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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백우선 연재시/'예술시편'[1][2]/백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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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우선
댓글 0건 조회 4,314회 작성일 02-06-14 17:06

본문

백우선 연재시

'예술시편'[1]
봄봄
―김인식 유화 '봄'


봄은 떼로 온다
온다 온다 오지 않더니
온갖 종족 떼로들 꿈틀대며
언제 터진 폭발일까, 꽃 꽃 꽃화산
확 몰려와 등을 탁 친다
히야―, 휘둥글
정신이 휘청한다
빛깔이며 향기며 흘리흘리며
동네방네 난리굿
질퍼덕질퍼덕 봄은 온다
그 꽃진창 속
흥건히 젖지 않을 길이 없다


[꼬리말]
"샤르댕, 이게 무슨 꽃이지요?"
"스타치스, 노랑과 보라의 스타치스……."

  그림에 들어가기 전의 꽃이 화병에 꽂혀 바짝 말라 있다. 색깔도 바래고 칙칙하다. 그러나 그림 속의 꽃은 여전히 싱싱하고 흐드러져 피어 있다. 그 아래서 연일 담배들을 피워대도 끄떡없다.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은 언제나 봄이다. 화병에 처음 꽂힌 꽃이 그냥 봄이라면, 이 그림 속의 꽃은 봄봄이다. 내가 싫어하는 담배 연기를 봄안개로 보이게도 해주는 향기로운 봄봄이다. 내 발은 늘상 그 꽃진창에 빠진다. 한겨울에도 봄꽃물이 가슴에 흥건히 고인다.

  그가 좋아하는 화가의 이름으로 그를 부른다.
  "샤르댕, 이 글 좀 봐봐요. 봄물에 젖나."  





돌의 꽃밭
―변미영 회화(들꽃과 새를 그린 돌들을 붙임)


꽃이란 꽃
다 주어버리고 잊어버리고
그저 막돌로 구르며
얼마가 지난 지도 모르는데
꽃 봐라 꽃 봐라
꽃 중의 꽃 봐라
돌의 가슴에 햇살은 내려
다시 꽃으로 피었습니다
깊이 모를 빛의 꽃 피었습니다
반짝반짝이는 하늘의 눈
꽃소식 전하려
나래 펴는 돌
파랑새의 노래도 향기롭습니다


[꼬리말]
  아기 주먹만한 자연석, 길가에 나뒹구는 돌멩이가 꽃과 새가 되어서 내 가슴속의 그것들과 만난다. 반가이 눈짓을 보내고 이야기를 나눈다. 작가의 작고 나서지 않는 것들에 대한 애정, 그것들과 만나 이루어내는 아름다움의 의미――그런 것들로 인해 마음이 더욱 따뜻해 온다.  
  모두 여덟 개의 돌 중, 하나에는 파란색의 새 한 마리를, 일곱 개에는 애기똥풀, 수박풀, 붉은토끼풀, 톱풀, 으아리, 동자꽃, 초롱꽃을 하나에 한 가지씩 그렸다. 방해말과 물감을 써서 그린 것을 서화지에 적당한 간격으로 붙이고 꽃이름도 연필로 적어 놓았다. 글씨도 참 소박하다. 이들을 보거나 생각할 때마다 우리꽃들이 자꾸 피어나고 소리 없는 웃음이 번져온다. 주름 없는 공기의 투명비단 자락을 가만가만 흔드는 새의 노랫소리도 들려온다. 꽃의 빛깔과 향기가 새의 노래를 더욱 곱고 향긋하게 한다. 내 발걸음이 자꾸 춤이 되려고 한다.





