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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초점/차이와 반복/이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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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경수
댓글 0건 조회 3,149회 작성일 02-06-14 20:37

본문

초점
차이와 반복
이경수(문학평론가)



1. 패러디의 가능성

현대시의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대개 주요한이나 김억, 많이 거슬러 올라가도 최남선 정도에서 머물곤 해 왔다. 현대시의 기원에 대한 탐구란 이전의 정형시와는 다른 새로움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찾는 성격의 작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시의 초창기 대표 주자들이 정형시로 귀착한 한계라든지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 시론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김기림 역시 근대가 부딪힌 숙명적인 한계에 대해 고민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과제는 늘 우리 문학사에 무거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무엇이 전통인가라는 어찌 보면 가장 본질적인 물음에 답하는 것은 이 글의 몫은 아닌 것 같다. 다만 계승과 창조, 어디에 방점이 찍히느냐에 따라 연속과 단절에 관한 시비는 길지 않은 우리의 현대 문학사를 통해 계속되어 왔고, 연속과 단절을 가르듯이 전통과 새로움을 가르는 논의 역시 때로는 엄정한 심판관의 자세로 때로는 좀더 은밀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천 년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시인들 역시 이러한 구획으로부터, 혹은 이러한 구획들 간에 작동하는 긴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새로움을 향해 강박적으로 치닫는 시대와 새로움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라는 장르 사이에서, 낡은 상징과 새로운 언어 사이에서, 시인들의 고투는 계속될 것이다.
어느 길이 바람직하다고 누가 섣불리 말할 수 있겠는가. 낡은 상징의 무력함을 시인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새로움의 강박적 추구가 가져오는 허망함을 시인만큼 몸서리치며 느껴본 사람이 또한 어디 있겠는가. 나아갈 것이냐, 돌아갈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러나 이분법적인 구획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러한 담론의 장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진정 문제다. 지난 계절에 발표된 시들을 읽으며 나를 끝없이 맴돌던 물음 역시 이로부터 멀지 않다. 이 시대에 전통과 새로움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의 만남이 일방적인 포섭이나 굴복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긴장을 생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지 그 만남의 방식을 고민하거나 보여 주는 시들에 이 글은 주목하였다.
린다 허천은 '과거의 풍요롭고도 위협적인 유산'을 가진 텍스트들과 연관되는 양식인 패러디를 비평적 거리를 가진 모방으로 새롭게 정의하였다. 패러디는 반복이지만 차이를 내포한 반복이라는 것이다. 다음에 살펴볼 시를 모두 패러디의 예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반복으로부터 차이를 끌어낸다는 점에서는 패러디가 가진 가능성과 유사한 효과를 나타낸다고 보았다.      

2. 동화, 깨어진 거울의 상상력

루이스 캐롤은 우리를 안심시켜 주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행복한 결말을 약속해 준다는 점에서 전래 동화를 '사랑의 선물'이라고 불렀다.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전인류의 상상력의 보고가 되어 왔다는 점에서 전래 동화는 영원한 고전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전래 동화를 빌린 시의 상상력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전통과 새로움이 만나는 방식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우리 시인들에게 전래 동화는 더 이상 '사랑의 선물'만은 아닌 것 같다. 전래 동화라는 거울을 통해서 더 이상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비춰 볼 수 없게 된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전래 동화는 이제 거울의 효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행복한 결말이 보장된 꿈같은 세상은 동화 속에나 있을 뿐, 전래 동화는 이제 안심 대신 불안을, 미래에 대한 희망 대신 절망을, 행복한 결말 대신 그저 그렇거나 불행한 일상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깨어진 거울이 되어 버린 전래 동화는 우리의 일상을 비출 수는 있어도, 그 균열만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박해람과 장이지의 시는 익숙한 동화를 토대로 한 동화적 상상력을 빌리지만 그것을 비트는 데서 이들 시의 매력은 발산된다.  

