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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초점/답변에 대한 질문:웃음이란 무엇인가/황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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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답변에 대한 질문:웃음이란 무엇인가
―이문열과 성석제, 숭고한 희극과 배중율적 농담
황호덕
1. 양반과 소설―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재출간에 붙여
매혹적이고 유장한 이야기에 감싸인 까닭에 좀처럼 그 서사 안에서 실재화되지는 않지만 문학에 대한 계몽주의적 편향이나, 삶과 역사·소설과 저자에 대한 확고한 태도와 기대의 높이로 보아 이문열은, 현존하는 말의 유통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80년대적이며 또한 근대적이다. 당대적인 신념 체계의 외부에서 그와는 다른 형식과 결의 이질적 신념을 구상해내곤 하던 이문열에게 소설을 통해 다수의 동의를 구하고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서사의 첨탑을 꿈꾸는 행위는 그야말로 숭고하다. 여기에 대해, 신경숙·윤대녕으로 대표되는 90년대 소설에서 90년대의 대표적 소설 문법인, 내적 고백―글쓰기의 진정성과 같은 심급과는 상당한 거리를 둔 채로 소설 이전/이후의 이야기 형식 간의 교통을 보여준 성석제는 말의 바른 의미에서 소위 '대표적 90년대 작가'라고 보아 틀리지 않는다. 그는 근대 서사의 첨탑에 소설도 저자도 신념도 위치시키지 않으며, 첨탑의 초월적 위상을 허망한 '거짓말'로 간주한다. 그에게 소설은 부정형(不定形)이며 그런 까닭에 하나의 지표로 확정지을 수 없는 무엇―'이야기'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대표적 80년대·90년대 소설가들에게는 어떤 동일한 의식이, 그것도 썩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내재해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말의 비유적인 의미에서 '양반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앞세우는 서술 주체는 공히 대체로 <지역>―특히 영남 남인 계통의 향반(鄕班)에 속할법한 출생의 연원을 갖고 있으며, 삶과 역사에 대한 순정한 자세를 이미 존재하는 전거(典據)들로부터 익혀온, 시대와는 한참을 어긋난 존재들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서술 주체는 공히 "족보 좋아하고 내세우기 좋아하고 양반의식이 일정 수준은 되며 정치적 성향이 높은 이 땅의 사내"({호랑이를 봤다}, 작가정신, 1999, 20∼21면)이거나 혹은 그러한 자장 안에 놓인 존재들이다. 단적으로, 표준어로 대표되는 <도시> 문법의 구사란 "뿌리 없고 조상 팔아 먹을 넋빠진" 짓과 한가지인 공간에서 성장하고 그러한 의식에 의해 깊게 침윤된 주체들이 거기에 있다. "지역 사람들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상것들'이라고 독특한 용어로 평가절하"(왕:210)한다. 따라서 이들 두 작가들을 통해 파악되는 20세기식 영남 남인의 이촌향도란 납득할 수 없는 공간에 처한 외로운 방외인(方外人) 의식이 되는 까닭에 지극히 숭고한 것이면서, 또한 시의에 맞지 않는 의장으로써 완전히 희극적인 장면들을 연출해낸다. 왜냐하면, 지역식의 행위와 사유가 도시라는 이질적 공간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거나 애증의 패러디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경(經), 행장(行狀), 내간(內簡), 약전(略傳)의 문투 혹은 연의(演義)―그 현대적 등가물인 무협지의 투식이 고래(古來)의 세계 진단 방식―'난세 속의 강호', 서사 구축과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쉬울 것이다.
우선 <도시> 문법 속에서 시대의 대세를 읽어 낸 성석제에게 태생과 훈육은 떳떳한 동시에 창피스러운 것이 된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자신의 어떤 부분을 포함한 '틀린 신념'에 대한 야유―웃음이 우세종을 이루는데, 그 웃음 발생의 기원에는 소위 '속된 양반'의 분열된 자기의식이 개입되어 있다. 그 인식론적 연쇄와 결락을 단순화시켜보면, 우리의 주제는 조금 명확해지며 많이 흥미로워진다.
1) 나는 양반의 자식이다. 그러니까, 어떤가 하면 나는 귀하다.
2) 그런데, 양반은 여자나 밝히는 비교적 나쁜 작자들이다. 즉, 나는 천하다.
3) 나라는 자아는 배반된, 이율배반의 허위적 자아로 귀착된다.
4) 그런데, 아뿔싸 내가 좋아하는 '미녀'들은 그 분열의 와중에 무식한 상놈·불한당의 차지가 된다.
5) 결국 나는 이 분열과 패배의 비극성을 희극적으로 그려내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대체로 {궁전의 새}(1998, 하늘연못)와 {왕을 찾아서}에서의 서술 주체가 털어 놓는 핵심적인 아픔과 상처는 위와 같은 자아 인식 때문이다. 1)을 통해 볼 때, '양반의 자식'인 나의 자아는 숭고해야 한다. 나의 태생과 나에 대한 훈육이 이 숭고한 자아를 보장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자란 나는 비교적 한심하고 천하며, 실제에 있어서는 비속한 자아를 갖고 있다. 환언하면, 삶은 구별되지 않으며, 양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생과 욕망 사이는 지속적으로 벌어지며 태생과 훈육을 통해 행위를 검열하는 '나'와, 욕망하지만 감시에 의해 더듬거리고 있는 '나' 사이의 분열이 발생하게 된다. 요컨대 그렇고 "그런 사람들을 여유 있게 관찰하는 사람이 있고 관찰하는 사람을 관찰하는 나 같은 족속도 있다"(왕:33). 그러다 보니, 관찰과 고뇌로 인해 머뭇거리는 허위적 의식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 사색인은 자신의 욕망에 배반당하고, 역시 말의 비유적인 차원에서 이를테면 '지역 최고의 미녀'를 빼앗긴다. '미녀'를 빼앗긴 서술 주체는 스스로 지극한 농담거리, 희극의 주인공이 되며 실연의 서정을 통과한 골계적 자아로 귀결된다. 그 과정에서 이미 태생의 순연한 가치는 지적 성장에 발맞추어 '틀린 신념'임이 드러났으며, 결국 최종적으로 '감시하고 판단하는 나', '욕망하는 나' 모두를 비웃으며 농담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작가가 얼굴을 내민다. 스스로의 이율배반을 어찌할 수 없는 존재인 서술 주체는 이야기 속의 한 위상만을 점유한 채, 운명적 희극의 일원이 된다. 웃음은 이 '나'를 향해 진군해올 때 최고조에 이르며 최고조로 신랄해진다. 성석제에게 이야기란 지극히 운명적인 것이면서 즐거운 것이다. 그가 던지는 농담의 문자는 거의 무의미에 육박하고서야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문자이다. 소설이란 일종의 농담, 그러니까 '재미나는'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문열의 주인공이나 서술 주체는 스스로의 신념을 숨기지 않으며, 승화된 형태의 초월의식을 꿈꾸고 있다. 그에게 있어 그의 몇몇 주인공이라면 몰라도, 서술 주체 자신이 우스꽝스러워지는 법은 없다. 그에게 신념과 그 주체는 숭고한 것이며, 그 숭고한 신념이 희극으로 구조화되는 것은 다만 '미친' 시대의 탓이다. 이문열이 [익명의 섬](1982) 등에서 표시가 날 정도로 말해 놓은 바, 그가 생각하는 선하고 지상(至上)적인 공간은 꾸짖음과 훈육, 섬김과 받듦이 교환되는 이미 존재했던 '동성부락(同姓部落)'―반촌(班村)이며, 그의 존재 근거와 신념 역시 그 주변에서 발생한다. 그 인식론적 결락과 연쇄를 단순화시켜보면 우리의 문제는 좀더 대조적이 된다.
1) 나는 양반의 자식이다. 그러니까, 어떤가 하면 나는 귀하다.
2) 그런데, 지금은 천민의 시대이다. 즉, 내가 아니라 시대가 천하다.
3) 따라서 나는 숭고한 가치를 수호해야할 (계몽의 운명을 지닌) 자아이다.
4) 그런데, 아뿔싸 '미친 시대'는 숭고한 것을 숭고하게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한다.
