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4호/단편소설/개와 거울/이지형
페이지 정보

본문
단편소설
개와 거울
이지형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날이라고 감히 말할 만 한 날씨다. 바람은 시원하고, 아직 낙엽을 떨구지 않은 나무들은 여유 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깨끗하다. 무엇보다 하늘이 아주 근사하다.
기후나 계절에 그다지 반응하지 않는 세진이지만 이런 날 영화관에 가는 사람은 뭔가 계산을 잘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햇살과 바람, 멋진 거리를 보지 않고 어디에다 돈을 쓰는 것일까. 세진은 거리 풍경을 제대로 보기 위해 진하게 코팅된 차창을 최대한 내린다. 바람을 맞는 세진의 얼굴은 평화로운 무표정 그 자체다. 하지만, 핸드폰이 울리자 그 무표정에 살며시 금이 간다.
"응. 가고 있어. 별로 안 막혀...... 날씨? ... 그냥. 별로. 흐려...... 약 챙겨 먹었지? 알았어. 금방 갈 거야."
리라는 이 주 전에 원추각막증으로 각막이식수술을 해서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외출은커녕 제대로 볼 수도 없다. 그런 그녀에게 지금 밖의 날씨가 일년 중 최고라고 하면 기분이 좋겠는가. 세진의 거짓말은 애교 있는 배려다.
옆 차에서 세진을 본다면 한눈에 그가 애인과 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맞출 것이다. 그러나, 통화를 마친 그를 본다면 그가 애인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을 의심할 지 모른다. 세진은 폴더를 닫으며 핸드폰을 조수석에다 내팽개친다.
세진은 리라와의 대화 때문이 아니라 핸드폰이 울릴 때마다 바짝 굳는 자신 때문에 짜증이 난다. 어제 정은을 만난 게 이렇게까지 컨디션에 영향을 줄지는 몰랐다. 세진은 핸드폰을 다시 들어 전원을 끈다.
백화점 근처에 다다르자 잘나가던 차들이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방금 세진 앞에 끼여든 백화점 트럭이 회색 실타래 같은 매연을 실실 풀어낸다. 세진은 나직이 욕을 하며 창을 닫는다. 가을 하늘은 갈색으로 코팅된 차창 유리와 합쳐져 묘한 빛을 낸다. 아름다운 어느 가을 오후의 하늘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세진이 리라에게 완전히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앗! 씨이-"
세진은 청록색 질레트 여성 면도기를 내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거울을 보니 이미 턱 아래에 굵은 가시만 한 상처가 그어져 있었다. 출근만 아니면 여자 겨드랑이 털깎기로 면도를 하지는 않을 텐데. 세진은 투덜거리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뭐 좀 먹고 가야지? 잠깐 기다려."
정은은 어느 새 일어났는지 아직 잠이 덜 깬 얼굴로 냉장고를 뒤지고 있었다. 8평 짜리 코딱지만 한 원룸이 끓어오르는 국 냄새로 후끈거렸다. 세진은 속이 울렁거렸다. 세진은 서둘러 옷을 집어들었다.
"왜? 가려고?"
현관 앞에 선 세진은 또 당혹스러웠다. 신문지 반장만 한 현관은 정은의 낡은 하이힐과 슬리퍼, 운동화들로 넘쳐 났다. 그 더러운 것들 틈 속에 세진의 검은 페라가모 슈즈는 빛나기는커녕 그녀의 신발들에 찍히고, 밟히고, 차이고, 급기야 묻혀버리기 직전이었다. 세진은 국자를 들고 웃고 있는 정은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는 재빨리 그 집에서 빠져 나왔다.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로 나왔지만 그 흔한 마을버스 하나 지나가지 않았다. 세진은 이런 낯설고 삭막한 변두리 동네에서 외박하고 나오는 아침이 정말 싫었다. 더욱이 애인의 친구와 자고 나오는 아침의 기분은 더럽기 그지없었다.
세진은 곧 시험 준비를 하는 수험생처럼 초조하게 자신을 다독이며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보았다. 우선 자신의 실수를 깨끗이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단순해 보이지 않았다. 애인이 친구와 하룻밤 보낸 것을 너그러이 용서할 여자는 분명 없겠지만, 리라는 그 어떤 여자보다도 뜨겁게 분노할 것임이 틀림없었다.
세진과 리라는 사이가 좋기로 유명한 연인이었다.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만난 둘은 첫눈에 서로에게 반했다. 처음부터 일년 반 넘게 사귀고 있는 지금까지 그들은 이상적이라고 불릴만한 커플이었다. 세련된 용모만큼 매너도 시원한 둘은 다른 사람 앞에서 서로를 흉보는 유치한 사랑싸움은 질색인 체질로, 언제나 상대를 배려해주고 존중해줬다. 세진은 소공녀처럼 상냥하고, 우아하고, 귀엽기까지 한 리라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녀의 친구와 일을 저지르고 돌아오는 아침에도 세진이 리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처음 만난 그 날과 똑같았다.
