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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초점/가족소설의 공과(功過)/하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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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가족소설의 공과(功過)
-조건상, {어머니의 초상}(새미, 2001)
하상일
1. 가족주의의 확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가족의 해체 또는 가족의 위기가 심각하게 거론되고 있다. 부모와 자식간의 근원적인 윤리의식이 무너진 것은 이미 놀라운 사실이 아니고, 부부사이의 관계 역시 화합과 조화보다는 불화와 일탈의 연속으로 일그러진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는 우리 사회가 1960년대 이후 본격적인 근대화를 추구하면서 가족제도 역시 서구적 근대모델로의 급격한 변화를 이룬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한국에서의 전통적 가족유형이었던 직계가족과 방계가족은 감소하고, 부부가족 내지는 핵가족이 급격히 증가하는 제도적 변화가 가치체계의 변화와 혼란을 아울러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제도의 변화에 따라 90년대 우리 소설의 양상은 전통적인 가족모델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심각한 변화를 보였다. 즉 아버지와 자식간의 수직적 모델이 아닌 가족구성원들간의 수평적 관계형성에 초점이 모아지면서 부성(父性)의 상실 내지는 부재, 여성성의 강화 등 새로운 문제의식이 두드러진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 삶과 현실을 모델로 하여 그것이 의미하는 이데올로기를 상징적으로 풀어나가는 소설세계가 지금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가족의 변화를 전혀 도외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아의 정체성 찾기라는 탈근대적 명제를 모토로 삼아 더욱 개인의식에만 집착함으로써 가족의 위기 혹은 해체를 초래하거나 그것을 정당화시킨다면 과연 소설의 가치, 나아가 문학의 가치를 무엇이라고 해명할 수 있을까? 다소 경직된 관점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의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문제를 정확히 진단하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토론의 장을 열어주는 것이 소설의 운명이라면, <집>을 현실의 굴레로만 바라보거나 <아버지>를 내 안의 적으로만 규정해버리는 극단적 태도 앞에서 우리는 잠시 머뭇거릴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 사회의 가족은 근대화의 여정 속에서 끊임없이 축소되고 파편화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문제는 가족이 축소되면서 오히려 가족 내부의 구속력은 더욱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가족에 연루되어 있던 여러 가지 사회적 기능들이 포기되는 대신, 가족 성원들이 서로의 정신적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훨씬 강화되었다. 이웃도 없고 친족과도 멀어진 사람들이 지치고 메마른 영혼을 위로 받을 수 있는 공간은 가족밖에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가족의 축소나 혹은 확대 같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근대적 가족모델이 동반한 <가족주의의 확산>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가족의 해체를 넘어서는 진정한 가족주의의 실현이라는 과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조건상의 가족소설 {어머니의 초상}은 오늘날 가족을 둘러싼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길잡이가 된다는 점에서 현재적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불화와 대립을 넘어선 가족공동체를 지향하는 그의 소설은 다분히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관습의 굴레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듯하다. 이는 그의 소설만이 지닌 문제라기보다는 우리 가족소설 전반이 지닌 전통사회의 봉건적 관습에 입각한 계몽적 성격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이 글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을 치유하는 기본적 모델로서의 가족소설의 공(功), 그리고 그것들이 여전히 전통적 보수주의 관점의 계몽적 서사를 드러내는 과(過)를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논의하고자 한다.
