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4호/단편소설/단풍 놀이/민선기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민선기
댓글 0건 조회 2,794회 작성일 02-06-14 20:43

본문

단편소설
단풍놀이
민선기




  그녀는 산길을 걷고 있다. 좌우로 가지각색의 색들이 산을 뒤덮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것을 보지 않는다. 자신의 발끝만 본다.
   언제 저렇게 단풍이 들었나.  
  옆에 걷고 있던 여자가 말한다. 말끝에 여운이 있는 것을 보니 그녀가 말 받기를 기다리는 것도 같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여자가 불편하다.
  그녀는 여자를 산사 앞에 있는 식당에서 만났다. 차에서 내려 그녀는 식당에 들어갔다. 배가 고파서는 아니었다. 점심 먹을 시간이었다. 산채 정식, 산채 비빔밥, 된장찌개, 김치찌개. 그녀는 비빔밥을 시켰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그것을 먹고 있었다. 산채 비빔밥은 산채보다 시금치나 콩나물이 더 많았다. 그녀는 시켜 놓기만 했지 거의 먹지 않은 채 일어났다. 여자를 본 것은 그 때였다. 사실은 여자가 아니라 앞에 놓인 동동주를 보았다. 여자는 맞은 편 자리에 앉아 동동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동동주를 시켰다.
   병으로 드릴까요 아니면 잔으로 드릴까요.
  식당 주인이 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잔으로 갖다 달라고 말하였다.
  동동주는 진한 누룩 냄새를 풍겼다. 집 앞 가게에서 파는 것과는 달랐다. 텁텁하지 않고, 말끔했다.
  식당 주인이 말했다.
   우리 집에서 직접 담은 거라우. 찾는 사람한테만 주려고.
  그녀는 동동주를 마시고 일어났다.
   가보시게?
  식당 주인이 앞치마에 손을 쓱쓱 문대었다. 그런데 식당 문을 나서는데 여자가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같이 가요.
  여자는 이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있었다.
  고개 마루턱에서 여자가 섰다.
   아무래도 이 길이 아닌가 보네.
  그녀는 여자 옆에 섰다. 식당을 나왔을 때, 여자는 그녀에게 말하였다. 대원암에 가려구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지 않았다.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기어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여자는 그녀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 또한 가려는 곳을 말하지 않았다.  
   분명히 대원암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는 쪽으로 왔는데...
  여자가 혼잣말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냐. 아냐. 이 길이 아닌 것 같아... 하기야 이 길이든 아니든 산길이야 다 이어져 있는 거니까 상관없지... 좀 쉬었다가 갑시다.
  여자가 길 가, 바위 위에 걸터앉으며 그녀에게 앉으라고 손짓한다. 그녀는 고개만 끄덕이고 앉지 않는다.
   언제 이렇게 단풍이 들었는지...
  여자가 말한다.
   그렇네요.
  그녀가 대답한다. 이제야 그것을 처음 보았다는 듯한 어투로. 여자가 바라본다. 그녀가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한 것은 처음이다.
   여유가 없나 봐요. 바쁘게 사나 보죠?
  여자가 묻는다. 그녀는 잠깐 여자의 말을 생각하다가 하늘을 본다. 맑다. 눈부시다.
  오늘 아침. 그녀는 깊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집이었으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방은 동쪽을 향해 있어 아침마다 눈까풀 위로 밝은 햇빛이 쏟아졌다. 그곳은 그녀의 방이 아니었다.
  어제 그녀는 그와 만났었다. 시간 있어? 전화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조금 차갑고, 딱딱했다. 그녀는 힘주어 입을 다물고 찻집 문을 열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가 펼친 신문을 내렸다. 그 위로 삐죽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맞은 편 의자에 앉으며 슬쩍 그의 얼굴을 살폈다. 한 쪽 입술을 약간 들어올리고 비웃는 듯한 표정. 같이 밤을 보내고 난 후 그의 표정은 줄곧 그랬었다. 이제 어떻게 할래? 그런 뜻을 내포한 표정. 그녀는 다시 한 번 힘주어 입을 다물었다. 그가 신문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제 기다렸어?
  다정다감한 그의 음성. 그녀는 저항하듯 꼿꼿하게 앉아 가슴을 폈다. 약간의 침묵. 이제 변명이 나올 차례야. 그녀는 생각하였다.
   망할 놈의 차. 공장에 갔다주고 나오니까 늦었지 뭐야.
  이제는 나에게 미룰 참이야. 그녀는 또 생각하였다.
   그래서 늦게 전화했는데... 받지 않대. 기다리다 잠들었나 보지?  
  그녀는 손으로 탁자 끝을 잡았다. 손가락 끝이 밑에 닿았다. 그녀는 손톱으로 천천히, 소리나지 않게 긁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화벨은 어젯밤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화났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그는 다른 길로 곧장 가 버릴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면서도 그녀는 늘 그것이 두려웠다. 그가 약간 나른하고, 졸린 표정으로 탁자 위에 있는 담뱃갑을 집어넣었다.
   일어나자. 차 안 마셔도 돼지?
  그녀는 그를 따라 일어났다. 찻집에서 나와 그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들은 저녁도 먹지 않고 가까운 여관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그녀의 귓부리에 대고 속삭였다.
   날 그렇게 원했니?
  그는 그녀의 말없음을, 뾰루퉁한 표정을 그렇게 단정짓고 있었다. 전날이 그녀의 생일이었던 것을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삼십 세 되는 생일날. 그녀가 그의 전화를 기다리며 보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초 세 개가 꽂혀 있는 케이크는, 그녀가 손가락으로 찔러 숭숭 구멍 뚫린 채 아직 탁자 위에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은 휴대폰이 부르르 떨렸다. 마지못한 듯 그가 일어났다. 그녀는 눈을 감고 그가 움직이는 소리를 좇았다. 그는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있을 터였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옷을 입는 소리. 그녀는 수치스러웠다. 조금 전, 그가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며 했던, 넌 말이야. 참 섬세해, 라는 말 때문에 더 수치스러웠다.
  그의 집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 휴대폰 소리는 늘 그녀와 그의 자리를 불안하게 했다. 그와 그녀의 시간에서 기준은 그의 아내였다. 아내가 부르면 그는 그녀에게 아주 조금 할애해 준 시간조차 동강내고 달려갔고, 아내가 친정에 가거나 누굴 만나거나 하면 보통 때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을 배당 받았다. 그의 아이도 그녀의 시간 속에 하나의 기준이었다. 아직 어려 그런지 아이는 아픈 날이 많았다. 감기도 코감기, 기침 감기, 열 감기 늘 종류가 달랐다. 넘어져서 이마가 까졌고, 장난치다 팔이 빠졌다. 그녀는 삼 년 동안, 그의 아이가 다치고 깨지고 아프며, 자라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어제 삼십의 고개를 꼴딱 넘었다.    그녀는 눈을 떴다.  
   배가 고프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말했다. 그가 힘없이 맺던 말끝을 갑자기 치켜올렸다.
   참. 저녁 안 먹었잖아. 같이 뭐 좀 먹을래?
  그는 고개를 흔드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는 바지를 꿰고 있었다. 그가 거울 앞에 서서 넥타이를 맸다.  
   같이 안 나갈 거야?
  그녀는 대답 대신 시트를 목까지 끌어올렸다. 그녀는 그가 시트를 걷어 내고 일으켜 주기를 기다렸다.
   일어나기가 귀찮구나.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하기야 피곤할거야.
  거울 속에 비친 그의 얼굴에 의미 있는 웃음이 배었다. 그녀는 무게 없는 홑겹의 시트를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의 기척이 가까이에서 들렸다.