세진은 리라를 알기 전, 몇 명의 여자들과 때론 짧고 때론 긴 만남을 가졌었다. 물론 리라도 이에 대해 알만큼은 알고, 또 지극히 정상적인 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세진이 정은을 사귀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연했다. 리라에게 그것은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한다해도 겨우 그려질까 말까한 최악의 현실이었다.
세진이 리라와 만나기 4년 전쯤, 아직 군대도 갔다오기 전의 일이었다. 세진은 정은과 한 6개월 정도 사귀었다. 그저 그런 미팅에서 발전된 평범한 교제였는데, 물론 조금 열정적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 해 봄과 여름을 뜨겁고 바쁘게 보냈다. 그러나 가을이 오기 전 서로의 뜨거움만을 느낀 채 다가올 차가움을 견뎌보기도 전에 서둘러 헤어져버렸다. 시간이 지나고 세진에게 정은과의 일은 어느 여름방학에 있었던 여행담과 닮은 것이 되어 버렸다. 굳이 떠올려본다며 당연히 재미있겠으나 별로 잘 기억나지 않는 평범한 추억들 중 하나였다.
세진이 정은과 리라가 친구 사이임을 알게 된 건, 리라와 사귄 지 일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집안, 능력, 외모 등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리라는 웬만해선 누구에게나 너그러운 편인데, 오랜만에 그녀의 첫 번째 직장이었던 수입의류업체의 옛 동료들을 만나고 와서는 누군가를 노골적으로 씹어대는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사회 생활을 처음 하는 거라서 뭘 모르니까 참았어. 만약 지금 우리 회사에 그런 애가 있어봐...... 그렇게 천박한 애들은 정말 나로서는 다루기가 힘들어. 그런 애들이 또 야심은 있거든. 그런데, 달라지나? 타고난 게 있는데. 난 그런 애들이 뭘 하든 상관 않는데, 제발 내 근처에만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세진은 리라가 이를 박박 가는, 천박한 것이 타고난 걸 모른 채 야심만 있는 인물이 정은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았을 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세진이 군대에 가있던 동안 정은과 리라는 그들의 첫 사회생활을 같은 곳에서 시작했던 것이다. 세진의 과거의 여자와 미래의 여자가 한 공간에서 서로의 운명도 모른 채 으르렁거렸을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세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종알종알 욕을 해대는 리라의 얼굴은 상당히 낯설었다. 여태껏 세진은 리라가 누군가를 그토록 미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세진은 자신이 알던 적극적이고, 계획이 많고, 열정적이었던 정은을 떠올려 보았다. 다른 기억은 별로 남아있지 않으나, 희한하게 정은이 메고 다니던 커다란 검은 숄더백은 생생히 생각났다. 합성피혁으로 만든 싸구려 가방이었는데 정은은 언제나 그 가방을 메고 나왔다. 가끔 신경 써서 치마를 입고 나올 때도 가방은 똑같았다. 세진은 궁금했다.
저기에 뭐가 들었기에 쟤는 항상 힘들게 저 가방을 이고 다니지.
리라는 그런 가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실용적이면서 품위 있는 명품 보스턴백을 구두와 맞춰서 하고 다녔다. 여자가 다른 여자를 지나치게 싫어할 때는 대게 질투 때문에 그러한 법인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정은은 리라에게 비교도 안 되는 여자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은은 시골쥐고 리라는 서울쥐였다.
철없던 시절 불우한 환경에 욕심도 많은 시골쥐 정은이 경쟁심리 때문에 서울쥐 리라를 교묘히 괴롭혔고, 그래서 아직도 리라가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겠거니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세진은 앞으로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과 정은의 일을 리라가 알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리라가 괜한 상처를 받는 것도 싫지만, 그것보다는 시골쥐와 함께 지냈던 자신을 리라가 경멸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 뭔가 달라진 것 같네요."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세진은 처음 온 손님처럼 조심스레 사방을 살핀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반갑게 세진을 맞는다.
"커튼을 바꿨어요. 리라 수술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여름 커튼을 그대로 두고 있었거든."
투명하던 망사 커튼은 두툼한 쟈가드 커튼으로 바뀌어 있고, 콘솔 아래에는 진한 커피 색 러그가 깔려있다. 옷을 갈아입은 집안은 머리를 자른 여자처럼 낯설어 보인다고, 세진은 생각한다.
"멋지네요."
"커피 줄까요?"
"괜찮아요. 리라는 뭐하죠?"
"좀 전에 위층에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까지 잠깐 기다리래요."
