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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신작시/백인덕 불순한 기도 외 1편/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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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백인덕
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한양대학교 국문과 강사. 한양
여대 문예창작과 강사. 웹메거진 <시단> 편집위원
불순한 기도 외 1편
밤새워 이웃집 붉은 기와지붕에 내리는 비,
남몰래 매맞는 얼굴 하나,
장미 다 진 골목에 남은 피 빛 아우성들.
약 먹은 듯 굽지 않는 손가락으로--그래,
그래 내 생각은 손끝에 있다. 아니, 손아귀에
단단히 쥐어져 있다. 적의의 최단 항로를
날쌔게 날아갈 하나의 돌멩이처럼,
--엽서를 쓴다.
내 마음의 독毒 밭에도, 놀라워라. 밤새 비는
양귀비 몇 송이를 피워 올리고 제 빛에 겨워
사지를 뻗고 누웠다. 비의 이 놀라운 전환,
칼을 버리고 칼의 비수성을 버리고
환각의 부주의를 대신 산 오늘의
안녕들에게, 안녕!
물 먹이듯 비만 쏟아지는 밤,
머리맡 냉수가 마를 때가지 사람들이 빠져
나가리라. 땟국물 긴 흔적을 따라
더러는 죽고, 더러는 앓으며 비단망사 꽃무늬
채에 걸린 부스러기처럼 몇 몇이 남아
어제의 술을 마시고
패를 돌리듯 내일의 운수를 점치겠지만
안녕, 어제 죽지 않은 것들은 오늘 죽으리니
꿈속에서도 매맞는 날들이 오리라.
모두 맞아 죽은 꿈속에
부러진 몽둥이들, 쏟아지는 비 사이 아픔들만
아프게 쏘다니는 날이 곧 오리라.
그 날이 꼭 오리라.
늦은 출발
-K에게
개가 죽고, 개집이 팔리고
꽃이 시들고, 화분이 버려지고
흐린 창, 유리가 깨지고
어긋난 빈 틀을 벗겨낸 후
나는 떠날 수 있을까?
아침에 얼었다가 늦은 오후에 몸 푸는
하수구 근처 겨우 고인 물, 추워진 며칠
새 물빛은 어두워지고 죽고,
시들고, 깨진 채 몰려와 아우성치는
아아, 깊이 잠긴 목을 조르는
추억의 위험수위는 높아만 가는데
언제든지 나는 떠날 수 있을까?
아직도 흔들리는 사철나무, 그 옅은 그늘 속에
자라나 더러운 벽도, 기둥도 되지 못한 채
생으로 허리만 망가졌던 오래된 집에서
엮고 푸는 것이 한 길인 매듭처럼
실밥 다 헤진 나를 놓아버릴 수 있을까?
차갑게 마른 빨래를 거두며
시린 손이 생각하는 늦은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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