저 산너머에 마을이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
다만 마을을 찾아가다 잠시 쉬는 중.
마을과 마을 사이에 휴식이란 얼마나 불편한지…
다시 한 번 품속의 피리를 더듬어 본다
무엇으로 꽉 차 있는지 여전히 무겁다.
오늘은 무엇을 꺼내어 이 하루치의 무게를 줄여 볼까
어디, 눈이라도 한번 불러내 볼까
발자국이라도 있어야
내가 걷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으로
어디, 흰 눈을 한번 내려 볼까.

(나는 그때의 피리소리를 잊을 수가 없어
모든 음을 다 털어낸 그 피리를
내게 주고 간 그 예리한 콧날의 사내를 잊을 수가 없어.
마치, 몸속에 잠복한 보균처럼
점점 무거워지는 피리.)

그 이후로 나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이 마을 저 마을로 그를 찾아다니는 중.
담보로 잡혀간 내 마음을 찾아다니는 중.  
최면에도 들지 못하는 수치스러운 몸으로 그들을 찾아다니는 중.
몸속에 쥐떼들만 점점 키우고 있는 중.

(어서 빨리 마을을 하나 잡아
무겁고 바글거리는 이 쥐떼들을 풀어놓아야 한다.
나를 다 갉아먹기 전에 이 쥐들을 수장시켜야 한다.)

붉은 노을이다.
저 노을은 필경 마을로 들어가는 門(문)일 것이다.
다리의 절룩임이 마치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다
그때 혼자 남겨진 이후로 한시도 거른 적이 없는 이 절룩이는 여행
뼈마디처럼 만져지는 이 피리를 어쩐다
점점 더 뚱뚱해져만 가는 이 피리를 어쩐다.
― 박해람, 「피리 부는 사나이」(《문학사상》2001. 9)

대표적인 전래 동화 중에 하나인 「피리 부는 사나이」는 여행 모티프와 문제 해결의 모티프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동화이다. 한 사나이가 길을 떠난다. 그는 우연히 피리를 손에 넣게 되고 그가 피리를 불자 많은 동물들이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어느 마을에 도착한 피리 부는 사나이는 쥐떼들로 인해 골치를 썩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피리를 불어 쥐떼들을 한데 모아 수장시켜 소탕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처음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피리 부는 사나이를 배신한다. 화가 난 피리 부는 사나이는 다시 피리를 불어 마을의 아이들을 불러모아 마을을 곤경에 빠뜨린다. 멋지게 피리를 불며 길을 떠나는 사나이와 마법의 피리가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소리와 주술적인 힘은 이 동화가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전래 동화와는 다르게 전개된다. 전래 동화와 현실과의 괴리는 이 시를 시 쓰기에 관한 시로 읽을 때 좀더 분명히 드러난다. 어쩌면 시인은 길 떠나는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서 느껴지던 자유와 마법 피리의 주술적인 힘과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유사성의 주술적인 힘을 상실한 우리 시대에 시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더 이상 피리 부는 사나이의 멋진 여행과는 거리가 멀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길 떠남은 자유로운 방랑이자 수많은 길벗들이 있는 풍요로운 여정이었지만, 지금, 여기에서 시인이 걷는 길은 고독만이 함께 할 뿐이다. '저 산너머에 마을이 있으리라는 법은 없다.'라는 시의 첫 행부터 전래 동화에 대한 뒤집기는 시작된다. 동화 속의 신나는 마법의 피리는 시의 화자에게는 무겁고 뚱뚱해져 가는 거추장스러운 피리가 되어 버렸고, 피리 부는 사나이의 경쾌하고 리드미컬한 걸음은 혼자 남겨진 이의 절룩이는 걸음으로 둔갑하고 만다. 동화 속 낭만은 사라져 버렸고, 피리로 비유되는 시인의 노래는 곤혹스럽고도 외로운 노래로 그려진다. 박해람 시인은 「피리 부는 사나이」라는 동화가 환기하는 유쾌한 환상을 깨어 버림으로써 지금, 여기에서 시를 쓰는 행위의 어려움을 보여 주고 있다. 마법의 피리가 저주의 피리가 되어 버린 차이는 시의 효용성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환상이 깨어진 뒤에도 시인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시이다.