세진은 소파 한가운데에 푹 기대어 앉는다. 테이블 위 깡통에 든 초콜릿 쿠키를 와사삭 깨물며 세진은 TV를 켠다. 잠깐 눈을 붙여도 될 듯 싶다. 그저께도 리라는 세진을 오래 기다리게 했다. 리라는 지금 거울 앞에 앉아 머리카락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신경질을 부리고 있을 게 뻔하다.
일주일 전에 퇴원한 리라는 아직도 특수 안대를 하고 있다. 눈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앞으로 한 달간은 세수도 못하고 머리도 못 감는다. 리라에게 그것은 전쟁과도 같은 일이다. 아무리 애인 사이라 해도 여태껏 한번도 세진 앞에 헐렁한 운동복 차림을 하고 나온 적이 없는 리라는 지금 더러워진 머리를 꼼꼼하게 묶느라 애쓰고 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세진은 자기 머리가 다 근질거린다. 마음 같아서는 리라의 번거로움과 짜증을 자기가 대신 겪었으면 좋겠다.
수술 후 리라는 신경이 이만저만 날카로운 게 아니다. 새로운 각막이 거부반응을 보이면 어쩌나 싶어, 눈을 뜨고 있을 때나 감고 있을 때나 언제나 걱정이다. 불안해서 그런지 원래는 전혀 귀찮게 구는 성격이 아닌데 요즘은 틈만 나면 세진에게 때를 쓰고 의지하려 든다.
"나 괜찮겠지? 아무 문제없겠지?"
세진은 일 주일 째 이 같은 질문을 대략 한 오 백 번 가량 듣고 있는 중이다.
"그럼. 조금만 참으면 잘 볼 수 있을 거야."
매번 세진은 최선을 다해 희망적인 대답을 한다. 매번 비슷비슷한 대답을 리라는 언제나 처음 듣는 것처럼 경청한다. 그러나, 것도 잠시 뿐이다. 곧 다시 가냘픈 목소리로 자기 눈이 어떻게 될 것 같은지 간절하게 묻곤 한다. 전에 없는 모습을 보이는 리라 때문에 세진은 어리둥절하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멀리 보이기 시작하면 어떡하지?"
리라는 안대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애처롭게 말한다. 세진은 리라가 거부반응과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도 두려움이지만 좀 더 심각하고 방정맞은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있다.
그녀는 안대를 푸는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상을 하고 있다.
물론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이제 그녀는 얇아질 걱정이 없는 정상적인 왼쪽 각막을 갖게 되었고, 6개월 정도 지켜보다가 별 무리가 없으면 오른쪽 눈도 마저 수술을 하면 된다. 병명을 알게 된 사춘기 때부터 쭉 그녀를 심적으로 육체적으로 괴롭혔던 유일한 콤플렉스에서 영원히 해방되는 것이다. 하지만, 리라는 믿지 못한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력이 좋았던 적이 한번도 없다. 키는 멈추어도 시력은 멈추지 않고 나빠졌다. 렌즈나 안경 없이 거리의 간판을 보고, 편지 봉투의 주소를 읽고, 냄비 속 재료를 확인하는 일이 그녀는 상상이 안 된다. 특히, 맨눈으로 거울을 본다는 건 어떤 일이지 알지 못한다.
이런 리라의 근심이 세진에게는 우습고 귀엽게 느껴질 뿐이다. 오이디푸스는 눈이 먼 순간 진실을 깨닫고, 리라는 눈을 뜬 순간 자신이 알고있던 현실을 잃어버리게 된다. 세진은 리라가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최악의 상황을 공상하는 거라고 여긴다. 마치 비행기를 한번도 타본 적 없는 사람이 폭발 사고나 하이재킹을 상상하는 것과 같이.
하지만. 한번 붕 뜬 망상은 쉽사리 내려오려 하지 않는다. 리라는 계속 새롭고 맹랑한 이야기를 꺼내 세진을 놀라게 한다.
며칠 전에는 비밀이야기라면서 세진의 귀에 바짝 입술을 붙이고 소곤거렸다.
"이 얘기는 아무한테도 안 했었는데 말이야......"
세진은 여자들이 그런 식으로 말문을 여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잔뜩 기대를 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눈이 안 좋았잖아. 병 때문에 그렇다는 건 고등학교 때 알게 됐지만. 사실 내 눈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건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어. 왜냐면...... 나는, 나한테만 보이는 환상이 있다....... 난 복권을 긁어."
긴장하고 있던 세진은 잠깐 인상을 쓰다가 침을 튀기며 웃었다. 리라는 웃지 않았다.
