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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권두언/다양하게 착종될 우리 문화를 위해/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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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남석
댓글 0건 조회 2,686회 작성일 02-06-1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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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다양하게 착종될 우리 문화를 위해
 김남석


만화경 속을 들여다보면 그 현란함에 놀라게 된다. 밖에서는 평범한 물체가 그 안에 들어가면서, 대비와 분열과 자가증식으로 현란한 무늬를 만들어낸다. 이 무늬는 읽는 이에 따라 기학학적 문양으로 격상되기도 한다. 이것은 무늬들의 잔상이 뒤섞여 모인 결과이다. 즉, 착종이다.
문화도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의 착종이다. 도저히 문화라고 이름 붙일 수 없었던 것이 우리 앞에서 자가 분열하거나 아직은 잘 이해되지 않는 어떠한 무늬로 현신하여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예를 찾아보자. 인터넷이 새로운 문화의 주체이자 매체로 등장하고 있고 각종 전자 게임 산업이 우후죽순처럼 우리 삶의 반경을 넘어오고 있다. 거리에는 머리를 물들이는 문화와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날리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아니 더 정확하고 솔직하게 말해보자. 이것은 넘어옴도 아니고 확산도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바깥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이 세계로 월경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삶의 한 귀퉁이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여기서 〈우리〉라는 말이 다소 어색해진다. 잠시 위기를 모면하자면, 이것을 문화로 인정하기 싫었던 사람들―는 이제 이러한 흐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지닌 많은 것들 가운데, 우리가 인정하기 싫었던 부분이 있었음을, 그래서 이제는 그것을 인정해야 함을, 또한 인정해야 한다.

리토피아는 문학 낙원이라는 뜻일 게다. 문학 낙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갖가지 의견이 제출될 수 있다. 예상되는 의견 중에 내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도 있다. 가령 천박한 것과 대중적인 것과 유희적인 것을 이러한 낙원을 만드는데 부적절한 것으로 치부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문학이 문화의 적자임을 내세워, 배타적 소유권을 내세우고, 정통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문학이외의 다종다양한 문화적 장르를 폄하하는 입장이다. 적어도 잡지 『리토피아』는 이러한 가짜 문학관 내지는 가련한 문화관에 동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화란, 우리가 인정하고 안하고를 떠나 우리 곁에서 생성되는 것이고, 일방적인 시각으로 재단되거나 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문학 낙원을 건설한다면, 이러한 문화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겨울호를 각종 문화 현상(특히 하찮게 여겨지는 대중문화와 터부시되는 일본문화)을 점검하는 데에 넉넉하게 할애했다. 그 할애는 멀리 보아서는 우리 문화의 현황을 짚어보기 위해서이고 좁혀서 말하면 문학과 문화의 관계를 탐색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우리 문화와 문학의 앞날에 필요한 일이라, 감히, 자부한다.

지난 1/4분기의 문화적 동향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일본이라는 화두를 건너야 한다고, 우리는 판단했다. 이 화두를 외면한 채, 현재의 우리문화를 논한다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적어도 우리가 대중 문화를 문화라고 용인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번 호의 특집과 기획과 문화산책의 공유면적은 〈일본〉이 되었다. 특집은 일본문화와 이를 대하는 우리의 문화적 입장에 관한 것이다. 필자로는 한림대 일본학 연구소의 지명관 교수와 고려대 서연호 교수가 선정되었다. 두 사람은 일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현 일본 문화를 보는 객관적 시각을 선취한 석학이다. 또한 두 사람은 일본 문화의 수용과 그 수위를 결정하는 현실적 직책을 맡고 있어, 그 발언에 있어 신뢰도가 높다. 먼저 지명관 교수는 지난 일년의 화제 거리이자 오래된 당면과제인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를 파고들었다. 일본의 정치적 입장과 어려움을 꼼꼼히 따지며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한일관계를 피력하고 있다. 서연호 교수는 일본의 대중 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냉정하게 짚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을 넘어 아시아로 그 시각을 확대하고, 일방적 수입에서 수출의 입장으로 돌아선 우리의 처지와 대책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혜안은 이 시대에 필요한 문화적 시각이 아닌가 한다.