차가운 돌로 지은 고등학교 교실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창작반 교사 하트의 여왕은
노래하듯 「애너밸 리」를 낭송합니다.
꿈꾸는 표정으로 〈애너밸 리〉라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도금이 벗겨진 하트 모양의 귀걸이가 흔들립니다.
애너밸 리 아씨는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사랑 받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답니다. 이 바닷가 왕국에서…….
지금 하트의 여왕에게는 시샘 많은 천사가 보낸 태풍이
애너밸 리를 잠들게 하는 환상이 보입니다.
회전하는 물기둥과 이리처럼 달려드는 해일,
차갑디 차가운 애너밸 리의 무덤가에는
얼굴이 하얀 소년이 웅크린 채 잠들어 있습니다.
가죽 점퍼를 입은 앨리스는 교실 뒤에 앉아 이 환상을
자르고 있습니다. 껌을 질겅질겅 씹습니다.
바람 소리, 파도 소리, 얼굴이 흰 소년의 심장 고동 소리가
앨리스의 핸드폰 소리 안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하트의 여왕은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키가 20센티미터나 줄었습니다.
여보세요. 괜찮아. 수업 시간이야. 시시한 이야기야.
세상에 없는 이야기지. 마치 시 같아. 사랑한다구?
핸드폰 줄에 매달린 고양이 장식이 웃으며
하트의 여왕은 위선자라고 최면을 거는군요.
만나자구? 얼마나 줄건대? 교복 입고 오라구? 변태!
앨리스는 철제 필통 안의 스타들 사진 앞에 앉아 있습니다.
하트의 여왕은 목을 치겠다고 허장성세입니다.
새로운 교실의 이데아를 하트의 여왕은 몰랐습니다.
앨리스는 하트의 여왕을 학교 폭력으로 신고합니다.
앨리스는 교활합니다. 하트의 여왕은
또 키가 20센티미터나 줄었습니다. 얼굴이 흰 앨리스는
어디 있는가요? 그녀는 늘 바닷가 왕국 별들의 무덤가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죽 점퍼를
벗어놓고 어디로 갔을까요?
바닷가 왕국에서는 아무도 앨리스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앨리스도 그랬습니다.
― 장이지, 「가죽 점퍼를 입은 앨리스」(《시안》2001. 가을)