"하루에 한번씩은 보게 되는데. 딸꾹질처럼 기습적으로 일어나는 거야...... 마치 누가 내 눈 바로 앞에, 갑자기 쿠킹호일을 갖다댄 것처럼 번쩍!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뭔가가 순간적으로 은색 비슷한 메탈 색을 띄면서 윤곽도 없이 평평해지는 거야. 빈혈인 애 얘기 들어보니까 아마 빈혈도 대충 그렇다나 봐. 하지만, 난 아프거나 어지럽지도 않은데 갑자기 그런 순간이 오는 거야. 애들이랑 카페에서 수다 떨고 있는데, 창 밖 유리창이 갑자기 검게 변하더니 순식간에 알루미늄으로 덮여. 회의 때 팀장이 원단 샘플을 설명하고 있는데, 난 아주 집중해서 듣고 있거든, 그런데 집중하면 할수록 팀장 얼굴은 냄비 바닥이 돼 가는 거야. 어느 날은 주말에 멍하니 앉아 야구 중계를 보고 있는데, 어지간히 지루한 게임이었거든, 난 딴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투수가 마름모꼴 도시락통 위에 올라가 서 공을 던지고 있는 거야."
세진은 난감했지만 진지하게 대꾸해줬다.
"그 증상이 몇 분 동안이나 지속되는데?"
"음...... 신호등이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는 시간 정도?"
"그럼 사람들이 다 건너가고 나면 제 정신이 돌아와?"
리라는 제법 음흉하게 씨익 웃으며 세진의 눈을 응시했다.
"갑자기 정상이 되는 건 아냐. 이제부터가 중요해. 난 잠깐 동안 바뀐 세상을 바라 봐. 그리고는 슥슥 문질러서 지워버려. 동전으로 즉석복권을 지우듯이 그렇게. 그러면 곧 은빛 가루는 날아가고 다시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나타나. 그때는 그냥 후- 불어버리면 끝이야."
세진은 당장 악성빈혈에 대해 검색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빈혈 증상을 자신의 눈과 연결 지어서 초자연적 신비주의 현상으로 만들어버린 리라의 상상력이 놀랍고도, 조금 걱정됐다. 리라는 아직 아쉬운지 계속 이어갔다.
"어렸을 때 누구나 한번쯤은 데자뷰를 자기만 겪는 줄 알고 무서워하잖아. 대충 그런 느낌이라고 보면 돼. 나만이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건 두려운 일이거든. 어렸을 때 난 언젠가는 눈이 멀 거라고 생각했어. 어쩌면 어른도 되기 전에. 나 혼자서만 조용히 느끼면서. 죽는 것도 아마 그런 걸 꺼야...... 물론 지금이야 심각할 거 하나 없지. 그냥 슥삭슥삭 문질러 버리면 끝나는 거니까."
세진은 그때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왔어?"
층계 쪽으로 고개를 쭉 빼던 세진은 멈칫 한다.
아이보리 니트 원피스를 입은 리라가 층계 끝에 얌전히 서있다. 세진은 눈동자를 굴리며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저께 밤까지만 해도 리라의 왼쪽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보이지 않는다. 리라는 쑥스러운 듯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손으로 입을 가린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자 세진도 갑자기 떨려온다. 세진은 더듬기조차 한다.
"아... 안대 풀었네. 어때, 잘 보여?"
리라는 말없이 코를 찡그리며 웃는다. 웃는지 우는지 애매한 표정이다. 리라는 살금살금 세진 쪽으로 걸어온다.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세진만 빤히 바라보면서.
세진이 정은을 다시 만난 건 한달 전쯤이었다.
테크노 타운의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세진은 혼자였고 정은은 여자 친구와 함께였다. 그 친구는 예전에 정은과 사귈 때 몇 번 본 적 있는 정은의 아주 친한 친구였다.
"어머, 넌 여전히 멋있구나."
그 친구가 세진을 보고 너무 반가워했기 때문에 세진은 기분이 좋았다. 셋은 카페로 올라갔다. 몇 년만에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예상외로 어색하지 않고 즐거운 시간이 이어졌다. 가끔 오묘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지만 세 사람은 연신 흐뭇한 얼굴로 지난 일을 회상하며 웃었다. 그 날 이후, 세진은 정은과 따로 두 번 더 만났다.
세 번 째 만났을 때 세진은 조금 망설이다가 재미 삼아 리라라는 여자를 아는지 물어보았다. 세진은 리라의 이름에 반응하는 정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일 초 정도 무표정한 눈빛이 스쳐갔다.
"왜?"
정은의 질문에 세진은 그냥 쿡- 웃었다. 세진의 수줍은 웃음을 정은은 정확히 받아넘겼다.
"혹시 여자친구?"
정은과 세진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테이블을 두드리며 깔깔거렸다. 정은은 정다운 표정으로 자신이 기억하는 리라에 대해 얘기했다. 정은이 그린 초상은 누구나 인정하는 괜찮은 여자 리라였다. 세진은 정은의 우호적인 태도에 조금 의아해 했다. 리라에 대한 얘기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마지막에 정은이 이런 얘기를 했던 걸로 세진은 기억한다.