   나 먼저 갈게. 푹 자고 나와.
  그는 시트 위 그녀의 어깨를 가만,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그가 가는 소리를 들었다. 멀어지는 발소리 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 잠시 후 문이 다시 열렸다. 그녀는 시트를 살짝 걷고 고개를 내밀었다. 문 틈 사이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눌러 놓는 것을 잊어서...
  그가 문 안쪽 손잡이, 가운데에 불쑥 솟은 잠굼쇠를 누르고 다시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며 잠가지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그의 것이 분명한 낮은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녀는 시트를 가슴까지 내렸다. 분노가 약간의 안도감과 미안함 그리고 죄의식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은 안에 귀중한 것이 있을 때에 문에 자물쇠를 건다. 잠굼쇠를 누르고 간 그의 작은 행동이 그녀의 감정을 변화시켰다.      
  그와 같이 있었을 때 들리지 않았던 소음들이 그가 가자마자 방안에 아주 빠르게 스며들었다. 옆방에서 샤워하는 소리, 좀 떨어진 큰길가에서 들리는 차소리, 천장을 울리는 위층에 든 사람들의 발소리와 두런거리는 소리, 낮은 웃음소리.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그런 것을 두려워했다. 혼자 있는 것보다 타인들이 사는 삶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자신의 모습이. 그러기 시작한 것은 스물 아홉이 지나면서부터였다.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남편의 무관심을 호소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녀는 꼼짝하지 않고, 들리는 모든 소리에 귀를 열었다. 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아이를 안는 그의 손을, 아내의 어깨에 올려놓는 그의 팔을 생각하지 않으려 그녀는, 귀를 활짝 열었다.
  그와 그의 아내가 웃고 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 그 모습을 지웠다. 위층에서 물 트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내와 눈을 부딪치며 웃는다.
  그녀는 얼굴을 베개에 묻었다. 위층에서 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상상 속에서, 그의 모습이, 위아래 옆 그녀가 누워 있는 방을 둘러싼 방에서 나는 소리와 스치고, 어긋나고, 겹쳤다.  
  시간은 어두운 동굴 같은 어둠을 지나고 있었다. 아주 느릿느릿하게. 아침이 오기에는 한참이 걸릴 터였다. 밤이 지나면서, 잠굼쇠를 누른 그의 행동이 불러일으킨 그의 아내에 대한 죄스러움과 그녀 자신에 대한 안도감이 점점 절망감으로 변했다. 그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일어났을 때, 그녀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시트 한 장으로 몸을 둘둘 말고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7시. 그녀는 샤워를 했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 앉아 화장하고, 머리 빗고,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들을 하나씩 걸쳐 입었다. 방에서 나올 때, 그녀는 잠깐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한 잠도 자지 않고 보낸 시간은 그녀의 눈가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여자가 말한다.
   단풍이 참 곱다. 금방 떨어질 거면서 왜 저리 곱누?
   ... 정말 단풍이 좋네요.
   ... 그 나이에도 단풍이 좋아요? 아직 삼십도 안 된 것 같은데...
  여자가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댄다.  
   나는 그 나이 때, 단풍이 좋은 지도 몰랐어요.
  그녀는 여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애들 데리고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그게 언제냐?...
  그녀가 가물가물 기억을 더듬듯 눈시울을 좁힌다.
   스물 여섯이었다우. 혼자 되었을 때가... 지금 환갑을 눈앞에 두었으니... 몇 년 전이냐... 아니 몇 십 년 전이지... 아들만 셋이에요. 큰놈은 의사, 작은놈은 군인, 막내는 교수.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지요. 지 아빌 닮아서 키도 훤칠하고, 잘 생기고.  
   다 잘 키우셨네요.
  그녀는 마지못해 여자의 말을 받는다.  
   키우기는... 그냥 지들이 컸지. 낳아 놓으니까 지들끼리 쑥쑥 큽디다. 옥수수 대 자라듯 쑥쑥... 그래도 에미 위하는 것은 누구 못지 않다우.
   효잔가 봐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정말 날이 좋지요? 라고 묻는다. 그녀는 하늘을 본다. 아마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회사로 가는 대신 이곳으로 온 이유는. 여관에서 나와서 본 것과 다름없이 맑고, 밝은 햇빛이다.
  그녀는 여관 문을 나서자마자 쏟아져내리는 햇빛을 견딜 수 없었다. 아니 햇빛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하루의 시간을 보낼 자신을 견딜 수 없었다. 밤새 그녀를 짓누른 절망감이 햇빛 아래에서 더 무거워졌다. 그녀는 오늘 회사에서 있을 품평회를 기억했다. 그녀가 디자인한 것도 목록에 올라 있었다. 뽑힌 것만이 상품으로 만들어져 진열장에 걸릴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일에 한동안 매달렸다. 시장조사와 개인 취향에 대한 조사. 그녀는 자신이 디자인한 것이 뽑히기를 원했다. 그녀는 호텔 문 앞에 선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회사가 있는 거리의 이름을 댔다. 운전사가 택시를 출발시켰다. 회사 근처에 왔을 때쯤이었다. 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녀는 운전사에게 이 지역의 이름을 댔다. 택시는 회사 바로 앞에서 유턴 했다. 햇빛이 택시 안 좌석 끝까지 닿았다.
   대원암에 아는 사람이 있어요. 누구를 찾으려고 하는데 거기 있는 사람이 안다고 해서... 들어보고 해 넘어가기 전에 내려와야지... 거기는 오늘 산에서 내려갈거유?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다 만다.  
   가보구요.
  여자가 몸을 일으킨다. 운동화를 신은 여자의 발걸음은 그녀보다 가볍다. 검은 바지와 같은 색의 조끼, 흰 블라우스 그리고 뒤로 묶어 검은 망으로 싼 머리칼. 종교단체에 있는 사람처럼 여자의 옷차림이 단정하다.
  한참 걷다 보니 산 속에 까만 기와가 보인다. 좁은 길이 산 속으로 꼬불꼬불 나 있다.
   저긴가?
  여자가 걸음을 서두른다. 좁지만 그 길도 시멘트로 발라져 있다. 까만 기와 아래 나무로 된 문이 있다. 담 없이 대문만 덜렁 서 있다. 은적암(隱寂巖)이라는 글씨를 본 여자가,
   대원암이 아니네.
  라고 말한다. 그녀는 물끄러미 은적암이라고 쓰인 글씨를 본다.
  그녀가 찾아 온 곳. 삼년 전 그와 처음 만난 곳의 이름이 은적암이었다. 아니 그곳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만났다. 그는 마악 이곳을 나오고 있었고, 그녀는 들어가려는 중이었다. 둘은 가볍게 몸을 부딪쳤다. 그녀는 그 때, 지금 다니는 회사에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았었다. 사실 그녀는 속옷을 디자인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눈에 띄는 화려한 의상을 디자인하고 싶었다. 투피스나 원피스 그리고 파티 드레스 같은 것들. 그러나 그녀는 원하는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외출복 속에 입는 속옷의 디자인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갈등을 느꼈고, 그만두고 싶어했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녀에게 말했다.
   뭐가 있을 것 같아 들어가 봤는데, 볼 것 하나도 없어요.
  그러고는 고집스럽게 들어가는 그녀를 주춤주춤 따라 다녔다. 은적암을 보고 난 후, 그들은 같이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아래 식당에서 동동주를 먹었다. 건축 설계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하고 있는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집을 설계하다 보면 예전과 사람들의 취향이 변하는 것을 느끼죠. 확실히 요새 사람들은 전보다 햇빛을 많이 찾아요. 창도 크고,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훤한 집을 좋아하죠.  
