 80년대 일본의 모습...물질사회 속의 불안한 개인
모두에서 일본문학의 현 상황을 논하는 시각과 접근방법이 다양하다고 했는데, 오늘날 일본의 현대문학을 바라보는 시각 중에는 '전전문학과 전후문학'처럼 전쟁을 경계로 문학의 시대와 특성을 나누는 기존의 시각도 여전히 건재하지만 '문학의 전개와 미디어의 발달' 혹은 '문학과 서브컬쳐(sub culture)'라는 새로운 문제의식이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오히려 오늘날과 같은 대중소비사회에서의 미디어의 발달을 전제로 한 시점이 오늘날의 실제 대중사회 속에서의 문학의 자리를 제대로 파악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일본에서의 미디어의 발달은 '책'이라는 미디어의 발전사만 보더라도, 형태에서는 두루말이(卷子)에서 책자(冊子)로 발전하였고 필사방법 및 인쇄기술에서는 사본에서 목판인쇄, 금속활자, 컴퓨터사식으로 발전하였으며 오늘날에는 'Expanded book'과 같은 전자북(電子book)이라는 디지털화된 출판물까지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필사방법 및 인쇄기술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발전하면서 대량생산과 복제를 용이하게 하는 쪽으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함께 책의 형태가 변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문학과 그 사상을 담고 있는 글자가 종이에서 노트북 컴퓨터 액정화면 위로 옮겨간 것이다. Theodor H. Nelson이 "순서대로 쓰지 않아도 되는 문장, 즉 하나의 문장이 몇 가지 요소로 나뉘어져서 대화적인 화면상에서 독자가 읽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을 하이퍼텍스트(Hyper Text)라고 규정한 것이 1994년인데 이미 상용화된 지 오래다. 이러한 책의 형태적, 내용적 변화 혹은 발전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소비자=독자가 문학을 접하는 방법을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공급자=작가의 창작활동의 기법과 발상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디어의 발달은 결코 책을 비롯한 문자미디어 분야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화의 출현, TV의 출현, 녹음기의 출현, 비디오의 출현이 전후 고도성장기를 거친 일본의 문화의 소비형태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활자미디어에 대해서 영상미디어가 급속도로 발전, 보급된 것이다. 게다가 이 영상미디어는 흑백에서 컬러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계속 발전하여 활자미디어에 속하는 문학의 형태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이러한 미디어의 발전과 그에 영향을 받은 문학의 변용은 대중사회의 발전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실제로 1970년대에 접어들자 활자미디어와 영상미디어의 발달이 시너지효과를 낳아서 출판업계와 매스컴이 제휴하여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는' 블럭버스터 방식을 출현시켰다. 성공한 소설은 영화나 TV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며, 거꾸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먼저 성공한 결과로서 소설이 팔리는 일도 이제는 흔한 일이다. 즉 자본이 문화를 이끌고 관리하는 "문화산업"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며, 이러한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문화적 생산물이 시장에서 대량으로 소비되는 형태를 정착시켰으며 하나의 사회시스템으로서 자리를 잡아갔다. 즉 문학은 소비되는 문화의 한 장르에 불과한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러한 미디어의 발전과 보급은 기술이 대량생산과 복제를 용이하게 하는 쪽으로 발전한 것도 있겠지만 대중으로 하여금 보다 간편하고 폭넓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했으며, 그 결과 사회 안의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교류시켜 중간형태의 대중소비문화를 만들어냈으며, 문학에서는 순문학과 대중문학이라는 경계선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한편 이러한 대중소비사회 속에 내던져진 개인의 자아는 매우 공허하다. 물질이 부족했던 대가족시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 시기를 거쳐 산업이 발달하여 물질의 풍요로움이 정신적인 윤택함으로 연결되어 거기에 개인과 자유라는 개념이 접목하여 70년대를 구가하게 된다. 80년대에 이르자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히려 거품경제의 절정기였기에 넘쳐나는 물질은 더 이상 정신적인 윤택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도쿄라는 도회에서의 생활'이 동경의 대상에서 외로운 생활의 대명사로 전락한 점을 그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다. 1979년 6월에 Ezra F. Vogel의 {Japan As Number One : Lessons of America}가 발간되고 1992년 9월에 {청빈의 사상(淸貧の思想)}이 발간되었는데 이 두 권의 서적이 일본의 80년대의 시작과 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경제대국 일본과 그 거대한 집단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정신적, 정서적 가난의 극복이라는 기호를 여실히 나타내는 1979년과 1992년의 중간 10년이 80년대 일본의 모습인 것이다.