"리라는 아니겠지만 난 리라를 친구로 생각해."
세진은 다음 날 정은의 그 지저분한 원룸에서 깨어날 때까지 그 모든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실은 그 비슷한 일이 두 세 번 정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리라의 친구가 아니었다.
일년에 한 두 번씩 시험삼아 음주운전을 해보는 세진에게는 꼭 그런 식의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야만 풀어지는 못된 호기심이 있었다. 세진은 처음으로 자신의 모험심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이번에는 좀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행이 지금 리라가 눈을 가린 채 병원에 누워있어 이 모든 일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어때 잘 보여?"
세진은 리라보다 더 긴장된 얼굴로 리라의 눈을 이리저리 살핀다. 리라는 비스크 인형처럼 하얀 얼굴로 눈만 뜨고 앉아있다.
"내 눈 어때 보여?"
리라는 대답은 않고 오히려 자기가 질문을 던진다. 기대감과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이다.
세진은 무릎을 어정쩡하게 굽히고 리라의 눈가에 천천히 얼굴을 갖다댄다. 세진도 자꾸 긴장이 된다. 세진은 입김을 불어넣기라도 할 듯 가까이 선다. 리라의 얇고 촉촉한 눈두덩이 살며시 떨린다.
특별할 것은 없다. 하지만 흰자위는 조금 부어있고, 누군가의 것이었을 각막도 소프트렌즈처럼 입체감 있게 튀어 나와있다. 한마디로 아직 완벽하게 리라의 눈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어쩜 이렇게 똑같니. 야- 진짜 신기하다. 누가 봐도 네 눈이야. 어때 잘 보이기는 해? 응? 답답하다. 어떤지 말해봐!"
리라가 계속 뜸을 들이자 세진은 인상을 쓰며 재촉한다. 리라는 옆에 난로라도 있는 것처럼 자꾸 가슴을 움츠린다.
세진이 어깨를 잡자 리라는 고개를 들어 세진을 본다. 세진의 이마가 헤드라이트라도 되는 양 곤혹스럽게 눈을 뜨며 세진을 본다. 세진은 손을 내리고 리라의 대답을 기다린다.
"모르겠어. 잘 보이는 지 어떤지."
진심인 듯 하다. 세진은 답답하다. 계획대로라면 전보다 두 배나 좋은 시력을 갖게 됐을 텐데 왜 안 보인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모를 게 따로 있지. 그걸 몰라? 자- 내가 어떻게 보여?"
리라는 눈썹을 힘껏 올리며 천장을 본다. 흰자위가 우유처럼 맑은 빛을 낸다. 그 눈빛을 감싸고 있는 갈색 속눈썹 아래에 옅은 그림자가 진다. 리라는 거기에 근심거리를 살짝 감춰둔 것 같다.
"몰라. 모르겠어! 나 지금 좀 아파!"
갑자기 리라는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인다. 가는 손목으로 눈썹을 꾹꾹 누른다. 세진은 조금 놀란다. 리라는 꼭 눈물을 흘리는 것만 같다.
"병원에 갈까?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아파서 못 참겠어?"
리라는 하얀 손목을 휘휘 저으며 힘없이 말한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안압이 조금 올라간 것 같아."
세진은 아파하는 리라가 안쓰럽다. 마음 같아서는 리라의 고통을 나눠 가지고 싶다. 그러나 고통은 햄버거빵처럼 사이좋게 두 쪽으로 나눌 수 없다. 세진은 결코 리라가 얼마큼 아픈지 느낄 수 없고, 얼마큼 보이지 않는지도 알 수 없다.
"괜찮을 거야. 아직 적응이 안 돼서 그래. 조금만 지나면 잘 보일 거야."
리라는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짓는다. 외판원처럼 굳게 마음먹고 웃는 사람 같다.
"우리 차 마시자."
리라의 미소를 보자 세진은 마음이 놓인다.
세진은 잔 두 개를 가져온다. 한 잔에는 커피를, 한 잔에는 생수를 따른다. 약을 복용하는 리라를 위해서는 깨끗한 물을 준비한다.
두 사람 머리 위로 달콤한 커피향이 두둥실 떠다닌다. 세진은 맛있게 커피를 마시며 리라를 바라본다. 그런데 앞에 앉은 리라가 어딘가 이상하다.
리라는 속눈썹을 길게 늘어뜨리고는 잔 속에 후후 입김을 불어가며 홀짝거린다. 차가운 맹물을 커피 마시듯 하는 그녀의 모습은 자연스럽고도 기괴하다.
어제 드디어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못 참고 세진이 먼저 전화를 걸었다.
