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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문화/관습의 해체와 불온한 상상력/임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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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관습의 해체와 불온한 상상력
- 아니메와 성인 애니메이션에 대한 짧은 생각
임화인
타자에 대한 공포와 꿈의 반납 - 「신세기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키 감독의 96년 작품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이하 「에바」)은 아니메 역사상 매우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될 듯 하다. 에바초호기의 파일럿 신지는 세계와의 소통 출구를 상실한 일본 청소년들의 찰나적 위안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우리가 목격한 것은 상실된 꿈의 희미한 끝자락이었다. '그러니까 모두 죽어버리면 좋을텐데'라는 신지의 독백은 꿈을 반납 당하고 정신의 폐허를 경험한 채 병적인 피사체로 전락해가던 우리들 젊은 시절의 은유이다. 물론 「에바」의 배경은 2015년의 가상도시인 ‘제3 신동경시’이지만, 그것이 보여주는 명백한 아이콘은 고독한 자아의 불안이라는 인류의 근원적 트라우마와 일치한다. 난해한 스토리와 회의하고 번민하는 나약한 주인공의 창조라는 관습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에바」에 환호성을 보냈던 이유는 그곳에서 벌어지는 존재의 붕괴 현상이 익숙한 아니메 법칙의 변형이자, 세기말에 직면한 나약한 인간의 고민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던 시대의 격렬한 허무에 닿아있는 경계 없는 모호한 세상 속에 [에반게리온]의 신지와 레이, 그리고 현실의 우리들이 뒤섞여 있었던 셈이다.
하여“난 장차 되고 싶은 것이 없다. 꿈도 희망이란 것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14세인 지금까지 되는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지금 사고로 죽는다 해도 난 상관없다”라는 신지의 허무적 독백은 존재에 대한 회의와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 대한 일종의 경고가 된다. 꿈을 반납해야 한다는 것은 소통의 출구를 폐쇄됨을 의미하며, 이는 곧 타자가 동화의 대상이 아니라 공포스러운 적으로 변주된다는 것을 뜻한다.
신지가 보여주는 자폐적 증상은 타자에 대한 명백한 공포와 이 세계에 버려졌다는 고아의식을 상징한다. 신지는 거대한 생체병기 「에바」의 파일럿으로 그가 왜 선택되었는지도 모른 채 불안에 떨며 사도라는 수수께끼의 적과 전투를 수행한다. 정신과 육체는 만신창이가 되어가고, 성장은 멈추어 버린다. 소년에서 청년으로의 성장이 멈추었다는 것은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희망이 되지 못하고 공포로 전락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마치 어느날 갑자기 벌레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하며 경악하는 카프카의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와 같이 실존의 공포스러운 체험 앞에서 청년보다는 소년의 삶에 더 익숙해 보이는 14살 신지의 정신은 근원적 결핍의 길로 들어선다.
라캉에 의하면 주체는 존재 자체로 근원적 결핍에 시달리게 되며 인간 욕망은 무한한 환유를 꿈꾼다. 타자를 인식하지 못하고 거울 속의 나를 보며 환호성을 울리는 어린아이의 상태를 라캉은 상상계라 명명했다. 상상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오인의 구조를 인정하지 않는 유아의 단순한 심리상태가 지속된다. 거울단계는 언어의 세계이자, 질서의 세계이며, 아버지라는 절대권력의 법률이 적용되는 상징계에 이르러 소멸되기 시작한다.
[에바]의 14세 주인공들의 신경증은 거울단계에 고착된 심리적 자아를 상징한다. 이들이 보여주는 소통 부재의 고독한 자아의 모습은 타자의식이 형성되지 못한 상상계의 상태를 재현한다. 이들은 상징계라는 아버지의 질서와 대립하고 갈등하며 모성에로의 회귀에 집착적으로 매달린다. 신지의 자폐증은 아버지라는 질서의 세계에 순응하지 못하는 상징계 속의 공포이다. 타자의식의 부재는 근원적인 소외와 연결되어 있다.