장이지는 좀더 발랄한 상상력으로 루이스 캐롤의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애드거 앨런 포우의 시 「애너밸 리」를 패러디하여 시 창작 교실과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을 풍자한다.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장이지의 시에서 색다른 모습으로 채색되어 나타난다. 쳤다 하면 이기는 크로켓 경기를 즐기고 "저 자의 목을 쳐라"라는 명령을 일삼던 독재자의 상징 하트의 여왕은 이 시에서 고등학교 시 창작반에서 시를 가르치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하트 모양의 귀걸이를 한 창작반 교사로 둔갑한다. 하트가 그려진 카드로 만든 옷을 입은 여왕만큼이나 도금이 벗겨진 하트 모양의 귀걸이를 하고 있는 여교사의 모습도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창작반 여교사 역시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앨리스에게 '목을 치겠다'는 협박을 하기는 하지만, 동화 속 하트 여왕에 비해 미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앨리스에 의해 그녀의 수업은 무시당하고, 새로운 교실의 이데아를 모르고 학생을 협박했다가 '학교 폭력'으로 고발까지 당하는 신세가 된다. 동화 속에서 앨리스의 키가 커지던 것처럼 이번에는 여교사의 키가 20센티미터씩 작아진다. 루이스 캐롤의 동화에 등장하는 앨리스는 다소 엉뚱하기는 하지만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장이지의 시에 등장하는 앨리스는 '가죽 점퍼를 입은 앨리스'이며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한 시 따위는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원조 교제를 하는 교활한 소녀이다. 애너밸 리나 루이스 캐롤의 동화에 나오는 앨리스와는 달리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그랬다. 사랑스러운 동화 속 주인공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시의 패러디는 '핸드폰 줄에 매달린 고양이 장식'에서 극대화된다. 루이스 캐롤의 동화에서 고양이는 모든 수수께끼의 근원이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가장 이상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고양이는 핸드폰 줄에 매달려 있는 ―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에 대한 기막힌 패러디이다. ― 하찮은 장식에 불과하다.
발랄한 상상력에 기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패러디하고 있는 시 「가죽 점퍼를 입은 앨리스」가 일으키는 효과는 그러나 씁쓸하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한 시를 시시하다고 느끼고 스타의 사진 앞에 열광하며 수업 시간에 공공연히 핸드폰을 받는 사랑스럽지 않은 앨리스들이 우리 곁에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죽 점퍼를 입은 앨리스들에게 시를 읽고 감동 받는 세상은 분명 이상한 나라로 여겨질 것이다. 이때 동화 속의 신비는 몰이해와 단절감으로 현실화된다. 장이지의 시는 아름다운 서정시의 무력함뿐만 아니라 가죽 점퍼를 입은 앨리스들의 소외감을 사랑받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마지막 구절에서 보여 주고 있다. '사랑의 선물'인 거울은 깨져 버렸지만, 깨진 거울의 조각에는 이따금씩 사랑스럽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이 땅의 수많은 소녀들의 모습이 비친다.            

3. 사라진 비극, 누추한 삶의 현장

영웅이 사라진 시대, 영웅이 갈 길을 비추어 주는 별이 사라진 시대에 비극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눈물을 쏙 빼게 하는 멜로 드라마는 있어도 비장미를 느끼게 하는 비극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가까이는 1980년대만 하더라도 영웅이나 비극에 대한 기대는 어느 정도 살아 있었다. 어쩌면 비극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면서 비극은 우리 앞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춘 것인지도 모른다. 비극은 물론 비극에 대한 기대마저 사라진 시대의 삶이란 누추할 수밖에 없다. 최정례, 함성호, 김영승의 시는 패러디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내세우지는 않지만, 고전의 상상력에 기대 악착같고 우스꽝스럽고 바보스러운 우리네 일상을 그리는 데 천착한다.        

저 티끌을 지나서 왔구나
저 벌레를 지나서
한없이 지나서 왔구나

업은 아이를 내려놓고
순두부를 시켜 먹는 동안
훌쩍거리며 코를 훔치는 동안
아이는 끽끽거리며
바닥을 기어 다니고

너의 나이 나의 나이
저 티끌에서부터의
나이를 셀 수가 없구나

「그 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까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검은 옷에 끈질기게 따라온 먼지들
악착같이 따라 붙는 희끄무레한 것들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이냐
세포가 되었다가
버러지가 되었다가
떨치고 일어나
짐승이 되고 싶은 것이냐

검은 옷에 악착같이 따라다니는
보푸라기야
구렁텅이야
― 최정례, 「보푸라기들」(《리토피아》 2001. 가을)