2. 가족소설의 공과(功過)
조건상의 {어머니의 초상}은 전통적 가족모델의 휴머니즘적 성격을 재현하는 따뜻한 인간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소설집의 전체는 어머니, 아버지, 아내, 아들 등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이해와 그들의 따뜻한 가족주의의 실현을 주된 모티프로 삼고 있다. 작가의 직접적 고백에 의하면, [어머니의 초상], [20년 뒤], [눈 뜬 짐승 하나 가슴속에 키우며], [아버지의 초상] 등 수록된 작품 대부분이 "내 육친의 생애 속에서 찾아낸 진솔한 삶의 형상이거나, 젊은 날의 내 추억 속을 배회하고 있는 주변의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놓은 작품들"이기 때문에 "평범한 일상 속의 정감이 훈훈한 감동으로 전해지길 바랄 뿐"([작가의 말])이라고 한다. 이는 그의 소설의 지향점이 가족 내의 갈등이나 대립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오히려 가족간의 훈훈한 인정의 세계를 찾아내려는 데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조건상의 소설은 오늘날 가족문제를 부각시킨 대부분의 소설과는 그 방향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우선 표제작인 [어머니의 초상]은 평생 자식을 위해 헌신하다 이제 생을 하직하기에 앞서 주변의 삶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자식의 안전을 위해 "한 움큼의 소금을 승용차에 뿌리는"(p.11) 어머니의 마음은 한결같다. 오로지 자식의 편안함과 성공을 바랄 뿐, 그 자식에게 결코 짐이 되거나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백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육신의 병과 죽음마저 자식에게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앞에서는 절로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마음과 정성이 바로 지독한 가난과 신산(辛酸)한 시대를 지나오면서 오로지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온 우리네 '어머니의 초상'인 것이다.
당신의 죽음에 대한 관심은 요 몇 년 사이에 부쩍 고조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신 주변의 노인들이 치매나 중풍으로 몇 년씩 자리보전을 하며 자식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부터였다.
"서로 못할 짓이다. 당자도 괴롭겄지만 수발을 드는 자식들의 맘 고생이야 오죽 허겄어. 잘 허네 못 허네 말만 듣게 되고 …… 그래서 옛날에도 장병에 효자 없다구 혔겄지. 나는 정말 그러지 말아야 헐텐데 ……"(p.13)
육신의 병과 죽음 뒤의 자리를 걱정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한다. "날씨도 사납지 않아서 장사 치르기에도 좋고, 자식들의 직장이나 개인적 사업에도 별 지장이 없는 때, 병들거나 고통받지 않고 그저 자는 듯이 눈감고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다면 더 이상의 바람이 없겠다"(p.14)는 어머니의 독백은, 자식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어머니의 절대적 사랑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자식들은 이런 어머니의 마음을 알고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 망연자실할 뿐이다. 그저 마음속으로 오래 사시길 기원하거나 어머니 뜻대로 편안히 돌아가시길 바라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등에 업고 아버지 산소를 찾아간 주인공은 "좋은 때 어머니를 불러 가십시오"(p.19)라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육신의 늙음과 죽음은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생명의 연장이 실현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직 그것들은 평범한 인간이 넘어서기에는 너무 힘든 과제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노인문제는 아주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이러한 사회적 논의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오늘날 농촌의 공동화(空洞化)는 "예순 다섯 살 된 내가 이 마을에서는 제일 어린애"(p.15)라는 상황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혼자서 고향의 종가를 지키며 외롭게 살아가고 있는 미수(米壽)의 어머니, 아무리 자식들이 함께 도시로 떠나자고 말씀드려도 장구한 세월 동안 핏줄로 이어져 내려온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어머니, 이런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근대의식이 휩쓸고 간 가족공동체의 상실과 세대적 단절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가족들은 모두 제 살 길을 찾아 떠나고 홀로 고향을 지키며 생을 정리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부끄러운 초상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고향이 물에 잠기어 그 형체가 온전히 사라지듯 어머니의 삶은 그렇게 세월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있는 것이다.
멀리 산자락 밑으로 을씨년스럽게 초라해 보이는 마을의 모습이 가물가물 눈에 들어오더니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뿌옇게 흐려진 시야 저편에, 넘실대는 저수지의 물이 어머니의 고향마을을 뒤덮고 산의 중턱까지 차 오르는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결국 어머니는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실 모양이었다.