태양새
―김기창 수묵채색화 '태양을 먹은 새'


태양을 꿀꺽 집어삼켜
하늘까지 쌈으로 욱여 넣어
태양으로, 하늘로
타오르는 새
저 위의 위
짙붉어 끝없는
태양의 태양
하늘의 하늘까지로
이글이글
깃을 치는 새


[꼬리말]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나의 분신같이 아끼는 작품이다. 우주로 비상하여 우주 자체를 집어삼키고 싶은 내 심정의 표현이기도 하다."<'나의 그림 나의 생각' "현대인" 1976년 4월호>  

  올 1월 23일 고인이 된 운보 김기창 화백은 청록산수, 바보산수, 수묵추상 등을 통해 우리를 푸르고 넉넉한 그림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그의 바보산수를 보면서는 나도 바보시를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10 년 전쯤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있는 그의 '운보의 집'을 둘러보고 '운보의 집에는'이라는 시를 다음과 같이 썼다.(최근에 고침)

  "운보의 집에는/크고 둥그스럼한/돌들이 있다//돌거북과 돌물고기/굴껍질 흔적의 바위/이들이 그들이다//초정 약수터 길목/본채 왼편에는/아욱과 기장밭의 신이란 뜻일까/'露葵黃粱社'(노규황량사)가/완당의 글씨로 현판돼 있다//들꽃들의 꽃밭이 있고/복스럽고 동그마한/개, 닭, 토끼 들도 있다//운보, 우향 기념관 앞에는/소박하나 그윽하고 넉넉한/돌해태 한 쌍도 있다"

  '굴껍질 흔적의 바위'를 보면서 왜 하필이면 굴 껍질(제대로는 껍데기)이 붙어 있는 바위를 이곳에 세우게 되었을까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 굴 껍데기가 어쩌면 그의 친일 관련 얼룩일까하고도 생각해 보았다.






황홀의 비
―구스타프 클림트 유화 '다나에'


하늘의 꽃에서 내리쏟아져
땅의 꽃으로 빨려 들어라
황홀, 천지 황홀의
왼갖 꽃들 흐드러진 꽃밭의
진동하는 꽃비린내, 풀비린내
흥건한 꽃물 미끈미끈적여라


[꼬리말]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물구슬발'이라고 부른 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냥 내리는 비는 '물구슬줄', 꽃에서 흘러내리는 비는 '꽃물구슬줄'일까.

  그렇다면 꽃에서 꽃으로 흘러드는 꽃물은 '비단구슬꽃물'일까.

  그렇다면 내게서 네게로 흘러가는, 네게서 내게로 흘러오는 이것의 이름은 무엇일까.






오직 연꽃을 사랑하리
―주돈이와 나의 '애련설'
                

나는 오직 연꽃을 사랑하리
진흙탕에서 자라 진흙탕을 꽃피우고
맑게 씻기고도 자만하지 않으며
속은 통하고 겉은 곧으며
덩굴지거나 가지치지 않고
향기는 멀리에서 더욱 맑으며
등불로 솟아올라 빛이 되나니
이만치서 바라는 보고
가까이서 만질 일은 아니리
나는 오직 연꽃을 사랑하리니
연꽃은 꽃 중의 어진이이리


[꼬리말]
중국 북송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 전문 풀이는 다음과 같다.

"물뭍 초목의 꽃에는 사랑할 만한 것이 아주 많다.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고 당나라 고조 이래로는 세인들이 모란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나는, 진흙에서 나오나 그것에 더러워지지 않고, 맑은 물에 씻기고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통해 있고 겉은 곧으며, 덩굴지거나 가지치지 않고,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으며, 꼿꼿하고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만만히 다룰 수는 없는 연꽃을 유독 사랑한다.
  국화는 꽃의 은일자요, 모란은 꽃의 부귀자요, 연꽃은 꽃의 군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슬프다. 국화 사랑은 도연명 이후엔 들은 적이 거의 없고, 연꽃 사랑은 나와 같은 이가 몇이나 될까. 모란 사랑 많음이 당연한 것이리라."

  이 중에서 연꽃을 유독 사랑하는 이유 부분을 뽑은 뒤 내 생각을 20%쯤 넣어 풀이했다. 번역도 창작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도 한문일 경우는 10∼20%쯤일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도 써 보았다.






