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제3호/젊은시인조명/김왕노/잠 잘 오는 방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왕노
댓글 0건 조회 4,387회 작성일 02-06-14 17:12

본문

젊은시인조명
김왕노
 잠 잘 오는 방 외 9편


그 방에는 장마비 내리기도 하지 장마비엔 우림의 냄새가 나기도 해 어느 세상 모퉁이에서 묻어온 이야기가 빗방울로 튀어 오르기도 하지 창문 틈으로 북상해온 장마전선 종일 머무르다 흘러가는 방
그 방의 천장에 스티커로 붙여져 있는 야광의 별과 달 세상 흐려 별 하나 없는 밤에 환히 빛나기도 하지 그 방에 들어가 별바라기 하려다 숱하게 서성이다 간 아픈 마음들 이렇게 어둠 출렁이면 생각나기도 하지 그 방엔 인공심장을 단 꿈이 축축하게 젖어 있기도 하지

그 방엔 이승하의 폭력과 광기의 나날 박정대의 단편들 배용제의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고진하의 프란체스코의 새들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 보르헤스의 칼잡이들의 이야기 알베르트 까뮈의 페스트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L. 휴즈의 아메리칸 니그로 단장이 꽂혀 있지 내 마음의 불순물을 걸러내며 정결하게 꽂혀 있지 어쩌다 거리에서 절뚝이며 돌아온 날엔 책의 행간행간 속으로 들어가 다시 직립하는 방법과 걸음마를 익히기도 해 그러다 지치면 거대한 잠의 자궁에 들어가 태아처럼 잠들어 가지

어떤 날 그 방의 기슭에는 뜬눈의 꽃이 피지 뜬눈으로 꽃들이 지고 있지
기다림이 뚝뚝 다 질 때까지 뜬눈으로 있지 수면제를 안개처럼 풀어놓았나 의심받는 방 나를 치고 뺑소니쳐간 세월마저 용서하지 못할 이름마저 잠에 취해 정답게 불러보는 잠 잘 오는 방 잠들면 무서운 세상 몇 페이지가 그냥 넘어가 주기도 하지
아픈 기억들이 밤새 잠에 씻겨 은하로 흘러가 버리기도 하지

내겐 아직도 잠으로 끝없이 깊어 가는 방이 있지 가뭄과 사막의 날이 지나가고 푸른 비가 억수로 퍼부으면 그때서야 폐어처럼 잠들어 있다 깨어나는 그런 방
잠의 혁명이 있고 잠의 사계절이 지나가고 잠의 아리아가 들리고 꿈의 파출부가 와 낡은 잠을 손질해 주고 개어주는 그런 방 있지 때로는 잠이 위험수위로 차 올라 위태하지만 그럴 때마다 몸 뒤척이다 다시 잠드는 내 잠의 푸른 방 있지

내가 세상으로 출근해 내 몫의 슬픔이나 사랑 이별을 찾아다닐 때
채 챙겨 나오지 못한 상처들이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잠들어 있는 방
그러다 아련히 아물어 가는 방
세상에는 아직도 그런 잠 잘 오는 방이 있지
누구도 엿보거나 방해할 수 없는 그런 방
혐의를 두어도 도청하거나 색출해 낼 수 없는 잠 잘 오는 방
세상 계곡 사이를 끝없이 잠으로 흘러가는 방






깊은 물1


막차가 떠나버린 서울역 연탄가스 냄새 화한 싸구려 여인숙에서 죽음의 잠이라도 자고 싶은 날이 있었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노숙자들은 동사해도 좋았을까
따뜻한 꿈 하나 꾸려는지
희망의 싹 하나 틔워주지 않던 맨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잠들던 그 겨울 한없이 깊고 깊었네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던 깊고 깊은 물이었네

그때 내가 아는 이름들은 어둠의 먼발치에서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잠들어 간 솜털에 뽀얗게 쌓인 꽃눈이거나 잎눈
쉬 잠들지 못했던 내 아픈 겨울이야기만 새벽 눈발로 이리 저리 흩날리다 아침이면 사람들의 발아래 밟혀 아무일 없었다는 듯 소리 없이 녹아갔네