5) 결국 시대와의 불화로 인해 나는 '양반(지식인)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도시> 문법 속에서 천한 시대를 읽어낸 이문열에게 태생과 훈육은 시대의 천함을 지우고 "동양정신의 정수(精粹)를 끌어"낼 수 있게 하는 당당함의 기원이다. 시대와의 불화는 그를 더욱 계몽적인 인간으로 만들며, 소설이란 그 때 그 동양정신의 정수와 현대적인 형식이 만나서 형성하는 계몽의 유력한 매개에 다름 아니다. 실상 {황제를 위하여}라는 희극적인 숭고물에서 희극의 책임은 시대에 있으며, 숭고한 침전은 황제와 그에 교응하는 서술 주체의 계몽에의 의지로부터 발생한다. 존재하지 않는 실록을 설정하기 위한 {황제를 위하여}의 액자 구조, 그러한 구조를 중계하는 서술 주체의 이끌림 자체가 발신자―메세지(문맥)―수신자를 설정하는 계몽의 모형을 유도하고 있으며 서사는 그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쾌의 첨단―희극을 모방한다. 확실히 이것은 어떤 부조화의 산물이며, 근대적 숭고 미학과 (그 자신 의식하지 못했다하더라도) 그에 대한 비판적 형식화가 만나 갑작스럽게 생겨난 걸작이 아닐 수 없다. 숭고한 메시지가 희극적인 기표로 전도되는 것, 희극적인 형식화가 숭고함의 나선을 그려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는 소설 장르의 필연적인 요구와 함께, 시대와의 강한 불화가 개입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시대는 그보다 훨씬 유력하고 숭고한 계몽의 기표로 흘러넘치고 있었고, 이문열 스스로가 그러한 숭고한 문장들에 맞서는 서사의 매혹으로 스스로의 입지를 다져왔기 때문이다. 그가 여러 자리에서 '시대와의 불화'를 이야기 할 때 그 불화는 두 곳에서 발생한다. 하나는 그에 의해 천박하고 욕되기 짝이 없다고 인정되는 시대 때문이며, 또 하나는 공히 숭고 미학―계몽의 기표를 택하고 있음에도 그다지도 멀리 떨어진 문학적 주류와의 갈등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계몽적 인간의 진언을 단박에 알아들을만큼 유능한 시대가 아닌 까닭에, 목적론적 구조화의 노골성을 반사해오는 보다 높은 서사의 첨탑에 맞서게 된 사정으로 해서 숭고한 진리는 희극적으로 구조화된다. 그러니까 작가는 숭고한 것을 희극적으로 쓰는 부조화를 감수하며, '양반 이야기꾼'이 된다. 이야기꾼에 귀속되는 희극적 사태, 양반이 점유하는 숭고한 신념―이문열에게 소설이란 특히 희극적 서사란 이 숭고한 '양반'과 즐거운 '이야기꾼' 간의 부조화, 때때로의 타협이 그려내는 동선과 한가지이다. 그렇다면 이 광경을 시대 간의 충돌―탈주하려는 서사와 숭고한 의미 연관 사이의 이율배반이라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여러 자리에서 이상주의는 세계 안에서 실현되지 않는다는 요지의 말로 소설에 내재한 '설득의 수사'들을 은폐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설정해 놓은 숭고한 이념의 체계는 지극히 복벽적(復酸的)인 한에서 완전한 유토피아에 대한 희구로 가득 차 있다. 소설가라는 존재에 대한 태도 역시 이야기꾼의 옷을 입었다고는 하나 계몽적인 열정을 숨기지 않는 한에서 지식인의 포즈이다. 이문열의 소설들이 이념 과잉의 시대에 맞서는 탈이념의 형식화로 보였던 것은 단지 그가 산포시켜 놓은 이념이 시대 밖에 있었고 관념의 수사로 은폐된 '신화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문열에게 소설은 어떤 식으로든 '의도'이며, '일깨움'이며 '장치'이며, '야심'이고 '메세지' 그것(황제Ⅰ:5∼7)이다. 그가 던지는 희극의 문자는 숭고한 '의미'의 정점에 육박하고서야 마음이 편해지는 그런 문자이다. 소설이란 즐거운 교편, 그러니까 계몽이다. 따라서, "그는 전통적 문화에 회귀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려 하지만, 그의 소설은 그것을 부정적으로 비판한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바 모순의 기원이고 부조화의 심층인 것이다. 그리고 그 부조화, 모순은 여기까지가 행복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택}(1997)을 둘러싼 논쟁과 거듭되는 정치 논쟁들을 통해 확인된 바, 당대의 문학, 당대의 이념과의 불화 혹은 피해의식이 제거되어 가면서 이문열의 소설들은 완연히 '의도'와 '야심'의 비대화라는 궤도를 그려왔던 것이다. 소설의 서술 주체는 '세태 비판'의 선정성을 스스로의 목소리로 삼음으로써, 작가 자신과 구별되지 않게 된다. 실상 {선택}에서 장씨부인이 보여준 자부심과 강한 질책·계몽의 목소리―허다하게 구사되는 "너희들은 나의 성취를……"―가 작가 자신의 목소리임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 스스로도 이 사실을 굳이 숨기려하지 않고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 자체를 욕되게 여기고 있지 않은가. {황제를 위하여}라는 모순의 희극이 {왕을 찾아서}라는 농담의 서사와 겹쳐지는 지점으로부터 시작된 이 글은 결국 이 부조화 속의 웃음이 어디서부터 왔으며,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해명하는 일과 한가지이며 어떤 문학사적 결락을 그려 보이는 일이 된다. 만약 이 글이 웃음 생성의 다양한 진폭, 거기에 개입된 은밀한 욕망과 기획을 둘러싼 우리의 의문들을 덜어내고 속속 진군해 오는 웃음에 대한 어떤 태도로 쓰일 수만 있다면, 이 두 작품을 넘어 서서 이 글의 종국에 이르렀을 때 이 장황한 사다리는 내던져져도 좋다. 그 어느 주변에 놓인 어떤 '이야기'들은 내던져져도 좋다.
2. 두 개의 현실, 서사 구축과 이데올로기
2.1.숭고한 저자, 희극적 소설―진리 축조술로서의 서사
{황제를 위하여}와 {왕을 찾아서}의 이야기 제시법은 매우 독특하다. 그 독특함은 대략 이중 나선에 의존하는 중층적인 이야기 구성방식에서 나온다. 우선 형식적으로 보아 실록 혹은 무협지적 신화화―신화의 목소리와 이에 대한 해석 지평이라고 할 수 있는 합리적 현실화―탈신화의 목소리가 겹쳐 나타난다. 또한, 이 두 개의 현실에 대한 어려운 선택의 문제에 놓인 서술 주체들의 정황과 태도가 이러한 중층적 이야기 방식에 관여한다. 작가들은 실록이나 무협지적 세계 인식에 의존하는 신화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들이 그려내 보이는 주인공을 신화화하는 동시에 현실적 서술 주체의 탈신화의 목소리를 통해 그 신화를 허구화한다. 마찬가지로 독자들은 전자를 통해 '정설(定說)'―신화를 보지만, 후자를 통해 '이설(異說)'―합리적 해석을 얻는다. 이를테면, {황제를 위하여}에서 우리는 실록의 유장한 편년체와 그것을 베낀 연의(演義)의 형식을 따라가며 황제의 신화를 만나며, 그 귀퉁이마다 고개를 내미는 이설에 대한 꾸짖음을 통해 탈신화의 가능성―현실적 해석을 경험한다. 또한 {왕을 찾아서}에서 우리는 철권의 신화에 협력하는 <지역> 사람들의 소문을 통해 마사오의 신화를 만나며, 그 소문에 대한 마사오의 누이―광자의 전언, 주인공의 해석을 통해 소문의 진상을 확인한다. 이야기 자체의 제시법에 의거해 작품을 읽어가는 일 자체가 신화와 현실 간의 변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중 제시의 의도와 효과는 매우 이질적이며, 이 이질성 자체가 하나의 지표이다.
이문열은 이야기를 축조함에 있어 신빙성―진실이라는 지표를 사용하고 있다. 우선 {황제를 위하여}의 액자 구조에서 서술 주체가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자신이 개입된 외부 이야기를 통해 황제의 이야기를 사실화하려는 강한 충동이다. 이것을 위해 그는 '실록'과 '우발산'이라는 인물을 살려내고, 이들 모두를 다시 지워버림으로써 "그 노인은 죽고, 실록도 찾을 길 없는 지금, 황제를 알고 그 삶을 일관되게 정리할 수 있는 이는 나 뿐"(황제Ⅰ:25)인 상황을 얻어낸다. 이렇게 해서 서술 주체는 황제의 일생과 그 의미를 초점화할 수 있는 초월적 지위에 정초된다. 그러나 서사적 동력이 현실과 관계 맺는 방식은 개연성의 과학에 의해 제어될 수밖에 없는 까닭에, 소설은 이념적 정당성에 의한 구조화와 현실적 정합성에 의한 구조화의 이중 나선을 그리게 된다. 그에 따라 작가는 두 가지의 사료를 채택하는데, 하나는 실록―그것도 그 중 기억나는 부분이며, 또 하나는 구전(口傳)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료는 역사성과 흥미를 뒤섞는 연의(왜 아니겠는가!)라는 형식을 취한다. 우선 황제와 {정감록}·{남사고비결}을 필두로 한 감결(鑑訣)·도참(圖讖)과의 놀라운 겹침에 의존하는 정설이 제시되고 나면, 다음과 같은 언급이 뒤따른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한다"(황제Ⅰ:29) 혹은 "그런데 그 산승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을 하는 이가 있다"(황제Ⅰ:33). 소위 이설(異說)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황제가 '정진인(鄭眞人)'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 모든 불일치는 황제와 무관한 곳에서 발생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설의 대부분은 황제의 아버지인 정처사(皇考) 혹은 천한 입들에 관련된 것이고 황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까닭이다. 이를테면, 황제가 천재임을 논증하는 무사독학(無師獨學)의 정설 다음에 위치하는 백석리 주변의 학문 수준에 대한 이야기―이설, 그 이후에 이어지는 구절이 그렇다. "황제가 반드시 천재이어야만 한다는 법칙이 없는 이상, 거기 대한 것은 별로 실익이 없는 논란이므로 그냥 덮어 두고 황제의 인품이나 살피는 게 낫겠다"(황제Ⅰ:39). 천재를 내세우던 정설의 목소리는 이설의 제시로 짐짓 역사를 내세우지만, 정설이 의심될 때는 즉각 최초의 천명론(天命論)으로 맞받아친다. 정설과 이야기의 필연성을 접속시키는 다음의 기기(奇奇)한 귀류 논증은 서술 주체의 갈라진 목소리가 어디로부터 들려오는지를 확연히 보여준다.
