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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호/젊은시인조명 해설/책, 잠, 가라앉음 혹은 바닥을 차고 오르는/이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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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우
댓글 0건 조회 3,297회 작성일 02-06-1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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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인 조명
책, 잠, 가라앉음 혹은 바닥을 차고 오르는
― 김왕노의 신작시
이성우(문학평론가)


김왕노 시인의 최근작 10편이 담긴 파일을 열어 보고 나서, 곧바로 나는 그의 이전 작품들도 되짚어 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무엇보다 단 10편만의 작품을 가지고 한 시인의 시세계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말하는 일의 어려움과 무모함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92 신춘문예 당선시집}에서 시작해, 1994년 간행된 6인 합동 시집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을 거쳐, 계간 문예지 ≪다층≫ 2000년 겨울호에서 '지난 계절의 우수작품상'을 받은 [화성의 아버지]와 또 다른 시편들에 이르기까지,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그의 시세계에 갑작스럽게 뛰어든 한 사람의 이방인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각에서 그의 이전 시와 최근 시를 비교해 가며 읽을 수 있었다.
김왕노 시인의 이번 신작시를 특징짓는 키워드로서 내가 꼽고 싶은 것들은 '책'과 '잠'과 '가라앉음'이다. 특히 이 세 개의 키워드 중에서도 단연 두드러진 것은 타인의 '책'에 대한 애착이다. 예컨대 [파블로 네루다를 읽다]와 [실밥], [잠 잘 오는 방] 등의 시편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이나 작가 또는 그들의 책이나 작품명을 열거하는 것으로 시행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을 정도이다. 물론 그 시편들의 의미가 시인의 책에 대한 애착이나 취향을 드러내는 수준에 머물지는 않는다. 책에 대한 시인의 경도는 현실을 기록하거나 읽어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이때 책은 현실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출구이면서 동시에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입구의 구실을 한다. 책을 매개로 하는 잦은 현실 이탈과 복귀는 결국 현실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인식 태도와 함께 시인의 현실이 매우 고되다는 정황을 드러낸다.

ⅰ) 이 땅의 행간, 행간 속에 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선 외등
    얼어 버석거리는 공기의 이파리 이파리를 적시며 솟아나는
    온천수 같은 파블로 네루다의 입김 읽어야 될 마땅한 문장 없는 밤
    파블로 네루다를 읽는다 '수수께끼' '길 위의 친구들'……
― [파블로 네루다를 읽다] 부분

ⅱ) 그 방엔 이승하의 폭력과 광기의 나날 박정대의 단편들 배용제의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고진하의 프란체스코의 새들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 보르헤스의 칼잡이들의 이야기 알베르트 까뮈의 페스트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L. 휴즈의 아메리칸 니그로 단장이 꽂혀 있지 내 마음의 불순물을 걸러내며 정결하게 꽂혀 있지 어쩌다 거리에서 절뚝이며 돌아온 날엔 책의 행간행간 속으로 들어가 다시 직립하는 방법과 걸음마를 익히기도 해 그러다 지치면 거대한 잠의 자궁에 들어가 태아처럼 잠들어 가지
― [잠 잘 오는 방] 부분

작품 ⅰ)에 나오는 '이 땅의 행간, 행간'은 매우 부정적인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 공간은 시적 자아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외등' 같은 존재가 안간힘을 써야 하는 곳이며, 음미할 만한 마땅한 문장이 담길 수 없는 곳이다. 이에 반해 작품 ⅱ)에서 '책의 행간행간'은 현실의 상처를 달래고 새로운 힘을 얻는 긍정적인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땅'이라는 현실을 벗어나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 바로 시적 자아가 현실의 삶을 견디는 한 방법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 '책'들이 꽂혀 있는 방은, 시적 자아가 마치 태아처럼 잠들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작품 ⅱ)의 끝부분을 마저 읽어 보자. "세상에는 아직도 그런 잠 잘 오는 방이 있지/ 누구도 엿보거나 방해할 수 없는 그런 방/ 혐의를 두어도 도청하거나 색출해 낼 수 없는 잠 잘 오는 방/ 세상 계곡 사이를 끝없이 잠으로 흘러가는 방". 여기서 '방'은 물론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방은 세상의 온갖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곳이다. 그 곳에서 시적 자아는 끝없는 잠에 빠져든다.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대신 태아 같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앞서의 '책'은 결과적으로 '잠 잘 오는 방'에서 잠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문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일어서지 않았다 네 몸에 가해진 둔탁한 공포를
오랫동안 음미하다 서서히 맑아오던 네 눈동자
그러다 스스로 감기던 눈 그 평온한 잠
찬 공기를 품고 온 밤이 이리 저리 너를 툭툭 차보다 떠나가고
순결을 잃은 소녀의 울음마저 잠들고
피비린내에 눈뜬 고양이의 기척마저 사라지고