정은은 한 참 바쁜 와중인 것 같았다. 얼마 전 실직을 한 정은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그랬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는지는 끝내 세진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옆에서 들리는 소리로 보아 상당히 시끄러운 곳에서 일하고 있는 듯 했다. 세진은 일부러 딱딱한 어투로 약속장소를 통보하듯 일러주었다.
정은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팔꿈치 부분이 자글자글 꾸겨질 대로 꾸겨진 흰 셔츠를 입은 정은은 무척 피곤한 얼굴이었다. 세진은 진정 매너가 좋은 남자란 여자한테 냉정할 때는 냉정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마디 형식적인 안부를 주고받자마자 서둘러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우리가 안 봐야 서로에게 좋다는 거 알고 있지?"
거의 '가까이 오면 쏠 테다' 하는 투였다. 세진 자신도 스스로의 삭막한 태도에 움찔할 정도였다. 세진은 이러다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판단이 들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녹차 케이크를 주문해 정은에게 권해주었다.
정은은 막막한 눈길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곧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배가 고팠는지 정은은 금새 케이크 한 조각을 다 먹어 치웠다. 정은은 다 먹고 나서 목이 막혔는지 꿀꺽꿀꺽 냉수를 오랫동안 마셨다. 다시 이런 저런 얘기가 나누다가 정은은 어렸을 적 키우던 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개는 정말 사람을 너무 좋아했었다. 함께 밥상에서 밥 먹고, 똑같이 잠자리에 들고, 응가도 변기 옆에다 하고. 자동차 타는 건 또 얼마나 좋아했는데. 조수석에 앉아서는 창 밖으로 고개를 쓱 내밀고 바람을 맞고 그랬다. 정말 사람이 하는 건 다 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딱 한 가지만은 절대 안 하려고 한 게 있었어. 그 개는 거울 보는 걸 싫어했어. 아주 너무너무. 우리가 안고서 거울 앞에 서잖아, 그러면 고개를 팩 돌리는 거야, 겨우 억지로 다시 거울 앞에 돌려놓잖아, 그러면 아예 눈을 꾹 감아버렸다. 개는 자기가 사람이 아니라는 현실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거야."
세진은 재미있게 듣기는 했는데 어쩌다가 그 얘기가 나오게 됐는지 궁금했다.
"무슨 얘기하다 말았지? 개 얘기가 왜 나왔지?"
"그냥. 너를 보니까 갑자기 개 생각이 나서."
정은은 세진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혓바닥이 나올까 말까 하고 있었다. 그런 정은을 보고 있노라니 세진은 커피를 한 열 잔 들이킨 후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리라는 엄마와 오 분도 넘게 통화를 하고 있는 중이다. 엄마도 세진처럼 꼬치꼬치 캐묻고 있는 듯 하다. 리라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시원찮은 대답을 교묘하게 돌려서 대답한다. 아까 막 안대를 풀었을 때보다는 많이 안정돼 보인다.
"어머니가 뭐라셔?"
리라는 픽 웃으며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엄마는 알아 볼 수 있겠냐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모르겠다고 그랬어."
리라는 커피 테이블 위에 사뿐히 걸터앉는다. 아이보리 니트 원피스가 어깨부터 발목까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다. 리라는 세진의 발 언저리에 가만히 시선을 주고 있다. 그런데 자꾸 한쪽 손을 움찔움찔 하더니 기어이 왼쪽 눈가로 가져간다. 하지만 살짝 속눈썹만 만지고는 손을 털며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세진은 리라의 그런 얌전하고 새침한 동작을 재미있게 관찰한다. 지금의 단정하고 앙증맞은 모습이 세진이 좋아하는 리라의 진짜 모습이다. 세진은 이제 서야 안심이 된다.
"새로운 세상을 만난 기념으로 근사한 저녁을 먹어야지."
리라는 세진과 눈을 마주치고는 얼굴을 슬며시 돌린다.
"나 때문에 많이 귀찮았을 테니 맛있는 걸 사줘야 할 텐데. 짜증냈던 거 미안해. 아이처럼 굴었지? 답답해서 그랬어. 난 지금 아무 것도 할 수 없잖아. 일도 쉬고, 쇼핑도 못 하고, 운동은 부족하고. 감옥에 있는 부자들은 얼마나 살 맛 안 날까. 그런 생각이 들어."
"그래서 부자들이 감옥에 안 가는 거야."
세진은 싱겁게 큰소리로 떠들며 분위기를 띄운다.
"답답하면 한 번 이런 상상을 해 봐. 지금 너는 직장도 짤렸고, 집도 더럽고, 입고 나갈 옷도 없고, 얼굴도 그저 그렇고, 남자친구도 없다. 그런데 다행이 넌 눈이 아파서 제대로 볼 수 없다. 넌 아주 불쌍하고 가난한데 그 꼴을 볼 수 없다. 안 봐도 된다. 야- 아이디어 죽인다. 어때, 그렇게 한번 생각해봐. 나쁘지 않잖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다행이 리라는 세진의 농담이 마음에 든 것 같다. 리라는 입을 삐죽이며 웃는다. 세진도 까불며 따라 웃는다.