예술시편 연재<2>

백우선
아직은 희망일까요
―안병석 유화 '자연의 본성이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산과 물의 자연 풍경
산적한 차와 컴퓨터
하늘을 찢는 초음속 전투기
'자연의 본성이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라고 쓰인
디스켓

자연에서 나온
차, 컴퓨터, 전투기, 디스켓
모두 함께도 하고
자연으로 다시 들어가거나 못 들어도 가고

자연의 수많은 등분면(等分面) 중에는
그래도 처녀가 남았다고도 하고

[꼬리말]  
  베란다 화분의 금낭화가 피었다. 금낭화와 금낭화 사이에 있는 콘크리트 벽이 아니라, 콘크리트와 콘크리트 벽 사이에 금낭화가 피었다. 살충제와 살충제 사이, 제초제와 제초제 사이에도 금낭화는 피겠지만, 자동차와 자동차 사이, 컴퓨터와 컴퓨터 사이에 금낭화가 피었다. 지금 여기서 내가 뛰어들 수 있는 곳은 저 작은 금낭화 꽃풀 한 포기밖에 없다.        





생명의 샘
―마르셀 뒤샹 조각 '샘'


그는 소변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 앞의 사진사를 말하듯
소변기 앞 사람의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남자의 샘, 여자의 샘
그리하여 암컷샘, 수컷샘
암꽃, 수꽃을 말하는 것이다
흐르는 사람들과 짐승들의 물결
풀과 나무의 초록 바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뒤집은 물의 샘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살아있게 하는 샘
생명의 샘이다

[꼬리말]
  다 아시죠? 뒤샹(1887∼1968)의 조각 '샘'이 실은 남자 소변기인 공산품인 것을. 공산품을 조각 작품, 소변기를 샘이라며 당당히 출품하고 미술사에 기록되게 한 그 발상과 예술적 소신이 놀랍지 않나요? 뒤샹은 돈, 상업주의, 공명심, 어떤 유행이나 사조, 심지어 자기 자신의 재능으로부터도 자유로웠고, 이 자유를 긴 생애에 걸쳐 유지했다고 하네요. 화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제작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체스 게임을 즐기며 전통적인 미학이나 예술의 우상 파괴자로서의 일생을 살았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가 현대 예술의 새로운 전통, 우상이 되었다고 하네요. 물론 그가 그런 걸 노려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요.






이삭 줍는 이삭
―장-프랑수아 밀레 유화 '이삭 줍기'


주인은 감독을 치켜올리고
감독은 일꾼을 몰아올리고
일꾼은 볏단을 끌어올리고

이삭은 이삭을 줍는다
이삭은 지금도 이삭을 줍는다
그나마 이삭끼리

[꼬리말]
  역시 원화를 보길 잘했다. 마을회관이나 이발소, 음식점 등에 걸린 그림에서는 이삭 줍는 세 여자만 보였/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유심히 보지 않은 잘못도 있겠지만, 낟가리를 쌓아 올리거나 마차에 볏단을 싣는 일꾼들이 있고 그것을 곁에서 말 타고 감독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까 앞쪽의 이삭 줍는 세 여자는 그 축에도 못 든 사람들인 셈이다. 밀레는 주인도, 감독도, 뽑힌 일꾼도 관심의 뒷전이었던 것이다. 일제 때부터 얼마 전까지 우리 국민이 가장 많이 보아왔다는 이 그림을 우리는 반만, 아니면 반대로 보아온 것은 아닐까? 일제 때라면 주인은 일본인, 감독은 일본인이거나 그 하수인인 조선인, 일꾼은 당연히 조선 농부, 앞의 세 여자는 노동력 미달자인 조선인일 것이다. 그러나 저항이나 음모 없이 다소곳하고 근면해 보이는 세 여자가 클로즈업된 이 그림을 일본은 식민지배에 이용하기 위해 더 널리 보급하고 우리는 그 여자들을 삶의 전형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은, 가난했던 농업 위주의 과거 삶에 대한 향수에 젖게 될 것이고, 세 여자만 보면.  