기획으로 들어서면, 일본 문학으로 그 범위를 압축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일본의 모든 것이 그러하겠지만, 일본 문학 역시 낯설면서도 동시에 친숙하다.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는 9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우리에게 마치 한국작가처럼 읽혔다. 또 「설국」으로 널리 알려진 가와바타도 귀에 익은 편이다. 조금 더 일본 사정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쯔카코우헤이나 유미리 정도의 작가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문학의 현주소는 이들 작가와는 많이 다를 수도 있다. 〈다를 수도 있다〉는 조심스러운 어투가 증명하듯이, 우리에게 일본의 현 문단 상황이나 문학적 경향은 확신을 줄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가려져 있는 부분을 조금이라도 개방하는 것에 이번 겨울호는 치중하였다.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와 작품 성향을 논의하는 것에 비중을 두었다. 하루키와 재일 동포 작가들이 그 무게 중심에 위치했다. 한림대 서정완 교수는 하루키의 작품을 통해 일본 문학의 일단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일본문학 전공자의 목소리로 『노르웨이의 숲(번역제목:상실의 시대)』을 읽는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유숙자 씨는 일본어의 깊이와 한국어의 감각을 고루 겸비한 연구자로, 일본 속에서 활동하는 우리 교포 작가의 문학적 성향을 분류하고 논의했다. 이러한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산책 역시 일본문화에 대한 접근로를 비축하고 있다. 만화 평론가 임화인 씨는 우리 나라에 널리 알려진 일본 만화의 특징을 언급하고 삼투된 의미를 따져 묻는 글을 소개했다. 소위 386세대는 어릴 적부터 일본 만화에 적지 않게 열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이후의 세대는 시중에 해적판으로 떠도는 일본 만화에 적극적으로 탐닉한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일본 만화에 대한 직간접적인 선입견과 뒷소문을 낳는다. 우리는 이제 이러한 선입견과 뒷소문을 정면으로 끌어내어 다루려고 하며,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동일 관점에서 쓰여진 『리토피아』 여름호에 기획된 일본 관련 문화산책을 함께 읽으면, 독서의 폭과 재미가 배가될 것이다. 이흥수 씨의 전자 게임에 대한 글도 주목을 요한다. 이흥수 씨는 게임 관련 업계에 종사하고 있어, 이 글이 담아내는 정보와 현장감은 좀처럼 흉내내기 힘든 것이었다. 관심을 가진 독자이건 그렇지 않은 독자이건, 이 글을 통해 우리 나라가 겪고 있는 또 하나의 전투를 관전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경쟁 업체로서의 일본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어, 일본과 우리 나라의 밀착된 측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 우리가 초청한 시인은 박재열 님이다. 이 시인의 목소리는 길고 단정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두드러지는 요철이 있다. 이 요철은 시각적 효과를 빌어 두터운 글씨로 처리된다. 우리는 과속 방지턱을 넘듯, 박재열의 시에서 두터운 강조의 턱을 넘는다. 처음에 넘기도 하고 중간에서 넘기도 한다. 넘어야 되는데 하다가, 끝까지 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오랜만에 접하는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답답한 시단의 활력이 되겠다는 짧은 생각을 해보았다. 이 시를 정밀하게 읽어준 사람은 안정인 씨이다. 씨는 프로이트와 라깡의 정신분석학을 중요한 규준으로 삼아 시들을 타고 넘는다. 시를 읽는 즐거움과 인문학을 대하는 기쁨이 어우러진 자리였다. 시평과 관련하여 이경수 씨의 계간평도 주목된다. 흔히 계간평은 개성이 없는 글이 되기 쉬운데, 이경수 씨는 부담을 이겨내고 책읽기의 새로운 매혹을 일깨워주고 있다. 각종 문학 잡지로 흩어진 시들에서, 공통적인 모티프를 뽑아 하나의 맥락으로 이는 즐거움은, 상당할 것이다. 그 노고가 큰 만큼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호에서 시도한 여성시인 10인선에 대한 박정선 씨의 평도 주목된다. 『리토피아』의 커다란 특색은 잡지를 구성하는 일관성과 체계에 있는데, 이 글도 그러한 맥락 안에 설명된다. 지난 호의 여성 시인선은 빛나는 시도로 우리 시단에 긍정적 평가와 참신한 충격을 이끌어내었다. 이것을 차분하게 정리하는 역할을 박정선 씨가 맡아준 것이다.
소설 비평에서는 황호덕 씨과 하상일 씨가 수고해주었다. 두 분은 촉망받는 젊은 평론가로 잠재된 가능성을 높이 인정받고 있다. 황호덕 씨가 보여준 정치함과, 하상일 씨가 보여준 의젓하고 균형잡힌 시각은 현 문단의 젊은 평론가들 중에서 돋보이는 것이었다.
이번 호의 소설은 이지형과 이혜선의 단편소설이다. 두 작가는 모두, 문단의 신예에 해당한다. 이번 계기가 그들의 수련과 경험에 중요한 몫을 제공할 수 있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일본과 우리는 매우 가까운 관계이다. 어느 무엇으로 따져 보아도 그렇다. 유일하게 심정적인 거리만큼은 예외이다. 그러나 지명관 교수가 말한 대로,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선택할 권리는 없다. 더구나 일본이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진 나라였다고 해도, 현재의 추세대로 하면 벌써 이웃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우리에게 이웃이 아닐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일본 혹은 일본 문화와 빚고 있는 마찰과 애증은, 우리가 모든 국가와 이웃이 되는 그날을 대비해서라도 미리 해결해 두어야 할 사항이 아닐까. 물론 원만하게 말이다. 이 원만함을 위해, 아니 이 원만함을 위한 사전 이해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리토피아』 겨울호는 노력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다양하게 착종될 우리 문화를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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