'백석 시의 구절을 빌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시는 백석의 시 「北方에서」의 한 구절을 효과적으로 삽입하여 새로운 의미의 창출을 이루어 내고 있다. 백석의 시에서 '그 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까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라는 구절은 행갈이 없이 쓰임으로써 유장한 리듬 속에 한 개인의 역사를 넘어선 민족의 역사의 유장한 흐름을 보여 준 반면, 이 시에서는 적절히 행갈이를 함으로써 티끌과도 같고 먼지와도 같은 개개인을 지나온 시간들을 환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의 각 연을 이루는 행들은 효과적인 각운의 배치를 통해 반복적인 리듬을 형성하고 있는데 「北方에서」를 인용한 부분도 '―지고 / ―히고'가 각운을 형성함으로써 시의 전체적인 리듬과 어우러지고 있다. 반복적인 리듬의 적절한 배치는 '저 티끌'과 '저 벌레'를 한없이 지나서 온 세월을 환기하고 우리네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되었을 '업은 아이를 내려놓고 순두부를 시켜 먹는' 남루한 시간을 환기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무한히 반복되거나 윤회하는 시간과는 다르다. 먼지나 티끌이 긴긴 시간을 지나 세포가 되고 버러지가 되고 짐승이 되는 차이의 시간인 것이다. 무한한 반복이 차이를 생성해 내는 효과를 백석의 시가 리듬에서 실현했다면, 최정례의 시는 시간 속에서 잡아내고자 한다.  
검은 옷에 끈질기게 달라붙는 먼지들의 악착같음에서 시인은 어떤 생명의 기운을 감지한다. 그것은 관념화된 거창한 의미와는 거리가 먼, 악착같고 남루하고 지리멸렬한 모습을 하고 있다. 검은 옷에 한사코 달라붙는 먼지처럼, 낡은 옷에 일어나는 보푸라기처럼 거추장스럽고 추하고 초라한 존재인지만 정말이지 악착같다. 그러므로 시인은 보푸라기들을 가리켜 구렁텅이라고 부른다. 너무 많은 보푸라기들을 보며 시인은 비명을 지른다. 아! 진저리나는 삶의 구렁텅이들.        

낙타를 몰고 대화역 러브호텔 골목을 지나가는데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사자인 삐끼가
기본 25,000원 부킹 책임지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시지푸스 성인 나이트클럽이라고 말했다
이상하게 틀렸는데도 나를 죽이지 않았다
삐끼의 머리가 사람이라는 게 좀 걸렸지만
낙타들을 지하철 안으로 몰아넣고 역삼동을 지나
수서까지 오랜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낙타들은 지쳐 있었고, 나도 어디 적당한 곳에서 쉬고 싶었기 때문에
다시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사자인 삐끼가
안주 무료 아가씨 끝내주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그냥 스핑크스 중년 나이트클럽이라고 말해주었다
이번에도 틀렸는데 그냥 살려주었다
이상하다 나는 빨리 비극으로 가야 하는데
낙타를 수간해서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사자인 괴물을 낳게 한 범인을 잡아야 하는데
나도 계속 살아 있고
저 삐끼도 계속 살아 있다
나는 할 수 없이 낙타를 데리고 예비군 교육장 옆 농수산물센터에서
배추 이파리를 씹으며 사막 횡단 버스를 기다리는데
예의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사자인 삐끼가 다가와
오늘은 왜 오지 않았느냐며
9시 전에 입장하는 여성 고객들은 공짜인 데가 어디냐고 물었다
거기는 궁전 나이트클럽이었고,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삐끼는 분명히 그런데도 아니라고 거짓말하면서도 나를 살려주었다
당연히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사자인 삐끼도
달리는 자동차 바퀴에 몸을 던져 죽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너무 이상해서 귀가 간지러웠다
아무도 죽지 않다니
그때 큰 돌을 굴리고 가던 맛없는 큰 간 말똥구리가
'웃지 말아요, 이 연극에는 비극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요'
라고 충고하며 혀를 차고 지나간다
비극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이렇게 자꾸 삶이 반복된다면
나는 어디에서 내 죽음을 볼 수 있을까
― 함성호, 「비극을 찾아서」(《문학과사회》2001. 가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멋지게 해결하고 주어진 비극적인 운명을 향해 한발한발 가까이 다가서는 외디푸스는 그리스 신화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에나 존재한다. '비극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연극인 현실 속에서 비극을 찾아 다니는 행위는 오히려 다분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신화 속의 괴물 스핑크스는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사자인 삐끼'로 풍자되며 화자인 '나' 역시 일부러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틀리는 등 아무리 죽으려 애써도 죽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아침엔 넷, 점심엔 둘, 저녁엔 셋인 건 뭐냐?'라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 정체성에 다가갔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나이트클럽의 위치를 묻는 사소하고 무의미한 수수께끼로 둔갑한다. 그런가 하면 부친 살해와 근친 상간의 모티프는 獸姦의 모티프로 대체된다. 성에 관해 아직도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금기가 수간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시인이 노린 효과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수간의 이미지는 비극적 영웅이 만들어 내는 비장미와는 거리가 멀다. 이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외디푸스 신화와 비슷한 구성을 따르던 이 시가 신화와 결정적으로 어긋나기 시작하는 것은 수수께끼를 틀린 다음부터다. 수수께끼를 틀렸는데도 죽이지 않는 것은 한편으로 수수께끼의 신비함이나 신통력이 현실에서는 이미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인들은 질문 하나에 삶의 전부를 거는 게임 따위는 더 이상 하려 들지 않는다. 이기는 게임만을 하려 들거나 장난임을 전제한 게임만을 하려고 들 뿐이다. 신비함이 사라진 곳에 비장미가 생길 리 만무하다.
통상적으로는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면 기뻐해야 할 일이겠으나, 시의 화자는 무한히 반복되는 삶에 공포에 가까운 지루함을 느낀다. 생각해 보면 무한히 반복되는 삶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더구나 그것이 사막을 걷는 길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화자가 낙타를 끌고 걸어 다니는 러브호텔 골목은 시에서 사막으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바로 그 사막은 우리의 일상으로부터 멀지 않다. 함성호의 시가 우스꽝스럽게 외디푸스의 비극을 풍자하고 있는데도 거기서 씁쓸함과 남루함이 느껴지는 것은 비극과 인용시 사이의 거리가 지금, 여기의 현실을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날 형수가 싸준 갈비
인겸1)이 생일에 끓여 먹자고 넣어둔
兄宅에 선물로 들어온 갈비
꺼내어 끓여 먹는다 냉동된
갈비는 시베리아 유형지
내려찍을 때 곡괭이에서 튀는 살점
氷壁에서 발굴된 맘모스 같고
오늘은 4월 3일 토요일 아니
그 갈비가 언젯적 갈비냐고
묻기도 전에 갈비는
식탁을 종횡하고 아아