새만금 갯벌을 위하여
―변산 해창 장승들
  
  
  울려라 풍악을 울려라
  얼쑤 어이 허이 깨-앵 씨-앵
  놀아라 꼭지껏 뛰어라
  조오타 읊어라

  도요새, 반지락, 철새, 농게, 꽃게, 망둥어, 갯지렁이, 피조개, 민챙이, 소라고둥, 백합 …… 갯벌, 습지, 호수, 산 등등의 대장군, 여장군/ 하늘에서 내린 듯 바다에서 솟은 듯/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모여들어/ 갯벌에 우뚝우뚝 떡버티어 들어박혀/ 퉁방울눈 부리부리/ 주먹코 벌름벌름/ 대문니 으르렁 딱딱/ 작두날 혓바닥 널름널름/ 스피커입 우렁우렁/ 물고기 입에 문 여의주 번쩍번쩍/ 새만금호 돛배 하늘 높이 두둥실/ 물렀거라 잦았거라/ 자연개발 생태파괴/ 재해초래 생명말살/ 악귀야 잡귀야/ 엇쐬 물렀거라

  쳐라 매우 쳐라
  돌아라 휘돌아라
  얼씨구 절씨구
  어리라 저리라
  어리 저리 씨구 씨구

[꼬리말]
  전북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 해창 바닷가에는 새만금 갯벌을 지키기 위해 세운 장승들과 매향비1), 풀꽃상 시상 안내판2)이 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신석정 시인의 '파도'를 새긴 시비가 있다.
  1)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았듯이/ 후대에 물려줄 갯벌이 보전되기를 / 바라는 뜻에서 이 비를 세우며/ 해창다리에서 서북쪽 300걸음/ 갯벌에 매향합니다/ 2000년 1월 30일/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는 부안 사람들
  2)제5회 풀꽃상// 본상: 새만금 갯벌의 백합/ 부상: 갯벌을 위해 소송을 건 어린이들// 갯벌은 갯지렁이가 꼬물대고 망둥어가 설쳐대고 농게가 어기적거리고 수백만 마리 찔룩이와 저어새가 끼룩거리는 생명의 땅입니다. 또한 해일과 태풍이 오기 전에 모든 생명체에게 재해의 예감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자연의 파괴력을 완화시키기도 하는, 은혜로운 땅입니다. 그러나 갯벌 가치에 대한 무지와 오판으로 인해 사라지게 될지도 모를 갯벌과 갯벌 생명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우리는 조개 중의 조개라 불리는 백합에게 제5회 풀꽃상을 드리는 것으로 갯벌과 갯벌 생명체에 대한 말로 다할 수 없는 애정과 함께 그들이 영원토록 갯벌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000. 3. 26/ 풀꽃 세상을 위한 모임






일어선 매향리
―임옥상 조각 '자유의 신 인 코리아'


