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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초점/신 인류의 상상력/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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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남석
댓글 0건 조회 2,448회 작성일 02-06-14 20:39

본문

초점
신 인류의 상상력
- 젊은 작가들이 부활시킨 초인(超人)과 이족(異族)의 계보 
김남석


Ⅰ. 잃어버린 우리들의 꿈과, 다시 꾸기 시작한 문학의 꿈

인간은 즐겨, 인간 이상의 능력을 꿈꾼다. 하늘을 날고 타인의 속내를 읽고 보이지 않는 나를 과시하고 범인의 몇 배에 해당하는 힘을 갖는 것은, 인류가 지속적으로 꾸어온 하나의 꿈이다. 문학은 이러한 꿈을 이어받아 수많은 초인을 만들어내었다. 그리스인은 초인적 능력을 지닌 신을 만들어내었고, 중국인은 도술을 부리는 원숭이를 만들어내었고, 허균은 호풍환후하는 홍길동을 만들어내었다. 무협지는 평범한 인간이 초능력을 발휘하는 인간이 되는 과정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기술을 선보였고, 텔레비젼 드라마 「X파일」은 돌연변이나 외계인을 인간과 구별하는 방식을 선보였다. 헐리우드 영화는 과거에서, 미래에서, 아주 먼 외계나 심해에서,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종족과 인류의 대결을 그린 수많은 도식을 선보였다. 이처럼 문학과 그의 후신인 영화, 텔레비젼 드라마, 각종 대중 장르에서 초인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주요한 모티프로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유독 본격문학은 이러한 모티프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본격문학이 지켜야 할 삶과 인간에 대한 논의가, 이러한 모티프가 드러내는 허황된 측면과 모순적으로 작용할 것을 깊이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는 자신들이 지속시켜온 황당한 꿈을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이러한 꿈을 각종 비루한 것들 속에서 확인하고 그것이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느끼고 안도했지만, 진지한 성찰과 깊은 사색을 요구하는 본격문학에서 다루는 것에는 반대해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본격문학은 이러한 인류의 허황된 꿈을 밀어내고 마련된 영토 위에 축성되었다. 그러기에 초인에 대한 상상력은 최근까지만 해도 본격문학의 변경을 맴돌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은 이러한 변경의 소재들이 본격문학의 일각으로 당당하게 들어오는 최근의 추세에 힘입어 쓰여졌다. 아직도 본격문학의 성곽을 완강하게 방어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이러한 변경으로부터의 침입은 외적의 침입이나 적군의 발흥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본격문학의 영토 위에서 새롭고 다양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해방의 나팔이나 원군의 도래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 어느 쪽 입장도 함부로 비판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리고 변경으로부터의 침입이 어떤 성격인지를 보다 분명하게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대단히 새로운 하나의 문학적 동향으로 판단된다. 이 글은 이러한 나의 판단에 대한, 일종의 자체 검증인 셈이다.

Ⅱ. 일상에 구속된 초인의 과거 운명 : 신라의 처용랑

『삼국유사』의 「처용랑과 망해사」 조를 보면, 고대 한국인의 재미있는 상상력이 눈에 들어 온다. 이 이야기의 개요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의 관점으로 다시 한 번 읽어보겠다.

제 49대 헌강왕 때의 신라는 정치적으로 태평했고 경제적으로 윤택했으며 사회적으로 체계가 잡혀 있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러했다. 헌강왕은 자신의 치세를 돌아보고 기뻐했으며, 이러한 치세와 관련된 것으로 보여지는 잦은 순행을 했다. 그러던 중 개운포 순행 길에서 이족(異族)의 초인을 만난다. 그는 구름과 안개를 자유자재로 다루어 자연의 흐름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닌 〈동해용〉이었다. 헌강왕은 동해용의 신이한 능력을 이어받은 막내아들을 얻고, 그를 데려와 서라벌에 정착시킨다. 그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서라벌의 이름난 미녀를 주었고, 상당한 재산과 권력마저 하사했던 것 같다. 서라벌 생활에서의 생활은 전적으로 추측에 맡겨야 할 문제이지만, 처용은 밤늦도록 무언가를 할 수 있거나 해야 할 정도로 바쁘게 자신의 삶을 설계해나간 듯하다. 그렇게 밤늦게 돌아온 어느날, 그는 아내와 〈역신〉의 동침 현장을 목격한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추수리고 이 현장에서 물러나와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한 의연함에 역신은 깊이 탄복하게 된다.

처용의 태도를 보면, 이 동침이 강간인지 화간인지 불륜인지 자유로운 성행위인지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는 다만 조용히 물러나 큰 소리로 자신의 담담함을 성토할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처용이 일상인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고 판단할 수도 없다. 우리는 많은 문학작품에서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탈을 꿈꾸는 많은 연인들을 목격한 바 있다. 90년대 이후 문학은 특히 이러한 목격담을 더 분명하고 자신있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설화의 특이한 점은 무엇인가. 나는 처용의 신분을 문제삼고 싶다. 그는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이 아니다. 그는 외부에서 왔으며, 인간과 다른 기원을 가진 종족의 일원이다. 그의 아버지의 능력으로 판단하건데, 무척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식으로 말하면, 〈서라벌의 슈퍼맨〉인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초인의 행적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인류 역사를 바꿀 거대한 업적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나약한 인간을 돕거나 구제하는 거창한 뜻을 세우는 것도 아니며, 하다못해 범인들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신통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밤늦게까지 무언가를 하며 서라벌의 거리를 걸어다니고 또 어쩌면 그 다음날 똑같은 거리를 걷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출근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선택한 외도이든 불가항력적인 강제이든 간에 아내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다. 그런 그를 초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일상인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처용의 초상은, 초인임에도 초인다운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범인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일상인의 윤곽을 드리우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러한 처용의 초상은 90년대 우리 문학에서도 발견되기 시작했다. 황당한 소재들의 당당한 문학입성은 바로, 이러한 〈처용의 상상력〉이 고전에서 현대로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일종의 문학적 반향이다. 우리는 이러한 반향을 김영하와 송경아와 백민석과 전경린 그리고 이기호로부터 감지해낼 수 있다.