그러나 실록과 그것을 지지하는 구전(口傳)을 의심한다면 그 반대자들의 주장 또한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하지만, 부질없는 시비로 머뭇거리느니보다는 미심쩍은 대로 앞으로 나감으로써 일을 전체적으로 차분히 미루어 생각함이 나으리라. (황제Ⅰ:45)
번역하자면,
정설이 있고 정설에 대한 판단―이설이 있다. 그런데, 정설이 사실이 아니고 이설이 사실이라고 하자. 그러나, 정설을 믿지 않는다면 정설로부터 나온 이설을 믿을 이유가 없다. 둘 다 미심쩍다면 더구나 이미 시작한 이야기인 다음에야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정설에 대한 합리적 해석인 이설을 정설에 포함시킴으로써 정설에 대한 의심은 이설 자체를 설정할 수 없도록 하며, 이야기의 지속 자체를 방해하는 요소로 된다. 결국, 이러한 이중 제시가 이야기 진행을 지체시키고 있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독자의 이야기 진행에의 욕구에 편승하면서, 정설과 이설의 무게 편중은 현격히 정설 쪽으로 기울게 된다. 서사 진전에 대한 호기심 혹은 이야기에의 욕망이 정설을 선결정적 지위에 올려놓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날 밤 황제의 아버지는 황제를 불러 조용히 자기가 받은 천명(天命)을 전하였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아아, 이제 그들의 얘기는 그만두자."(황제Ⅰ:47)라는 설득을 거쳐 마침내 "이미 수십번 거듭 말해 왔지만, 아아 그같이 어리석고 속좁은 무리를 새삼 탓해서 무엇하랴"(황제Ⅱ:77 )라는 서술이 자연스럽게 터져나오게 된다. 정설을 옹호하되 이설을 제시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야기의 합리성·불확정성은, 이설을 정설과 완전히 분리해낸 후반부의 이야기를 통해 정설을 불가침의 것으로 재구축한다. 이제 후반부에 이르면 "동양의 지혜와 깨달음은 이놈 저놈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여 이미 이 땅에서 숨쉴 곳조차 없는 난세(亂世)에"(황제Ⅱ:82)라는 말, "상식과 합리로 절여진 우리들 범인(凡人)들의 몰이해"(황제Ⅱ:229) 따위의 질타는 그처럼 숭고하다. 황제에 대한 숭모와 추도가 "내가 처음 덕릉(德陵)을 찾게 된 날로부터 6년전인 1972년의 일이었다"라는 한 문장을 통해 대단원에 이를 때, 서술 주체와 실록 편찬자는 더 이상 둘이 아니다. 소설의 초입에서 기도된 신빙성―사실성에 대한 장황한 장치들이 황제의 숭고한 이념에 의해 완전히 점유됨으로써 나타난 현상이 바로 '닫는 액자'의 소멸인 것이다. 진본성autenticity에 대한 강한 집착은 그 가치의 진정성에 대한 옹호로 탈바꿈한다. 이렇게 해서 {백제실록}의 진본성·실재성에 의존했던 최초의 숭모가 후반부의 인격적 완성―'진정한' 형이상학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떠한 단락, 어떠한 의혹도 천한 것이 된다. 이설의 제시는 오직 황제의 이야기와 서술 주체의 현실을 매개하고 신빙성을 확보해가는 방편으로까지만이며, 서술 주체의 서사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추인하기 위한 명분으로만 사용된다. 요컨대, 이념의 정당성을 가치론적으로 확정해가는 과정을 통해 이설로 서사화되는 현실적 정합성은 지워지며 이념은 더 '순수'해진다. 그러나 그 가치화 작업이란, 황제와 대학생들간의 토론, 이현웅과 김광국·황제 간의 토론에서 보듯이 생성 중인 현실을 이미 있는 가치로 중화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다. 김광국이 "이형의 유물사관(唯物史觀)이나 그분의 천명(天命)이나 그것이 어떤 필연성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는 똑같은 발상"(황제Ⅰ:264)이라고 말할 때, 또 황제가 "맑시즘인지 말오줌인지 내 알 바 아니지만, 기왕의 네 주장이 그를 따른 것이라면 그는 필시 허행(許行)의 소설(所說)을 치장하고 비튼 것에 틀림이 없다"(황제Ⅱ:270)라고 꾸짖을 때, 그 논쟁들은 얼마나 형식 논리적인가. 생성 중인 현실을 존재했던 전거를 통해 중화시키는 논리는 현실이 고사로 자리를 바꾸고 고사가 현실로 작용하는 일이 되며, 대개의 보수주의가 바로 이러한 '있는 것/있었던 것'을 통해 '발생하는 것'을 포획하는 현실 읽기를 택한다. 현실은 그렇게 해서 꼭 있었던큼만 있게 된다. 존재했던 역사로 생성의 역사를 계몽하고 신화가 계몽과 한 몸이 되는 기획은 이렇게 시도된다. "먼저 세상이 이렇게 만들어졌을 때는 이렇게 되어야 할 까닭이 있으리라라는 것"({선택}:58).
이러한 시도는 실상 황제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별반 다른 것이 아니다. 황제에게 있어, 감결은 존재에 선행한다. 감결이 먼저 있고, 즉 먼저 읽은 것이 있고 여기에 '생성(현실)'이 그 읽은 것으로 해석되는 과정이 황제의 한평생 삶이다. 또한, 이미 있는 것으로 환원된 현실과 그에 대한 서술 주체의 가치론적 확정이 {황제를 위하여} 그것이다. 모든 것이 그러니까, 이미 '있었다'. 물론 소위 동양적인 가치에 의해 열린 우호적 기대지평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이 기대지평에 의해 황제의 기업(企業)인 백석리, 만주의 척가장은 성지이자 천명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그 기대지평이 그대로 기대지평에 머물 때, 황제의 천명은 유예된 채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 기대지평이 현실화될 때, 황제의 천명은 배반당한다. 현실이 감결을 읽은 것이 아니라 감결이 현실을 구상해냈기 때문이다. 현실 외부에서 설정된 이념은 오직 그 이념의 신봉자를 현실 외부에 위치시킴으로써 현실을 거절한다. 황제는 세계 안에서 발견되지 않게 된다. 외적인 상황이 예언적 상고주의―감결의 세계에 대해 극복할 수 없는 대립으로 나타날 때, (황제에게나 작가에게나) 세계는 미친 풍경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 미친 것은 황제 자신이다. '벌'과 '나비'를 천승만승(千乘萬乘)으로 삼은 황제가 "다스리지 않음으로써 다스린다"라는 경지에 이르는 과정은 그 자체 현실에서 축출되는 이념의 운명이며 이것이 {황제를 위하여}가 그 자체 초월적 이념―기대지평의 우선성에 대한 우화가 되는 이유이다. 즉, 황제와 그가 개진하는 동양적인 이념은 도래한 이념에 대한, 이념의 실현 과정에서 발생하고 반복되는 상흔에 대한 대항주체·대항주제로 설정된 것일 터이지만, 실은 그 감결이 보장하는 개벽을 신봉하는 황제 자신이 근대적 이념 과잉의 총아이기도 하다. 어떤 가치가 현실을 실재적으로 운용해 나가는 힘들과 무관하게 운위되면서 현실을 오직 최초의 신념 안에서 구획하려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기계적인 반복을 통해 신념에 대한 어떠한 수정도 가하려 하지 않은 채 현실을 오직 신념의 피사체로만 간주하려 한다면, 그 때도 그 삶과 신념은 숭고할 것인가. 선듯 대답하기 어려운 대로, 우리는 적어도 '그 풍경은 우습다'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더구나 더욱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은, 완강한 위계화의 원리에 의존하는 이문열의 '동양적인 것'에의 옹호가 다름 아닌, 바로 전시대의 복원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세계의 위계화―유가적 실천과 세계의 해체―도가적 도통(道通)이 그때 그때의 도래 이념을 소추하기 위해 설정됨으로써 동양적 이상 자체가 단독적으로는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 많은 경우, 이문열이 즐겨 사용하는 고사를 통한 인유는 사료(史料)로 포섭되는 현실에 다름 아니며 고사와 현실을 뒤바꾸는 전도체계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읽은 것으로 읽어야 할 것(현실)을 베끼는 일, 읽어야 할 것을 읽은 것 속에 위치시키는 전도된 세계이해 방식 자체가 극단의 근대성인 것이다. 이문열은 서구적인 것을 지우려 하지만, 그가 동양적인 것을 파악하는 방식은 서구적 이념과의 겹침을 통해서이다. 맑시즘에 대한 해석에 개입하는 허자가 소설 전편에서 한번도 적극적으로 해석되지 않는 점, 묵자가 예수의 사랑에 대한 대항주체로만 해석되는 상황 등을 떠올려 보면 이해는 좀 더 명확해진다. 이문열이 동양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서구적 근대성 안에서의 일이며, 소위 '동양적인 것'은 '서양적인 것'과 한 쌍을 이루는 도상(圖像, icon)인 한에서 호명된다. 그의 이념은 체계가 아니라 도상이다. 김현이 베끼기에 대한 일련의 천착―유하의 시·로빈슨 크루소의 변용 등을 해명하며 말한 바, 현실적인 것을 이야기 속에 위치시키는, 또 이야기에 삶을 덧쓰는 방식의 세계 인식이 왜 이문열을 논하는 자리에서 예언적으로 언급되었는지가 비로소 조금 드러난다. {황제를 위하여}는 근대적 작가―서술 주체의 숭고 미학과 근대 이후적인 이야기 방식이 갑작스럽게 부딪치는 묘한 지점에서 발생했던 것이고 김현은 이것을 '베끼기'라는 절묘한 지표를 통해 해명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이문열의 강한 이념적 회귀 편향, 진본성 혹은 진정성에 대한 강한 집착―즉 텍스트의 권위the authority of text 지표와 충돌하는 것이기에 여전히 예감적 심증이면서 암호로 존재한다. 황제든 세계든 이념이든 작가든 간에 도대체 뻣뻣한 무언가가 '반복'되고 있으며 "상황은 다른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근육은 계속해서 같은 운동을 하는 것이다". 요컨대, "희극적으로 보이는 결점은 우리가 그 안에 끼워넣어지는 기성의 주형과 같은 것이다"(강조:필자). {황제를 위하여}는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모순의 소설이다. 그렇다면 수상한 이념의 행간마저 뛰어 넘으며, 이토록 빠른 독서를 가능하게 하는 장치는 그 모순의 사이에 숨어 있는 셈이다.
2.2. 운명과 화법―저자, '흐름'과 '끌림' 사이에 서다
{왕을 찾아서}의 이중적 이야기 제시법은 탈신화화의 과정이 역사의 순리이고 대세임을 아는 자의 화법이다. "나는 간섭할 수 없고 간섭해서도 안된다. 역사가란 그런 것이다"(왕:320)라는 동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소설이란 때때로 현실의 '흐름' 속에 놓인 '뒤떨어진' 사초(史草) 같은 것이다. 예컨대, "세상에는 흐름이란 게 있지……세상을 원망하지 않아. 흐름에 대해서도 유감없어. 나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잖아. 세상에 대해서는 무익무해(無益無害)하자는 게 내 신조야. 그렇게 존재하고 있어. 왜 시를 쓸까. 뒤떨어지는 걸 좋아해서 그럴지도 몰라"({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민음사, 1997, 235면)와 같은 구절. 혹은 역사가란 "요컨대 누구에게나, 그 자신에게도 무해무익한"({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민음사, 1994, 27면) 존재라는 언급들이 그렇다. 삶의 흐름―운명에 항상 합치되지는 않는 개인의 실존과 희구 때문에 소설은 정교하지 못하며 어떤 분열의 형태로, 이원화된 구조로 나타난다. 이문열과 약간의 뉘앙스 차이를 둔 채로 두 관점의 이야기가 대립하는데, 이를테면 어떠한 사건이든 "이렇게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다르게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조동관약전], {아빠 아빠 오, 불쌍한 우리 아빠}, 민음사, 1997, 12면) 혹은 "이 신화의 뒤편에는 내가 아는 진실의 그림자가 있다"(왕:23). 요컨대, '신화'가 있고 '역사'가 진군해온다.