  매향리에서는 사람들이 일어선 것이 아니다
  살아 있는 타겟들이 일어선 것이고
  반쯤 날아가버린 농섬, 보복적으로 매립된 논, 우라늄 열화학 폭탄(BDU)에 새까맣게 타 널브러진 흙들이 일어선 것이고
  소음성난청, 중금속오염, 유산, 스트레스, 혈중납농도, 수면장애, 홧병, 불안, 공포, 암, 방사능피폭, 기형아출산, 무정란산란, 불발탄폭발, 젖소유산, 가옥파괴, 항의대구타가 일어선 것이고
  평일 낮 하루 평균 200여 차례와 8∼10시 야간 폭격으로 불모지가 된 '가상의 북한 땅'이 일어선 것이고
  고기 잡다 기총 사격에 관통된 어부의 팔뚝, 조개 줍다 폭탄 파편에 잘린 소녀의 다리가 일어선 것이고
  굴 따다 포탄에 명중되어 즉사한 임신 8개월의 산모와 그 태아가 일어선 것이고
  포탄 맞아 죽었어도 장례비 요구는커녕 빨갱이로 몰릴까봐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 개죽음 당할까봐 가족끼리 모여 앉은 밥상머리에서도 쉬쉬하며 먹던 밥알들이 일어선 것이고
  사격 훈련을 알리는 찢겼으나 내려지지 않는 황색 깃발이 일어선 것이고
  자기들만 착용한 청각보호장구, 레이저탄 섬광 보안경이 일어선 것이고
  주권국가라 할 수 없는 곳에 살아 국민임을 포기한 이들의 반납된 주민등록증이 일어선 것이고
  헬기, A10과 F16 전투기의 폭탄 투하, 기총 사격의 붕 부웅 꽝 꽈앙하는 굉음과 목표물의 하얀 연기가 일어선 것이고
  왜 왔느냐 어디서 왔느냐 어떻게 왔느냐 언제 가느냐 ……
  한국인 경비경찰이 진압봉 들고 묻는 말의 울림이 일어선 것이고
  경고/위험
  미공군 시설
  폭탄 및 총포 사격장
  작전용 폭탄/불발 포탄
  본 군사시설 사령관의 허가 없이 본 시설의 출입은 위법입니다
  본 시설의 보호
  대한민국 법령 2388호 1972년 12월 26일 공포
  대통령령 6655호 1973년 5월 2일 공포
  대통령령 7031호 1974년 1월 4일 공포
  본 군사 시설 내에 있을 때에는 개인 및 소지품에 대하여 수색을 받을 것입니다
  그 너머의 오만에 부딪힌 눈길이 일어선 것이고
  법원이 훈련 피해 배상 결정을 내린 바로 다음 날의 폭격 훈련 재개에 벌어진 입들이 일어선 것이고
  외국군의 범죄에 배상금으로 쓰이는 우리 국민의 혈세, 사격장 주변에 새로 친 철책의 가시에 긁힌 눈의 불길이 일어선 것이고
  주한미군과 동아시아 주둔 미군 기동사격과 폭탄투하 훈련장(고온리/쿠니사격장)으로 사용되게 한 1954년 한미협정과 1967년 소파(주한 미군의 지위에 관한 협정)의 굴욕적인 불평등이 일어선 것이다

[꼬리말]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 남에게 대접받기를 원하거든 먼저 남을 대접하라. 사람만이 아니라, 만물이 나인 것을.






예술시편 연재<3>--백우선


리비도
―로리타 티모헤바 조각 '카마 2'


질구로만 서 있는 여성을 향해

발끝에서부터 뻗쳐올라
상반신이 뒤로 휘어 샅을 막 지나
남성이 탄두로만 적광(赤光)을 내뿜는

[꼬리말―<'어' 이야기>①]
  성기가 몸의 작은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들은 몸 전체가 성기이다. 몸만이 아니라 몸에 지니거나 걸친 것, 이름이나 통장도 성기가 되는 판이다. 이들의 소원은 역시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민감한 성감대인 전신 성기를 만나는 것이다. 손길만 스쳐도 찌르르르 감전되듯 바들거리는 초고감도 성감대의 몸과 한판 대접전을 벌이는 것이다. 손가락 한둘 따위의 드나듦이 아니라 전신을 들이밀고 빨아들여 발가락 하나 안 남기고 쏙 들어가 안기고 품어버리는 것이다. 완전한 일체를 이루어 내는 일이다. 여차하면 아예
그렇게 눌러 살고 살려 버리는 것이다. 노래방, 춤방, 서재도 차리고 텃밭도 일구어서 자급자족하고 살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을 것인가?
  