Ⅲ. 생활인의 고뇌 : 김영하의 「고압선」과 「흡혈귀」

「고압선」은 익히 알려진 투명인간의 이야기이다. 투명인간은 수많은 영화와 소설의 소재가 되었지만,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이 낳은 부정적 결말을 보여준다는 다소 도식적인 교훈 이외에는 작가적 전언을 함의하지 못했다. 오히려 투명인간이 되어 악한 자들을 벌주거나 스스로 악한 자가 되어 욕망을 마음껏 분출시켰으면 하는 부정적 바램으로 기능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는 인류가 성장하면서 만들어낸 금기에 대한 위반 욕구이다. 이 욕구를 모든 사람이 느끼기에 이 이야기는 허황되면서도 실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영하는 이러한 허황된 면과 실제적인 면을 동시에 주목한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허황된 면을 보다 간소하게 처리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 허황된 면을 실제적인 면에 강력하게 결부시킨다. 투명인간이 안게 되는 사회적 장애를 만남의 문제로 환원하여, 실존의 문제로 부각시킨다는 뜻이다. 화자는 평범한 가정을 꾸려가는 은행원인데, 옛날 자신이 꿈꾸던 여인과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하면 사라진다〉는 점장이의 예언대로, 화자는 몸이 투명해지는 증상을 겪게 되면서 사회적 가치를 소실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족들은 투명인간이 되어 어려움을 겪는 그에게 가장의 책무만을 강요할 뿐, 실존적 안위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그를 사랑에 빠뜨려 투명인간의 처지로 몰고 간 여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어느새 화자를 잊고, 옛 애인을 다시 찾아 대담한 섹스를 재개한다. 화자와의 만남은 과거의 연인을 만나는 계기로만 작용할 뿐이다. 그 안에서 상실의 아픔이나 상대의 고통에 대한 연민은 엿보이지 않는다.
화자에게는 그들의 옆에서 자신이 사라진 자리를 지켜보는 참담한 처지만 허용된다. 타인과의 교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체험시키는 〈투명한 존재〉로만 남게 된다. 음식점에서 자신만 푸대접을 받는다거나 같은 직장 동료 사이에서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인지된다거나 심지어는 가정에서마저 무능력자로 몰려 간접적인 내쫓김을 당하던 그의 처지는, 결국 사랑의 문제에서도 언제나 주변인의 자리를 점유할 수밖에 없게 된다. 방관자이자 소외자가 그의 자리이자 운명인 셈이다.
당연히 우리는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 왜 그는 방관자나 소외자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 〈물리적 투명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대답은 김영하가 의도했던 대답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서사의 표피적 층위에서 다루어진 허황된 이야기에 의거한 답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영하는 〈사회적 투명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이면의 대답을 기대하는 것 같다. 이 소설에서 엿보이는 김영하의 시치미는, 우리가 사회라고 이름붙인 인간들의 모임 내에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화자가 소외되듯 언젠가 그를 소외시킨 아내나 어머니, 직장 동료 그리고 앞에서 섹스를 벌이고 있는 옛 친구와 연인 모두가 결국 동일한 처지에 빠질 것이라는 확대된 대답을 겨냥하고 있다.
이러한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바로 현대인의 초상이다. 현대인은 본질로 평가받지 못하고, 지위와 역량과 쓸모로 평가받는다. 뒤집어 말하면, 사회적으로 온전한 삶이란 내면적 교류나 진실한 사랑이 도외시된 상태에서 지위와 역량과 쓸모로 관련 맺게 되는 삶이다. 사실 이러한 지적은 전혀 새롭지 않다. 위대한 문학에서 타인으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심지어는 자아 내부로부터 자신을 유폐시키고 소외시키는 인물들은 흔히 목격된다. 그러니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셈이다. 이러한 면에서 김영하의 소설적 전언은 고전적이다. 그러나 김영하는 현실이 어떻고 사회가 어떻고 타인이 어떻고 하는 천편일률적인 사변으로 소설을 이끌지 않는다. 처음에 사랑하면 사라진다는 점장이의 말을 배치하고, 마지막에 정말 사라지는 화자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에 익히 알려진 투명인간 모티프를 결합하여, 흥미있고 재치있는 설정을 엮어놓을 따름이다. 이러한 흥미와 재치는, 읽는 이에게 자신의 현실을 대입시키려는 노력을 자발적으로 유발시킨다. 익히 알려진 투명인간의 모티프가, 현실을 적절하게 성찰할 수 있음을 넌지시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작업은 또 다른 흥미거리이다. 투명인간 모티프가 보여주는 흥미로움과 고전적 주제를 실어 나르는 방식을 해석하는 즐거움, 이 두 가지는 의미있는 전언이되 흥미있어야 한다는 90년대의 논리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흡혈귀」는 처음부터『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염두에 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김영하는 작가 자신의 입장으로 복귀해, 〈죽음의 냄새〉를 해명하려고 한다. 해명의 방식은, 영원히 죽지 않는 고통을 간직한 인물 창조에 있다. 그 인물은 흡혈의 자유와 반역의 재능을 헌납당하고, 생존의 굴욕만을 넘겨받은 흡혈귀이다. 그는 죽음을 거세당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잃은 존재이다. 그에게 삶이란, 생존에 대한 권태와 일상에 대한 무기력이 엮어내는 형벌에 다름 아니다. 모든 욕망은 그에게 무한한 반복에 불과할 뿐이며, 집착이 없는 상태이므로 감정의 굴곡도 허용되지 않는다. 섹스조차도 예외가 아니다. 그에게 섹스는 무미건조한 행위로 인식될 뿐이다. 이는 현대인의 성향을, 우회적으로 읽어낸 결과이다. 다른 작품에서 반복적이고 자극적으로 강조된 어떠한 섹스도, 이보다 분명하고 설득력있게 삶의 상투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
흡혈귀가 겪는 생존의 굴욕과 삶의 환멸 역시,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현대인은 흡혈귀처럼 반복적 일상에 지치고, 미래가 없는 생존에 암담해 한다. 이러한 지침과 암담함을 포착하는 방식이,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소설은 독창성을 지니게 된다. 고유의 소설적 재미와 이단적 상상력을 훼손하지 않고도, 현실의 모습을 적확하게 묘사한다는 사실은, 김영하 소설에 대한 신뢰를 한층 두텁게 한다.
김영하는 「고압선」에서는 〈투명인간〉을, 「흡혈귀」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를 창조해내었다. 별종형태의 인간을 문학의 새로운 소재로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은밀한 꿈을 간직한 이러한 존재들은, 선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현대 문명과 일상의 층위에서 억눌리고 고통받는 존재로 전락해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능력은 사회생활 부적응자로,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은 생에 대한 오래된 환멸로 바뀌어져 있다. 김영하는 신 인류의 능력을 생활인의 고뇌로 변주한 것이다.
김영하의 경우, 초인들의 능력은 일상의 막강한 권위 앞에 무너져 있는 형세이다. 아무리 비밀스러운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삶이라는 실체가 가하는 압력마저 저절로 무마시키지는 못한다. 이러한 문학적 변주는, 허황된 것들 안에서 의미있는 요소를 마련하려는 고뇌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Ⅳ. 두 가지 부끄러움 : 송경아의 「투명인간」