초롱아귀 불빛 같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던 서울의 밤
밤마다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으면서 내가 부력이라 믿었던 것은 네 이름 미친 듯 부르는 것뿐이었네 네 이름 부르다 부르다 더 깊은 반도의 물속으로 소리 없이 소리 없이 가라앉는 일 뿐이었네






깊은 물 2


가라앉는다 끝없이
(자각 증세가 없는 거리와 사람들)

가라앉는 것 위로 또 가라앉는 것이 있다
(하강에 대해 느낌이 없는 표정들)

가라앉으면서 가라앉는 것을 바라보다
우리는 가라앉지 않는다는 가설을 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명제이다
(밑바닥 없는 곳으로 직행해 가는 적막들)

내가 함께 했던 날도 가라앉는다
찬비를 피해 들렀던 러브호텔도
직사광선을 피했던 마로니에 넓은 잎도
촘촘한 그늘을 짜주었던 고생대에서 걸어온 메타세콰이어도
내가 열광했던 이름도
그의 카리스마도
내가 바라본 푸른 하늘이며
푸른 하늘을 장식하러 오던 제비며 새털구름이며 애드벌룬이며 고추잠자리며
먼저 가라앉아 가는 도시위로 가라앉는다
먼저 가라앉아 간 것은 묵묵부답이다
가라앉아 가는 것은 도시의 장례를 완성하는
적석고분의 돌같이 가라앉는다
(아가미 호흡을 할 수 없는 절망들)
(지느러미가 돋아나지 않는 몸뚱아리들)

가라앉는다 심연에 내리는 플랑크톤 시체처럼
하얗게 하얗게 밑바닥이라 믿었던 것과 함께
(여전히 자각증세가 없는 거리와 사람들)






이 시대의 액자소설


비속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에 젖는 꽃 속에 비에 젖는 꽃이 있었다 자명종 소리 속에 또 자명종이 울리고 세시에 떠나는 사람 속에 또 세시에 떠나는 사람이 있었다 이별 속에 또 이별이 서 있었다 피는 절망 속에 또 절망이 피고 있었다 남자 속에 또 남자가 박혀 있고 버려지는 것 속에 또 버려지는 것이 있었다 무너지는 것 속에 또 무너져 내리는 것이 있었다 눈물 속에 또 눈물이 있고 슬픔 속에 또 슬픔이 살고 있었다 비명 속에 또 비명이 들렸다
사고다발 지역에 어둠 내리면 사고다발 지역에서 미끄러지는 풍경 미끄러지는 풍경 속에 또 미끄러지는 풍경이 있었다 가라는 말속에 또 가라는 말이 있어 더더욱 서러운 저녁 갈곳 없는 곳에 또 갈곳 없는 곳이 있었다 허무 속에 또 허무가 있었다 어둠 속에 또 어둠이 박혀 파르르 떨고 있었다 칼 속에 또 칼이 박히고 상처 속에 또 상처가 나고 있었다. 세시에 떠나는 사람 속에 또 세시에 떠나는 사람이 있었다






파블로 네루다를 읽다


파블로 네루다를 훔쳐본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아 소나무 숲의 광활함' '나는 기억한다 그 최후의 가을에'
'한 여자의 육체'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나는 퇴근해 일찍 잠들었다 일찍 일어났으므로
꿈속은 갑작스레 끝물이 와 버렸고 별 볼일 없는 꿈
별 볼일 없는 세기초의 잠

파블로 네루다를 훔쳐본다 거리는 영하의 겨울이 닥쳤고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던 벽도 난방으로 부족하고
'이 땅에서 살기' '죽음만이' '산보' '동쪽에서의 장례'
'혼자 사는 남자' '소나타와 파괴들' '가족 안의 우울'
'性的인 물' '망각은 없다' '브뤼셀' 겨울 해의 기억으로는
영혼이 따습지 않고 어둠이 방바닥에서 치솟아 오르고
파블로 네루다는 불타는 조개탄 내 안의 암흑으로 디미는 야광의 신발