사랑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미니픽션 '말 바라보기'


 은 둘이 기대어 있다
     마음과 몸도 기대어 있다
     함께 하는 그들,
     다리도 두 팔을 펼치고 있다

ㅏ는 사람과 배꼽 밑이
     꽃길로 높고 깊게 일어서 있다

 은 위아래 둘이 한 몸이 되어
     노래의 물결로 출렁이고

ㅏ는 마주보고 쳐다보며
     그대께로 곧추선 끝없는 지향

 은 둘이 하나 된 동그라미
     품고 품어 안은 알이 되어 있다

[꼬리말―<'어' 이야기>②]
  이들의 소망은 또 있다. 날카롭고 무덤덤만 하던 해와 서산이 눈을 맞추고 자신들의 몸과 이마, 하늘까지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한 몸이 되어 꼴깍 문지방을 넘듯 안고 안기는 것이다. 파도에 파도로 겹치면서 난바다로 출렁거려 보는 것이다. 햇빛이나 달빛을 한 덩어리 알몸으로 친친 감으면서 파도와 해일로 너울대고 휘몰아쳐 보는 것이다. 섬 꼭대기와 해저로 치솟고 내리꽂혀 보는 것이다. 던져지듯 솟구치거나 처박히듯 꺼져 내리는 아찔함도 짜릿하기만 할 것이다.
  산이어도 좋다. 봉봉 골골이 높고 깊은 산이라면 더욱 좋다. 봉우리와 골짜기로 거푸거푸 솟아오르고 내리박히면서 터질 듯이 충만한 열락에 만취해 볼 수 있을 것이리라.
  그리고 이들은 이런 시를 기억한다.
  "나는 어젯밤/ 별떼를 쏟았어라/ 향그러운 별떼/ 온 하늘을 가득 수놓는 별떼,/ 탐스럽고 화사한/ 모란의 꽃송이 속/ 꽃들의 바다/ 별들의 우주로/ 힘찬 내 꽃대를 세워 들고/ 나는 내 생명의 별떼를 쏟았어라/ 내 온몸의 영롱한 꽃씨떼/ 내 온 우주의 춤추는 불씨떼/ 축제의 찬란한 불꽃, 불꽃, 불꽃을/ 나는 어젯밤/ 활짝 핀 모란꽃의 밤하늘에/ 쏟고 또 쏟았어라" <백우선의 '환희―생명의 노래'>







눈빛 카드
―김창겸 설치 '위험한 관계'


카드 시대, 이런 카드도
없을 리 없으렷다
눈빛들이 반짝
서로의 눈을 파고들면
금세 밀실이 생기고
옷이 사라지고
알몸이 된다
몇 합의 접전
흥건한 몸을 씻고는
명세서 함께나 없이
눈에서 카드를 꺼낸 뒤
말도, 뒤돌아봄도 없이
총총히 제 갈 길을 간다

[꼬리말―<'어' 이야기>③]
  이들은 또 이런 시를 기억한다.
  "산골 밥집 점심상의/ 고추장과 풋고추// 그 찐득거리는 진홍과/ 탱탱한 초록의 열정을/ 덤썩 베어문다// 입안과 목이 온통/ 확확 타는데// 철철철 쏟아지는/ 매미떼 울음// 흙바닥을 벌겋게 달구는/ 잉그럭불 햇살,// "더 드시요오/ 더 드시요오 이"// 들솟는/ 열아지랭이 사이로// 주인 아낙의 불꽃도/ 너울거리고" <백우선의 '염하'>







해물된장찌개
―이만희 작·채윤일 연출 연극 '오늘'


싱싱한 조개를 고르면 되는데
외삼촌이 조카딸을
조개 해감을 가만히 내면 되는데
외삼촌이 조카딸 둘을 소녀 적부터
국물이 뽀르륵 끓으면 되는데
검사 외삼촌이 조카딸 둘의 …… 순결을
단단한 것에서 무른 것 순으로 넣으면 되는데
검사가 힘없는 선량한 농부를
감자부터 호박까지 넣으면 되는데
표창이나 사죄는커녕
풋고추 쫑쫑쫑 썰어 넣으면 되는데
순수는 나약한 것이라며
시원하고 구수하고 매콤하면 되는데
작은 악들이 큰 선을 이룬다며
사랑사랑 마주앉아 눈으로도 먹으면 되는데
분하고 억울한 농부의 자살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한다며
냄비를 기울여 국물 한 방울까지 다 먹어도 되는데

목숨을 끊었어, 바로 어제 요리법을 물은 동생이!
나는 너만 죽이면 돼! ――땅!  땅!