[…중략…]

씨를 뿌린다는 것은
<計劃>한다는 것

얏호!

계획, 계획,

미래에 대한 彫像(imaging),

눈먼 거북이2)
구멍 뚫린 널판지 하나 만나
구사일생

둥둥 떠내려가다가 닿아보니
무릉도원이었구나 별유천지비인간이었구나

아내는
'半裸의 美姬'들이 되어
영신군가를 부르고

어린 아들은
'다윗'들이 되어
골리앗과 낚시를 하네

玉流엔 錦鱗魚……

눈먼 거북이
구멍뚫린 널(棺)판 하나 만나
모가지에 그 칼(枷)
뒤집어쓰고 어기적 어기적

골고다를 기어오르네 눈먼 거북이
구멍 뚫린……

맹구여, 김맹구여……
  
저 非想非非想天川3)이 또 범람하면
그 모든 雪泥鴻爪

水沒당하기도 전에 아득히
떠내려가리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맹구여, 김맹구여 그러니
이게 꿈인가 生時ㄴ가
살아 있음을 天恩으로 알고
方舟 하나 또
<計劃>하지 않으련?

一望無際 大平原엔
들소떼를 猛추격하는
늠름한 어린 아들,

토막토막 예리하게 절단된
그 갈비의 뼈를

오래도록 凝視하고 있는
맹구여, 김맹구여…….