{왕을 찾아서}에서의 서술 주체는 {황제를 위하여}와 같은 초점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서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기억, 그리고 그러한 기억에 대한 해석을 통해 서사 내부에 존재한다. 서술 주체는 기억을 추억의 형태로 취향화한 채 탈신화된 <도시>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취향:끌림'과 '대세:흐름'의 한쌍은 신화와 탈신화의 한쌍으로 구조화된다. 따라서 이 이중 나선 자체가 시대적 결락, 개인의 분열적 편향에 대한 징표가 된다. {왕을 찾아서}를 비롯한 성석제의 서사 구조가 이중 나선의 이야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그의 서술 주체가 신화 시대를 통과해 역사 시대에 이른 '기억'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추억(취향)과 현실(대세) 사이에서 흔들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상, 정사와 야사 혹은 진실과 소문이 다투는 가운데, 도시 문법의 대세―더 많은 '옳음'을 읽어낸 자의 자기 분열과 아픔, 그에 대한 희화가 그의 목소리를 갈라진 것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제, 정설과 이설―신화와 계몽은 개인의 욕망 안에서 배반과 전도―배중율(排中律的)적 문제로 존재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사오는 광복 이후 지역의 거리가 낳은 최초의 건달, 최대의 신화였다. 마사오가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던 그 무렵은 지역이 신화 시대에서 역사 시대로 교체되는 시점이었다. 또한 내가 학교에 입학해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이기도 했다. 역사는 신화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을 필요로 한다. 다만 신화의 주인공은 신이고 역사는 인간이라는 점이 다른데 격변하는 시대교체기에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영웅이 바로 마사오였다.(왕:19)
그렇다면, 좀 더 살펴보자.
마사오가 세계 챔피온을 한 방에 무릎 꿇게 만들었다는 소문이나 신화는 소문이고 신화일 따름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영웅을 만들어 간다. 마사오가 불패의 신화를 가지게 된 것은 사람들이 불패의 신화를 가지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광자는 목화씨를 골라 내면서 나머지 이야기도 해 주었다. 나는 진실을 알고도 아이들에게는 물론 지금까지 한번도 발설하지 않았다. 나 역시 신화를 가지고 싶었다. 나도 남들처럼 영웅을 가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사오가 결국에는 세계 챔피온을 때려뉘었다는 신화를 재창조해야한다는 책임을 기껍게 지려 한다. (왕:28)
신화 시대의 사람들은 신화 속에 사는 한에 있어서 왕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을지언정 왕은 무엇으로 왕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왕은 누구인가' 혹은 '왕은 얼마나 왕다운가'라고 물으며, 여기까지가 바로 {황제를 위하여}의 무대―'백석리'적인 수준을 가진 당대인들의 모습에 해당한다. 성석제는 '누가 세계를 움직이는가'보다는 '무엇이 세계를 움직이는가'에 대해 말한다. {왕을 찾아서}는 두 개의 시대, 두 종류의 왕('조창용'의 조직시대를 포함한다면 세 종류의)에 대한 신화이고 역사인데, 각기 그 왕의 구성 과정에 개입하는 힘들·기도들이 그에 대한 해답을 이중적으로 구조화해낸다. 우선 재천으로부터 마사오의 부음을 들은 '나'의 <지역>행과 마사오에 대한 추억담―신화 시대·신화 속 왕의 모습을 추억하는 과정이 첫번째 '왕 찾기'의 구조를 이룬다. 이 추억은 마사오의 누이이자 '나'의 첫사랑인 천하 박색(薄色) 광자를 또한 불러내는데, 광자는 '나'에게 왕의 본모습을 말해주어 '나'를 신화와 현실 사이에서 고통하게 만든다. '나'는 마사오 '神話'가 <지역>의 어법과 요구에 의한 '神化'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분명히 알 수 있는 입지에 있다. 그리고 수많은 신화들이 마사오라는 초월 신화 주변을 장식한다. 영시 짓기의 왕(최고의 문사) 박조룡, <지역> 최고의 민주투사 유붕신, 우주적인 술꾼 정운천,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보는 최고의 도사 겸 역술가 최고려, 재야 천재화가이며 방술의 대가인 성문종, 지역에서 둘째가는 부자지만 부자 중에 가장 주먹질을 잘하는 이희주,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소설을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만드는 지역 최고의 미녀 세희. 이들 모두가 세계 최고이고 따라서 세계를 움직인 신화 속의 주인공들이다. 애초부터 이야기의 신빙성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이들의 호를 보면 알 수 있다. 거창(巨創) 박조룡, 대단(大端) 성문종, 주호(酒豪) 정운천. 그리고 그 중심에 우뚝 선 '이 마사오도 저 마사오도 아닌 그냥 마사오'(왕:13).
레비스트로스와 아도르노의 어떤 주지를 반복하자면, 신화와 역사, 신화와 계몽 사이의 간격은 신화의 분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화의 연속으로서 역사·계몽을 파악할 때 극복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성석제의 역사 인식은 신화적 진실과 역사적 허구를 배중율화하는 데까지, 주체 안에 자리한 신화적 욕망과 초월의식, 속악한 것(세희와 재천으로 대표되는)에의 매혹 간의 거듭되는 전도에까지 이른다. 마사오의 행적들은 범상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 최고를 원하고 미증유를 원하고 전우주적 사건을 원하는 사람들―즉, 신화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효모가 들어간 밀가루처럼 부풀어올랐다가 적당히 첨삭이 되고 장식이 된 다음 잘 구워진 빵과 같은 신화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신화가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지워질 수 없이 되풀이되고 공고하게 된"(왕:31)다. '나' 역시 "스무 살이 되도록 광자가 가진 마사오의 신화를 담은 젖, 그 젖이 흘러나오는 풍요한 젖꼭지의 유혹을 한 번도 이기지 못"(왕:86)한다. 마사오는 지배자가 아니라 하나의 이상적 관념이고 힘이며 질서이다. 개인 안에 있는 전체주의·파시즘적 권력 관계에의 매혹이고 그 헛됨이다. 마사오가 마사오인 것은 <지역>의 사람들이 그를 그러한 마사오로 이야기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조직으로 대표되는 <도시>와 소문 이상의 언어―'역사'가 진군해온다. 이것은 현실이고 추억이 아니며 '상것들'의 것이면서 대세이다. 조창용이 몰고 온, 조직과 여자, 대경이 건설할 호텔이 그렇다. 그러나 마사오처럼 되고 싶어하는 창용의 은밀한 욕망이 말해 주듯이 역사는 또한 신화를 모방하며, 꼭 그만큼 신화 살해에 가담한다. 마사오는 마사오와 같아지려는 창용의 도끼에 오른팔을 잃고 실각한다. 그 과정에서 마사오를 배신하고 창용에게 배신당한 '소문의 일인자' 박재천은 다시 한번, 마사오의 신화와 소문에 의지해 설득, 회유, 협박 등으로 <지역>의 왕이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지역 사람들은 그 말에 여러 방식으로 속아 그 일에 엉뚱한 협력자가 된다.
소문의 나라인 지역에서 제철을 만난 소문이 비 온 뒤 상산 대나무 숲의 죽순처럼 무성하게 자라난 것은 당연하다. 소문은 소문을 낳고 소문을 먹고 소문에게 시집 가고 소문과 교배하여 다시 소문을 낳고……. 이런 식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과정을 되풀이한 끝에 결국 한 가지로 통합되었다. 지금 와서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굳어 버린 그 소문의 줄거리……(왕:306)
현대적 어휘로 말하자면 각자가 만든 담론의 총합이 역사로 정초되는 것이 된다. 마사오라는 왕의 신화 자체가 역사로 반복되며, 신화도 역사도 이 소문―담론들의 교점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왕은 개인들의 욕망 혹은 언어와 공모하는 한에서 신화를 생산할 수 있는 몇 가지 소문들만을 제공하면 그만이다. 지역 최고 인사들과의 '잉어 낚시 대회'는 그런 의미에서도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셈이다. 마사오의 실체가 텅 빈 기표만이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월적 지위는 책임으로부터도 초월하며, 면책(免責)의 언어인 소문은 계속된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시대에서 신화 시대의 향수를 불러내고, 이것을 현대적 조직과 정치적 언어책략에 접목시키는 재천이 <지역>의 왕이 된 것은 예정된 '흐름'인 것이다. 마사오와 그 신화에 대한 향수 때문에 재천의 우군이 되어버린 <지역>의 건달들, 또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데 동원된 서술 주체는 공히 분노로 인해, 혹은 침묵에 윤색된 참회로 인해 스스로의 위상을 알지 못한 채, 재천의 원군이 된다. 지역 정서를 동원하고 신화를 동원하고 지역 방언―소문에 의지해서 박재천은 담론들의 교점―탈신화된 권력의 정점에 선다. 박재천은 결코 싸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지역의 패권을 얻기 위한 맞수 황포의 제거, 대경과의 협상은 그토록 쉽다. 재천은 말로 이기는 담론학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왕의 여자가 된 세희에 대한 '나'의 욕망은 거세된다. 어느 순간, 나는 '이용당한 역사가'로 서 있다.
대부분의 설득적 언술이 계몽의 형식을 취하듯이, 또 그 계몽이 신화를 모방하듯이 모든 것이 반복된다. 담론들의 교점, 담론의 기원, 박재천의 왕위 찬탈은 그래서 우수꽝스럽다. {황제를 위하여}에서 서술 주체는 담론의 교점이자 유일한 저자로서 서사에 있어 하나의 초월적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백제실록}의 유무와는 무관하게 여기서는 저자의 모사(模寫) 작업의 가치와 의의가 진본성(眞本性) 혹은 진정성authencity 자체를 구상해내고 확증하는 근거가 된다. 사건의 전모를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 숭고한 신념을 계몽으로 축조하는 서술 주체가 거기에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왕을 찾아서}의 서술 주체는 서사를 결정하는 자도, 서사의 전모를 알고 있는 자도 아니다. 자신의 외부에서 구축된 담론들―실은 스스로도 모르게 가담되어 있는 여러 기획들 속에서 하나의 흔들리는 위상을 그려내 보임으로써, 소설은 어느 순간 완전히 '패배'해 있는 우수꽝스러운 서술 주체의 실존을 드러낸다. "냉소의 왕위"(왕:361)마저 재천에게 물려준 서술 주체는 드디어 웃음이라는 가혹한 특이점에 놓인 채, 스스로를 향해 어색하게 웃고 있다. 언어라는 것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체, 즉 담론을 상정하는 이상 우리의 '표현'은 어떤 식으로든 세계를 구성하는 행위가 된다. 왜냐하면 그 표현 자체가 세계 형성에 가담하는 행위가 되고 그 가담에는 많은 이데올로기적 계략들이 개입되는 까닭이다. 따라서 말은 세계를 구성하고, 그 구성 과정은 권력 형성의 단초가 된다. <지역>에서 담론의 질서는 마사오 신화였고 그 신화를 보장하는 소문이었다. 무엇이 세계를 지배하고 구성하는가. 우리의 말투가 지나치게 문장을 지향하는 한 그것은 담론책략이 될 것이다. 따라서 성석제는 현존하는 담론들의 다양한 진폭을 펼쳐 보이는 동시에, 여기에 가담하는 개인의 욕구들을 그렇게 선명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권력의 중심이란 개념적 허구이며 말의 성채이다. 저자도 서술 주체도 결코 세계의 한계는 아니며, 세계 안의 한 위상에 불과하다. 성석제 소설에는, 어떠한 주체도 어떠한 저자도 초월되어 있지 않다. 담론을 기획하고 담론의 방향을 조작해내는 담론의 질서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나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저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담론들 간의 힘의 대결에 의해 결정되며, 그것에 꼭 맞게 대응하는 것이 '흐름'과 '끌림'을 배중율화하는 이야기의 이중 나선이다. 담론의 교점에 말의 성채가 서며, 주체는 거대한 성 '안'에 망연히 서있다. 서사의 끝에 어리둥절하게 서있는 '나'는 근대 이후로 튀어나간 'K' 바로 그의 현신이다!