깊어간다 네 잠 어둠을 호흡하며 조금씩 내뿜는 빛의 예감
꿈을 절도하러 밤의 문턱을 넘어오는 크고 작은 발소리
그래도 꿈쩍 않는 네 잠
아침을 이 도시 입구까지 끌어올 거대한 잠
이제는 아무도 깨울 수 없는 거인의 잠
                                                        ― [거인의 잠] 부분

이 시에서는 '잠'이 외부 세계의 공포와 폭력에 대응하는 하나의 방어 기제로 작용한다. 이 작품의 '너'는 철저히 무저항과 용서의 태도로 현실의 어려움을 감내한다. 특히, "아침을 이 도시 입구까지 끌어올 거대한 잠/ 이제는 아무도 깨울 수 없는 거인의 잠"이란 구절은, 인도의 독립을 위해 비폭력주의 불복종 운동으로 영국에 맞섰던 간디의 삶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시인이 말하는 '잠'은 의지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신작 시편에서 반복 제시되는 '잠'의 이미지는 다소 수동적이며 더군다나 '꿈이 없는 잠'이란 측면에서 이전의 작품들과 대비된다. 시인의 등단작인 [꿈의 체인점](1992)을 읽어 보자. "당신이 깨어진 술병처럼 날이 서/ 누군가의 발바닥을 찌르거나/ 헌 비닐봉지처럼 이리저리 뒹굴 때/ 당신의 불면 속으로/ 질 좋은 석탄 같은 잠을 화석 같은 잠을/ 수십 삽 퍼넣어 줄 것이다/ 화력 좋은 꿈에 불도 당겨 줄 것이다". 여기서의 '잠' 역시 현실의 어려움이나 패배를 위무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거인의 잠]의 수동성에 비할 때 이 작품에서의 '잠'은 매우 활달한 이미지들을 동반하고 있으며, '화력 좋은 꿈'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더욱이 [꿈마다 은여우가 되어](1994)라는 작품에서는, "그러나 난 알고 있어/ 솜털 뽀얀 몸으로 은여우 꿈을 꾼다는 사실만으로/ 내 정든 꿈길에 누가 놓은 강철의 덫을"과 같은 감각적인 구절을 통해, '꿈'이라는 모티프가 지니는 현실적 한계나 위험성까지 인식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김왕노 시인의 신작시에서 '잠'이 활달함이나 꿈을 잃은 것과 결부되어 드러나는 또 하나의 특성은 '가라앉음'의 이미지이다.

막차가 떠나버린 서울역 연탄가스 냄새 화한 싸구려 여인숙에서 죽음의 잠이라도 자고 싶은 날이 있었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노숙자들은 동사해도 좋았을까
따뜻한 꿈 하나 꾸려는지
희망의 싹 하나 틔워주지 않던 맨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잠들던 그 겨울 한없이 깊고 깊었네 몸부림치면 칠수록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던 깊고 깊은 물이었네

[중략]

초롱아귀 불빛 같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던 서울의 밤
밤마다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으면서 내가 부력이라 믿었던 것은 네 이름 미친 듯 부르는 것뿐이었네 네 이름 부르다 부르다 더 깊은 반도의 물속으로 소리 없이 소리 없이 가라앉는 일뿐이었네
― [깊은 물 1] 부분

이 시의 화자에게는 이 세상이 바로 '깊은 물'로 인식된다. 밤마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것은 일차적으로 잠을 자는 행위를 비유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죽음의 잠'이라는 의미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요컨대 이 시에서의 '가라앉음'의 이미지는 잠, 또는 죽음과 동류항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유일한 희망은 '부력'을 지녀 다시 물위로 떠오르는 일일 텐데, 이 시에서는 그것마저 매우 절망적으로 채색되어 있다. 가령, 이 시의 운율을 가다듬는 데 기여하는 '-뿐이었네'의 반복은, 어찌할 수 없는 한계에 빠진 화자의 절망적 상황을 더욱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다음 작품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가라앉는 상황이 제시되기에 이른다.