상징계에서 끝없는 추락을 경험하게 되는 신지가 상상계에 대한 동경을 꿈꾸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파일럿과 동일시의 감정을 공유하는 생체병기 [에바]에 어머니의 혼이 담겨 있다는 암시는 [에바]의 조종석이라는 자궁 안으로의 인써트를 통해서만 비로소 분열된 자아의 원초적 복원을 이룰 수 있음을 은유 한다. 하지만 자궁으로의 탈출과 모성으로의 회귀 또한 주체의 결핍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의 결핍은 죽음과 함께 소멸될 뿐이다. 욕망을 환유시키기를 거부하는 신경증 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일반적 아니메 흥행 법칙의 관습을 전복시킨 안노 히데키 감독은 [에반게리온]을 지배하는 죽음에 대한 함의를 통해 주체의 결핍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애니메이션의 주제로 그려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에반게리온]에 대한 매니아들의 환호는 아니메의 전통적 흥행공식 - 예를 들면 [미래소년 코난]의 미야자키적 세계관인 대재앙 후의 인류, 미소년, 미소녀적 캐릭터, 동심과 모성으로의 회귀, 정교한 로봇 메카닉, 일본적 판타지 등 - 에 대한 변함없는 오타쿠족의 경배가 한 몫 하고 있겠지만, "그럼,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거야?"라는 질문을 던지며, 세기말적 불안을 실존의 문제와 결부시켜 그려낸 안노 히데키의 타자에 대한 공포와 꿈의 반납에 우리 모두가 묵시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음에 기인한다.
[에바]을 보며 나는 아니메의 다양한 장르 구분과 이에 걸 맞는 독특한 아이템의 창조가 부러웠다. 그런 날이면 아직도 애니메이션을 3류 소프트 포르노나 유아용 명랑 개그 만화 정도로 생각하며 허술한 기획서만 양산하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좀처럼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관습이 부끄러워진다.
아무튼 안노 히데키 감독의 [에바]은 방황하는 오타쿠들의 불안심리를 죽음의 함의를 통해 비극적으로 그려내 매니아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면, 마쓰모토 레이지의 [은하철도 999]는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의 욕망과 타락을 은유적으로 묘사해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아니메의 또 다른 아이콘이 되고 있다.
죽음으로부터의 도피와 욕망의 은유 - 「은하철도 999」
'추억은 마음속의 우주'라는 「은하철도 999」(이하 「은철」)의 나레이션은 소년시절의 나에게는 점수 몇 점 올리기 위해 입에 신물이 나도록 외워야 했던 영어단어보다 훨씬 각별한 것이었다. 우주를 날아가는 19세기 증기기관차라는 역설적인 상상력 안에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한다는 기계인간이 되기 위해 은하철도 999호에 승차한 우리들을 꼭 닮은 못생긴 소년 철이와 첫사랑의 소녀처럼 신비롭기만 한 여인인 메텔의 슬픈 시선이 존재한다.
마쓰모토 레이지가 만든「은철」의 인기는 예정된 것이었다. 특히, 「은철」의 흥행에 한몫 한 일등공신은 메텔의 '몸'에 대한 환상적이고도 미스테리한 접근일 것이다. 방송국에 의해 많이 삭제되었지만, 곳곳에서 보여지는 메텔의 몸, 아니 '육체'는 한참 성에 눈뜰 나이였던 소년들의 시선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메텔의 몸이 지닌 함의는 모성의 결핍을 경험한 철이에게는 자궁으로의 회귀를 상징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첫 회부터 심심찮게 등장하던 메텔의 관능미는 훔쳐보기라는 본능을 제거하고 볼 때 모성의 빛나는 생명력으로서의 자궁이 되거나, 고단한 삶의 안식처로서의 어머니의 몸이 되기도 하지만, 흥행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던 작가의 고육지책이 그 속에 겹쳐 있었다고 상상해 보는 것은 논리의 오류일까?