송경아의 「투명인간」은 재미있는 관찰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벼락을 맞는다는 모티프와 이로 인해 투명인간이 된다는 모티프가 결합되어 있다. 이것은 김영하의 「피뢰침」과 「고압선」에서 발견되는 핵심적 모티프를 연상케 한다. 벼락을 맞는다는 점에서 「피뢰침」과 동일하고, 투명인간이 된다는 점에서 「고압선」과 흡사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의 작품이 모티프를 베끼고 모방했다는 말은 아니다. 이들은 비슷비슷한 상상력의 자장권 안에 있는 것이다. 또한 90년대 소설에서 두드러진 신변잡기적 요소에 대한 문학적 비난이나 대응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사실 이념이라는 거대한 화두가 무너진 자리에서 자라난 90년대 문학은 지나칠 정도로 사소설적 경향을 짙게 드러내었다. 일군의 젊은 작가들은 협소한 체험과 비좁은 세계관을 중심으로 비슷비슷한 소설을 대량으로 양산해내게 되었다. 김영하나 송경아와 같은 경우는 이러한 소설적 흐름에서 한 걸음 빗겨 서게 되는데, 〈초인에 대한 꿈〉이 이러한 빗겨섬을 가능하게 한다.
초인에 대한 꿈이 현실 도피나 막연한 환상에 불과했다면 이 작품의 품격은 한 층 떨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송경아는 투명인간의 모티프를 세련되게 변주하여 현대인의 주요한 실덕을 꼬집는다.

다음날부터 김의관은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생리 현상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휴지를 들고 엉거주춤 일어날 때,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똥을 볼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이 그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문제는 간단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모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킬 수는 없었다. 그의 내면은 투명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김영하의 투명인간이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사회적 투명인간〉이라면, 송경아의 투명인간은 〈있으면 곤란한 존재〉로 〈본질적 투명인간〉이다. 김의관이 존재한는 이유만으로, 타인들은 모두 불편해진다. 그는 우리 모두가 거부하고 싶어하는 인간 본연의 치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주어진 출세 기회는 그의 내면이 투명하다는 실덕이 아닌 실덕으로 인해, 사라지게 된다. 김의관이 벼락을 맞고 살아나 각광을 받는다는 앞의 줄거리를 염두에 두면, 김의관의 변모는 급전직하의 아찔함을 선사한다.
현대 사회는 진선미의 고전적 미덕을 어느 정도 부인하도록 가르친다. 진리에 대한 탐구는 기능과 쓸모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고, 아름다움에 대한 의식은 인공적이고 편의 위주로 바뀌고 있다. 선함에 대한 인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김의관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은 존재이다. 그의 내면은 다른 사람의 내면과 별로 다르지 않고, 위선적인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면에서 순수한 편이다. 그런데도 순수함을 드러낸다는 이유만으로,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거추장스러운 사람으로 변한다. 오히려 가식과 위선이 김의관의 현대적 삶에는 유용하고 모두에게 편리하다는 것이다.
송경아는 이러한 어처구니없지만 우리 사회에서 버젓이 요구되는 덕목들을 재미있는 설정으로 비꼬고 있다. 더구나 김의관의 다음 행실은 이러한 비꼼의 최종적 목표를 확장시킨다. 모자를 쓴다는 기발한 발상으로 대인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한 김의관이었지만, 이번에는 내면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인관계의 실패에 직면하게 된다.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로 다가왔고, 그는 팔을 내저으며 그 손을 세차게 쳐냈다. 평소에는 그녀의 그런 진지한 사고방식이 참 좋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양손은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 관자놀이 위를 꽉 누르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장난하듯이 벗겨내려고 시도하다가 그가 너무나 진지하게 그 모자를 눌러 쓰고 있자 나중에 그만 화가 나고 말았다.

