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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신작시/김형술/물고기 편지 외 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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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시
김형술
1956년 경남 진해생. 199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의자와 이야기하는 남자>(세계사) 외
물고기 편지 외 2편
어떤 날은
흰 물고기들이 벽들 뚫고 쏟아져 나와
구름 사이를 날아다닌다 딱딱한
등줄기를 거슬러 오른다
투명한 지느러미를 가진 물고기들
쩔렁쩔렁
빈 호주머니 속의 손금이 된다
기호가 아닌, 상징이 아닌
아름다운 날것들의 날카로움
햇빛이 우레처럼 쏟아져
내 속의 빈 어항들을 깨뜨린다
반짝이는 한 잎 비늘인 채로
햇빛을 건너가는 벽의 꿈
물고기의 꿈
어떤 날은 푸른 지느러미들이
벽을 무너뜨리고 날아 나온다
벽 속, 벽 너머
깊이 모를 어떤 시간들로 부터
기계들.Ⅱ
TV는 나의 태양, 나의 달
TV에 의해 나는 뜨고 지네
비디오는 나의 신부, 나의 어머니
비디오를 켜기 위하여 나는 세상에 태어났네
네모난 푸른 스크린의 세상 안에서
웃는 계절, 우는 여자들을 안으며
나는 살아가네, 적막은 깊고
담은 자라 평화로운 무덤의 시간 속
즐거운 황홀, 오, 즐거운 허기
인간을 꿈꾸지 않는 행복으로
컴퓨터는 나의 학교, 위대한 종교
나는 홀로, 거침없이 세상과 소통하네
내 몸에 깃든 기계들의 영혼
내 혈관을 깨우는 기계들의 눈빛
누구도 이 기계들을 대신할 수 없네 누구도
기계의 영혼들을 흉내낼 수 없네
아무런 상처
아무런 악몽도 남기지 않는 채
새로운 사랑을 배달하고
새로운 사랑을 깨우쳐 주는
TV는 나의 아버지
컴퓨터는 나의 창조주
그들의 기호는 나의 언어
그들의 명령은 천상의 음악
한 점 의심도 갖지 않는
나는 기계들의 천진한 식민지라네
낯선 봄
손톱 붉은 여자들
어린 남자 데리고 숲으로 가네
돌아와 돌아와 목 쉰 메아리
혼자 맴돌다
갓 피어난 꽃잎 속으로 숨어
흩날리는 꽃잎 속에서
날아오르는 흰 새들 숲을 덮고
머리 검은 여자들
솜털 보숭숭한 손목 부여 잡은 채
일제히 짙은 숲그늘로 숨어드네
흩어졌던 길들 하나로 엉키는지
숨은 시내들 황급히 향기를 뿜고
온 숲은 노래로 일어서는데
햇빛은 어디만큼에서
황금빛 이마를 숨기며
아무도 없는 마을로 내려가나
입술 푸른 여자들
어린 남자 버리고 마을로 내려오네
흥얼흥얼 꽃노래 길에 흘리며
땀 배인 머리카락 쓸어올리며
어느 새 짙디짙은 초록숲 이끌고 오네
눈부셔 차마 마주볼 수 없는
나른한 황금빛 몸에 감은 채
목덜미에 흔붉은 꽃문신
새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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