따라서, 성석제의 소설에 나타나는 이중 나선에 있어 어떤 담화도 결코 진리치의 경중을 주장하지 않으며, 다만 하나의 관점, 이끌림으로 존재한다. 성석제에게 삶의 일련의 사건들은 관점을 포함한 채 담론화된 사건이기 마련이며, 따라서 하나의 법칙성만으로 관측될 수도, 확정될 수도 없다. 진정함을 강조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성석제에게 그러니까 의심스러운 무엇이다. 서사의 이중 나선에 있어 신화와 계몽은 지속적인 것이면서 배중율적이며, 적대적인 꼭 그만큼 상호의존적이다. 신화에 불과한 것에 대한 취향을 가진 서술 주체는 그 때문에 이용되고 질서화되며 결국 그 스스로 웃음거리가 된다. 그는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웃었지만, 그 낄낄대는 표면의 심층은 어둡고 우울하다. 배반과 전도의 서사―서정 희극 안에서 흔들리는 어떤 운명론자의 화법은 유쾌하고 쓸쓸하다. 과연 그는 무해무익했던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소설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이 씁쓸한 농담, 가혹한 웃음은 우리의 맹목적 사다리가 아닐 수 없다.
3.숭고 미학과 웃음의 서사―두 개의 책:질문, 두 개의 소설
3.1.스스로를 살해하는 예술―숭고한 희극의 문제
아름다움이라는 화두, 숭고함이라는 전율은 계몽의 이상이 예술을 벗삼으면서 어떻게 서로서로를 고양시키고 지시하는가를 보여주는 한에서 근대성의 매우 특징적인 한마디를 구성한다. 이 화두 탄생의 기원에서 자연의 합목적성·표상능력들의 합법칙성·대상의 형식·반성적 취미·쾌와 불쾌의 감정·공통감 등의 칸트가 제공하는 개념들로 그 마디마디를 읽는 것은 예술의 자율성과 주체의 자율성이라는 두 개의 기둥이 이루는 놀랄만한 균형과 상호 표상을 확인하는 일이 된다. {판단력비판}은 계몽이라는 가치와 그것이 치환된 아름다움이라는 술어로 가득한 책이다. 취미판단은 대상의 현존재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직 대상의 성질을 쾌·불쾌의 감정과 결부시키는데 지나지 않는 판단으로서 지극히 관조적인 능력이다. 그러나, 일견 무관심한 듯한 건축술의 얼개를 따라가다보면, 어떤 순간 우리는 개념도 목적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자리에서 비로소 계몽은 표상 가능해진다는 칸트의 암묵적인 진술을 통각하게 된다. 미감적 판단에서 숭고의 분석으로 넘어가자마자 개진되는 수학적 숭고―크기와 무한감에서 발생하는 숭고의 감정이 바로 그 전형적인 부분이다. 무한한 것은 절대적으로 큰 것인데 이 무한한 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사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관의 모든 척도를 초월하는 하나의 심의력이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자연 현상의 직관이 그 현상의 무한성이라는 이념을 수반할 경우에 그러한 자연은 그 현상에 의해서 숭고한 것이 된다(KU, §26). 그런데 그 현상에 대해 자연을 숭고한 것으로 '판단'하게 하는 초월적 심의의 근거가 바로 이성 이념의 자유로운 사용 즉, 계몽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연에 있어서 숭고한 것에 관한 감정은 우리들 자신의 사명에 대한 경외의 염(念)이요, 우리는 이 경외를 일종의 치환에 의해서 자연의 객체에 표시하는 것"(KU, §27)일 뿐인 까닭이다. 그리고 그 사명이란 계몽에 의해 확인되는 무엇이다. 우리의 구상력의 사명과 우리 구상력의 제한·부적합성은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우리는 사명의 존재인데, 그러나 제한된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의 감성 능력으로도 부족한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을 이성의 자유라는 궁극목적의 전도된 형식으로 확인하며 결정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유한한 구상력에 부딪혀오는 아무리 큰, 아무리 아름다운 자연도 이성의 이념에 비하면 그다지도 작다. 그렇게 해서 계몽은 자연―현실의 원리에서 자유―이성의 원리로 건너뛰는 지렛대를 얻게 된다. 감성은 이러한 숭고의 상태에서 초감성적인 것이 되며, 사명과 합치하게 된다. 계몽이라는 이상은 아름다움의 영역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면서, 또한 아름다움 자체에 대해서도 은폐된 근거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칸트가 판단력을 축조하는 방법은 초감성적인 이념을 부정적으로 현시하는 솜씨에 있어서 이념적인 근거 위에서 건축을 시도하되 그 근거를 결코 실재화하지 않고 초감성적인 영역에 은폐된 채로 통각하게 하는 그의 철학에 그대로 일치한다. 자유라는 의지의 인과율을 은폐한 채로 예술을 숨은 계몽―숭고한 것을 향해 매듭짓은 행위는 마치 장죽의 지랫대로만 겨우 도달할 수 있을까 말까 한 고딕 성당의 늑재 궁륭(ribvaulut)을 겨냥하는 아찔한 일이 된다. 결국 '숭고'함은 세계 안에 있지 않으며 세계 속의 사태―특수를 보편 아래 포섭하는 주체에 의해, 그 주체가 의존하는 '사명에 대한 경외의 염(念)'에 의해 발생한다. 주체의 선천적인 능력들과 세계 내에서의 자유로운 사용이라는 숭고한 기획들―이를테면 계몽을 통해 감히 알게 된 인간을 지시하는 과업에 분골쇄신하는 근대인에게 판단력이란 참으로 근대적인 계략이다. 요컨대, 칸트가 판단력이라는 선천적인 능력에 부과한 '사명'―그러나 오직 부정적으로 현시한 사명은 계몽과 예술의 연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숭고함의 기원―'숨은 계몽'은, 흔히 사명의 담지자를 자기 원인화하려는 음험한 계략들에 노출되며 그렇게 이용된다. 미적인 숭고함에 대한 칸트의 부정적 현시는 "막대한 힘에 대한 정신의 저항"을 지시하고 있음에도, 때때로 불가지적이며 사명에의 긍정이다. 신화적인 것을 모방하는 '상처입은 영웅'의 서사와 그것이 기도하는 예술의 열성적 매개화는 숭고 미학의 나쁜 취향, 부정적 결과들이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는 이 사명·계몽을 '봉건적인 방식'으로 모사하는 인물―영웅적인 구제 사관을 통해 숭고 미학의 괴이쩍고 수상한 존재방식을 드러내 보인다. 심지어 여기서 그 '사명'의 원인은 불가지적인 '천명'(하늘이 준 사명!)이며, 황제의 숭고 역시 이 세계와 무관하게 단지 그 신념의 순수성에 의해 평가된다. 칸트가 부정적으로 현시해낸 숭고는 여기서 현실에 대한 이념의 선결정성·불가공약성으로 실재화된다. 저자의 계몽주의적 정열과 황제의 천명―사명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만나며, 바로 그곳에서 숭고함과 지배권 간의 의심할 여지 없는 복합 긍정이 이루어진다. 숭고함을 압도적으로 거대한 예언―사명의 실재화에 대한 신학(神學) 속에 옮겨 놓자마자, 또 그 신학을 '천한 시대'와 충돌시키자마자 황제는 초월적 이성·절대적 숭고가 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식의 숭고 미학은 신학이 예술을 직접 점유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며, 그런 신학은 현존재의 긍정과 사명의 추상화―현실의 추방에 있어서는 무엇이든 해낸다.