60년대에 일본의 주요대학에 경영학과가 설치되었고, 70년대에 '일본적 경영'이 일본의 경제성장과 부자 나라 일본을 상징하는 개념어가 되었고, 그 결실이 풍요로운 사회, 경제대국 일본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80년대에 일본인들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인 풍요에 어울리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매스컬쳐(mass culture)에 의한 사회시스템 안에서 고아가 되어버린 '나약한 마음'을 치유하고 물질만능을 반성하려는 신호가 {청빈의 사상}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1987년에 발간되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 위에서 요약한 일본의 80년대라는 시대를 등에 업고 있는 것이다. 이 동시대성이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의 근간인 것이다. 비록 37세의 '나'라는 주인공 와타나베가 18년 전의 일을 회상하는 구성을 취해서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라는 '젠쿄토(全共鬪)' 시대 전후를 무대로 설정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은 이 어두운 시대의 유산인 '투쟁'이라든지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일상을 살면서 '자아확인'을 위해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실제로 전개되는 풍속이라고 할까 문화는 80년대라는 이중적인 면을 보인다. 80년대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투영할 수 있는 모습, 바로 그런 동시대성을 이 작품은 품고 있는 것이다.
Ⅲ 자아상실과...반만 달성된 자아확인
{노르웨이의 숲} 일본어 원서 띠지에는 "격렬하고, 조용하며, 슬픈 100% 연애 소설"이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실제로 {노르웨이의 숲}을 "청춘 연애 소설"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 스스로 띠지에 '100% 연애 소설'이라는 문구를 넣은 이유에 대해서 "이러한 소설을 펴낸 데에 대한 나름의 변명"이었으며, {노르웨이의 숲}이 연애 소설이라는 관점에서 평론되는 것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당황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노르웨이의 숲}은 "정확한 의미에서 연애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러면서 이 소설은 "내 주위에서 죽어간, 혹은 사라져 간 수많은 캐주얼티즈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캐주얼티즈의 뒤에 남아서 존속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혹은 사물들의 모습"이자 "고독하게 싸우고, 상처받고, 상실되고, 상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야만 하는 모습"을 그린 "성장 소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이 작품에는 기즈키와 나오코의 자살을 하나의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기즈키의 죽음에 의한 나오코의 상실감과 그로 인한 자아의 불안이 선명하게 그려진다.
나오코는 아래와 같은 언어능력의 곤란에 직면한다. 그러나 이 곤란은 표현방법에 대한 곤란이라기보다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그 의미에 대한 인식의 혼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즈키의 사망 전에는 마치 기즈키가 유능한 호스트이고, 나오코가 파트너로 TV의 토크쇼를 담당하는 사람처럼 유창한 언어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즈키의 사망은 나오코에게 커다란 상실이었고 그 상실은 곧 자아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 것이다.
"잘 설명할 수가 없어" 하고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즈음 늘 이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어. 뭔가를 말하려 해도 늘 빗나가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거야. 빗나가거나 전혀 반대로 말하거나 해. 그래서 그걸 정정하려면 더 큰 혼란에 빠져서 빗나가 버리고, 그렇게 되면 처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조차 알 수 없어. 마치 내 몸이 두 개로 갈라져서 쫓고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 한복 판에 굉장히 굵은 기둥이 서 있어서 그 주위를 빙빙 돌며 술래잡기를 하는 거야. 꼭 알맞은 말이란 늘 또 다른 내가 품고 있어서, 이쪽의 나는 절대로 따라잡을 수가 없게 돼."