서로에게 솔직하기를 원하는 여자친구로 인해, 김의관은 투명한 내면을 드러내 보여야 할 난처한 상황에 빠져든다. 이제 상황은 역전된다. 타인들이 김의관에게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요구 자체는 가식적인 측면이 있고, 진정한 마음의 교류로 생각하기 힘든 측면도 있다. 그러나 부족한 상호이해일망정,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수 없는 김의관의 처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먼저 그의 처지는, 타인들의 삶 속으로 편입되기를 원했지만 타인을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일 준비는 하지 못했음을 실토한 꼴이다. 투명한 내면을 이해받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이를 속여가면서까지 억지 관계를 맺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는 김의관이 특별히 선하지는 않았지만, 순수한 존재에 가까웠다는 앞의 전제를 뒤집어 보게 한다. 즉, 김의관은 자신의 투명한 내면을 감추고 적응하기 위해서 적당한 가식과 위선을 체득하게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순수한 존재로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일 여기서 김의관이 모자를 벗는다면, 자신의 투명한 내면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투명한 내면에 감추어진 사악하고도 이기적인 욕망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는 김의관이 특수한 능력을 지닌 존재이지만, 이 세상의 보편적인 인간과 크게 차별되지 않는 이유이다.
송경아는 〈내면의 투명인간〉을 창조해서, 현실 속 인간들의 내면을 투시한다. 아니 그 내면을 투시하여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각각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종용한다. 이러한 문학적 전언은 상당히 유효해 보인다. 고답적인 자세로 독자의 도덕적 수양을 종용하지 않기에 더욱 유효하다. 김영하가 사랑하면 사라진다는 점장이의 말과 사라지는 인간을 통해 독자들에게 재미있게 그 답을 찾도록 하였듯이, 송경아도 황당한 모티프를 교차시켜 웬만해서는 작가의 전언에 그 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관객들에게도 자발적으로 숨은 의미를 찾도록 해준다. 특히 잠든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사회적 관계와 본연의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아니 이러한 삶의 태도에 대해 초연할 수 있는 존재를 꿈꾸어 보는 대목은 꽤 음미해 볼 만하다.