그러나 「은철」이 단순한 소년만화의 범주에 머물렀다면 일요일 아침 삥 둘러앉은 밥상에서 아버지와 삼촌의 시선을 쉽게 빼앗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전 우주를 기계인간의 제국으로 만들려는 프로메슘의 비틀린 유토피아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영혼을 팔고 기계인간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무수한 인간들의 모습이야말로 「은철」이 방송되던 1981년이나 이십년이 지난 지금이나 여전히 가장 강력한 인간의 욕망으로 남아있지 않던가? 「은철」의 작가 마쓰모토 레이지는 물질만능주의로 변해 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타락과 이를 대체할 아무런 희망도 남아있지 않은 채 세기말을 맞아야만 하는 인류의 우울한 표정으로 철이와 메텔이 정차하는 별들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독재자의 서슬퍼런 권력이 방송을 자신의 입맛대로 칼질하던 시대였던 1981년도에 빈곤과 착취와 의미 없는 자유와 추억과 꿈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은철」이 113회나 방송되었다는 사실이다. 만화영화를 유치원 철부지들이나 보는 것으로 치부했던 권력의 단순함이 「은철」의 방송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청년이 된 철이에게 프로메슘이 보장한다는 영원한 생명의 유토피아는 인간의 헛된 욕망이 만들어낸 신기루에 불과할 뿐이었다. 기계인간이 되기를 그토록 갈망했던 철이가 프로메슘의 제국인 기계화 별을 멸망시키는 것으로 113회 동안 멈춤 없이 달려왔던 은하철도 999호는 다시 지구를 향해 기적소리를 내뿜기 시작한다.
추억은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우주이다. 철이가 어른이 되었다는 것은 헤어짐의 슬픔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구로 돌아오는 999호에는 메텔이 승차하지 않는다. 「은철」의 열렬한 지지자가 아니더라도 메텔과 철이의 입맞춤과 777호를 타고 떠나는 메텔을 향해 울부짖는 철이의 모습과 쓸쓸하기만 한 메텔의 눈망울은 두고두고 기억될 명 장면이다. 철이가 헤어짐의 슬픔을 인식하는 것은 상상계의 상태에서 상징계로의 진화를 그가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엄격한 질서의 세계라는 상징계 속으로의 편입을 받아들일 때, 거울단계에 나타났던 모성으로서의 메텔은 철이에게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철이가 비록 모성의 자궁역할을 했던 메텔과의 이별을 받아들이지만, 상상계의 몽롱했던 추억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메텔과 철이의 이별의 입맞춤은 하여 상상계에 머물며 죽음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메타포임에 틀림없다. 비로소 철이는 소년에서 청소년으로의 진화를 겪으며,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며, 타자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에바]나 [은철]의 관객층은 따라서 단순한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머물지 않는다. 신지라는 미소년과 철이라는 못생긴 소년이 보여주는 비극적 활극은 실존의 문제라는 무거운 화두를 매달고 우리들 마음속에 가라앉는다. 소년에서 청소년으로의 진화가 멈춰버린, 아니 멈추기를 욕망 했던, 혹은 비로소 성장을 인정하기 시작하던 그들이 갖게되는 세계에 대한 공포와 불안, 그리고 주체의 결핍은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섹스 코드만이 성인관객을 소구할 것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쾌락주의는 [에바]과 [은철]의 깊이 있는 고민 앞에서 너무 쉽게 추락해 버린다. 초등학생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국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는 그래서 더욱 낯설고 경이롭게 성인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에바]의 실존적 공포나 [은철]의 죽음에 관한 은유와는 상이한 차원에서 추악한 욕심의 전복을 꿈꾸며 질주하고 있다.
욕심을 전복시키는 동심의 불온한 상상력 - [사우스 파크]
[사우스 파크」라는 미국 콜로라도의 산골 마을에서 우리가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네 명의 초등학교 학생들이다. 이등신으로 그려진 단순한 캐릭터들이 '컷 아웃' 기법의 조잡한 그림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쉽 없이 욕설을 내 뱉는다. 그런데 그 욕설이 묘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오며 우리들은 정신이 은화처럼 맑아지는 경험을 한다. 왜냐하면 "돼지랑 교미할 놈" "내 밑이나 핥는 게 어때요" 등의 거친 욕설이 놀랍게도 혼탁한 사회에 대한 거대한 독설이 되어 메아리처럼 스크린을 맴돌기 때문이다.