  그녀가 말 중간에 끼어들었다.
   취향이 변한 것이 아니라 여유가 생긴 거겠죠.  
  그가 고개를 꺄우뚱하더니 말했다.
   글쎄요. 여유라면 좀 다를 거예요... 나는 돈을 많이 벌어 내 집을 짓게 된다면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는 책장에 꽂힌 책 한 권을 만지면 스르륵 책장이 돌아 나타나는 비밀의 공간을 하나 만들어 놓고 싶다고 했다.
   좋잖아요.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비밀스러움이 있다, 생각하면.      
  그녀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런데 자신이 그만두려 하는 그 일에 그가 호기심을 보였다. 약간 알딸딸하게 올라오는 취기 때문이었나. 그녀는 속옷을 디자인하고 싶지는 않다고 실제보다 과장되게 표현했다. 그러자 그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나는 정말 모르겠네요. 왜 그 일이 싫은지.  
  그들은 같이 버스를 타고 그곳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길을 연장해 왔고 그러는 동안 그녀는 그의 비밀스러운 방이 되었다.        
  그녀는 무심하게 목소리를 지어 말한다.
   온 길이니까 들어가서 어떻게 가면 대원암에 가는지 물어 보죠.
  여자는 대문밖에 서 있고, 그녀는 안으로 들어간다. 마당 한 가운데 우물가가 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방이 둘러 서 있다. 그녀는 들어가면서 흘끔흘끔 좁은 마루와 방을 엿본다. 정갈하고 조용하다. 어디선가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소리는 유리문 안에서 들리고 있다. 그녀는 유리 안을 엿본다. 스님 한 명과 여자 둘이 있다. 부엌이다. 그들은 싱크대 앞에 앉아 나물을 다듬고 있다.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는지 키득키득 웃는다. 그녀는 유리문을 톡톡 두드린다. 웃음소리와 말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고, 세 사람의 시선이 유리문 너머 그녀의 얼굴에 머무른다. 미닫이문이 부드럽게 열린다.
   말씀 좀 묻겠는데요.
   ...
  얼굴에 나타난 웃음기를 갑자기 지운 사람들한테 미안해, 그녀는 서둘러 입을 연다.
   대원암에 가려고 하는데요.
   대원암요?
  스님이 나물을 손에 든 채 그녀를 바라본다.
   여기가 아닌데...
   길을 찾을 수가 없어서요.
  스님이 앉은 채로 잠시 생각한다.
   대원암이라면 너무 많이 올라왔어요. 여기 오는 길 중간에 옆에 작은 길이 나 있는데... 거기가 대원암 가는 길이에요.
  그녀는 스님의 말에 생각하는 척 갸웃한다. 그러나 그녀의 기억에 작은 길은 없다. 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네 에. 고맙습니다.
  뒤도는데 여자가 바로 뒤에 있다. 어느 사이 따라 들어온 모양이다.
   너무 많이 올라왔다는데요. 다시 내려가야겠어요.
  여자가 그녀의 말에 발걸음을 돌린다. 그런데 그냥 서 있는 그녀를 보더니 멈춘다. 그리고,
   어떻게 가지?
  혼잣말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뇌까린다. 여자가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여자를 가만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뒤돌아 부엌문을 연다.
   혹시 여기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나요?
   대원암 찾아온 길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스님이 되묻는다.
   아. 같이 온 분이 그렇고 저는 아니에요.
  그녀는 뒤에 있는 여자를 의식하며 약간 소리를 높인다. 그녀는 여자가 혼자 가길 바란다. 그러나 여자는 뒤에 선 채 움직이지 않는다. 스님은 곁에 앉은 여자와 짧게 시선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나물이 담긴 양푼 안에 손을 넣어 휘저으며 말한다.
   아무나 와서 자는 절이 아닌데... 어쨌든 정 잘 데가 없으면 오세요.
  스님이 말했던 길은 찾을 수 없다. 그녀와 여자는 한참 동안 똑같은 길을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녀는 짜증이 인다. 여자로 인해 생각이 흐트러지고 있다. 여자를 떼내고 싶다. 그러나 여자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슬며시 웃고만 있다. 그녀는 여자를 떼내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표정을 다독인다. 산 속에 좁은 오솔길 하나가 있다.
   여기로 가볼까.
  여자가 오솔길로 발을 들인다. 길은 잡초로 덮여 있다. 사람들이 별로 오가지 않는 양, 사람들이 드나든 흔적이 없다. 여자의 바지 단이 길 옆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건드린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풀이 넘어졌다 다시 고개를 든다. 걷다 보니 아예 길이 없다. 물이 말라 돌이 드러난 계곡이 앞에 있다. 여자는 망설이지 않고 계곡 안으로 들어간다. 여자가 돌을 밞고 기우뚱거리며 건너편 언덕으로 오른다.
   물이 없어요.
  여자가 그녀를 뒤돌아본다. 그녀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자는 그녀가 길을 못 찾아 포기할 즈음부터 앞서 걷고 있었다. 여자가 다시 뒤돌아본다. 그녀는 계곡 안으로 들어간다.    
   이 길이 맞는 것 같네.
  그녀를 쳐다보지 않은 채 여자가 말한다. 역시 길은 없다. 길 없는 곳에서, 여자는 이 길이 맞다고 한다. 길 없이 온갖 풀들이 엉크러져 발을 내딛기도 어려운 길을 여자는 쉽게 걸어간다.
   칡 좀 봐. 산에 칡이 많네. 칡은 아무데서나 이렇게 잘 자란다오.
  여자가 허리를 굽혀 칡 이파리를 만진다. 아주 조심스럽게 아기 얼굴을 만지듯 칡 이파리를 만진다.
   이리 와요. 바로 요기 길이 있으니까.
  길 없는 곳에 와서 여자는 계속 길이 보인다고 한다. 그녀는 뭔가에 홀린 기분이다. 칡넝쿨을 헤치고 걸어나가자 조그만 텃밭이 있다. 고추가 자라고 있다.
   밭이 있으면 사람이 다니는 길이 있는 법이에요.
  여자는 밭과 이어진 작은 길을 찾아낸다. 비탈길 위에 까만 기와가 드러난다.
  여자가 말한다.
   대원암일거예요.
  산 속에서 헤맬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단풍들이 암자를 둘러싸고 펼쳐져 있다. 암자는 은적암에 비해 허름하다. 옆으로 요사채가 있고, 가운데에 대원암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안채가 있고, 다른 한 옆으로 뭔지 알 수 없는 건물이 있다. 요사채 앞 아궁이에 희고, 검은 고양이 두 마리가 몸을 얽고 앉아 있다. 고양이는 졸린 눈을 하고 있다. 털을 쓸어 내리자 가르릉 소리를 낸다. 아무도 없나. 빈 뜰을 둘러보는데 뭔지 알 수 없는 건물 안에서 공양주가 나온다. 헝클어진 파마머리에 어울리지 않게 잿빛 승복을 입고 있다.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눈이 작은, 사십쯤 돼 보이는 여자다.
  신을 꿰기도 전에 어떻게 왔냐, 고 묻던 공양주의 얼굴이 갑자기 환하게 펴진다.
   아니. 이게 누구랴. 여기까지 웬일이래유.
  공양주가 달려와 여자의 손을 잡는다.
   그냥. 저기... 사실은...
  말을 흐리던 여자가 공양주에게 손을 잡힌 채 여자를 힐끔거린다.
   저기... 진우스님 찾아왔어. 여기 진우스님 계시지?
   진우스님은 누구래? 진우스님이 누군데 찾는데유?...
  그녀는 여자와 공양주를 본다.