내가 함께 했던 날도 가라앉는다
찬비를 피해 들렀던 러브호텔도
직사광선을 피했던 마로니에 넓은 잎도
촘촘한 그늘을 짜주었던 고생대에서 걸어온 메타세콰이어도
내가 열광했던 이름도
그의 카리스마도
내가 바라본 푸른 하늘이며
푸른 하늘을 장식하러 오던 제비며 새털구름이며 애드벌룬이며 고추잠자리며
먼저 가라앉아 가는 도시위로 가라앉는다
[중략]

가라앉는다 심연에 내리는 플랑크톤 시체처럼
하얗게 하얗게 밑바닥이라 믿었던 것과 함께
(여전히 자각증세가 없는 거리와 사람들)
                                                                ― [깊은 물 2] 부분

러브호텔이나 마로니에 잎, 새털구름 같은 구체적인 사물은 물론 카리스마 같은 추상의 가치도 모두 가라앉는다는 것이 이 시에 설정된 정황이다. 그런데 이 시를 자세히 살펴보면 '가라앉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현실이 아니라 일종의 '자각 증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달리 말해 '가라앉는다'는 시적 진술에 시적 자아 또는 시인의 가치관이 교묘히 내재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전히 자각증세가 없는 거리와 사람들)"이라고 표나게 진술한 부분을 통해서 우리는 이 시인의 끝없는 '잠'과 '가라앉음'이 개인적 차원의 진술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앞서 [깊은 물 1]에서 노숙자들의 삶의 한 자락을 그려낸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으로 받아들여진다. 시인의 개인사적 경험 내용과 사회적 차원의 인식 내용이 정교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번 신작시를 지배하고 있는 깊은 절망의 한  뿌리가 사회적인 차원에 닿아 있음을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 이르러 우리는 '상실의 나날'이라는 비관적 제목의 시 속에서 역설적으로 이 시인이 끝내 버릴 수 없었던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눈앞에 피었다 진 꽃들은 환상이 아니기를

언젠가 나도 내 존재를 마감해야 하는 일
떠나가며 나에게 남긴 숱한 눈물 방울방울들
삶의 진한 엑기스 떨구게 한 이름이여 사랑이여
환상이 아니기를 천근 만근 찍어누르다 간 그 날의 하늘 한 자락마저
어느 시간의 모퉁이에서 만나
꽃으로
꽃으로 흐드러지며
다시 존재의 봄날을 죽음의 문 앞으로 불러올 수 있으리라
뺨에 떨어지던 빗방울도
뺨에 살 비비다 간 안개며 그리움도
환상이 아니기를
지금은 사랑의 은총으로부터 추락한 계절
절망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다 추락하다 보면
밑바닥을 차고 다시 솟구쳐 오르는 반동의 힘이 찾아올 테니

눈앞에 피었다 진 꽃들은 환상이 아니기를
                                                        ― [상실의 나날] 전문

'눈앞에 피었다 진 꽃들은 환상이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첫 행과 마지막 행 사이에는, 수많은 상실의 사례들이 열거되어 있다. 그 세목들은 이 시의 화자에게나 우리들에게나 매우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그것들을 잃어 가는 것이 우리들 삶의 한 모습은 아닌가 하는 진지한 문제 제기가 이 시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 시인의 말마따나 지금 이 시대는 '사랑의 은총으로부터 추락한 계절'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앞에 피었다 진 꽃들이 진정 환상은 아니듯, 언젠가 스스로의 존재를 마감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 역시 환상에 불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절망의 밑바닥으로 추락하다 추락하다 보면/ 밑바닥을 차고 다시 솟구쳐 오르는 반동의 힘이 찾아올 테니" 하는 시인의 믿음에 나 역시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시가, 우리의 삶이 바닥을 차고 다시 힘차게 솟아오르리라는 믿음 없이 어찌 이 팍팍한 시대를 유쾌하게 견뎌 나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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