별만 하늘의 꽃으로 피어나고 들녘의 풀꽃들이 감감무소식인 겨울밤
'온갖 노래' '마추피추 산정' '칠레의 발견자들' '시인'
'남쪽에서 굶주림' '젊음' '독재자들' '아메리카여, 나는 희망 없이 네 이름을 부를 수 없다' '찬가와 귀국'
'트리스토발 미란다' '포도의 가을이었다'
'카라카스에 있는 미겔 오테로 실마한테 보내는 편지' 네루다를 읽는다
이 땅의 행간, 행간 속에 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선 외등
얼어 버석거리는 공기의 이파리 이파리를 적시며 솟아나는
온천수 같은 파블로 네루다의 입김 읽어야 될 마땅한 문장 없는 밤
파블로 네루다를 읽는다 '수수께끼' '길 위의 친구들'……
  
    




상실의 나날


눈앞에 피었다 진 꽃들은 환상이 아니기를

언젠가 나도 내 존재를 마감해야 하는 일
떠나가며 나에게 남긴 숱한 눈물 방울방울들
삶의 진한 엑기스 떨구게 한 이름이여 사랑이여
환상이 아니기를 천근 만근 찍어누르다 간 그 날의 하늘 한 자락마저
어느 시간의 모퉁이에서 만나
꽃으로
꽃으로 흐드러지며
다시 존재의 봄날을 죽음의 문 앞으로 불러올 수 있으리라
뺨에 떨어지던 빗방울도
뺨에 살 비비다 간 안개며 그리움도
환상이 아니기를
지금은 사랑의 은총으로부터 추락한 계절
절망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다 추락하다 보면
밑바닥을 차고 다시 솟구쳐 오르는 반동의 힘이 찾아올 테니

눈앞에 피었다 진 꽃들은 환상이 아니기를






 실밥


니까노르 빠라도
나를 가봉하고 재단하여 짤라낸 자투리거나 실밥이었다
가브리엘 마르께스, 루신, 가와바타 야스나리, 입센,
테드 휴즈도 셰이머스 히니도, 토머스 하디도 귄터 그라스도
서머셋 모옴도 내 청춘을 만들고 난 실밥이었다
숙·영·민 그 이름도 내 젊은 날을 만들고 난 실밥이었다
뒷문 가에 봄비처럼 서성이며 울다 간
이름이었다 실밥이었다
흐린 날 걷던 소나무 숲도 내 가슴 안쪽에서 은하수로 흘러간
그리움도 실밥이거나 자투리였다

아버지 어머니도 나의 실밥이었다
먼 훗날 나마저 우주를 가봉하고 재단하며 버린
실밥이란 걸 깨닫기 전까지
나를 스쳐 가는 모든 것을 나는 실밥이라 명명하는 것이다






거인의 잠    


발길질, 그 폭력이 너에게 집중될 때
흡사 너는 모든 충격을 흡수하는 한 마리 외로운 짐승이었다
발길질을 피해 머리를 감싸고 시간의 무덤 속에 매장된 채
공포의 바다 속으로 떠내려갔다
누구도 공포의 해변에서 너에게 손 내밀지 않았다.
가슴을 진정시키며 재빨리 그 장소를 벗어나기만 할 뿐이었다

집단의 발길질 아래서 네가 끝끝내 품에서 내놓지 않았던 것은
네 삐걱이는 몸으로 벌어온 지폐 몇 장
너를 열차에 싣고 노숙의 거리를 떠나
고향이나 먼 남녘으로 데려갈 푸성귀 같은 꿈 몇 장
몸져누운 네 내면에서 활활 타오르는 분노의 불꽃 잠재우고
세상을 용서하며 흘리던 흥건한 그 눈물

일어서지 않았다 네 몸에 가해진 둔탁한 공포를
오랫동안 음미하다 서서히 맑아오던 네 눈동자
그러다 스르르 감기던 눈 그 평온한 잠
찬 공기를 품고 온 밤이 이리 저리 너를 툭툭 차보다 떠나가고
순결을 잃은 소녀의 울음마저 잠들고
피비린내에 눈뜬 고양이의 기척마저 사라지고

깊어간다 네 잠 어둠을 호흡하며 조금씩 내뿜는 빛의 예감
꿈을 절도하러 밤의 문턱을 넘어오는 크고 작은 발소리
그래도 꿈쩍 않는 네 잠
아침을 이 도시 입구까지 끌어올 거대한 잠
이제는 아무도 깨울 수 없는 거인의 잠