   모르는가 보네... 여기 기시다고 해서 왔는데...
   진우스님이구 뭔 스님이구 간에 얼렁 들어오기나 해요... 이게 얼만만이예유.
   진우스님을 찾아야 하는데...
  공양주에게 거의 끌려들어가다시피하며 여자가 그녀를 향해 손짓한다. 그제야 공양주는 그녀를 발견하고 여자에게 누구냐, 고 묻는다. 여자가 그녀를 바라본 채 싱긋 웃는다.
   양 딸.
  여자의 말에 그녀는 어리벙벙해진다.

  뭔지 알 수 없었던 건물은 부엌과 식당이다. 따뜻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냉기가 있다. 낡은 캐시밀론 담요를 펼쳐 공양주는 여자와 그녀에게 자리를 만들어 준다. 가운데는 양은 밥상이 있고, 몇 개의 송편이 만들어져 있다. 속넣지 않은 것도 있다.
   웬 송편이래?
  여자의 말에 공양주가 싱긋 웃으며,
   여기 스님 생신이 내일이잖어.
  라고 말한다. 나갔다 들어온 여자의 손이 젖어 있다. 여자가 밥상에 다가앉는다.  
   여기 스님은 거기 때문에 잘 얻어 잡숫네.
  여자는 흰 쌀가루를 조금 떼어 손바닥에 놓고 둥글린다. 가만히 앉은 그녀에게 공양주가 묻는다.
   송편 빚을 줄 알아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스님 생신 음식 만드는 것도 업을 없애는 일인데 한 번 해보려우?
  공양주는 잇몸을 훤히 드러내며 넉살좋게 웃는다. 그녀는 일어나 부엌 바로 앞에 있는 세면장에서 손을 씻고 들어온다.
   아이구. 조가비 모양이네.
  공양주는 그녀가 만들어 놓은 송편을 들어 보이며 히히히 웃는다.
   낭중에 딸 낳으면 이쁘겄네. 이 조갑지 마냥.
  초승달 모양인 송편들 사이에 그녀가 만든 조가비 모양의 송편이 놓인다. 그녀는 그것을 바라본다. 그런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여자는 손을 재게 놀린다. 그녀가 한 개 만드는 사이, 두 개를 만든다. 속 넣을 홈을 만들기 위해 손가락 하나를 넣고 돌려 모양을 다듬는 여자의 얼굴이 편안하다.
   몇 년만에 빚어 보는 송편이야. 맨날 바쁘게 살다 보니 송편 빚는 것도 잊어버렸네...
  다 만든 송편을 양은 밥상 위에 올려놓으며 여자가 말한다.
   참 성님네 애들 많이 컸겠네.
  공양주가 빗어 놓은 송편이 마르지 않도록 젖은 삼베 보자기를 덮으며 묻는다.
   그럼. 올해 손주가 초등 학교 입학했는걸.  
   성님은 참 좋겄수. 애들이 다 잘되어서.
   다 잘 컸지. 훤칠하고, 잘 생기고... 참 그 집 애는 지금 몇 살이야?
   아이구. 지금서 중 3이 됐어유. 내년에 고등핵교 들어가지유...  
   벌써 중학교 다녀? 세월 참 빠르다. 코 찔찔 흘리고 다니던 것이 벌써 그렇게 컸으니...
   그때 성님 덕 많이 봤지유. 애는 잘 먹어야 한다고 다른 보살들 눈치채지 않게 도시락에 멸치 꽁댕이도 넣어 주고. 성님이 아니었으면 그나마도 못 넣었을 틴데... 성님이 어디 우리네처럼 올 데 갈 데 없어 공양주 노릇한 건가요. 그래서 그런가 스님들도 성님은 못 건들였잖아유? 공연히 절에 와서 요양하시는 분을 가지고 공양주 노릇하면 병 고친다고 꼬셔가지고설라무네 험한 일 시키구... 그런 거 보면 스님들도 보통 아니여유.
  공양주의 말에 여자가 빙그레 웃는다.
   그래도 그때 몸 많이 좋아졌어. 고됐어도, 공기가 좋아서 그랬나.
  그녀는 송편을 빗으며 여자와 공양주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랬으면 다행이지유. 나는 바람난 서방 뵈기 싫어 나와서 그때부터 계속 이렇게 떠돌고만 있으니... 애도 지 에미 잘 못 만나 고생이고...
  바람난 서방. 송편을 빗던 그녀의 손이 한순간 가볍게 바르르 떤다.  
   다 지난 세월이지... 애 아버지 소식은 들어봤어?
  공양주가 빗던 송편을 확 우그러뜨린다.
   그 인사 잘 먹고 살면 나는 몰라도 애는 벌써 찾아갔겄지. 그냥 있겠어유? 술에 쩔고, 지집에 쩔어서 사람 꼴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 번 전해들었지유.  
  그녀는 송편 끝마무리를 하느라 애쓴다. 껍데기를 너무 얇게 만들었는지 자꾸만 옆이 터져 녹색 녹두 계피가 비어져나온다.
   여시같은 지지배. 끝까정 책임지지 못 헐 일이면 중간에 사단을 내야지. 지 신세 망치고, 내 신세 망치고. 애까정 이렇게 맨들고...
  공양주는 해묵은 화를 삭히느라 애꿎은 송편 반죽을 이리 굴려 메치고, 저리 굴려 메치며 소리를 높인다.  
   멀쩡한 처녀가 애 딸린 유부남이 무에 좋다고 붙어먹어. 먹기를...
  그녀는 터진 송편 옆구리에 반죽을 조금 떼어다 붙인다. 그러나 틈은 메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떨리던 손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아내가 있는, 아이가 있는 그. 그와 보내는 하루 중 약간의 시간을 위해 살았던 그녀. 그녀는 그 이상, 다른 무엇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늘 사람 눈을 피해 그를 만났다. 그녀는 그것이 대단한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아내는 자신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더 많은 것을 받았지만, 세상의 시선 앞에 고개를 떨구어야 하는 사람은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는 모순인 그와의 관계를 받아들였다. 세상의 규칙이 그랬다. 그녀는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그 규칙을 배웠다. 퉤퉤 침을 뱉거나 손가락으로 '찜'을 해 놓으면 이건 내 것이다. 아무도 건들지 말아라, 는. 그는, 그의 아내가 먼저 '찜'을 해 놓은 사람이었다. 또 하나, 그와의 관계를 지탱해 주는 것이 있었다.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젊었고, 그래서 이 세상에 자기 것이 또 하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 그녀에게 있어 그는 일부분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녀는 그와 나란히 서지 않고 그를 향해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그는 그녀의 전부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책장에 꽂힌 하나의 책을 건드리는 그의 손에 의해 열리는 비밀스러운 방이 되었다.
  그런데, 공양주의 말을 들으며 차츰차츰 손가락의 떨림이 잦아들고 있다.
   그만 해 둬. 다 지난 일인 걸. 그렇게 따지면 참지 못하고 나온 거기 책임도 크지... 애 생각해서 그냥 있지. 왜 나왔어? 나 같은 과부도 이제껏 사는데... 다 지 탓이지... 다 지 탓인 게야.
  여자의 말에 공양주가 불퉁거리던 말씨를 누그러뜨린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지유... 그건 그렇고 성님 손이 어쩜 그렇게 곱수?
  여자가 송편을 빗다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정말 곱네요.
  그녀도 거죽을 덧붙인 송편을 양은 밥상 위에 내려놓으며 공양주의 말을 거든다. 할 말을 찾은 것이, 눈이 갈 곳을 찾은 것이 다행스럽다.