그 동안 어머니는 이 세상에 살았던 당신의 흔적을 불로 태워 지워 나가더니, 태어난 생가마저 수몰되어 이 세상에서 흔적을 지우며 사라질 운명이 아닌가.(p.38)
이 작품은 고향마을이 물에 잠기듯 이 세상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돌아가시길 소망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잃고 개체화되어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반성하게 한다. 그 반성 속에는 '따뜻한 인간주의'에 대한 동경과 '진정한 사랑'에 대한 믿음이 담겨져 있다. 이는 조건상의 소설이 지향하는 궁극적 세계관임에 틀림없다. 임규찬의 지적대로, [어머니의 초상]은 "작품집 전체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마치 수필을 읽는 것 같은 편안한 문장하며, 특별한 표현기법이나 문학적 장치를 구사하지 않고, 물 흐르듯 실제적 삶의 형태로 진솔하게 펼쳐내는, 인공적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문학적 힘이 어느 만큼 큰 힘을 가질 수 있는 가를 느끼게"(p.276)한다. 조건상의 소설이 지닌 강점은 바로 이러한 자연스러움에 있는 듯하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소재들로부터 현재의 삶을 반성하게 하고, 거창한 구호를 드러내거나 숨기지 않더라도 소설적 진실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 그의 소설의 미덕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이 소설의 효용적 가치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계몽적 의도를 짙게 드러냄으로써 소설 본래의 미학성을 갖추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가족주의의 강조가 자칫 관습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함으로써 전통적 가족모델을 옹호하는데 급급한 보수적 시각으로 치우쳐 버릴 가능성도 반드시 경계해야만 한다. 오늘날 가족소설이 지닌 과(過)는 바로 이러한 편향된 시각에서부터 비롯된다.
가족의 문제는 대개 윤리적인 관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굳이 삼강오륜의 전통적 윤리의식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가족의 일상은 엄격한 위계질서와 봉건적 관습의 굴레 속에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다분히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족의 제도적 특성은 현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굴레로 작용하기까지 한다. 특히 유교적 관습이 중요한 도덕률로 작용해온 우리 나라는 점점 핵가족화 되는 사회의 변화를 쉽게 용납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전통적 미덕으로 환원되는 봉건적 관습과 젊은 세대에 의한 새로운 가치관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가족소설은 대개 이러한 균열을 찾아내어 그 해결점을 찾아나가는 것을 주된 줄거리로 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이 해결점 찾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 해결점이란 것이 너무도 명명백백한 해답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가족소설은 대부분 가족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고 가족간의 화합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착되어 버린다. 그 과정에서 대체로 갈등의 원인과 대립의 구조적 문제는 쉽게 희석되어 버림으로써 언제나 유교적 교훈으로서의 계몽성만 남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서 그 때의 아버지를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는 [아버지의 초상]은, 아버지와 아들의 세대의식의 차이와 갈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뭇 문제적인 작품으로 읽힌다. 결코 세상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뜻대로 살기를 고집하신 아버지의 모습은 다분히 봉건적인 우리네 아버지의 전형에 다름 아니다. 더군다나 교사인 아버지가 맡은 과목이 "반공도덕"이었다는 점은 전통성과 보수성을 지닌 아버지의 전형을 창출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아버님, 그건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의 약속위반, 즉 배신이라고 할 수 있잖습니까. 그러나 상대가 일본인 학생이었다는 데서 오는 경쟁의식 때문에 더욱 시험지를 보여주기 싫었었다는 아버님의 말씀은 제게도 충분히 수긍은 갑니다. 그러나 어쨌든 썩 유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꼬장꼬장 따지기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성격에 걸맞는 호쾌한 배신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p.131)
인용글은 지난날 일본인 학생에게 연필을 빌어 쓰는 대신 시험지를 보여주기로 한 약속을 과감하게 어겨버린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 아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몽당연필 하나 제대로 지니지 못한 채 살았던 지독한 가난에서 비롯된 이야기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냈다는 점을 아들에게 말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너무도 교훈적이고 계몽적이다. 아니 교훈과 계몽,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것을 너무 쉽게 노출시켜버리는 점이 더더욱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이미 아들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이루어진 소설 형식에서부터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지금은 철이 든 아들이 그 때의 아버지를 회고하면서 보내는 편지형식이란 으레 이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겠다는 아들의 반성과 아버지와 아들의 육친으로서의 화해로 귀결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건 육이오 때였습니다. 저는 좀 지각이 덜 트였던 국민학교 이 학년 때였으므로 무슨 주의(主義)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것들을 생판 몰랐습니다만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라느니 토지의 무상분배라느니 하는 생경한 용어들 앞에서 아버님은 무척이나 흥분해서 노기를 띠며 화를 벌컥벌컥 내셨습니다.(중략)