Ⅴ. 헛된 힘의 어지러움 : 백민석의 『목화밭 엽기전』

백민석은 「목화밭」과 「파산세일」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하더니, 나중에 이를 묶어 『목화밭 엽기전』이라는 장편소설을 출간했다. 결론부터 말해서, 이러한 장편화는 문학적 실패에 해당한다. 문학적 진지함은 점차 사라져갔고, 초인에 대한 꿈은 한낱 흥미거리로 전락했다. 더구나 소설의 중요한 요소인 개연성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초인의 상상력은 황당한 이야기를 채택함으로써 겨냥하는 소설적 전언의 진중함으로 그 진위가 판별될 수 있는데, 백민석은 장편화의 어느 지점에서 이 점을 상실해버린다.
장편화되기 이전에 발표된 단편소설 「목화밭」만 따로 떼어놓고 판단하면, 여러모로 주목될만한 요소가 상당했다. 이 소설은 백민석의 독특한 그로테스크함이 살아있으면서도, 상당한 의미 생산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창림이라는 평범한 일상인이 발산하는 폭력적 성향은,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충동적 공격 심리에 대한 예리한 감식안에 해당한다. 화자는 대학 강사라는 일정한 지위와 인텔리로서의 학식을 갖춘 자이면서도 일반적으로 존중되는 〈휴머니즘〉을 외면하고 삼촌으로 대변되는 사회의 강압적 면모에 굴복해 간다. 여기서 현대 사회의 개인이 담지할 수밖에 없는 비인간적인 혹은 초윤리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엿보기는 야만적인 문명에 대한 비판으로도 일정 부분 기능한다.
특히 일상 밑에 가라앉아 있던 〈수컷 냄새〉가 강력하게 발산되며 일구어내는 이질적이고도 기괴한 효과는,  백민석의 다른 소설인 《헤이, 우리 소풍 간다》의 만화적 상상력과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의 환상적 요소가 구체적인 현실을 토양으로 적절하게 발현된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현실에 착지하지 못하고 귀퉁이를 빌어서 그 실체를 유난스럽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백민석의 상상력이, 현실의 토대위에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한결 차분해진 느낌이었다.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는데도, 지하실 내부의 풍경을 옮겨오지 않은 점도 칭찬할만했다. 포르노그라피를 찍는 과정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독자들의 상상에 맡김으로써,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형태로 제시되곤 하던 섹스의 현장은 저절로 소멸하고 만다. 이는 소설적 맥락을 전혀 훼손하지 않고도, 작가의 전언을 충분히 전달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절제로 간주될 수 있다.
「파산 세일」은 「목화밭」의 후편에 해당하는데, 이 작품부터 실패의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목화밭」에서 돋보이는 수컷 냄새의 문학적 의미가 퇴색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현실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내면의 공격적인 취향이 어우러져 인간의 본질을 탐색했다는 평가가 가능했던 「목화밭」의 수컷 냄새는, 「파산 세일」에 접어들면서 편향적이고 대책없는 본능으로 기울어버린 아쉬움을 남겼다. 아내를 팔겠다는 기발한 착상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납득할만한 이유를 이끌어내지 못한 구조상의 결함도 내재했다. 목화밭을 강조하는 한창림의 발언도 초점을 잃고 부유했다. 전작에서는 〈목화밭〉이 현재 사회에 대한 설득력있는 전복과 야유의 공간으로 기능했던 데에 비해, 「파산 세일」에서는 도착적인 증세를 보이는 한창림의 중얼거림 속의 공간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서울랜드라는 비일상적 장소로 인해 바깥 세상과 차단된 공간이, 다시 정체 불명의 엘리스와 만화 주인공들에 의해 점령당할 우려를 남긴 셈이다.
「파산세일」에서 이미 목화밭 연작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했다. 〈수컷냄새〉는 70년대생이 어릴적 열광했던 〈헐크〉의 교묘한 연장에 불과했다. 내면의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면 터져나오는 또하나의 분풀이용 〈나〉에 불과했다. 이러한 또다른 〈나〉가 태어나고 활동하고 이를 보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 자체를 상실했다. 이는 필자가 언젠가 지적한대로, 〈일탈적이고 엽기적〉인 것에 불과하다. 아무리 〈엽기〉를 긍정하는 시대적 풍조를 참조한다 해도, 목적없는 엽기란 그다지 신뢰받을 수 없는 것이다. 백민석에게는 초인적 능력을 내장한 인간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인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학적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의 문학은 시시한 대중소설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점은 백민석이 극복해야 할 하나의 과제이다. 섹스가 소설을 읽게 만들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의미있게 만들지 못하는 것처럼, 초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 자체로 그러한 인간이 문학에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님을.

Ⅵ. 무거운 삶, 가벼운 초능력 : 전경린의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

전경린의 소설은 대체적으로 하나의 구도를 따르고 있다. 가정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여자와 이 여자가 단행하는 그로테스크한 가출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소설은 떠나는 여자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경우가 많으며, 그녀의 소설은 상당한 면적을 가출한 여자의 심리를 이해시키고 정당화시키는 것에 할애하고 있다. 그래서 여성편향적인 성향을 감추지 못한다.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은 두 가지 점에서 약간의 변주가 일어나는 작품이다. 하나는 떠나는 여자가 아니라 이미 떠나 세상을 떠돌고 있는 여자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 여자가 이전까지의 신분과는 달리 특수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변주는 여자가 〈희생이 전제된 사랑〉을 시도한다는 결말과 어울려 무난하게 처리된다. 두 번째 변주는 이 소설에서 독특한 효과를 파생시킨다.

최모는 여자의 어깨를 만져주고 싶었습니다. 그는 공중에 뜨는 사람의 고통을 알 수 있으니까요. 삶의 편에서 볼 때는 꼽추나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그건 일종의 장애입니다. 공중에 뜨는 사람은 사람의 길을 알 수가 없어요. 걸음걸이도 서툽니다. 그는 허공에 유폐된 자아를 지닌 자이며 세상으로부터 중절된 자인 것입니다.

〈메리고라운드 서커스 여인〉은 공중에 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양력은 하나의 〈장애〉로 취급된다. 삶의 여러 모퉁이에서 못다한 욕구를 실현시키거나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능력이 아니라, 길을 잃고 걸음걸이를 서툴게 만드는 귀찮은 습성일 뿐이다. 더구나 이 여인이 직업으로 삼아야 할 외줄타기에서는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물에 추를 달 듯 신체 각 부분에 존재의 중량을 정교하게 분배〉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 여인의 경우는 〈공중에 뜨는 힘을 통제〉해야 하는 부담마저 안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인에게 전경린은 사망선고와 같은 작가적 판결을 첨부한다. 공중에 뜬다는 것은 지상에 발딛고 살기 어렵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이것의 숨겨진 의미를 채굴하면, 지상의 삶으로부터 유폐될 수밖에 없으며 결국 정상적인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위치만을 보장받을 뿐이라는 것이다. 전경린은 공중에 뜨는 초인의 초상을 그려내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그 안에 지상에서 추방된 현실인의 밑그림을 배치한 것이다. 〈외줄타기〉같은 〈삶의 난처한 처지〉에서 〈공중 부양력〉에 비견될 수 있는 〈참기 어려운 존재의 상실감〉은 해만 끼칠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앞에서 전경린이 여러 소설에서 삶의 터전에서 상처를 입고 떠나는 여자들을 그리는 작업에 몰두해 왔다고 전제했었다. 그녀의 여인들은 남편으로부터, 매너리즘과 같은 일상의 반복으로부터, 허물어진 가정으로부터, 그리고 태생의 신비한 부름으로부터, 자신들의 가출을 인정받으려 했지만, 〈메리고라운드 써커스 여인〉은 가벼워진 중량감으로부터 이러한 인정을 이끌어내려 한다. 삶은 무거운 물과 같아서 자신의 몸을 가볍게 하지 않으면 익사하고 말지만, 너무 가벼워진 체중 덕분에 부유하는 삶만을 허락받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중부양력〉의 힘은 문학적인 근거지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공중부양력〉을 갖고도 영어의 몸이 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문학 속의 인물이 되는 이유도 찾아질 수 있다. 그만큼 전경린에게 삶은 무거운 것이었다.