 너를 지나치다


안개 같은 너를 지나쳤다 눈물 같은 너를 지나쳤다
물푸레나무 같은 너를 지나쳤다 내가 한눈 판 거지
눈에 콩꺼풀 씐 거지 굴뚝새 같은 너를 지나쳤다
은하수 같은 너를 지나쳤다 냇물 같은 너를 지나쳤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며 지나쳤다 네 몸 속으로 난
수많은 길을 지나쳤다 시도 때도 없이 지나쳤다
내 마른 날을 꽃비로 적셔오던 너를 지나쳤다
미쳤던 거지 내가 미쳤던 거지 말없이 풀밭에 달개비 꽃으로 피어나던
명아주로 서 있던 너를 다소곳이 울음으로 서 있던 너를
너를 지나쳐 저물녘까지 걸어왔다
끝없이, 끝없이 와 버렸다






밴댕이


바독 걸쇠 갓치 얽은 놈이 물가에 왔는감 눈 큰 쥰치, 헐이 긴 갈치, 두루셔메 메육이, 츤츤 감을치, 문어의 아들 낙지, 넙치의 가잠이, 배 부른 올창이, 공지 결레 만흔 권장이* …그 이름 다 외우기도 숨차는데 고기란 고기는 다 달아나고 부레를 부풀렸다 쭈그렸다 다 달아나고 놀란 쓸개즙은 감탕같은디. 그물이면 어떻고 곰보면 어떤감. 물 안에 온갖 허잡쓰레기 다 흘러와 퉁퉁 불은 몸뚱아리로 떡하니 버티고 여기 간섭 저기 간섭 별빛을 가렸다 안 가렸다 조명 같아 온몸은 건질거리는디 볼다귀를 때리는 매 같은 물은 어디 있는감 맛보면 소태고 스치면 생기는 물부스럼, 물굽이 굽이 타며 몸 하나 간수키 어려운디 그래도 나는 밴댕이 아비도 손자도 다 밴댕이, 씹으면 씹히는 등허리뼈로 이 너른 서해 바다 버팅겨 왔지 흐린 날 번뜩이는 물비늘 비늘 일으키고 파닥이는 꼬리로 물의 볼 따귀를 좌우로 때리며 속 좁은 밴댕이로 헤엄쳐 왔지. 간 맞지 않는 식탁 모퉁이 소금꽃 핀 몸으로 입맛 돋우기도 했지 때깔 없고 볼품 없는 이 상판때기로 아가미 호흡 가쁘게 하며 살아왔지.

주) * 조선시대 사설시조




시작메모

내가 가장 가슴 아려올 때는 한낮에 아무도 없는 텅 빈 골목에 혼자 있을 때였다.
적막이 앙금으로 고여 있는 골목에 갑자기 풀무치 한 마리 날아오르면 외로움이 진저리쳐 왔다. 지금도 인기척 없는 골목에 들어서면 헉하고 숨이 막힌다. 사람이 사람을 떠나면 그 만큼 슬퍼진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세상이 두려워진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또 시가 있었다. 아름다운 삶일수록 삶에서 시가 피어났다.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시가 없다면 무미건조하다. 사람들이 있으나 시가 없다면 그곳은 우범지역이거나 범죄집단이 모인 곳과 같을 것이다.
시가 절망의 날에는 절망의 강물을 건너는 삿대였다. 시가 어둠의 날에는 어둠을 사르며 오는 새벽의 예감이었다. 시가 외로운 날에는 외로운 몸을 기댈 수 있는 벽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시에 중독되었다. 시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 몸이 경련하는 이 금단증세!
때로는 치사량에 가까운 시를 정맥주사 한다.
아직도 밀매를 통하지 않고 시를 구할 수 있고 나를 감동시키는 푸른 문장이 있어 좋다.
나도 내 생의 절대 오르가즘을 스포츠나 섹스, 수면이나 식욕이 아니라 시를 쓰면서 얻을 수 있는 이 거리가 좋다. 뭉게구름 피어나는 시의 수평선을 바라보는 날들이 좋다. 시의 수평선으로 순풍이 불고 하얀 돛단배 떠가는 날이 좋다.
우주의 한 모퉁이로 은하가 저물어 가는 이 밤, 시를 가까이 하므로 나는 살아 있는 것이고 나의 시 쓰기란 내 존재의 확인 과정인 것이다. 내 영혼의 발자국 남기기인 것이다.  

1957년 경북 포항(영일) 출생
1992년 대구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6인 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추천2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