[꼬리말―<'어' 이야기>④]
  이들은 수첩에 적어둔 이런 구절을 떠올리기도 한다.
  "담장이 있어서 월장도 생기는 것이지만, 담장이 없는 경우 담보다 더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이 쉬쉬하면서도 잊지 않을 만큼 들려오곤 했다.
  모든 길은 말 그대로 길인데, 길 밖으로 걸으면서 길 걷는 이를 바보 등신이라며 당당히 대거리하는 그 손가락 앞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자리를 피하는 것만으로 끝내야 하는 고민도 많았다."







씨앗은 영양제 겸 열락제다
―강신영 조각 '생명 공간'


현대인의 소화력은 대단하다
위장보다
자궁의 소화력은 더욱 왕성하다
수백 번의 파종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양의 씨앗을
다 소화해 버린다
입술로, 이도 없는 잇몸으로
옴찔옴찔 빨아 씹어 삼켜서는
이내 소화, 흡수한 뒤
변기로 쏴아 쏟아버린다
즐거운 비만이 느는 것을 보면
정자는
영양제 겸 열락제가 분명하다
먹어치우기 위해 산다는
말이 맞다
더 많이 먹어치우자고
개 뱀 물개의 씨까지
말리고 있다
오죽하면 삼신께서
시험관에, 내장 같은 배관통에
새 아기를 점지하시겠는가

[꼬리말―<'어' 이야기>⑤]
  이들은 그렇다. 성냥개비나 볼펜, 손가락이나 핫도그 따위가 성에 차기나 하겠는가? 전신으로도 이 우주 같은 몸의 허공을 채울 수가 없다. 바다째로, 산째로 온몸을 가득 채우고 또 그것들을 쑥쑥 낳아보고 싶을 뿐이다. 이 세상을 통째로 낳아보고 싶다. 다 내뿜고 품어들였다가 오 귀여운 내 새끼, 장한 내 새끼로 키워보고 싶다. 잠깐이나 열 달의 포만으로는 안 된다. 평생을 몸의 굽이굽이로 새끼들을 배이고 배고 하면서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정즙을 다 주고 빨아들이고도 머리부터 꽁무니까지 아삭아삭 씹어 먹히고 삼키는 사마귀의 허기로 칭얼대며 보채는 뱀대가리나 입술들의 게걸을 풀어 주고 싶은 것이다. 어,  , 오, ㅏㅇ ―그 방법도 이렇게 가지가지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부러 택한 즐거운 헛수고의 방법일 뿐이다.


*편집시 유의 사항(이것은 편집 후 삭제해야 함)
①두 번째 시 <사랑>의 ㅅ, ㅏ, ㄹ, ㅏ, ㅇ은 일반 글자보다 2호 크게 입력돼 있음(돼 있어야 함). <ㅅ은>, <ㅏ는> 등의 밑에는 다음 행들이 비어 있음(비어 있어야 함).
②맨 끝 꼬리말의 끝부분 <어>와 <오> 사이에는 <웅>에서 초성이 없는 것이고(것이어야 하고), <ㅏㅇ >는 <ㅏ ㅇ >를 블록-모양-글자모양-자간-마이너스 40으로 처리해서 둘을 붙인 것임(붙어 있어야 함).    


*백우선 약력
1981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  "우리는 하루를 해처럼은 넘을 수가 없나", "춤추는 시", "길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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