이놈의 세상이 얼마나 가나 보자, 꼭 뒤집어질 텐데……. 그리고는 제가 어쩌다가 소년단 모임에서 배운 '장백산 줄기줄기'니 '김일성 장군' 어쩌구 하는 군가풍의 노래를 입에 올리면 제 귀청이 찢어져라고 소리를 빽 질러서 당장에 제지시켰습니다. 그 때 아버님의 고함소리가 어찌나 매섭고 날카로왔는지 저는 그만 오줌을 질금 싸버리고 사지가 굳어서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버리곤 했었습니다.(pp.131∼132)
또한 인용 부분에서처럼 공산주의 세력들을 대할 때 "한 마리의 발가벗은 산짐승"이 되어버리는 완고한 반공주의자인 아버지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일본인 기무라 교장과의 술좌석에서의 자존심 대결 등은 이미 아버지의 고집이 선(善)의 가치가 될 수밖에 없는 너무도 명백한 이분법적 시각에 갇혀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아버지에 대한 묘사는 식민지와 한국전쟁, 그리고 이후의 군사독재 시절을 살아온 우리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모습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을 무조건적으로 선망하거나 이해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한 태도는 반드시 오늘날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재정립되는 개연성을 갖추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미학적·구조적 요건인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가족소설은 이러한 미학적인 장치에 둔감하거나 가족의 계몽성에 갇혀 쉽게 중심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는 가족간의 윤리를 강조하는 주제의식을 지나치게 의식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때문에 가족소설은 교훈성과 계몽성의 규격화된 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그 과(過)를 더욱 노골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3. 가족소설의 새로운 지향
이상에서 조건상의 소설집 {어머니의 초상}을 두 편의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논의의 초점을 가족소설의 장르적 문제에 두다 보니 서평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하지 못한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필자는 작가가 30년의 긴 세월 동안 천착한 주제가 일관되게 '가족'이란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다소 도식적이라는 비난을 듣게 되더라도 가족소설의 장단점을 통해 작품을 들여다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우리 사회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닌 상징성, 즉 희생과 헌신으로서의 어머니상(像)과 가부장적 권위에 의지하는 아버지상(像)이 가족소설의 공과(功過)에 그대로 연결되고 말았다. 이는 결코 의도된 결과는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가 그 동안 우리 사회의 가족제도가 이루어온 가족구성원의 전형적인 역할과 무관할 수는 없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한국 근대소설을 돌아보면 이미 우리는 염상섭의 {삼대}와 같은 뛰어난 가족사소설을 경험한 바 있다. 그 속에는 가족과 세대간의 갈등이 있고 그것들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다분히 계몽적인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계몽성은 가족소설의 장르적 문제에 국한되었다기보다는 식민지를 사는 우리 지식인들의 의식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가 소설 속에 구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어떻든 간에 지금 우리 사회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를 이루었고, 그 변화의 흐름에 비교적 둔감하다 할지라도 가족의 역할과 사회적 의미 역시 적지 않은 동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가족소설이 전통적 관습을 강조하거나 유교적 윤리에 입각한 가족모델을 구현하는 데 매몰되어버린다면 여전히 근대소설의 계몽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말 것이다.
{어머니의 초상}은 근래에 보기 드물게 '가족'이라는 한 가지 제재로 이루어진 완성도 있는 소설집이다. 뒷부분에 수록된 많은 장편(掌篇)들 역시 단순히 꽁트로 읽히기보다는 '가족'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능수능란하게 풀어가는 이야기꾼의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 장편들로 인해 이 소설집은 더욱 완결된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유독 가족의 문제를 따뜻하게 그려내는 데 매달려온 조건상의 소설세계는 지금까지는 "우리네 야산을 닮은 푸근한 삶의 문학"을 지향했지만, 이제는 새로운 가족소설의 가능성을 시험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계몽성과 교훈성이라는 도식적인 굴레로부터 자유로운 미학적 장치의 구현이 시급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변화를 승인하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가족모델의 창출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그의 소설은 가족소설의 새로운 지향점 속에서 형상화되리라 믿는다. 그것은 이 소설집을 내면서 그에게 부여된 무거운 소설적 과제임에 틀림없다.
필자소개
《오늘의 문예비평》편집동인, 동의대, 인제대 강사
편저 {고석규 문학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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