   이게 고와? 나이 먹어서 찌글찌글하지. 거기 손 좀 한 번 내놔 봐.
  그녀는 두어 번의 채근에 송편을 빗느라 하얀 쌀가루가 더깨 진 손을 내민다.  
   봐. 젊은 사람 손하고 비교하니까 확실히 다르지.
  여자가 그녀의 손 옆에 자신의 손을 나란히 한다. 그녀는 여자가 욕심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여자의 손을 곱다고 한 것은 여자의 나이를 마음에 두고 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나이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단지 '손'만을 생각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도, 그 흐름 동안 거치게 된 일들도 상관이 없다.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비추어 볼 때 다 그런 함정에 빠지는 걸까? 그래서 공양주도 그렇게 열을 내며 해묵은 감정을 터뜨린 걸까.  
  여자가 손을 슬그머니 오그려뜨린다. 그녀는, 여자가 자신의 나이에 비해 거의 절반밖에 먹지 않은 자신과의 터무니없는 비교에 움츠러들었다고 생각한다.
   애들 먹여 살리느라 지금까지 쉴 새 없이 살았지. 돈을 많이 준다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그러다 보니까 이렇게 나이를 먹었어...
  여자가 뒤늦게 세월의 흐름을 느꼈는지 송편에 깊은 한숨을 넣어 빗는다. 한숨을 속에 넣은 송편의 배가 불룩하다.
  소리가 난다. 공양주가 일어나 부엌문을 연다.
   오셨슈?
  그녀는 밖을 내다본다. 스님이 쭈그리고 앉아 등에 멘 지게 안의 것을 부리고 있다. 불그스레한 늙은 호박들이 주르륵 마당에 떨어진다. 스님은 공양주의 말에 대답 없이 지게를 내려놓고 옆에 있는 싸리비를 든다.  
   손님들도 오셨는데 조금 쉬었다 하시지...
  스님은 대꾸하지 않는다. 싸리비를 들고 법당 옆으로 난 길을 올라간다.
   아이구. 성질 하구는. 인사라도 하면 어디 덫이 나나.
  공양주가 혀를 차며 문을 닫는다.
   쉬는 법이 없지. 일 하는 것이 공부라나. 뭐라나. 손님들이 와도 모른 척, 뭘 말해도 모른 척. 저러니 암자 꼴이 이 모양이지.
  공양주가 비아냥거리며 자리에 앉는다. 여자는 스님의 이름이 뭐냐, 고 묻는다.
   이름은 무슨 이름유? 아무 것도 없슈. 그냥 스님이지. 그런 건 다 쓸데없는 짓거리라구 합디다. 어딘가 큰절에 계시다가 성불하신다고 예 틀어박혔다나봐요. ..아이구. 벌써 다 빗었네.
  공양주가 양은 밥상을 싱크대 근처로 옮겨 놓는다. 여자가 말한다.
   그래도 거기 애 학비 대서 가르쳐 주잖아. 애비도 없는 자식한테 애비 노릇 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
  공양주가 사납게 그릇을 닦으며 대꾸한다.  
   저도 그 값은 해유. 이 산골 구석에 나 거튼 사람 아니면 누가 온대유. 지집 밝히는 사내가 지긋지긋해 예서 사는 거지.  
   그래도 저 스님 아녔어 봐. 여자는 품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밥해 먹일 사람이 있어야 되는 거야.
  그녀는 부엌에서 나온다. 흰 쌀가루가 묻은 손바닥에 손금대로 좍좍 주름이 가 있다. 자디잔 마음고생이 많겠다고 말을 들은 손금이다. 그녀는 꺼슬꺼슬한 손바닥을 마주 대고 비빈다. 흰 쌀가루가 부스스 땅바닥에 쏟아진다. 여자와 공양주는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세숫대야에 물을 퍼 손을 닦는다. 물이 쌀가루로 부얘지고, 그녀의 손바닥이 매끈해진다.
  스님은 저쪽 고갯길에서 빗자루 질을 하고 있다. 멀리 있는데도 쓰윽쓰윽 빗자루질 소리가 들린다. 스님의 비 앞에 낙엽이 잔뜩 모여 있다. 아궁이에 웅크린 채 몸을 붙이고 있던 두 마리의 고양이는 어디론지 가고 없다.  
  그녀는 화장실에 갔다가 곧장 산 쪽으로 발을 옮긴다. 조금 들어가자 통나무가 어슷하게 세워져 있고 표고버섯이 자라고 있다. 햇빛이 들지 않고, 바람이 통하고, 습기가 적당한 곳. 버섯은 그런 곳에서만 자란다. 그녀는 나무에 뿌리박고 자라는 올망졸망한 버섯을 바라보다 대원암과의 거리를 가늠한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다.  
  작년에 그는 집을 지었다. 그와 그의 가족이 살집이었다. 그녀는 비밀 방을 만들었냐, 고 물었다. 그는 아직도 그걸 기억하느냐, 고 말하며 비짓 웃었다.
   막상 집을 지려고 하니까 생각이 달라지대. 아무래도 집은 크고, 밝고, 숨김없어야 하지 않나, 싶고. 아이도 있는데...  필요하면 집에서 좀 떨어진 데다 따로 하나 만들면 되지, 구태여 집안에 비밀의 방을 둘 이유가 어디 있겠어?  
  버섯의 갓이 클수록 갈색으로 쩍쩍 갈라져 있다. 제 때에 따지 않아 먹지도 못할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돌린다. 그런데 갑자기 빨간 보자기 같은 천이 산비탈 사이에서 휙 스친다. 그녀는 찬찬히 살핀다. 빨간 보자기가 아니다. 산아래 있는 빨간 단풍나무에 매달린 붉은 이파리들이다. 그녀는 길 가 바위에 앉아 빨간 보자기 같은 단풍을 본다. 그녀는 오늘 회사 자체의 품평회에 내놓은 자신의 작품을 생각한다. 장식 없이 과감하게 노출시킨 여성 팬티. 그녀는 단풍잎처럼 빨간 색상을 골랐다. 바람도 없는데  빨간보자기같은 단풍나무 한 모서리가 허물어지듯 떨어진다.    
  
  형광등이 있는데도 공양주는 기어코 초를 켰다. 촛농을 떼내지 않은 초는 불빛이 흐리다. 심지가 길어 그을음이 촛불 위로 거무스름하게 새나온다.
  그녀는 결국 대원암에 머무르게 되었다. 저녁을 먹고, 일어나려고 하자 여자가 덩달아 엉덩이를 들었다. 공양주가 진우스님도 찾지 않고 그냥 갈 거냐고 하자, 여자는 다시 오지. 뭐. 말꼬리를 흐리며 주춤주춤 그녀를 따라 나섰다. 공양주는, 가지 말고 이따가 산아래 내려가서 동동주 먹으면서 놀다 자고 낼 가, 라고 다시 한 번 붙들다가 뜬금없이 그녀를 붙잡고 늘어졌다.
   내려가다 차 없으면 어쩌려고 간댜?
  공양주는 여자와 그녀의 관계가 양어머니와 양딸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은적암에 얘기해 놓고 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어서 여기를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공양주가 입을 실룩이며 그 부자 암자에 적선할 일이 있으면 자기한테나 하라고 볼 멘 소리를 했다. 아무리 그랬어도, 여자가 따라오지 않으면 그녀는 갔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는 주춤주춤 계속 따라나섰고, 공양주도 슬그머니 붙들었고, 그래서 그녀는 다시 대원암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여자가 왜 그렇게 따라붙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자신이 그 여자를 왜 떼내지 못하는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멀리서 컹컹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아들 오는 가보네.
  공양주가 다른 초에 불붙여 들고 나간다.