―――――――
1) 吝謙, 필자의 아들.
2) 盲龜遇木.
3) 상상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도 아닌, 그러니까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 없을 수도 없는, 佛家에서 말하는 三界의 모든 하늘 중 가장 높은 하늘(非想非非想天)을 흐르는 川의 뜻으로 필자가 상상하여 명명한 川.
― 김영승, 「맹구여, 맹구여……」(《현대시》2001. 9)

설날 형수가 싸 준 냉동 갈비를 몇 달 후에 꺼내 먹으면서 식탁을 종횡무진하는 갈비를 보며 시인의 상상력은 먼 시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갈비는 빙벽에서 발굴된 맘모스를, 내일 모레가 식목일이라는 생각은 '씨를 뿌린다는 것은 / <計劃>한다는 것'이라는 생각의 연쇄를 낳는다. 아마도 계획 따위는 한 번도 하지 않고 살아왔을 화자/시인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생각하다가 盲龜遇木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리게 된다. 여기서부터 시인의 상상력은 동서고금을 넘나들기 시작한다. 아내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고 협박하는 반라의 미희들이 되고, 어린 아들은 '다윗'들이 되어 골리앗과 낚시를 한다. '다윗'에 비유된 어린 아들의 행위는 갈비를 하나라도 더 건져 먹기에 골몰하는 아들의 모습과 겹치고 거북이를 위협하는 반라의 미희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가장으로서의 화자에게 은근히 압력을 행사하는 아내의 모습과 겹친다. 여기서 '옥류에 금린어' 가득한 무릉도원은 눈먼 거북이가 골고다 언덕을 기어오르는 험난한 고행의 길로 뒤바뀐다. 거북이를 구해 준 구멍 뚫린 '널판지'는 순식간에 모가지에 쓴 칼, 즉 관으로 변한다. 골고다 언덕을 기어오르는 '눈먼 거북이(盲龜)'는 발음의 유사성에 기초한 언어 유희의 효과에 기대 바보의 상징인 '맹구'로, 다시 '김맹구'라는 시인/화자를 연상케 하는 인물로 전이된다. 성서적 상상력은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켜 인생 무상감을 자아내고, 갈비를 먹느라 정신 없는 어린 아들은 일망무제 대평원을 달리며 들소떼를 맹추격하는 늠름한 모습으로 환치된다. 어린 아들의 모습이 눈물겨워 화자는 갈비를 응시만 할 뿐 입에 대지 못한다. 초라하고 남루한 일상과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신화적 상상력의 병치는 시인/화자의 어리숙함과 바보스러움에 진중한 삶의 무게를 실어 준다. 일상과 신화의 교묘한 병치를 통해 누추한 일상에 따뜻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데 이 시의 힘과 매력이 있다.      

4. 충돌의 미학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세계를 표상하는 기호라고 믿었던 시대에 시인들은 분명 행복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주술적인 힘을 지닐 수 있었고, 언어의 마법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 또한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미메시스의 환상이 깨지고 '사랑의 선물'인 거울이 깨져 버린 '지금, 여기'를 사는 시인들은 주술의 힘을 상실한 언어를 부여잡고 존재 이유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앞서 살펴본 다섯 시인의 시는 동화나 신화, 혹은 고전의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을 무의미하게 반복하지 않고 출발점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분명한 차이를 생성해 내는 데 성공한다. 익숙한 동화와 신화지만 낯설게 반복되거나 배치됨으로써 의미의 충돌을 일으킨다. 그것은 동화와 현실, 신화와 현실 사이의 괴리를 환기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운 조롱과 씁쓸한 현실 인식의 효과를 동시에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김영승의 경우처럼 씁쓸함과 따뜻함이라는 정서를 동시에 발생시키기도 한다.
위에서 살펴본 다섯 편의 시들은 전통과 새로움이 만나는 방식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도 음미할 만한 시이다. 거울이 깨진 시대에 시를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 라는 존재론적인 고민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당위에 대해서도 나름의 개성적인 방법을 보여 줄 수 있었다고 믿는다. 하늘 아래 온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하더라도 시가 존재하는 한 새로움은 늘 새롭게 창조될 것이다. 차이 없는 반복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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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수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평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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