세진의 얼굴을 보던 리라가 손으로 턱을 쓰윽 만지며 말한다.
"과자 묻었어."
세진은 손등으로 리라가 가리키는 곳을 문지른다. 초콜릿 쿠키 부스러기들이 떨어진다. 그런데 큰 조각 하나가 떨어지지 않는다.
"아하- 이거. 면도하다 다친 거야."
"안 아파? 상처가 생겼는데."
"응. 난 안 아파."
세진은 무심하게 손등으로 계속 턱을 쓰다듬는다. 세진이 갑자기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보여? 이게 보인단 말야?"
세진은 기뻐서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리라는 대꾸 없이 세진을 바라보기만 한다.
세진은 리라가 껌을 씹는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차분히 뱉어내는 말을 듣는다.
"왜 나한테 거짓말했어?......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왜 거짓말 한 거야?"
세진은 창 쪽을 본다. 여전히 아름다운 날이다. 빌라의 정원수들이 아늑한 가을 오후의 햇살을 받고 있다. 나뭇가지에 새가 앉았는지 새 지저귀는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세진은 그 소리처럼 명랑하게 대답한다.
"네가 집에서 속상해할 까봐 그랬지. 알았구나?"
리라는 점점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세진은 뭔가 어색하다고 느낀다.
"너랑 통화하기 전에 전화를 한 통 받았어. 그 애가 알려줬어. 지금 바깥은 아주 좋다고. 걔가 나를 만나고 싶대."
"누군데? 같이 만날까? 내가 아는 친구야?"
리라는 이제 고개를 완전히 떨군다.
"응. 내 첫 번째 직장 동료야. 하지만, 친구는 아냐."
리라는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얼굴을 든다. 그러나, 리라의 눈길은 바로 앞의 세진을 넘어 창가로 향한다.
화장실을 꾸미고 있는 멋진 자줏빛 타일들이 벽돌처럼 무겁게만 느껴진다. 세진은 세면대거울 앞에 선다. 다행이 땀도 흐르지 않고 안색이 창백하지도 않다. 하지만 온 몸에 더러운 습기가 가득 찬 것 같다.
세진은 재빨리 정리를 해본다. 상상조차 싫은 일이지만 정은이 리라에게 연락을 한 게 틀림없다. 이 방면에서는 여자나 남자나 예감이 적중하는 법이다. 정은이 정말 여태까지의 일을 리라에게 다 말했을까? 리라는 지금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오늘 리라가 왜 그렇게 이상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세진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부르르 턴다. 생각하기도 싫다.
세진은 화가 난다. 화장실에서 씩씩거리고 있어봤자 달라질 건 없다. 이미 세진 모르게 모든 건 정해져 있다. 리라를 만나기 전 정은과의 관계를 되돌릴 수 없듯이 바꿀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점점 더 화가 치민다. 왜 이런 멋진 날 정은 따위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지.
세진은 굳게 마음을 먹고 화장실에서 나온다. 손을 씻은 척 손바닥을 탁탁 털면서. 세진은 무조건 빌기로 한다.
"미안해. 날 그냥 죽여줘."
세진은 벌써 한 이 백 번쯤 이 말을 속으로 연습하고있다. 하지만, 좀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세진은 곁눈질로 리라를 살핀다. 리라는 멍하니 창 밖의 정체된 도로를 보고 있다.
백화점, 영화관, 병원 앞 모든 길이 꽉 막혀있다. 토요일 저녁 한강 아래 도로의 자동차들은 꽉 찬 신발장 안의 신발들처럼 포개지기 일보 직전이다. 교통방송에서는 정확히 세진과 리라가 있는 사거리가 얼마나 지독히 정체되고 있는지 심각하게 얘기하고 있다. 세진과 리라는 공원 옆의 중국 교자 전문점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많이 막히는데."
"응."
세진은 여유 있게 딴소리를 해댄다. 그러나, 오히려 속만 더 불편해질 뿐이다.
식사 내내 세진은 리라가 언제 정은의 얘기를 꺼낼지, 언제 땅에 머리를 박고 빌어야 할 지, 조마조마 기다렸지만 후식으로 나온 차를 다 마실 때까지도 리라는 그 비슷한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다.
피를 말리는 작전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세진은 오늘 리라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리라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대체 앞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 지도 알 길이 없다. 리라는 가로등의 숫자를 세고 있는지 주의를 집중해서 창 밖만 보고 있다.