Ⅶ. 욕망의 색다른 풍경 : 이기호의 「머리칼 전언」

이기호의 「머리칼 전언」은 초인의 계보에 소속시킬 수 있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그 초인은 〈지종〉이라는 대처승이 노후를 대비하여 고아원에서 데리고 온 여자아이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요사한 힘을 드러내는 여자의 머리칼이다. 지종은 탐스러운 머리칼에 반해 여자를 지목했지만, 곧 머리칼의 요사함을 감지하고 자르려 한다. 머리칼은 살아있는 생명체인 양 지종의 손길을 피하고 요사스러운 몸짓으로 지종의 성욕을 자극한다. 지종은 이 사실을 아내에게 말하지만, 아내는 이를 믿지 않는다. 여자를 내쫓으려는 지종에 반대하고 아이를 보호한다. 아이는 머리칼에 커다란 무쇠머리핀을 한 채 자라난다. 고등학교 국사 교사인 남자의 눈에 여자아이가 띈 것은, 20세 정도가 되었을 때이다. 용인에 있는 별장에 종종 들르곤 했던 남자는 기묘한 머리핀을 꼽은 여자아이에게, 새로운 머리핀을 선물하려고 마음먹었다가 머리칼에 숨겨진 비밀을 엿본다. 머리칼이 일으킨 강렬한 성욕을 참지 못하고 여자와 관계를 맺은 남자는, 여자를 서울로 데려와 모종의 장소에 숨겨둔다. 낮에는 가정과 직장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다가, 밤에는 여자와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지속시켜 나간다. 여자의 머리칼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반응을 보이고, 특히 남자에 공포스러울 정도로 집착한다. 남자 또한 여자에 대한 살의와 폭력성을 드러내게 되고, 이러한 공격적 성향은 아내에게까지 향한다. 아내가 남자의 이중생활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고, 남자가 공격적인 성향을 스스로 인지하게 되면서, 남자는 여자를 버릴 방도를 모색한다.
여자의 머리칼은 독립된 생명체에 가깝다.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고 또 타인이나 대상을 소유할 수 있다. 특히 남자들에게 강력한 성욕을 불러일으켜 성적 관계를 유도하고, 그 관계를 통해 일종의 자양분을 얻는 것 같기도 하다. 더구나 분노와 같은 공격적 감정을 표출하여, 심할 경우에는 상대를 살해하기도 한다. 이처럼 머리칼은 요괴와 같은 생명체이고, 이러한 머리칼을 지닌 여자는 마녀나 요괴인간과 같은 저주받은 돌연변이인 셈이다.
이기호는 이러한 돌연변이를 등장시켜 잠재된 욕망을 펼쳐 보이려 했던 것 같다. 여자의 머리칼을 잠재우기 위해서 무쇠머리핀을 채우는 행위는, 가부장권과 남성중심 체제가 부가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들을 연상시킨다. 여성은 거의 모든 시대에 남성에 비해 약자의 위치에 처해 있었다. 심할 경우에는 소유물이나 노예처럼 취급된 시대도 있었다. 개명한 시대라 해도 남성이상의 권력을 누린 경우는 극히 드물다. 현대 여성들의 권익신장과 사회참여가 향상되었다고는 하지만 수직적인 위계차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러한 사회·문화·역사적 상황들을 참고했을 때, 머리칼은 억압된 여성의 욕망에, 무쇠핀은 이를 종용하는 남성중심 이데올로기에, 그리고 머리핀을 채운 여자는 순종하는 여성상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머리칼의 구속에서 풀려난 여자가 광포해지는 까닭이 어느 정도 설명된다.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해방되면 본래의 속성을 되찾으려 할 것이고, 이러한 해방의 기운은 남성에게 무의식적인 공포로 인지될 공산이 크다. 다시 말해서 잠재적 압제자였던 남성의 무의식적인 공포가, 여자의 광포한 행위를 인지시킨 것이다. 남성들은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보다 확고하게 조성할 수 있다고 믿어왔는데, 만일 그 믿음이 무너져 여성이 억압에서 풀려날 경우 어떠한 위협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보여주는 것이 이 작품인 셈이다. 이러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창작 의도는 비교적 선명하게 여자의 머리칼에 투영되었으며, 그래서 「머리칼 전언」은 허무맹랑한 이야기이거나 단순한 흥미 거리로 치부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창작의도를 높이 산다고 해도, 문제점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는 간과하기 힘든 몇 가지 중대한 결함이 있고, 이러한 결함이 작가의 전언을 산만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아울러 지적해야 한다. 이 소설에 나타나는 일차적 결함은, 대처승의 아내가 별다른 이유없이 여자아이의 머리칼에 무쇠핀을 매다는 데에 있다. 대처승의 아내의 성격과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모호하다. 플롯의 표면상에서 따져 보아도 아내는 여자아이를 좋아했다고만 말하지, 왜 좋아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우회해서 그 이유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것을 끌어들일 수는 있을 듯하다.