그러나, 이문열 자신이 80년대의 문학적 주류들에 맞서 피력한 바 예술이라는 이 절묘한 매개는 또한 자율적이며 당대를 향해가는 방식을 스스로 알고 있다. 예술은 헐거운 계몽 신학의 지배를 오직 스스로의 형식화 방식에 의해 거절해버린다. 즉, 스스로의 자율성에 의해 그 신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예술은 오직 스스로의 형식을 가지고 신학에 복수하는 것이다. 희극의 형식이 바로 그것이다. 숭고한 신념이 고용한 흥미성의 향방과는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운위되는 비판의 서사는, 위대함 자체도 일단 간파된 후에는 노골적인 첨탑에의 욕망에 불과함을 확연히 드러내 보인다. 예컨대, '미친 시대'에 맞선 황제의 예지적인 면모가 숭고의 나선을 그려보이는 것과 꼭 같은 순간에 겹쳐 나타나는 승리에 취한 절대자의 포즈가 그렇다. 현실에 남은 황제의 육신에 주어지는 것은 포즈가 된 계몽, 권력이 된 숭고, 욕망으로 발각된 사명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황제와 그 이념은 급격히 추상화된 채 현실에서 축출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자의 '지덕―무위자연(無爲自然)'(왕:233)은 깨달음이 아니라 추방이다. 만약 군중 앞에 선 황제의 늠름하고 아름다운 의장과 기상이 희극적으로 판단되고 조금 심드렁하게 느껴진다면 우리는 이미 계몽의 신화 밖에 서서 올바르게 판단력을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소설은 비극적인 일을 희극적으로 써낸다. 숭고함은 칸트적 기원이 약속하는 바, 어떠한 압도에도 저항하는 적나라한 부정성이다. 그러나 어떤 시기의 숭고함은 이제 희극적인 형상, 즉 일견 거룩해 보이지만 도무지 실재화될 수 없는 것에의 음험한 욕망에 의지한 채, 대체로 이루어진 지배 관계를 옹호하는 거짓된 미감이 된다. 이 숭고한 희극을 통해 이문열은 '존재하지 않는 것'―숭고한 형상을 얻었지만 그것은 그 형식에 있어 배반된 것이며, 바로 그 선명한 '사명'―'나쁜 신념'에 의해 적의 편임을 알려줌으로써 우습게 된다. 황제와 여타 근대적 이념군의 논쟁에서 드러나는 '반복'되는 것으로써의 이념―도식화 작업이 지니는 진정한 본성이 지배 관계의 긍정임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든 사건, 모든 인물이 반복 가능하고 대체 가능해지는 것인데, 여기서 어떤 이념도 어떤 주체도 체계라는 개념장치의 단순한 실례가 된다. 천명의 실현―목적론적 구조화에 의해 주체를 대상화하고 완전히 균등한 매개로 획일화한다는 점에서 '추상화'된 계몽은 하나의 절대적 기표만을 위해 운행하는 신화 시대의 세계 이해와 한가지이다. "모든 사건을 <반복>이라고 설명하는 [내재성의 원리]는 신화적인 상상력에 반대하는 계몽의 원리이지만 이 원리는 바로 신화 자신의 원리인 것이다"({계몽의 변증법}:36). 바로 이 '반복'의 순간에 폭발하는 웃음은 숭고함과 크기 간의 전도체계―계몽의 신화와 동시적인 판단력을 판단의 판단Beurteilung―가치 판단의 형태로 탈마법화하는 전략인 셈이다. 니체와 아도르노의 계몽에의 환멸―가치의 계보학·부정의 변증법이 작동하는 곳도 이곳이며 계몽이 절묘하게 패러디된 베르그송의 {웃음}도 바로 그 끝에서 탄생한다. 숭고한 신념이 미학적인 형상 밖에서 '무관심'하게 판단되어질 때, 우리의 지성은 안면근육을 향해 웃으라고 명령한다. "무관심함은 (숭고가 아니라) 희극성을 감지할 수 있는 천연의 장소이다"(부연:필자). {황제를 위하여}의 기획들은 어쩌면 완전히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황제의 어떤 모습은 때때로 숭고하며 아주 가끔씩 옳다. 또, 소설은 유쾌하다. 그러나 그 숭고함은 스스로를 살해하는 숭고함이며, 그 걸작은 스스로를 배반하는 걸작이다. 이 근대의 영웅은 오직 장렬한 이념의 형상―미학적인 승리만을, 그것도 희극적 승리만을 구가할 뿐이다. 이 숭고한 희극에 있어서 능력들의 일치란, 감성과 지성의 유비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3.2.웃음, 무관심하고 가혹한 특이점에 대한 소묘―배중율적, 서정 농담의 문제
선한 것과 진실한 것만으로도 {폴리테이아}는 구상될 수 있다고 확신했던 플라톤이 최후의 순간에 머리맡에 둔 단 하나의 책은 전도와 풍자의 책―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이었다. 위독한 계몽, 길들여진 한에서 자율적인 '기계'들을 향해 싸늘하게 웃고 있던 니체가 밑줄 그으려 환호했을 것임에 틀림없을 이 풍경은, 알레고리라기에는 너무나 교묘하며, 아이러니라기엔 지나치게 예언적인 데가 있다. 무엇보다 이 전언은 숭고한 비극의 절정부가 통쾌한 희극으로 전도되는 순간을 똑떨어지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반성철학의 내면화 원리를 잘 그려진 정물화를 통해 향유하는 아름다운 제일 시민, 하이데거가 규정해 놓은 바, [세계 그림의 시대]―그 그림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자율적 인간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잘 내면화된 인간은 훌륭한 기계이고 잘 정돈된 정물인 것이다. {르뷔 드 파리Revue de Paris}를 통해 발표된 {웃음―희극성의 의미에 관한 시론}은 그 문자에 있어 웃음이라는 결과를 해명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것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계몽된) 기계에 대한 꾸짖음이고 웃음이 갖는 기능이다. 더구나, {판단력 비판}과 그 주변으로 이합집산하는 계몽의 희망 연대, 그에 관한 나쁜 취향·신념들의 결절점 사이에서 {웃음}을 읽는 것은 독특한 경험, 놀랄만한 농담을 발견하는 일이며 웃음이 터져나오는 상황에 대한 비극적인 추체험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웃음}은 그 모든 계몽의 문자들을 뒤입어 놓은 잘 짜여진 패러디―판단의 판단, 가히 경악할만한 전도로 읽히는 것이다. 예컨대,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아름다움·숭고함·앎과 선함 간에 놓인 쾌적함과 같은 범주를 통해 시도했던 것은 특수에서 보편으로의 이월―심미적인 것의 선함이었다. 따라서 칸트에게 중요한 것은 주체가 그 삶의 장인 혹은 명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명정대한 판단자가 되는 것이며, 아름다움 자체가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판단이 귀한 것이다. 그렇지만 베르그송은 판단과 같은 범주화와 일반화 작업이 정당화되는 곳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차라리 희극적인 것의 영역이라는 말로 칸트에 맞설 뿐 아니라 희화화하고 있다. "사실상 희극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유형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견해로는 모든 예술 중에서 유일하게 일반적인 것을 지향하는 예술이다"(LR:123―강조:필자). 앎이 암호로 존재하지 않듯, 베르그송에게 예술은 자유의 암시가 아니라 자유의 가장 빛나는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성하는 지속의 느낌을 포착하고 앎을 대상 각각에 마촘하게 들어맞는 상태로 마름질하는데에 예술만큼 유능한 것은 없다. 그런데 희극은 모든 예술 중에서 유일하게 일반적인 것을 문제삼는 예술이고 불활적(不活的)인 전형화―반복을 다루는 예술인 것이다. 베르그송은 우선 우리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보고 웃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얼이 빠져 있는 방심absence 상태 혹은, 유연성이 결여된 생각에 환경을 '끼워 맞추는' 존재들, 즉 '기계들' 속에서 웃는다. 기계적인 것, 자동주의적인 것, 경직된 것―반복되는 것은 우습다. 이러한 방심의 상태에서는 무의식의 기계가 의식을 대신해서, 습관의 기계가 지성을 대신해서 행동한다. 즉 "우리는 세심한 융통성과 민첩함이 요구되는 상황에서의 어떤 기계적인 경화(硬化) 때문에 웃는다"(LR:18) 예컨대 {황제를 위하여}에 대한 독서에서, 우리는 이미 환경에는 맞지 않는 유장한 가치를 수호하려는 황제의 기계적 거동 혹은 환경을 가치에 끼워넣는 열정 때문에 웃는다. {정감록}을 베끼는 의식과 행위 속에서 모든 것은 책 안으로 구겨져 들어간다. 그러한 광경 속에 웃는 행위를 통해 이념은 지성적 가치 판단 위에 놓인다. 계몽과 웃음이 동시에 구조화된 이 미적 결과물은, 그러니까 면밀하고 음험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우습다.
그런데 니체가 가치의 계보학을 통해 비판하고 있는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의 문제가 여기에 암호처럼 가로 놓여 있다면 어떨까. 가능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을 매개하는 행복에의 약속은 인간에게 현재에 대하여 그 미래를 불투명함에서 구해내고 사회적인 삶에 기계적인 정확성을 부여한다. 따라서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른다는 과제는 예비적인 과제로서, 인간을 어느 정도까지 필연적인, 균일한, 서로 동등한, 규칙적인 그리고 결과적으로 산출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수반하고 전제하고 있다"({니체전집8}, 김태현 옮김, 청하, 1982, 67∼68면). 이러한 과제의 명분이 정당화되고 그 안에서 자유롭다고 느끼는, 이 최종점에 있어서 스스로 결과한 양 서있는 것이 계몽의 인간―'주권자적 개체'인 것이다. 계몽의 역사가 그 최종점에 있는 인간으로 본 것은 스스로에게 관습과 법규를 제정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인간, 그 자신이 하나의 법전이며 국가인 주권자이다. '약속할 수 있는 동물'―계몽된 인간은 스스로를 반복·재생산시킬 수 있는 '기계' 그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율화된다는 것과 기계화된다는 것의 의미는 사실상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며 '반복될 수 있는 것'에 대한 '추상화'―'일반화'({계몽의 변증법}:38) 자체가 계몽의 이념이 된다. 이것이 약속의 완수가 의미하는 바이며, 자율적인 또는 기계화된 자아는 다름 아닌 일관되게 물질화된 약속을 자유로 느끼는 주체이다. "책임이라는 이상한 특권에 대한 자랑스러운 인식"을 지니는 것과 자율화된다는 것 사이의 참으로 근대적인 결합은 그 끝에 이르면 마침내 기계가 자유를 압도한다. 그리고 우리의 웃음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다.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약속―가능적인 것이 나날의 삶을 제압하고, 기하학적 기계성이 본능과 섬세한 사유, 능동적 의식을 장악하게 되는 상황을 증언하는 것이 웃음이며, 그 웃음의 의미를 캐는 것이 가치의 해석학, 판단의 판단인 것이다. 비판의 서사―희극은 이 '반복'―'경직성'을 가능한 한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해체시켜 버린다. 웃음은 계몽―행복에의 약속과 태생을 함께 하며 그 약속이 거짓된 것·기계적인 경직성에 빠졌을 때 폭발하는 작용이다.
그런데 그 발생 자체는 약속에 대한 탈가치화가 상당 정도에까지 진척된 상황에서만 가능한 까닭에 다음과 같은 필연적 질문을 동반한다. 성숙한 개인이나 자율적 능력에 대한 희망이 여전히 우리에게 위안이고 미덕이라면, 대체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없고 사회 생활의 관습과 직무·국가와 사회가 법칙화된 약속을 개인에게 온전히 내면화하여 마침내 인간 그 자신을 압도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왜 그러한 희망들마저 좌절되어가는 상황들을 앞에 두고 이토록 잔혹하게 웃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개체의 자유가 그 내면에 있는 기계의 검열, 그 외면에 있는 전체의 약속을 거치지 않고는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강요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밀란 쿤데라는 전체주의와 농담 간의 관계 속에서 소설을 사유하며, 다음과 같은 놀라운 영감을 제시해 주고 있다. "300년 동안의 여행을 거쳐 돈키호테, 바로 그 자가 측량기사의 모습으로 변장하고서 마을에 돌아온 것은 아닌가?"({소설의 기술},권오룡 옮김, 책세상, 1990, 23면) 그리고 그 측량기사는 {왕을 찾아서} 속에서 말의 성채 앞에 선 망연한 역사가로 현신한다.