라디오에서는 이제 막 터널에서 일어난 이중 추돌 사고에 대해 떠들기 시작한다. 사망자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진행자의 목소리는 이미 무겁다. 리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난 너를 거기에서 처음 봤어. 그 터널에서. 넌 우리가 생일 파티에서 처음 만난 걸로 알고 있지만 난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너를 알고 있었어. 버스에서 난 널 봐왔어."
세진은 리라의 난데없는 이야기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세진과 리라는 같은 동네에 살았고, 대학도 가까웠기 때문에 똑같은 버스 노선을 이용하긴 했다. 하지만, 세진은 리라를 한번도 본 적이 없고, 더구나 이런 이야기는 처음이다. 세진은 여하튼 진지한 리라의 목소리에 잔뜩 긴장하며 라디오 볼륨을 줄인다.
"나 터널 지나는 거 끔찍이 싫어하잖아. 알지? 만약 내가 시력을 잃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상상할 때 그려지는 그림이 터널 같기 때문이야. 길고, 어둡고, 다 똑같은 노란 불빛만이 흔들리고 있어. 평생 그것만 봐야한다고 상상해 봐."
세진은 터널의 매캐한 공기를 떠올리며 괜히 헛기침을 해본다.
"그 날은 비가 왔고, 넌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았어. 비를 맞은 채로 내 옆자리에 앉았어. 처음에는 그냥 키 큰 남자애가 하나 앉았나보다 했는데. 그런데, 차가 터널을 지날 때였어.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지더니, 맞아. 또 그 증상이었어. 옆에 앉은 네가 중세 기사처럼 은색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변하는 거였어. 네 이마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귓불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은빛 물방울이 꼭 귀고리 같았어. 순간, 검은 터널, 검은 버스 안에서, 내 눈에는 너 밖에 안 보였어."
리라의 충격적인 고백에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몰라 세진은 수줍게 웅얼거린다.
"왜 그걸 이제야 얘기해. 근데, 그래서, 나도 복권처럼 슥삭슥삭 지웠니?"
"아니. 가만히 있었어. 네가 사라져버릴까 봐. 난 너를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어.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야...... 난 내가 가진 게 꽝이란 걸 확인하고 싶지 않아. 설레는 맘으로 그냥 덮어두고 싶어. 내가 바라는 너의 모습을 나는 깨고 싶지 않다고."
세진은 흥분을 감추며 짐짓 점잖은 목소리로 되묻는다.
"그런데, 왜 그 얘기를 하는 거야?"
리라는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비밀을 한 가지씩만 나눠가져. 그리고 다시는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마."
세진은 오랜만에 눈물 때문에 콧등이 얼얼해지는 걸 느낀다. 세진은 리라의 발에 머리를 조아린 채 입을 맞추고 싶지만 운전 때문에 어쩌지 못하는 게 원통하다. 세진은 너무나 고맙다. 남자의 실수를 깨끗이 묻어줄 줄 아는 현명하고 자존심 강한 여자친구를 뒀다는 게 너무나 사랑스럽다.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다.
"이제 눈은 좀 어때?
세진은 쑥스럽고 떨려서 말을 돌린다. 리라는 고개를 살짝 흔든다. 왼쪽 눈을 만지려고 몰래 손을 들었다 놨다 망설이는 게 보인다. 리라가 새 눈을 갖게 된 이 기념일을 이렇게 보낸다는 것이 세진은 안타깝고 속상하다. 리라는 세진 쪽을 바라보며 대답한다.
"괜찮아. 잘 보일 거야. 지금도 잘 보여."
완전히 밝지만은 않은 목소리에 세진은 어쩌면 리라가 아직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지는 않은 것이 아닐까, 불길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쁜 예감은 버리기로 한다.
"예쁘다."
세진은 애교 있게 빽빽한 자동차와 빌딩들 위로 서서히 번지는 저녁 해를 가리킨다. 차창의 진한 코팅과 합쳐진 보랏빛 스모그는 제법 붉은 노을 빛을 흉내낸다.
"응. 예쁘다."
리라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한다.
라디오는 방금 막 연결된 현장 통신원의 보도로 터널 안의 사망자가 확인됐다는 뉴스를 전한다. 리라는 가로수 위에 매달린 오늘의 교통사고 사망자를 표시하는 전광판을 올려다본다.
아직 '0'이란 숫자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리라는 문득 전광판의 문자가 이렇게 선명하게 보이기는 처음이란 걸 깨닫고는 신기해한다. 무척이나 신기해한다.
차가 움직이는 순간, 바로 '0'이 '1'로 바뀐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리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난다.
약력 : 74년 서울 생. 2000년 <망하거나 죽지 않고 살 수 있겠니> 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 상하며 등단.
- 이전글4호/신작시/강은미/일반국도 21번 02.06.16
- 다음글4호/단편소설/단풍 놀이/민선기 02.06.1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