  그녀는 여자와 단 둘이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해 방안을 둘러본다. 흐린 촛불에 비추어 생긴 여자의 그림자가 천장까지 이어져 있다. 그녀의 그림자도 곁에 나란히 키를 키우고 있다. 그림자의 목 부분, 천장 밑 벽 위쪽에 상장이 나란히 붙어 있다. 공양주 아들이 타 온 것이 분명했다. 우등상. 모범상. 나무 액자의 흰 틀은 오래도록 닦지 않았는지 누렇게 찌들어 있다.  
   공부를 잘 하는가 보네.
  여자도 그것을 보고 있었는가 보다. 여자가 한 마디를 덧붙인다.
   이 맛으루다 사는 거지. 세상에 발 담그고.
  바로 옆방에 스님이 있는 것을 알아 그런지 여자는 목소리를 한껏 죽인다. 여자의 목소리가 음산하다.
  아랫목으로 엉덩이를 미는데 버스럭 뭔가 깔리는 소리가 난다. 그녀는 얼른  아랫목에 깔린 얇은 담요를 들춘다. 밑에, 벌레 먹어 허옇게 변한 고추가 한 뭉텅이 깔려 있다.
   다 바스러졌네.
  그녀는 바스러진 고추를 다독인다. 여자가 힐끔 보더니, 때깔이 그래서 어디 먹겠나, 허기야 부엌이며 방이며 살림살이도 오죽잖네, 라고 말한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방안까지 들린다. 앳띤 남자 목소리와 공양주의 목소리가 섞인다. 여자가 문을 연다.
   지금에서 오는 거야?
  여자의 말에 공양주가 아들 대신, 보충 수업하느라고 늦게 오지유,라고 대답한다. 여자가, 이 컴컴한 산길을 혼자 걸어 오는 거야? 라고 말하며 나간다.
  옆방의 소리가 벽에 스민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걷는 소리. 하루종일 일하고 들어와서 또 늦게까지 공부한다는 스님의 인기척이다. 그녀는 귀를 기울인다. 독경이라도 하면 좋겠는데 스님은 가만가만 움직이기만 한다.          
  문이 열리고, 공양주와 여자가 들어온다. 세수한 여자의 얼굴에 물기가 남아 있다.
   아들 참 잘생겼어. 애가 아주 훤하네. 누구 닮았나.
  여자의 말에 공양주의 입이 헤벌쭉 벌어진다.
   누구를 닮아요. 닮기는... 나를 닮았지.
  그녀는 웃느라 더 두드러지는 공양주의 광대뼈를 보며 아들의 얼굴을 상상한다. 문이 열린다.  
   엄마.
  아직 근육이 맺히지 않은 가는 팔이 방으로 쑥 들어온다. 손에 흰 교복 윗도리와 양말, 러닝이 들려 있다. 공양주는 깨끗하게 빨았냐, 고 물으며 빨래를 받아 툭툭 턴다. 그녀의 얼굴에 물기가 튄다.
   애가 고생이네. 이렇게 늦게 와서 빨래를 다 하니...
  여자의 말에 공양주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럼 그것도 못해유? 다 컸는디...
  방을 가로질러 멘 빨랫줄에 중학생 교복과 러닝, 양말이 걸린다. 공양주는 다 널어놓고 나서 중얼거린다.  
   팬티가 없네. 챙피해서 그러나.
  그녀는 공양주의 아들이 공양주의 얼굴을 전혀 닮지 않았을 거라고 짐작한다.
  공양주가 방에 딸린 다락에서 이부자리를 꺼낸다. 두 채의 이부자리. 그녀는 얼른 요 하나를 끌어당긴다.
   나는 혼자 깔래요.
  공양주가 낄낄 웃는다.
   같이 자면 누가 잡아먹는대?
  그녀는 좀 떨어지게 자신의 것을 펼쳐 놓는다. 이부자리는 깨끗하지 않다. 베개에 침 흘린 자국이 있다. 지퍼 달린 뒷부분으로 돌려놓는데 여자가 말한다.
   이부자리 좀 깨끗하게 해 놓지.
   성님도. 그게 저절로 되간디유? 다 돈이 있어야 되지.
  공양주의 말에 여자가 잠깐 시선을 잃는다. 아주 잠깐이다. 여자가 말한다.
   내가 보내 줄까? 만져 둔 이부자리 있는데.
   정말유?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으면 내가 덮던 것도 주구. 홑청만 새로 하면 아주 새건대.      
  공양주가 헤헤거린다. 여자는 꾀죄죄한 이부자리를 새 이불인 양, 손으로 천천히 더듬는다.
  그녀는 방에서 나왔다. 밖은 깜깜했다. 도심의 어둠과 다르게 꽉 눌러 놓은 것처럼 한 올의 틈도 없다. 스님의 방에서, 아들의 방에서 흘러나온 불빛도 몇 걸음 나오자마자 어둠 속에서 맥을 추지 못한다. 낮에 현란했던 단풍들도 어둠 속에서 색을 죽이고 있다. 그녀는 변소에 가지 않고 빈터에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눈다. 계곡에 물 내려가는 소리에 오줌누는 소리가 가려진다. 괜히 조급증이 일어 그녀는 얼른 바지를 추켜올린다. 그녀는 밑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그녀는 몇 발자국 걷다 말고 암자로 되돌아온다. 절망스러웠던 오늘 새벽의 그 어둠보다 더 진한 어둠 속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생경해서다. 오늘 새벽의 그 어둠은 두려웠지, 낯설지는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암자로 돌아온다.
  그녀가 들어오고 나서 공양주는 불을 껐다. 동동주를 먹으러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 말에 여자가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가 못 본 체 하자 여자가 그만두지, 라고 말해 공양주는 화가 조금 난 듯 했다. 불 끄기 전에 여자는 옷을 벗었다. 까만 레이스 천으로 된 러닝과 즈로오즈를 입고 있었다. 공양주는, 혼자 살면서 속옷이 왜 이리 멋지대? 하며 여자를 놀렸다. 잿빛 승복을 벗은 공양주의 몸에 입혀진 속옷은 반소매 남자 러닝이었다. 너무 많이 빨아 목둘레가 늘어지고 색도 바래 있었다.
  춥지 않았지만 그녀는 옷을 다 입은 채 이부자리 속에 들어갔다. 전날 밤 한 잠도 자지 못한 그녀의 눈까풀이 어둠 속에서 쉽게 감긴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개 짖는 소리. 그녀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깨었다 몇 번 하다가 눈을 뜬다. 창호지 바른 문에 파르스름한 새벽빛이 들어온다. 여자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 여자가 웃는다.
   왜요?
  그녀가 묻자,
   그냥. 거기 보니까 웃음이 나오네.
  여자가 말한다.
   왜요?
   베개가 더러워서 마음에 안들지?... 싫다 소리도 못하고...
  그녀는 어렵게 웃는다.        
   처음 볼 때부터 그렇다 싶었어... 싫다 소리 못하고, 좋다 소리 못하고...
  웅얼거리는 말꼬리 속에 하나의 말이 또렷하게 들린다.
   내가 꼭 그랬거든.
  그녀는 입을 약간 벌린 채 여자를 바라본다. 그랬구나. 알면서 나를 보내지 않았구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침 공양은 스님과 여자와 공양주와 같이 했다. 스님은 어제 송편을 빗어 놓았던 양은 밥상을 받고, 그녀네는 식탁에 앉는다. 미역국만 빼고, 엊저녁과 똑같은 반찬이 상위에 올라 있다. 그녀는 밥을 건드리지 않는다.
   생신 상은 이따 올릴게요.
