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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신작시/이덕규/별들 외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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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이덕규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별들 외 1편
어디 그 멀고 아득한 곳에만
이쁜 별들이 있었으랴
어느 추운 겨울밤, 장독대 위
살짝 언 정화수 위에 깨어질 듯 박힌
얼음별이나 막차 놓치고
걸어가던 고샅길
내 지친 발걸음 앞에서 우수수
우수수 쏟아지며 산산이 깨어지던
풀섶 수 천 수 만의
그 성근 이슬별들도 고왔거니, 혹은
어느 가문 해
우묵배미 마른 논으로
천섬 만섬 흘러 들어가며 짤그랑
짤그랑 부딪던 그 물 위에 뜬
방울별 소리들은 또 어떤가, 그보다도
그보다도 닷새거리로
새벽장 보러가던 우리 어머니
이마 위에 송글송글 솟은 샛별
거름 내고 측간 옆에 함부로 앉혀놓은
양철 똥통 안에 뜬,
그 밑으로
흐릿하니 가라앉은 내 할아버지나
아버지 구릿빛 얼굴 같은
그
별들
하나 하나도 더욱 더 아름다웠느니
들꽃, 그 이름들
해마다 봄이면 어김없이
들녘에는 참 많은 꽃들이 피어나지만 그 이름들을
낱낱이 아는 이는 우리 동네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씨 뿌릴 즈음에 피었다가
가을걷이 추수철이면 앙상한 꽃대들이 말라 비틀어 질 뿐
더러는 사람들이 그 꽃 핀 자리에 털석 주저앉아
들밥을 먹고 더러는 쇠똥에도 눌려 주저앉고 억센 발굽에 짓이
겨져도 제 이름을 불러주거나 꺾으려 하지 않아도
그것들은 거기에 늘 제 몫으로 피었다가 지고 말 뿐
못다한 말 못다한 울음일랑 가슴 속에 꼭꼭 싸 안은 채
다음해 봄을 기다려 단단한 제 집을 지을 뿐
어느 누가 그 이름을 불러
아름답다거나 남루하다거나 신비롭다 하는 말을 했던가,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서로에게 불러줄 이름이 없던 그 시절부터
민들레 홀씨 불어 날리며 나 오늘 여기까지 흘러 왔느니
누구 하나 내게 그 이름 들려준 적 없고
너희들 이름 불러본 적 아득히 없었다.
들꽃들아! 네 이름을 모르고 살다간 사람들은 너를 닮았었다
너를 닮아, 오늘 다시 이 외진 들길마다에는 못다한 말 못다한
울음 저토록 많은 여문 씨들로 터져 오르는데
그 이름들을 또박또박 새겨보며 그렁그렁한 눈빛들을
두 손으로 받쳐들면 아름답고 신비스럽고 남루한 서러움의 향내
돌아 눈물이 날수록
세상은 가깝고 너는 더 멀어지지만 하는데
이제사 가까이 다가가려는 마음이 자꾸 부끄러워지는 것은
세상을 반 바퀴쯤 돌아나와
반쯤은 알아버린, 어느새 너희들 이름을 내가
너무 많이 알아버리고 말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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