여자아이는 절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갔다. 새벽 다섯 시에 깨워도 칭얼댐이 없었다. 누가 시킨 적 없어도 그 작고 마디 얇은 손가락으로 물을 길어 오기도 했으며, 아주 조금씩 먹었고 목소리도 작았다. 다섯 살이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몸가짐이 단정했다.

그러나 아이는 무쇠핀에 의해 머리칼에 족쇄가 채워진 이후에 다음과 같이 변모한다.

아이는 눈에 띄게 그 총명함을 잃어갔고, 게을러졌고, 먹을 것을 탐하게 되었다. 시키는 일만 했고, 그 일들도 실수투성이로 채워졌다. 지종은 늦은 밤, 부엌에서 남은 밥을 게걸스럽게 먹고있는 아이를 자주 목격했다. 아이의 머리칼은 차츰 까칠해졌고 서캐가 내려앉았다.

머리칼의 유혹을 믿지 않는 아내가 족쇄를 채운 행위도 이해되기 어렵지만, 족쇄를 채운 이후에 수양딸로서의 매력마저 상실해가는 아이의 족쇄를 벗기지 않는 속셈도 이해하기 힘들다. 현실적 쓸모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은 아내라 할지라도, 쓸모와 매력을 나날이 상실해가는 여자아이를 관대하게만 지켜보았다는 설정은 어색하다. 여기서 우리는 여자아이의 욕망이 폐쇄되는 현장을 주변인들의 합리적인 행동 양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여자아이는 어머니에 의해 주체적인 삶의 방향을 상실하는 존재이다. 부지런하고 총명하던 여자는 어머니의 폐쇄적 손길에 갇혀, 주체성을 상실한 여자 즉 게으르고 멍청한 여자로 변모된다. 어머니는 여성을 수동적 존재로 만들어내는 일차적 억압을 뜻한다. 이 억압은 쉽게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절대적이다. 그 이후에 무쇠핀을 채우려는 모든 시도가 힘겹게 치뤄지지만, 어머니가 채우는 무쇠핀만은 아주 간단히 실행되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렇게 해석의 가닥을 잡으면, 어머니가 죽을 때 머리칼들이 일제히 솟구친 것은 억압에서의 해방되는 환희였음을 알게 된다.
해방감을 완성시키는 자가, 남성이다(남자가 그녀의 머리핀을 제거한다). 그렇다면 남성 중심의 사회가 가하는 억압을 보여주기 위해서 머리칼과 무쇠핀을 필요로 했을 것이라는 앞의 해석적 가정과 어딘지 어울리지 않게 된다. 어머니의 모호한 처리로 인해, 여성적 삶을 방해하는 적대자로서의 남성이 사라지고 도리어 억압된 여성의 정체성을 해방시키는 남성이 오히려 부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소설 어디에서도 남성에 대한 긍정적인 역할 부여는 찾기 힘들다. 따라서 우리는 자그마한 해석상의 혼란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이기호가 작가의 전언을 전달하기에 급급해서, 인물의 정상적인 처리를 도외시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처승 내외와 여자아이의 관계를 다룬 전반부를,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다룬 후반부와 유기적으로 연관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책의 결과는 작품의 마지막에서 다시 나타난다. 지하철 역사로 여자를 유기하려 한 남자는, 오히려 여자로부터 버림받는 신세가 된다. 여자는 사람들의 인파 속에서 스님의 행색을 한 늙은이를 따라가기에 바쁘고, 남자는 관심 권외로 밀려난다. 이러한 설정은 일견 그럴 듯 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그 숨은 뜻이 혼란스러울 뿐만 아니라 결론으로서는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여자는 머리칼을 가두느냐 가두지 않느냐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단계에까지 나아간 바 있다. 그렇다면 여자가 머리칼로 인해 닥쳐온 시련과 고통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는 갖추어진 셈이다. 그런데 스님을 무작정 따라 나서는 행위에는, 시련과 고통이라는 정신적 성숙의 기미가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막연한 과거 회귀의 욕구만 보인다. 여자는 끝까지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머리칼이 욕망이라면, 그녀는 욕망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제어할 수 없는 덜 성장한 아이일 따름이다.
소설이 이러한 여자아이의 마지막 모습에 머물고 만다면, 무언가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여성들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억눌린 모습으로만 남성의 선택에 지배당할 뿐이라는 결론만을 남겨둘 뿐이다. 이러한 질문은 불만스럽다. 더구나 낯설다고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많은 소설에서 이러한 결론을 보았고, 그다지 폭넓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정리하면 몇 가지 사소한 설정들이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져, 작품 내의 의미망이 상당히 모호해졌다. 이로 인해 작가가 애초에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창작 의도와 소설 내부의 실제 전언 사이에 어긋남과 부조화가 생겨났다. 이 점은 대단히 아쉽다.
비록 그렇더라도 여러 가지 주변 정황으로 판단하건데, 신인인 이기호의 소설적 미래는 대단히 밝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대단히 이색적인 소재를 엮어 흥미로운 줄거리를 엮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아직은 미흡하지만 상당한 문제의식을 삼투시키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내가 비판한 바는, 이러한 성과에 대한 긍정적 동의를 한 상태에서 부족한 부분을 꼬집은 것이었지, 처음부터 이러한 성과 자체를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의 머리칼이 삼손의 머리칼을 연상시킬 수 있다면, 여자의 마지막 모습에서 삼손의 희생을 혹은 비참한 파국을 볼 수 있기를 기원했던 나의 바램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기호는 90년대의 작가들이 단초를 보인 초인의 상상력에 근접한, 2000년대의 뛰어난 후기지수인 것만은 틀림없다. 따라서 그에게는 초인의 상상력을 이어갈 임무도 어느 정도 주어진다.