  그릇에 물을 부어 마시던 스님이 묵뚝뚝하게 말한다.
   생일이 무슨 소용여. 쓸데없이.
  공양주가 빈 그릇을 개수대에 넣으며 눈을 흘긴다.
   그려도 내가 있으니께 생신을 챙겨드리는거지. 암말 않고 그냥 받으면 안돼요?
   쓸데없는 것에 매달리니까 그렇지.
  스님이 그릇을 상에 놓는다.
   그려서 엊그제 제 올려 달라는 사람 그냥 보내셨어유?
   그거야 부탁하는 사람 태도가 불손해서 그냥 보냈지. 제 올리기 싫어 그랬남.
   어이구. 성질 허구는. 제 올려 주면 그게 얼만디. 어유 답답혀.
  스님이 나가고 문이 닫치자 공양주가 불평한다.
   거기 하구 스님이 꼭 부부같어. 어려워하지두 않구.
  여자가 공양주에게 말한다. 공양주는, 부부겉기는. 오래 같이 살다 보니 허물이 없어지는 거지. 라고 말하다가 와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오매. 성니임. 스님 허구 나허구 의심하는게벼.
  그녀는 방에 와서 간단하게 화장을 한다. 손을 빠르게 놀려 콤팩트를 누르고, 루즈를 칠한다. 그녀가 나오자 여자가 또 엉거주춤 따라 일어선다. 스님은 어제 쓴 길을 또 쓸고 있다. 나뭇잎 몇 장이 비질에 아래로 쓸려 내려온다. 댓돌 위에 내려서는데 공양주가 부엌에서 조그만 소반을 들고 온다.
   차 마시려구 하는디...  
  그녀는 못들은 채 신을 꿴다. 공양주가 마루 위에 소반을 올려놓는다. 그녀는 신을 신고 댓돌에서 내려온다.
   왜 이리 서두른댜. 아무래도 찾아 올 사람이 있는게벼.
  공양주는 그녀가 못 알아들은 것 같자 덧붙인.
   이런데 있으면 남자가 불쑥 찾아와서 이러케 묻는다구. 우리 집사람 여기 있슈?
  공양주가 말하고 나서 키킥거린다. 그녀는 길을 본다. 비어 있다. 공양주의 말대로 누군가 찾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표정을 추스르며 발을 떼는데 등뒤에서 여자가 말한다.
   차 마시구 가요. 나는 이따 천천히 갈 테니까 차만 마시고 일어나요.
  그녀가 앉은 것은 끝 말 때문이다. 공양주가 주전자에서 잔에 뜨거운 물을 따룬다. 팔팔 끓이지 않아 허연 거품이 뜬다. 공양주는 스님도 불렀다. 스님이 비를 놓고 내려와 마루에 앉는다.
   혹시 진우스님이라고... 아슈?
  공양주가 스님에게 묻는다. 스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다 잠시 후, 가로 젖는다.
   몰라유?
   몰러.
  스님은 그 말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여자를 흘낏 돌아본다. 여자의 얼굴이 무덤덤하다.
   성님. 우리 스님도 모른다네.
  공양주가 말하자 표정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스님은 커피를 마시자마자 다시 비를 챙겨 든다.
  그녀는 공양주에게 삼만 원을 내밀었다. 공양주가 사양하다가, 받아야지. 그래야 우리 스님 공양도 하고, 우리 아들 공부도 시키지. 그러면서, 거기도 하룻밤 먹고, 자고 헌 것에 비해서 괜찮은 편이지? 한다. 여자가 마루에서 내려와 신을 꿴다.
   나도 내려갈텨.
  공양주에게 말하는 건지 그녀에게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진우스님은 어떡하구 간댜. 더 찾아보지 않을랑가 보네.
   다시 올게. 이따...아니 다음에 오든가. 거기도 모른다며? 모르는 사람 붙들고 어떻게 찾어.
  여자는 서둘며 마당으로 내려선다.  
   벨일여.오자마자 그것부텀 묻더니... 하여튼 다시 연락해야 돼유. 성님.
  그녀는 내려가다 말고 뒤돌아본다. 공양주가 옹색하게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다.    
  
  그녀와 여자는 수월하게 내려간다. 올라올 때 보이지 않던 길이 넓게 뚫려 있다. 그녀는 여자가 불편하다. 올라갈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는 같이 가자, 소리 한 번하지 않고 그녀와 간격을 두고 따라온다. 그녀는 꼼짝없이 여자와 걸음을 맞춘다. 은적암이라고 화살표가 붙은 표시판을 그대로 지나친다. 여자는, 그녀가 잠시라도 주춤대면, 그 길이 아닌데, 라고 참견했다.
   단풍이 참 좋다.
  사찰이 보이는 곳에서 여자가 말한다. 그녀는 표나지 않게 걸음을 빨리 했다 늦추었다 해보지만 여자는 꼭 그만큼의 간격 뒤에서 따라온다. 사찰을 지나고, 개울을 건넌다. 그녀는 여자가 혼자 단풍놀이 온 사람들이 많네. 라든지 계곡에는 물이 없더니 아래에는 꽤 물이 많네. 라고 말해도 대꾸하지 않는다.  
  벌써 식당과 가게들이 문을 열어 놓고 있다. 어제 그 식당도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그 앞에서 여자가 그녀의 팔을 건드렸다. 아니 붙잡는다.
   동동주 먹고 가지 않으시려우?
  여자는 산에서와 달리 존댓말을 썼다. 그녀는 붙잡힌 팔을 슬쩍 돌려 빼면서 시계를 본다.
   아침인데요.
   내가 살게, 들어갑시다.
  그녀는 당황한다. 어제부터 거의, 하루 동안 따라다니면서도 여자는 한번도 그렇게 붙잡지 않았다. 그녀는 먼발치 주차장에 줄지어 선 버스를 보며 시간이 없다는 듯 시계 찬 손목을 들어올린다. 그러나 여자는 거듭 그녀에게 동동주를 먹자고 권했다.
  식당에는 사람이 없다. 여자와 그녀는 구석 창 가 자리로 갔다. 여자는 창을 등지고, 그녀는 창을 바라보고 앉는다. 여자는 식당 주인에게,
   저기... 어제 먹었던 그거, 병으로 갖다 줘요.
  라고 시킨 후 그녀를 바라본다. 눈길이 찬찬하다. 그녀는 여자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아마 여자가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다면 그녀가 먼저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여자에게 무엇인가 빼앗긴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다. 여자 때문에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것도 같다. 동동주가 왔다. 금방 부친 표고버섯 전이 든 접시가 옆에 놓인다.
  여자가 그녀의 잔에 동동주를 따루고, 자신의 잔도 채운다.
   들어요.
  여자가 동동주를 마시느라 목을 젖힌다. 그녀는 가만 쳐다보다 입을 연다.
   진우스님은 안 찾아보세요? 그 분 찾으러 왔다면서.
  그녀는 여자가 자신의 속내를 알아차릴까 일부러 반듯하게 말한다. 그녀는 여자를 놀리고 싶다. 그녀는 여자의 제킨 목에서 이제껏 보지 못했던 주름이 줄줄이 있는 것을 보았다. 쭈글쭈글 몇 개의 선이 나이테처럼 목을 감고 있다.  
   진우스님?
  여자가 잔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진우스님은... 우리 남편 살았을 때 모습이랑 똑같다우. 젊고, 잘생기고, 똑똑하구...
  여자의 음성이 당당하다. 그녀는 할 말을 잃는다.
   같이 가서 보시려우?
  그녀는 고개를 젓는다. 여자는 몸을 옆으로 돌려 밖을 내다본다. 밖에는 산과 하늘과 나무가 있다. 여자는 한참 그러고 있다가 중얼거린다.  