97년 8월 미국의 위성 TV '코미디 센트럴'에서 방영되기 시작한 「사우스 파크」는 극장판에 이르러 더욱 대담해진 욕설과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 전개로 성인용 애니메이션의 신천지를 콜롬보스처럼 항해하고 있다. 우리는 성인용이라는 타이틀 앞에서 늘 섹스를 떠올리곤 한다. 섹스 없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무의식이 우리의 통속적인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근래에 흥행에 성공한 OVA인 「누들누드」나 「고인돌」이 모두 현대인의 허위적인 성 담론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사우스 파크」는 이러한 성인용 애니메이션에 대한 고정관념을 단번에 허문다. 섹스가 거세되어 버린 「사우스 파크」에는 이등신으로 귀엽게 그려진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이 내 뱉는 "너네 엄마는 화냥년" 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거친 욕설이 천연덕스럽게 넘쳐난다. 네 명의 초등학생은 스탠, 에릭, 카일, 케니이다. 이들이 욕설을 입에 달기 시작한 것은 캐나다의 코미디언 콤비인 필립과 테란스가 나오는 R등급의 영화 <불타는 엉덩짝>을 본 후이다. 욕설만이 난무하는 애니메이션이라면 그것은 저질 삼류의 낙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귀여운 악동들의 무표정 속에서 나오는 욕설들이 엄마나 선생님, 더 나아가 의사나 정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들은 경악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욕설은 오만과 욕심으로 가득찬 미국이라는 거대 제국의 모든 억압적인 권위를 조롱하고 야유하는 언어임에 틀림없었다.
「사우스 파크」에서 엄마는 아이들을 통제하는 권력이자 모성이 거세되어 버린 마녀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스탠과 영화를 보러가는 케니에게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면 사탄과 잘해보라며 악담을 퍼붓는 것은 바로 케니의 엄마이며, 캐나다를 반대하는 어머니의 모임을 만들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카일의 엄마 쉴라이다. 에릭의 엄마는 한 술 더 떠 독일 포르로물의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한다. 가장 상식적인 모자 관계를 전복시켜 버리는 불온한 상상력이 「사우스 파크」에는 가득하다. 우리들 지식의 범주 안에 있는 초등학생의 심리는 어머니 자궁이라는 상상계로의 안락한 복귀를 꿈꾸거나 상징계라는 아버지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사우스 파크」의 스탠, 에릭, 카일, 케니는 이 두 가지 범주의 수용을 모두 거부하며 불온한 상상력을 극대화시킨다.
불온한 상상력은 필연적으로 관습의 전복과 금기의 해체를 동반하며 온다. 심장을 데우기 위해 전자레인지에 넣는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은 지옥에 떨어진 사담 후세인이 사탄과 동성애를 하는 장면과 스탠이 짝사랑하는 웬디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클리토리스를 찾으러 다니는 황당무계한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클리토리스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는 학교 흑인 주방장의 말만을 믿고 만나는 사람마다 클리토리스를 찾는 이등신 꼬마 스탠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시라! 쾌락에 도취된 현대인의 성적 허위를 섹스 없이 이만큼 통렬하게 비판하는 애니메이션을 나는 지금까지 본적이 없다.
「사우스 파크」는 이와 같은 기발한 상상력을 밑천으로 미국 사회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을 화면의 곳곳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동성애 문제, 기독교적 윤리관의 비판, 빌 게이츠로 대표되는 독점 자본주의의 문제, 인접국 캐나다와의 갈등, 전쟁을 국내 문제의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미국이라는 거대 제국의 오만함 등이 네 명의 천연덕스러운 악동들에 의해서 사정없이 조롱되고 있다. 미국이라는 제국의 욕심은 불온한 상상력으로 가득 찬 동심에 의해 너무나 쉽게 전복된다. 악동의 무표정은 순수를 대변하고,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세계는 추악한 욕심을 상징한다. 세계의 고정관념과 제국의 오만을 그려내는 작가의 불온한 상상력은 놀랍게도 동심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취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사우스 파크」를 보면서 두 가지 점에서 놀라웠고 한가지 점에서 부러웠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섹스 없는 성인용 애니메이션이 구현되었다는 점과 현란한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대비되는 이차원적 그림만으로 성인 관객을 소구케 하고 있는 점이 놀라웠고, 만화의 도발적 상상력이 사회비판의 메시지와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부러웠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은 늘 자본이 없음을 탓하며 헐리우드나 일본의 거대한 애니메이션 시장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실제로 100개가 넘는 애니메이션 기획들이 망령처럼 허공을 떠돌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의 실상이다. 그러나 「사우스 파크」의 대중적인 호소력은 현실의 모순과 불순한 음모들을 전혀 낯선 방법으로 풍자하고 야유하는 지점에서 솟아오르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애니메이션과 '꿈' 이라는 단어 사이에 부등호가 아닌 등호가 그어지기를 희망하는 우리 모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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