이러한 나오코가 스무 살 생일 때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잘도 떠들어댔다." 그러나 그녀가 열심히 떠들어대면 댈수록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인가가 차츰 의식되기 시작"했고, "뭔가 부자연스럽고 일그러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국 위에 게시한 것처럼 무언가 설명하고 싶었는데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나오코는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에 직면하여 처절한 울음을 터뜨린다. 그 날 밤 '나'는 나오코와 함께 자는데 여기서 섹스는 "잘 설명할 수가 없는"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을 보상하려는 또다른 커뮤니케이션의 시도라고 봐야 한다. "이 곡을 들으면 난 가끔 무척 슬퍼질 때가 있어. (중략) 내가 깊은 숲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감정이 들곤 해 (중략) 외롭고 춥고, 그리고 어둡고, 아무도 구해 주는 사람도 없고"라는 요양원에서의 나오코의 발언은 도쿄라는 거대한 숲 속에서 기즈키를 포함한 타인과의 커뮤니케인션, 자아와의 커뮤니케이션을 모두 상실한 인간의 에스오에스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오코는 결국 자아를 회복하지 못하고 자살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스스로가 "이 소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잇달아 죽어간다. 그건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이지 않느냐는 비평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나로서는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의 자아가 흔들리면서 치유를 위해서 몸부림쳤으나 결국 자살이라는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기즈키와 나오코. 한편으로 생각하면 작가가 자아를 회복하는 방법과 과정을 독자에게 제시하지 못했다고도 볼 수 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말대로 삶의 연장으로서의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나오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다 살게 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단 그렇게 보더라도 나오코의 '자아확인'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 자아에 대한 불안은 결국 '나'에게로 이어진다. '나' 또한 자아를 확인하지 못한 채 미도리가 지금 어디에 있냐는 질문에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자문을 되풀이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자기, 지금 어디 있는 거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밑줄 인용자)
보잉 747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밝히지 않은 채 시작된 이 소설은 주인공 와타나베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끝난다. '나'의 자아 또한 매우 불안정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지리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자아의 위치까지 뜻한다고 봐야 한다. 아니, 오히려 자아의 불확실성을 뜻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기즈키나 나오코처럼 자살하지 않는다.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든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야기할 게 너무 많다, 이야기해야만 할 게 산처럼 쌓여 있다"고 말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의 복구에 적극 나선다. 바로 '자아확인'에 대한 필요성을 미도리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이렇듯 자아를 확인하지 못한 채 막을 내린다. 그러나 자아의 상실을 확인했다. 그것이 아직 반쪽이기는 하나 '성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1994년에 달성된다. {태엽감는 새}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물'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자아확인'의 과정을 마무리한다. '마른 우물'에 물이 가득 차면서 자아는 확인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노르웨이의 숲}은 "성장 소설"인 것이다.
작가 자신의 "세대적 티"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80년대 물질사회에서 자아의 방황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했던 것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리얼리즘이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특색으로 지적되는 경쾌한 문제, 빠른 템포, 섹스, 음악, 평범한 일상 등은 바로 80년대 세속을 그대로 반영한 리얼리즘의 소도구가 아닌가? 작가 스스로 20대를 보낸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설정하면서도 회상하는 시점인 80년대를 회상한 시점에 그림으로써 자아를 놓고 방황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의 단절을 두려워하는 나약하고 외로운 도시의 젊은 세대에게 동질성과 동시대성을 느끼게 한 소설, 그것이 '무라카미 하루키 현상'의 본체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경력 :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1984.2)
(일본) 쓰쿠바대학교 대학원 문예언어연구학과 박사과정 졸업(1992. 3)
(일본) 호세이대학교 문학부 객원연구원(1992. 4~1992. 8)
한림대학교 일본학과 부교수 (1992. 9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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