Ⅷ. 다시, 잃어버린 꿈을 찾기 위해

90년대 이후 소설은 개인화된 일상의 기록에 의존해 명맥을 유지해 왔다. 이는 평론가 이희중의 말을 빌어, 〈작은 자아들의 난중일기〉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80년대만 해도 우리 문학은 〈사사로운 자아들의 개체적 성향을 유보토록 하는 이른바 총체성 또는 큰 자아의 대한 신념과 합의에 기초〉할 수 있었고, 또 그렇게 해왔다. 그러나 90년대와의 접경을 넘어서면서 이러한 경향은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그리고 이내 그 자리는 〈작은 자아〉들의 반란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문학은 적진 속에 깊숙이 들어와버린 작은 자아들의 〈난중일기〉를 닮게 된다. 이 난중일기에 적힌 주요한 전략 목표이자 타도 대상은 일상이다.
일상은 〈반복〉과 〈권태〉로 설명된다. 〈반복〉되는 삶의 패턴이 일상의 층위를 가리킨다면, 이렇게 규정된 일상에 대한 생활인의 감정적 반응이 〈권태〉에 해당한다. 일상인들은 즐겨, 권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복적인 일상에 변화를 가미하려 한다. 여행과 같은 모범적 일탈은 이러한 변화를 순수하게 염원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여행이 결국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변화와 폭과 방향은 그다지 강력하지도 지속적이지도 못한 것 같다. 어느새 일탈은, 반복적 일상의 한 층위로 편입되고 있다. 그 만큼 일상의 힘은 강력하다.
일상이라는 강력한 힘에 저항하기 위해서, 1990년대 일군의 작가들은 새로운 방어 전략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신변잡기적 요소와 내면의 섬세한 무늬를 강조하는 작업만으로는 새로운 시대의 문학적 요구에 적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결과 그들은 일상을 근본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다. 죽지 않는 인간, 보이지 않는 인간, 하늘을 부유하는 인간, 무한한 잠재능력을 발휘하는 인간, 자신의 마음을 나누어주는 인간, 요사한 또다른 존재를 거느린 인간. 신화시대에 태어났다면 이들은 영웅이나 현자나 성인이 되었어야 마땅한 존재들이다. 적어도 마녀나 요괴로 몰려 각별한 주목 정도는 충분히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태어난 시기는 불행히도 1990년대와 2000년대이다. 이들은 생존의 고통을 강요받아야 하고, 각박한 인간의 인심에 아파해야 한다. 영원히 죽지 않고 보이지 않고 날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나누어주는 모든 행위는, 거추장스럽기 이를 데 없다. 적어도 일상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일상의 한 영역만을 붙잡고 보이지 않는 세계 대전을 치루고 있는 〈작은 자아〉들에게는 특별한 인류의 출현에 그다지 신경을 쓸 틈이 없다. 숭앙도, 지지도, 심지어는 비판이나 적개심도 없는 상태에서 출현한 신 인류에게는 이제 자신의 능력은 일상인의 평범한 능력만큼도 못한 것이 된다. 김영하의 투명인간은 하루 밥을 구걸해야만 하는 신세이며, 전경린의 부양하는 여자는 동물원 우리에 갇힐 신세이다. 삼손의 힘과 메두사의 저주를 동시에 갖춘 머리칼을 지닌 여자아이도, 일상에서 추방당할 뿐이다. 소설의 결말은 유보되었지만, 그녀의 머리칼도 조만간 힘을 잃고 말 것이다. 그 만큼 이 세계는 처참한 전쟁터이다. 그리고 일상이라는 전쟁터를 벗어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던 작가들은, 다시 한 번 이 세계의 위력을 절감한다.
이 작가들의 노력은 근본적으로 헛된 것인가. 아니다. 문학은 일반적으로 현실의 모사로 규정되지만, 그 모사는 사진처럼 똑같이 행해지는 정밀묘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간략한 특징만을 잡아 그리는 크로키도 있을 수 있고, 특징을 강조하기 위해 전체를 일그러뜨리는 케리커쳐도 있을 수 있으며, 아예 형체와 구조를 해체하여 새로운 질서로 재편하는 추상화도 있을 수 있다. 신인류의 상상력은 하이퍼리얼리즘 쯤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전혀 엉뚱한 것에 기대어 친근한 것들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돕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 차원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를 등장시켰지만, 그들 역시 일상인과 마찬가지로 고민하고 예속되는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일상의 힘을 다시 한번 체감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그리고 똑같은 일상을 동어반복적으로 보여주는 매널리즘에서 소설이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소재적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며 주제적 변주라는 측면에서 무척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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