삶에 있어서 모든 진지함은 우리의 자유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성숙시켰던 감정이나 은밀히 품었던 정열, 그리고 우리가 숙고하고 결정해서 실행했던 행동, 한 마디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와 분명 우리의 것, 바로 이러한 것들로 인해 우리의 삶은 때로는 비장하고 대개의 경우에는 장엄한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희극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자유의 이면에 그 자유를 조종하는 실이 숨겨져 있다고 상상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LR:72―강조:필자)
지금 이곳에서 웃음을 해방적인 체험이자 도약으로 보려는 경향을 만나는 일은 누구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경향은 명백히 웃음을 별다른 의심없이 마치 엄숙주의에 대한, 가능적인 것의 억압성에 대한 저항군으로 생각하며 신앙의 역사에서 계몽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신성함, 경건함, 아름다움, 숭고함만큼 더 많이 가진 것처럼 여기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는 단 몇 가지 이의를 달아봄으로써도 이 희망들이 얼마나 기계적인가를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쿤데라 소설론의 어떤 주지 속에서 희극적인 것은 "어조의 가벼움을 통해 비극적인 것을 좀더 견딜만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극적인 것'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희생자들부터 그것이 아직 가질 수 있는 위안, 즉 (진짜이건 꾸며진 것이건) 위대한 비극에서 찾을 수 있는 위안을 빼앗아버림으로써 그 비극적인 것을 '알의 상태에서 깨뜨려버리는' 것이다"({소설의 기술}:121). 꼭 니체의 환멸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어느 경우에나 희극의 시대는 비극의 시대보다 위안이라는 삶의 요소가 삭감된 시대이다. 웃음의 역사는 계몽의 역사보다 더 적은 것을 더 적은 향유만을 가지고 있다. 웃음의 역사에서는 인간이 그 자신의 삶의 고유한 창조자이며 주인일 수 있다는 희망,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용기를 과감히 실천함으로써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위안이 사라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농담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리는 것이며, {왕을 찾아서}의 결말은 그다지도 갑작스러웠던 것이다.
말의 유희에 의존하는 화행(話行) 때문에 때로 엄청난 장황함이 성석제 문체의 지배적 요소를 이루고 그 멈춤의 지점을 알지 못하듯이, 그의 소설은 때때로 깨어진 비극을 붙들고서는 멈추어야 할 자연스로운 지점을 확정짓지 못한다. 숭고한 희극―그에 따른 황제의 비극적 일생이 지배하던 {황제를 위하여}에서 서술 주체는 항상 그 서사의 공간을 초월해 있는 세계의 한계이다. {황제를 위하여}가 주는 웃음은 자동주의, 기계적 거동―상황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며 숭고한 이념에 대한 기대와 그것의 현실화가 치루는 비용 간의 그 엄청난 모순 때문에 발생한다. 그 웃음은 작가에 있어 전략적이지만, 그 세계 내적 형식에 있어 필연적인 모순을 드러낸다. 매개된 모범―전거(典據)는 불활적인 반복이며 웃음의 기원이다. 그러나, {왕을 찾아서}에서 서술 주체는 이미 웃는 자인 동시에 웃음의 대상이며, 주체 스스로부터 탈가치화하고야마는 운명론자이다. 어느 누구도 숨을 수 없으며,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다. 성석제의 말투는 운명을 패러디하는 부정의 화법이며, 자신의 어떤 편향에 대한 자기 비판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왕을 찾아서}에서 보다 본질적인 웃음을 주는 것은 상황 희극―<희극성>이 아니라 '의미'(지시)와 '다른 의미'(내포)를 충돌시키는 탈가치화의 <농담>이다. 그는 항상 둘 이상의 문맥을 참조하기에 비판―웃음의 표적이 되는 대상으로부터 그 어떤 '전도'들을 발견하는 일에 유능하다. 보안관과 악당의 결투로 상상된 마사오와 경찰인 재천의 아버지와의 결투,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마사오의 소년원행을 표현하는 '입산수도' 혹은 '수업'은 또 어떤가. 상황이 웃긴 게 아니라 그에 대한 배중율(排中律)적 '발화'가 우습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독자를 언어적 함정에 빠뜨리며,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수사학적 실천에 계속 주목하게 한다. 대부분의 소설이 은폐하고 있는 소설의 허구성, 현실적 무력함·무의미성, 말의 이데올로기적 자장 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 있어서 그의 말투는 탁월하다. 말놀이가 깊게 개입된 소문에 대한 위의 인용이나, 허다하게 등장한는 "광자는 좋겠네. 어째서 좋은가. 좋으니 좋겠지"(왕:87)와 같은 구절들―심지어 마사오의 싸움 기술과 고기 잡는 법을 묘사한 어떤 장(왕:111)은 한 장 전체가 무의미의 연쇄 수사, 즉 펀pun에 의존해 있다. 그토록 흥건한 수사들이 벌려 놓은 의미와 이데올로기, 언어와 권력의 공모는 그 전방위적 웃음을 통해 '다른 의미'―'다른 시대'에 충돌한다. 우리가 한동안 의미있게 생각한 많은 것들이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 되어 우리 앞에 서 있으며 대개 그 무의미화는 옳다. 그 의미와 무의미, 의미와 다른 의미 사이에 존재하는 특이점이 바로 맹목적 질문―웃음이다.
이문열의 숭고한 희극―{황제를 위하여}에서 황제는 그 자체로 아무런 농담도 없으며, 진지함 속에 즐거움을 주는 인물이다. 황제는 순수한 희극적 인물로서, 감결의 환상으로 머리가 가득 찬 '다 큰 아이'이다. 그러나, 이 우수꽝스러운 인물에게 깊은 지혜와 고귀한 이상을 부여하여, 목적의 실현을 믿고 의무를 진지하게 여기며 예언을 곧이곧대로 믿고 실천하는 복벽적 이상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만들면서, 이 인물의 희극적 효과는 최초의 숭고한 기획에 접속된다. 희극적 쾌락의 동기들은 중단되며, 우리는 이 소설의 저의가 농담과는 한참 떨어진 숭고한 것임을 깨닫는다. 황제 행위의 "무의미를 희극적인 무의미로 만드는 것은 농담에 대한 불충분한이며 그로 인해 농담이 주도하는 {왕을 찾아서}와 구별된다. {황제를 위하여}의 희극성이 시장의 계몽주의로서, 타협된 것이라면 또 그 희극이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통해 숭고함을 살해하는 것이라면, 성석제의 농담은 판단인 동시에 환멸이며 그럼에도 버리지 못한 인간에 대한 애착과 미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농담이란 전달을 위한 '대화―담론'을 생각하지 않고는 성립조차가 어려운 까닭이다. 왕―마사오에 얽힌 일화들에 정말 성공적인 희극이 들어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 농담의 생산물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개별적인 희극이 아니라, 그 안에서 풍요롭게 넘치는 언어의 기지이다.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질펀한 구연의 말투가 보여주는 것도 바로 타자에 대한 전제이다. 마치 [바리데기] 설화나 [춘향전]의 나귀에 대한 묘사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구연성(口演性)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의 문체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구연성은 우선 위에서 말한 바 농담이 필요로 하는 대화성에 의한 것이지만, 그 구연의 심층에는 유형화된 삶, 정형화된 인간 행위에 대한 통찰이 개입되어 있다. 그 구연의 말투를 통해 나날의 삶은 전형화되고 유형화된다. 따라서 구연성의 어투를 새로운 소설 문법의 가능성으로 발견하려는 시도들은 때때로 위태롭고 여전히 희미한 전망만을 갖는다. 구연성 자체는 삶의 '창조'가 아니라 삶의 '반복'을―즉 부정적인 현상을 유희로 모사(模寫)하는 발화 방식일 뿐인 까닭이다.
진군하는 웃음에 포위된 주체에게 삶은 반복이며, 희소한 충만―드문 미소이다. 그가 때때로 의고체([유랑]이나, {왕을 찾아서}의 어떤 구절들)에 가까운 인유나 수사들을 구사한다고 할 때, 그의 의사(擬寫) 의고체가 실상 모던한 실험들, 서정적 수사들을 거쳐 나온 그것임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序·跋·後記·解題·異論을 대신하여"({재미나는 인생}, 강, 1997, 187면)라는 부제는 각기 그 "序·跋·後記·解題·異論"들을 모호한 대로 희화하면서 그 허식적인 맨 얼굴을 드러내 보인다. 그는 그 어떤 투식에 스스로를 끼워넣지 않지만, 그러한 투식들 속에서 반복되는 개인의 안타까운 삶을 본다. 이러한 수사학적 실천들은 유희적 언어 화행과 그것의 정치성, 의미(지시)와 다른 의미(내포), 운명과 화법 간의 거듭되는 전도와 배반이 첨예하게 맞서는 무시무시한 게임이고 농담이다.