   참 좋다. 산도 좋고 나무도 좋고... 세상은 정말 좋아요. 그래서 단풍이 곱게 보이나. 떨어져내릴 것이 아쉬워서...
  여자가 몸을 틀어 그녀를 본다.
   거기도 참 곱수.
  여자가 눈가에 잔주름을 잡으며 웃는다. 그러나 곧 웃음이 사라진다. 여자의 얼굴이 어둡다.
   며칠 전에...
  여자가 말하다 말고 끊는다. 그리고 한숨을 쉰다. 잠시 후, 여자는 어렵게 다시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손주가, 내가 이야기했지요? 초등 학교 들어간 손주가 있다구. 그 애가 나를 참 좋아해요... 그런데 그 애가 할 말이 있다고 제 방에 끌고 가는 거예요. 할머니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그러더니 귀에 대고 수근거리대요. 아빠 엄마가 할머니보구 미쳤대. 늙어서 돈 쓸데도 없으면서 돈 벌려고 돌아다닌다고... 웃는 내게 손주가 물어요. 왜 웃느냐고... 늬가 하두 수군대서 근지럽다, 고 했더니 손주가 깔깔거려요. 할머니가 무슨 간지럼을 그렇게 타냐고.
  넋두리구나. 듣고 싶지 않지만 여자는 계속 말한다.  
   남편이 죽고나서 사표를 냈어요. 공무원 월급 갖고는 아이 셋을 공부시킬 수 없었어요. 그리고 곧바로 노가다판에 뛰어들었어요. 일은 험해도 돈을 많이 받으니까. 한창 때는 하루에 벽돌을 몇 천 장 씩 쌓았지요. 옷이라구는 몸뻬 하나였구. 그렇게 배워서 지금까지 집만 짓고 돌아다녀요. 그런데 날 보구 미쳤다는 거예요. 그 돈으로 먹고, 입고, 유학 가고, 결혼한 내 새끼들이.
  여자가 그녀와 자신의 잔에 동동주를 다시 채운다.
   자. 마셔요. 버섯전도 먹고.
  그녀는 여자가 젓가락으로 집어 준 버섯전을 다시 접시에 갖다 놓는다.
   나는 취미가 술 마시는거라우. 정신이 산란스러우면 소주 한 병 마시고 잔다우. 술 말고 할 줄 아는 건 없어요...
  여자의 한숨에 동동주 냄새가 배어 있다.  
   햇빛이 참 좋수. 이렇게 쭈글쭈글 주름살이 드러나도 밝은 것이 좋아요. 그렇지 않수?
  여자가 바싹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것을 들이댄다.
   어둔 것 보다 밝은 것이, 죽는 것 보다 사는 것이 좋지 않수?
  그 순간이다. 그녀는 등줄기에서 갑자기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다. 목에서 등으로, 허리로.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아니 여기로 오기까지 그녀를 끌고 다니던 힘. 그녀는 지금에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녀는 무너져내리는 허리춤을 간신히 의자에 끌어당긴다.  
   힘들거든 살 부딪치고, 더 힘들거든 뼈 부딪치고 살아봐요. 다 드러내 놓고. 활짝 드러내 놔도 어여쁜 나이인데...
   그게... 도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은.... 그냥 거기가 고와서 하는 말이요...  
  여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버섯 접시를 앞으로 민다.
   이거 먹어 봐요. 씁쓰레한 게 맛있어요.
  그녀는 버섯전 대신 동동주를 마신다. 잔을 내려놓는데 여자가 웃고 있다.
   고마워요. 귀찮을 텐데 끌고다녀줘서. 이상하게 처음 볼 때부터 같이 가고 싶었다우... 거기도 그랬수?... 그냥 가려고 하다 늙은이 혼자 두고 가는 것이 찜찜해서 못 갔수?
  식당을 나오다가, 그녀는 비틀거렸다. 빈속에 마신 동동주가 취기를 불러일으킨 것 같지는 않은데, 자꾸 걸음이 엉킨다. 식당 앞에 주저앉으려는데 여자가 그녀의 겨드랑이를 끌어올린다.
   차가 가려고 하네.
  주차장에 선 버스를 건너다보며 여자가 채근한다.
   어여. 일어나요.
   잠깐만요. 조금만 앉아 있다가 일어날게요.
  그녀는 여자의 손을 뿌리친다. 그러나 여자는 그녀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힘들어도 일어나면 저절로 발이 데리고 간다우.
  여자가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끌어올린다.
   잠깐만요. 취해서 그래요.
  그녀는 짐짓 술취한 핑계를 댄다.
   그러지말고 어서 일어나요. 나도 진우스님한테 가 보게... 거기 때문에 내가 못 가면 되겠수? 우리 진우스님한테 나도 가 봐야지. 내가 말했잖수. 진우 스님은 우리 남편 만치 훤칠하고, 잘생겼다고...  
  여자가 그녀의 손을 잡아끈다.
   어여. 일어나요.
  여자는 그녀를 일으키고, 등을 민다. 그녀는 주저앉다 말고 일어나고, 멈추려다 말고 걷는다. 주차장에 선 버스가 바로 앞에 있다. 어느새 그녀는 여자의 두 팔을 붙들고 있다.
   그럼 저랑 같이 버스에 타요. 진우 스님 찾으러 저도 갈래요.
  그녀는 힘주어 여자의 두 팔목을 쥔다.
   우리 진우스님을 찾으러 간다고 말했수?
  여자가 고개를 설래설래 젓는다.
   우리 진우스님은 아무나 안 만나요. 몰라요? 불가에서는 다 인연이 있다우. 거기는 진우스님하고는 인연이 없어요.
  여자가 팔목을 쥔 그녀의 손을 떼어놓는다.
   빨리 가요. 버스 떠나네.
   그럼 동동주 더 마시면서 이야기해요. 진우스님이 어떤 분인가 듣고 싶어요.
  그녀는 엄마 품을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여자를 붙들고 늘어진다.
   얘기는 무슨 얘기. 이제 할 이야기가 없다우. 어여 가요. 일어나기만 하면 발이 알아서 데리고 가니까 걱정 말고 일어나요.            
  여자는 마구 옷가지를 잡아채며 달라붙는 그녀를 떼내며 버스로 간다. 버스가 부르릉, 시동을 걸고 있다.
  여자는 기어이 버스 안에 그녀를 밀어 넣었다. 여자는 비틀거리다가 바로 앞에 있는 의자에 주저앉는다. 열린 창 너머 여자가 있다. 운전사가 여자에게 비키라고 손짓한다. 여자가 한 걸음 물러나며 손사래질을 한다.
   어여 가요. 뒤돌아보지 말고 어여 가요.
  버스가 후진하여 방향을 튼 다음 출발한다. 그녀는 몸을 틀어 여자를 본다. 웃는 듯 하던 여자의 얼굴이 금세 표정을 잃는다. 거리가 바로 지척인데... 여자는 아주 멀리 있는 듯 하다.  
  버스는 산을 뒤로, 점점 빨리 달린다. 이상하다. 산이 멀어질수록, 그녀의 몸이 가벼워진다. 그녀는, 달리는 버스의 작은 덜컹거림에도 가볍게 튀어 오른다. 마치 산에, 그녀 자신의 무게를 내려놓고 온 듯...
  어느새 옆으로 틀어져 있던 그녀의 발이 앞을 향하고 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들어올린다.(*)  

                                                                  
 충남 대전 출생.
199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빙괴」로 등단.
1997년 장편 「나무뿌리는 겨울을 향해 깊이 가라앉는다」 발표.

추천2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