그리고 그 농담은 자주 지극히 서정적인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작가 역시 반복되는 개인이고 안타까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타자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농담과 서정의 뒤섞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첫사랑](1995) 정도의 서정에 도달한 문장을 찾아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세희와 광자에 대한 거듭되는 서정적 언사와 그에 대한 희화 간의 결합이 그렇고, 여성에 대한 환유 혹은 여성에 대한 색정의 은유로 채택된 '흰팔뚝'의 이미지가 그러하다. 마사오에 대한 과장된 신화를 헐떡거리며 늘어놓던 서술 주체는 "그리고 희디흰 팔뚝 하나가 마사오의 겨드랑이 사이로 뻗어나왔다. 그 팔뚝에서 뻗은 박꽃 같은 손은 봉지 안에 든 희디흰 카스탤라 하나를 집었고 땅에 떨어뜨렸다. 카스텔라는 오동나무 꽃잎처럼 아름답게 떨어져 내렸다.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왕:53)와 같은 이질적인 언어들을 군데군데 산포시키고 있으며, 마사오와 세희로 대표되는 신화 시대의 미망을 서정적으로 추억해낸다. 그는 희화하고 의뭉스럽게 비꼬지만, 미워하지는 않는다. 부정적 현상과 그 인간과의 분리―관용적 시선이 거기에는 있다. 그에게 사랑을 포함한 모든 가치는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으며 추악하지 않은 때가 없다"(왕:251). 골계적 웃음, 서정 비극이란 장르와 구조에 있어 필연적 결합일 수 있다. 숭고한 희극은 나쁜 신념과 철면피한 거동이 교환과 계몽을 의도하는 한, 언제든 부활한다. 그러나 우수꽝스러운 서정이란, 언어의 기지에 의존하는 서정적 웃음이란, 취향과 현실 간의 배중율적 농담이란, 말하자면 '드문 것'이다. 이문열의 방법으로서의 웃음―연의(演義)는 성석제에게 언어의 흘러넘침―구연(口演), 의미와 내포 사이의 피 말리는 유희가 된다. 이문열에게 웃음은 판단이 아니며 자유이자 시장의 법칙일 뿐이다. 반성자적 위치를 확정지어 놓은 근대적 계몽 주체에게 웃음은 시대적 이행에 대한 문학적 화폐이다. 그러나 성석제의 {왕을 찾아서}에서의 반성자는 세계 속에 빨려들어간 주체이며, 따라서 그 웃음은 절망 사이에서 솟구치는 이의(異議)이고 판단의 특이점이다. 이 탈가치화의 웃음은 옳고 유쾌하지만, 그만큼 절망적이다. 불량배, 고수, 여자들의 변두리 삶을 통해 반복되고 있는, 자기 스스로의 안타깝고 우수꽝스러운 삶 때문에 그는 정교하지 못하다. 그가 말한 바 "인생은 반복이고 오늘은 어제의 동어반복이며 나는 남의 반복"({호랑이를 봤다}:5)이라면 그들에 대한 웃음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다. 어쩌면 그의 시대, 우리의 시대는 반복되는 삶의 음산한 순간들을 어릿광대의 과장된 표정으로 견디어야 하는, 그 표정 자체가 일종의 태도인 그런 시간일 수 있다.
4.웃음―이토록 악마적인, 이토록 가혹한 유산
1784년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월간 베를린}의 질문에 [질문에 대한 답변: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잘 알려진 기고문을 보내왔다. 그리고 오늘날의 상황에서 끊임없이 부활하고 확산되는 전체에 대한 희극, 그것의 서사화는 계몽이라는 답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제목의 질의서를 요청하고 있는지 모른다. [답변에 대한 질문:웃음이란 무엇인가]. 계몽이 여전히 미완의 기획이고 행복에의 그래도 가장 유력한 약속이라면, 그리고 그런 한에서 답변을 요구하는 희망이라면 그 희망을 향해 이토록 싸늘하게 이토록 자주 우리를 웃게 만드는 이 가혹한 웃음이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웃음은 오늘날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바, 계몽에 대한 하나의 도전적 물음이며, 맹목적인 질문이다. 맑스는 어느 자리에선가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놀라운 것은 그 반복 자체가 이미 첨단의 희극이라는 사실이며, 그런 한에서 끝간 데 없는 질문이라는 사실이다. 웃음이 향유되지 않고 사고되는 시대에 웃음은 어떤 것의 반복이고 가치 판단에의 요청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웃음은 흔히 과소평가되고 때때로 과대평가된다. 유쾌한 것은 즐겁거나, 해롭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웃음을 진지하지 못하거나 진리와 무관하다고 경계하는 이념이 표정화된 엄숙함은 때때로 얼마나 우수운가. 또, 웃음의 해방성에 대하여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들은 이 무관심하고 악마적인 유산에 대해 얼마나 순진하게 웃고 있는 것인가. 그런데, 우리가 볼 수 있는 얼굴은 이 두 얼굴 뿐인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희극성을 자체를 정의 내리기를 꺼려하며 웃음을 실용주의적이고 기능적인 측면에서 접근, 사회적 교정이라는 효과를 내세웠는지 모른다. 그는 웃음의 순기능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사고하고 있음을 내세움으로써 이 난감한 유산의 채권만을 상속받는다. 우리는 악에게 악으로 돌려주는 웃음이라는 작용을 통해 그 악을 응징한다. 그러나 웃음 자체에 대해서 그 효과는 단지 우연적이다. 삶의 부조리함, 인간성의 부정적 측면을 폭발시키는 희극의 기능과 삶의 비극으로부터 구원되고 싶어하는 열망 사이에는 어떠한 본질필연적인 관계도 없다. 웃음은 무차별적으로 무관심하게 실천될 뿐 누구의 적도 누구의 편도 될 수 없다. 그것은 시대적 결락마다 발생하는 이데올로기 교체의 징후이며, 더 이상 옳지 않은 신념에 대한 유쾌한 장송(葬送)이다.
언제나 웃음에서 척도는 반성되지 않으며 다만 실천된다. 웃음은 기계적인 것에 대한 기계적인 반응이다. 그 가혹한 웃음 속에서 우리는, 김수영이 오래 전에 말해 놓은 바, "진정 기계주의적 판단을 잊고 시들어 가―"([웃음], {김수영전집1}, 민음사, 1981, 19면)고 있는지도 모른다. 웃는 것은 우리가 구경하고 있다는 것이며, 무엇인가가 희극적이라면 그것은 삶에 존재하는 견디기 힘든 '반복'들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소설은 반복을 본뜰만한 전거(典據)로 가치화하며, 또한 그렇게 모사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반복을 거쳐서 우수꽝스러운 탈가치화의 모순에 빠진다. 그런데, 또 하나 소설은 옳지 않은 반복 속에서 기계를 보고, 운명을 발견한다. 그처럼 무관심한 자신과 그 형식을 통해 삶의 신산스러움을 간파해내는 것이다. 웃는 사람은 숭고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사람의 몇 배로 관조적이고 그 몇 배로 그 대상에 무관심한 체험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숭고함이 관심의 계략, 전체주의의 수중에 놓인 세계 속에서, 무관심은 이제 숭고에서 희극성으로 스스로의 위상을 이동시킨다. 그 위치를 무대 혹은 세계 안에서 지시하자면 희극 공연의 객석에서 낄낄대는 관객의 모습이 될 것이다. 웃음은 어떤 단절, 즉 그 감정과 그 존재가 분리되는 곳에서만 가능해지는 상태를 상정할 때 가능한 심드렁함에 가깝다. 우리를 무감동한 상태에 있도록 하여 그 감정이 그 존재의 뿌리에 가 닿는 것을 방해하고 다른 감정과 치환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도 바로 웃음이다. 웃음은 무관심하기에 무차별하며, 따라서 매우 고립적으로 작동한다. 웃음의 무관심성은 적어도 웃음이 발생하는 그 지점에서는 매우 정적이고 확고한 위치만을 고수한다. 웃음은 인간 세계 내부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시선 자체는 언제나 세계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작동한다. "웃음은 완전히 예술에도, 삶에도 속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실제 삶의 주인공들인 그들의 행동거지를 마치 우리가 극장의 칸막이 좌석의 높은 곳에서 굽어보며 구경거리를 보듯이 볼 수 없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해 웃을 수 없을 것이다. (……) 웃음에는 우리 스스로가 갖고 있지 않을 때는 우리를 위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저의(底意)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LR:113)". 우리는 세계의 이해관계 속에서 웃지만 짐짓 세계와 무관하다는듯이 웃는다. 웃음은 무관심이라는 유일한 조건을 갖지만, 그 웃음이 터져나오는 상황 자체는 지극히 사회적인 것, 즉 관심의 상황이다. 숭고가 그러한 과도한 관심 속에서 파시즘과 손쉽고 지속적인 결합을 했던 것처럼, 웃음은 가치의 병렬식을 개별자 각각에서 수행하는 아나키한 사유들과는 곧잘 어울린다. 웃음은 기계 장치에 대한 응징, 불활적(不活的)인 것에 대한 조롱이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응징을 위한 기계장치이자 특이점이며 그 특이점의 이쪽 저쪽에 위치하는 것이 바로 웃음의 조건으로서의 무관심·무감동이고, 웃음의 효과로서의 응징·교정이다. 웃음은 밖에 있는 시선―적어도 세계의 한계에 위치한 시선이라는 전제 속에서 안의 기계성를 교정하는 기계장치이다. 그러나 오늘날 회의(懷疑)의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이 가능성의 에테르, '밖'이다. 다만, 다음과 같이 물음으로써 답변에 대한 질문을 맺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웃음은 지금 얼만큼 있으며 어떻게 있는가. 그리고 기억할 수 있는 어느 시점들에 위치한 유쾌한 독서들과 기억해 낼 수 있는 그 웃음의 발생 지점들을 생각해볼 때 웃음은 점점 세계 구석구석을 향해 또는 담론 주체 자신을 향해서 가혹하게 진군해 들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폭증하는 웃음의 맛은 우리에게 아주 가끔씩만 달다. 허다한 위악(僞惡)과 냉소의 서사들, 웃음 끝에 희화된 스스로를 발견하는 서사들의 증감을 가늠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계속되는 낄낄거림 속에서 언젠가는 그 낄낄거림 혹은 쓰디 쓴 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처럼 유쾌하게 부정적인 것들 속에서 웃던 숨겨진 저의의 개별자들은 많은 경우 유용하게 웃지만, 불행히도 그 웃음이 속한 공간의 꼴밖에는 하나같이 처음 것과는 다른 질감의 웃음으로 던져진다. 우리가 늙고 둔둥한 가치들과 그것의 기계적 작동을 보며 웃을 때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탈가치화의 전략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웃음은 매우 유용하고 해방적인 측면을 가질 것임도 틀림없다. 그러나 그러한 웃음도 때때로 기껏해야 새로운 신 옆에서 새로운 가치를 위해 웃는 행위 이상이 아니라는 사실, 또는 그러한 가치마저 찾기 힘든 상황에서 터져나온 우연적 쾌에 머물 수 있다는 우려 역시 타당한 논거들을 지닌다. 우리는 지금 악에게는 악을 돌려주고, 선이라면 악을 내어주는 경쾌하기 짝이 없은 세르반테스의 20세기적 유산 둘을 손에 쥐고 웃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웃음은 어디에 있으며, 왜 그렇게 있으며, 무엇을 위해 거기에 그만큼 있는 것인가. 그 웃음의 맛은 또한 어떠한가. 혹 그 입술의 끝에는 어떤 종류의 실이 달려있지나 않은가, 어떤가. 당신이 걷어 차야할 사다리는 마침내 발견되었는가, 어떤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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